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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사기권130 태사공자서제70

by 최인표 2020. 1. 9.

史記卷一百三十

  太史公自序第七十

 

昔在顓頊命南正重以司天北正黎以司地[]唐虞之際紹重黎之後使復典之至于夏商故重黎氏世序天地其在周程伯休甫其後也[]當周宣王時失其守而為司馬氏[]司馬氏世典周史[]惠襄之閒司馬氏去周適晉[]晉中軍隨會奔秦[]而司馬氏入少梁[]

옛날 전욱이 살아있을 때 남정인 중에게 명하여 천문을 담당하게 하고, 북정인 여러 하여금 지리를 관장하게 하였다. 요순시절에는 중가 여의 후예가 이어서 다시 그것을 하게 하였고, 하와 상에 이르러서는 옛 중과 여씨의 집안에서 대대로 천문과 지리를 서술하게 하였다. 주나라에 이르러 정나라 국백 휴보는 그 후예이다. 주나라 선왕 때를 당하여 그 직책을 잃고 사마씨가 되었다. 사마씨는 대대로 주나라 역사를 담당하였다. 혜왕과 양왕의 사이에는 사마씨가 주나라를 떠나 나라로 갔다. 나라 중군인 수회가 나라로 달아나니 사마씨가 소양에 들어갔다.

 

[] 索隱南正重以司天火正黎以司地張晏云南方陽也水配也水為陰故命南正重司天火正黎兼地職」。臣瓚以為重黎氏是司天地之官司地者宜曰北正古文作非也揚雄譙周並以為然國語黎為火正以淳曜敦大光照四海」,又幽通賦云黎淳曜於高辛」,火正為是也

[] 索隱남정으로서 천문을 보게하고, ‘화정로서 지리를 담당하게 하였다. 살펴보니 장안이 말하기를 남쪽은 양이니 가 되고, 물을 짝한다. 물은 음이 되므로 남정에게 명하여 천문을 보게 하고, ‘와정가 땅의 직책을 겸하게 한 것이다.” 했다. 신찬은 여씨는 이에 천문과 지리를 담당한 관리로 여겨서 사지는 마땅히 북정이라 해야 하며, 옛 글에는 이라 썼다.“ 하였는데 아니다. 양웅과 초주가 모두 그러하다고 여겼다.” 살펴보니 국어“‘黎為火正은 큰 별이 도탑고 커서 빛이 四海에 비침이다.” 했다. 또한 유통부고신(요의 아버지) 때에 많은 큰 별이라 한 즉 火正은 이것이 된다.


[] 集解應劭曰:「封為程國伯休甫字也。」 索隱案重司天而黎司地是代序天地也據左氏重是少昊之子黎乃顓頊之胤二氏二正所出各別而史遷意欲合二氏為一故總云在周程伯休甫其後」,非也[]彪之序及干寶皆云司馬氏黎之後是也今總稱伯休甫是重黎之後者凡言地即舉天稱黎則兼重自是相對之文其實二官亦通職然休甫則黎之後也亦是太史公欲以史為己任言先代天官所以兼稱重耳正義括地志云:「安陵故城在雍州咸陽東二十一里周之程邑也。」

[] 集解응소가 말하기를 봉하여 정국 백이 되었고, 휴보는 자이다.” 했다. 索隱살펴보니 중은 천문을 맡았고, 여는 지리를 맡았는데 이는 천지를 대신하여 서술한 것이다. 춘추좌씨에 의거하면 중은 소호의 아들이고, 여는 곧 전욱의 후예이니 두 씨족이 二正이나 나온 바는 각기 구별되는데 사마천이 사기에서 두 씨를 합하여 하나로 하고자 생각하였기 때문에 총괄하여 주나라 때 나라 백 휴보가 그 후손이다.” 한 것인데 아니다. 그러나 뒤에 살펴보니 표의 서문과 간보가 모두 사마씨라 하였으니 여의 후손이다, 한 것이 옳다. 지금 총칭하여 백 휴보는 이 중과 여의 후손이라 한 것은 무릇 땅을 말하면 곧 하늘을 거론하기 때문에 여를 말한 것은 곧 중을 겸한 것이므로 이로부터 글이 서로 대치하나 그 실제는 두 관직이 또한 직책을 통괄 한다. 그러나 휴보는 곧 여의 후손이니 또한 이는 태사공이 사를 기록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고자 하여 선대가 천관임을 말하면서 중을 겸하여 말하였을 뿐이다. 正義】 『괄지지안릉 옛 성은 옹주 함양 동쪽 21리에 있는데 주나라의 정읍이다.” 했다.


[] 正義司馬彪序云:「南正黎後世為司馬氏。」

[] 正義사마표의 서문에 남정 여는 후대에 사마씨가 되었다.” 했다.


[] 索隱案司馬夏官卿不掌國史自是先代兼為史衛宏云司馬氏周史佚之後」,不知何據

[] 索隱사마는 하나라의 관직으로 국사를 담당하지 않았는데 이로부터 선대가 사를 기록함을 겸하였다. 위굉이 말하기를 사마씨는 주나라 사일의 후손이다.” 하였는데 어디에 근거하였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 集解張晏曰:「周惠王襄王有子穨叔帶之難故司馬氏奔晉。」

[] 集解장안이 말하기를 주나라 혜왕, 양왕 때 자퇴와 숙대의 난이 있었기 때문에 사마씨가 나라로 달아났다.” 했다.

 

[] 隱案左氏隨會自晉奔秦後乃奔魏自魏還晉故漢書云會奔秦魏也

[] 索隱좌씨는 수회가 나라에서 나라로 달아났다가 후에 나라로 달아났으며, 나라에서 나라로 돌아왔기 때문에 한서에서 수회가 , 나라로 달아났다.” 한 것이다.

 

[] 索隱古梁國也秦滅之改曰少梁後名夏陽正義案春秋隨會奔秦其後自秦入魏而還晉也隨會為晉中軍將少梁古梁國也在同州韓城縣南二十二里是時屬晉

[] 索隱옛 양국이다. 나라가 멸하였기 때문에 고쳐서 소양이라 하였다가 후에 하양이라 이름하였다. 正義】 『춘추를 살펴보니 수회가 나라로 달아났다가 그 후 나라로부터 나라에 들어갔다가, 나라로 돌아갔다. 수회는 나라의 중군장이 되었다.” 했다. ‘소양은 옛 양국인데 성은 영이고, 동주 한성현 남쪽 12리에 있는데 이 때 나라에 속하였다.

 

自司馬氏去周適晉分散或在衛或在趙或在秦其在衛者相中山[]在趙者[]以傳劍論顯[]蒯聵[]其後也在秦者名錯與張儀爭論於是惠王使錯將伐蜀遂拔因而守之[]錯孫靳[]事武安君白起而少梁更名曰夏陽靳與武安君阬趙長平軍[]還而與之俱賜死杜郵[]葬於華池[]靳孫昌昌為秦主鐵官當始皇之時蒯聵玄孫卬[]為武信君將[一一]而徇朝歌諸侯之相王王卬於殷[一二]漢之伐楚卬歸漢以其地為河內郡昌生無澤[一三]無澤為漢巿長無澤生喜喜為五大夫皆葬高門[一四]喜生談談為太史公[一五]

사마씨가 주나라를 떠나 나라로 감으로부터 나뉘고 흩어져 혹은 나라에 있고, 혹은 나라에 있고, 혹은 나라에 있었다. 나라에 있었던 자는 중산의 재상이 되었다. 나라에 있던 자는 검법의 논의를 전하여 이름이 드러났는데 괴외는 그 후손이다. 나라에 있던 자는 이름이 착인데 장의와 논쟁하니 이에 혜왕이 착으로 하여금 촉을 치게 하였더니 마침내 함락시키고 그것을 지켰다. 착의 손자 (가슴 걸이 근)은 무안군 백기를 섬겼다. 소양이 다시 이름을 바꾸어 하양이라 하였다. 근과 무안군이 나라 장평의 군대를 묻어 죽이고 돌아왔으나 (무안군 백기와)함께 모두 두우에서 죽음이 내려지자 화지에 장사하였다. 근의 손자는 창이고, 창은 나라의 철을 관장하는 관리가 되었는데 시황제의 시대에 해당한다. 괴외의 현손 (나 앙)은 무신군의 장군이 되어 조가를 따라가며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서로 왕이 되자 앙이 은에서 왕이 되었다. 한이 초를 정벌하자 앙이 한에 귀의하니 그 땅을 하내군으로 삼았다. 창은 무택을 낳았고, 무택은 한의 시장이 되었다. 무택은 희를 낳았는데 희는 오대부가 되었다가 죽으니 모두 고문에 장례하였다. 희는 담을 낳고, 담은 태사공이 되었다.

[] 集解徐廣曰:「名喜也。」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이름은 희이다.” 했다.

 

[] 索隱案何法盛晉書及司馬氏系本名凱正義何法盛晉書及晉譙王司馬無忌司馬氏系本皆云名凱

[] 索隱살펴보니 하법성의 진서와 사마씨의 계본에 이름을 (즐길 개)라 하였다. 正義하법성의 진서나라 초왕 사마무기의 사마씨 계본에 모두 이름을 라 했다.

 

[] 集解服虔曰:「世善傳劍也。」蘇林曰:「傳手搏論而釋之。」晉灼曰:「史記吳起贊曰非信仁廉勇不能傳劍論兵書。」 索隱服虔云:「代善劍也。」解所以稱傳也蘇林云傳作」,言手搏論而釋之所以知名也

[] 集解복건이 말하기를 대대로 검법을 잘 전하였다.” 했다. 소림이 말하기를 수박의 논의를 전하여 그것을 해석하였다.” 했다.진작이 말하기를 사기』 「오기 찬에 믿음과 인과 청렴과 용기가 아니면 검을 논한 병서를 전할 수 없다.” 했다. 索隱복건이 말하기를 가문 대대로 검을 잘 썼다.” 했다. 살펴보니 풀이하였기 때문에 전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소림이 말하기를 “‘이라 쓴 것은 수박론을 말하여 그것을 풀이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안 것이다.” 했다.

 

[] 正義五怪反如淳云:「刺客傳之蒯聵也。」

[] 正義이다. 여순이 말하기를 자객전의 괴외이다.” 했다.

 

[] 集解蘇林曰:「郡守也。」

[] 集解소림이 말하기를 “‘는 군수이다.” 했다.

 

[] 集解徐廣曰:「一作』。」 索隱上音七各反下音紀釁反漢書作」。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풀이름 기)’로 쓴다.” 했다. 索隱위의 음은 이고, 아래 음은 (피 바를 흔)’이다. 한서에는 로 썼다.

 

[] 集解文穎曰:「趙孝成時。」

[] 集解문영이 말하기를 조나라 효성왕 때이다.” 했다.

 

[] 索隱下音尤李奇曰地名在咸陽西」。按三秦記其地後改為李里者也

[] 索隱아래 음은 (더욱 우)’이다. 이기가 말하기를 지명으로 함양 서쪽에 있다.” 했다. 삼진기를 살펴보니 그 땅은 후에 고쳐서 이리가 돤 곳이다.

 

[] 集解晉灼曰:「地名在鄠縣。」 索隱晉灼云在鄠縣非也案司馬遷碑在夏陽西北四里正義括地志云:「華池在同州韓城縣西南七十里在夏陽故城西北四里。」

[] 集解진작이 말하기를 지명으로 호현에 있다.” 했다. 索隱진작이 호현에 있다.” 했으나 아니다. 살펴보니 사마천의 비는 하양 서북쪽 4리에 있다. 正義】 『괄지지에 이르기를 화지는 동주 한성현 서남쪽 70리에 있고, 화양 옛 성은 서북쪽 4리에 있다.” 했다.

 

[] 索隱案晉譙國司馬無忌作司馬氏系本云蒯聵生昭豫昭豫生憲憲生卬

[0] 索隱나라 譙國 사마무기가 사마씨계본을 지었다. 괴외는 소예를 낳았고, 소예는 헌을 낳고, 헌은 앙을 낳았다.

 

[一一] 集解徐廣曰:「張耳傳云武臣自號武信君。」 索隱案漢書武臣號武信君

[一一]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장이전무신들이 스스로 무신군이라 이라 불렀다.” 했다. 索隱】 『한서를 살펴보니 무신을 무신군이라 불렀다.

 

[一二] 索隱漢書云項羽封卬為殷王

[一二] 索隱】 『한서항우가 앙을 봉하여 은왕을 삼았다.” 했다.


[一三] 索隱漢書作毋擇」,並音亦也

[一三] 索隱】 『한서毋擇이라 섰는데 모두 음이 이다.

 

[一四] 集解蘇林曰:「長安北門也。」瓚曰:「長安城無高門。」 索隱案蘇說非也案遷碑在夏陽西北去華池三里正義括地志云:「高門原俗名馬門原在同州韓城縣西南十八里漢司馬遷墓在韓城縣南二十二里夏陽縣故城東南有司馬遷冢在高門原上也。」

[一四] 集解소림이 말하기를 장안 북문이다.” 했다. 찬이 말하기를 장안 성에는 높은 문이 없다.” 했다. 索隱살펴보니 소림의 말은 잘못이다. 살펴보니 사마천의 비는 하양 서북쪽에 있는데 화지로부터 3리 떨어져 있다. 正義】 『괄지지“‘고문원의 속명은 마문원인데 동주 한성현 서남쪽 18리에 있다. 한나라 사마천의 묘는 한성현 남쪽 22리에 있다. 하양현 옛 성 동남쪽에 사마천의 무덤이 있는데 고문원 위이다.” 했다.


[一五] 集解如淳曰:「漢儀注太史公武帝置位在丞相上天下計書先上太史公副上丞相序事如古春秋遷死後宣帝以其官為令行太史公文書而已。」瓚曰:「百官表無太史公茂陵中書司馬談以太史丞為太史令。」索隱案茂陵書談以太史丞為太史令遷所著書尊其父云然稱太史公皆遷稱述其父所作其實亦遷之詞而如淳引衛宏儀注稱位在丞相上」,謬矣案百官表又無其官且修史之官國家別有著撰則令郡縣所上圖書皆先上之而後人不曉誤以為在丞相上耳正義虞喜志林云:「古者主天官者皆上公自周至漢其職轉卑然朝會坐位猶居公上尊天之道其官屬仍以舊名尊而稱也。」下文太史公既掌天官不治民有子曰遷」,又云卒三歲而遷為太史公」,又云太史公遭李陵之禍」,又云汝復為太史則續吾祖矣」,觀此文虞喜說為長乃書談及遷為太史公皆遷自書之漢舊儀云太史公秩二千石卒史皆秩二百石」。然瓚及韋昭桓譚之說皆非也以桓譚之說釋在武本紀也

集解여순이 말하기를 한의주석에 태사공은 무제 때 설치하였는데 지위는 승상의 위에 있다. 천하를 헤아리는 글은 먼저 태사공에게 올리고, 다음으로 승상에게 올리며 일을 차례하는 것은 옛 춘추와 같이 한다. 사마천이 죽은 후 선제는 그 관직을 령으로 하고, 태사공의 문서를 행하였을 뿐이다.’” 했다. 찬이 말하기를 백관표에 태사공이 없다. 무릉 중서 사마담이 태사승으로서 태사령이 되었다.” 했다. 索隱】 『무릉서를 살펴보니 사마담은 태사승으로서 태사령이 되었다.” 했는데 곧 은 사마천이 글을 지으면서 그 아버지를 높여 이라 한 것이다. 그러니 태사공이라 말한 것은 모두 사마천이 그 아버지가 지은 것이라 일컳어 서술하였지만 그 실제는 사마천의 말이고, 여순이 인용한 위광의 의주에서 지위가 승상의 위에 있다.” 한 것은 잘못이다. 백관표를 살펴보니 또한 그 관직이 없다. 또한 역사를 편찬하는 관직은 국가가 별도로 저술하고 편찬함이 있으니 곧 령은 군과 현이 올린 도서는 모두 먼저 그것을 올리는데 후세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잘못 승상의 위에 있다고 여겼을 뿐이다. 正義우희의 지림에 말하기를 옛날 천관이 주관한 것은 모두 공에게 올리는데 주나라에서부터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직책이 낮게 바뀌었으나 조회 때 앉는 자리는 지위가 오히려 공의 위에 머물렀다. 하늘의 도를 높여 그 관속들이 그대로 옛 이름으로 높여 일컳었다.” 했다. 살펴보니 아래 글에 태사공이 천관을 담당하면서부터 백성을 다스리지 않았으며 아들이 있었는데 사마천이라 하였다.” 했다. 또한 말하기를 삼년 만에 죽고 사마천이 태사공이 되었다.” 했다. 또한 말하기를 태사공이 이릉의 화를 만났다.” 했고, 또 말하기를 네가 다시 태사가 되었으니 곧 우리 조상을 이으라.”했으니 이 글을 관찰하면 우희가 말한 것이 장점이 된다. 곧 사마담과 사마천을 써서 태사공이라 한 것은 모두 사마천이 스스로 그것을 쓴 것이다. 한서의에 말하기를 태사공의 봉록은 이천 석이고, 졸사는 모두 봉록이 이백 석이다.” 했다. 그러나 찬과 위소, 환담의 말은 모두 잘못이다. 환담의 말은 해석이 무본기에 있다.


太史公學天官於唐都[]受易於楊何[]習道論於黃子[]太史公仕於建元元封之閒學者之不達其意而師悖[]乃論六家之要指曰

태사공이 당도에게 천관을 배우고, 양하에게 을 받았으며, 황자에게 도가의 이론을 익혔다. 태사공이 건원과 원봉의 사이에 벼슬하고 배우는 자가 그 뜻에 통달하지 못하고 스승을 거스를 것을 우려하여 이에 六家의 요지를 논하여 말하였다.

 

[] 正義天官書云星則唐都

[] 正義】 「천관서별은 곧 당도이다.” 했다.

 

[] 集解徐廣曰:「菑川人。」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치주 사람이다.” 했다.

 

[] 集解徐廣曰:「儒林傳曰黃生好黃老之術。」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유림전에 황생이 황노의 술을 좋아하였다.” 했다.

 

[] 正義布內反顏云:「惑也各習師書惑於所見也。」

[] 正義이다. 안이 말하기를 “‘는 미혹함이다. 각기 스승의 글을 익혀 본 바에 미혹한 것이다.” 했다.

 

易大傳[]天下一致而百慮同歸而殊塗。」夫陰陽道德此務為治者也直所從言之異路有省不省耳[]嘗竊觀陰陽之術大祥[]而眾忌諱使人拘而多所畏[]然其序四時之大順不可失也儒者博而寡要勞而少功是以其事難盡從然其序君臣父子之禮列夫婦長幼之別不可易也墨者[]儉而難遵是以其事不可遍循[]然其彊本節用不可廢法家嚴而少恩然其正君臣上下之分不可改矣名家使人儉而善失真[]然其正名實不可不察也道家使人精神專一動合無形贍足萬物[]其為術也因陰陽之大順采儒墨之善名法之要與時遷移應物變化立俗施事無所不宜指約而易操事少而功多儒者則不然以為人主天下之儀表也主倡而臣和主先而臣隨如此則主勞而臣逸至於大道之要去健羨[]絀聰明[]釋此而任術夫神大用則竭形大勞則敝形神騷動欲與天地長久非所聞也

주역대전천하가 하나를 이루어도 생각은 백가지이고, 돌아감은 같아도 길은 다르다.” 했다. 대저 음양, , , , , 도덕가들은 이에 힘써 다스림을 삼는 자들로 바로 말의 다른 길을 따르는 바이니 살피고 살피지 않음이 있을 뿐이다. 일찍이 음양의 술을 관찰한 적이 있는데 상서로움을 크게하여 삼가고 꺼림을 많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망설이고 주저하게 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많았다. 그러나 四時의 큰 순서의 단서가 되었으니 잃을 수 없다. 儒者는 널리 알지만 요점이 적어 수고롭되 공이 적으니 이 때문에 그 일로서 모두 따르기 어렵다. 그러나 군신과 부자의 예의 실마리가 되고, 부부와 장유의 구별을 나열하니 바꿀 수 없다. 墨者는 검소하되 따르기 어렵다. 이 때문에 그 일로서 두루 따를 수 없다. 그러나 그 근본에 힘쓰고 쓰는 것을 절약하니 하니 버릴 수 없다. 법가는 엄격하여 은혜가 적다. 그러나 군신 상하의 구분을 바로잡으니 바꿀 수 없다. 명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검소하게 하되 참됨을 잘 잃어버린다. 그러나 그 명분과 실제를 바로잡으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도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오로지 한가지에만 힘쓰게 하고, 움직임을 형상이 없음에 합하게 하니 충분히 만물을 도울 수 있다. 그 방법을 삼음에는 음양의 큰 따름으로 인하여 유가와 묵가의 좋은 점을 채택하고, 명가와 법가의 요점을 취하여 때와 함께 옮기고 사물의 변화에 알맞게 하며, 풍속을 세우고 일을 베는 바에 마땅하지 않은 바가 없어 가르침을 요약하고 조치를 쉽게 하니 일은 적으나 공은 많다. 유자는 곧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의 임금된 자는 천하의 모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임금이 부르면 신하는 화답하고, 임금이 앞서면 신하는 따른다. 이 같으면 곧 임금은 수고로워도 신하는 편안하다. 큰 도의 요점에 이르면 굳셈과 욕심을 버리고 총명을 물리치는 것이니 이를 풀어버리고 방법을 맡긴다. 대저 정신을 크게 쓰면 마르고, 형상()을 크게 수고롭게하면 피폐해진다. 형과 신이 소란스럽게 움직이면서 천지와 길고 오래 함께 하고자하는 것을 들은 바가 없다.


