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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연의

제85회 유선주(유현덕)는 유언으로 고아(아버지 상을 당한 이:후주 유선)를 부탁하고, 제갈량(제갈공명)은 편안히 있으면서 오로를 평정하다.

by 최인표 2021. 5. 21.

第八十五回劉先主遺詔託孤兒諸葛亮安居平五路

85회 유선주(유현덕)는 유언으로 고아(아버지 상을 당한 이:후주 유선)를 부탁하고, 제갈량(제갈공명)은 편안히 있으면서 오로를 평정하다.

 

卻說章武二年夏六月東吳陸遜大破蜀兵於猇亭彝陵之地先主奔回白帝城趙雲引兵據守忽馬良至見大軍已敗懊悔不及將孔明之言奏知先主先主歎曰:「朕早聽丞相之言不致今日之敗今有何面目復回成都見群臣乎!」遂傳旨就白帝城駐紮將館驛改為永安宮人報馮習張南傅彤程畿沙摩柯等皆歿於王事先主傷感不已又近臣奏稱:「黃權引江北之兵降魏去了陛下可將彼家屬送有司問罪。」先主曰:「黃權被吳兵隔斷在江北岸欲歸無路不得已降魏是朕負權非權負朕也何必罪其家屬?」仍給祿米以養之

각설하고 장무 이년 여름 유월에 동오 육손은 촉의 군대를 효정과 이릉 땅에서 크게 깨트리니 선주(유현덕)는 백제성으로 돌아가고 조운(조자룡)이 군대를 이끌고 점거하여 지켰다. 홀연히 마량이 이르러 대군이 이미 패한 것을 보고 뉘우치고 한탄해 마지않으면서 제갈공명의 말을 선주(유현덕)에게 아뢰었다. 선주(유현덕)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승상(제갈공명)의 마를 들었다면 오늘의 패함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성도에 돌아 가 여러 신하를 부겠는가!”하고는 마침내 명령을 내려 백제성에 나아가 주둔하고 관역을 고쳐 영안궁이라 하였다. 사람이 풍습, 장남, 부동, 정기, 사마가 등이 모두 왕사(왕의 일)에 죽었다고 보고하자 선주(유현덕)는 서글퍼하기를 그치지 못하였다. 또 근신이 아뢰어 말하기를 황권이 강북의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에 항복하러 갔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들의 가족을 데려다 유사(담당관청)에 보내 죄를 물어야 합니다.”했다. 선주(유현덕)가 말하기를 황권은 오나라 군대가 강북쪽 언덕을 막고 있어 돌아오고자 하나 길이 없어 부득이 위나라에 항복하였을 것이다. 이는 짐이 황권을 저버린 것이지 황권이 짐을 저버린 것이 아니다. 어찌 그 가족에게 죄를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하고는 녹미를 주어 부양했다.

 

卻說黃權降魏諸將引見曹丕丕曰:「卿今降朕欲追慕於陳韓耶?」權泣而奏曰:「臣受蜀帝之恩殊遇甚厚令臣督諸軍於江北被陸遜絕斷臣歸蜀無路降吳不可故來投陛下敗軍之將免死為幸安敢追慕於古人耶?」丕大喜遂拜黃權為鎮南將軍權堅辭不受忽近臣奏曰:「有細作人自蜀中來說蜀主將黃權家屬盡皆誅戮。」權曰:「臣與蜀主推誠相信知臣本心必不肯殺臣之家小也。」丕然之後人有詩責黃權曰降吳不可卻降曹忠義安能事兩朝堪歎黃權惜一死紫陽書法不輕饒

각설하고 황권이 위나라에 항복하자 여러 장수들이 인도하여 조비를 뵙게 하였다. 조비가 말하기를 경이 지금 짐에게 항복한 것은 진평과 한신을 추모하여 따르려는 것인가?”하니 황권이 눈물을 흘리며 아뢰어 말하기를 신은 촉 황제의 특별한 은혜를 받음이 매우 두터워 신으로 하여금 여러 군사를 강북에서 감독하게 하였는데 육손에게 길이 끊어짐을 당하였습니다. 신이 촉으로 돌아가려하나 길이 없고, 오나라에 항복할 수도 없어 폐하게 들어 온 것입니다. 패한 군대의 장수로 죽음을 면하는 것만도 다행인데 어찌 감히 옛 사람을 추모하여 따르겠습니까?”했다. 조비가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황권에게 벼슬을 주어 진남장군으로 삼았다. 황권은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홀연히 근신이 아뢰어 말하기를 첩자가 촉에서 왔는데 촉주(유현덕)가 황권의 가족을 데려다 모두 죽였다고 말하였습니다.”했다. 황권이 말하기를 신과 촉주(유현덕)는 정성으로 대하고 서로 믿어, 신의 본심을 알기 때문에 신의 가족을 죽이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했다. 조비가 그렇게 여겼다. 후세 사람이 시를 지어 황권을 꾸짖어 말하기를 오나라에 항복할 수 없다며 도리어 조씨(조비)에게 항복하니 충성과 의리상 어찌 두 조정을 섬길 수 있는가? 황권이 한 번 죽음을 아끼니 자양서법에는 간단히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했다.

 

曹丕問賈詡曰:「朕欲一統天下先取蜀乎先取吳乎?」詡曰:「劉備雄才更兼諸葛亮善能治國東吳孫權能識虛實陸遜見屯兵於險要隔江泛湖皆難卒謀以臣觀之諸將之中皆無孫權劉備敵手雖以陛下天威臨之亦未見萬全之勢也只可持守以待二國之變。」

조비가 가후에게 물어 말하기를 짐은 천하를 통일하려하는데 촉을 먼저 취하여야 하는가? 오를 먼저 취하여야 하는가?”하니 가후가 말하기를 유비(유현덕)는 영웅의 재능을 지녔고, 다시 겸하여 제갈량(제갈공명)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동오의 손권은 허실을 알고 있고, 육손이 험한 요해처에 주둔하여 강을 사이하고 호수가 넓으니 모두 갑자기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신이 관찰하건데 여러 장수들 중에는 모두 손권과 유비(유현덕)의 적수가 없습니다. 비록 폐하께서 하늘의 위엄으로 임할지라도 또한 만전(온전한 형세)의 형세를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지키는 것으로서 두 나라에 변이 있기를 기다려야 합니다.”했다.

