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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연의

제11회 유황숙이 북해 공융을 구하고, 여온후가 복양에서 조조를 깨트리다.

by 최인표 2020. 1. 30.

第十一回劉皇叔北海救孔融呂溫侯濮陽破曹操

11회 유황숙이 북해 공융을 구하고, 여온후가 복양에서 조조를 깨트리다.

 

卻說獻計之人乃東海朐縣人姓糜名竺字子仲此人家世富豪嘗往洛陽買賣乘車而回路遇一美婦人來求同載竺乃下車步行讓車與婦人坐婦人請竺同載竺上車端坐目不邪視行及數里婦人辭去臨別對竺曰:「我乃南方火德星君也奉上帝敕往燒汝家感君相待以禮故明告君君可速歸搬出財物吾當夜來。」言訖不見竺大驚飛奔到家將家中所有疾忙搬出是晚果然廚中火起盡燒其屋竺因此廣捨家財濟貧拔苦後陶謙聘為別駕從事當日獻計曰:「某願親往北海郡求孔融起兵救援更得一人往青州田楷處求救若二處軍馬齊來操必退兵矣。」

각설하고 계책을 올린 사람은 곧 동해 구현 사람이니 성은 미이고, 이름은 축이며, 자는 자중이다. 이 사람의 집은 대대로 부호였다. 일찍이 낙양에 가서 장사하다가 수레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한 미부인을 만났는데, 와서 같이 수레 타기를 구하였다. 이에 미축이 곧 수레를 내려 걸어가고 수레를 양보하여 부인에게 주어 앉게 하였다. 부인이 미축에게 함께 타기를 청하였다. 미축이 수레에 올라 단정히 앉고 눈으로는 곁눈질을 하지 않았다. 몇 리를 가서 부인이 하직하고 가는데 헤어질 때 쯤 미축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곧 남방화덕성군인데 상제의 명을 받들어 너의 집을 불태우러 간다. 그대가 서로 예로써 대우한 것에 감동하였기 때문에 그대에게 밝게 알리는 것이다. 그대는 속히 돌아가 재물을 반출하십시오. 나는 밤에 갈 것입니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미축이 크게 놀라 날듯이 달려 집에 이르러 집 안에 있는 것을 재빨리 반출하였다. 이날 늦게 과연 주방 안에서 불이 일어나 그 집을 모두 태웠다. 미축이 이로 인하여 집의 재물을 널리 희사하여 가난한 이를 구제하여 괴로움을 뽑았다. 후에 도겸이 초빙하여 별가종사를 삼았다. 그날 계책을 올려 말하기를 제가 직접 북해군에 가서 공융이 군대를 일으켜 구원해 줄 것을 청하고, 다시 한 사람을 얻어 청주 전계가 있는 곳에 보내 구원을 요청할 것을 원합니다. 만약 두 곳의 군마가 일제히 오면 조조는 반드시 군대를 물릴 것입니다.” 했다.

 

謙從之遂寫書二封問帳下誰人敢去青州求救一人應聲願往眾視之乃廣陵人姓陳名登字元龍陶謙先打發陳元龍往青州去訖然後命糜竺齎書赴北海自己率眾守城以備攻擊

도겸이 그것을 따라 마침내 글 두 통을 써서 장막아래서 누가 용감하게 청주에 가서 구원을 청할지를 물었다.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기를 원하였다. 여러 사람이 그를 보니 곧 광릉 사람으로 성은 진이고, 이름은 진등이며, 자는 원룡이었다. 도겸이 먼저 진원룡을 파견하여 청주에 가게한 후에 미축에게 명하여 글을 가지고 북해에 가게하고, 자기는 군대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는 것으로서 공격에 대비하였다.

 

卻說北海孔融字文舉魯國曲阜人也孔子二十世孫泰山都尉孔宙之子自小聰明年十歲時往謁河南尹李膺閽人難之融曰:「我係李相通家。」及入見膺問曰:「汝祖與吾祖何親?」融曰:「昔孔子曾問禮於老子融與君豈非累世通家?」膺大奇之

각설하고 북해 공융은 자가 문거이고, 노나라 곡부 사람이다. 공자 20세손으로 태산도위 공주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나이 10세 때 하남 윤 이응에게 가서 뵈려 하였는데 문지기가 막으니 공융이 말하기를 나는 이씨 가문과 선조 때부터 대대로 친하게 지낸 집이다.”하고는 들어가 뵈었는데 이응이 물어 말하기를 너의 조상과 나의 조상이 어떻게 친한가?”하였다. 공융이 말하기를 옛날 공자가 일찍이 노자에게 예를 물었으니 나와 그대가 어찌 여러 세대 친하게 지낸 것이 아닙니까?” 했다. 이응이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少頃太中大夫陳煒至膺指融曰:「此奇童也。」煒曰:「小時聰明大時未必聰明。」融即應聲曰:「如君所言幼時必聰明者。」煒等皆笑曰:「此子長成必當代之偉器也。」自此得名後為中郎將累遷北海太守極好賓客常曰:「座上客常滿樽中酒不空吾之願也。」在北海六年甚得民心

얼마 후 태중대부 진위가 이르렀다. 이응이 공융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는 기이한 아이이다.”하였다. 진위가 말하기를 어렸을 때 총명하였다하여 자라서 반드시 총명한 것은 아니다.” 했다. 공융이 곧 대답하여 말하기를 만약 그대가 말한 바와 같다면 (그대는)어렸을 때 반드시 총명한 자일 것이다.” 했다. 진위 등이 모두 웃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면 반드시 당대의 위대한 그릇이 될 것이다.”하였다. 이로부터 명성을 얻었다. 후에 중랑장이 되었다가 여러 번 옮겨 북해태수가 되었다. 빈객을 지극히 좋아하여 항상 말하기를 자리에는 객이 항상 가득하고, 술 단지에는 술이 비지 않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했다. 북해에 있은 지 6년 만에 많은 민심을 얻었다.