[] 集解張晏曰:「謂易繫辭。」 正義張晏云謂易繫辭」。下二句是繫辭文也

[] 集解장안이 말하기를 주역계사를 말한다.” 했다. 正義장안이 말하기를 주역계사를 말한다.” 했다. 살펴보니 아래 두 구는 이 계사의 글이다.


[] 索隱案六家同歸於正然所從之道殊塗學或有傳習省察或有不省者耳

[] 索隱살펴보니 六家가 같이 바름에 돌아가는 것이나 도를 따르는 길이 다르니 배우고, 혹은 전하고 익히며 살펴야 함이 있거나, 혹은 살펴보지 않는 자가 있을 뿐이다.


[] 集解徐廣曰:「一作』。」駰案李奇曰月令星官是其枝葉也」。索隱案漢書作大詳」,言我觀陰陽之術大詳而今此作」,於義為疏也正義顧野王云:「善也吉凶之先見也。」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이라 쓴다.” 했다. 인이 살펴보니 이귀가 말하기를 월령과 성관은 그 지엽이다.” 했다. 索隱살펴보니 한서에는 大詳이라 썼다. 내가 음양의 술을 크게 자세하게 관찰함을 말한다. 지금 여기서는 이라 섰으니 뜻과는 먼 것이 된다. 正義고야왕이 말하기를 “‘은 좋음이니 길흉을 먼저 보는 것이다.” 했다.

 

[] 正義言拘束於日時令人有所忌畏也

[] 正義날과 때에 구속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꺼리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 正義韋云:「墨翟之術也尚儉後有隨巢子傳其術也。」

[] 正義위가 말하기를 묵적의 술은 검소함을 숭상하였는데 뒤에 소자가 따라 그 술을 전함이 있었다.” 했다.

 

[] 索隱遍音遍遍循言難盡用也

[] 索隱의 음은 이다. ‘遍循은 모두 쓰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 索隱案名家流出於禮官古者名位不同禮亦異數孔子必也正名乎」。名家知禮亦異數是儉也受命不受辭或失其真也

[] 索隱명가는 예관에서 흘러 나왔다. 옛날에는 이름과 자리가 같지 않아 예가 또한 달랐으니 공자가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을 것이다.” 했다. 살펴보니 명가가 예를 안다는 것은 또한 달리하였으니 이것이 검소함이다. 명을 받았으되 를 받지 못함은 혹 그 참을 잃게 된다.


[] 索隱贍音巿豔反漢書作」,古今字異也

[] 索隱의 음은 (고울 염)’이다. 한서에는 (담박할 담)’이라 썼다. 옛과 지금이 글자를 달리하였다.

 

[] 集解如淳曰:「『知雄守雌』,是去健也。『不見可欲使心不亂』,是去羨也。」

[] 集解여순이 말하기를 “‘知雄守雌(굳센 사나이다운 적극적인 태도를 이해하면서 연약한 여자 같은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다 )’ 이것이 去健이고, ‘不見可欲使心不亂(욕심낼 만한 것을 보지 않아, 마음으로 하여금 어지럽지 않게 한다.)’ 이것이 去羨이다.” 했다.


[] 索隱如淳曰:「『不尚賢』,『絕聖棄智。」

[0] 索隱여순이 말하기를 “‘어진이를 숭상하지 않는다.’, ‘성인을 끊어 지혜를 버린다.’이다했다.

 

夫陰陽四時八位十二度二十四節[]各有教令順之者昌逆之者不死則亡未必然也故曰使人拘而多畏」。夫春生夏長秋收冬藏此天道之大經也弗順則無以為天下綱紀故曰四時之大順不可失也」。

대저 음양가는 四時, 八位, 십이도, 이십사절기는 각기 교령이 있는데 그것을 따르는 자는 번창하고, 그것을 거스르는 자는 죽지 않으면 곧 망하는데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사람으로 하여금 구속되게 하여 많이 두려워하게 한다.” 했다. 대저 봄에 나서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감춘다. 이것은 천도의 큰 법이니 따르지 않으면 곧 천하에 강기가 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四時의 큰 도리를 따르는 것은 잃을 수 없다.” 한 것이다.


[] 集解張晏曰:「八位八卦位也十二度十二次也二十四節就中氣也各有禁忌謂日月也。」

[] 集解장안이 말하기를 八位는 팔괘의 자리이다. 十二度12 차례이며, 二十四節은 기에 나아감이 알맞음이다. 각기 금기가 있으니 일월을 말한다.


夫儒者以六蓺為法六蓺經傳以千萬數累世不能通其學當年不能究其禮故曰博而寡要勞而少功」。若夫列君臣父子之禮序夫婦長幼之別雖百家弗能易也

대저 儒者六藝로서 법을 삼는다. 육예 경전은 천만을 헤아려 여러 세대가 지나도 그 배움을 통달하지 못하고, 당년에 그 예를 궁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널리 알되 요점은 적고, 수고롭되 공은 적다.”한 것이다. 대저 군신, 부자의 예를 나열하고 부부, 장유의 구별을 차례하는 것과 같은 것은 비록 백가일지라도 바꿀 수 없다.

 

墨者亦尚堯舜道言其德行曰:「堂高三尺[]土階三等茅茨不翦[]采椽不刮[]食土簋[]啜土刑[]糲粱之食[]藜霍之羹[]夏日葛衣冬日鹿裘。」其送死桐棺三寸[]舉音不盡其哀教喪禮必以此為萬民之率使天下法若此則尊卑無別也夫世異時移事業不必同故曰儉而難遵」。要曰彊本節用則人給家足之道也此墨子之所長雖百長弗能廢也

墨者는 또한 요와 순의 도를 숭상하고, 그 덕행을 말하기를 마루의 높이는 3척이고, 흙 계단은 세 단이며 띠풀로 지붕을 덮고 다듬지 않으며, 서까래를 채집하되 깍지 않는다. 밥은 흙 그릇으로 먹고, 흙 그릇으로 국을 마시며, 거친 기장밥을 먹으며, 명아주와 콩잎 국을 먹는다. 여름날에는 갈의를 입고, 겨울에는 사슴 가죽 갖옷을 입는다.” 했다. 그 죽음을 보낼(장례) 때는 3치두께의 오동나무 관을 쓰고, 소리를 들어도(곡을 하여도) 그 슬픔을 다하지 않는다. 상례를 가르칠 때는 반드시 이로서 만민의 솔선이 되게 하였다. 천하의 법이 이 같게 하면 곧 존비가 구별됨이 없을 것이다. 대저 세대가 다르고 때가 옮겨지고, 사업이 반드시 같지 않다. 그러므로 검소하되 따르기 어렵다.” 한 것이다. 요점은 근본을 굳게 하고 쓰는 것을 절약하면 곧 사람은 넉넉하고 집이 풍족해지는 도이다. 이는 묵자의 장점인 바이니 비록 백개의 장점으로도 버릴 수 없다.


[] 索隱案自此已下韓子之文故稱」。

[] 索隱살펴보니 여기서부터 이하는 한자의 글이다. 그러므로 이라 한 것이다.

 

[] 正義屋蓋曰茨以茅覆屋

[] 正義집의 지붕을 (가시나무 자)’라하니 띠풀로 지붕을 덮는 것이다.

 

[] 索隱韋昭云:「采椽櫟榱也。」 正義採取為椽不刮削也

[] 索隱위소가 말하기를 “‘采椽(상수리나무 역)(서까래 최)’ 이다.” 했다. 正義채취하여 서까래를 삼는데 깍지 않는다.

 

[] 集解徐廣曰:「一作』。」駰案服虔曰土簋用土作此器」。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라 썼다.” 했다. 인이 살펴보니 복건이 말하기를 “‘土簋(제기이름 궤)’이니 흙을 써서 이 그릇을 만든다.” 했다.

 

[] 正義顏云:「所以盛飯也所以盛羹也土謂燒土為之即瓦器也。」

[] 正義안이 말하기를 “‘는 밥을 담는 것이고, ‘은 국을 담는 것이다. ‘는 흙을 구워 그것을 만드니 곧 질그릇이다.” 했다.

 

[] 集解張晏曰:「一斛粟七斗米為糲。」瓚曰:「五斗粟三斗米為糲音剌。」韋昭曰:「礲也。」 索隱服虔云:「麤米也。」三倉云:「好粟。」 正義糲麤米也脫粟也粟也謂食脫粟之麤飯也

[] 集解장안이 말하기를 一斛(10)이라 하고, 7두를 (현미 려)’라 한다.” 했다. 찬이 말하기를 “5두의 3두의 라 한다. 음은 (어그러질 랄)’이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목구명 롱)’이다.” 했다. 索隱복건이 말하기를 “‘는 거친 쌀이다.” 했다. 삼창이 말하기를 “‘(기장 양)’은 좋은 조이다.” 했다. 正義는 거친 쌀인데 껍질을 벗긴 조이다. ‘은 조이다. 껍질을 벗긴 조의 거친 밥을 먹는 것을 말한다.

 

[] 正義藜似藿而表赤豆葉也

[] 正義(명아주 려)’(콩잎 곽)’과 비슷한데 표면이 붉다. ‘은 콩 잎이다.

 

[] 正義以桐木為棺厚三寸也

[] 正義오동나무로 관을 만드는데 두께가 3치이다.

 

法家不別親疏不殊貴賤一斷於法則親親尊尊之恩絕矣[]可以行一時之計而不可長用也故曰嚴而少恩」。若尊主卑臣明分職不得相踰越雖百家弗能改也

법가는 친하고 소원한 이를 구별하지 않고, 귀천을 달리하지 않고, 한결같이 법으로 결단하니 친한 이와 친하고 나이 많은 이를 높이는 은혜를 끊었다. 일시의 계책을 행할 수는 있지만 길게 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엄격하고 은혜가 적다.” 한 것이다. 만약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며, 명분과 직분을 분명하게 하여 서로 넘지 못하게 한다면 비록 百家(다른 학파)라 할지라도 바꿀 수 없다.

 

[] 索隱案親親父為首尊尊君為首也

[] 索隱살펴보니 예에 親親은 아버지를 우선으로 삼고, ‘尊尊은 임금을 우선으로 삼는다.

 

名家苛察繳繞[]使人不得反其意專決於名而失人情故曰使人儉而善失真」。若夫控名責實參伍不失[]此不可不察也

명가는 뒤얽혀 어지러운 것을 철저히 살펴 사람으로 하여금 그 뜻을 돌이키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명분에서 결단하여 인정을 잃는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넉넉하지 않게 하여 참됨을 잃는다.” 했다. 대저 이름과 실상이 서로 들어맞게 하는 것 같은 것은 이리저리 뒤섞여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서로 비교하여 맞추는 것으로 잃을 수 없으니 이는 살피지 않을 수 없다.

 

[] 集解服虔曰:「繳音近叫呼謂煩也。」如淳曰:「繳繞猶纏繞不通大體也。」

[] 集解복건이 말하기를 “‘(주살 줄 격)’의 음은 (부르짖을 규)’에 가까우니 번잡함을 이른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繳繞纏繞(둘둘 감다)’와 같으니 大體와는 통하지 않는다.

 

[] 集解晉灼曰:「引名責實參錯交互明知事情。」

[] 集解진작이 말하기를 명분을 이끌어 실정을 따져 밝히고, 이리저리 뒤섞여 어지러운 것을 서로 비교하여 가지런하게 하여 사정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했다.

 

道家無為又曰無不為[]其實易行[]其辭難知[]其術以虛無為本以因循為用[]無成埶無常形故能究萬物之情不為物先不為物後[]故能為萬物主有法無法因時為業[]有度無度因物與合[]故曰聖人不朽時變是守[]虛者道之常也因者君之綱[]群臣並至使各自明也其實中其聲者謂之端實不中其聲者謂之窾[]窾言不聽姦乃不生賢不肖自分白黑乃形在所欲用耳何事不成乃合大道混混冥冥[一一]光燿天下復反無名凡人所生者神也所託者形也神大用則竭形大勞則敝形神離則死死者不可復生離者不可復反故聖人重之由是觀之神者生之本也形者生之具也[一二]不先定其神[]而曰我有以治天下」,何由哉

道家無爲(함이 없다)를 말하고, 또한 無不爲(하지 않음이 없다.)를 말하니 실제로는 행하기 쉬우나 그 말은 알기 어렵다. 그 학술은 虛無로서 근본을 삼고, 자연에 순응하는 것을 으로 삼는다. 이루어진 형세도 없고, 항상하는 형상도 없다. 그러므로 만물의 실정을 궁구할 수 있다. 사물을 우선하지 않고, 사물을 뒤로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만물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법은 있지만, 법은 없어 때를 따라 일한다. 헤아림이 있지만 헤아림 없어 사물을 따라 더불어 부합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성인은 썩지 않고, 때의 변화를 따라 이를 지킨다. ‘는 도의 항상됨이고, 은 임금의 벼리이다.” 했다. 여러 신하들이 함께 이르니 각기 스스로 밝히게 한다. 그 실상이 그 명성에 알맞은 것을 이라 하고, 실상이 그 명성에 맞지 않은 것을 (빌 관)’이라 한다. ‘窾言(공허한 말)’을 듣지 않으니 간악함이 이에 생겨나지 않고, 현명하고 어리석음이 스스로 구분되니 이 이에 형상한다. 쓰고자 하는 바에 달려있을 뿐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할까? 이에 큰 도에 합하니 음과 양이 뒤섞여 혼돈스럽고 높고 아득한 하늘에서 천하를 밝게 비추어 다시 無名에 돌아간다. 무릇 사람을 나게 하는 바는 이고, 의탁하는 바는 이다. ‘은 크게 쓰면 곧 다하고, ‘은 크게 수고하면 곧 피폐해지니 은 떨어져 곧 죽는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떠난 것은 다시 올아올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것을 중요시한다. 이로 말미암아 관찰하면 은 삶의 근본이고, ‘은 삶의 도구이다. 먼저 그 ()’을 안정시키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천하를 다스릴 방도가 있다.” 말한다면 어디에 말미암은 것인가?


[] 正義無為者守清淨也無不為者生育萬物也

[] 正義無爲는 맑고 깨끗함을 지키는 것이다. ‘無不爲는 만물을 生育한다.

 

[] 正義各守其分故易行也

[] 正義각기 그 분수를 지키기 때문에 행하기 쉽다.

 

[] 正義幽深微妙故難知也

[] 正義그윽하고 깊으며, 미묘하기 때문에 알기 어렵다.


[] 正義任自然也

[] 正義자연에 맡기는 것이다.

 

[] 集解韋昭曰:「因物為制。」

[] 集解위소가 말하기를 사물로 인하여 제재함이다.” 했다.

 

[] 正義因時之物成法為業

[] 正義때의 사물을 따라 법을 이루는 것을 으로 삼는다.


[] 正義因其萬物之形成度與合也

[] 正義그 만물의 형태로 인하여 도와 합함을 이룬다.

 

[] 索隱故曰聖人不朽因者君之綱」,此出鬼谷子遷引之以成其章故稱故曰正義言聖人教跡不朽滅者順時變化

[] 索隱故曰聖人不朽(그러므로 말하기를 성인이 썩지 않는다.)”에서 因者君之綱(인은 임금의 벼리)”에 이르기까지 이는 귀곡자에서 나온 것을 사마천이 그것을 인용하는 것으로서 그 문장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故曰이라 일컳었다. 正義성인의 가르침과 자취가 썩어 없어지지 않는 것은 때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 正義言因百姓之心以教唯執其綱而已

[] 正義】 【正義백성의 마음을 따라 가르쳐서 오직 그 벼리를 잡을 뿐임을 말한 것이다.

 

[] 集解徐廣曰:「音款空也。」駰案李奇曰聲別名也」。索隱窾音款漢書作」。空也故申子云款言無成是也聲者名也以言實不稱名則謂之空空有聲也

[0]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음은 (정성 관)’이니 빈 것이다.” 했다. 인이 살펴보니 이기가 말하기를 “‘을 구별한 것이다.” 했다. 索隱(빌 관)’의 음은 이다. 한서이라 썼다. ‘은 빈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말하기를 “‘은 이룸이 없다는 말이다.” 한 것이 이것이다. ‘이다. 실제로서 말하고 명을 말하지 않았으니 곧 이라 말하고, 은 소리가 있다.

 

[一一] 正義上胡本反混混者元氣神者之貌也

[一一] 正義위는 이다. ‘混混은 원기()의 모습이다.

 

[一二] 集解韋昭曰:「聲氣者神也枝體者形也。」

[一二] 集解위소가 말하기를 “‘聲氣이다. ‘枝體이다.” 했다.

 

太史公既掌天官不治民有子曰遷

태사공은 천관을 관장하고 나서부터는 백성을 다스리지 않았다. 아들이 있었는데 (사마천)’이라 했다.

 

遷生龍門[]耕牧河山之陽[]年十歲則誦古文[]二十而南游江上會稽探禹穴[]闚九疑[]浮於沅[]北涉汶[]講業齊魯之都觀孔子之遺風鄉射鄒厄困鄱[]彭城過梁楚以歸於是遷仕為郎中奉使西征巴蜀以南南略邛昆明還報命[]

사마천은 용문에서 태어나 하산의 남쪽에서 농사와 목축을 하였다. 10세에 고문에 능통하였다. 20세에 남쪽으로 강, 회수를 유람하고, 회계에 올라 우 임금의 무덤을 탐방하고 구의를 엿보며, 원수와 상수에서 배를 탔다. 북쪽으로 문수와 사수를 건너 제나라와 노나라의 도읍에서 수업을 듣고, 공자의 유풍과 향사례를 추와 역산에서 관찰하고 파와 설, 팽성에서 어려움을 겪고, 양과 초를 지나 돌아왔다. 이에 사마천이 벼슬하여 낭중이 되고 병을 받들고 서쪽으로 파와 촉 이남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공과 작, 곤명을 공략하고 돌아와 명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 集解徐廣曰:「在馮翊夏陽縣。」駰案蘇林曰禹所鑿龍門也」。正義括地志云:「龍門在同州韓城縣北五十里其山更黃河夏禹所鑿者也龍門山在夏陽縣遷即漢夏陽縣人也至唐改曰韓城縣。」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풍익 하양현에 있다.” 했다. 인이 살펴보니 소림이 말하기를 우임금이 용문을 둟었다.” 했다. 正義】 『괄지지용문은 동주 한성현 북쪽 50리에 있다. 그 산은 황하가 지나고 하나라 우왕이 뚫은 것이다. 용문산은 하양현에 있는데 사마천은 곧 한나라 하양현 사람이다. 당나라에 이르러 고쳐 한성현이라 했다.” 했다.