 

丕曰:「朕已遣三路大兵伐吳安有不勝之理?」尚書劉曄曰:「近東吳陸遜新破蜀兵七十萬上下齊心更有江湖之阻不可卒制。」陸遜多謀必有準備。」丕曰:「卿前勸朕伐吳今又諫阻何也?」曄曰:「時有不同也昔東吳累敗於蜀其勢頓挫故可擊耳今既獲全勝銳氣百倍未可攻也。」

조비가 말하기를 짐이 이미 세 길로 대군을 보내 오나라를 치게 하였는데 어찌 이기지 못 할리가 있겠는가?”했다. 상서 유엽이 말하기를 최근 동오의 육손이 새롭게 촉의 군대 칠십만을 깨트려 상하가 마음을 같이하고 있고, 다시 강과 호수의 막힘이 있어 갑자기 제어할 수 없고, 육손은 꾀가 많으니 준비가 있을 것입니다.”했다. 조비가 말하기를 경은 앞서 짐에게 오를 치라고 권하더니 지금은 또한 간하여 막으니 왜인가?”하니 유엽이 말하기를 때가 같지 않음이 있습니다. 옛날 동오는 촉에게 여러 번 패하여 그 형세가 갑자기 꺽였기 때문에 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은 이미 완전한 승리를 하여 날카로운 기운이 백배이니 공격할 수 없습니다.”했다.

 

丕曰:「朕意已決卿勿復言。」遂引御林軍親往接應三路兵馬早有哨馬報說東吳已有準備令呂範引兵拒住曹休諸葛瑾引兵在南郡拒住曹真朱桓引兵當住濡須以拒曹仁劉曄曰:「既有準備去恐無益。」丕不從引兵而去

조비가 말하기를 짐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경은 다시 말하지 말라.”했다. 마침내 어림군을 이끌고 친히 세 길의 병마를 접응하러 갔다. 바로 정찰병이 동오가 이미 준비가 있어 여범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조휴를 막게 하고, 제갈근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남군에 있으면서 조진을 막게 하고, 주환은 군대를 이끌고 유수에 주둔하는 것으로서 조인을 막게 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유엽이 말하기를 이미 준비가 있으니 가도 이익이 없을까 두렵습니다.”했으나 조비는 따르지 않은 채 군대를 이끌고 갔다.

 

卻說吳將朱桓年方二十七歲極有膽略孫權甚愛之時督軍於濡須聞曹仁引大軍去取羨溪桓遂盡撥軍守把羨溪去了止留五千騎守城忽報曹仁令大將常雕同諸葛虔王雙引五萬精兵飛奔濡須城來眾軍皆有懼色

각설하고 오나라 장수 주환은 나이가 이십칠 세로 지극히 담력과 계략이 있어 손권이 매우 그를 사랑하였다. 이 때 (주환은) 유수에서 군대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조인이 대군을 이끌고 가서 선계를 취하려 한다는 것을 듣자 주환은 마침내 군대를 모두 동원하여 선계를 지키러 가면서 다만 오천의 기병을 남겨 성을 지키게 하였다. 홀연히 조인이 대장 상조로 하여금 제갈건, 왕쌍과 함께 오만의 정예군대를 이끌고 유수성으로 달려온다고 보고하였다. (주환의 )여러 군사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桓按劍而言曰:「勝負在將不在兵之多寡兵法云;『客兵倍而主兵半者主兵尚能勝於客兵。』今曹仁千里跋涉人馬疲困吾與汝等共據高城南臨大江北背山險以逸待勞以主制客以主制客此乃百戰百勝之勢雖曹丕自來尚不足憂況仁等耶?」於是傳令教眾軍偃旗息鼓只作無人守把之狀

주환이 검을 만지며 말하기를 이기고 지는 것은 장수에게 달려있고, 군대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병법에 객병(공격하는 군대)이 배이고, 주병(수비하는 군대)이 반이라면 오히려 객병을 이길 수 있다.’했다. 지금 조인은 천리를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왔으니 인마가 피곤하다. 나와 너희들이 함께 높은 성에 기대었고, 남쪽으로 큰 강을 임하였고, 북쪽으로는 산의 험함을 등지고 있다. (우리는)편안함으로서 피로함을 기다리니 주병(수비군)으로서 객병(공격군)을 제어하는 것이니 이는 곧 백번 싸우면 백번을 이기는 형세이다. 비록 조비가 직접 오더라도 오히려 근심할 것이 없는데 하물며 조인 따위이겠는가?”하고는 이에 명령을 내려 많은 군사로 하여금 깃발을 넘어뜨리고 북을 치지 말아 지키는 사람이 없는 모습을 만들게 했다.

 

且說魏將先鋒常雕領精兵來取濡須城遙望城上並無軍馬雕催軍急進離城不遠一聲砲響旌旗齊豎朱桓橫刀飛馬而出直取常雕戰不三合被桓一刀斬常雕於馬下吳兵乘勢衝殺一陣魏兵大敗死者無數朱桓大勝得了無數旌旗軍器戰馬曹仁領兵隨後到來卻被吳兵從羨溪殺出曹仁大敗而退回見魏主細奏大敗之事丕大驚

각설하고 위나라 장수 선봉 상조가 정예군대를 거느리고 유수성을 취하러 와 멀리 성 위에 군마가 없는 것을 바라보았다. 상조는 군대를 재촉하여 급히 진군하는데 성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 때 한 소리 포가 울리고 깃발이 일제히 세워졌다. 주환이 칼을 빗겨들고 빠르게 말을 몰아 나와 곧바로 상조를 취하려 하였다. 싸운 지 삼합이 되지 않아 주환이 한 칼에 상조를 베어 말에서 떨어뜨렸다. 오나라 군사들이 형세를 타고 한바탕 치고 죽이니 위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주환이 크게 이기고 헤아릴 수 ᅟᅥᆹ는 깃발과 무기, 전마를 얻었다. 조인이 군대를 거느리고 뒤를 따라 왔으나 도리어 오나라 군대가 선계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조인이 크게 패하고 물러났다. 돌아와 위나라 임금을 뵙고 크게 패한 일을 자세히 아뢰니 조비가 크게 놀랐다.