當日正與客坐人報徐州糜竺至融請入見問其來意竺出陶謙書:「曹操攻圍甚急望明公垂救。」融曰:「吾與陶恭祖交厚子仲又親到此如何不去只是曹孟德與我無讎當先遣人送書解和如其不從然後起兵。」竺曰:「曹操倚仗兵威決不肯和。」融教一面點兵一面差人送書正商議間忽報黃巾賊黨管亥部領群寇數萬殺奔前來

그날 마침 객과 앉아있는데 사람이 서주의 미축이 이르렀다고 보고하였다. 공융이 들어가 뵙기를 청하였는데 그 온 뜻을 물으니 미축이 도겸의 글을 내고 말하기를 조조가 공격하여 포위하였기 때문에 매우 급하니 명공께서는 구원을 드리우시기를 바랍니다.” 했다. 공융이 말하기를 나와 도공조(도겸)은 사귐이 두텁고 자중(공융)이 또한 직접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가지 않겠습니까? 다만 조맹덕과 나는 원수 진 것이 없으니 먼저 사람과 글을 보내 화해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만일 따르지 않은 연후에 군대를 일으킬 것입니다.” 했다. 미축이 말하기를 조조가 군대의 위엄에 기대어 결코 화친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공융이 한쪽으로는 군대를 점검하게하고, 한쪽으로는 사람을 보내 글을 보냈다. 서로 의논하는 사이에 갑자기 황건적의 무리 관해 부가 여러 도적 수만을 거느리고 달려온다고 보고하였다.

 

孔融大驚急點本部人馬出城與賊迎戰管亥出馬曰:「吾知北海糧廣可借一萬石即便退兵不然打破城池老幼不留!」孔融叱曰:「吾乃大漢之臣守大漢之地豈有糧米與賊耶!」管亥大怒拍馬舞刀直取孔融融將宗寶挺鎗出馬戰不數合被管亥一刀砍宗寶於馬下孔融兵大亂奔入城中管亥分兵四面圍城孔融心中鬱悶糜竺懷愁更不待言

공융이 크게 놀라 급히 본부의 인마를 점검하고 성을 나와 적을 맞아 싸웠다. 관해가 말을 몰고 나와 말하기를 내가 북해에 양식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일만 석을 빌려주면 곧 군대를 물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과 해자를 쳐 깨트려서 늙은이, 어린이를 머물지 못하게 할 것이다!” 했다. 공융이 꾸짖어 말하기를 나는 곧 대한의 신하로 대한의 땅을 지키는데 어찌 식량을 적에 줄 수 있겠는가!” 했다. 관해가 크게 노하여 말을 치고 칼을 휘두르면서 곧바로 공융을 취하려 하였다. 공융의 장군 종보가 창을 뽑아 들고 말을 몰아 나가 싸운 지 몇 합되지 않아 관해에게 한 칼에 찔려 말에서 떨어진 종보를 베었다. 공융의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달아나 선안으로 들어갔다. 관해가 군대를 나누어 四面으로 성을 포위하니 공융이 마음 속으로 번민하였다. 미축이 근심을 품고 다시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次日孔融登城遙望賊勢浩大倍添憂惱忽見城外一人挺鎗躍馬殺入賊陣左衝右突如入無人之境直到城下大叫:「開門!」孔融不識其人不敢開門賊眾趕到河邊那人回身連搠十數人下馬賊眾倒退融急命開門引入其人下馬棄鎗到城上拜見孔融融問其姓名對曰:「某東萊黃縣人也覆姓太史名慈字子義老母重蒙恩顧某昨自遼東回家省親知賊寇城老母說:『屢受府君深恩汝當往救。』某故單馬而來。」孔融大喜原來孔融與太史慈雖未識面卻曉得他是個英雄因他遠出有老母住在離城二十里之外融常使人遣以粟帛母感融德故特使慈來救

다음 날 공융이 성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적의 형세가 넓고 컷으므로 근심과 번뇌가 배로 더하였다. 갑자기 선 밖에 한 사람이 창을 들고 말을 달려 적진에 들어가 좌로 치고 우로 돌격하는데 사람이 없는 듯이 곧 바로 성 아래에 이르러 크게 소리쳤다. “문을 열라!” 공융이 그 사람을 알지 못하여 감히 문을 열지 못하였다. 적의 무리들이 쫓아 강가에 이르렀는데 어떤 사람이 몸을 돌려 수십 명을 푹 찔러 말에서 떨어뜨렸다. 적의 무리들이 거꾸로 물러나니 공융이 급히 문을 열도록 명령하여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 사람이 말을 내려 창을 버리고 지름길로 성 위에 이르러 공융에게 절하고 뵈었다. 공융이 그 성명을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저는 동래 황현 사람으로 복성은 태사이고, 이름은 자이고, 자는 자의입니다. 노모가 은혜를 무겁게 입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요동으로부터 집에 들어가 어버이를 살펴보니 도적이 성을 노략질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노모가 말하기를 여러 번 부군의 깊은 은혜를 받았으니 너는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하므로 제가 한 바리 말을 타고 왔습니다.” 했다. 공융이 크게 기뻐하였다. 원래 공융은 태사자와 비록 얼굴은 알지 못하지만 그 사람이 영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태사자가)멀리 나가 있고 노모가 성으로부터 20리 밖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공융이 항상 사람을 시켜 곡식과 비단을 보내 주었다. 어머니가 공융의 덕에 감동하여 특히 태사자로 하여금 와서 구원하게 한 것이다.

 

當下孔融重待太史慈贈與衣甲鞍馬慈曰:「某願借精兵一千出城殺賊。」融曰:「君雖英勇然賊勢甚盛不可輕出。」慈曰:「老母感君厚德特遣慈來如不能解圍慈亦無顏見母矣願決一死戰。」融曰:「吾聞劉玄德乃當世英雄若請得他來相救此圍自解只無人可使耳。」慈曰:「府君修書某當急往。」融喜修書付慈慈擐甲上馬腰帶弓矢手時鐵鎗飽食嚴裝城門開處一騎飛出近河賊將率眾來戰慈連搠死數人透圍而出管亥知有人出城料必是請救兵的便自引數百騎趕來八面圍定慈倚住鎗弓搭八面射之無不應弦落馬賊眾不敢來追

그 때 공윤이 태사자를 중하게 대우하여 갑옷과 말안장을 주었다. 태사자가 말하기를 저에게 정병 일천을 빌려주시면 성을 나가 적을 죽이겠습니다.” 했다. 공윤이 말하기를 그대가 비록 용맹스러우나 적의 형세가 매우 성개하니 가벼이 나갈 수 없다.”했다. 태사자가 말하기를 노모가 그대의 두터운 덕에 감동하여 특히 저를 보내 왔습니다. 만약 포위를 풀 수 없다면 제가 또한 어머니를 뵐 낯이 없습니다. 결단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기를 원합니다.” 했다. 공융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유현덕은 곧 이 시대의 영웅이라 하는데 만약 다른 곳으로부터 들어 올 것을 청하여 서로 구원할 수 있다면 이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이다. 다만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뿐이다.” 했다. 태사자가 말하기를 부군이 글을 써서 준다면 제가 마땅히 급하게 갈 것입니다.” 했다. 공융이 기뻐하면서 글을 써서 태사자에게 붙였다. 태사자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탔는데 허리에는 활과 화살을 달고, 손에는 철창을 들고, 배불리 먹으며 차림을 단단히 하여 성문을 열고는 홀로 말을 타고 나는 듯이 달려 나갔다. 강에 가까이 갔을 때 도적의 장군이 무리를 통솔하여 와서 싸웠는데 태사자가 연이어 푹 찔러 몇 명을 죽이고 포위를 뚫고 나갔다. 관해가 어떤 사람이 성을 나온 것을 알았는데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청하는 것이라는 것을 헤아리고는 문득 자신이 수 백명의 군대를 인솔하여 쫓아 와 팔면으로 포위하였다. 태사자가 (안장에)창을 기대 놓고, 활을 잡아 화살을 걸고 팔면으로 쏘아대니 활시위에 따라 말에서 떨어지지 않음이 없었다. 도적의 무리가 감히 쫓아오지 못하였다.