 

[] 正義河之北山之南也在龍門山南也

[] 正義하의 북쪽은 산의 남쪽이다. 살펴보니 용문산 남쪽에 있다.

 

[] 索隱案遷及事伏生是學誦古文尚書劉氏以為左傳國語系本等書是亦名古文也

[] 索隱살펴보니 사마천이 복생을 섬겨서 이에 고문상서를 배우고 외웠다. 유씨는 좌전, 국어, 계본등의 글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또한 고문이라 이름하였다.


[] 集解張晏曰:「禹巡狩至會稽而崩因葬焉上有孔穴民閒云禹入此穴。」 索隱越絕書云:「禹上茅山大會計更名曰會稽。」張勃吳錄云:「本名苗山一名覆釜禹會諸侯計功改曰會稽上有孔號曰禹穴也。」正義括地志云:「石箐山一名玉笥又名宛委山即會稽山一峰也在會稽縣東南十八里吳越春秋云禹案黃帝中經九山東南天柱號曰宛委赤帝左闕之填承以文玉覆以盤石其書金簡青玉為字編以白銀皆瑑其文禹乃東巡登衡山血白馬以祭禹乃登山仰天而笑忽然而臥夢見繡衣男子自稱玄夷倉水使者卻倚覆釜之山東顧謂禹曰:「欲得我山神書者齊於黃帝之岳[]之下三月季庚登山發石。」禹乃登宛委之山發石乃得金簡玉字以水泉之脈山中又有一穴深不見底謂之禹穴』。史遷云上會稽探禹穴』,即此穴也。」

우왕이 이에 동쪽으로 순수하여 형산에

[] 集解장안이 말하기를 우가 순수하다 회계에 이르러 죽었으므로 여기에 장례하였다. 위에는 구멍이 있는데 민간에서 우 임금이 이 구멍으로 들어갔다.” 했다. 索隱】 『월절서우 임금이 모산에 올라 크게 모임을 계획하였으므로 고쳐서 회계라 하였다. 위에 구멍이 있는데 부르기를 우혈이라 한다.” 했다. 장발의 오록본래 이름은 묘산인데 일명 북부라 하며, 우 임금이 제후를 모아 공을 헤아렸으므로 고쳐 회계라 했다. 위에 구멍이 있는데 우혈이라 부른다.” 했다. 正義】 『괄지지석청산은 일명 옥사산이라 하고, 또한 완위산이라 이름하는데 곧 회계산의 한 봉우리로 회계현 동남쪽 18리에 있다. 오월춘추우 임금이 황제중경을 살펴보니 九山은 동남쪽의 천주산완위산이라 불렀고, 적제가 왼쪽 빠진 곳을 메꾸려 무늬 있는 옥으로 받들고 반석으로 덮었는데 그 글은 금으로 꾸민 간에 청옥으로 글자를 쓰고, 백은으로 엮었으니 모두 그 글을 홀에 아로새겼다. 올라 백마를 잡은 피로 제사하였다. 우왕이 이에 산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 웃다가 갑자기 누웠는데 꿈에 수놓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스스로 현이 창수의 사자라 일컳고는 물러나 복부산에 기대 동쪽을 바라보면서 우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산신의 글을 얻고자 하는 자는 황제의 산 바위 아래서 제사하고, 삼월 말의 경일에 산에 올라 돌을 들추어라.” 했다. 우왕이 이에 완위산에 올라 돌을 들추어 곧 금으로 만든 간자에 옥 글자를 얻고, 물과 샘의 맥을 찾았다. 산 안에 또한 한 구멍이 있어 깊이가 바닥을 볼 수 없었는데 그것을 우혈이라 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회계에 올라 “‘우혈을 살폈다.” 한 것은 곧 이 구멍이다. 했다.

 

[] 索隱山海經云:「南方蒼梧之丘蒼梧之泉在營道南其山九峰皆相似故曰九疑。」張晏云:「九疑舜葬故窺之。」尋上探禹穴蓋以先聖所葬處有古冊文故探窺之亦搜採遠矣正義九疑山在道州

[] 索隱】 『산해경남쪽 창오의 언덕과 창오의 샘은 영도 남쪽에 있는데 그 산은 9개의 봉우리가 모두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구의산이라 한다,” 했다. 장안이 말하기를 구의산은 순 임금을 장례한 곳이므로 살펴 본 것이다.” 했다. 우혈을 찾아올라 본 것은 대개 앞의 성인을 장례한 곳이 옛 책의 글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았고, 또한 멀리에서 찾은 것이다. 正義구의산은 도주에 있다.


[] 正義沅水出朗州湘水出道州北東北入海

[] 正義원수는 낭주에서 나온다. 상수는 도주 북쪽에서 나오는데 동북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 正義兩水出兗州東北而南歷魯

[] 正義두 물은 연주 동북쪽에서 나와 남쪽으로 노나라를 지난다.

 

[] 集解徐廣曰:「嶧音亦縣名有山也鄱音皮薛三縣屬魯。」 索隱鄱本音蕃今音皮田襃魯記云靈帝末有汝南陳子游為魯相子游太尉陳蕃子也國人諱而改焉」。若如其說」,鄱皮聲相近後漸訛耳然地理志魯國蕃縣應劭曰邾國也音皮正義鄒縣名山名嶧山在鄒縣北二十二里地近曲阜於此行鄉射之禮括地志云:「徐州滕縣漢蕃縣音翻漢末陳蕃子逸為魯相改音皮田襃魯記曰靈帝末汝南陳子斿為魯相陳蕃子也國人為諱而改焉』。」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산이름 역)’의 음은 이니 현의 이름으로 산이 있다. ‘(고을 이름 파)’의 음은 이다. , , 설 세 현은 노나라에 속한다.” 했다. 索隱의 본래 음은 (우거질 번)’인데 지금의 음은 이다. 살펴보니 전포의 노기영제 말 여남의 진자유가 노의 재상이 되었는데 자유는 태위 진번의 아들로 나라 사람들이 꺼렸으므로 고쳤다.” 했다. 만약 그 말과 같다면 곧 라 고쳤고, ‘는 소리가 서로 비슷하여 후에 점점 잘못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리지노국 번현이 있는데 응소는 주국이라 말하고, 음은 이다.” 했다. 正義는 현 이름이다. ‘은 산 이름이다. 역산은 추현 북쪽 22리에 있는데 땅이 곡부와 가까우니 이에 향사례를 행한 것이다. 괄지지서주 등현은 한의 번현인데 음은 (날 번)’이다. 한 말에 진번의 아들 일이 노의 재상이 되자 음을 로 고쳤다. 전포의 노기열제 말 여남 진자유가 노의 재상이 되었으니 진번의 아들이다. 나라 사람들이 꺼려하자 고쳤다.’” 했다.

 

[] 集解徐廣曰:「元鼎六年平西南夷以為五郡其明年元封元年是也。」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원정 6년 서남이를 평정하고 다섯 군을 만들었다. 그 다음 해는 원봉 1년이 이것이다.” 했다.

 

是歲天子始建漢家之封而太史公留滯周南[]不得與從事[]故發憤且卒而子遷適使反見父於河洛之閒太史公執遷手而泣曰:「余先周室之太史也自上世嘗顯功名於虞夏典天官事後世中衰絕於予乎汝復為太史則續吾祖矣今天子接千歲之統封泰山而余不得從行是命也夫命也夫余死汝必為太史為太史無忘吾所欲論著矣且夫孝始於事親中於事君終於立身揚名於後世以顯父母此孝之大者夫天下稱誦周公言其能論歌文武之德宣周邵之風達太王王季之思慮爰及公劉以尊后稷也幽厲之後王道缺禮樂衰孔子脩舊起廢論詩書作春秋則學者至今則之自獲麟以來四百有餘歲[]而諸侯相兼史記放絕今漢興海內一統明主賢君忠臣死義之士余為太史而弗論載廢天下之史文余甚懼焉汝其念哉!」遷俯首流涕曰:「小子不敏請悉論先人所次舊聞弗敢闕。」

이해 천자가 처음으로 한나라 황실의 封禪을 세웠는데 태사공이 주남에 머물러 참여하여 종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번민이 일어나서 또한 죽게 되었다. 아들 사마천이 마침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하수와 낙수 사에서 아버지를 뵈었다. 태사공이 사마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의 선조는 주나라 왕실의 태사이다. 윗세대로부터 일찍이 虞夏에서 공과 이름이 드러났으며 천관의 일을 담당하였다. 후세 중에 쇠하여 나에게서 끊어지는가? 네가 다시 태사가 되어 곧 우리 조상을 이으라. 지금 천자가 천년의 전통을 계승하여 태산에서 봉선의 의식을 진행하는데 나는 따라 갈 수 없으니 이는 천명일 것이라 천명일 것이라!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라. 태사가 되면 내가 논하여 저술하려하던 것을 잊어버림이 없게 하라. 또한 저 효도는 어버이를 섬김에서 시작하여 다음으로 임금을 섬기고, 마지막에 몸을 세워 후세에 이름을 떨치는 것으로서 부모를 드러내면 이는 효도의 큰 것이다. 저 천하가 주공을 칭송하는 것은 그가 문왕과 무왕의 덕을 논하여 노래할 수 있었고, 주남과 소남의 풍속을 펴고, 태왕과 왕계의 생각을 전달하고, 이에 공유에게 미치는 것으로서 후직을 높였던 것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유왕과 여왕 뒤에는 왕도가 빠지고 예와 악이 쇠하였는데 공자가 옛 것을 다듬고, 없어진 것을 일으키며 시와 서를 논하며 춘추를 지었으니 곧 배우는 자들이 지금에도 그것을 본받는다. 기린을 잡음으로부터 이래로 400여년이 지나 제후들이 서로 겸병하여 사관의 기록이 흩어지고 끊어졌다. 지금 한 나라가 일어나 천하를 하나로 통합하였는데 밝은 임금과 어진 임금, 충신, 의에 죽는 선비들을 내가 태사가 되어 논하여 싣지 않는다면 천하의 역사와 글이 없어질 것이다. 내가 이것을 매우 두려워하니 너는 그것을 생각하라!” 했다. 내가(사마천) 어리를 숙이고 울면서 말하기를 소자가 명민하지 못하니 先人이 옛 것을 듣고 차례 한 것을 모두 논하여 감히 빠트리지 않을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 集解徐廣曰:「摯虞曰古之周南今之洛陽。」 索隱張晏云:「自陝已東皆周南之地也。」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지우가 말하기를 옛날의 주남은 지금의 낙양이다.” 했다. 索隱장안이 말하기를 섬 이동으로부터는 모두 주남의 땅이다.” 했다.

 

[] 正義與音預

[] 正義의 음은 (미리 예)’이다.

 

[] 集解駰案年表魯哀公十四年獲麟至漢元封元年三百七十一年

[] 集解인이 살펴보니 연표노나라 애공 14년 기림을 잡았다.’하니 한 원봉 1년까지는 371년이다.

 

卒三歲而遷為太史令[]史記[]石室金匱之書[]五年而當太初元年[]十一月甲子朔旦冬至天曆始改建於明堂諸神受紀[]

(태사공)이 죽은 지 3년이 지나 내가(사마천) 태사령이 되어 역사의 기록과 석실과 금궤의 글들을 편철하였다. 5년이 지난 태초 111월 갑자 초하루 아침 동지에 역법을 처음 고쳐서 명당에 세우고 여러 신들에게 천하가 다시 시작 되었음을 고하였다.


[] 索隱博物志:「太史令茂陵顯武里大夫司馬遷年二十八三年六月乙卯除六百石。」

[] 索隱】 『박물지태사령무릉현무리대부 사마천은 나이 28세이고, 36월 을묘에 제수하고 봉록은 600석이다.” 했다.

 

[] 集解徐廣曰:「紬音抽。」 索隱如淳云:「抽徹舊書故事而次述之。」徐廣音抽小顏云:「紬謂綴集之也。」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명주 주)’의 음은 (맬 추)’이다.” 했다. 索隱여순이 말하기를 옛글과 옛 일을 뽑아 통하게 하고 차례로 그것을 서술하는 것이다.” 했다. 서광은 음이 이다.” 했고, 소안은 “‘는 엮고 모으는 것을 말한다.” 했다.

 

[] 索隱案石室金匱皆國家藏書之處

[] 索隱살펴보니 석실, 금궤는 모두 국가가 소장한 글이 있는 곳이다.

 

[] 集解李奇曰:「遷為太史後五年適當於武帝太初元年此時述史記。」 正義案遷年四十二歲

[] 集解이기가 말하기를 사마천이 태사가 되고 5년 후가 마침 무제 태초 1년에 해당하는데 이 때 사기를 서술하였다.” 했다. 正義살펴보니 사마천의 나이 42세이다.

 

[] 集解徐廣曰:「封禪序曰封禪則萬靈罔不禋』。」駰案韋昭曰告於百神與天下更始著紀於是」。索隱虞喜志林云:「改曆於明堂之於諸侯諸侯群神之主故曰諸神受紀』。」孟康云:「句芒祝融之屬皆受瑞紀。」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봉선서문에 봉선은 곧 온갖 신령스러운 이에게 제사 하지 않음이 없다.’” 했다. 인이 살펴보니 위소는 온갖 신에게 고하여 천하와 함께 다시 시작되어 여기에 를 드러낸다.” 했다. 索隱우희의 지림역법을 명당에서 고치고 제후에게 나누어주었다. 제후들은 여러신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諸神受紀라 한 것이다.” 했다. 맹강이 말하기를 “‘구망’, 축융의 등속이 모두 상서로운 를 받는다.” 했다.

 

太史公曰:「先人有言[]自周公卒五百歲而有孔子孔子卒後至於今五百歲[]有能紹明世正易傳繼春秋本詩書禮樂之際?』意在斯乎意在斯乎小子何敢讓焉。」[]

태사공이 말하기를 선인의 말이 있다. ‘주공이 죽고 500년이 지나 공자가 있었다. 공자가 죽은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500년으로 밝은 세상을 이을 수 있었고, 역과 전을 바로잡으며, 춘추를 계승하며 시, , , 악의 때를 근본할 수 있을까?’ 하셨다. 뜻이 여기에 있었는가! 뜻이 여기에 있었던가! 소자가 어찌 감히 이것을 사양하리오.”


[] 索隱先人謂先代賢人也正義太史公司馬遷也先人司馬談也

[] 索隱선인은 선대의 현명한 사람이다. 正義태사공은 사마천이다. ‘선인은 사마담이다.

 

[] 索隱按孟子稱堯舜至湯五百餘歲湯至文王五百餘歲文王至孔子五百餘歲太史公略取於孟子而楊雄孫盛深所不然所謂多見不知量也以為淳氣育才豈有常數五百之期何異瞬息是以上皇相次或有萬齡為閒而唐堯禹比肩並列降及周室聖賢盈朝孔子之沒千載莫嗣安在於千年五百乎具述作者蓋記注之志耳豈聖人之倫哉

[] 索隱살펴보니 맹자가 요와 순을 일컳고 탕에 이르기까지 500여년이고, 탕에서 문왕에 이르기까지가 500여년이고, 문왕에서 공자에 이르기까지가 500여년이다. 살펴보니 태사공이 대략 맹자에서 취하였으나, 양웅, 손성은 깊이 그렇지 않았으니 이른바 많이 보고도 헤아릴 줄 모른다는 것이다. 순박한 기운으로 인재를 기르는데 어찌 항상된 수가 있다 할 것이며, 오백년의 기간이 어찌 눈 깜박임과 다르리오. 이 때문에 윗대의 황제가 서로 차례로 잇고, 혹은 만년이 사이가 있기도 하고, 당요와 순, 우가 어깨를 나란히 나열되는 것이다. 내려가 주나라에 이르러 성현이 조정에 가득찼다. 공자가 죽고 천년을 이음이 없었는데 어찌 천년 오백년이 있겠는가? 모두 갖추어 서술하고 지은 것은 대개 기록하고 주석하려는 뜻일 뿐 어찌 성인의 차례이겠는가.


[] 索隱讓漢書作」。晉灼云:「此古言己當述先人之業何敢自嫌值五百歲而讓也。」

[] 索隱한서(물리칠 양)’이라 썼다. 진작이 말하기를 이는 옛 자이니 이미 선인의 업적을 서술하면서 어찌 감히 스스로 오백년의 가치를 의심하여 사양하겠는가.” 했다.


上大夫壺遂[]:「昔孔子何為而作春秋哉?」太史公曰:「余聞董生曰[]周道衰廢孔子為魯司寇諸侯害之大夫壅孔子知言之不用道之不行也是非二百四十二年[]之中以為天下儀表天子退諸侯討大夫以達王事而已矣。』子曰:『我欲載之空言[]不如見之於行事之深切著明也。』[]夫春秋上明三王之道下辨人事之紀別嫌疑明是非定猶豫善善惡惡[]賢賢賤不肖存亡國繼絕世補敝起廢王道之大者也易著天地陰陽四時五行故長於變禮經紀人倫故長於行書記先王之事故長於政詩記山川谿谷禽獸草木牝牡雌雄故長於風樂樂所以立故長於和春秋辯是非故長於治人是故禮以節人樂以發和書以道事詩以達意易以道化春秋以道義亂世反之正莫近於春秋春秋文成數萬其指數千[]萬物之散聚皆在春秋春秋之中弒君三十六亡國五十二諸侯奔走不得保其社稷者不可勝數察其所以皆失其本已[]故易曰失之豪釐差以千里』。[]故曰臣弒君子弒父非一旦一夕之故也其漸久矣』。故有國者不可以不知春秋前有讒而弗見後有賊而不知為人臣者不可以不知春秋守經事而不知其宜遭變事而不知其權為人君父而不通於春秋之義者必蒙首惡之名為人臣子而不通於春秋之義者必陷篡弒之誅死罪之名其實皆以為善為之不知其義[]被之空言而不敢辭[一一]夫不通禮義之旨至於君不君臣不臣父不父子不子夫君不君則犯[一二]臣不臣則誅父不父則無道子不子則不孝此四行者天下之大過也以天下之大過予之則受而弗敢辭故春秋者禮義之大宗也夫禮禁未然之前法施已然之後法之所為用者易見而禮之所為禁者難知。」

상대부 대호수가 말하기를 옛날 공자가 무엇을 위해 춘추를 지었는가?” 하니 태사공이 말하기를 내가 동중서에게 들었는데 말하기를 주나라의 도가 쇠퇴하여 없어지고,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가 되니 제후들은 그를 해치려 하고, 대부들은 그를 막았다. 공자가 말이 쓰이지 않고, 도가 행해지지 않을 것을 알고는 242년 안에 옳고 그름으로서 천하의 본보기로로 삼고, 천자를 낮추고, 제후를 물리치며, 대부를 성토하는 것으로써 왕사에 도달하고자 했을 뿐이다.’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빈말을 싣고자 하였지만, 정사를 행한 것을 깊고 간절하게 하여 분명히 드러내는 것을 보는 것이 낫다.’하였다. 춘추는 위로 삼왕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 인사의 벼리를 판별하며, 의심나는 것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을 밝히며, 의심스러워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결정하며, 선한 이를 좋아하고, 악한 이를 미워하며 현명한 이를 현명하다하고, 어리석은 이를 천하게 하며 망한 나라를 보존하고 끊어진 세대를 이으며 헤진 것은 돕고 없어진 것은 일으키는 것이 왕도의 큰 것이다. 주역은 천지, 음양, 四時, 오행을 드러내기 때문에 변함에서 장점이 있다. 예기는 인륜에 통하기 때문에 행함에 장점이 있고, 서경은 선왕의 일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정사에 장점이 있다. 시경은 산천, 계곡, 금수, 초목, 짐승의 암수, 새의 암수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풍속에 장점이 있다. 은 즐거움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에 장점이 있다. 춘추는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때문에 사람을 다스리는데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예로서 사람을 절제하고, 악으로서 를 펴고, 서경으로서 일을 인도하고, 시경으로서 뜻에 도달하고, 주역으로서 변화를 인도하며, 춘추로서 의리를 인도한다.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정으로 되돌리는 것으로는 춘추보다 좋은 것이 없다. 춘추의 글은 수만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가르침은 수천이다. 만물의 흩어지고 모이는 것이 모두 춘추에 있다. 춘추안에는 임금을 시해 한 것이 36,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52, 제후가 달아나 그 사직을 보존하지 못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까닭을 살펴보면 모두 그 근본을 잃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주역에 말하기를 잘못이 가을 짐승의 털끝이나 차이는 천리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시해한 것은 하루아침 하루 저녁의 일이 아니며, 점진적이 것이 오래되었다.’ 했다. 그러므로 나라를 소유한 자는 춘추를 알지 않으면 안되며, 앞에서 참소함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뒤에서 해침이 있어도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신하된 자는 춘추를 알지 않으면 안되며, 경전의 일을 지키면서도 그 마땅함을 알지 못하며 변란의 일을 만나도 그 임시방편을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임금과 아버지가 되어 춘추의 뜻에 통하지 못한 자는 반드시 가장 악하다는 이름을 쓰게 된다. 다른 사람의 신하와 자식이 되어 춘추의 뜻에 통하지 못한 자는 반드시 찬탈하고 시해의 죽임에 빠져 죽을죄를 지었다는 이름을 얻는다. 실제는 모두 선이라 여겨 그것을 행하는 것은 그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니 빈말을 입어도 감히 변명하지 못한다. 대저 예의의 뜻에 통하지 않으면 임금은 임금답지 않고, 신하는 신하답지 않고, 아버지는 아버지답지 않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함에 이른다. 대저 임금이 임금답지 않으면 곧 범해지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곧 죽임을 당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않으면 곧 무도해지고, 자식이 자식답지 않으면 곧 불효한다. 이 네 가지를 행하는 것은 천하의 큰 허물이다. 천하의 큰 허물이라 허여함을 받아도 감히 변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춘추는 예와 의리의 큰 종주이다. 대저 에는 아직 그렇게 되기 전에 금하고, 법은 이미 적용된 이후입니다. 법을 적용하는 것은 쉽게 보이나 예의 금지하는 바를 알기는 어렵다.” 했다.