 

正議之間忽探馬報:「曹真夏侯尚圍了南郡被陸遜伏兵於內諸葛瑾伏兵於外內外夾攻因此大敗。」言未畢忽探馬又報:「曹休亦被呂範殺敗。」丕聽知三路兵敗乃喟然歎曰:「朕不聽賈詡劉曄之言果有此敗!」時值夏天大疫流行馬步軍十死六七遂引軍回洛陽魏自此不和

논의 하는 사이에 홀연히 정찰병이 보고하기를 조진, 하후상이 남군을 포위하였으나 육손의 복병은 안에서, 제갈근의 복병은 밖에서 협공하니 이 때문에 크게 패하였습니다.”했다.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홀연히 정찰병이 또 보고하기를 조후가 또한 여범에게 죽고 패하였습니다.”했다. 조비가 세 길의 군대가 패한 것을 들어 알고는 이에 위연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짐이 가후와 유엽을 따르지 않아 과연 이 패함이 있구나!”했다. 때는 한 여름으로 역병이 크게 유행하여 기병과 보병 열명 중에 육, 칠 명이 죽으니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돌아갔다. 오나라와 위나라가 이로부터 하지 않았다.

 

卻說先主在永安宮染病不起漸漸沈重至章武三年夏四月先主知病入四肢又哭關張二弟其病愈深兩目昏花厭見侍從之人乃叱退左右獨臥於龍榻之上忽然陰風驟起將燈吹搖滅而復明只見橙影之下二人侍立先主怒曰;「朕心緒不寧教汝等且退何故又來!」叱之不退先主起而視之上首乃雲長下首乃翼德也先主大驚曰:「二弟原來尚在!」雲長曰:「臣等非人乃是鬼也上帝以臣二人平生不失信義皆敕命為神哥哥與兄弟聚會不遠矣。」

각설하고 선주(유현덕)는 영안궁에 있었는데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고 점점 심해졌다. 장무 삼년 여름 사월에 이르러 선주(유현덕)는 병이 사지(팔과 다리)에 들어갔음을 알았고, 또 관운장, 장비 두 아우를 울며 부르니 그 병이 더욱 깊어지면서 두 눈이 어두워지고, 시종하는 사람 보기를 싫어하였다. 이에 좌우를 질책하여 물리치고 홀로 용탁 위에 누웠다. 홀연히 서늘한 바람이 불면서 등불이 흔들리며 꺼질듯하다가 다시 밝아졌다. 평상 아래를 보니 두 사람이 시립하고 있었다. 선주(유현덕)가 노하여 말하기를 짐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아 너희들로 하여금 물러나게 하였는데 무슨 이유로 또 왔는가?”하고 그들을 질책하였으나 물러나지 않았다. 선주(유현덕)가 일어나 그들을 보니 윗자리는 곧 운장(관운장)이고, 아래 자리는 곧 익덕(장비)이었다. 선주(유현덕)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두 동생은 알고 보니 아직도 살아 있구나!”하니 운장(관운장)이 말하기를 신들은 사람이 아니라 곧 귀신입니다. 상제께서 신들 두 사람이 평생동안 신의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칙명으로 신이 되었습니다. 형님은 형제들과 모여 만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했다.

 

先主扯定大哭忽然驚覺二弟不見即喚從人問之時正三更先主歎曰:「朕不久於人世矣!」遂遣使往成都請丞相諸葛亮尚書令李嚴等星夜來永安宮聽受遺命孔明等與先主次子魯王劉永梁王劉理來永安宮見帝留太子劉禪守成都且說孔明到永安宮見先主病危慌忙拜伏於龍榻之下先主傳旨請孔明坐於龍榻之側撫其背曰:「朕自得丞相幸成帝業何期智識淺陋不納丞相之言自取其敗悔恨成疾死在旦夕嗣子孱弱不得不以大事相託。」言訖淚流滿面孔明亦涕泣曰:「願陛下善保龍體以副天下之望!」

선주(유현덕)가 끌어당기며 크게 곡하다(크게 울다) 홀연히 놀라 깨니 두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곧 종인(시종)을 불러 물었는데 때는 전 삼경이었다. 선주(유현덕)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짐이 인간 세상에 있는 때가 멀지 않았구나!”하고는 마침내 사람을 보내 성도에 가 승상 제갈량(제갈공명), 상서령 이엄 등을 청해 밤을 새워 영안궁에 와 유명(유언)을 듣게 하였다. 제갈공명 등은 선주(유현덕)의 둘째 아들 노왕 유영, 양왕 유리와 함께 영안궁에 와 황제(유현덕)을 뵙고, 태자 유선은 머물러 성도를 지켰다. 각설하고 제갈공명이 영안궁에 이르러 선주(유현덕)의 병이 위태로움을 보고 황망히 용탑 아래에 엎드렸다. 선주(유현덕)가 명을 내려 제갈공명을 청해 용탑의 옆에 앉게 하고는 그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짐이 승상을 얻어 다행히 제업을 이루었으나 지식이 얕고 비루함을 생각하지 않고, 승상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그 무너짐을 취하였습니다. 뉘우침이 병이 되어 죽음이 아침저녁에 달렸습니다. 사자(후계자)가 연약하고 무능하니 대사를 부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는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려 얼굴에 가득하였다. 제갈공명이 또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용체(임금의 신체)를 잘 보존하시어 천하의 바람에 부응하기를 원합니다.”했다.

 

先主以目遍視只見馬良之弟馬謖在傍先主令且退謖退出先主謂孔明曰:「丞相觀馬謖之才何如?」孔明曰:「此人亦當世之英才也。」先主曰:「不然朕觀此人言過其實不可大用丞相宜深察之。」

선주(유현덕)가 눈으로 둘러보다 마량의 동생 마속이 곁에 있는 것을 보고 선주(유현덕)가 물러가게 하였다. 마속이 물러나가자 선주(유현덕)가 제갈공명에게 일러 말하기를 승상께서는 마속의 재능을 관찰해 보니 어떠합니까?”하니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또한 당대의 영재입니다.”했다. 선주(유현덕)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짐이 이 사람을 관찰해보니 말이 그 실제보다 지나치니 크게 쓸 수 없습니다. 승상께서는 마땅히 깊이 살펴야 합니다.”했다.

