史記卷一百九
李將軍列傳第四十九
李將軍廣者,隴西成紀人也。[一]其先曰李信,秦時為將,逐得燕太子丹者也。故槐里,徙成紀。廣家世世受射。[二]孝文帝十四年,匈奴大入蕭關,而廣以良家子[三]從軍擊胡,用善騎射,殺首虜多,為漢中郎。廣從弟李蔡亦為郎,皆為武騎常侍,[四]秩八百石。嘗從行,有所衝陷折關及格猛獸,而文帝曰:「惜乎,子不遇時!如令子當高帝時,萬戶侯豈足道哉!」
이장군 광은 농서 성기 사람이다. 그 선조는 이신으로 진 나라 때 장군이 되어 연 나라 태자 단을 쫓아 가 잡았다. 고향은 괴리인데 성기로 이사했다. 이광의 가문은 대대로 활쏘기를 전수하였다. 효문제 14년 흉노가 크게 숙관에 들어오자 이광은 양가의 아들로 종군하여 오랑캐를 쳤는데 말을 타고 활쏘기를 잘하여 우두머리를 죽이고 포로로 잡은 것이 많아 한의 중낭장이 되었다. 이광의 4촌 동생 이채가 또한 낭이 되어 모두 무기상시가 되어 녹봉 8백석을 받았다. 일찍이 황제를 따라다녔으며, 돌격하여 함락시키고 빗장을 부러뜨려 맹수에 다다름에 이르자 문제가 말하기를 “애석하다. 그대는 때를 만나지 못하였구나! 만약 그대로 하여금 고제 때를 만나게 하였다면 만호후가 어찌 충분하다 말할 수 있으랴!” 했다.
[一] 正義成紀,秦州縣。
[一] 【正義】 성기는 진주현이다.
[二] 索隱案:小顏云「世受射法」。
[二] 【索隱】 살펴보니 소안이 “대대로 활소는 법을 전수받았다.” 했다.
[三] 索隱案:如淳云「非醫、巫、商賈、百工也」。
[三] 【索隱】 살펴보니 여순이 말하기를 “의원, 무당, 장사꾼은 百工이 아니다.” 했다.
[四] 索隱案:謂為郎而補武騎常侍。
[四] 【索隱】 살펴보니 낭이 되어 무기상시를 도왔음을 말한다.
及孝景初立,廣為隴西都尉,徙為騎郎將。[一]吳楚軍時,廣為驍騎都尉,從太尉亞夫擊吳楚軍,取旗,顯功名昌邑下。以梁王授廣將軍印,還,賞不行。[二]徙為上谷太守,匈奴日以合戰。典屬國公孫昆邪[三]為上泣曰:「李廣才氣,天下無雙,自負其能,數與虜敵戰,恐亡之。」於是乃徙為上郡太守。後廣轉為邊郡太守,徙上郡。嘗為隴西、北地、鴈門、代郡、雲中太守,皆以力戰為名。
효경제가 처음 즉위함에 이르러 이광이 농서도위가 되자 옮겨 기낭장이 되었다. 오와 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관이 효기도위가 되어 태위 아부를 따라가 오와 초의 군대를 쳐서 기를 취하여 공과 이름이 창읍 아래에 드러났다. 양왕이 이광에게 장군의 인을 주었기 때문에 돌아갔을 때 상을 주지 않았다. 옮겨 상곡태수가 되어 흉노와 매일 전투를 치루었다. 전속국 공손혼야가 천자에게 울면서 말하기를 “이광은 재주와 기개가 천하에 짝할 이가 없는데 스스로 그 능력을 업고 여러 번 오랑캐와 대적하여 싸우니 그를 잃을까 두렵습니다.” 했다. 이에 곧 옮겨 상군태수로 삼았다. 후에 이광이 변군태수가 되었다가 전직되어 상군에 옮겼다. 일찍이 농서, 북지, 안문, 대군, 운중태수가 되었는데 모두 힘써 싸우는 것으로써 명예를 삼았다.
[一] 集解張晏曰:「為武騎郎將。」 索隱小顏云:「為騎郎將謂主騎郎也。」
[一]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무기낭장이 되었다.” 했다. 【索隱】 소안이 말하기를 “‘為騎郎將’은 낭장을 주관함을 말하는 것이다.” 했다.
[二] 集解文穎曰:「廣為漢將,私受梁印,故不以賞也。」
[二] 【集解】 문영이 말하기를 “이광이 한의 장군으로 사사로이 양의 인을 받았기 때문에 상을 주지 않은 것이다.” 했다.
[三] 集解昆音魂。索隱案:典屬國,官名。公孫,姓也;昆邪,名。服虔云「中國人」。包愷云「昆音魂」也。
[三] 【集解】 ‘昆’의 음은 ‘魂 ’이다. 【索隱】 살펴보니 ‘전속국’은 관직 이름이다. ‘공손’은 성이고, ‘혼야’는 이름이다. 복건이 말하기를 “중국인이다.” 했다. 포개가 말하기를 “‘昆’의 음은 ‘魂’이다.” 했다.