[] 索隱案遂為詹事秩二千石故為上大夫也

[] 索隱살펴보니 호수는 첨사가 되었는데 봉록이 2천석이기 때문에 상대부라 한 것이다.

 

[] 集解服虔曰:「仲舒也。」

[] 集解복건이 말하기를 중서이다.” 했다.

 

[] 索隱案是非謂褒貶諸侯之得失也

[] 索隱살펴보니 是非는 제후의 득실을 기리거나 낮추는 것을 말한다.

 

[] 索隱案孔子之言見春秋緯太史公引之以成說也空言謂褒貶是非也空立此文而亂臣賊子懼也

[] 索隱살펴보니 공자의 말은 춘추위에 보이는데 태사공이 인용하여 말을 이루었다. ‘空言은 옳은 일을 한 자는 기리고, 잘못한 자는 낮추는 것을 말한다. 다만 이런 글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亂臣賊子(나라를 어지럽히고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자식)가 두려워하였다.

 

[] 索隱案孔子言我徒欲立空言設褒貶則不如附見於當時所因之事人臣有僭侈篡逆因就此筆削以褒貶深切著明而書之以為將來之誡者也

[] 索隱살펴보니 공자가 내가 한갓 빈말을 세워 기리고 낮춤을 베풀고자 하는 것은 곧 당시 인한 바의 일을 붙여 나타내는 것만 못함을 말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신하된 자로 지나치게 사치하거나 빼앗고 거스름이 있기 때문에 붓으로 쓰고 깍는 것으로서 기리거나 낮추기를 깊고 간절히 드러내어 밝히고, 써서 장래의 경계로 삼는 것이다.


[] 索隱公羊傳曰善善及其子孫惡惡止其身

[] 索隱】 『춘추공양전선을 좋아하면 그 자손에게 미치고, 악한 이를 미워하면 그 자신에서 그친다.

 

[] 集解張晏曰:「春秋萬八千字當言』,而云成數』,字誤也。」駰謂太史公此辭是述董生之言董仲舒自治公羊春秋公羊經傳凡有四萬四千餘字故云文成數萬不得如張議但論經萬八千字便謂之誤索隱案張晏曰春秋萬八千字此云文成數萬』,字誤也」。裴駰以遷述仲舒所論公羊經傳凡四萬四千故云數萬」,又非也小顏云史遷豈以公羊傳為春秋乎」?又春秋經一萬八千亦足稱數萬非字之誤也

[] 集解장안이 말하기를 춘추만팔천 자는 마땅히 줄여 말해야 하고,‘成數라 말한 것은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했다. 인이 말하기를 태사공의 이 말은 동중서의 말을 서술한 것이다. 동중서는 스스로 공양춘추를 다루었는데 공양경전은 모두 사만 사천여자이다, 그러므로 文成數萬(글이 수만의 글자로 이루어졌다.)’한 것이다. 장이 논의한 것과 같음을 얻지 못하고 다만 경을 논하면서 만팔천자뿐이기 때문에 문득 잘못이라 말하였다.” 했다. 索隱살펴보니 장안이 말하기를 춘추는 만팔천 글자이므로 이에 글이 수만을 이루었다.’ 한 것는 글자가 자못된 것이다.” 했다. 배인은 사마천이 동중서가 논한 춘추공양전이 모두 사만사천이기 때문에 數萬이라 한 것은 또한 잘못이다. 소안이 말하기를 춘추경일만팔천도 또한 충분히 수만이니 글자의 잘못은 아니다. 소안이 말하기를 사마천이 어찌 공양전으로서 춘추라 하였겠는가?” 하였으니 또한 춘추경일만팔천은 또한 충분히 수만이라 말할 수 있으니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 索隱案弒君亡國及奔走者皆是失仁義之道本耳已者語終之辭也

[] 索隱살펴보니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망하게 한 자와 달아난 자는 모두 인의의 도와 근본을 잃었다. ‘는 말을 끝맺는 말이다.

 

[] 集解徐廣曰:「一云差以毫釐』,一云繆以千里』。」駰案今易無此語易緯有之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가을 짐승의 털끝 차이라 하고, 한편으로 잘못이 천리이다.’” 했다. 인이 살펴보니 지금 주역에 이런 말이 없고, ’易緯에 있다.

 

[] 正義其心實善為之不知義理則陷於罪咎

[0] 正義그 마음이 실제 선함에도 의리를 알지 못하고 행하면 곧 죄와 허물에 빠진다.

 

[一一] 集解張晏曰:「趙盾不知討賊而不敢辭其罪也。」

[一一] 集解장안이 말하기를 조순은 적을 성토함을 알지 못하여 감히 그 죄를 변명할 수 없었다.” 했다.

 

[一二] 正義顏云:「為臣下所干犯也一云違犯禮義。」

[一二] 正義안이 말하기를 신하가 되어 저지르는 것이다. 한편으로 예의를 어기고 범함이다.” 했다.

 

壺遂曰:「孔子之時上無明君下不得任用故作春秋垂空文以斷禮義當一王之法今夫子上遇明天子下得守職萬事既具咸各序其宜夫子所論欲以何明?」

상대부 호수가 말하기를 공자 때에는 위로 현명한 임금이 없고, 아래로 맡기고 등용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춘추를 지어 빈 글을 드리우는 것으로서 예의를 결단하여 한 왕의 법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선생께서는 위로 현명한 천자를 만났고, 아래로 관직을 얻어 만 가지 일이 이미 갖추어져 모두 각각 그 마땅함을 펼치고 있으니 선생이 논한 것은 무엇을 밝히려 하는가.” 했다.

 

太史公曰:「唯唯否否[]不然余聞之先人曰:『伏羲至純厚作易八卦堯舜之盛尚書載之禮樂作焉湯武之隆詩人歌之春秋采善貶惡推三代之德褒周室非獨刺譏而已也。』漢興以來至明天子獲符瑞封禪改正朔易服色受命於穆清[]澤流罔極海外殊俗重譯款塞[]請來獻見者不可勝道臣下百官力誦聖德猶不能宣盡其意且士賢能而不用有國者之恥主上明聖而德不布聞有司之過也且余嘗掌其官廢明聖盛德不載滅功臣世家賢大夫之業不述墮先人所言罪莫大焉余所謂述故事整齊其世傳非所謂作也而君比之於春秋謬矣。」

태사공이 말하기를 예예 아니아니 그렇지 않다. 내가 선인의 말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복희는 지극히 순수하고 두터워 역의 八卦를 지었다. 요임금과 순임금의 성대함은 상서에 실렸고, 이에 예악을 지었다. 탕의 융성함은 시인이 노래하였다. 춘추는 선을 채집하고 악을 떨어뜨렸으며, 삼대의 덕을 미루어 주나라 왕실을 기렸으니 단지 풍자하고 비방할 뿐만은 아니었다.’ 했다. 한이 일어난 이래로 현명한 천자에 이르러 상서로운 조짐을 얻고, 봉선의 에를 행하고, 정삭을 고치며, 복색을 바꾸고, 아득하고 맑은 하늘의 명을 받아 은택의 흐름이 끝이 없으며 바다 밖의 풍속을 달리하는 이들이 거듭 통역으로 요새를 두드려 와서 뵙고 바치기를 청하는 자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신하인 모든 관리들은 힘써 성스러운 덕을 칭찬하는 것이 오히려 그 뜻을 다 펴지 못하였다. 또한 선비로 현명과 능력 있는 이를 등용하지 못하는 것은 나라를 소유한 자의 부끄러움이다. 주상이 현명하고 성스러운데도 덕이 펴 들리지 않는 것은 담당 관직의 허물이다. 또한 내가 일찍이 그 관직을 주관하였는데 밝고 성스러우며 성대한 덕을 싣지 않아 없어지게 하고, 공신과 세가, 어진 대부의 일을 서술하지 않아 없어지게 함은 선인이 말한 바를 떨어뜨린 것이니 죄가 이보다 큼이 없다. 내가 이른 바 옛 일을 서술하고, 세상에 전하는 것을 정리하고 가지런하게 하는 것은 이른 바 지으려는 것이 아닌데 그대가 춘추에 그것을 견주는 것은 잘못이다.” 했다.

 

[] 集解晉灼曰:「唯唯謙應也否否不通者也。」

[] 集解진작이 말하기를 “‘唯唯는 겸손한 응대이다. ‘否否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했다.

 

[] 集解如淳曰:「受天命清和之氣。」 正義於音烏顏云:「歎辭也美也言天子有美德而教化清也。」

[] 여순이 말하기를 천명의 맑고 화함의 기운을 받음이다.” 했다. 正義의 음은 이다. 안이 말하기를 “‘는 탄사이다. ‘은 아름다움이다. 천자가 아름다운 덕을 소유하고 교화가 맑음을 말한 것이다.” 했다.

 

[] 集解應劭曰:「叩也皆叩塞門來服從也。」如淳曰:「寬也請除守塞者自保不為寇害。」 正義重譯更譯其言也

[] 集解응소가 말하기를 “‘(두드릴 고)’이다. 모두 요새를 두드리고 와서 복종함이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은 너그러움이다. 요새를 지키는 것을 없앨 것을 청하고, 스스로 도적의 해침을 하지 않을 것임을 보증한 것이다.” 했다. 正義重譯은 그 말을 다시 번역함이다.

 

於是論次其文七年[]而太史公遭李陵之禍[]幽於縲紲乃喟然而歎曰:「是余之罪也夫是余之罪也夫身毀不用矣。」退而深惟曰:「夫詩書隱約[]欲遂其志之思也昔西伯拘羑里[]演周易孔子厄陳蔡作春秋屈原放逐著離騷左丘失明厥有國語孫子臏腳而論兵法不韋遷蜀世傳呂覽[]韓非囚秦說難孤憤詩三百篇大抵賢聖發憤之所為作也此人皆意有所鬱結不得通其道也故述往事思來者。」於是卒述陶唐以來至于麟止[]自黃帝始

이에 그 글을 논하여 차례하였다. 7년이 지나 태사공이 이릉의 화를 만나 감옥에 갖혔다. 이에 위연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는 나의 죄일 것이다! 이는 나의 죄일 것이다! 몸이 훼손되어 등용되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물러나 깊이 생각하고 말하기를 대저 시와 서가 말이 간략하나 뜻이 깊은 것은 그 뜻의 생각을 이루려 해서이다. 옛날 서백이 羑里의 옥에 구금되어 주역을 연역하였고, 공자는 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액을 만나 춘추를 지었다. 굴원은 추방되어 이소를 지었다. 좌구명은 눈을 잃자 그 국어가 있게 되었고, 손자는 (종지뼈 빈)( 다리 각)의 형벌를 당하고서 병법을 논하였다. 여불위는 촉에 옮겨지고서 세상에 呂覽을 전하였다. 한비자는 진나라에 갖히면서 세난(신하가 임금을 말로 설득하기 어려움)고분(홀로 외로이 곧아 세상에 용납받지 못함)을 지었다. 시경300편은 대개 현명하고 성스러운 이가 발분하여 행한 바를 지은 것이다. 이는 사람이 모두 뜻이 막혀 답답한 바가 있어 그 도를 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고 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 했다. 이에 마침내 도당(요 임금) 이래로부터 기린(한 무제)에 이르러 그쳤는데 황제로부터 시작하였다.

 

[] 集解徐廣曰:「天漢三年。」 正義案從太初元年至天漢三年乃七年也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천한 3년이다.” 正義살펴보니 태초 1년으로부터 천한 3년에 이르기까지가 곧 7년이다.

 

[] 正義太史公舉李陵李陵降也

[] 正義태사공이 이릉을 천거하였는데 이릉이 (흉노에) 항복하였다.

 

[] 索隱案謂其意隱微而言約也正義詩書隱微而約省者遷深惟欲依其隱約而成其志意也

[] 索隱살펴보니 그 뜻은 은미하고 말은 간략하다. 正義】 『시경서경은 은미하고 간략히 생략한 것은 사마천이 깊이 생각하고 그 은미하고 간략함에 의지하여 그 뜻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 集解徐廣曰:「在湯陰。」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탕음에 있다.” 했다.

 

[] 正義即呂氏春秋也

[] 正義여씨춘추이다.

 

[] 集解張晏曰:「武帝獲麟遷以為述事之端上紀黃帝下至麟止猶春秋止於獲麟也。」 索隱服虔云:「武帝至雍獲白麟而鑄金作麟足形故云麟止』。遷作史記止於此猶春秋終於獲麟然也。」史記以黃帝為首而云述陶唐者」,案五帝本紀贊云五帝尚矣然尚書載堯以來百家言黃帝其文不雅馴」,故述黃帝為本紀之首而以尚書雅正故稱起於陶唐」。

[] 集解장안이 말하기를 무제가 기린을 잡은 것을 사마천이 일을 서술하는 실마리로 삼은 것이다. 위로 황제를 기록하고, 아래로 기린을 잡은 것에서 그친 것은 춘추가 기린을 잡은 것에서 그친 것과 같다.” 했다. 索隱복건이 말하기를 무제가 옹에 이르러 흰 기린을 잡고, 금을 녹여 기린의 발을 만들었기 때문에 麟止라 한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지으면서 여기에서 그친 것은 춘추가 기린을 잡은 것에서 그친 것과 같다.” 했다. 사기는 황제를 처음으로 삼았으면서도 도당(요 인금)을 서술했다.” 한 것은 살펴보니 오제본기찬에 말하기를 오제를 숭상하였으나 상서에는 요 이후부터 실었다. 백가가 황제를 말한 것은 그 글이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므로 황제를 본기의 처음으로 서술한 것이며. 상서는 아름답고 바르기 때문에 起於陶唐(도당:요 임금)에서 일으켰다.’고 말한 것이다.” 했다.


維昔黃帝法天則地四聖遵序[]各成法度唐堯遜位虞舜不台[]厥美帝功萬世載之作五帝本紀[]第一

옛날 황제는 하늘을 본받은 것이 곧 땅이라 하고, 사성(전욱, 제곡, , )은 사례를 따라 각기 법도를 이루었다. 요 임금이 왕위를 양보하고 우순은 기뻐하지 않았다. 그 황제의 공을 아름답게 여겨 만세에 전해지도록 실었다. 오제본기1을 짓는다.


[] 集解徐廣曰:「顓頊帝嚳。」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전욱, 제곡, , 순이다.” 했다.

 

[] 索隱台音怡悅也或音胎非也

[] 索隱의 음은 (기쁠 이)이니 기뻐함이다. 혹은 음이 (아리밸 태)‘라 하나 아니다.

 

[] 索隱應劭云:「有本則紀有家則代有年則表有名則傳。」

[] 索隱응소가 말하기를 근본이 있으면 라 하고, ‘아 있으면 곧 라 하고, ‘이 있으면 곧 年表라 하고, ‘이 있으면 곧 이라 한다.” 했다.

 

維禹之功九州攸同光唐虞際德流苗裔夏桀淫驕乃放鳴條作夏本紀第二

우의 공은 9주를 한가지로 하여 당우의 때를 빛내어 덕이 후손에게 흘렀다. 하나라의 걸은 음탕하고 교만하였으므로 이에 명조에 추방하였다. 하본기2를 지었다.

維契[]作商爰及成湯太甲居桐德盛阿衡武丁得說乃稱高宗帝辛湛湎諸侯不享作殷本紀第三

설은 상을 세워서 이에 성탕에 이르렀다. 태갑은 에 살았는데 덕이 성대하여 아형(재상)이 되었다. 무정이 열을 얻어 곧 고종을 일컳었다. 제신(주왕)이 주색에 빠지자 제후들이 섬기지 않았다. 은본기3을 지었다.


[] 正義音薛也

[] 正義음은 (맑은 대쑥 설)’이다.

 

維棄作稷德盛西伯武王牧野實撫天下幽厲昏亂既喪酆鎬陵遲至赧洛邑不祀作周本紀第四

기는 후직이 되었고, 덕이 서백 때에 성대해졌다. 무왕은 목야에서 실로 천하를 어루만졌고, 유왕과 여왕은 어둡고 음란하여 (나라이름 풍)(호경 호)를 잃었고, 난왕에 이르러 낙읍은 제사가 끊어졌다. 주본기4를 짓는다.

 

維秦之先伯翳佐禹穆公思義悼豪之旅[]以人為殉詩歌黃鳥昭襄業帝作秦本紀第五

진나라의 선조는 백예가 우를 보좌하였고, 목공이 의를 생각하여 효산의 전투 때 죽은 군대를 애도하였고, (그가 죽자)사람으로서 순장하였는데 시경진편풍 황조는 이를 노래한 것이다. 소왕과 양왕이 제의 제업의 기초를 닦았다. 진본기5를 지었다.


[] 索隱案豪即之異音師旅也正義穆公封崤山軍旅之尸

[] 索隱살펴보니 는 곧 (산이름 효)’의 다른 이름이다. ‘(군사 여)’는 군대이다. 正義목공은 효산에 봉해져 군대를 주관하였다.


始皇既立并兼六國銷鋒鑄鐻[]維偃干革尊號稱帝矜武任力二世受運子嬰降虜作始皇本紀第六

시황제가 즉위하고 나서 6국을 병합하고 칼을 녹여 악기걸이를 주조하고, 방패와 갑옷을 쉬게 하고 호칭을 높여 라 하고 무력을 자랑하고 힘으로 하였다. 2세가 나라의 운명을 받았고, 자영이 ()에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다. 시황본기6을 지었다.


[] 集解徐廣曰:「嚴安上書銷其兵鑄以為鍾鐻也。」 索隱下音巨鐘也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엄안이 글을 올려 그 병기를 녹이고 주조하여 종과 종 걸이를 만들었다.” 했다. 索隱아래의 음은 이다. ‘(악기걸이 거)’는 종이다.