 

分付畢傳旨召諸臣入殿取紙筆寫了遺詔與孔明而歎曰:「朕不讀書粗知大略聖人云:『鳥之將死其鳴也哀人之將死其言也善。』朕本待與卿等同滅曹賊共扶漢室不幸中道而別煩丞相將詔付與太子禪令勿以為常言凡事更望丞相之!」

부탁을 마치고 명령을 내려 여러 신하를 불러 전각에 들게 하고 종이와 붓을 가져다 유조(유언)를 써서 전하여 제갈공명에게 주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짐이 글을 읽지 않아 큰 책략을 대략적으로 알 뿐입니다. 성인이 말하기를 새가 장차 죽을 때는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할 때는 그 말이 선하다.’했습니다. 짐은 본래 경들과 함께 조적(조조)을 없애고 함께 한나라 황실을 부축하려 하였는데 불행히도 중도에 이별하게 되었다. 번거롭지만 승상은 유조를 태자 선(유선, 후주)에게 주고, 평범한 말로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모든 일은 승상이 하기를 바랍니다.”했다.

 

孔明等泣拜於地曰:「願陛下將息龍體臣等盡施犬馬之勞以報陛下知遇之恩也。」先主命內侍扶起孔明一手掩淚一手執其手:「朕今死矣有心腹之言相告!」孔明曰:「有何聖諭?」先主泣曰:「君才十倍曹丕必能安邦定國終定大事若嗣子可輔則輔之如其不才君可自為成都之主。」

제갈공명 등이 눈물을 흘리며 땅에서 절하며 말하기를 페하께서는 용체(임금의 몸)를 쉬십시오! 신들은 견마지로를 다하는 것으로서 폐하께서 알아주시고 대우해 주신 은혜를 갚겠습니다.”했다. 선주(유현덕)가 내시로 하여금 제갈공명을 부축해 일으키게 하고 한 손으로는 눈물을 닦고, 한 손으로는 그 손을 잡고 말하기를 짐은 지금 죽을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알릴 것이다.!”하니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무슨 성스러운 깨우침이 있습니까?”했다. 선주(유현덕)가 울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재능은 조비보다 열 배 뛰어나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마침내 대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자(후계자)가 보필할 만하면 그를 보필하고, 만약 그 재능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성도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했다.

 

孔明聽畢汗流遍體手足失措泣拜於地曰:「臣安敢不竭股肱之力效忠貞之節繼之以死乎!」言訖叩頭流血先主又請孔明坐於榻上喚魯王劉永梁王劉理近前分付曰:「爾等皆記朕言朕亡之後爾兄弟三人皆以父事丞相不可怠慢。」言罷遂命二王同拜孔明二王拜畢孔明曰:「臣雖肝腦塗地安能報知遇之恩也!」

제갈공명이 듣기를 마치자 땀이 온 몸에 흐르고 손과 발을 둘 곳이 찾지 못하고(어쩔 줄 몰라 하며) 울며 땅에서 절하며 말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고굉의 힘을 다하고, 충정의 절개를 본 받아 죽음으로서 (유현덕의 뜻)잇지 않겠습니까?”했다. 말을 마치고 머리를 찧으니 피가 흘렀다. 선주(유현덕)가 또 제갈공명을 청해 탑 위에 앉게 하고 노왕 유영, 양왕 유리를 앞에 가까이 불러 분부해 말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짐의 말을 기억하였다가 짐이 죽은 후 너희 형제 세 사람은 모두 아버지로 승상 섬기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하는 말을 마치고 마침내 두 왕으로 하여금 제갈공명에게 절하게 하였다. 두 왕이 절하기를 마치자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간뇌가 땅에 뿌려질지라도 어찌 알아주시고 잘 대우해 주신 은혜를 갚지 않겠습니까?”했다.

 

先主謂眾官曰:「朕已託孤於丞相令嗣子以父事之卿等俱不可怠慢以負朕望。」又囑趙雲曰:「朕與卿於患難之中相從到今不想於此地分別卿可想朕故交早晚看覷吾子勿負朕言。」雲泣拜曰:「臣敢不效犬馬之勞!」先主又謂眾官曰:「卿等眾官朕不能一一分囑願皆自愛。」言畢駕崩壽六十三歲時章武三年四月二十四日也後杜工部有詩歎曰蜀主窺吳向三峽崩年亦在永安宮翠華想在空山外玉殿虛無野室中古廟杉松巢水鶴歲時伏臘走村翁武侯祠屋長鄰近一體君臣祭祀同

선주(유현덕)가 여러 관리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짐이 이미 승상에게 아버지를 잃은 이를 부탁하고, 자식들로 하여금 아버지로 섬기게 하였다. 경들은 모두 태만히 하여 짐의 바람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하고, 또 조운(조자룡)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짐과 경은 환난 중에서도 서로 따르며 지금에 이르렀는데 생각지 않게 이 땅에서 헤어지게 되었다. 경은 짐과 오래 사귄 것을 생각하여 아침저녁으로 내 자식을 지켜보며, 짐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했다. 조운이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말하기를 신이 감히 견마의 수고로움을 드러내지 않겠습니까?”했다. 선주(유현덕) 또 여러 관리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경들 여러 관리에게 짐이 일일이 나누어 부탁할 수 없으니 모두 스스로를 아끼기를 원한다.”하는 말을 마치고 (붕어하니)숨을 거두니 나이는 육십삼세이고, 때는 장무 삼년 사월 이십사일이었다. 후에 두공부(두보)가 시를 지어 탄식하기를 촉주(유현덕)가 오를 엿보아 삼협을 향하다, 붕어할 때 또한 영안궁에 있었다. 천자의 출정 깃발은 빈 산 밖에 있고, 옥전(궁전)은 들판 가운데 비어있다. 옛 사당의 전나무에는 학이 깃들고, 절기에 따라 촌 늙은이 달려온다. 무후사(제갈공명의 사당)가 오래 가까이 있으니 임금과 신하는 한 몸이라 제사를 함께한다.”했다.

