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一百一十四
東越列傳第五十四
閩越[一]王無諸及越東海王搖者,其先皆越王句踐之後也,姓騶氏。[二]秦已并天下,皆廢為君長,以其地為閩中郡。[三]及諸侯畔秦,無諸、搖率越歸鄱陽令吳芮,所謂鄱君者也,從諸侯滅秦。當是之時,項籍主命,弗王,[四]以故不附楚。漢擊項籍,無諸、搖率越人佐漢。漢五年,復立無諸為閩越王,王閩中故地,都東冶。孝惠三年,舉高帝時越功,曰閩君搖功多,其民便附,乃立搖為東海王,[五]都東甌,[六]世俗號為東甌王。
민월 왕 무제와 월의 동해왕 요는 그 선조가 모두 월왕 구천의 후예이다. 성은 추시이다. 진나라가 천하를 병탄한 후 모두 폐하여 군장이 되었고, 그 땅을 민중군으로 삼았다. 제후들이 진나라를 배반할 때 무제와 요가 월을 거느리고 파양령 오예에게 돌아갔다. 오예는 이른바 파군이라 불리던 자인데 제후들이 진나라를 멸망시킬 때 따랐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항적이 제후들에게 명을 주관하되 왕으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에 붙지 않았다. 한이 항적을 칠 때 무제와 요가 월 사람을 데리고 한을 도왔다. 한 5년 다시 무제를 세워 민월왕이라 하고, 민중의 옛 땅에서 왕 노릇하게 하고 동야에 도읍하였다. 효혜제 3년 고제 때 월의 공을 들어 민군 요의 공이 많다. 하니 그 백성들이 곧 귀부하였다. 이에 요를 세워 동해왕으로 삼았다. 동구에 도읍하였으므로 민간에서 동구왕이라 불렀다.
[一] 集解韋昭曰:「閩音武巾反。東越之別名。」 索隱案:說文云「閩,東越蛇種也」,故字從「虫」。閩音旻。
[一]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閩’의 음은 ‘武’와 ‘巾’의 反이다. 동월의 별명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설문해자』에 “‘閩’은 동월의 일파이다.” 했다. 그러므로 글자를 ‘虫’을 따랐다. ‘閩’의 음은 ‘旻(하늘 민)’이다.
[二] 集解徐廣曰:「騶,一作『駱』。」 索隱徐廣云一作「駱」,是上云「歐駱」,不姓騶。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騶(말 먹이는 사람 추)’는 한편으로 ‘駱(낙타 락)’이라 쓴다.” 했다. 【索隱】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駱’이라 쓴다. 했다.” 이 위에서 ‘구락’이라 한 것은 성을 추라 하지 않았다.
[三] 集解徐廣曰:「今建安侯官是。」 索隱徐廣云「本建安侯官是」。案:為閩州。案:下文「都東冶」,韋昭以為在侯官。正義今閩州又改為福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지금 건안후의 관직이 이것이다.” 했다. 【索隱】 서광이 말하기를 “본래 건안후관이 이것이다.” 했다. 살펴보니 민주라 했다. 살펴보니 아래 글에 ‘동야’에 도읍했다. 하는데 위소는 후관에 있다 하였다. 【正義】 지금의 민주는 또한 고쳐서 복주가 되었다.
[四] 集解漢書音義曰:「主號令諸侯,不王無諸、搖等。」
[四] 【集解】 「한서음의」에 “제후에게 호령을 주관하면서도 무제, 요 등을 왕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五] 集解應劭曰:「在吳郡東南濱海云。」
[五] 【集解】 응소가 말하기를 “오군 동남쪽 바닷가에 있다.
[六] 集解徐廣曰:「今之永寧也。」 索隱韋昭曰:「今永寧。」姚氏云:「甌,水名。」永嘉記:「水出永寧山,行三十餘里,去郡城五里入江。昔有東甌王都城,有亭,積石為道,今猶在也。」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지금의 영녕이다.” 했다. 【索隱】 위소가 말하기를 “지금의 영녕이다.” 했다. 요씨가 말하기를 “‘甌’는 뭉 이름이다.” 했다. 『영가기』에 “물이 영녕산에서 나와 30여리를 가서 군성과 5리 떨어진 곳에서 강에 들어간다. 옛날 동구왕의 도성이 있고, 정자가 있으며, 돌을 깔아 길을 만들었는데 지금도 아직 있다,
後數世,至孝景三年,吳王濞反,欲從閩越,閩越未肯行,獨東甌從吳。及吳破,東甌受漢購,殺吳王丹徒,以故皆得不誅,歸國。
몇 대 후 효경제 3년 오왕 비가 배반하면서 민월을 따르게 하고자 하였는데 민월은 즐겨 행하지 않았으나 동구만은 오를 따랐다. 오가 깨트려짐에 이르러 동구가 한의 뇌물을 받고 오왕 단주를 죽였기 때문에 모두 죽지 않고, 나라에 돌아갈 수 있었다.