 

秦失其道豪桀並擾項梁業之子羽接之殺慶救趙[]諸侯立之誅嬰背懷天下非之作項羽本紀第七

진나라가 그 도를 잃자 호걸들이 나란히 소란스럽게 하였는데 항량이 그것을 업으로 삼았과 아들 항우가 그것을 이었다. 경자관군을 죽이고 조나라를 구하자 제후들이 그를 세웠다. 자영을 죽이고 초나라 회왕을 배반하자 천하가 그를 비난하였다. 항우본기7을 지었다.

 

[] 集解徐廣曰:「宋義為上將號慶子冠軍。」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송의가 상장군이 되자 경자관군이라 불렀다.” 했다.

 

子羽暴虐漢行功德憤發蜀漢還定三秦誅籍業帝天下惟寧改制易俗作高祖本紀第八

아들 항우가 포학하자 한이 공덕을 행하였으며, 촉과 한에서 발분하여 돌아와 三秦을 평정하였다. 항적()를 죽이고 제업을 이루어 천하가 편안해지자 제도를 고치고 풍속을 바꾸었다. 고조본기8을 짓는다.

惠之早霣[]諸呂不台[]崇彊祿諸侯謀之殺隱幽友[]大臣洞疑[]遂及宗禍作呂太后本紀第九

효혜제가 일찍 죽자 여러 여씨가 태보의 덕이 없고, 억지로 여록과 여산을 높이자 제후들이 배반을 모의하였고, 조의 은왕 여의와 조의 유왕 우를 감금하자 대신들이 두려워하였으며 마침내 종족이 멸해지는 화가 미쳤다. 여태후본기9를 짓는다.


[] 正義音殞

[] 正義음은 (죽을 운)’이다.

 

[] 集解徐廣曰:「無台輔之德也一曰怡懌也不為百姓所說。」 索隱徐廣音胎非也一音怡此贊本韻則怡懌為是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태보의 덕이 없음이다. 한편으로 (기쁠 이)’, ‘(기뻐할 역)’이라 하는데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음이다.” 했다. 索隱서광은 음이 라 했으나 아니다. 살펴보니 한 음은 로 이는 찬 본의 이니 곧 怡懌이 이것이 된다.

 

[] 集解徐廣曰:「趙隱王如意趙幽王友。」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조 은왕 여의, 조 유왕 우이다.” 했다.

 

[] 索隱案洞是洞達為義言所共疑也

[] 索隱살펴보니 은 이 洞達을 뜻으로 하니 함께 의심하는 바를 말한 것이다.

 

漢既初興繼嗣不明迎王踐祚天下歸心蠲除肉刑開通關梁廣恩博施厥稱太宗作孝文本紀第十

한이 처음 일어났을 때 후사를 이음이 분명하지 않았는데 ()왕을 맞아 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자 천하의 인심이 돌아왔다. 육형을 없애고, 관과 교량을 열고 통하게 하니 은혜를 넓히고 은혜가 널리 베풀어져 그 태종이라 말해졌다. 효문본기10을 짓는다.


諸侯驕恣吳首為亂京師行誅七國伏辜天下翕然大安殷富作孝景本紀第十一

제후가 교만하고 함부로 하여 오가 우두머리로 반란을 일으켰고, 경사가 가서 죽였다. 7국이 죄를 자복하자 천하가 흡족해하고 크게 편안해지며 부유해졌다. 효경본기11을 지었다.


漢興五世隆在建元外攘夷狄內脩法度封禪改正朔易服色作今上本紀第十二

한이 일어난 지 5세대에 융성함은 건원시대에 있었고, 밖으로는 이적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법도를 정비하며, 봉선의 예를 행하고, 정삭을 고치며, 복색을 바꾸었다. 지금임금(무제) 본기12를 짓는다.

維三代尚矣年紀不可考蓋取之譜牒舊聞本于茲於是略推作三代世表第一

삼대는 너무 멀어 연대를 상고할 수 없어 대개 보첩과 예전에 들은 것을 취하여 이를 근본으로 하고 여기에 대략 미루어 삼대세표1을 짓는다.

 

幽厲之後周室衰微諸侯專政春秋有所不紀而譜牒經略五霸更盛衰欲睹周世相先後之意作十二諸侯年表第二

주나라 유왕과 여왕의 뒤에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여 미미해지자 제후들이 정사를 오로지 하였는데 춘추에도 기록하지 않은 바가 있다. 보첩의 나라를 다스리고 경영하고 다스린 것은 오패가 성쇠를 번갈아 하였는데, 주나라 세대가 서로 앞, 뒤 되는 뜻을 보고자 하여 십이제후연표2를 지었다.

春秋之後陪臣秉政彊國相王以至于秦卒并諸夏滅封地擅其號作六國年表第三

춘추시대 후 家臣들이 정권을 잡고, 강한 나라가 서로 왕이라 하였다. 나라에 이르러 마침내 제하를 아우르고, 봉지를 없애며, 그 호를 함부로 하였다. 육국연표3을 지었다.

 

秦既暴虐楚人發難項氏遂亂漢乃扶義征伐八年之閒天下三嬗事繁變眾故詳著秦楚之際月表第四

나라가 포학하여 초나라 사람들이 난을 일으키고, 항씨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한이 이에 의를 부축하여 정벌한지 8년 사이에 천하가 세 번 이어졌으나 일이 번잡하고 변화가 많았기 때문에 진초지제월표4를 자세하게 드러내었다.

漢興已來至于太初百年諸侯廢立分削譜紀不明有司靡踵彊弱之原云以世[]作漢興已來諸侯年表第五

한이 흥기한 이래로 태초 100년에 이르기까지 제후가 없어지고, 세워지며 나누어 깍인 것은 보에 기록된 것이 분명하지 않고, 담당관청이 이어 강약의 근원을 세대로서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한흥이래제후연표5를 지었다.


[] 集解徐廣曰:「一作云已。(漢序[]:『義依霍庶幾云已』。」 索隱案踵謂繼也。「字當作」,「當作」,並誤耳皆語助之辭也正義言漢興已來百年諸侯廢立分削譜紀不能明其嗣有司無所踵繼其後乃云彊弱之原云以世相代,(不能有所錄紀也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云已라 썼다. 한 서문()(높을 창)과 의는 곽에 의지하여 云已에 가깝다.’” 했다. 索隱살펴보니 (발꿈치 종)’은 이음을 말한다. ‘자는 마땅히 라 써야 하고, ‘는 마땅히 라 써야 하니 모두 잘못이다. ‘’, ‘’, ‘는 모두 어조사이다. 正義한이 흥기한 이래로부터 100년이 지나 제후의 없앰과 세움, 나누고 깍음에 대해 보의 기록에 그 이음이 분명하지 않는 것은 담당관청이 그 후사를 잇는 바를 기록하여 이에 강약의 근원을 세대로서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서로 기록한 바가 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維高祖元功輔臣股肱剖符而爵澤流苗裔忘其昭穆或殺身隕國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오직 고조의 큰 공과 보필하는 신하인 고굉들은 부절을 쪼개어 작을 받아 은택이 후손에게 흘렀으나 그 조상을 잊고 혹은 자신을 죽이고 나라가 망하였다. 고조공신제후표6을 지었다.


惠景之閒維申功臣宗屬爵邑作惠景閒侯者年表第七

효혜제와 효경제의 사이에는 공신과 종실에 작읍을 폈으니 혜경간제후자연표7을 지었다.


北討彊胡南誅勁越征伐夷蠻武功爰列作建元以來侯者年表第八

북으로 강한 오랑캐를 토벌하고 남쪽으로 굳센 월을 죽이며, 이와 만을 정벌하였으니 무공을 이에 나열하여 건원이래후자연표8을 지었다.

 

諸侯既彊七國為從子弟眾多無爵封邑推恩行義其埶銷弱德歸京師作王子侯者年表第九

제후가 이미 강성해지자 7국이 따랐는데 자제가 많아졌으나 작과 봉읍이 없어 은혜를 미루고 의를 행하니 그 형세가 점점 약해져 덕이 경사로 돌아갔다. 왕자후자연표9를 지었다.

 

國有賢相良將民之師表也維見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賢者記其治不賢者彰其事作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第十

나라에 어진 재상과 훌륭한 장수가 있어 백성의 모범이 되었다. 한이 흥기한 이래로 장수와 재상의 연표를 나타내었는데 어진 자는 그 다스림을 기록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그 일을 드러내었다.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10을 지었다.


維三代之禮所損益各殊務然要以近性情通王道故禮因人質為之節文略協古今之變作禮書第一

삼대의 예는 덜고 더하는 바가 각기 힘쓰는 것이 달랐으나 요점은 본성과 실정에 가깝고 왕도에 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는 사람의 본질에 근거하여 행함을 절제하고 옛과 지금의 변화에 대략 부합해야 한다. 예서1을 짓는다.


樂者所以移風易俗也自雅頌聲興則已好鄭衛之音鄭衛之音所從來久矣人情之所感遠俗則懷[]比樂書以述來古[]作樂書第二

음악은 풍속을 바꾼다. 시경의 아와 송의 소리가 일어남으로부터 정과 위나라의 음악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정, 위나라의 음악이 전해진 바가 오래되었다. 사람의 정을 느끼게 하여 멀리 있는 풍속이 다른 사람을 회유하고 변화를 향하게 할 수 있다.


[] 集解徐廣曰:「樂者所以感和人情人情既感則遠方殊俗莫不懷柔向化也。」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음악은 사람의 정을 감회시킨다. 사람의 정이 이미 느껴졌으면 곧 먼 지방의 다른 풍속을 회유하여 변화를 향하자 않음이 없다.

 

[] 索隱案來古即古來也言比樂書以述自古已來樂之興衰也

[] 索隱살펴보니 來古는 곧 古來이다. 음악의 글을 비교하는 것으로서 옛날부터 이래로 음악의 일어나고 쇠퇴하는 것을 서술하였음을 말하였다.

 

非兵不彊[]非德不昌黃帝武以興[]二世以崩可不慎歟司馬法所從來尚矣[]太公王子[]能紹而明之切近世極人變作律書第三

군대가 아니면 강해지지 않고, 덕이 아니면 번창하지 못한다. 황제, , 무왕은 이로서 흥기하였고, 걸과 주, 나라 2세는 이것 때문에 죽었으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마법은 숭상된 내력이 있어 태공, 손빈, 오기, 왕자 성보가 이어 그것을 밝혔는데 근세에 절실하였고, 사람의 변화를 지극히 하였다. 율서3을 지었다.


[] 索隱案此律書之贊而云非兵不強則此律書兵書古者師出以律則凡出軍皆聽律聲故云聞聲效勝負望敵知吉凶

[] 索隱율서의 찬에 말하기를 “‘非兵不強(군대가 아니면 강해지지 못하고)’한 것은 곧 이 율서는 원래부터 병서였다. 옛날에는 군대를 출동시킬 때는 로서 하였으니 곧 무릇 군대를 출동시키는 것은 모두 율의 소리를 듣기 때문에 소리를 듣고 승부를 나타내고, 적을 바라보고 길흉을 안다.’” 했다.


[] 索隱黃帝有版泉之師武有鳴條牧野之戰而克桀

[] 索隱황제 때는 판천의 군대가 있었고, 탕왕과 무왕때는 명조와 목야의 싸움으로 걸과 주를 이김이 이김이 있었다.

 

[] 正義古者師出以律凡軍出皆吹律聽聲律書云六律為萬事根本其於兵械尤所重望敵知吉凶聞聲效勝負」。故云司馬兵法所從來尚矣

[] 正義옛날에는 군대를 출동할 때 율로서 하였으니 무릇 군대의 출동은 모두 율을 불고 소리를 듣는다. 율서“‘六律은 만 가지 일의 근본인데 그 중에 병기는 더욱 중하게 여겨졌다. 적을 바라보고 길흉을 알고, 소리를 들으면 승부가 드러난다.” 했다. 그러므로 “‘사마병법의 지나온 내력을 숭상하였는가?” 했다.


[] 集解徐廣曰:「王子成甫。」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왕자 성보이다.” 했다.

 

律居陰而治陽曆居陽而治陰律曆更相治閒不容翲[]五家之文怫[]維太初之元論作曆書第四[]

은 음에 있으면서 양을 다스리고, ‘은 양에 있으면서 음을 다스리니 율력이 번갈아 서로 다스려서 사이가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五家의 글은 서로 다 달랐고, 태초 원년의 편찬한 역법이 가장 정확하다. 율력4를 짓는다.

 

[] 索隱案忽者總文之微也翲者輕也言律曆窮陰陽之妙其閒不容絲忽也」,恐衍字耳正義翲匹遙反今音匹沼反字當作」。禾芒表也一蠶口出絲也言律曆相治之閒不容比微細之物也

[] 索隱살펴보니 은 모든 글의 뚜렷하지 않음이다. ‘(나는 모양 표)’는 가벼움이다. 율력은 응양의 묘리를 다하였으니 그 사이가 실낱의 소홀함도 용납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군더더기 글자(衍字)일 뿐이다. 正義(멀 요)’의 반이니 지금 음은 이다. 글자는 마땅히 라 써야 한다. ‘는 벼의 까끄라기이다. ‘은 한 마리 누에가 입으로 실을 내는 것이다. 율력이 서로 다스리는 사이가 매우 가는 물건에도 비견됨을 용납하지 않음이다.

 

[] 索隱怫音悖一音扶物反怫亦悖也言金木水火土五家之文各相悖異不同也正義五家謂黃帝顓頊周之曆其文相戾乖異不同維太初之元論曆律為是故曆書自太初之元論之也

[] 索隱(발끈할 불)’의 음은 (어그러질 패)인데 한 음은 이다. ‘은 또한 어그러짐이다. , , , , 五家의 글이 각각 서로 어그러지고 달라 같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正義五家는 황제, 전욱, , , 주의 역법을 말하는데 그 글이 서로 어그러지고, 어긋나 달라 같지 않고, 태초 1년의 율력을 논한 것이 옳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曆書自太初之元論之也라 한 것이다.

 

[] 集解徐廣曰:「一作』。」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은 한편으로 이라 쓴다.” 했다.

 

星氣之書多雜禨祥不經推其文考其應不殊比集論其行事驗于軌度以次作天官書第五

별과 기상의 글은 많이 길흉의 나타나는 것이 정도에 맞지 않고, 그 글을 미루거나 그 응함을 상고하여도 다름이 없다. 그 일을 비교하고 모아 논하여 궤도를 징험하는 것으로서 차례를 비교하여 천관서5를 짓는다.

受命而王封禪之符罕[]用則萬靈罔不禋祀追本諸神名山大川禮作封禪書第六

천명을 받고 왕이 도지만 봉선의 예를 쓰는 것은 드물고, 쓰면 곧 만 가지 신령스러움이 제사를 받지 않음이 없다. 여러 신과 명산, 대천의 예에 대한 근본을 다라 봉선서6을 짓는다.


[] 集解徐廣曰:「一云答應』。」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答應이라 한다.” 했다.

 

維禹浚川九州攸寧爰及宣防決瀆通溝作河渠書第七

우가 내를 파내고 구주를 편안하게 하고, 이에 선방궁을 지음에 이르러 물길을 터서 서로 통하게 했다. 하거서7을 짓는다.

維幣之行[]以通農商其極則玩巧[]并兼茲殖爭於機利去本趨末作平準書以觀事變第八

화폐를 발행하여 농업과 상업을 통하게 하는데 그 (폐단이) 지극하면 곧 교묘하게 이익을 아우르고 겸하며 기회를 보아 이익을 다투어 근본(농업)을 버리고 지엽(상업)을 따른다. 평준서를 지어 일의 변화를 관찰한다. 8


[] 索隱維獘之行上獘音幣帛」,錢也

[] 索隱화폐의 발행이다. 위의 음은 幣帛이니 돈이다.

 

[] 索隱杬上五官反下苦孝反

[] 索隱杬巧는 위는 이고, 아래는 이다.

 

太伯避歷江蠻是適文武攸興古公王跡闔廬弒僚賓服荊楚夫差克齊子胥鴟夷信嚭親越吳國既滅嘉伯之讓作吳世家第一

태백이 계력을 피하여 강의 만족에게로 갔다. 문왕과 무왕이 흥기한 것은 고공단보 때 왕의 자취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합려는 요를 시해하고, 형과 초를 굴복시켰고, 부차는 제를 이겼고, 오자서를 가죽부대에 담아 강에 던졌다. 백비를 믿고 월나라와 친하게 지내더니 오나라가 멸망당하였다. 태백의 양보를 아름답게 여겨 오세가1을 지었다.


呂肖矣[]尚父側微卒歸西伯文武是師功冠群公繆權于幽[]番番黃髮[]爰饗營丘不背柯盟桓公以昌九合諸侯霸功顯彰田闞爭寵姜姓解亡[]嘉父之謀作齊太公世家第二

신과 여 나라가 쇠퇴하고 상보 강태공은 미천한 신분이 이었다가 마침내 서백에게 돌아가 문왕과 무왕이 이에 스승으로 삼았다. 공은 여러 공들의 앞에 있었고, 은밀하고 치밀한 임시방편에 뛰어났다. 머리카락이 누렇게 변하는 노년에 영구를 봉지로 받았다. 땅의 맹서를 배반하지 않아 환공은 번창하였고, 아홉 번 제후를 모아 패업을 이룬 공이 드러났다. 전상과 감지가 총애를 다투자 姜姓인 제나라가 망하였다. 강태공의 도모함을 아름답게 여겨 제태공세가2를 지었다.


[] 集解徐廣曰:「肖音痟痟猶衰微。」 索隱案徐廣注肖音痟痟猶衰微其音訓不可知從出也今案肖謂微弱而省少所謂申呂雖衰正義肖音痟呂尚之祖封於申呂後痟微故尚父微賤也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닮을 초)’의 음은 (두통 소)’이다. ‘衰微와 같다.” 했다. 索隱살펴보니 서광은 의 음이 이고, ‘는 쇠미와 같다. 주석하였는데 그 음과 뜻이 나온 것을 알 수 없다. 지금 살펴보니 는 미약하여 덜어지고 적어진 것을 말하니 이른 바 신과 여 나라가 모름지기 쇠퇴하였다.” 한 것이다. 正義의 음은 이다. 여상의 조상이 신에 봉해졌다. 신과 여나라는 후에 쇠미해졌기 때문에 상보가 미천하다. 한 것이다.

 

[] 集解徐廣曰:「錯也猶云纏結也權智潛謀幽昧不顯所謂太公陰謀。」 索隱案繆謂綢繆也音亡又反又謂太公綢繆為權謀於幽昧不明著謂太公之陰謀也正義繆音武彪反言呂尚綢繆於幽權之策謂六韜三略陰符七術之屬也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얽을 무)’(섞일 착)’이니 纏結(얽거나 매어 묶음)’이란 말과 같다. 방편을 쓰는 지혜와 깊은 꾀가 그윽하고 어두워 들어나지 않음이 이른 바 태공의 음모이다.” 했다. 索隱살펴보니 綢繆(미리 빈틈없이 꼼꼼히 준비함)’이니 음은 이다. 또란 태공이 미리 빈틈없이 꼼꼼히 준비한 것을 말하고, 방편의 지혜가 그윽하고 어두워 밝게 드러나지 않음을 말하니 태공의 음모를 말하는 것이다. 正義의 음은 이다. 그윽한 방편의 계책을 미리 꼼꼼히 준비함을 말함이니 육도, 삼략, 음부, 七術의 등속이다.

 

[] 集解番音婆毛萇云番番威勇武貌黃髮言老人髮白而更黃也

[] 集解(갈마들 번)’의 음은 (할미 파)’이다. 모장이 말하기를 “‘番番은 위엄과 용맹함이 씩씩한 모양이다.” 했다. 살펴보니 黃髮은 노인의 머리카락이 희게 되었다가 다시 누르게 된 것을 말한다.


[] 集解徐廣曰:「一云』。一作』。」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바라볼 감)’은 한편으로 이라 한다. ‘는 한편으로 이라 쓴다.” 했다.