 

太史慈得脫星夜投平原來見劉玄德施禮罷具言孔北海被圍求救之事呈上書札玄德看畢問慈曰:「足下何人?」慈曰:「某太史慈東海之鄙人也與孔融親非骨肉比非鄉黨特以氣誼相投有分憂共患之意今管亥暴亂北海被圍孤窮無告危在旦夕聞君仁義素著能救人危急故特令某冒鋒突圍前來求救。」玄德斂容答曰:「孔北海知世間有劉備耶?」乃同雲長翼德點精兵三千往北海郡進發

태사자다 벗어나 밤에 평원에 이르러 유현덕을 만났다. 예를 마친 후 공융의 북해가 포위당하여 구원을 구하는 일을 모두 말하고 서찰을 올렸다. 현덕이 보기를 마치고 태사자에게 물어 말하기를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하니 태사자가 말하기를 저 태사자는 동해의 촌사람입니다. 공융과는 일가친척은 아니고, 같은 고향도 아니며 다만 뜻을 같이하고 의기투합하여 근심을 나누고 환란을 같이하는 뜻이 있습니다. 지금 관해가 폭력으로 어지럽혀서 북해가 포위를 당하여 외롭고 곤궁하여도 말할 곳이 없으며 위태로움이 아침저녁에 달려있습니다. 들으니 선생은 인의가 평소에 드러나 사람의 위급함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저로 하여금 날카로움을 무릅쓰며 포위를 뚫고 앞으로 와서 구원을 청하는 것입니다.” 했다. 유현덕이 태도를 바로하고 답하여 말하기를 북해의 공융이 세상에 유비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하고는 곧 운장(관우), 익덕(장비)과 함께 정병 삼천을 점검하고 북해군을 향해 출발하였다.


管亥望見救軍來到親自引兵迎敵因見玄德兵少不以為意玄德與關太史慈立馬陣前管亥忿怒直出太史慈卻待向前雲長早出直取管亥兩馬相交眾軍大喊量管亥怎敵得雲長數十合之間青龍刀起管亥於馬下太史慈張飛兩騎齊出雙槍並舉殺入賊陣玄德驅兵掩殺城上孔融望見太史慈與關張趕殺賊眾如虎入羊群縱橫莫當便驅兵出城兩下夾攻大敗群賊降者無數餘黨潰散

관해가 멀리서 구원군이 와서 이르는 것을 보고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적을 맞이하는데 현덕의 군대가 적은 것을 보고는 개의치 않았다. 현덕과 관우, 장비, 태사자가 진 앞에 말을 세우니 관해가 분노하여 바로 나왔다. 태사자가 마침 앞을 향해 나가려 하는데 운장이 빨리 나가서 바로 관해를 취하였다. 두 말이 서로 교차하니 많은 군대가 크게 함성을 질렀다. 헤아리건데 관해가 어찌 운장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수십 합 사이에 청룡도를 일으켜 관해를 쪼개니 말에서 떨어졌다. 태사자와 장비가 말을 타고 일제히 나가면서 쌍창을 함께 들고 죽이면서 적진에 들어갔다. 현덕이 군대를 몰아 습격하여 죽였다. 성 위에서 공윤이 태사자와 관우, 장비가 적들을 쫓아가 죽이는 것을 바라보니 마치 호랑이가 양떼에 들어가 종횡으로 하니 감당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공융이)문득 군대를 몰아 성을 나왔다. 양쪽으로 갈라 협공하여 여러 도적을 크게 무너뜨리니 항복하는 자가 무수하였고, 남은 무리들이 무너져 흩어졌다.


孔融迎接玄德入城敘禮畢大設筵宴慶賀又引糜竺出見玄德具言張闓殺曹嵩之事:「今曹操縱兵大掠圍住徐州特來求救。」玄德曰:「陶恭祖乃仁人君子不意受此無辜之冤。」孔融曰:「公乃漢室宗親今曹操殘害百姓倚強欺弱何不與融同往救之?」玄德曰:「備非敢推辭奈兵微將寡恐難輕動。」

공융이 현덕을 맞이하여 성에 들어가 에를 마치고 크게 잔치를 열고 축하하였다. 또 미축을 이끌고 나와 현덕을 뵙게하였는데 장개가 조숭을 죽인 일을 모두 말하면서 지금 조조가 군대를 놓아 크게 약탈하면서 서주를 포위하고 머물기 때문에 특히 와서 구원을 청하였습니다.”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도공조(도겸)仁人이고 군자인데 뜻하지 않게 이런 무고의 원통함을 받았습니다.” 했다. 공융이 말하기를 공은 곧 한 황실의 종친인데, 지금 조조가 백성을 잔인하게 해치고, 강함에 의지하여 약한 자를 속이니 어찌 공융과 함께 가서 구원하지 않겠습니까?”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제가 감히 미루고 사양하지 않을 것이지만 군대가 미약하고 장군이 적으니 가벼이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했다.