吳王子子駒亡走閩越,怨東甌殺其父,常勸閩越擊東甌。至建元三年,閩越發兵圍東甌。東甌食盡,困,且降,乃使人告急天子。天子問太尉田蚡,蚡對曰:「越人相攻擊,固其常,又數反覆,不足以煩中國往救也。自秦時棄弗屬。」於是中大夫莊助詰蚡曰:「特患力弗能救,德弗能覆;誠能,何故棄之?且秦舉咸陽而棄之,何乃越也!今小國以窮困來告急天子,天子弗振,彼當安所告愬?又何以子萬國乎?」上曰:「太尉未足與計。吾初即位,不欲出虎符發兵郡國。」乃遣莊助以節發兵會稽。會稽太守欲距不為發兵,助乃斬一司馬,諭意指,遂發兵浮海救東甌。未至,閩越引兵而去。東甌請舉國徙中國,乃悉舉眾來,處江淮之閒。[一]
오왕의 아들 자구가 도망하여 민월로 달아났다. 동구가 그 아비를 죽인 것을 원망하여 항상 민원에게 동구를 칠 것을 권하였다. 건원 3년에 이르러 민월이 군대를 징발하여 동구를 포위하였다. 동구가 식량이 다하여 곤궁해지고, 또 항복할 지경에 이르자 이에 사람을 시켜 천자에게 다급함을 알렸다. 천자가 태위 전분에게 물으니 전분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월 사람들이 서로 공격하는 것은 진실로 항상 있는 것이고, 또 여러 번 반복하니 중국을 번거롭게 하는 것으로 가서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나라 때부터 버려서 속하지 않았습니다.” 했다. 이에 중대부 장조가 전분을 힐난하며 말하기를 “다만 힘써 구원할 수 없거나 덕으로 덮을 수 없음을 근심할 뿐이요 진실로 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버리겠는가? 또한 진나라는 함양과 천하를 들어 그것을 버렸을 뿐 어찌 월이겠는가! 지금 작은 나라가 궁곤하여 외서 천자에게 다급함을 알리는데 천자가 떨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디에 하소연할 것입니까? 또한 어찌 만국을 자식으로 삼겠는가?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태위는 계책을 함께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내가 처음 즉위하여 호부를 내어 군대를 군국에서 징발 하고자 하지 않는다.” 했다. 이에 장조를 보내 절을 주어 회계의 군대를 징발하였다. 회계 태수가 저항하여 군대를 징발하려 하지 않았다. 장조가 이에 한 사마를 목 베어 뜻을 보이니 마침내 군대를 내어 바다에 떠서 동구를 구원하였다. 아직 동구에 이르지 않았는데 민월이 군대를 이끌고 갔다. 동구가 나라를 들어 중국으로 옮길 것을 청하니 이에 모든 무리를 들어오게 하고 강과 회수 사이에 있게 하였다.
[一] 集解徐廣曰:「年表云東甌王廣武侯望,率其眾四萬餘人來降,家廬江郡。」 索隱徐廣據年表而為說。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연표」에 동구왕 광무후 망이 그 무리 4만여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여 여강군에 살았다.” 했다. 【索隱】 서광이 「연표」에 근거하여 말하였다.