 

先主駕崩文武官僚無不哀傷孔明率眾官奉梓宮還成都太子劉禪出城迎接靈柩安於正殿之內舉哀行禮畢開讀遺詔詔曰朕初得疾但下痢後轉生雜病殆不自濟朕聞人年五十不稱夭壽」。今朕六十有餘死復何恨但以汝兄弟為念耳勉之勉之勿以惡小而為之勿以善小而不為惟賢惟德可以服人汝父德薄不足效也吾亡之後汝與丞相從事事之如父勿怠勿忘汝兄弟更求聞達至囑至囑

선주(유현덕)가 붕어하자 문무관료들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제갈공명은 여러 관리들을 통솔하여 유현덕의 관을 받들고 성도로 돌아갔다. 태자 유선이 성을 나와 영구를 맞이하여 정전 안에 안치하고 곡하는 예를 마치고 유조(유언)를 열어 읽었다. 유조에 말하기를짐이 처음에 병을 얻었을 때는 다만 이질이었을 뿐인데 후에 여러 가지 병이 생겨나 위태로워져 스스로 구제하지 못하였다. 짐이 들으니 사람의 나이 오십이면 절음 나이에 죽는다고 말하지 않는다.’했다. 지금 짐의 나이 육십이 넘었으니 죽어도 다시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다만 너희 형제를 생각할 뿐이다. 힘쓰라! 힘쓰라! 악은 적다하여 하지 말고, 선은 적다하여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오직 허진 더덕만이 다른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다. 너희들 아비는 덕이 적어 내가 죽은 후 본받기에 부족하니 너희들은 승상과 서로 일에 종사하여 그를 섬기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여 태만히 하지 말고 잊지 말라! 너희 형제들은 다시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구하기를 지극히 부탁한다. 지극히 부탁한다.”했다.

 

群臣讀詔已畢孔明曰:「『國不可一日無君請立嗣君以承漢統。」乃立太子禪即皇帝諡位改元建興加諸葛亮為武鄉侯領益州牧葬先主於惠陵諡曰昭烈皇帝尊皇后吳氏為皇太后甘夫人為昭烈皇后糜夫人亦追諡為皇后陞賞群臣大郝天下

여러 신하들이 유조 읽기를 마쳤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나라에는 하루라도 임금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하고 사군(후계자, 태자)을 세우는 것으로서 한나라 전통을 계승할 것을 청합니다.”했다. 이에 태자 유선을 세워 황제의 지위에 오르게 하고 연호를 고처 건흥이라 하였다. 제갈량(제갈량)(작을)더하여 무향후로 삼아 익주목을 관할하게 하였다. 선주(유현덕)를 혜릉에 장례하고 시호를 소열황제라 하고, 황후 오씨를 높여 황태후라 하고, 감부인은 소열황후라 하고, 미부인 또한 시호를 추증하여 황후로 삼았다. 여러 신하를 승진시키고 상을 주고 천하에 크게 사면하였다.

 

早有魏軍探知此事報入中原近臣奏知魏主曹丕大喜曰:「劉備已亡朕無憂矣何不乘其國中無主起兵伐之?」賈詡諫曰:「劉備亡必託孤於諸葛亮亮感備知遇之恩必傾心竭力扶持嗣主陛下不可倉卒伐之。」

일찍이 위나라 군대가 이 일을 알아내어 중원에 보고하였다. 가까이 모시는 신하가 위나라 임금에게 아뢰어 알렸다. 조비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유비(유현덕)가 이미 죽었으니 짐은 근심할 것이 없어졌다. 어찌 그 나라에 임금이 없는 틈을 타서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지 않겠는가?”하니 가후가 간하여 말하기를 유비(유현덕)가 죽었으니 반드시 아버지를 잃은 이(후주 유선)를 제갈량(제갈공명)에게 부탁하였을 것입니다. 제갈량(제갈공명)은 유비(유현덕)의 은혜에 감동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마음을 기우리고 힘을 다하여 이은 임금을 보필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갑자기 그를 쳐서는 안 됩니다.”했다.

 

正言間忽一人從班部中奮然而出曰:「不乘此時進兵更待何時?」眾視之乃司馬懿也丕大喜遂問計於懿懿曰:「若只起中國之兵急難取勝須用五路大兵四面夾攻令諸葛亮首尾不能救應然後可圖。」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홀연히 한 사람이 줄 안에서 분연히 나와 말하기를 이런 때를 타서 진군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했다. 무리들이 그를 보니 곧 사마의였다. 조비가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사마의에게 계책을 물었다. 사마의가 말하기를 만약 중국의 군대만을 일으켜 급히 승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드시 오로의 대병을 써서 사방에서 협공하여 제갈량(제갈공명)으로 하여금 앞뒤로 대응하지 못하게 한 후에 도모할 수 있습니다.” 했다.

 

丕問何五路懿曰:「可修書一封差使往遼東鮮卑國王軻比能賂以金帛令起遼西羌兵十萬先從旱路取西平關此一路也再修書遣使齎官誥賞賜直入南蠻見蠻王孟獲令起兵十萬攻打益州永昌牂牁越雋四郡以擊西川之南此二路也再遣使入吳修好許以割地令孫權起兵十萬攻兩川夾口徑取涪城此三路也又可遣使至降將孟達處起上庸兵十萬西攻漢中此四路也然後命大將軍曹真為大都督提兵十萬由京兆徑出陽平關取西川此五路也共大兵五十萬五路並進諸葛亮便有呂望之才安能當此乎?」

조비가 오로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사마의가 말하기를 글 한 통을 써서 사자를 보내 요동의 선비국 왕 가비능에게 가서 비단을 뇌물로 주고 요서의 강족 군대 십만을 일으키게 하여 먼저 마른길(육로)를 따라 서평관을 취하게 하는 것이 일로입니다. 다시 글을 써서 사자를 보내 상을 내리는 관고(임금의 명을 적은 공문서)를 가지고 바로 남만에 들어 가 만왕 맹획을 만나 군대 십만을 일으켜 익주, 영창, 장가, 월준 네 군을 치는 것으로서 서천의 남쪽을 치게 하는 것이 이로입니다. 다시 사자를 보내 오나라에 들어 가 우호를 닦고 땅을 떼어주는 것을 허락하는 것으로서 손권으로 하여금 십만의 군대를 일으켜 양천(동천과 서천)의 협구(삼협 입구?)를 공격하고 지름길로 부성을 추하게 하는 것이 삼로입니다. 또 사자를 항복한 장수 맹달이 있는 곳에 보내 상용의 군대 십만을 일으켜 서쪽으로 한중을 공격하게 하는 것이 사로입니다. 그렇게 한 후 대장군 조진을 대도독으로 삼아 군대 십만을 데리고 경조로부터 지름길로 양평관을 나가 서천을 취하게 하는 것이 제 오로입니다. 큰 군대 오십만이 함께 오로를 나란히 진군합니다. 제갈량(제갈공명)이 곧 여망(주공)의 재능이 있다한들 어찌 이를 당해 내겠습니까?”했다.