匈奴大入上郡,天子使中貴人從廣[一]勒習兵擊匈奴。中貴人將騎數十縱,[二]見匈奴三人,與戰。三人還射,[三]傷中貴人,殺其騎且盡。中貴人走廣。廣曰:「是必射雕者也。」[四]廣乃遂從百騎往馳三人。三人亡馬步行,行數十里。廣令其騎張左右翼,而廣身自射彼三人者,殺其二人,生得一人,果匈奴射雕者也。已縛之上馬,望匈奴有數千騎,見廣,以為誘騎,皆驚,上山陳。廣之百騎皆大恐,欲馳還走。廣曰:「吾去大軍數十里,今如此以百騎走,匈奴追射我立盡。今我留,匈奴必以我為大軍[之]誘(之),必不敢擊我。」廣令諸騎曰:「前!」前未到匈奴陳二里所,止,令曰:「皆下馬解鞍!」其騎曰:「虜多且近,即有急,柰何?」廣曰:「彼虜以我為走,今皆解鞍以示不走,用堅其意。」於是胡騎遂不敢擊。有白馬將[五]出護其兵,李廣上馬與十餘騎奔射殺胡白馬將,而復還至其騎中,解鞍,令士皆縱馬臥。是時會暮,胡兵終怪之,不敢擊。夜半時,胡兵亦以為漢有伏軍於旁欲夜取之,胡皆引兵而去。平旦,李廣乃歸其大軍。大軍不知廣所之,故弗從。
흉노가 크게 상군에 들어오니 천자가 중귀인으로 하여금 이광을 따라다니면서 군대로 흉노를 치는 것을 익히도록 했다. 중귀인이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말을 달리다가 흉노 세 명을 만나 함께 싸웠다.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활을 쏘아 중귀인을 상처 입히고, 그 기병을 모두 죽였다. 중귀인이 이광에게로 달아났다. 이광이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射雕(독수리를 쏘다)’란 자들일 것이다.”하고는 이광이 곧 마침내 백기를 거느리고 가서 세 사람을 추격하였다. 세 사람이 말을 잃고 걸어가는데 수 십리를 갔다. 이광이 그 기병으로 하여금 좌, 우익으로 펴게 하고 이광 지신은 스스로 그 세 사람에게 활을 쏘아 그 중 두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을 생포하였는데 과연 흉노의 ‘사조’란 자들이었다. 그들을 묶어 말에 태웠는데 멀리 바라보니 흉노 수천기가 있었다. (흉노 기병들이)이광을 보고도 기병을 유인하는 것이라 여겨 모두 경계하며 산에 올라가 진을 쳤다. 이광이 백기로 가니 모두 크게 두려워하여 말을 달려 돌아 달아나려 하였다. 이광이 말하기를 “내가 대군과 수 십리를 떨어져 있는데 지금 이같이 백기로 달아나면 흉노가 추격하여 우리를 활로 쏘아 곧 다 죽을 것이다. 지금 내가 머물면 흉노가 내가 대군으로 유인하는 것이 틀림없다 여겨 감히 우리를 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했다. 이광이 여러 기병에게 말하기를 “앞으로!”하여 전진하여 아직 흉노가 진을 친 2리에 이르지 않은 곳에서 멈추고 명령하기를 “모두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라!” 하였다. 기병이 말하기를 “오랑캐가 많고 또 가까워서 곧 급함이 있는데 어찌해서입니까?” 했다. 이광이 말하기를 “저 오랑캐들은 우리들이 달아날 것으로 여기겠지만 지금 모두 안장을 풀고 달아나지 않음을 보이는 것으로써 그 뜻을 확고히 쓸 것이다.” 했다. 이에 오랑캐 기병이 끝내 공격하지 않았다. 백마를 탄 장군이 있어서 나와 그 군대를 호위하니 이광이 말을 타고 10명의 기병과 함께 달리면서 활을 쏘아 오랑캐의 백마 탄 장군을 죽이고 다시 돌아와 그 기병 중에 이르러 안장을 풀고 사졸로 하여금 모두 말을 풀어놓고 눕게 하였다. 이런 때에 저녁이 되자 오랑캐의 군대가 끝내 괴이하게 여겼으나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 한 밤중에 오랑캐의 군대가 또한 한이 옆에 군대를 숨겨놓고 밤에 취하고자 할 것이라 여겨 오랑캐들이 군대를 이끌고 갔다. 동 틀 때 쯤 이광이 대군에게 돌아갔다. 대군은 이광이 간 곳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따를 수 없었다.
[一] 集解漢書音義曰:「內官之幸貴者。」 索隱案:董巴輿服志云「黃門丞至密近,使聽察天下,謂之中貴人使者」。崔浩云「在中而貴幸,非德望,故名不見也」。
[一] 【集解】 「한서음의」에 “내관의 총애받고 귀한 자이다.” 했다. 【索隱】 『동파여복지』에 “‘황문’의 승이 지극히 가까이 하여 천하를 듣고 살피게 하였는데 그것을 일러 중귀인의 사자라 한다.” 했다. 최호는 “궁중에 있어서 귀하고 총애 받은 것이고 덕망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다.” 했다.
[二] 集解徐廣曰:「放縱馳騁。」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제멋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님이다.” 했다.
[三] 正義射音石。還謂轉也。
[三] 【正義】 ‘射(쏘아 잡을 석)’의 음은 ‘石’이다. ‘還’은 돌아감이다.
[四] 集解文穎曰:「雕,鳥也,故使善射者射也。」 索隱案:服虔云「雕,鶚也。」說文云「似鷲,黑色,多子」。一名鷲,以其毛作矢羽。韋昭云「鶚,一名鵰也」。
[四] 【集解】 문영이 말하기를 “‘雕(독수리 조)’는 새이다. 그러므로 활을 잘 쏘는 자로 하여금 쏘아 잡게 한 것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복건이 말하기를 “‘雕’는 ‘鶚(물수리 악)’이다.” 했다. 『설문』에 “독수리와 비슷하고 검은 색이며 새끼가 많다.” 했다. 일명 ‘鷲(독수리 취)’라 하는데 그 털로 화살의 날개를 만든다. 위소는 “‘鶚’을 일명 ‘雕’라 한다.” 했다.
[五] 正義其將乘白馬,而出監護也。
[五] 【正義】 그 장군이 흰말을 타고 나와 감독하고 지킴이다.
居久之,孝景崩,武帝立,左右以為廣名將也,於是廣以上郡太守為未央衛尉,而程不識亦為長樂衛尉。程不識故與李廣俱以邊太守將軍屯。及出擊胡,而廣行無部伍行陳,[一]就善水草屯,舍止,人人自便,[二]不擊刀斗以自衛,[三]莫府[四]省約文書籍事,然亦遠斥候,[五]未嘗遇害。程不識正部曲行伍營陳,擊刀斗,士吏治軍簿至明,軍不得休息,然亦未嘗遇害。不識曰:「李廣軍極簡易,然虜卒犯之,無以禁也;而其士卒亦佚樂,咸樂為之死。我軍雖煩擾,然虜亦不得犯我。」是時漢邊郡李廣、程不識皆為名將,然匈奴畏李廣之略,士卒亦多樂從李廣而苦程不識。程不識孝景時以數直諫為太中大夫。為人廉,謹於文法。
오래 머물렀는데 효경제가 죽고 무제가 즉위하니 측근들이 이광을 명장이라 여겨 이에 이광을 상군태수로써 미앙궁의 위위로 삼고, 정불식을 또한 장락궁 위위로 삼았다. 정불식은 옛날에 이광과 함께 변경의 태수와 장군으로써 주둔하였다. 나가 오랑캐를 침에 이르면 이광의 행군은 부, 대오와 진을 치지 않고 물과 풀이 좋은 곳에 나아가 머무르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편리하게 하고, 칼과 초두를 치는 것으로써 스스로를 지키지 않았고, 막부는 문서와 장부를 작성하는 일을 생략하였으나 또한 멀리까지 척후를 보내서 일찍이 해침을 만나지 않았다. 정불식은 부곡, 대오와 진 치는 것을 바로하고, 칼과 초두를 치며, 사졸과 관리가 군대의 장부작성을 지극히 밝게 하니 군대가 휴식할 수 없었으나 또한 일찍이 해침을 만나지 않았다. 정불식이 말하기를 “이광의 군대는 지극히 간략하여 오랑캐가 범한다면 금할 수 없고, 그 사졸들이 또한 편안히 즐겨서 모두 그를 위해 즐겁게 죽는다. 나의 군대는 비록 번거롭고 소란스러우나 오랑캐가 또한 우리를 범할 수 없다.” 했다. 이 때 한의 변경의 군에서 이광과 정불식을 모두 명장이라 하였으나 흉노는 이광의 지략을 두려워하였고, 사졸들ㄹ이 또한 이광을 따르기를 즐거워하고 정불식을 괴롭게 여겼다. 정불식이 효경제 때 여러 번 직간을 하여 태중대부가 되었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문법에 신중하였다.