 

孔融曰:「融之欲救陶恭祖雖因舊誼亦為大義公豈獨無仗義之心耶?」玄德曰:「既如此請文舉先行容備去公孫瓚處借三五千人馬隨後便來。」融曰:「公切勿失信。」玄德曰:「公以備為何如人也聖人云:『自古皆有死人無信不立。』劉備借得軍或借不得軍必然親至。」 孔融應允教糜竺先回徐州去報融便收拾起程太史慈拜謝曰:「慈奉母命前來相助今幸無虞有揚州刺史劉繇與慈同郡有書來喚不敢不去容圖再見。」融以金帛相酬慈不肯受而歸其母見之喜曰:「我喜汝有以報北海也!」遂遣慈往揚州去了

공융이 말하기를 저는 도공조(도겸)를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비록 옛 정리에로 인한 것이지만 또한 대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공은 어찌하여 유독 정의를 다라 행동하려는 마음이 없습니까?”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이미 이와 같은데 문거(공융)가 먼저 가면 저는 공손찬이 있는데 가서 35백명의 인마를 빌려 뒤따라 갈 것을 청합니다.” 했다. 공융이 말하기를 공은 절대로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공은 나 유비를 어떤 사람이라 여기십니까? 성인이 말하기를 옛날부터 모두 죽음이 있지만,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존립하지 못한다.’하였으니 유비가 군대를 빌릴 수 있거나, 혹은 군대를 빌릴 수 없어도 반드시 직접 이를 것입니다.” 했다. 공융이 허락하고 미축으로 하여금 먼저 서주로 돌아가 보고하게 하고 공융은 곧 군대를 거두어 출발하였다. 태사자가 절하고 감사하며 말하기를 제가(태사자)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와서 서로 도왔는데 지금 요행히도 근심이 없어졌습니다. 양주자사 유요가 있는데 저(태사자)와 같은 군 출신으로 글로 부름이 있으니 감히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찾아뵙고 인사드리고자 합니다.” 했다. 공융이 금과 비단을 주어 갚고자 했으나 태사자가 받지 않고 돌아갔다. 그 어머니가 보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네가 북해 공융에게 갚음이 있었다 하니 기쁘구나!” 했다. 마침내 태사자를 보내 양주에 가게 했다.


不說孔融起兵且說玄德離北海來見公孫瓚且說欲救徐州之事瓚曰:「曹操與君無讎何苦替人出力?」玄德曰:「備已許人不敢失信。」瓚曰:「我借與君馬步軍二千。」玄德曰:「更望借趙子龍一行。」瓚許之玄德遂與關張引本部三千人為前部子龍引二千人隨後往徐州來

공융이 군대를 일으킨 것은 말하지 않겠다. 각설하고 현덕이 북해를 떠나 공손찬에게 와 만난 후 또 서주를 구원하고자 하는 일을 말하였다. 공손찬이 말하기를 조조와 그대는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대신하여 힘을 내는가?”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지가 이미 사람을 허여하여 감히 신의를 잃을 수 없습니다.” 했다. 공손찬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기병과 보병 2천을 빌려 줄 것이다.”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다시 조자룡 일행을 빌려주기를 바랍니다.” 하니 공손찬이 허락하였다. 현덕이 마침내 관우, 장비와 함께 본부 2천명을 거느리고 전부로 삼고, 조자룡은 2천 명을 이끌고 뒤를 따라 서주로 갔다.

 

卻說糜竺回報陶謙言北海又請得劉玄德來助陳元龍也回報青州田楷欣然領兵來救陶謙心安原來孔融田楷兩路軍馬懼怕曹兵勢猛遠遠依山下寨未敢輕進曹操見兩路軍到亦分了軍勢不敢向前攻城

각설하고 미축이 돌아와 도겸에게 보고하면서 북해 공윤이 또한 유현덕이 와서 도울 수 있기를 청하였음을 말하였다. 진원룡이 돌아가 청주 전해가 기쁘게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한다. 보고하니 도겸이 마음으로 편안하게 여겼다. 원래 공융과 전해가 두 길로 군마를 나누었는데 조조의 군대 형세가 사나움을 두려워하여 멀리 산에 의지하고 진영을 설치하고 감히 가볍게 나아가지 못하였다. 조조가 두 길로 군대가 이르는 것을 보고 또한 군세를 나누고 감히 앞을 향하여 성을 공격하지 못하였다.


卻說劉玄德軍到見孔融融曰:「曹兵勢大操又善於用兵未可輕戰且觀其動靜然後進兵。」玄德曰:「但恐城中無糧難以久持備令雲長子龍領軍四千在公部下相助備與張飛奔曹營逕投徐州去見陶使君商議。」融大喜會合田楷為犄角之勢雲長子龍領兵兩邊接應

각설하고 유현덕의 군대가 이르러 공융과 만났다. 공융이 말하기를 조조의 군대 형세가 크고 조조가 또한 군대 운용을 잘하니 가벼이 움직일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움직이고 고요한 것을 관찰해 본 후에 군대를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다만 성 안에 양식이 없어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이 두렵습니다. 제가 운장(관우), 자룡으로 하여금 군대 4천을 거느리게 하고 공의 부하로 있으면서 서로 돕게 하고, 저와 장비는 조조의 진영에 달려가서 지름길로 서주에 들어가서 도겸을 만나 상의하도록 하겠습니다.” 했다. 공융은 크게 기뻐하며 전해와 만나 양면 작전의 태세를 갖추고, 운장, 자룡은 군대를 거느리고 두 귀퉁이에서 호응하도록 하였다.

 

是日玄德張飛引一千人馬殺入曹兵寨邊正行之間寨內一聲鼓響馬軍步軍如潮似浪將出來當頭一員大將乃是于禁勒馬大叫:「何處狂徒往那裏去!」張飛見了更不打話直取于禁兩馬相交戰到數合玄德掣雙股劍麾兵大進于禁敗走張飛當前追殺直到徐州城下城上望見紅旗白字大書平原劉玄德陶謙急令開門玄德入城陶謙接著共到府衙禮畢設宴相待一面勞軍

이날 현덕과 장비는 일천의 인마를 이끌고 조조의 군대 진영 가에 들어갔다. 바로 가는 사이에 진영 안에서 한 소리의 북소리가 울리면서 기병과 보병이 밀물의 파도처럼 장군을 지키며 나왔다. 그 때 한 명의 대장을 정면으로 마주쳤으니 곧 우금으로 말의 가슴을 차면서 크게 소리치기를 어느 곳에서 온 미친 무리이며, 어디로 가는가?” 했다. 장비가 다시 말을 나누지 않고 곧 바로 우금을 취하려 했다(달려들었다.) 두 말이 서로 교차하면서 싸움이 여러 합에 이르자 현덕이 쌍고검을 늘어뜨리고 군대를 지휘하여 크게 나아가니 우금이 패하여 달아났다. 장비가 앞을 향하여 추격하여 죽이면서 곧바로 성 아래에 이르렀다. 성위에서 바라보니 붉은 깃발에 흰 글자로 크게 평원유현덕이라 쓰여 있는 것을 보고는 도겸이 급히 성문을 열게 하였다. 현덕이 성에 들어가니 도겸이 손으로 받아들여 함께 관아에 이르렀다. 예를 마치고 연회를 베풀어 서로 대하는 한편으로 군사를 위로하였다.