 

丕大喜隨即密遣能言官四員為使前去又命曹真為大都督領兵十萬逕取陽平關此時張遼等一班舊將皆封列侯俱在冀青及合淝等處據守關津隘口故不復調用卻說蜀漢後主劉禪自即位以來舊臣多有病亡者不能細說凡一應朝廷選法錢糧詞訟等事皆聽諸葛丞相裁處時後主未立皇后孔明與群臣上言曰:「故車騎將軍張飛之女甚賢年十七歲可納為正宮皇后。」後主即納之

조비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비밀리에 말 잘하는 관리 네 명을 사자로 삼아 앞에 가게하고, 또 조진을 대도독으로 삼아 십만의 군대를 거느리게 하여 빠른 길로 양평관을 취하게 하였다. 이 때 장요 등 한 무리의 장수들은 모두 열후에 봉해져 모두 기주, 서주, 청주와 합비 등에 있으면서 관과 진의 애구(요충지)를 차치하여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등용되지 못하였다. 각설하고 촉한은 후주 유선이 즉위한 이래 옛 신하들이 병들고 죽은 자가 많아 자세히 말할 수 없다. 무릇 조정, 선법(관리를 선발하는 법), 전량(재정), 사송(소송) 등의 일은모두 제갈(제갈공명) 승상이 처리하는 것을 따랐다. 이 때 후주는 아직 황후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공명(제갈공명)과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옛 거기장군 장비의 딸이 매우 어질고, 나이가 십칠세로 들여 정궁의 황후로 삼을만합니다.”하니 후주가 곧 받아들였다.

 

建興元年秋八月忽有邊報說:「魏調五路大兵來取西川第一路曹真為大都督起兵十萬取陽平關第二路乃反將孟達起上庸兵十萬犯漢中第三路乃東吳孫權起精兵十萬取峽口入川第四路乃蠻王孟獲起蠻兵十萬犯益州四郡第五路乃番王軻比能起羌兵十萬犯西平關 此五路軍馬甚是利害已先報知丞相丞相不知為何數日不出視事。」

건흥 원년 가을 팔월 갑자기 변경에서 보고하기를 위나라가 오로의 큰 군대를 동원해 와서 서천을 취하려 하는데 제 일로는 조진이 대도독이 되어 군대 십만을 일으켜 양평관을 취하려하고, 제 이로는 곧 배반한 장수 맹달이 상용의 군대 십만을 일으켜 한중을 범하려하고, 제 삼로는 곧 동오 손권이 정예군대 십만을 일으켜 삼협의 입구를 취하여 천(동천, 서천)에 들어오려 하고, 제 사로는 곧 만왕 맹달이 만병 십만을 일으켜 익주 사군을 범하려 하고, 제 오로는 곧 번왕 가비능이 강족 군대 십만을 일으켜 서평관을 범하려 하는데 이 오로의 군마(의 기세)가 매우 맹렬합니다. 이미 먼저 승상께 보고하였으나 승상께서도 어떻게 할지 알지 못하는지 몇일 동안이나 일을 보러 나오지 않습니다.”했다.

 

後主聽罷大驚即差近侍齎旨宣召孔明入朝使命去了半日,「回報丞相府下人言丞相染病不出。」後主轉慌次日又命黃門侍郎董允諫議大夫杜瓊去丞相臥榻前告此大事杜二人到丞相府前皆不得入杜瓊曰:「先帝託孤於丞相今主上初豋寶位被曹丕五路兵犯境軍情至急丞相何故推病不出?」良久門吏傳丞相令:「病體稍可明早出都堂議事。」杜二人歎息而回

후주(유선)이 듣기를 마치고 크게 놀라 즉시 근시를 보내 명령을 가지고 제갈공명을 불러 조정에 들어오도록 했다. 임금의 명을 받은 사람이 간지 한 나절만에 돌아와 보고하기를 승상부 소속 사람이 승상이 병이 들어 나오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했다. 후주가 더욱 당황하여 다음 날 또 황문시랑 동윤, 간의대부 두찬으로 하여금 승상이 누워있는 침상 앞으로 사 이 큰일을 알리게 하였다. 동윤과 두찬 두 사람이 승상부 앞에 이르렀으나 모두 들어갈 수 없었다. 두찬이 말하기를 선제(유현덕)께서 고(아버지를 잃은 이: 후주 유선)를 승상께 부탁하셨습니다. 지금 주상(후주 유선)께서 처음 보위(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조비의 오로의 군대가 국경을 침범함을 당하여 군대의 정세가 지극히 급합니다. 승상께서는 무슨 이유로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는 것입니까?”했다. 오래 지난 후에 문리(문지기)가 승상의 명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병든 몸이 조금 나아졌으니 내일 일찍 도당에 나가 일을 의논할 것입니다.”했다. 동윤과 두찬 두 사람이 탄식하며 돌아갔다.

 

次日多官又來丞相府前伺侯從早至晚又不見出眾官惶惶只得散去杜瓊入奏後主曰:「請陛下聖駕親往丞相府問計。」後主即引多官入宮啟皇太后太后大驚:「丞相何故如此有負先帝委託之情也我當自往。」董允奏曰:「娘娘未可輕往臣料丞相必有有高明之見且待主上先往如困怠慢請娘娘於太廟中召丞相問之未遲。」太后依奏

다음 날 많은 관리들이 또한 승상부 앞에 와서 동정을 보며 기다렸다.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러도 또한 나오지 않았다. 여러 관리들이 불안해 떨며 흩어져 갔다. 두찬이 후주에게 들어 가 아뢰어 말하기를 폐하께서 가마를 타고 직접 승상부에 가서 계책을 물을 것을 청합니다.”했다. 후주(유선)가 곧 많은 관리를 이끌고 궁에 들어 가 황태후에게 알렸다, 태후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승상이 무슨 이유로 이 같이 하는가? 선제께서 맡기고 부탁한 것을 저버리는 사정이 있는가! 내가 마땅히 스스로 갈 것이다.”했다. 동윤이 아뢰어 말하기를 낭낭(임금의 어머니)께서는 가벼이 가서는 안 됩니다. 신은 승상이 반드시 고명한 견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우선 주상(후주 유선)께서 먼저 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 태만함이 있다면 낭낭께서 태묘 안으로 청하여 승상을 불러 물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태후가 (동윤이 아뢰는 것에) 의거하였다.