[一] 索隱案:百官志云「將軍領軍皆有部曲。大將軍營五部,部校尉一人,部下有曲,曲有軍候一人」也。
[一] 【索隱】 살펴보니 「백관지」에 “장군과 영군은 모두 ‘부곡’이 있다. 대장군은 ‘5부’를 경영하는데 ‘부교위’ 1명, ‘부’아래에 ‘곡’이 있고, ‘곡’에는 ‘군후’ 1명이 있다.” 했다.
[二] 索隱音去聲。
[二] 【索隱】 음은 거성이다.
[三] 集解孟康曰:「以銅作鐎器,受一斗,晝炊飯食,夜擊持行,名曰刀斗。」 索隱刀音貂。案:荀悅云「刀斗,小鈴,如宮中傳夜鈴也」。蘇林云「形如鋗,以銅作之,無緣,受一斗,故云刀斗」。鋗即鈴也。埤倉云「鐎,溫器,有柄斗,似銚無緣。音焦」。
[三] 【集解】 맹강이 말하기를 “구리를 가지고 鐎(초두 초)器를 만드는데 한 말을 담으며 낮에는 밥을 짓고, 밤에는 지니고 가면서 치는데 이름을 ‘도두’라 한다.” 했다. 【索隱】 刀의 음은 ‘貂(담비 초)’이다. 살펴보니 순열은 “‘刀斗’는 작은 방울로 궁중에서 밤을 전하는 방울과 같다.” 했고, 소림은 “형상은 ‘鋗(노구솥 현)’과 같고 구리로 만드는데 테두리가 없고 한 말을 담기 때문에 ‘刀斗’라 한다.” 했다. ‘鋗’은 곧 방울이다. 비창이 말하기를 “‘鐎’는 따뜻하게 하는 기구로 자루가 있고, ‘銚(쟁개비 요, 냄비)’와 비슷한데 테두리가 없다. 음은 ‘焦’이다.” 했다.
[四] 索隱案:大顏云「凡將軍謂之莫府者,蓋兵行舍於帷帳,故稱(莫)[幕]府。古字通用,遂作『莫』耳」。小爾雅訓莫為大,非也。
[四] 【索隱】 살펴보니 대안이 말하기를 “모든 장군을 ‘막부’라 하는 것은 대개 군대가 행군하다 휘장(천막)에서 머물기 때문에 ‘막부’라고 말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글자를 통용하였는데 마침내 ‘莫’이라 썼을 뿐이다. 『소이아』에 ‘莫’을 새겨 ‘大’라 하였는데 아니다.
[五] 索隱案:許慎注淮南子云「斥,度也。候,視也,望也」。
[五] 【索隱】 살펴보니 허신이 주를 단 『회남자』에 “‘尺’은 ‘度(탁:헤아림)’이라 하고, ‘侯’는 보는 것이고, 바라보는 것이다.” 했다.
後漢以馬邑城誘單于,使大軍伏馬邑旁谷,而廣為驍騎將軍,領屬護軍將軍。是時單于覺之,去,漢軍皆無功。其後四歲,廣以衛尉為將軍,出鴈門擊匈奴。匈奴兵多,破敗廣軍,生得廣。單于素聞廣賢,令曰:「得李廣必生致之。」胡騎得廣,廣時傷病,置廣兩馬閒,絡而盛臥廣。行十餘里,廣詳死,睨其旁有一胡兒騎善馬,廣暫騰而上胡兒馬,因推墮兒,[一]取其弓,鞭馬南馳數十里,復得其餘軍,因引而入塞。匈奴捕者騎數百追之,廣行取胡兒弓,射殺追騎,以故得脫。於是至漢,漢下廣吏。吏當廣所失亡多,為虜所生得,當斬,贖為庶人。
후에 한이 마읍성으로 선우를 유인하면서 대군을 마읍 옆 골짜기에 숨겼는데 이광은 효기장군이 되어 호군장군을 거느려 속하게 했다. 이 때 선우가 깨닫고 돌아가니 한의 군대는 모두 공이 없었다. 그 후 4년이 지나 이광이 위위로써 장군이 되어 안문을 나가 흉노를 쳤다. 흉노의 군대가 많아 이광의 군대를 깨트려 무너뜨리고 이광을 생포하였다. 선우가 평소 이광이 현명하다는 것을 듣고 명령하기를 “이광을 잡으면 반드시 살려서 이르라.” 했다. 오랑캐 기병이 이광을 잡았는데 이광이 그 때 상처입고 병들었으므로 이광을 말 두 마리 사이에 두고 엮어서 이광을 담아 눕혔다. 10여리를 가서 이광이 거짓으로 죽은 척하면서 그 옆을 엿보니 한 오랑캐 아이가 좋은 말을 타고 있었다. 이광이 잠간 사이에 오랑캐 아이의 말에 올라 아이를 밀어 떨어뜨리고 그 활을 취하고, 말에 채찍질하여 남쪽으로 수 십리를 달려가서 다시 그 남은 군대를 만나 이끌고 요새에 들어갔다. 흉노의 이광을 잡았던 기병 수 백기가 추격하니 이광이 가면서 오랑캐 아이의 활을 취하여 활을 쏘아 추격하는 기병을 죽였다. 이 때문에 벗어날 수 있었다. 이에 한에 이르니 한이 이광을 관리에게 내렸다. 吏가이광이 병사를 잃어버린 것이 많고, 살아서 포로가 것은 목을 베는 것에 해당하지만 재물을 받고 풀어 주어 서인으로 만들었다.
[一] 集解徐廣曰:「一云『抱兒鞭馬南馳』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 아리를 껴안고 말에 채찍질하여 남쪽으로 치달렸다.” 하기도 한다.
頃之,家居數歲。廣家與故潁陰侯孫[一]屏野居藍田南山中射獵。嘗夜從一騎出,從人田閒飲。還至霸陵亭,霸陵尉[二]醉,呵止廣。廣騎曰:「故李將軍。」尉曰:「今將軍尚不得夜行,何乃故也!」止廣宿亭下。居無何,匈奴入殺遼西太守,敗韓將軍,[三]後韓將軍徙右北平。於是天子乃召拜廣為右北平太守。廣即請霸陵尉與俱,至軍而斬之。
어느덧 집에 머문지 여러 해가 지났다. 이광과 옛 영음후의 손자가 초야에 은거하여 남전의 남산 속에서 활을 쏘아 사냥하면서 지냈다. 일찍이 밤에 한 기병을 데리고 나갔는데 사람을 따라 밭 사이에서 술을 마셨다. 돌아오는 길에 패릉정에 이르니 패릉정의 위가 술에 취하여 이광을 꾸짖으며 저지하였다. 이광의 기병이 말하기를 “옛 이 장군입니다.” 했다. 위가 말하기를 “지금 장군도 오히려 밤에 다닐 수 없는데 어찌하여 옛 장군이라 하는가!” 하고는 이광을 저지하여 패릉정 아래서 묵게 하였다. 얼마 후 흉노가 들어와 요서태수를 죽이고 한안국 장군을 무너뜨렸으며, 후에 한안국 장군은 우북평으로 옮겼다. 이에 천자가 이광을 불러 관직을 제수하여 우북평 태수가 되었다. 이광이 곧 패릉의 위와 함께한다고 청하여 (위가)군에 이르자 목을 베었다.