 

陶謙見玄德儀表軒昂語言豁達心中大喜便命糜竺取徐州牌印讓與玄德玄德愕然曰:「公何意也?」謙曰:「今天下擾亂王綱不振公乃漢室宗親正宜力扶社稷老夫年邁無能情願將徐州相讓公勿推辭謙當自寫表文申奏朝廷。」玄德離席再拜曰:「劉備雖漢朝苗裔功微德薄為平原相猶恐不稱職今為大義故來相助公出此言莫非疑劉備有吞併之心耶若舉此念皇天不佑!」謙曰:「此老夫之實情也。」再三相讓玄德那裏肯受糜竺進曰:「今兵臨城下且當商議退敵之策待事平之日再當相讓可也。」玄德曰:「備當遺書於曹操勸令解和操若不從廝殺未遲。」於是傳檄三寨且按兵不動遣人齎書以達曹操

도겸이 현덕을 보니 행동거지가 훌륭하고 말하는 것이 활달하니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여 문득 미축에게 명하여 서주의 관인을 가져오게 하여 현덕에게 주었다. 현덕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공은 무슨 생각입니까?”하니 도겸이 말하기를 지금 천하가 소란스럽고 왕의 기강은 떨치지 못한데 공은 곧 한나라 황실의 종친이니 바로 사직을 돕는데 힘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노부는 나이가 많고 능력이 없어 장차 서주를 양보할 것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공은 사양하는 말을 마십시오. 저는 마땅히 스스로 표문을 써서 조정에 아뢸 것입니다.” 했다. 현덕이 자리를 떠나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제가 비록 한 황실의 후예이나 공이 미약하고 덕이 적어 평원상이 된 것도 오히려 직책에 걸맞지 않음을 두려워합니다. 지금 대의를 위하여 와서 서로 돕는데 공이 이런 말을 하면 제가 병탄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이러한 생각을 한다면 황천이 돕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도겸이 말하기를 이는 노부의 진실된 마음입니다.” 하고는 두 번 세 번 양보하였는데 현덕이 어찌 즐겨 받을 수 있겠는가. 미축이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군대가 성 아래서 맞대고 있으니 또한 마땅히 적을 물리칠 계책을 서로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일이 평정되는 말을 기다려 거듭 양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저는 마땅히 조조에게 글을 보내 화해를 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조조가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싸워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이에 세 곳의 진영에 격문을 보내고 또한 군대를 살피고 움직이니 않고, 가람을 보내 글을 가지고 조조에게 이르게 하였다.

 

卻說曹操正在軍中與諸將議事人報徐州有戰書到操拆而觀之乃劉備書也書略曰:「備自關外得拜君顏嗣後天各一方不及趨侍向者尊父曹侯實因張闓不仁以致被害非陶恭祖之罪也目今黃巾遺孽擾亂於外董卓餘黨盤踞於內願明公先朝廷之急而後私讎撤徐州之兵以救國難則徐州幸甚天下幸甚!」

각설하고 조조가 부대 안에 있으면서 여러 장군과 일을 의논하고 있는데 사람이 서주에서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글이 이름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조조가 회의를 끊고 그것을 보니 곧 유비의 글이었다. 글을 요약하면 내가 관외에서 그대의 얼굴을 본 후 각기 한 방향에 있어 달려가 모실 수 없었습니다. 지난번에 존부인 조후가 실로 장개의 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해침을 당한 것은 도공조(도겸)의 죄가 아닙니다. 지금 황건적의 남은 무리들이 밖에서 소란스럽게 하였고, 동탁의 남은 무리들이 안에서 도사리고 있습니다. 현명한 공께서는 조정의 급함을 우선하고 사사로운 원수를 뒤로 할 것을 원하며, 서주의 군대를 거두는 것으로서 나라의 어려움을 구원한다면 곧 서주는 매우 다행할 것이며, 천하가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했다.

 

曹操看書大罵:「劉備何人敢以書來勸我且中間有譏諷之意!」命斬來使一面竭力攻城郭嘉諫曰:「劉備遠來救援先禮後兵主公當用好言答之以慢備心然後進兵攻城城可破也。」操從其言款留來使候發回書

조조가 글을 보고 크게 욕하기를 유비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글을 보내는 것으로서 나를 권하는가! 또 중간에서 풍자의 뜻이 있는가!”하고는 온 사자를 죽이고 한편으로 힘을 다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곽가가 간하여 말하기를 유비가 멀리서 와서 구원하면서 예를 먼저하고 군대를 뒤로하니 주공께서는 마땅히 좋은 말을 써서 답하여 유비의 마음을 태만하게 한 후 군대를 나아가게 하여 성을 공격한다면 성을 깨트릴 수 있습니다.” 했다. 조조가 그 말을 따라 온 사신을 머물게 하고, 답장을 기다리게 했다.


正商議間忽流星馬飛報禍事!」。操問其故報說呂布已襲破兗州進據濮陽原來呂布自遭李郭之亂逃出武關去投袁術術怪呂布反覆不定拒而不納投袁紹紹納之與布共破張燕於常山布自以為得志傲慢袁紹手下將士紹欲殺之布乃去投張揚揚納之時龐舒在長安城中私藏呂布妻小送還呂布

상의하는 사이에 갑자기 유성마가 보고하기를 재앙의 일입니다!” 했다. 조조가 그 일을 물으니 여포가 이미 연주를 습격하여 깨트리고 나아가 복양에 웅거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원래 여포는 이각과 곽사의 난을 만났을 때 무관을 도망해 나와 가서 원술에게 투신하였다. 원술은 여포가 반복하여 안정하지 못하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막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소에게 투신하니 원소가 그를 받아들이고, 여포와 함께 상산에서 장연을 깨트렸는데 여포가 스스로 뜻을 얻었다 여겨 원소의 부하 장군들에게 오만하게 하였다. 원소가 그를 죽이려 하니 여포가 곧 떠나 장양에게 투신하니 장양이 그를 받아들였다. 그 때 방서가 장안 성 안에 있었는데 사사로이 여포의 처와 아이들을 잡아두고 있다가 여포에게 돌려보냈다.