 

依之違之周公綏之憤發文德天下和之輔翼成王諸侯宗周隱桓之際是獨何哉三桓爭彊魯乃不昌嘉旦金縢作周公世家第三

(주공이 섭정을 하자) 의지하거나 어겼는데 주공이 그들을 편안하게 하고, 문덕에 힘쓰게 하니 천하가 화합하였고, 성왕을 보좌하니 제후들이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여겼다. 은공과 환공의 사이에 나라가 혼란스러워진 것은 어째서일까? 삼환이 강함을 다투니 노나라가 창성하지 못하였다. 주공 단의 금등을 아름답게 여겨 주공세가3을 지었다.


武王克紂天下未協而崩成王既幼管蔡疑之淮夷叛之於是召公率德安集王室以寧東土[]之禪[]乃成禍亂嘉甘棠之詩作燕世家第四

무왕이 주를 이기고 천하가 아직 화합하지 않았는데 죽었다. 성왕이 어리니( 성왕이 어려 주공이 섭정하니) 관숙과 채숙이 그것을 의심하여 회의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소공이 덕으로 거느리고 왕실을 안정시켜 동쪽 땅을 편안하게 하였다. 연나라의 쾌의 선양(쾌가 소대의 유세에 따라 요순의 선양을 본받아 재상인 자지에게 임금의 자리를 양보했다가 3년 만에 연나라가)은 곧 화란을 이루었다. 시경감당의 시를 아름답게 여겨 연세가4를 짓는다.

 

[] 索隱謂王噲禪其相子之後卒危亂也

[] 索隱왕 쾌가 그 재상 자지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는데 후에 끝내 위태롭고 어지러워진 것을 말한다.


管蔡相武庚將寧舊商及旦攝政二叔不饗殺鮮放度[]周公為盟大任十子[]周以宗彊嘉仲悔過[]作管蔡世家第五

관숙과 채숙은 무경을 도와 장차 옛 상을 편안하게 하였는데 주공 단이 섭정함에 이르러 두 숙부가 누리지(복종하지) 않자 관숙은 죽이고 채숙은 추방하고, 주공은 충성을 맹세하였다. 문왕의 왕비 태임은 10명의 아들을 두어 주나라 종실이 강해졌다. 채숙의 아들 채중이 허물을 뉘우친 것을 아름답게 여겨 관채세가5를 지었다.


[] 索隱案系家云管叔名鮮蔡叔名度霍叔名處也

[] 索隱살펴보니 계가관숙의 이름은 이고, 채숙의 이름은 이고, 곽숙의 이름은 이다.

 

[] 索隱太任文王妃十子伯邑考武王曹是也

[] 索隱태임은 문왕의 비이다. ‘十子백읍고’. ‘무왕’, ‘’, ‘’, ‘’, ‘’, ‘’, ‘’, ‘’, ‘가 이이다.

 

[] 正義蔡叔度之子蔡仲也

[] 正義관숙 도의 아들 채중이다.

 

王後不絕舜禹是說維德休明苗裔蒙烈百世享祀爰周陳杞楚實滅之齊田既起舜何人哉作陳杞世家第六

(덕이 있는) 왕은 제사가 끊어지지 않았으니 순과 우(의 혼령이)가 이를 기뻐할 것이며, 덕이 아름답고 밝아 후손들이 공덕을 이었다. 백대가 지나도록 제사를 지냈으니 이에 주나라 때 에 봉해졌으나 초나라가 실제로 그들을 멸망시켰다. 제나라 전시가 일어났으니 순은 어떤 사람인가? 진기세가6을 지었다.


收殷餘民叔封始邑申以商亂酒材是告及朔之生衛頃不寧[]南子惡蒯聵子父易名周德卑微戰國既彊衛以小弱角獨後亡喜彼康誥作衛世家第七

은의 남은 백성을 거두어 강숙을 위에 봉하고, 상나라의 혼란을 훈계하기 위하여 상서주고와 梓材를 예로 들어 말하고, 위나라 공자 삭이 태어남에 이르러 위나라가 기울어 편안하지 못했다. 남자가 괴외를 미워하니 아들과 아비가 이름을 바꾸었다. 주나라 덕이 낮아지고 미미해져 전국의 제후국이 강해지자 위나라는 적어지고 약해졌으나 각왕 때까지 홀로 있다가 후에 망하였다. 상서』 「강고를 기뻐하여 위세가7을 지었다.


[] 索隱衛頃公也

[] 索隱위나라 경공이다.

 

嗟箕子乎嗟箕子乎正言不用乃反為奴武庚既死周封微子襄公傷於泓[]君子孰稱景公謙德熒惑退行成暴虐[]宋乃滅亡喜微子問太師作宋世家第八

아 기자여! 아 기자여! 바른 말이 쓰이지 않고 이에 도리어 종이 되었다. 무경이 죽은 후 주나라가 미자를 봉하였다. 양공이 홍수에서 싸우다 패하여 다쳤지만 군자들은 예를 잊지 않았다하여 칭찬하였다. 경공이 겸양의 덕을 쌓으니 형혹(화성)이 물러나 운행하였다. 척성이 포학하여 송이 이에 멸망하였다. 미자가 태사(기자)에게 물은 것을 좋아하여 송세가8을 지었다.


[] 正義泓水名公羊傳云:「宋與楚人期戰於泓之陽宋師大敗君子大其不鼓不成列臨大事而不忘禮雖文王之戰亦不過此也。」

[] 正義(깊을 홍)’은 물 이름이다. 공양전송과 초나라 사람이 홍수의 남쪽에서 싸우기를 기약하였는데 송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으나 군자들이 그 북을 울리지 않고, 열을 이루지 않았으며 큰일에 대하여 예를 잃지 않음을 크게 여겼으나 비록 문왕의 싸움이라 할지라도 또한 이를 지나지 못한다.” 했다.


[] 集解徐廣曰:「一云』,宋剔成君生偃。」 索隱上音逷成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쓰러질 언)’이라 하였는데 송나라 척성군이 을 낳았다.” 했다. 索隱위의 음은 척성이다.


武王既崩叔虞邑唐君子譏[]卒滅武公驪姬之愛亂者五世重耳不得意乃能成霸六卿專權[]晉國以秏嘉文公錫珪鬯作晉世家第九

무왕이 죽고 (성왕의)숙부 우가 당에 봉해졌다. 군자들이 진나라 목후가 아들 이름 지은 것을 비난하였는데 마침내 무공에게 멸망당하였다. 여희의 사랑이 혼란스럽게 한 것이 5세대였고, 중이가 뜻을 얻지 못하였으나 패업을 이룰 수 있었다. 六卿이 권세를 오로지 하다가 나라가 쇠퇴하였다. 문공에게 규와 울창주 내려진 것을 아름답게 여겨 진세가9를 지었다.


[] 正義謂晉穆侯太子名仇少子名成師也

[] 正義나라 목후의 태자 이름이 인데 어렸을 때의 이름이 成師였다.

 

[] 正義智伯中行

[] 正義지백’, ‘’, ‘중행’, ‘’, ‘’, ‘이다.


重黎業之吳回接之殷之季世粥子牒之周用熊繹熊渠是續莊王之賢乃復國陳[]既赦鄭伯班師華元懷王客死蘭咎屈原好諛信讒楚并於秦嘉莊王之義作楚世家第十

중려가 업을 이루고 오회가 그것을 이었고, 은의 말기에 죽자(육웅)이 계보를 기록하였다. 주나라가 웅역을 등용하고 웅거가 이를 이었다. 장왕의 현명함으로 이에 나라를 회복하여 진에 도읍하였다. 정백을 풀어주고 나서 화원의 말을 듣고 군대를 돌렸다. 회왕은 나라에서 객사하였고, 자란은 굴원을 책망하였으며, 아첨을 좋아하고 참소를 믿어 초나라는 나라에게 병합되었다. 장왕의 의리를 아름답게 여겨 초세가10을 짓는다.


[] 正義楚莊王都陳

[] 正義초나라 장왕이 진에 도읍하였다.

 

少康之子實賓南海[]文身斷髮黿鱓[]與處既守封禺[]奉禹之祀句踐困彼乃用種嘉句踐夷蠻能脩其德滅彊吳以尊周室作越王句踐世家第十一

소강의 아들이 실제 남해 변에 살면서 몸에 문신하고 머리를 자르고 자라, 악어와 함께 살면서 봉산과 우산을 지키며 우의 제사를 받들었다. 구천이 어려움을 당한 뒤 문종과 범려를 등용하였다. 구천이 이민족에게 그 덕을 닦아 강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 왕실을 높인 것을 아름답게 여겨 월왕구천세가11을 지었다.

 

[] 正義吳越春秋云:「啟使歲時祭禹於越立宗廟南山之上封少康庶子無餘於越使祠禹至句踐遷都山陰立禹廟為始祖廟越亡遂廢也。」今禹廟在會稽山下

[] 正義】 『오월춘추에 말하기를 계를 시켜 매해 때에 맞추어 월에서 우를 제사하게 하였고, 종묘를 남산의 위에 세우고 소강의 서자 무여를 월에 봉하여 우을 제사하게 하였는데 구천에 이르러 산 북쪽에 도읍을 옮기고 우의 사당을 세워 시조묘로 삼았다가 월이 망하자 마침내 없어졌다.” 했다. 살펴보니 지금 우의 사당은 회계산 아래에 있다.


[] 索隱蚖鱓元鼉二音

[] 索隱원선’, ‘원타두 음이다.

 

[] 集解徐廣曰:「封禺山在武康縣南。」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봉우산은 무강현 남쪽에 있다.” 했다.

 

桓公之東太史是庸及侵周禾王人是議祭仲要盟鄭久不昌子產之仁紹世稱賢三晉侵伐鄭納於韓嘉厲公納惠王作鄭世家第十二

정나라 환공이 동쪽으로 간 것은 태사의 말을 따랐기 때문이다. 주나라 화를 침범하자 주나라의 백성들과 신하들이 이에 논의가 분분하였다. 제중이 송나라에 굴복하여 맹세를 하자 정나라가 오래 동안 번창하지 못하였다. 자산의 어짐은 세대를 이어 현명하다 칭찬받았다. 삼진이 침범하여 치자 정나라가 한나라에 받아들여졌다. 여공이 주나라 혜왕을 받아들인 것을 아름답게 여겨 정세가12를 지었다.


維驥騄耳乃章造父趙夙事獻衰續厥緒[]佐文尊王卒為晉輔襄子困辱乃禽智伯主父生縛餓死探爵王遷辟淫良將是斥嘉鞅討周亂作趙世家第十三

명마 녹이가 조보를 빛나게 하였다. 조숙은 헌공을 섬겼고, 최가 그 유업을 이었다. 문공을 도와 왕을 높이고, 마침내 진나라 대신이 되었다. 양자가 곤욕을 치르고 이에 지백을 잡았다. 주부는 사로잡혀 묶여있다 참새를 잡아 연명하다 굶어 죽었다. 왕 천은 편벽되고 음탕하여 훌륭한 장수들을 배척하였다. 앙이 주나라의 혼란을 토벌한 것을 아름답게 여겨 조세가13을 지었다.


[] 正義衰楚為反

[] 正義이다.

 

畢萬爵魏卜人知之及絳戮干戎翟和之文侯慕義子夏師之惠王自矜齊秦攻之既疑信陵諸侯罷之卒亡大梁王假廝嘉武佐晉文申霸道作魏世家第十四

필공 만이 위나라에 봉해졌고, 점치는 사람이 그것을 알려주었다. 강이 간을 죽임에 이르러 융적이 그것을 화친하게 하였다. 문후가 의리를 사모하여 자하를 스승으로 삼았다. 혜왕이 스스로를 과시하다 제나라와 나라의 공격을 받았다. (안희왕이) 신릉군을 의심하니 제후들이 그만두었다. 마침내 대량을 잃고, 왕 가는 종이 되었다. 무가 진나라 문공이 패도를 도운 것을 아름답게 여겨 위세가14를 지었다.


韓厥陰德趙武攸興紹絕立廢晉人宗之昭侯顯列申子庸之疑非不信秦人襲之嘉厥輔晉匡周天子之賦作韓世家第十五

한궐의 음덕으로 조무가 집안을 일으켰다. 끊어진 대를 잇고, 없어진 제사를 확립하니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종주로 여겼다. 소후가 열후들 가운데 드러난 것은 신불해의 계책을 썼기 때문이다. 한비를 의심하여 신임하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엄습하였다. 궐이 진나라를 보좌하고, 주나라 천자의 부역을 바로잡은 것을 아름답게 여겨 한세가15를 짓는다.

 

完子避難適齊為援陰施五世齊人歌之成子得政田和為侯王建動心乃遷于共嘉威宣能撥濁世而獨宗周作田敬仲完世家第十六

진완이 난을 피하여 제나라에 가서 구원을 청하고, 음덕을 다섯 세대에 베푸니 제나라 사람들이 그를 노래하였다. 성자가 정권을 얻고, 전화는 후가 되었다. 왕 건이 마음을 움직여 이에 공으로 옮겼다. 위왕과 선왕이 흐린 세상을 뽑아내고 오직 주나라를 종주로 높인 것을 아름답게 여겨 전경중완세가16을 짓는다.


周室既衰諸侯恣行仲尼悼禮廢樂崩追脩經術以達王道匡亂世反之於正見其文辭為天下制儀法垂六蓺之統紀於後世作孔子世家第十七

주나라 왕실이 쇠퇴한 후 제후들이 마음대로 행하였다. 중니(공자)가 예가 없어지고 악이 무너진 것을 슬퍼하여 경술을 쫓아 닦는 것으로서 왕도에 도달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바름으로 돌이키려 하였는데 그 글과 말을 보면 천하를 위해 의례와 법도를 만들고, 육예의 원칙을 후세에 드리웠으므로 공자세가17을 짓는다.

 

紂失其道而湯武作周失其道而春秋作[]秦失其政而陳涉發跡諸侯作難風起雲蒸卒亡秦族天下之端自涉發難作陳涉世家第十八

걸과 주가 그 도를 잃어서 탕왕과 무왕이 일어났고, 주나라가 그 도를 잃자 춘추가 지어졌다. 나라가 그 정사를 잃자 진섭이 자취를 폈고, 제후들이 난을 일으켜 바람이 일어 구름이 나아가듯 하니 마침내 진나라 족속이 망하였다. 천하의 바로잡힘이 진섭이 난을 일으킴으로부터였으므로 진섭세가18을 짓는다.


[] 正義周失其道至秦之時諸侯力事乎爭強

[] 正義주나라가 그 도를 잃고 진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제후들이 힘써 강함을 다툼에 종사하였다.

 

成皋之臺薄氏始基意適代厥崇諸竇栗姬偩王氏乃遂陳后太驕卒尊子夫嘉夫德若斯作外戚世家十九

성고의 대는 박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 뜻을 굽히고 대에 갔다가 여러 두씨가 높여졌다. 율희가 자부하여 귀해졌다가 왕씨들이 이에 이루었다. 진 황후가 크게 교만하자 마침내 자부를 높였다. 자부의 덕이 이 같음을 아름답게 여겨 외척세가19를 지었다.

 

漢既譎謀禽信於陳越荊剽輕乃封弟交為楚王爰都彭城以彊淮泗為漢宗藩戊溺於邪禮復紹之嘉游輔祖[]作楚元王世家二十

한이 솜임수를 써서 진에서 한신을 사로잡고, 월과 형()가 사납고 경박하다 여겨 이에 동생 교를 초왕으로 삼으니 이에 팽성에 도읍하고 회수와 사수 사이를 억지로 하여 한의 제후로 분봉된 종실로 삼았다. 무가 사간에 빠지니 예가 다시 그를 이었다. 유가 할아버지를 보조한 것을 아름답게 여겨 초원왕세가20을 지었다.


[] 正義游楚王交字也高祖也

[] 正義는 초왕 의 아들이다. ‘는 고조이다.


維祖師旅劉賈是與為布所襲喪其荊營陵激乃王琅邪[]信齊往而不歸遂西入關遭立孝文獲復王燕天下未集澤以族為漢藩輔作荊燕世家第二十一

고조가 군대를 일으켰을 때 유가가 함께하여 영포에게 엄습당하여 그 형과 오를 잃었다. 영릉후는 여태후를 감격시켜 이에 낭야에서 왕 노릇 하였고, 축오의 꾐으로 제를 믿고 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마침내 서쪽으로 관에 들어갔다가 효문제가 즉위하자 다시 연에서 왕 노릇할 수 있었다. 천하가 모아지지 않았을 때 가와 택은 황족으로서 한을 지키고 도왔다.(제후가 되었다.) 형연세가21을 지었다.


[] 正義謂祝午也

[] 正義축오를 말한다.

 

天下已平親屬既寡悼惠先壯實鎮東土哀王擅興發怒諸呂駟鈞暴戾京師弗許厲之內淫禍成主父嘉肥股肱作齊悼惠王世家第二十二

천하가 평정된 후 친속이 적었다. 도혜왕이 먼저 성인이 되어 동쪽 땅을 지켰다. 애왕이 멋대로 군대를 일으킨 것은 여러 여씨에게 노하였기 때문인데 사균씨가 사납고 어그러져 경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여왕이 안으로 음란하여 주보언에게 화를 입었다. 비가 고굉의 신하가 된 것을 아름답게 여겨 제도혜왕세가22를 지었다.


楚人圍我滎陽相守三年蕭何填撫山西[]推計踵給糧食不絕使百姓愛漢不樂為楚作蕭相國世家第二十三

초나라 사람들이 우리 형양을 둘러싸자 서로 지킨 지 3년 만에 소하가 산서를 평정하고 민심을 가라앉히고 백성을 미루어 헤아려서 군대를 보충하고 양식을 공급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한을 아끼게 하니 초나라를 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소상국세가23을 짓는다.


[] 正義謂華山之西也

[] 正義화산의 서쪽을 말한다.

 

與信定魏破趙拔齊遂弱楚人續何相國不變不革黎庶攸寧嘉參不伐功矜能作曹相國世家第二十四

(조참이)한신과 함께 나라를 안정시키고, 조나라를 깨트리며, 제나라를 함락하자 마침내 초나라 사삼들이 약해졌다. 소하의 재상 자리를 이어 변하지 않고 바꾸지 않아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조참이 공을 자랑하거나 능력을 자랑하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여겨 조상국세가24를 짓는다.


運籌帷幄之中制勝於無形子房計謀其事無知名無勇功圖難於易為大於細作留侯世家第二十五

장막 안에서 산대를 운용하여 형상이 없는 것을 제재하여 이겼던 것은 장자방이 그 일을 헤아리고 도모한 것이며, 이름을 알아주는 이가 없었고, 용맹과 공을 세운 것은 없으나 어려운 일은 쉬운 일에서 도모하고, 사소한 일에서 큰일을 하였다.(사소한 일을 하여 큰일을 이루었다. 유후세가25를 짓는다.


六奇既用諸侯賓從於漢呂氏之事平為本謀終安宗廟定社稷作陳丞相世家第二十六

여섯 가지 기이한 계책이 쓰여진 후 제후들이 한에 복종하였고, 여씨의 일은 진평이 본래 도모한 것으로 마침내 종묘를 편안하게하고, 사직을 안정시켰다. 진승상세가26을 짓는다.


諸呂為從謀弱京師而勃反經合於權吳楚之兵亞夫駐於昌邑以厄齊趙而出委以梁作絳侯世家第二十七

여러 여씨가 서로 따라 경사를 약하게 할 것을 도모하니 주발이 도리어 방편을 써서 법에 합치하게 하였고, 오초가 군대를 일으켰을 때 주아부가 창읍에 주둔하니 제와 조에게는 재앙이 되었고, 나가서는 양나라에 맡겼다. 강후세가27을 짓는다.

 

七國叛逆蕃屏京師唯梁為扞偩愛矜功幾獲于禍嘉其能距吳楚作梁孝王世家第二十八

일곱 나라가 반역하였을 때 경사를 지키던 제후들 중에 오직 양나라 만이 막았다. 사랑을 자랑하고 공을 자랑하다, 화를 얻었다. 오와 초를 잘 막은 것을 아릅답게 여겨 양효왕세가28을 짓는다.