至建元六年,閩越擊南越。南越守天子約,不敢擅發兵擊而以聞。上遣大行王恢出豫章,大農韓安國出會稽,皆為將軍。兵未踰嶺,閩越王郢發兵距險。其弟餘善乃與相、宗族謀曰:「王以擅發兵擊南越,不請,故天子兵來誅。今漢兵眾彊,今即幸勝之,後來益多,終滅國而止。今殺王以謝天子。天子聽,罷兵,固一國完;不聽,乃力戰;不勝,即亡入海。」皆曰「善」。即鏦[一]殺王,使使奉其頭致大行。大行曰:「所為來者誅王。今王頭至,謝罪,不戰而耘[二],利莫大焉。」乃以便宜案兵告大農軍,而使使奉王頭馳報天子。詔罷兩將兵,曰:「郢等首惡,獨無諸孫繇君丑[三]不與謀焉。」乃使郎中將立丑為越繇王,奉閩越先祭祀。
건원 6년에 이르러 민월이 남월을 쳤다. 남월이 천자와의 약속을 지켜 감히 멋대로 군대를 내어 치지 못하고 (한에) 알렸다. 황제가 대행왕 회를 보내 예잘을 나가게 하고 대농 한안국은 회계를 나가게 하였는데 모두 장군을 삼았다. 군대가 아직 영을 넘지 못하였는데 민월왕 영이 군대를 내어 험한 곳을 막았다. 그 동생 여선이 이에 상, 종족과 모의하여 말하기를 “왕이 멋대로 군대를 내어 남월을 치면서도 (황제에게)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자의 군대가 와서 죽이려 한다. 지금 한의 군대는 강하니 지금 곧 요행히 이길 수 있어도 뒤에 더욱 많이 올 것이니 마침내 나라를 멸망시키고서야 그칠 것이다. 지금 왕을 죽이고 천자에게 사죄하자.” 했다. 천자가 듣고 군대를 파하면 진실로 한 나라를 완전하게 할 것이고, 듣지 않는다면 이에 힘써 싸우고 이기지 못한다면 곧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자. 했다. 모두 “좋다”고 했다. 곧 창으로 찔러 왕을 죽이고 사신을 시켜 그 머리를 대행에게 이르게 하였다. 대행이 말하기를 “(우리가) 오게 된 것은 왕을 죽이려는 것이다. 지금 왕의 머리가 이르고 사죄하니 싸우지 않고 제거하였으니 이로움이 이보다 큼이 없다.” 하고 편의적으로(임의로) 군대를 어루만지고(그치고) 대농군에게 알리고 사자로 하여금 왕의 머리를 받들게 하여 말을 달려 천자에게 보고하였다. 두 군대를 그치게 명령하고 말하기를 “영 등은 악의 우두머리이고, 다만 무제의 손자인 요군 축은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고는 이에 낭중으로 하여금 축을 세워 월요왕이라 하고, 민월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一] 索隱劉氏又音窗。鏦,撞也。
[一] 【索隱】 유씨는 또 음이 ‘窗’이라 했다. ‘鏦’은 치는 것이다.
[二] 集解徐廣曰:「漢書作『殞』。耘義當取『耘除』。或言耘音于粉反,此楚人聲重耳。隕耘當同音,但字有假借,聲有輕重。」 索隱耘音云。耘,除也。漢書作「隕」,音于粉反。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서』에는 ‘殞(죽을 운)’이라 썼다. ‘耘(김맬 운)’의 뜻은 ‘耘除(풀을 베어 없앰)’를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떤 사람은 ‘耘 ’의 음은 ‘于’와 ‘粉’의 反이라 하였는데 이는 초나라 사람들이 소리를 거듭했을 뿐이다. ‘隕’과 ‘耘’은 같은 음인데 다만 글자는 假借가 있고, 소리에는 輕重이 있다.” 했다. 【索隱】 ‘耘’의 음은 ‘云’이다. ‘耘’은 제거함이다. 『한서』에는 ‘隕’이라 썼고, 음은 ‘于’와 ‘粉’의 反이다.
[三] 索隱繇音搖,邑號也。丑,名。
[三] 【索隱】 ‘繇(역사 요)’의 음은 ‘搖’인데 읍호이다. ‘丑’은 이름이다.
餘善已殺郢,威行於國,國民多屬,竊自立為王。繇王不能矯其眾持正。天子聞之,為餘善不足復興師,曰:「餘善數與郢謀亂,而後首誅郢,師得不勞。」因立餘善為東越王,與繇王並處。
여선이 영을 죽인 후 나라에 위엄을 행하니 국민이 많이 속하므로 몰래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요왕은 그 무리들을 바로잡아 정통을 지닐 수 없었다. 천자가 그것을 듣고 여선 때문에 군대를 일으키는 것이 충분하지 못하다 여겨서 말하기를 “여선이 여러 번 영과 함께 난을 도모하였으면서도 후에 먼저 영을 죽였으니 군대를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하고는 여선을 세워 동월왕으로 삼고, 요왕과 함께 나란히 거처하게 하였다.