 

李傕郭汜知之遂斬龐舒寫書與張揚教殺呂布布因棄張揚去投張邈恰好張邈弟張超引陳宮來見張邈宮說邈曰:「今天下分崩英雄並起君以千里之眾而反受制於人不亦鄙乎今曹操征東兗州空虛而呂布乃當世勇士若與之共取兗州伯業可圖也。」張邈大喜便令呂布襲破兗州隨據濮陽止有鄄城東阿范縣三處被荀彧程昱設計死守得全其餘俱破曹仁屢戰皆不能勝特此告急操聞報大驚曰:「兗州有失使吾無家可歸矣不可不亟圖之!」郭嘉曰:「主公正好賣個人情與劉備退軍去復兗州。」操然之即時答書與劉備拔寨退兵

이각과 곽사가 그것을 알고 마침내 방서를 죽이고 글을 서서 장양에게 주어 여포를 죽이게 하였다. 여포가 때문에 장양을 버리고 떠나 장막에게 투신하였다. 마침 장막의 동생 장초가 진궁을 데리고 와서 장막을 만나게 하였다. 진궁이 장막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지금 천하가 나뉘어 무너지고 영웅이 아울러 일어나는데 그대는 천리의 무리로서 다른 사람에게 도리어 제재당하고 있으니 또한 비루하지 않는가! 지금 조조가 동쪽으로 정벌을 가서 연주가 비어 있고, 여포는 곧 지금 세상의 용사이니 만약 함께 연주를 취한다면 패업을 도모할 만합니다.” 했다. 장막이 크게 기뻐하여 문득 여포로 하여금 연주를 습격하여 깨트리고 복양을 따라 웅거하게 하였다. 다만 견성, 동아, 범현 세 곳만은 순욱과 정욱이 계책을 세워 죽음으로 지켜 온전하게 소유할 수 있었고, 그 나머지는 모두 깨트렸다. 조인이 여러 차례 싸웠으나 모두 이길 수 없어 특히 급함을 알렸다. 조조가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연주를 잃으면 내가 집에 돌아갈 만함이 없게 되니 빨리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 했다. 곽가가 말하기를 주공께서는 좋은 인정을 유비에게 주고 퇴군해 가서 연주를 회복하십시오.” 했다. 조조가 그러하다 여기고 즉시 답장의 글을 써서 유비에게 주고 진영을 뽑고 군대를 물렸다.


且說來使回徐州入城見陶謙呈上書札言曹兵已退謙大喜差人請孔融田楷雲長子龍等赴城大會飲宴既畢謙延玄德於上座拱手對眾曰:「老夫年邁二子不才不堪國家重任劉公乃帝室之胄德廣才高可領徐州老夫情願乞閒養病。」玄德曰:「孔文舉令備來救徐州為義也今無端據而有之天下將以備為無義人矣。」糜竺曰:「今漢室陵遲海宇顛覆樹功立業正在此時徐州殷富戶口百萬劉使君領此不可辭也。」玄德曰:「此事決不敢應命。」陳登曰:「陶府君多病不能視事明公勿辭。」玄德曰:「袁公路四世三公海內所歸近在壽春何不以州讓之?」孔融曰:「袁公路塚中枯骨何足挂齒今日之事天與不取悔不可追。」

왔던 사신이 서주로 돌아가 성에 들어가서 도겸을 만나 서찰을 올리고 조조의 군대가 이미 물러났음을 말하였다. 도겸이 크게 기뻐하여 사람을 보내 공융, 전해, 운장, 자룡 등을 청하여 성에 나아가 크게 모였다. 술을 마시는 연회를 마치고 난 후 도겸이 현덕을 상좌에 이끌고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며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노부는 나이가 많고 두 아들은 재능이 없어 국가의 큰 임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유공은 곧 황실의 혈통으로 덕이 넓고 재주가 높아 서주를 거느릴만 합니다. 노부는 사실 한가로이 병을 요양할 것을 원합니다.”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공문거가 저로 하여금 와서 서주를 구하게 한 것은 의를 위한 것인데 지금 올바른 근거 없이 서주를 소유한다면 천하가 장차 저를 의리가 없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했다. 미축이 말하기를 지금 한나라가 점차 쇠퇴하여 천하가 엎어지고 뒤집어지니 공을 세우고, 대업을 세우는 것은 바로 이러한 때에 있었습니다. 서주는 매우 부유하고, 인구는 백만이니 유사군(유비)이 이를 거느리는 것은 사양해서는 안 됩니다.”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이 일은 결단코 감히 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했다. 진등이 말하기를 도부군(도겸)은 병이 많아 일을 보지 못하니 현명한 공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오.”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원공로는 4세대에 걸쳐 삼공이어서 나라 안이 돌아가는 곳이고, 가까이 수춘이 있으니 어찌 주 때문에 그것을 사양하지 않겠습니까?” 했다. 공융이 말하기를 원공로 무덤 안의 해골이 어찌 충분히 제기할 수 있으리오! 오늘의 일은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면 뉘우쳐도 따를 수 없습니다.” 했다.

 

玄德堅執不肯陶謙泣下曰:「君若捨我而去我死不瞑目!」雲長曰:「既承陶公相讓兄且權領州事。」張飛曰:「又不是我強要他的州郡他好意相讓何必苦苦推辭?」玄德曰:「汝等欲陷我於不義耶?」陶謙推讓再三玄德只是不受陶謙曰:「如玄德必不肯從此間近邑名小沛足可屯軍請玄德暫駐軍此邑以保徐州何如?」眾皆勸玄德留小沛玄德從之陶謙勞軍已畢趙雲辭去玄德執手揮淚而別孔融田楷亦各相別引軍自回玄德與關張引本部軍來至小沛修葺城垣撫諭居民

현덕이 굳게 고집을 피우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겸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나를 버리고 간다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했다. 운장이 말하기를 도공의 양보를 받들어 형이 또한 잠시 주의 일을 맡으십시오.” 했다. 장비가 말하기를 또한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주군을 강요한 것이 아니고 좋은 뜻으로 양보하는데 어찌 극력 미루고 사양할 필요가 있습니까?” 했다. 현덕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를 불의에 빠트리려 하는가?”하니 도겸이 두, 세 번 양보하고, 현덕은 다만 받지 않을 뿐이었다. 도겸이 말하기를 만일 현덕이 반드시 즐겨 따르지 않는다면 이곳과 가까운 읍으로 소패가 있는데 충분히 군대를 주둔할 만합니다. 현덕이 잠시 이 읍에 군대를 주둔하는 것으로서 서주를 보호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했다. 여럿이 모두 현덕에게 소패에 머물 것을 권하니 현덕이 그것을 따랐다. 도겸이 군대를 위로하기를 마치자 조운은 하직하고 갔고, 현덕은 손을 잡고 눈물을 훔치면서 이별하였다. 공융과 전해가 또한 각기 서로 이별하여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현덕과 관우, 장비가 본부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소패에 이르러 성벽을 수리하고 살고 있는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였다.