[一] 集解(孫)灌嬰之孫,名強。 索隱案:灌嬰之孫,名強。
[一] 【集解】 ‘孫’은 관영의 손자이니 이름은 ‘강’이다. 【索隱】 살펴보니 관영의 손자로 이름은 ‘강’이다.
[二] 索隱案:百官志云「尉,大縣二人,主盜賊。凡有賊發,則推索尋案之」也。
[二] 【索隱】 살펴보니 「백관지」에 “‘衛’는 큰 현이 2명이고, 도적을 주관한다. 무릇 도적이 있으면 곧 추적하고, 수색하며 조사한다.” 했다.
[三] 集解蘇林曰韓安國。
[三] 【集解】 소림이 말하기를 “한안국”이라 했다.
廣居右北平,匈奴聞之,號曰「漢之飛將軍」,避之數歲,不敢入右北平。
이광이 우북평에서 있다는 것을 흉노가 듣고 부르기를 “한의 비장군”이라하고, 그를 피한 것이 여러 해로 감히 우북평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廣出獵,見草中石,以為虎而射之,中石沒鏃,[一]視之石也。因復更射之,終不能復入石矣。廣所居郡聞有虎,嘗自射之。及居右北平射虎,虎騰傷廣,廣亦竟射殺之。
이광이 사냥을 나가 풀 안에 있는 돌을 보고 범으로 여겨 활을 쏘았는데 돌에 적중하여 화살촉이 박혔는데 가서보니 돌이었다. 인하여 다시 활을 쏘았는데 끝내 다시 돌에 박히게 하지 못하였다. 이광이 살고 있는 군에 범이 있다는 것을 들으면 일찍이 스스로 그것을 쏘아 잡았다. 우북평에 살면서도 범을 쏘아 잡았는데 범이 뛰어 들어 이광에게 상처를 입혔으나 이광이 또한 마침내 활을 쏘아서 죽였다.
[一] 集解徐廣曰:「一作『沒羽』。」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沒羽(화살의 깃털이 없어졌다.)’라 썼다.
廣廉,得賞賜輒分其麾下,飲食與士共之。終廣之身,為二千石四十餘年,家無餘財,終不言家產事。廣為人長,猿臂,[一]其善射亦天性也,雖其子孫他人學者,莫能及廣。廣訥口少言,與人居則畫地為軍陳,射闊狹以飲。[二]專以射為戲,竟死。[三]廣之將兵,乏絕之處,見水,士卒不盡飲,廣不近水,士卒不盡食,廣不嘗食。寬緩不苛,士以此愛樂為用。其射,見敵急,非在數十步之內,度不中不發,發即應弦而倒。用此,其將兵數困辱,其射猛獸亦為所傷云。
이광이 청렴하여 상으로 내리는 것이 있으면 문득 그 휘하에 나누어 주고, 음식은 사졸과 같이 하였다. 이광이 죽었을 때 2천석 녹으로 400년간 재직했지만 집에는 남은 재물이 없었고, 죽을 때까지 집의 재산에 대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 이광의 사람됨은 키가 크고, 원숭이처럼 팔이 길고, 활을 잘 쏘는 것은 타고난 것이었다. 비록 그 자손과 다른 사람들 활쏘기를 배웠지만 이광에 미칠 수 없었다. 이광은 말을 어눌하게 하고 적게 하여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땅을 그어 군진으로 삼거나 활쏘기의 넓고 좁음으로 술을 마셨다. 오로지 활쏘기를 놀이로 삼다가 마치고 죽었다. 이광이 군대를 거느리는 것은 모자라고 막힌 곳에서 물을 보면 사졸이 모두 마시지 않으면 이광이 물을 가가이 하지 않았고, 사졸이 모두 먹지 않으면 이광이 일찍 밥 먹지 않았다. 너그럽고 원만하여 가혹하지 않으니 사졸들이 이 때문에 존경하여 즐겁게 쓰여졌다. 그 활 쏘기는 적이 급박함을 보아도 수 십보 안에 있지 않고, 적중하지 못할 것을 헤아리면 발사하지 않고, 발사하면 곧 활시위에 응하여 적이 넘어졌다. 이를 썼기 때문에 그가 군대를 거느리고 여러 번 곤궁하고 욕을 당하였고, 그 맹수를 쏘아 잡을 때도 또한 상처를 입었다.
[一] 集解如淳曰:「臂如猿,通肩。」
[一]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臂’는 ‘猿(원숭이 원)’과 같고, ‘肩(어깨 견)’과 통한다.” 했다.
[二] 集解如淳曰:「射戲求疏密,持酒以飲不勝者。」 正義飲音於禁反。
[二]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활쏘기 놀이로 성글고 빽빽함을 구하였고(친하고 친하지 않음을), 술을 지니고 이기지 못한 자가 마시게 했다.
[三] 索隱謂終竟廣身至死,以為恆也。
[三] 【索隱】 이광이 죽을 때까지 항상 한 것을 말한다.