五宗既王親屬洽和諸侯大小為藩爰得其宜僭擬之事稍衰貶矣作五宗世家第二十九

오종이 왕이 된 후 친속이 화합하였고, 크고 작은 제후들이 되어 이에 그 마땅함을 얻어 직분을 벗어나 윗 사람인체하는 일이 점점 없어졌다. 오종세가29를 짓는다.

 

三子之王文辭可觀作三王世家第三十

세 아들의 왕으로 봉함은 글과 말이 볼만하다. 삼왕세가30을 짓는다.

 

末世爭利維彼奔義讓國餓死天下稱之作伯夷列傳第一

말세에 이익을 다투었으나 오직 그들만은 의리에 달려가 나라를 양보하고 굶어죽으니 천하가 그를 칭찬하였다. 백이숙제열전1을 짓는다.


晏子儉矣夷吾則奢齊桓以霸景公以治作管晏列傳第二

안자는 검소하고 이오는 곧 사치하였으나 제나라 환공을 패자로 만들고 경공의 다스림을 이루었다. 관안열전2를 짓는다.

 

李耳無為自化清淨自正韓非揣事情循埶理作老子韓非列傳第三

이이는 함이 없어도 저절로 변화하게 하였고, 맑고 깨끗하여 스스로 바르게 되었다. 한비는 일마다 실정을 헤아려 형세와 이치를 따랐다. 노자한비열전3을 짓는다.


自古王者而有司馬法穰苴能申明之作司馬穰苴列傳第四

옛날부터 왕 노릇하는 자에게는 사마법이 있었는데 사마양저가 펴 밝힐 수 있었다. 사마양저열전4를 짓는다.


非信廉仁勇不能傳兵論劍與道同符內可以治身外可以應變君子比德焉作孫子吳起列傳第五

’, ‘’, ‘’, ‘이 아니면 병법을 전하고 검을 논할 수 없고, 도는 부절과 같이 꼭 맞아야 안으로는 자신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변화에 대응할 수 있으니 군자는 이에서 덕을 견주었다. 손자오기열전5를 짓는다.


維建遇讒爰及子奢尚既匡伍員奔吳作伍子胥列傳第六

건이 참소를 만나니 이에 오자서에게 미쳤고, 오상은 아버지를 구원하하다 죽었으며, 오원은 오나라로 달아났다. 오자서열전6을 짓는다.

 

孔氏述文弟子興業咸為師傅崇仁厲義作仲尼弟子列傳第七

공씨가 글을 서술하니 제자들이 업을 일으키고 모두 사부로 삼았으니 인을 높이고 의를 드날렸다. 중니제자열전7을 짓는다.


鞅去衛適秦能明其術彊霸孝公後世遵其法作商君列傳第八

상앙은 나라를 떠나 나라에 가서 그 법가의 술을 밝히고, 효공을 강한 패자로 만들었으며, 뒷 세상에서도 그 법을 따랐다. 상군열전8을 짓는다.

 

天下患衡秦毋饜而蘇子能存諸侯約從以抑貪彊作蘇秦列傳第九

천하가 연횡한 나라의 싫어함이 없음을 근심할 때 소진은 합종을 약속하는 것으로서 탐욕과 강함을 억제하여 제후를 보존할 수 있었다. 소진열전9를 짓는다.


六國既從親而張儀能明其說復散解諸侯作張儀列傳第十

육국이 합종하여 친해지자 장의가 그 유세를 밝게하여 다시 제후를 흩었다. 장의열전10을 지었다.

 

秦所以東攘[]雄諸侯樗里甘茂之策作樗里甘茂列傳第十一

나라가 동쪽으로 제후를 물리치고 군림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저리와 감무의 계책 때문이다. 저리감무열전11을 짓는다.

 

[] 集解徐廣曰:「一作』。」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이라 쓴다.” 했다.

 

苞河山[]圍大梁使諸侯斂手而事秦者魏冉之功作穰侯列傳第十二

하와 화산을 차지하고 대량을 둘러싸고는 제후들로 하여금 손을 거두어 나라를 섬기게 한 것은 위빙의 공이었다. 양후열전12를 짓는다.

 

[] 集解徐廣曰:「一作』。」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그령 포)’는 한편으로 라 쓴다.

 

南拔鄢郢北摧長平遂圍邯鄲武安為率破荊滅趙王翦之計作白起王翦列傳第十三

남쪽으로 언과 영을 함락하고, 북쪽으로 장평을 꺽고 마침내 한단을 둘러쌀 수 있었던 것은 무안군이 통솔하였기 때문이다. ()을 깨트리고 조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왕전의 계책 때문이다. 백기왕전열전13을 짓는다.

      

獵儒墨之遺文明禮義之統紀絕惠王利端列往世興衰[]作孟子荀卿列傳第十四

유가와 묵가의 남은 글을 섭렵하고 예의의 정통을 밝히고, 혜왕이 이익을 추구하는 실마리를 끊고 지난 세대의 흥하고 쇠퇴함을 나열하였다. 맹자순경열전14를 짓는다.


[] 集解徐廣曰:「一作』。」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라 쓴다.” 했다.

 

好客喜士士歸于薛為齊扞楚魏作孟嘗君列傳第十五

객을 좋아하고 선비를 기쁘게 하여 선비가 설에 돌아가게 하며, 제나라를 위해 초와 나라를 막았다. 맹상군열전15를 짓는다.

 

爭馮亭以權[]如楚以救邯鄲之圍使其君復稱於諸侯作平原君虞卿列傳第十六

풍정과 권세를 다투다 초나라에 가서 한단의 포위를 구원하고, 그 임금으로 하여금 다시 제후에게 일컬어지게 하였다. 평원군우경열전16을 짓는다.


[] 集解徐廣曰:「一作』。太史公譏平原曰利令智昏』,故云爭馮亭反權。」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는 한편으로 이라 쓴다. 태사공이 평원군을 꾸짖어 말하기를 이익은 지혜를 어둡게 한다.’했다. 그러므로 풍정과 다투어 권세를 되돌렸다.” 했다.

 

能以富貴下貧賤賢能詘於不肖唯信陵君為能行之作魏公子列傳第十七

부귀한 신분이면서도 빈천한 이에게 낮출 수 있었고, 현명하면서도 어리석은 이에게 굽힐 수 있었던 이는 오직 신릉군만이 행할 수 있었다. 위공자열전17을 짓는다.

 

以身徇君遂脫彊秦使馳說之士南鄉走楚者黃歇之義作春申君列傳第十八

몸으로 임금을 따라 마침내 강한 나라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하였고, 유세하는 선비로 하여금 남쪽으로 초나라로 향하게 한 것은 황갈의 의리 때문이었다. 춘신군열전18을 짓는다.


能忍詬於魏齊[]而信威於彊秦推賢讓位二子有之作范睢蔡澤列傳第十九

, 제나라에서 받은 부끄러움을 참고, 강한 나라에서 신임을 받아 위엄을 떨쳤고, 어진 이를 추천하고 왕위를 양보하였는데 두 사람에게 그것이 있었다. 범수채택열전19를 짓는다.

 

[] 集解徐廣曰:「詬音逅。」 索隱詬火候反辱也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꾸짖을 후)’의 음은 (만날 후)’이다.” 했다. 索隱이다. ‘는 욕이다.

 

率行其謀連五國兵為弱燕報彊齊之讎雪其先君之恥作樂毅列傳第二十

그 계책에 따라 통솔하고 행하고, 다섯 나라를 이어 약한 연나라를 위해 강한제나라에 원수를 갚아 그 죽은 임금의 수치를 씻었다. 악의열전20을 짓는다.


能信意彊秦而屈體廉子用徇其君俱重於諸侯作廉頗藺相如列傳第二十一

강한 나라에게 뜻을 펴고 염파에게 몸을 굽혀, 그 임금을 따라 죽음을 쓰니 모두 제후에게 중시되었다. 염파인상여열전21을 짓는다.


湣王既失臨淄而奔莒唯田單用即墨破走騎劫遂存齊社稷作田單列傳第二十二

민왕이 임치를 잃고 거로 도망하였는데 오직 전단만은 즉묵을 지키며 기겁을 깨트려 달아나게 하여 마침내 제나라의 사직을 지켰다. 전단열전22를 짓는다.

 

能設詭說解患於圍城輕爵祿樂肆作魯仲連鄒陽列傳第二十三

속이는 말을 베풀어 포위된 성에서 근심을 풀고, 작과 록을 가벼이 여기며 즐거이 뜻을 마음대로 하였다. 노중련추양열전23을 짓는다.


作辭以諷諫連類以爭義離騷有之作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

를 지어서 풍자하고 간쟁하며 비슷한 것을 잇는 것으로서 의를 다투었는데 이소에 그것이 있다. 굴원가생열전24를 짓는다.

 

結子楚親使諸侯之士斐然爭入事秦作呂不韋列傳第二十五

자초와 친함을 맺어 제후의 선비로 하여금 현저하게 다투어 진에 들어가 섬기게 하였다. 여불위열전25을 짓는다.


曹子匕首魯獲其田齊明其信豫讓義不為二心作刺客列傳第二十六

조말은 비수로 노나라가 그 땅을 얻게 하고 제나라는 그 믿음을 밝혔다. 에양은 의리를 지켜 두 마음을 삼지 않았다. 자객열전26을 짓는다.


能明其畫因時推秦遂得意於海內斯為謀首作李斯列傳第二十七

그림 그리듯 계책을 분명하게 하고, 때에 따라 진나라에서 추진하여 마침내 해내에서 뜻을 얻어 이에 모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사열전27을 지었다.

 

為秦開地益眾北靡匈奴據河為塞因山為固建榆中作蒙恬列傳第二十八

나라를 위하여 땅을 열고 무리를 더하고 북쪽으로 흉노를 쓰러드리며 하에 의지하여 요새를 삼고 산을 인하여 견고함을 삼아 유중을 세웠다. 몽렴열전28을 짓는다.

 

填趙塞常山以廣河內弱楚權明漢王之信於天下作張耳陳餘列傳第二十九

조나라를 지키고 상산을 막는 것으로서 하내를 넓혔고, 초나라를 방편으로 약하게 하여 한왕의 신뢰를 천하에 밝혔다. 장이진여열전29를 짓는다.


收西河上黨之兵從至彭城越之侵掠梁地以苦項羽作魏豹彭越列傳第三十

서하와 상당의 군대를 거두어 한왕을 따라 팽성에 이르렀고, 월이 가서 양의 땅을 침범하고 노략질하는 것으로서 항우를 괴롭혔다. 위표팽월열전30을 짓는다.

 

以淮南叛楚歸漢漢用得大司馬殷卒破子羽于垓下[]作黥布列傳第三十一

회남이 초에 반란을 일으켜 한에 돌아가니 한이 대사마 은을 얻어 등용하고 마침내 아들 항우를 해하에서 깨트렸다. 경포열전31을 짓는다.


[] 集解徐廣曰:「塘之名也。」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둑과 못의 이름이다.” 했다.

 

楚人迫我京索而信拔魏趙定燕齊使漢三分天下有其二以滅項籍作淮陰侯列傳第三十二

초나라 사람들이 우리 경성과 색성을 압박할 때 한신은 위와 조나라를 함락하여 연과 제나라를 평정하고 한으로 하여금 천하를 셋으로 나눌 때 그 둘을 소유하게 하는 것으로서 항적을 멸망시켰다. 회음후열전32를 짓는다.


楚漢相距鞏洛而韓信為填潁川盧綰絕籍糧餉作韓信盧綰列傳第三十三

초와 한나라가 공과 낙에서 대치하였는데 한신은 영천을 지켰고, 노관은 항적의 식량을 끊었다. 한신노관열전33을 짓는다.

 

諸侯畔項王唯齊連子羽城陽漢得以閒遂入彭城作田儋列傳第三十四

제후들이 항왕을 배반하였는데 오직 제나라만은 성양에서 아들 항우와 연결하였고, 한이 틈을 타서 마침내 팽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전담열전34를 짓는다.


攻城野戰獲功歸報商有力焉非獨鞭策又與之脫難作樊酈列傳第三十五

성을 공격하고 들에서 싸우는데 공을 얻고 돌아가 보고하는 데는 번쾌와 역상이 힘씀이 있었으며 유독 말채찍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함께 어려움을 벗어났다. 번역열전35를 짓는다.

 

漢既初定文理未明蒼為主計整齊度量序律曆作張丞相列傳第三十六

한이 처음으로 안정되었으나 문물과 제도가 분명하지 못하였는데 장창이 재정을 담당하여 도량을 정리하고 가지런하게 하고, 율과 달력을 바로잡았다. 장승상열전36을 짓는다.


結言通使約懷諸侯諸侯咸親歸漢為藩輔作酈生陸賈列傳第三十七

말로 맺고 사신을 통하여 제후를 묶고 품었고, 제후들이 모두 친해지자 한에 돌아가 지키고 보좌하였다. 역생육가열전37을 짓는다.

 

欲詳知秦楚之事維周緤常從高祖平定諸侯作傅靳蒯成[]列傳第三十八

진과 초나라의 일을 자세히 알고자 한다면 주설이 항상 고조를 따라 제후를 평정하였다. 부근괴성열전38을 짓는다.

 

[] 索隱蒯成上音裴其字音從崩邑又音浮

[] 索隱괴성은 위의 음은 이고 그 글자의 음은 붕읍을 따르고 또한 음은 이다.

 

徙彊族都關中和約匈奴明朝廷禮次宗廟儀法作劉敬叔孫通列傳第三十九

강한 씨족을 옮기고 관중에 도읍하며 흉노와 화약하고, 조정의 에를 밝히며 종묘의 의례와 법을 차례하였다. 유경숙손통열전39를 짓는다.

 

能摧剛作柔卒為列臣欒公不劫於埶而倍死作季布欒布列傳第四十

강한 것은 누르고 부드러운 것은 일으켜서 마침내 신하로 반열되었고, 난포는 형세를 겁내지 않아 모시다 죽었다. 계포난포열전40을 짓는다.

 

敢犯顏色以達主義不顧其身為國家樹長畫作袁盎朝錯列傳第四十一

감히 얼굴색을 범하는 간쟁으로서 주장하는 뜻에 이르렀고, 그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긴 계책을 세웠다. 원앙조착열전41을 짓는다.


守法不失大理言古賢人增主之明作張釋之馮唐列傳第四十二

법을 지켜 큰 이치를 잃지 않았고, 옛 현인을 말하여 임금의 밝음을 더하였다. 장석지풍당열전42를 짓는다.


敦厚慈孝訥於言敏於行務在鞠躬君子長者作萬石張叔列傳第四十三

성격이 너그럽고 두터우며 자애롭고 효성스러웠다. 말은 어눌하나 행동에는 민첩하였고, 힘쓰는 것은 몸을 굽힘에 있어 군자나 장자의 모습을 갖추었다. 만석장숙열전43을 짓는다.

 

守節切直義足以言廉行足以厲賢任重權不可以非理撓作田叔列傳第四十四

절개를 지키고 강직하며 의는 충분히 청렴을 말할 수 있고, 행실은 충분히 어진 사람을 격려할 만하고 중요한 권세를 맡겨도 이치가 아니면 껏을 수 없다. 전숙열전44를 짓는다.

 

扁鵲言醫為方者宗守數精明後世[]弗能易也而倉公可謂近之矣作扁鵲倉公列傳第四十五

편작은 의술을 말하였는데 같은 무리로는 종주가 되고, 의술은 정밀하고 밝아서 후세는 차례를 따랐을 뿐 바꾸지 못하였으나 창공만은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편작창공열전45를 짓는다.

 

維仲之省[]厥濞王吳遭漢初定以填撫江淮之閒作吳王濞列傳第四十六

유중은 제후의 지위를 깍였으나, 그 아들 비는 오에 왕으로 봉해졌다. 한이 처음 평정됨을 만났을 때 강과 회수 사이를 막고 어루만졌다. 오왕비열전46을 짓는다.


[] 集解徐廣曰:「吳王之王由父省。」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오왕의 왕됨은 아버지의 깍임에서 말미암았다.” 했다.

 

吳楚為亂宗屬唯嬰賢而喜士士鄉之率師抗山東滎陽作魏其武安列傳第四十七

오와 초가 반란을 일으키자 황족들 중에 오직 영 만이 어질어서 선비를 좋아하니 선비들이 그를 향하였다. 군대를 통솔하여 산동의 형양에서 대항하였다. 위기무안열전47을 짓는다.


智足以應近世之變寬足用得人作韓長孺列傳第四十八

지혜는 충분히 근세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고, 너그러움은 충분히 다른 사람을 얻어 쓸 수 있었다. 한장유열전48을 짓는다.

 

勇於當敵仁愛士卒號令不煩師徒鄉之作李將軍列傳第四十九

용맹함은 적을 감당할 수 있고, 으로 사졸을 아꼈고, 명령을 내림이 번거롭지 않아 군대의 무리의 마음이 그를 향하였다. 이장군열전49를 짓는다.


自三代以來匈奴常為中國患害欲知彊弱之時設備征討作匈奴列傳第五十

삼대(, , )이래로부터 흉노는 항상 중국의 근심과 해침이 되었는데 강해지고 약해지는 때를 알아서 정벌을 베풀고 대비하고자 했다.흉노열전50을 짓는다.

 

直曲塞廣河南破祁連通西國靡北胡作衛將軍驃騎列傳第五十一

구불구불한 변경의 길을 곧게하고 하남을 넓혔으며 기련산에서 흉노를 개트렸으며 서쪽의 나라와 통하고 북쪽 오랑캐를 쓰러뜨렸다.위장군표기열전51을 짓는다.

 

大臣宗室以侈靡相高唯弘用節衣食為百吏先作平津侯列傳第五十二

대신과 황족들이 사치함으로서 서로 높였는데 오직 공손홍만은 의식을 절약하여 써서 모든 관리의 모범이 되었다. 평진후열전52를 짓는다.


漢既平中國而佗能集楊越以保南藩納貢職作南越列傳第五十三

한이 중국을 평정한 후 조타가 양월을 모으는 것으로서 남쪽 번(제후)이 되어 조공하였다.남월열전53을 짓는다.


吳之叛逆人斬濞[]葆守封禺[]為臣作東越列傳第五十四

오가 반역하자 구 사람들이 비를 죽이고 봉산과 우산을 지키면서 신하가 되었다. 동월열전54를 짓는다.

 

[] 集解徐廣曰:「今之永寧是東甌也。」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지금의 영녕이니 이는 동구이다.“ 했다.

 

[] 索隱上音保言東甌被越攻破之後保封禺之山今在武康縣也

[] 索隱위의 음은 이다. 동구가 월의 공격을 받아 깨트려진 후 봉과 의 산을 지켰는데 지금 무강현에 있다.

 

燕丹散亂遼閒滿收其亡民厥聚海東以集真藩[]葆塞為外臣作朝鮮列傳第五十五

연의 태자 단이 요수 사이에 흩어져 혼란하였는데 위만이 그 도망한 백성을 거두어 해동으로 가서 진번을 모아 변경을 지키는 외신이 되었다. 조선열전55를 짓는다.

 

[] 集解徐廣曰:「一作』。藩音普寒反。」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이라 쓴다. ‘의 음은 이다.

 

唐蒙使略通夜郎而邛笮之君請為內臣受吏作西南夷列傳第五十六

당몽을 사신으로 보내 야랑과 통하니 공과 착의 임금이 내신이 되어 한의 관리들을 받아들였다.서남이열전56을 짓는다.

 

子虛之事大人賦說靡麗多誇然其指風諫歸於無為作司馬相如列傳第五十七

자허부의 일과 대인부의 말은 아름다우나 과장이 많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풍자하고 간하여 무위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사마상여열전57을 짓는다.


黥布叛逆子長國之以填江淮之南安剽楚庶民作淮南衡山列傳第五十八

경포가 반역하니 아들 장의 나라로 하고 강과 회수의 남쪽을 지키게 하여 사나운 초나라의 백성들을 안정시켰다. 회남형산열전58을 짓는다.