卻說曹操回軍曹仁接著言呂布勢大更有陳宮為輔兗州濮陽已失其鄄城東阿范縣三處賴荀彧程昱二人設計相連死守城郭操曰:「吾料呂布有勇無謀不足慮也。」教且安營下寨再作商議呂布知曹操回兵已過滕縣召副將薛蘭李封曰:「吾欲用汝二人久矣汝可引軍一萬堅守兗州吾親自率兵前去破曹。」

각설하고 조조가 회군하니 조인이 영접한 후 여포의 세력이 크고, 다시 진궁을 보좌로 삼아 연주, 복양을 이미 잃었고, 견성, 동아, 법현 세 곳은 순욱, 정욱 두 사람이 계책을 세워 서로 이어 죽음으로 성곽을 지키고 있음을 말하였다. 조조가 말하기를 내가 헤아려 보니 여포는 용맹은 있으나 꾀가 없으니 염려할 필요 없다.” 하고는 진영을 세우고 다시 논의하게 하였다. 여포는 조조가 군대를 돌렸는데 이미 슬현을 지난 것을 알고는 부장인 장군 설란과 이봉을 불러 말하기를 나는 너희 두 사람을 오래 쓰고자 한다. 너희 들은 군대 이만을 거느리고 연주를 굳게 지키라. 나는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앞으로 가 조조를 깨트릴 것이다.” 했다.

 

二人應諾陳宮急入見曰:「將軍棄兗州欲何往乎?」布曰:「吾欲屯兵濮陽以成鼎足之勢。」宮曰:「差矣薛蘭必守兗州不住此去正南一百八十里泰山路險可伏精兵萬人在彼曹兵聞失兗州必然倍道而進待其過半一擊可擒也。」布曰:「吾屯濮陽別有良謀汝豈知之!」遂不用陳宮之言而用薛蘭守兗州而行

두 사람이 응락하였다. 진궁이 급히 들어와 보고 말하기를 장군은 연주를 버리고 어디로 가고자 합니까?” 했다. 여포가 말하기를 나는 군대를 복양에 주둔하여 솥발의 형세를 이루고자 합니다.” 했다. 진궁이 말하기를 잘못입니다. 설란은 반드시 연주를 지키고, 머물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정 남쪽으로 180리 떨어진 태산로는 험하여 정예 군대 만 명을 숨길 수 있는 곳이 거기에 있습니다. 조나라 군대가 연주를 잃었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길을 급하게 나아갈 것이니 그 반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한 번에 치면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여포가 말하기를 내가 복양에 주둔 하는 것은 따로 좋은 꾀가 있으니 네가 어찌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하고는 마침내 진궁의 말을 쓰지 않고 설란으로 연주를 지키게 하고 (복양으로)갔다.


曹操兵行至泰山險路郭嘉曰:「且不可進恐此處有伏兵。」曹操笑曰:「呂布無謀之輩故教薛蘭守兗州自往濮陽安得此處有埋伏耶?」教曹仁領一軍圍兗州吾進兵濮陽速攻呂布陳宮聞曹兵至近乃獻計曰:「今曹兵遠來疲困利在速戰不可養成氣力。」布曰:「吾匹馬縱橫天下何愁曹操待其下寨吾自擒之。」

조조의 군대가 행군하여 태산 험로에 이르니 곽가가 말하기를 또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 복병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했다. 조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여포는 꾀가 없는 무리이기 때문에 설란으로 하여금 연주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 복양에 갔으니 어찌 이곳에 매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조인으로 하여금 한 부대를 거느리게 하여 연주를 포위하게 하고, “나는 군대를 복양으로 나아가게 하여 속히 여포를 공격하겠다.” 했다. 진궁이 조조의 군대가 가까이에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 계책을 올려 말하기를 지금 조조의 군대는 멀리서 와서 피곤할 것이기 때문에 이로움은 속히 싸움에 있으니 기세와 힘을 기르고 이루게 해서는 안 됩니다.” 했다. 여포가 말하기를 나는 한 마리 말로 천하를 종횡하였는데 어찌 조조를 근심하겠는가! 진영을 이루는 것을 기다렸다가 내가 스스로 사로잡을 것이다.” 했다.

 

卻說曹操兵近濮陽下住寨腳次日引眾將出陳兵於野操立馬於門旗下遙望呂布兵到陣圓處呂布當先出馬兩邊排開八員健將第一個雁門馬邑人姓張名遼字文遠第二個泰山華陰人姓臧名霸字宣高兩將又各引六員健將曹性成廉魏續宋憲侯成布軍五萬鼓聲大震

각설하고 조조의 군대는 복양 근처에 진영을 세웠다. 다음 날 여러 장군들을 거느리고 나가 들판에 진을 쳤다. 조조가 문의 깃발 아래 말을 세우고 멀리 여포의 군대가 이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둥글게 진을 친 곳에 여포가 앞서 말을 타고 나오고 양 옆에 여덟 명의 건장한 장군을 벌려 세웠는데 첫 번째는 안문 마읍 사람으로 장은 장이고 이름은 요이며, 자는 문원이었다. 두 번째는 태산 화음사람인데 성은 장이요 이름은 패이며 자는 선고이다. 두 장군이 또한 각각 여섯 명의 건장한 장군을 거느렸는데 학맹, 조성, 성렴, 위속, 송헌, 후성이었다. 여포의 군대가 오만으로 북소리를 크게 울렸다.


操指呂布而言曰:「吾與汝自來無讎何得奪吾州郡?」布曰:「漢家城池諸人有分偏爾合得?」便叫臧霸出馬搦戰曹軍內樂進出迎兩馬相交雙鎗齊舉戰到三十餘合勝負不分夏侯惇拍馬便出助戰呂布陣上張遼截住廝殺惱得呂布性起挺戟驟馬衝出陣來夏侯惇樂進皆走呂布掩殺曹軍大敗退三四十里布自收軍

조조가 여포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와 너는 원래 원한이 없는데 어찌하여 나의 주와 군을 빼앗을 수 있는가?” 했다. 여포가 말하기를 한나라의 땅을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 소유하였는데 너만 합당하게 얻었는가?” 하고는 장패를 불러 말을 타고 나가 싸우게 하였다. 조조의 군대 안에서 악진이 나와 맞이하였다. 두 말이 서로 교차하고 쌍창을 가지런히 들었다. 싸움이 30합이 넘어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하후돈이 말을 박차고 나가 싸움을 도우니 여포의 진영에서 장요가 막아 서로 싸우고 죽였다. 번뇌하던 여포가 노하여 극()을 들고 말을 달려 진영을 치고 나오니 하후돈과 악진이 모두 달아났다. 여포가 습격하여 죽이니 조나라 군대가 크게 무너져 3, 40리를 물러났다. 여포가 군대를 거두었다.