居頃之,石建卒,於是上召廣代建為郎中令。元朔六年,廣復為後將軍,從大將軍軍出定襄,擊匈奴。諸將多中首虜率,以功為侯者,[一]而廣軍無功。後二歲,廣以郎中令將四千騎出右北平,博望侯張騫將萬騎與廣俱,異道。行可數百里,匈奴左賢王將四萬騎圍廣,廣軍士皆恐,廣乃使其子敢往馳之。敢獨與數十騎馳,直貫胡騎,出其左右而還,告廣曰:「胡虜易與耳。」軍士乃安。廣為圜陳外嚮,胡急擊之,矢下如雨。漢兵死者過半,漢矢且盡。廣乃令士持滿毋發,而廣身自以大黃[二]射其裨將,殺數人,胡虜益解。會日暮,吏士皆無人色,而廣意氣自如,益治軍。軍中自是服其勇也。明日,復力戰,而博望侯軍亦至,匈奴軍乃解去。漢軍罷,弗能追。是時廣軍幾沒,罷歸。漢法,博望侯留遲後期,當死,贖為庶人。廣軍功自如,無賞。
얼마 후 석건이 죽자 이에 천자가 이광을 불러 석건을 대신하여 낭중령으로 삼았다.원삭 6년 이광이 다시 후장군이 되어 대장군의 군대를 따라 정양에 나가 흉노를 쳤다. 여러 장군들이 적의 머리를 베거나 포로를 잡은 공으로 후가 되었는데 이광의 군대는 공잉 없었다. 2년 후 이광이 낭중령으로서 4천의 기병을 이끌고 우북평을 나가 박망후 장건이 만여 기를 거느리고 이광과 함께 하되 길을 달리하였다. 수백리 쯤을 행군하였는데 흉노의 좌현왕이 4만 기병을 거느리고 이광을 포위하니 이광의 군사가 모두 두려워하자 이광은 곧 그 아들 이감으로 하여금 가서 말을 달리게 하였다. 이감이 홀로 수십 기와 함께 말을 달려 곧바로 오랑캐의 기병을 꿰뚫고 그 좌우로 나와 돌아와서 이광에게 보고하여 말하기를 “오랑캐 따위는 대적하기 쉽습니다.” 했다. 군사들이 이에 안심하였다. 이광이 둥근 진을 치고 밖을 향하게 하였는데 오랑캐가 급히 공격하자 화살이 비 같이 쏟아졌다. 한의 군대로 죽은 자가 반을 넘고, 한의 화살이 또한 다하였다. 이광이 이에 사졸로 하여금 화살을 매겨 가득 당기되 발사하지 못하게 하고, 이광 자신이 스스로 ‘대황’으로 그 비장을 쏘고, 여러 사람을 죽이니 오랑캐가 포위를 더욱 풀었다. 날이 저물자 관리와 사졸이 모두 사람의 기색이 없었지만 이광은 의기양양하여 더욱 군대를 다스렸다. 군부대 안에서 이로부터 그 용기에 복종하였다. 다음 날 다시 힘서 싸웠는데 박망후의 군대가 또한 이르자 흉노의 군대가 곧 포위를 풀고 갔다. 한이 군대를 파하고 추격하지 못하였다. 이 때 이광의 군대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파하고 돌아갔다. 한의 법에 박망후가 기일에 늦은 것은 사형에 해당하나 재물로 속죄하고 서인을 삼았다. 이광 군대의 공이 보통 때와 같아서(공적과 과실이 반반이어서) 상은 없었다.
[一] 集解如淳曰:「中猶充也。充本法得首若干封侯。」
[一]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中’은 ‘充(찰 충)’과 같다. 이 법에 정해진 머리 약간을 얻어 채우면 후에 봉한다.” 했다.
[二] 集解徐廣曰:「南都賦曰『黃閒機張,善弩之名』。」駰案:鄭德曰「黃肩弩,淵中黃朱之」。孟康曰「太公六韜曰『陷堅敗強敵,用大黃連弩』」。韋昭曰「角弩色黃而體大也」。索隱案:大黃,黃閒,弩名也。故韋昭曰「角弩也,色黃體大」是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남도부」에 ‘黃閒機張’은 좋은 쇠뇌의 이름이다.”하였다. 배인이 살펴보니 정덕이 말하기를 “‘黃’은 어깨에 매는 쇠뇌로 연못 안에서 황색이 붉은 색이 된다.” 했다. 맹강이 말하기를 “『태공육도』에 ‘적의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고, 강한 적을 무너뜨리는데 대황연노를 쓴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각노의 색은 누렇고, 몸체는 크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대황’, ‘황간’은 쇠뇌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위소가 “각노인데 백은 누렇고, 몸체는 크다.”한 것이 이것이다.
初,廣之從弟李蔡與廣俱事孝文帝。景帝時,蔡積功勞至二千石。孝武帝時,至代相。以元朔五年為輕車將車,從大將軍擊右賢王,有功中率,[一]封為樂安侯。元狩二年中,代公孫弘為丞相。蔡為人在下中,[二]名聲出廣下甚遠,然廣不得爵邑,官不過九卿,而蔡為列侯,位至三公。諸廣之軍吏及士卒或取封侯。廣嘗與望氣王朔燕語,曰:「自漢擊匈奴而廣未嘗不在其中,而諸部校尉以下,才能不及中人,然以擊胡軍功取侯者數十人,而廣不為後人,[三]然無尺寸之功以得封邑者,何也?豈吾相不當侯邪?且固命也?」朔曰:「將軍自念,豈嘗有所恨乎?」廣曰:「吾嘗為隴西守,羌嘗反,吾誘而降,降者八百餘人,吾詐而同日殺之。至今大恨獨此耳。」朔曰:「禍莫大於殺已降,此乃將軍所以不得侯者也。」
처음에 이광의 4촌 동생 이채와 이광이 함께 효문제를 섬겼다. 경제 때 이채가 공로를 쌓아 녹이 2천석에 이르렀다. 효무제 때 대의 재상에 이르렀다. 원삭 5년에 경거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우현왕을 칠 때 군공의 등급이 率에 알맞음이 있어 봉하여 낙안후가 되었다. 원수 2년 중에 대의 공손홍이 승상이 되었다. 이채의 사람됨은 下中이고, 명성도 이광보다 아래에 나와 위치함이 매우 멀었으나 이광은 작읍을 얻지 못하고, 관직이 9경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채는 열후가 되어 지위가 삼공에 이르렀다. 이광에게 속했던 여러 군리들과 사졸들도 혹 취하여 후에 봉해졌다. 이광이 일찍이 엉긴 기운을 보고 조짐을 알아내는 왕삭과 잔치에서 이야기하며 말하기를 “한이 흉노를 칠 때부터 내가 일찍이 그 안에 있지 않음이 없었고, 여러 부의 교위이하로 재능이 중간 사람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오랑캐를 친 군공으로 후를 취한 자가 수십 명인데 저는 다른 사람에 뒤떨어지지 않음에도 한자 한치의 공으로 봉읍을 얻은 것이 없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내 상이 후가 되기에 마땅하지 않습니까? 또한 진실로 운명입니까?” 했다. 왕삭이 말하기를 “장군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일찍이 원한을 살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했대. 이광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농서태수가 되었을 때 강이 일찍이 배반하므로 말로 꾀어 항복을 받았는데 항복한 자 800여명을 내가 속이고 같은 날 그들을 죽였습니다. 지금 크게 원한 살만한 일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했다. 왕삭이 말하기를 “재앙으로 이미 항복한 것을 죽이는 것보다 큰 것은 없으니 이것이 곧 장군이 후의 작위를 얻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했다.
[一] 索隱中音丁仲反。率音律,亦音雙筆反。小顏云:「率謂軍功封賞之科,著在法令,故云中率。」
[一] 【索隱】 ‘中’의 음은 ‘丁’과 ‘仲’의 反이다. ‘率’의 음은 ‘律’이고, 또 음은 ‘雙’과 ‘筆’의 反이다. 소안이 말하기를 “‘率’은 군공으로 봉하여 상을 주는 등급을 말하는 것으로 법령에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中率(율에 맞춘다.)’이라 한 것이다.” 했다.