 

次日後主車駕親至相府門吏見駕到慌忙拜伏於地而迎後主問曰;「丞相在何處?」門吏曰:「不知在何處只有丞相鈞旨教擋住百官勿得輒入。」後主乃下車步行獨進第三重門見孔明獨倚竹杖在小池邊觀魚後主在後立久乃徐徐而言曰:「丞相安樂否?」孔明回顧見是後主慌忙棄杖拜伏於地曰:「臣該萬死!」後主扶起問曰;「今曹丕分兵五路犯境甚急相父緣何不肯出府視事?」 孔明大笑扶後主入內室坐定奏曰:「五路兵至臣安得不知臣非觀魚有所思也。」後主曰:「如之奈何?」孔明曰:「羌王軻比能蠻王孟獲反將孟達魏將曹真此四路兵臣已皆退去了也止有孫權這一路兵臣已有退兵之計但須一能言之人為使因未得其人故熟思之陛下憂乎?」

다음 날 후주(유선)가 직접 수레를 타고 승상부에 이르렀다. 문리(문지기)가 임금의 수레가 이르는 것을 보고 황급히 땅에 졸라며 엎드려 맞이하였다. 후주(유선)가 물어 말하기를 승상은 어디에 있는가?”하니 문리(문지기)가 말하기를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승상의 뜻이 있으니 백관을 막아 들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했다. 후주(유선)가 이에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홀로 삼중의 문으로 나아가니 제갈공명이 홀로 지팡이를 짚고 작은 연못가에서 물고기를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후주(유선)가 뒤에 오래 서 있다가 이에 천천히 말하기를 승상은 편안하셨습니까?”했다. 제갈공명이 돌아보다 후주(유선)를 보고는 황급히 지팡이를 버리고 땅에 절하며 엎드려 말하기를 신이 만 번 죽음에 해당합니다.”했다. 후주(유선)이 부축하여 일으키며 물어 말하기를 지금 조비가 군대를 다섯 길로 나누어 국경을 침범하여 매우 급한데 상부께서는 어찌하여 기꺼이 일을 보러 부를 나오지 않습니까?” 했다. 제갈공명이 크게 웃고는 후주(유선)를 부축하여 내실에 들어 가 않아 아뢰어 말하기를 오로의 군대가 이르는 것을 신이 어찌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신은 물고기를 본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바가 있었습니다.”했다. 후주(유선)이 말하기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니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강왕 가비능, 만완 맹획, 배반한 장수 맹달, 위나라 장수 조진 이 네 길의 군대는 신이 이미 모두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다만 손권 일로의 군대는 신이 이미 군대를 물리칠 계책이 있으나 다만 반드시 한 말을 잘하는 사람을 사신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직 그 사람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했다.

 

後主聽罷又驚又喜:「相父果有鬼神不測之機也願聞退兵之策。」孔明曰:「先帝以陛下付託與臣臣安敢旦夕怠慢成都眾官皆不曉兵法之妙貴在使人不測豈可洩漏於人老臣先知西番國王軻比能引兵犯西平關臣料馬超積祖西川人氏素得羌人之心羌人以超為神威大將軍臣已先遣一人星夜馳檄令馬超緊守西平關伏四路奇兵每日交換以兵拒之此一路不必憂矣又南蠻孟獲兵犯四邵臣亦飛檄遣魏延領一軍左出右入右出左入為疑兵之計蠻兵惟勇力其心多疑若見疑兵必不敢進此一路又不足憂矣又知孟達引兵出漢中孟達與李嚴曾結生死之交臣回成都時留李嚴守永安宮臣已作一書只做李嚴親筆令人送與孟達達必然推病不出以慢軍心此一路又不足憂矣又知曹真引兵犯陽平關此地險峻可以保守臣已調趙雲引一軍守把關隘並不出戰曹真若見我軍不出不久自退矣。」

후주(유선)가 듣기를 마치고 또한 놀라고 또한 기뻐하여 말하기를 상부는 과연 귀신이 헤아리지 못하는 틀이 있군요! 군대를 물리칠 계책을 듣고 싶습니다.”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선제(유현덕)께서 폐하를 부탁하여 신과 함께하게 하셨는데 신이 어찌 감히 아침저녁으로 태만히 하겠습니까? 성도의 여러 관리들이 모두 병법의 묘함을 깨닫지 못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헤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어찌 다른 사람에게 누설할 수 있겠습니까? 노신이 먼저 서쪽 번국 왕 가비능이 군대를 이끌고 서평관을 침범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이 헤아려보니 마초는 조상이 서천의 씨족으로 평소 강족 사람의 마음을 얻어 강족이 마초를 신위대장군이라 합니다. 신이 이미 먼저 한 사람을 보내 밤을 새워 격문을 가지고 치달리게 하여 마초로 하여금 서평관을 굳게 지키고 사방으로 군대를 매복시키고 매일 군대를 교대하는 것으로서 막게하였습니다. 이것이 일로를 근심할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또 남만 맹획의 군대가 네 고을을 침범하므로 신이 또한 격문으로 위연을 보내 일군을 거느리고 왼쪽으로 나오면 오른 쪽으로 들어가고, 오른 쪽으로 나오면 왼쪽으로 들어가 군대의 계책일까 의심하게 하였습니다. 만의 군대는 용력이 있으나 그 마음에 의심이 많으니 만약 군대가 의심스럽게 보이면 반드시 감히 진군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일로이니 근심할 필요 없습니다. 또 맹달이 군대를 이끌고 한중을 나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맹달과 이엄은 일찍이 살고 죽는 것을 같이하는 벗을 맺었습니다. 신이 성도에 돌아올 때 이엄을 남겨 영안궁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신이 이엄의 친필을 모방하여 이미 글 한 통을 써서 사람을 보내 맹달에게 주었습니다. 맹달은 반드시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군대의 마음이 게을러질 것입니다. 이 일로를 또한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조진이 군대를 이끌고 양평관을 침범할 것을 알았습니다. 이 땅은 험준하여 지킬만하고, 신이 이미 조운(조자룡)을 뽑아 일군을 이끌고 관의 좁은 것을 지키게 하면서 아울러 나가 싸우지 말라 하였습니다. 조진은 우리 군대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본다면 오래지 않아 스스로 물러날 것입니다.”했다.