至元鼎五年,南越反,東越王餘善上書,請以卒八千人從樓船將軍擊呂嘉等。兵至揭揚,以海風波為解,不行,持兩端,陰使南越。及漢破番禺,不至。是時樓船將軍楊僕使使上書,願便引兵擊東越。上曰士卒勞倦,不許,罷兵,令諸校屯豫章梅領待命。[一]
원정 5년에 이르러 남월이 배반하니 동월왕 여선이 글을 올려 군졸 8천명으로 누선장군을 따라 여가 등을 치기를 청하였다. 군대가 게양에 이르러 바다의 바람과 파도를 핑계로 가지 않고 두 끝을 잡고 몰래 남월에 사신을 보냈다.(통하고 있었다,) 한이 번우를 깨트림에 이르러도 이르지 않았다. 이 때 누선장군 양복이 사자를 시켜 글을 올려 군대를 이끌고 동월을 치기를 원하였다. 천자가 말하기를 “사졸이 수고롭고 노곤하다 하여 허락하지 않고 군대를 멈추게 하고 여러 교위들로 하여금 예장 매령에 주둔하여 명을 기다리게 했다.
[一] 集解徐廣曰:「在會稽界。」 索隱案:徐廣云「在會稽」,非也。今案:豫章三十里有梅嶺,在洪崖山足,當古驛道。此文云「豫章梅嶺」,知非會稽也。正義括地志云:「梅嶺在虔化縣東北百二十八里。」虔州漢亦屬豫章郡,二所未詳。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회계 경계에 있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서광은 “회계에 있다.” 하였으나 아니다. 지금 살펴보니 예장 30리에 매령이 있는데 홍애산 기슭에 있으며 옛 驛道에 해당한다. 이 글에 이르기를 “예장 매령”이라 하니 회계가 아님을 안다. 【正義】 『괄지지』에 “매령은 건화현동북쪽 128리에 있다.” 했다. 건주는 한이 또한 예장군에 속하게 하였는데 두 곳은 자세하지 않다.
元鼎六年秋,餘善聞樓船請誅之,漢兵臨境,且往,乃遂反,發兵距漢道。號將軍騶力等為「吞漢將軍」,入白沙、武林、[一]梅嶺,殺漢三校尉。是時漢使大農張成、故山州侯齒[二]將屯,弗敢擊,卻就便處,皆坐畏懦誅。
원정 6년 가을 여선이 누선장군이 죽일 것을 청하여 한의 군대가 경계에 주둔하고 또한 나아갈 것이란 것을 들었다. 이에 마침내 배반하여 군대를 징발하여 한의 길을 막았다. 장군 추력 등을 ‘탄한장군’이라 불렀는데 백사, 무림, 매령에 들어가 한의 세 교위를 죽였다. 이 때 한이 대논 장성과 이전 산주후 치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주둔하게 하였는데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 편한 곳에 나아가니 모두 두려워하고 나약한 죄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一] 集解徐廣曰:「在豫章界」。索隱徐廣云在豫章界。案:今豫章北二百里,接鄱陽界,地名白沙,有小水入湖,名曰白沙阬。東南八十里有武陽亭,亭東南三十里地名武林。此白沙、武林,今當閩越入京道。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예장 경계이 있다.” 했다. 【索隱】 서광은 “예장 경계에 있다.” 했다. 살펴보니 지금 예장 북쪽 200리는 파양 경계에 접하는데 땅이름은 백사이며, 작은 물이 있어 호수로 들어가며 이름을 백사갱이라 한다. 동남쪽 80리에 무양정이 있고, 무양정 동남쪽 30리 땅을 무림이라 이름한다. 이것이 백사와 무림인데 지금 민월에서 서울에 들어가는 길에 해당한다.
[二] 集解徐廣曰:「成陽共王子。」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성양 공왕 유희의 아들이다.” 했다.