[二] 索隱案:以九品而論,在下之中,當第八。
[二] 【索隱】 살펴보니 구품으로써 논하였을 때 하의 중에 있음이니 제 8등급에 해당한다.
[三] 索隱案:謂不在人後。
[三] 【索隱】 살펴보니 다른 사람의 뒤에 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後二歲,大將軍、驃騎將軍大出擊匈奴,廣數自請行。天子以為老,弗許;良久乃許之,以為前將軍。是歲,元狩四年也。
2년 후 대장군과 표기장군이 크게 나와 흉노를 치는데 이광이 여러 번 스스로 가기를 청하였다. 천자가 늙었다 여겨 허락하지 않다가 오래 후 허락하여 전장군으로 삼았다. 이해가 원수 4년이다.
廣既從大將軍青擊匈奴,既出塞,青捕虜知單于所居,乃自以精兵走之,而令廣并於右將軍軍,[一]出東道。東道少回遠,而大軍行水草少,其勢不屯行。[二]廣自請曰:「臣部為前將軍,今大將軍乃徙令臣出東道,且臣結髮而與匈奴戰,今乃一得當單于,[三]臣願居前,先死單于。」
이광이 대장군 위청을 따라가서 흉노를 공격하러 요새를 나왔는데 위청이 포로를 잡아 선우가 있는 곳을 알자 이에 스스로 정병으로서 달려가고, 이광으로 하여금 우장군의 군대와 합하여 동쪽 길로 나가게 했다. 동쪽 길은 조금 돌아서 멀고, 대군이 행군하기에 물과 풀이 적고, 그 형세가 주둔하거나 행군하기에 알맞지 않았다. 이광이 스스로 청하여 말하기를 “신의 부가 전장군이 되었는데 지금 대장군이 곧 옮겨 신으로 하여금 동쪽 길을 나가게 하고, 또 신이 상투를 틀 때(젊어서)부터 흉노와 싸워왔으니 지금 곧 한번 선우를 대적하게 되었으니 신이 앞에 있으면서 먼저 선우를 죽일 것을 원합니다.” 했다.
大將軍青亦陰受上誡,以為李廣老,數奇,[四]毋令當單于,恐不得所欲。而是時公孫敖新失侯,為中將軍從大將軍,大將軍亦欲使敖與俱當單于,故徙前將軍廣。廣時知之,固自辭於大將軍。大將軍不聽,令長史封書與廣之莫府,曰:「急詣部,如書。」[五]廣不謝大將軍而起行,意甚慍怒而就部,引兵與右將軍食其[六]合軍出東道。軍亡導,或失道,[七]後大將軍。大將軍與單于接戰,單于遁走,弗能得而還。南絕幕,[八]遇前將軍、右將軍。廣已見大將軍,還入軍。大將軍使長史持糒醪遺廣,因問廣、食其失道狀,青欲上書報天子軍曲折。[九]廣未對,大將軍使長史急責廣之幕府對簿。廣曰:「諸校尉無罪,乃我自失道。吾今自上簿。」
대장군 위청 또한 몰래 천자의 경계를 받았는데 이광이 늙고 운수가 기구하니 선우를 감당하게하지 말라하였으며, 하고자하는 바를 얻지 못할까 두렵다. 하였다. 이 때 공손오가 새로 후의 지위를 잃고 중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랐는데 대장군이 또한 공손오와 함께 선우를 대적하게 하고자 하였으므로 정장군 이광을 옮겼다. 이광이 그 때 그것을 알고는 굳게 그것을 대장군에게 거절하였다. 대장군이 듣지 않고, 장사로 하여금 글을 봉하여 이광의 막부에 주게 하면서 말하기를 “급히 부에 나아가서 글과 같이하라.” 했다. 이광이 대장군에게 감사하지 않고 일어나 갔는데 마음으로는 매우 노하며 부에 나아가 군대를 이끌고 우장군 조이기와 군대를 합하여 동쪽 길로 나갔다. 군대는 길을 인도하는 자를 잃거나 혹은 길을 잃어 대장군보다 늦었다. 대장군과 선우가 만나 싸웠는데 선우가 달아나니 잡을 수 없어 돌아왔다. 남쪽으로 사막을 거녀다 전장군과 우장군을 만났다. 이광이 대장군을 뵌 후 돌아가 군대에 들어갔다. 대장군이 장사로 하여금 말린 밥과 술을 이광에게 보내고 이광과 조이기에게 길을 잃은 상황을 묻게 하고, 위청은 글을 천자에게 글을 올려 군대의 곡절을 보고하고자 하였다. 이광이 대답하지 않으니 대장군이 장사로 하여금 이광의 막부를 급히 질책하여 심문하게 하였다. 이광이 말하기를 “여러 교위는 죄가 없고 내가 스스로 길을 잃었다. 내가 지금 스스로 심문을 받겠다.” 했다.
[一] 集解徐廣曰:「主爵趙食其為右將軍。」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주작 조이기를 우장군으로 삼았다.” 했다.
[二] 集解張晏曰:「以水草少,不可群輩。」
[二]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물과 풀이 적기 때문에 무리지을 수 없다.” 했다.
[三] 索隱今得當單于。案:廣言自少時結髮而與匈奴戰,唯今者得與單于相當遇也。
[三] 【索隱】 지금 선우를 감당할 수 있다. 살펴보니 이광이 어렸을 때부터 머리를 묶고 흉노와 싸웠으니 지금은 선우와 서로 만남을 감당할 수 있다. 밀한 것이다.
[四] 集解如淳曰:「數為匈奴所敗,奇為不偶也。」 索隱案:服虔云「作事數不偶也」。音朔。小顏音所具反。奇,蕭該音居宜反。
[四]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數’는 흉노에게 패하는 것이고, ‘奇’는 불우함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복건이 말하기를 “일을 하는 운수가 불우함이다.” 했다. 음은 ‘朔 ’이다. 소안은 “음이 ‘所’와 ‘具’의 反이다.” 했고, ‘奇’는 소해가 “음이 ‘居’와 ‘宜’의 反이다.” 했다.
[五] 正義令廣如其文牒,急引兵徙東道也。
[五] 【正義】 이광으로 하여금 그 文牒과 같이 하여 급히 군대를 이끌고 동쪽 길로 옮겨가게 한 것이다.
[六] 索隱音異基。案:趙將軍名也。或亦依字讀。
[六] 【索隱】 음은 ‘異基’이다. 살펴보니 조장군의 이름이다. 혹은 또 글자를 읽음에 의하였다.
[七] 索隱謂無人導引軍, 故失道也。
[七] 【索隱】 군대를 인도하여 이끌 사람이 없기 때문에 길을 잃은 것이다.