 

奉法循理之吏不伐功矜能百姓無稱亦無過行作循吏列傳第五十九

법을 받들고 이치를 따르는 관리는 공과 능력을 자랑하지 않아 백성들이 칭찬함이 없으나 또한 지나친 행실이 없다. 순리열전59를 짓는다.

 

正衣冠立於朝廷而群臣莫敢言浮說長孺矜焉好薦人稱長者壯有溉[]作汲鄭列傳第六十

의관을 바로하고 조정에 서니 여러 신하들이 감히 헛된 유세를 하지 못하였는데 장유가 그런 사란이었다. 사람을 추천하기를 좋아하고 장자라 칭송받은 것은 정장이 기개가 있었기 때문이다.급정열전60을 짓는다.

 

[] 集解徐廣曰:「一作』。」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분개할 개)’라 쓴다.” 했다.

 

自孔子卒京師莫崇庠序唯建元元狩之閒文辭粲如也作儒林列傳第六十一

공자가 죽은 후 경사에 학교를 숭상함이 없고, 오직 건원과 원수 사이에 문사가 찬란하였을 뿐이다.유림열전61을 짓는다.

 

民倍本多巧姦軌弄法善人不能化唯一切嚴削為能齊之作酷吏列傳第六十二

백성들이 근본을 등지고, 공교로움을 많이 하고, 간사함을 쫓고 법을 농단하여 善人이 교화할 수 없었다. 오직 엄격하고 깍는 것으로 그들을 가지런하게 할 수 있었다.혹리열전62를 짓는다.

 

漢既通使大夏而西極遠蠻引領內鄉欲觀中國作大宛列傳第六十三

한이 사신을 보내 대하에 통하니 서쪽으로 지극히 먼 오랑캐가 옷깃을 이끌고 안을 향하여 중국을 보고자 하였다. 대완열전63을 짓는다.

 

救人於厄振人不贍仁者有乎不既信[]不倍言義者有取焉作游俠列傳第六十四

사람을 재앙에서 구원하고 넉넉하지 않은 사람을 구휼하니 仁者라 불릴만하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자기가 한 말을 저버리지 않으니 의로운 자라 할만하다. 유협열전64를 짓는다.


[] 集解徐廣曰:「一云不慨信』。」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不慨信이라 한다.” 했다.

 

夫事人君能說主耳目和主顏色而獲親近非獨色愛能亦各有所長作佞幸列傳第六十五

대저 임금을 섬기면서 임금의 귀와 눈을 기쁘게 할 수 있고 임금의 안색을 온화하게 하여 친하여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미색으로 사랑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각기 장점인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열행열전65를 짓는다.


不流世俗不爭埶利上下無所凝滯人莫之害以道之用作滑稽列傳第六十六

세속에 휩슬리지 않고 권세와 이익을 다투지 않으며 상하가 엉기고 막힘이 없이 다른 사람을 해침이 없는 것은 도로서 썼기 때문이다. 골계열전66을 짓는다.

 

趙為日者各有俗[]所用欲循[]觀其大旨作日者列傳第六十七

, , , 조나라의 점쟁이가 돤자는 각기 풍속에 쓰이는 바가 있었다. 그 큰 뜻을 따라 관찰하고자 하여 일자열전67을 짓는다.

 

[] 索隱案日者傳云無以知諸國之俗」,今褚先生唯記司馬季主之事也

[] 索隱살펴보니 일자전여러 나라의 풍속을 알 수 없다.”하였고, 지금 저선생은 오직 사마계주의 일을 기록하였을 뿐이다.


[] 集解徐廣曰:「一作』。」

[] 集解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이라 쓴다.” 했다.

 

三王不同龜四夷各異卜然各以決吉凶略闚其要作龜策列傳[]第六十八

삼대의 거북점은 같지 않았고, 주변 이민족도 점치는 것이 각기 달랐다. 그러나 각기 길흉을 점으로 길흉을 결단하였다. 대략적으로 그 요점을 살펴보아 귀책열전68을 짓는다.]

      

[] 索隱三王不同龜四夷各異卜其書既亡無以紀其異今褚少孫唯取太卜占龜之雜說詞甚煩蕪不能裁剪妄皆穿鑿此篇不才之甚也

[] 索隱삼대 왕들의 거북점은 같지 않았고, 네 이민족의 점치는 것도 서로 달랐다. 그 글이 이미 없어져 그 다름을 기록할 수 없다. 지금 저소손의 태복점과 거북점의 잡설을 취할 뿐인데 말이 매우 쓸모없이 번거로우나 재단하여 깍을 수 없어 망녕되이 모두 천착하였으니 이편은 재능이 뛰어난 것이 아니다.


布衣匹夫之人不害於政不妨百姓取與以時而息財富智者有采焉作貨殖列傳第六十九

베옷 입은 필부의 사람은 정사에서 해치지 않고 백성을 방해하지 않으며 때에 맞게 물건을 취하거나 주어서(팔아서) 재부를 늘였다. 지헤로운 자는 여기에서 캘 것이 있을 것이다. 화식열전69를 짓는다.


維我漢繼五帝末流接三代[]周道廢秦撥去古文焚滅詩書故明堂石室金匱玉版[]圖籍散亂於是漢興蕭何次律令韓信申軍法張蒼為章程[]叔孫通定禮儀則文學彬彬稍進詩書往往閒出矣自曹參薦蓋公[]言黃老而賈生晁錯明申公孫弘以儒顯百年之閒天下遺文古事靡不畢集太史公太史公仍父子相續纂其職:「於戲余維先人嘗掌斯事顯於唐虞至于周復典之故司馬氏世主天官[]至於余乎欽念哉欽念哉!」罔羅天下放失舊聞[]王跡所興原始察終見盛觀衰論考之行事略推三代錄秦漢上記軒轅下至于茲著十二本紀既科條之矣並時異世年差不明[]作十表禮樂損益律曆改易兵權山川鬼神[]天人之際承敝通變作八書二十八宿環北辰三十輻共一轂[]運行無窮輔拂股肱之臣配焉忠信行道以奉主上作三十世家扶義俶不令己失時[]立功名於天下作七十列傳凡百三十篇五十二萬六千五百字為太史公書[]序略以拾遺補蓺[一一]成一家之言厥協六經異傳[一二]整齊百家雜語[一三]藏之名山副在京師[一四]俟後世聖人君子[一五]第七十[一六]

우리 한은 오제의 뒤를 잇고 삼대의 업을 이었다. 주나라의 도가 없어진 것은 나라가 옛글을 없애고, 시와 서를 불살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당, 석실의 금궤와 옥판, 圖籍들이 흩어지고 어지러워졌다. 이에 한이 흥기하여 소하는 율령을 차례하였고, 한신은 군법을 폈으며, 장창은 법규를 만들었고, 숙손통은 예의를 정하였으니 곧 문학이 찬란하게 빛나고 점점 나아가 시와 서가 자주 세상 사이에 나왔다. 조참이 개공을 천거함으로부터 황노를 말하였고, 가생과 조착이 신자와 상군의 법을 밝혔다. 공손홍은 유학으로 드러나 백년 사이에 천하에 남겨진 글과 옛 일들이 태사공에게 모이지 않음이 없었다. 태사공이 그대로 부자가 그 직책을 서로 이어 편찬하였다. 말하기를 아 나의 先人이 일찍이 이 일을 관장하여 당우 때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주나라에 이르러 다시 그 직책을 맡았다. 그러므로 사마씨는 대를 이어 천관을 주관하였다. 나에게 이르렀는가? 생각을 공경히 할 것이라! 생각을 공경히 할 것이라!” 했다. 천하에 흩어진 옛날에 들은 것을 두루 모아 왕의 자취가 일어난 바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폈는데 성대함을 드러내고 쇠퇴함을 관찰하되 일을 행함을 논하고 살펴서 대략 삼대는 미루어 보고, 진과 한나라는 기록에 유추하여 위로는 헌원으로부터 아래는 여기에 이르기까지를 12본기를 저술하였는데 모두 조목으로 나열하였다. 때가 같기도 하고 세대가 다르기도 하여 그 연대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아 10개의 연표를 지었다. 예악의 덜고 더함과 율력의 고치고 바꾼 것과 군대와 방편, 산천, 귀신, 하늘과 사람의 사이는 그 잘 알 수 없는 것은 구해 보충하고 변화를 통하게 하여 서 8편을 지었다. 28수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30개 바퀴살이 한 개 바퀴통에 집중하나 운행은 끝이 없듯이 왕을 보필하던 고굉지신을 여기에 비유하여 충과 믿음으로 두를 행하고 임금을 받들었으니 세가 30편을 짓는다. 의를 돕고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며 때를 잃지 않고 천하에 공과 이름을 세웠으니 열전 70편을 지었다. 모두 130526,500자를 태사공서라 이름지었다. 서문은 대략적으로 흩어진 것을 수습하고 육의의 빠진 것을 보충하여 一家의 말을 이루고 6경과 다른 전들을 합하였으며 백가의 여러 말들을 정리했다. (정본)울 이름있는 산에 감추고 부본은 경사에 두어 후세의 성인과 군자를 기다린다. 이것이 열전 70이다.

 

[] 集解如淳曰:「刻玉版以為文字。」

[] 集解여순이 말하기를 옥판을 새겨서 문자를 쓴다.” 했다.

 

[] 集解如淳曰:「曆數之章術也程者權衡丈尺斛斗之平法也。」瓚曰:「茂陵書丞相為工用程數其中』,言百工用材多少之量及制度之程品者是也。」

[] 集解여순이 말하기를 “‘은 역수의 장술이다. ‘저울, , 양을 재는 도구의 평법이다.” 했다. 찬이 말하기를 무릉서丞相為工用程數其中(승상이 장인을 위해 정수는 그 가운데를 쓰도록 했다.)’라 하였으니 모든 장인이 재료를 쓰는 것은 많고 적음의 양과 제도의 정품이다. 한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이다.” 했다.


[] 索隱蓋姓也古合反

[] 索隱는 성인데 이다.

 

[] 索隱案此天官非周禮冢宰天官乃謂知天文星曆之事為天官且遷實黎之後而黎氏後亦總稱重黎以重本司天故太史公代掌天官蓋天官統太史之職言史是歷代之職恐非實事然衛宏以為司馬氏周史佚之後故太史談云予之先人周之太史」,蓋或得其實也

[] 索隱살펴보니 여기의 천관주례총재의 천관이 아니니 곧 천문과 별, 역법의 일을 아는 것을 일러 천관이라 했다. 또 사마천은 실여씨의 후예인데 여씨의 후예들이 또한 중여를 총칭하는 것으로서 거듭 司天을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태사공이 대대로 천관을 담당한 것이니 대개 천관의 전통은 태사의 직책이었다. 사기에서 말한 이 역대의 직책은 아마도 실제의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위굉은 사마씨가 주나라 사관 일의 후예로 여겼기 때문에 태사의 말씀에 나의 선조는 주나라의 태사이다.” 한 것은 대개 혹 그 실제를 얻은 것이다.


[] 索隱案舊聞有遺失放逸者網羅而考論之也

[] 索隱살펴보니 옛날에 들은 것. 빠트리고 잃어버린 것, 흩어진 것을 망라하여 고찰하고 논하는 것이다.

 

[] 索隱案並時則年曆差殊亦略言難以明辯故作表也

[] 索隱살펴보니 때를 아우르면 곧 연대가 차이나 달라지니 또한 말을 대략적으로 하여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를 지은 것이다.


[] 索隱案兵權即律書也遷沒之後褚少孫以律書補之今律書亦略言兵也山川即河渠書也鬼神封禪書也故云山川鬼神也

[] 索隱살펴보니 병권은 곧 율서이다. 사마천이 죽은 후 없어졌으나 저소손이 율서를 가지고 보충하였다. 지금의 율서가 또한 대략 군대를 말한다. ‘산천은 곧 하구서이다. 귀신은 봉선서이다. 그러므로 산천과 귀신이라 한 것이다.


[] 集解駰案漢書音義曰象黃帝以下三十世家老子言車三十輻運行無窮以象王者如此也」。正義顏云:「此說非也言眾星共繞北辰諸輻咸歸車群臣尊輔天子也。」

[] 集解인이 살펴보니 한서음의황제 이하 30편의 세가를 상징한 것인데 노자가 말한 수레의 30개 바퀴살의 운행이 무궁하다.’ 한 것으로서 왕 노릇 하는 자가 이 같음을 상징한 것이다.” 했다. 正義안이 말하기를 이 말은 잘못이다. 여러 별들은 북극성을 향해 함께 돌고, 여러 바퀴살이 모두 수레로 돌아간다. 한 것은 여러 신하들이 천자를 높이고 보좌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다.


[] 索隱己音紀言扶義倜儻之士能立功名於當代不後於時者也

[] 索隱의 음은 이다. 의를 부축하는 호방하고 기개있는 선비는 그 시대에 공과 이름을 세울 수 있어서 때를 뒤따르는 것이 아니다.


[] 索隱案桓譚云遷所著書成以示東方朔朔皆署曰太史公』,則謂太史公是朔稱也亦恐其說未盡蓋遷自尊其父著述稱之曰』。或云遷外孫楊惲所稱事或當爾也」。

[0] 集解살펴보니 환담이 말하기를 사마천이 글을 쓰고 이룬 것을 동박삭에게 보이니 동방삭이 모두 태사공이라 서명하였다. 태사공은 이 동방삭이 말한 것이니 일이 혹 마땅하다.

 

[一一] 集解李奇曰:「六蓺也。」 索隱案漢書作補闕」,此云」,謂補六義之闕也

[一一] 集解이기가 말하기를 六蓺이다. 索隱】 『한서에는 補闕(빠진 것을 보충하다.)” 라 썼으니 이는 를 말한 서이니 육의의 빠진 것을 보충함을 말한 것이다.

 

[一二] 索隱遷言以所撰取協於六經異傳諸家之說耳謙不敢比經蓺也異傳者如子夏易傳毛公詩及韓嬰外傳伏生尚書大傳之流者也

[一二] 索隱사마천이 지은 것이 육경, 異傳, 제가의 말을 취하였을 뿐이라 한 것은 겸손하여 감히 경예에 비견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異傳은 자하의 역전, 모공의 시, 한영이 외전, 복성의 상서대전따위와 같은 것이다.

 

[一三] 正義太史公撰史記言其協于六經異文整齊諸子百家雜說之語謙不敢比經藝也異傳謂如丘明春秋外傳國語子夏易傳毛公詩傳韓詩外傳伏生尚書大傳之流也

[一三] 正義태사공이 사기를 짓고 그 육경의 다른 글을 조화롭게 하고, 제자백가의 섞인 주장의 말을 정돈하였다고 말한 것은 겸손하게 감히 경예에 견줄 수 없다. 한 것이다. ‘異傳은 좌구명의 춘추외전, 국어, 자하의 역전, 모공의 시전 , 한시외전, 복생의 상서대전따위를 말한다.


[一四] 索隱言正本藏之書府副本留京師也穆天子傳云天子北征至于群玉之山河平無險四徹中繩先王所謂策府」。郭璞云古帝王藏策之府」。則此謂藏之名山是也

[一四] 索隱정본은 서부에 보관하고, 부본은 경사에 두는 것이다. 목천자전에 말하기를 천자가 북쪽으로 정벌을 가서 군옥산에 이르렀는데 하는 평온하고 험함이 없어 네 개의 바퀴자국이 먹줄에 꼭 맞은 듯하니 선왕이 이른 바 책부이다.” 했다. 곽복이 말하기를 옛날 제왕이 계책을 보관하는 창고이다.” 하니 곧 이름있는 산에 보관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다.

 

[一五] 索隱以俟後聖君子此語出公羊傳言夫子制春秋以俟後聖君子亦有樂乎此也

[一五] 索隱뒤의 성인과 군자를 기다린다.’는 이 말은 춘추공양전에 나온다. 공자(선생이)춘추를 짓고서 뒤의 성인과 군자를 기다리는 것이 또한 이보다 즐거운 것이 있겠는가? 한 것이다.

 

[一六] 集解駰案衛宏漢書舊儀注曰司馬遷作景帝本紀極言其短及武帝過武帝怒而削去之後坐舉李陵陵降匈奴故下遷蠶室有怨言下獄死」。

[一六] 集解인이 살펴보니 위광의 한서구의주석에 말하기를 사마천이 경제본기를 지으면서 그 단점과 무제의 허물을 극언하니 무제가 노하여 벼슬을 깍았다. 후에 이릉을 천거한 죄에 연루되었다가 이릉이 흉노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사마천을 잠실에 내려보냈다. 원망하는 말이 있어서 옥에 내려 죽였다.” 했다.

 

太史公曰余述歷黃帝以來至太初而訖百三十篇[]

태사공이 말하기를 내가 황제이래로부터 태초에 이르기까지 서술하여 마쳤으니 130편이다.

 

[] 集解駰案漢書音義曰十篇缺有錄無書」。張晏曰遷沒之後亡景紀武紀禮書樂書律書漢興已來將相年表日者列傳三王世家龜策列傳傅靳蒯列傳元成之閒褚先生補闕作武帝紀三王世家龜策日者列傳言辭鄙陋非遷本意也」。索隱案漢書曰十篇有錄無書」。

[] 集解인이 살펴보니 한서음의10편이 빠졌는데 기록은 있으나 글은 없다.” 했다. 장안이 말하기를 사마천이 죽은 후 경제기, 무기, 예서, 악서, 율서, 한이 흥기한 이래 장상연표, 일자열전, 삼왕세가, 귀책열전, 부근괴열전이 없어졌다.” 했다. 원성 연간에 저선생이 빠진 것을 보충하고 무제기, 삼왕세가, 귀책, 일자열전을 지었으나 말이 비루하니 사마천의 본래 뜻이 아니다. 索隱살펴보니 한서에 말하기를 “10편은 기록은 있으나 글이 없다.” 했다.

 

張晏曰遷沒之後亡景紀武紀禮書樂書兵書將相表三王世家日者龜策傳傅靳等列傳也」。景紀取班書補之武紀專取封禪書禮書取荀卿禮論樂取禮樂記兵書亡不補略述律而言兵遂分曆述以次之三王系家空取其策文以緝此篇何率略且重非當也日者不能記諸國之同異而論司馬季主龜策直太卜所得占龜兆雜說而無筆削之功何蕪鄙也

장안이 말하기를 사마천이 죽은 후 경기, 무기, 예서, 악서, ‘병서, 장상표, 삼왕세가, 일자, 귀책전, 부근등열전을 잃어버렸다.” 했다. 살펴보니 경기는 반서(한서)에서 취하여 보충하였고, 무기는 오직 봉선서에서 취하였고, 예서는 순경의 예론에서 취하였고, 악은 예기악기에서 취하였다. 병서는 없어서 보충하지 못하고 개략적으로 율을 서술하면서 군대를 말하였고, 마침내 역을 나누어 서술하는 것으로서 차례하였다. 삼왕의 가계는 한갓 그 계책의 글을 취하여 이 편을 이었으니 대개 간략하면서도 또한 중하나 마땅한 것이 아니다. ’일자는 여러 나라의 같고 다름을 여러 나라의 같고 다름을 기록할 수 없어서 사마계주를 논하였다. 귀책은 다만 태복이 얻은 바의 점괘와 거북의 조짐을 섞어 말하여 더 쓸 것은 쓰고, 지울 것은 지워버리는 공이 없다. 왜냐하면 난잡하고 비루하기 때문이다.

 

索隱述贊太史良才寔纂先德周遊歷覽東西南北事覈詞簡是稱實錄報任投書申李下獄惜哉殘缺非才妄續

索隱述贊태사의 어진 재주로 이에 선조의 덕을 편찬하였다. 두루 노닐면서 차례 살펴보기를 사방에서에서 하였다. 일의 실상을 조사하여 죽간에 글을 써 알렸는데 이를 실록이라 말한다. 친구 임안에게 글을 보내고 이릉의 죄에 연좌되어 옥에 갇혔다. 애석하다 이지러져 완전하지 못하고, 재능이 아니면서 망녕되이 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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