餘善刻「武帝」璽自立,詐其民,為妄言。天子遣橫海將軍韓說出句章,[一]浮海從東方往;樓船將軍楊僕出武林;中尉王溫舒出梅嶺;越侯為戈船、下瀨將軍,出若邪、[二]白沙。[三]元封元年冬,咸入東越。東越素發兵距險,使徇北將軍守武林,敗樓船軍數校尉,殺長吏。樓船將軍率錢唐轅終古[四]斬徇北將軍,為禦兒侯。[五]自兵未往。
여선이 무제새를 새기고 스스로 즉위하여 그 백성을 속이고 망년된 말을 하였다. 천자가 횡해장군 한설을 보내 구장에서 나가 바다에서 배를 타고 동쪽을 따라가게 하고, 누선장군 양복은 무림에서 나가게 하고, 중위 왕온서는 매령에서 나가게 하고, 월후는 과선장군과 하뢰장군이 되어 약사와 백사에서 나가게 하였다. 원봉 1년 겨울 모두 동월에 들어갔다. 동월이 평소처럼 군대를 징발하여 험한 곳을 막고, 순북장군으로 하여금 무림을 지키게 하였는데 누선장군의 몇몇 교위를 무너뜨리고 장리를 죽였다. 누선장군이 전당의 원종고를 거느리고 순북장군을 목 베어 죽이고 어아후가 되었다. 군대가 미처 이르기도 전이었다.
[一] 索隱鄭氏音勾,會稽縣也。正義句章故城在越州鄮縣西一百里,漢縣。
[一] 【索隱】 정씨는 음이 ‘勾(굽을 구)’라 하였는데 회계의 현이다. 【正義】 ‘구장’ 옛 성은 월주 무현 서쪽 100리에 있는데 한의 현이다.
[二] 索隱案:姚氏云「地名,今闕」。
[二] 【索隱】 살펴보니 요씨가 말하기를 “땅 이름인데 지금은 빠졌다.” 했다.
[三] 正義越州有若耶山、若耶溪。「若」「如」一。預州有白沙山。蓋從如此邪。白沙東故閩州。
[三] 【正義】 월주에 약야산과 약야계가 있다. ‘若’은 ‘如’와 같다. 예주에 백사산이 있다. 대개 이 같이 따를 것이다. 백사의 동쪽이 이전의 민주이다.
[四] 正義錢唐,杭州縣。轅,姓;終古,名。
[四] 【正義】 전당은 항주현이다. ‘轅(끌채 원)’은 성이고, ‘終古’는 이름이다.
[五] 集解漢書音義曰:「今吳南亭是也。」 正義「禦」字今作「語」。語兒鄉在蘇州嘉興縣南七十里,臨官道也。
[五] 【集解】 「한서음의」에 “지금의 오남정이 이것이다.” 했다. 【正義】 ‘禦(막을 어)’자는 지금 ‘語’라 쓴다. 어아향은 소주 가흥현 남쪽 70리에 있는데 관도와 맞닿아 있다.
故越衍侯吳陽前在漢,漢使歸諭餘善,餘善弗聽。及橫海將軍先至,越衍侯吳陽以其邑七百人反,攻越軍於漢陽。從建成侯敖,[一]與其率,從繇王居股謀曰:「餘善首惡,劫守吾屬。今漢兵至,眾彊,計殺餘善,自歸諸將,儻幸得脫。」乃遂俱殺餘善,以其眾降橫海將軍,故封繇王居股為東成侯,[二]萬戶;封建成侯敖為開陵侯;[三]封越衍侯吳陽為北石侯;封橫海將軍說為案道侯;封橫海校尉福為繚嫈侯。[四]福者,成陽共王子,故為海常侯,坐法失侯。舊從軍無功,以宗室故侯。諸將皆無成功,莫封。東越將多軍,[五]漢兵至,棄其軍降,封為無錫侯。
이전 월연후 오양은 앞서 한에 있었기 때문에 한이 돌아가 여선을 깨우치게 하였는데 여선이 듣지 않았다. 횡해장군이 먼저 이르니 월연후 오양은 그 읍의 700명과 함께 여선을 배반하고 월의 군대를 한양에서 공격하였다. 건성후 오를 따라 그 무리를 거느리고 요왕 거고를 따라 모의하여 말하기를 “여선은 악을 짓는 우두머리로 지키는 우리들을 위협합니다. 지금 한의 군대가 이르는데 무리는 많고 강하니 여선을 헤아려 죽이고 스스로 여러 장군에게 귀순하는 것이 요행히도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했다. 이에 모두 함께 여선을 죽이고 그 무리들이 횡해장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므로 요왕 거굉을 봉하여 동성후로 식읍 만호를 삼고, 건성후 오를 봉하여 개릉후로 삼고, 열연후 오양을 봉하여 북석후로 삼고, 횡해장군 열을 봉하여 안도후로 삼고, 횡해교위 복을 봉하여 요앵후로 삼았다. 복은 성양공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해상후로 삼았는데 죄를 지어 후의 지위를 잃었다. 옛날에 군대를 따랐으나 공이 없었으나 종실이었기 때문에 후가 되었다. 여러 장군들은 모두 공을 이룸이 없었기 때문에 봉해지지 못했다. 동월의 장군 다군은 한의 군대가 이르자 그 군대를 버리고 항복하였으므로 봉하여 무석후로 삼았다.