[八] 正義絕,度也。南歸度沙幕。
[八] 【正義】 ‘絶’은 건넘이다. 남쪽으로 사막을 건너 돌아왔다.
[九] 正義言委曲而行迴折,使軍後大將軍也。
[九] 【正義】 자기의 듯을 굽히고 돌아가서 군대로 하여금 대장군을 두 따르게 한 것이다.
至莫府,廣謂其麾下曰;「廣結髮與匈奴大小七十餘戰,今幸從大將軍出接單于兵,而大將軍又徙廣部行回遠,而又迷失道,豈非天哉!且廣年六十餘矣,終不能復對刀筆之吏。」遂引刀自剄。廣軍士大夫一軍皆哭。百姓聞之,知與不知,無老壯皆為垂涕。而右將軍獨下吏,當死,贖為庶人。
막부에 이르러 이광이 그 휘하에 말하기를 “내가 머리를 묶고 흉노와 크고 적게 70여회를 싸웠는데 지금 요행히도 대장군을 따라 나와 선우의 군대를 맞이하였는데 대장군이 또한 나의 부를 옮겨 돌고 멀게 하였고, 또한 길을 잃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또 내 나이 60여세로 끝내 다시 刀筆의 관리를 대할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칼을 당겨 스스로 목을 찔렀다. 이광의 군대 중에 사대부와 모든 군대가 모두 곡하였다. 백성이 그것을 듣고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 늙은이와 장년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우장군 홀로 관리에게 내렸는데 죽을죄에 해당하였으나 재물과 속죄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廣子三人,曰當戶、椒、敢,為郎。天子與韓嫣[一]戲,嫣少不遜,當戶擊嫣,嫣走。於是天子以為勇。當戶早死,拜椒為代郡太守,皆先廣死。當戶有遺腹子名陵。廣死軍時,敢從驃騎將軍。廣死明年,李蔡以丞相坐侵孝景園壖地,[二]當下吏治,蔡亦自殺,不對獄,國除。李敢以校尉從驃騎將軍擊胡左賢王,力戰,奪左賢王鼓旗,斬首多,賜爵關內侯,食邑二百戶,代廣為郎中令。頃之,怨大將軍青之恨其父,[三]乃擊傷大將軍,大將軍匿諱之。居無何,敢從上雍,[四]至甘泉宮獵。驃騎將軍去病與青有親,射殺敢。去病時方貴幸,上諱云鹿觸殺之。居歲餘,去病死。[五]而敢有女為太子中人,愛幸,敢男禹有寵於太子,然好利,李氏陵遲衰微矣。
이광의 아들이 셋인데 ‘당호’, ‘초’, ‘감’으로 낭이 되었다. 천자와 한언이 희롱하는데 한언이 조금 공손하지 않아 이당호가 한언을 치니 한언이 달아났다. 이에 천자가 용감하다 여겼다. 당호가 일찍 죽었으므로 이초에게 관직을 주어 대군 태수로 삼았는데 모두 이광보다 먼저 죽었다. 당호에게 유복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이릉이었다. 이광이 군대에서 죽었을 때 이감이 표기장군을 따랐다. 이광이 죽고 다음해 이채가 승상으로 효경제 사당 뜰과 담장 사이의 땅을 침범한 죄를 짓고 관리에게 내려졌는데 이채가 자살하여 심문받지는 않았으나 나라가 없어졌다. 이감이 교위로 표기장군을 따라서 오랑캐 좌현왕을 칠 때 힘써 싸워 좌현왕의 북과 깃발을 빼앗고, 머리를 벤 것이 많아 관내후의 작을 내리고, 식읍을 2백호로 하면 이광을 대신하여 낭중령으로 삼았다. 얼마 후 대장군 위청에게 그 아버지가 한을 품고 죽은 것을 원망하여 대장군를 쳐서 상처를 입혔는데 대장군이 그것을 숨기고 꺼렸다. 얼마 후에 이감이 천자를 따라 옹 땅에 올라 감천궁에 이르러 사냥하였다. 표기장군 곽거병과 위청은 친족관계에 있어 이감을 활로 소아 죽였다. 곽거병이 그 때 바야흐로 귀하고 총애를 받았는데 천자가 꺼려서 말하기를 “사슴이 받아 그를 죽였다.” 했다. 몇 년 후 곽거병이 병으로 죽었다. 이감에게 딸이 있었는데 태자 중인이 되어 사랑을 받았고, 이감의 아들 우는 태자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이익을 좋아하여 이씨의 가문이 점차 쇠퇴하여 미미하여졌다.
[一] 索隱或音偃,又音許乾反。
[一] 【索隱】 혹은 음이 ‘偃’이고 또 음이 ‘許’와 ‘乾’의 反이다.
[二] 索隱壖音人絹反,又音乃段反,又音而宣反。案:壖地,神道之地也。黃圖云「陽陵闕門西出,神道四通。茂陵神道廣四十三丈」也。正義漢書云:「詔賜冢地陽陵,當得二十畝,蔡盜取三頃,頗賣得四十餘萬,又盜取神道外壖地一畝,葬其中。當下獄,自殺。」
[二] 【集解】 ‘壖’의 음은 ‘人’과 ‘絹’의 反ㅇ;고, 또 음은 ‘乃’와 ‘段’의 反이고, 도 음은 ‘而’와 ‘宣’의 反이다. 살펴보니 ‘壖地’는 神道의 땅이다. 「황도」에 “양릉은 대궐 문의 서쪽으로 나오며 신도는 4방으로 통한다. 무릉의 신도는 넓이가 43장이다.” 했다. 【正義】 『한서』에 “조칙으로 양릉에 봉토를 내려 20무를 내렸는데 이채가 3경을 훔쳐 취하여 팔아 40여만을 얻었고, 또 신도 밖 연지 1무를 훔쳐 취하여 그 안에 장례하였다. 옥에 가둠에 해당하니 자살하였다.” 했다.
[三] 索隱小顏云:「令其父恨而死。」
[三] 【索隱】 소안이 말하기를 “그 아비가 한을 품고 죽게 하였다.” 했다.
[四] 索隱劉氏音尚。大顏云「雍地形高,故云上」。
[四] 【索隱】 유씨는 음이 ‘尙’이라 했다. 대안에 “옹 땅의 형세가 높기 때뭄에 ‘上’이라 한 것이다.
[五] 集解徐廣曰:「元狩六年。」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원수 6년이다.” 했다.
李陵既壯,選為建章監,監諸騎。善射,愛士卒。天子以為李氏世將,而使將八百騎。嘗深入匈奴二千餘里,過居延[一]視地形,無所見虜而還。拜為騎都尉,將丹陽楚人五千人,教射酒泉、張掖以屯衛胡。
이릉이 장성하자 뽑혀 건장감이 되어 여러 기들을 감독하였는데 활을 잘 쏘고 사졸을 사랑하였다. 천자가 이씨가 대대로 장군이 되었다 하여 800기를 거느리게 하였다. 일찍이 흉노 땅 2천리를 들어갔는데 거연해 지나면서 땅의 형세를 보니 오랑캐를 볼 수 없어 돌아왔다. 벼슬을 주어 기도위가 되고, 단양의 초인 5천명을 거느리고 주천과 장액에서 활 쏘기를 가르치면서 주둔하여 오랑캐를 지켰다.