 

此四路兵俱不足憂臣尚恐不能全保又密調關興張苞二將各引兵三萬屯於緊要之處為各路救應此數處調遣之事皆不曾經由成都故無人知覺只有東吳這一路兵未必便動如見四路兵勝川中危急必來相攻若四路不濟安肯動乎臣料孫權想曹丕三路侵吳之怨必不肯從其言雖然如此須用一舌辯之士逕往東吳以利害說之則先退東吳其四路之兵何足憂乎但未得說吳之人臣故躊躇何勞陛下聖駕來臨?」後主曰:「太后亦欲來見相父今朕聞相父之言如夢初覺復何憂哉!」

(제갈공명이 말하기를)“이 네 길의 군대는 모두 근심할 필용 없습니다. 신이 그래도 보전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또 비밀리에 관흥과 장포 두 장수를 뽑아 각각 이만의 군대를 이끌고 긴요한 곳에 주둔하여 각 길을 구원하고 대응하게 하였습니다. 이 몇 곳에 뽑아 보낸 일은 모두 일찍이 성도를 경유하지 않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동오의 이 일로의 군대가 아직 곧 움직이지 않고 있으나 만약 사로의 군대가 이겨 천중이 위태롭고 급한 것을 보면 반드시 와서 서로 공격할 것입니다. 만약 사로가 이루지 못한다면(이기지 못한다면) 어찌 기꺼이 움직이겠습니까? 신이 생각하건데 손권이 조비가 세 길로 오나라를 침범한 원한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기꺼이 그 말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이 같으나 반드시 말 잘하는 선비를 써서 지름길로 동오에 가 이해를 가지고 그들을 설득하여 먼저 동오를 물러나게 한다면 그 (나머지)네 길의 군대를 근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아직 오나라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을 얻지 못한 것이 신이 머뭇거리는 이유이지 어찌 수고롭게 폐하의 수레가 직접 오시게 하는 것이겠습니까?”했다. 후주(유선)가 말하기를 태후가 또한 와서 상부(제갈공명)를 뵙고자 합니다. 지금 짐이 상부(제갈공명)의 말을 들으니 마치 꿈에서 깬 것과 같으니 다시 무엇을 근심하리오!”했다.

 

孔明與後主共飲數杯送後主出府眾官皆環立於門外見後主面有喜色後主別了孔明上御車回朝眾皆疑惑不定孔明見眾官中一人仰天而笑面亦有喜色孔明視之乃義陽新野人姓鄧名芝字伯苗現為戶部尚書漢司馬鄧禹之後孔明暗令人留住鄧芝多官皆散

제갈공명과 후주(유선)이 같이 몇 잔의 술을 마시고 후주(유선)가 부를 나가는 것을 환송하였다. 여러 관리들이 모두 문 밖에 둥글게 둘러 서 있다가 후주(유선)의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을 보았다. 후주(유선)는 제갈공명과 헤어져 수레에 올라 궁으로 돌아갔다. 무리들이 모두 의혹하고 안정하지 못하였다.(어리둥절하였다.) 제갈공명이 여러 관리들 중에 한 사람을 보고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웃었는데 얼굴에 또한 기쁜 기색이 있었다. 제갈공명이 그를 보니 곧 의양 신야 사람으로 성은 등이고, 이름은 지로 자는 백묘였다. 현재 호부상서로 현재 한나라 사마 등우의 후손이었다. 제갈공명이 몰래 사람을 시켜 등지를 머물게 하였다. 많은 관리들이 모두 흩어졌다.

 

孔明請芝到書院中問芝曰:「今蜀吳鼎分三國欲討二國一統中興當先伐何國?」芝曰:「以愚意論之魏雖漢賊其勢甚大急難搖動當徐徐緩圖今主上初登寶位民心未安當與東吳連合結為脣齒一洗先帝舊怨此乃長久之計也未審丞相鈞意若何。」孔明大笑曰:「吾思之久矣奈未得其人今日方得也!」芝曰:「丞相欲其人何為?」 孔明曰:「吾欲使人往結東吳公既能明此意必能不辱君命使吳之任非公不可。」芝曰:「愚才智淺恐不堪當此重任。」孔明曰:「吾來日奏知天子便請伯苗一行切勿推辭。」芝應允而退至次日孔明奏准後主差鄧芝往說東吳芝拜辭望東吳而來正是吳人方見干戈息蜀使還將玉帛通未知鄧芝此去若何且看下文分解

제갈공명이 등지를 청해 서원 안에 이르자 등지에게 물어 말하기를 지금 촉, , 오가 솥발처럼 세 나라로 나뉘어 있는데 두 나라를 토벌하여 통일로 중흥을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어느 나라를 쳐야 합니까?”하니 등지가 말하기를 저의 뜻으로 논한다면 위나라가 비록 한나라의 도적이나 그 형세가 매우 크기 때문에 급히 흔들어 움직이게 하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천천히 느슨하게 도모해야 합니다. 지금 주상(후주 유선)께서 초음 황제 위에 올라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니 마땅히 동오와 연합하여 순치의 관계를 맺어(밀접한 관계)를 맺어 한 번 선제(유현덕)의 옛 원한을 씻는 이것이 오래할 계책입니다. 아직 승상(제갈공명)의 뜻이 어떠한지 살피지 못하였습니다.”했다. 제갈공명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그것을 생각한지 오래되었으나 그 사람을 얻지 못하였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얻었구나!”했다. 등지가 말하기를 승상께서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하니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나는 사람을 시켜 동오에 가 (동맹을)맺게 하고자 합니다. 공이 이미 이 뜻을 잘 알고 있으니 반드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나라에 사신가는 임무는 공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했다. 등지가 말하기를 저의 재능과 지혜가 얕아 이 중요한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내가 내일 천자께 아뢰어 백묘(등지)가 한 번 갈 것을 청할 것이니 절대로 사양하지 마십시오.”했다. 등지가 허락하고 물러났다. 다음 날에 이르러 제갈공명은 후주(유선)에게 등지를 보내 동오를 설득할 것을 아뢰었다. 등지가 절하여 하직하고 동오를 향해 갔다. 바로 이러하다. “오나라 사람들이 바야흐로 전쟁이 그치는 것을 보았는데, 촉의 사신이 다시 옥과 비단을 가지고 통하려하는구나.” 등지가 이렇게 가서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구나. 또 아래 글에서 나누어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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