[一] 集解徐廣曰:「亦東越臣。」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또한 동원의 신하이다.” 했다.
[二] 索隱韋昭曰:「在九江。」
[二] 【索隱】 위소가 말하기를 “구강에 있다.” 했다.
[三] 索隱徐廣云:「敖,東越臣。」韋昭云:「開陵屬臨淮。」
[三] 【索隱】 서광이 말하기를 “‘敖(놀 오)’는 동월의 신하이다.” 했다. 위소는 “개릉은 임회에 속한다.” 했다.
[四] 集解漢書音義曰:「音遼縈。」 索隱服虔云:「嫈音榮,縣名。」劉伯莊云:「繚音遼,下音紆營反。成陽王子也。」
[四] 【集解】 「한서음의」에 “음은 ‘遼縈(얽힐 영)’”이다. 【索隱】 복건은 “‘嫈’의 음은 ‘榮’이니 현 이름이다.” 했다. 유백장은 “‘繚(감길 료)’의 음은 ‘遼(멀 요)’이고, 아래의 음은 ‘紆(굽을 우)와 ’ ‘營’의 反이다. 성양왕의 아들이다.” 했다.
[五] 集解漢書音義曰:「多軍,名也。」 索隱李奇云:「多軍,名。」韋昭云:「多,姓;軍,名也。」
[五] 【集解】 「한서음의」에 “다군은 이름이다.” 했다. 【索隱】 이기는 “다군은 이름이다,” 했고, 위소는 “‘多’는 성이고, ‘軍’은 이름이다.” 했다.
於是天子曰東越狹多阻,閩越悍,數反覆,詔軍吏皆將其民徙處江淮閒。東越地遂虛。
이에 천자가 말하기를 “동월은 좁고 막힘이 많고, 민월은 사나워 자주 배반하였다.” 하고는 군리에게 명령하여 모두 그 백성을 거느리고 장강과 회수의 사이에 살게 하였다. 동월의 땅이 마침내 비게 되었다.
太史公曰:越雖蠻夷,其先豈嘗有大功德於民哉,何其久也!歷數代常為君王,句踐一稱伯。然餘善至大逆,滅國遷眾,其先苗裔繇王居股等猶尚封為萬戶侯,由此知越世世為公侯矣。蓋禹之餘烈也。
태사공이 말하기를 “월이 비록 오랑캐이나 그 선조가 백성에게 큰 공덕이 있었는가? 어찌 그리도 오래되었을까! 여러 대를 거치면서 항상 군왕이 되었고, 구천은 한번 ‘伯(우두머리)’을 일컳다. 그러나 여선이 대역에 이르러 나라를 멸망시키고, 무리를 옮겨가게 하며, 그 후예인 요왕 거굉 등이 오히려 봉함을 받아 만호후가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월이 대대로 공후가 되었다. 대개 우가 후세에 남긴 공덕 때문일 것이다” 했다.
【索隱述贊】句踐之裔,是曰無諸。既席漢寵,實因秦餘。騶、駱為姓,閩中是居。王搖之立,爰處東隅。後嗣不道,自相誅鋤。
【索隱述贊】 구천의 후예로 이를 무제라 했다. 이미 한의 총애를 받았음은 실로 진나라가 남긴 때문이다. 추와 낙을 성으로 삼고 민중에 살았다. 왕요가 즉위하여 이에 동쪽 귀퉁이에 살았다. 후사가 법도가 없어 스스로 서로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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