[一] 集解徐廣曰:「屬張掖。」 正義括地志云:「居延海在甘州張掖縣東北六十四里。地理志云『居延澤古文以為流沙』。甘州在京西北二千四百六十里。」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장액에 속한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거연해는 감주 장액현 동북쪽 64리에 있다. 「지리지」에 ‘거연택은 옛 글에 유사라 했다.’ 감주는 서울 서북쪽 2천4백6십리에 있다.” 했다.
數歲,天漢二年秋,貳師將軍李廣利將三萬騎擊匈奴右賢王於祁連天山,[一]而使陵將其射士步兵五千人出居延北可千餘里,欲以分匈奴兵,毋令專走貳師也。陵既至期還,而單于以兵八萬圍擊陵軍。陵軍五千人,兵矢既盡,士死者過半,而所殺傷匈奴亦萬餘人。且引且戰,連鬥八日,還未到居延百餘里,匈奴遮狹絕道,陵食乏而救兵不到,虜急擊招降陵。陵曰:「無面目報陛下。」遂降匈奴。其兵盡沒,餘亡散得歸漢者四百餘人。
몇 해 후 천한 2년 가을 이사장군 이광리가 3만기를 거느리고 흉노 우현왕을 기련산과 천상에서 칠 때 이릉이 그 활 쏘는 군대와 보병 5천을 거느리고 거연해 북쪽으로 천여리 정도를 나가 흉노의 군대를 나누어 나오게 하는 것으로써 이사장군 이광리에게 오로지 달려 가게하지 않도록 하고자 하였다. 이릉이 이미 돌아갈 기한이 이르렀고, 선우가 군대 8만명으로 이릉의 군대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이릉의 군대 5천 명은 병기와 화살이 다하고 군사 중에 죽은 자가 반이 넘었으되 죽이고 다치게 한 흉노가 또한 만여명 이었다. 또한 유인하고, 또 싸우는데 연 8일을 싸우며 돌아가는데 거연해 100여리를 정도 떨어진 곳에서 흉노가 좁은 곳을 차당하고 길을 끊으니 이릉이 식량이 다하고 구원군은 이르지 않으며 오랑캐가 급히 공격하면서 이릉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릉이 말하기를 “폐하께 보고할 면목이 없다.” 하고는 마침내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그 군대가 모두 죽고 나머지는 도망하여 흩어져 한에 돌아간 자가 400여명이었다.
[一] 集解徐廣曰:「出燉煌至天山。」 索隱案:晉灼云「在西域,近蒲類海」。又西河舊事云「白山冬夏有雪,匈奴謂之天山也」。正義括地志云:「祁連山在甘州張掖縣西南二百里。天山一名白山,今名初羅漫山,在伊吾縣北百二十里。伊州在京西北四千四百一十六里。」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돈황을 나가면 천산에 이른다.” 했다. 【索隱】 진작이 말하기를 “서역에 있는데 포류해에 가깝다.” 했다. 또 「서하구사」에 “백산은 겨울과 여름에 눈이 있다. 흉노는 그것을 천산이라 한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기련산은 감주 장액현 서남쪽 200리에 있다. 천산은 일명 백산이라 하는데 지금은 초라만산이라 이름하며 이오현 북쪽 120리에 있다. 이주는 서울 서북쪽 4천4백16리에 있다.” 했다.
單于既得陵,素聞其家聲,及戰又壯,乃以其女妻陵而貴之。漢聞,族陵母妻子。自是之後,李氏名敗,而隴西之士居門下者皆用為恥焉。
선우가 이릉을 얻고는 평소에 그 가문의 명성을 들었고, 싸우면서도 또한 장하다 여겼으므로 그 딸을 이릉에게 시집보내고 그를 귀하게 대우하였다. 한이 듣고 이릉의 어머니와 처, 자식을 모두 죽였다. 이 로부터 뒤로 이씨의 명성이 무너지고 농서의 선비로 문하에 살았던 자들이 모두 쓰여지게 되었던 것을 수치로 여겼다.
太史公曰:傳曰「其身正,不令而行;其身不正,雖令不從」。其李將軍之謂也?余睹李將軍悛悛[一]如鄙人,口不能道辭。及死之日,天下知與不知,皆為盡哀。彼其忠實心誠信於士大夫也?諺曰「桃李不言,下自成蹊」。[二]此言雖小,可以諭大也。
태사공이 말하기를 전하는 말에 “그 자신을 바르게 하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그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할지라도 따르지 않는다.” 하니 이광 장군을 이르는 것인가? 내가 이광 장군의 말이 적고 진중한 모습이 마치 시골사람 같고, 입으로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듯이 하는 것을 보았다. 죽는 날에 이르러 천하에 장군을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들이 모두 지극히 슬퍼하였다. 그의 충실한 마음이 진실로 사대부들에게 믿음을 주었기 때문인가? 속담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말하지 않아도 아래는 저절로 길이 이루어진다.”했으니 이 말은 비록 소소하나 깨우치는 것은 크다 할 수 있다.
[一] 索隱音七旬反。漢書作「恂恂」,音詢。
[一] 【索隱】 음은 ‘七’과 ‘旬’의 反이다. 『한서』에는 ‘恂恂’이라 썼는데 음은 ‘詢’이다.
[二] 索隱案:姚氏云「桃李本不能言,但以華實感物,故人不期而往,其下自成蹊徑也。以喻廣雖不能出辭,能有所感,而忠心信物故也」。
[二] 【索隱】 살펴보니 요씨가 말하기를 “복숭아와 오얏은 본래 말할 수 없고, 다만 꽃과 열매로 남을 감동시킨다. 그러므로 사람이 기약하지 않아도 가서 그 아래가 저절로 길을 이룬다. 이광이 비록 말을 잘 하지는 않았지만 감동시키는 바가 있었던 것은 충심으로 남에게 믿음을 주었기 때문임을 비유한 것이다.
【索隱述贊】 猿臂善射,實負其能。解鞍卻敵,圓陣摧鋒。邊郡屢守,大軍再從。失道見斥,數奇不封。惜哉名將,天下無雙!
【索隱述贊】 원숭이처럼 긴팔로 활을 잘 쏘아 실로 그 능력을 업었다. 말안장을 풀고 적을 물리치고 둥근 진을 쳐 예봉을 꺾었다. 변경의 군을 여러 번 지켜내고 대군을 두 번이나 따랐다. 길을 잃고 배척을 당하여 운수가 따르지 않아 봉해지지 못하였다. 애석하다 명장이여 천하에 짝할 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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