 

曹操輸了一陣回寨與諸將商議于禁曰:「某今日上山觀望濮陽之西呂布有一寨約無多軍今夜彼將謂我軍敗走必不準備可引兵擊之若得寨布軍必懼此為上策。」操從其言帶曹洪李典毛玠呂虔于禁典韋六將選馬步二萬人連夜從小路進發

조조는 한 부대가 돌아오자 진영으로 돌아가 여러 장군과 의논하였다. 우금이 말하기를 제가 오늘 산 위에 올라 살펴보니 복양의 서쪽에 여포의 한 진영이 있는데 대략적으로 많은 군대는 없습니다. 오늘 밤 저들 장군들이 우리 군대가 패하여 달아난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준비하지 않을 것이니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할만 합니다. 만약 진영을 얻는다면 여포의 군대는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이는 상책이 됩니다.” 했다. 조조가 그 말을 따라 조홍, 이전, 모개, 여건, 우금, 전위 등 여섯 장군을 데리고 기병과 보병 2만 명을 뽑아 밤을 이어 작은 길을 따라 나아갔다.

 

卻說呂布於寨中勞軍陳宮曰:「西寨是個要緊去處或曹操襲之奈何?」布曰:「他今日輸了一陣如何敢來?」宮曰:「曹操是極能用兵之人須防他攻我不備。」布乃撥高順并魏續侯成引兵往守西寨卻說曹操於黃昏時分引軍至西寨四面突入寨兵不能抵擋四散奔走曹操奪了寨將及四更高順方引軍到殺將入來曹操自引軍馬來迎正逢高順三軍混戰將及天明正西鼓聲大震人報呂布自引軍來了操棄寨而走背後高順魏續侯成趕來當頭呂布親自引軍來到于禁樂進雙戰呂布不住操望北而行山後一彪軍出左有張遼右有臧霸操使呂虔曹洪戰之不利操望西而走忽又喊聲大震一彪軍至郝萌曹性成廉宋憲四將攔住去路眾將死戰操當先衝陣子響處箭如驟雨射將來操不能前進無計可脫大叫:「誰人救我!」

각설하고 여포는 진영 안에서 군대를 위로하였다. 진궁이 말하기를 서쪽의 진영은 중요한 곳인데 혹 조조가 그것을 습격한다면 어떻게 하렵니까?” 했다. 여포가 말하기를 오늘 한 부대가 돌아갔는데 어떻게 한 부대가 감히 올수 있겠는가?” 하니 진궁이 말하기를 조조는 지극히 군대를 잘 운용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우리가 대비하지 않는 곳을 공격하는 것을 지켜야 합니다.” 했다. 여포가 이에 고순과 위적, 후성을 뽑아 군대를 이끌고 가서 서쪽의 진영을 지키게 했다. 한편 조조는 해질 녘에 군대를 이끌고 (여포의)서쪽 진영에 이르러 사방에서 돌입하였다. 진영의 군대가 막아내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으므로 조조가 진영을 빼앗았다. 4경쯤 되었을 때 고순이 바야흐로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여 죽이며 들어왔다. 조조가 스스로 군마를 이끌고 와서 맞이하였는데 바로 고순을 만나 삼군이 섞여 싸웠다. 하늘이 밝아질 무렵 서쪽에서 북 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사람들이 여포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온다고 보고하였다. 조조가 진영을 버리고 달아났다. 뒤에 고순, 위적, 후성이 쫓아오고, 여포가 앞장서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왔다. 우금 과 악진 둘이 여포와 싸웠으나 머물게 하지 못하니 조조는 북쪽을 바라보고 갔다. 산 뒤에서 한 떼의 군사가 나왔는데 왼쪽에는 장요가 있고, 오른 쪽에는 장패가 있었다. 조조가 여건, 조홍으로 하여금 싸우게 하였으나 이롭지 못하자 조조가 서쪽을 바라보고 달아났다. 갑자기 또한 함성이 크게 일어나면서 한 떼의 군사가 이르렀는데 학맹, 조성, 성렴, 송헌 네 장군이 (조조가)가는 길을 막으니 여러 장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데 조조도 앞장 서 진을 공격하였다. 목탁소리가 울리는 곳에서 화살이 비가 내리듯 쏟아져 내렸다. 조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탈출할 수 있는 계책도 없어 크게 소리 지르기를 누가 나를 구할 수 있는가!” 했다.

 

馬軍隊裏一將踴出乃典韋也手挺雙鐵戟大叫:「主公勿憂!」飛身下馬住雙戟取短戟十數枝在手中顧從人曰:「賊來十步乃呼我!」遂放開腳步冒箭前行布軍數十騎追至從人大叫:「十步矣!」韋日:「五步乃呼我!」從人又曰:「五步矣!」韋乃飛戟刺之一戟一人墜馬並無虛發立殺十數人眾皆奔走韋復飛身上馬挺一雙大鐵戟衝殺入去宋四將不能抵擋各自逃去典韋殺散敵軍救出曹操眾將隨後也到尋路歸寨

기병 중에 한 장군이 뛰어나왔는데 곧 전위였다. 손에 두 개의 철창을 빼어들고 크게 소리치기를 주공은 근심하지 마십시오!”하고는 몸을 날려 말에서 내려 쌍창을 땅에 꼿고 짧은 창 10여개를 취하여 손에 들고 따르는 사람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적이 와서 10보 떨어지면 나를 부르라!” 하였다. 마침내 발걸음을 크게 하여 화살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갔다. 여포의 군대 수십 기가 따라 이르니 따르는 사람들이 크게 소리치기를 “10보입니다!” 했다. 전위가 말하기를 “5보이면 곧 나를 부르라!”하니 따르는 사람이 또 말하기를 “5보입니다!” 했다. 전위가 곧 창을 날려 찌르니 한 창에 한 사람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헛된 창이 없어 수십 명을 죽였다. 무리들이 모두 달아났다. 전위가 다시 몸을 날려 말을 타고 한 쌍의 큰 쇠창을 뽑아 쳐서 죽이며 들어갔다. 학맹, 조성, 성렴, 송헌 네 장군이 막지 못하여 각자 도망하여 갔다. 전위가 흩어진 적군을 죽이고, 조조를 구출하니 여러 장군들이 뒤를 따라 이르자 길을 찾아 진영으로 돌아갔다.


看看天色傍晚背後喊聲起處呂布驟馬提戟趕來大叫:「操賊休走!」此時人困馬乏大家面面相覷各欲逃生正是

해질 무렵 뒤에서 함성이 일어나는 곳에서 여포가 말을 달려 창을 가지고 쫓아오면서 크게 소리 지르기를 조조 도적아 달아나지 말라!” 했다. 이때 사람과 말이 피곤하여 대가들이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으로 각기 도망하여 살고자 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雖能暫把重圍脫只怕難當勁敵追不知曹操性命如何且聽下文分解

비록 잠간 두터운 포위를 탈출 할 수 있었으나, 다만 굳센 적의 추격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구나. 조조의 목숨이 어떠할지는 알지 못하니 또한 아래의 글에서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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