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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1 문호왕 법민~김부대왕

by 최인표 2022. 4. 30.

三國遺事卷第二

文虎王法敏

王初卽位 龍朔辛酉 泗泚南海中有死女尸 身長七十三尺 足長六尺 陰長三尺 或云身長十八尺 在封乾二年丁卯 總章戊辰 王統兵 與仁問欽純等至平壤 會唐兵滅麗 唐帥李勣獲高臧王還國(王之姓高 故云高臧 按唐書高記現慶五年庚申 蘇定方等征百濟 後十二月大將軍契如何爲浿道行軍大摠管 蘇定方爲遼東道大摠管 劉伯英爲平壤道大摠管 以伐高麗 又明年辛酉正月 蕭嗣業爲扶餘道摠管 任雅相爲浿江道摠管 率三十五萬軍以伐高麗

삼국유사 권제2

문호왕 법민

왕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인 용삭 신유년에 사비 남쪽 바다 중에 죽은 여자의 시체가 있었는데 키가 73, 발의 크기 6, 성기가 3자였다. 혹은 키가 18자라고 했다. 봉건(건봉) 2년 정묘년에 있었다. 총장 무진년에 왕이 군대를 통솔하여 김인문, 김흠순 등과 평양성에 이르러 당나라 군대와 만나 고구려를 없앴다. 당나라 장수 이적이 고장왕(보장왕)을 잡아 나라로 돌아갔다.(왕의 성이 고씨이기 때문에 고장이라 한 것이다. 당서 고종기를 살펴보면 현경 5년 경신에 소정방 등이 백제를 정벌한 다음 12월에 대장군 계여하(계필하력)를 패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소정방을 요동도대총관을 삼고, 유백영을 평양도대총관으로 삼아 고려(고구려)를 정벌하게 했다. 또 다음 해 신유년 정월 소사업(을 부여도총관으로 삼고, 임아상을 패강도총관으로 삼아 35만군을 통솔하고 고려(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八月甲戌 蘇定方等及高麗 戰于浿江敗亡 乾封元年丙寅六月 以龐同善囗高臨薛仁貴李謹行等爲後援 九月 龐同善及高麗戰敗之 十二月己酉 以李勣爲遼東道行臺大摠管 率六摠管兵以伐高麗 總章元年戊辰九月癸巳 李勣獲高臧王 十二月丁巳獻俘于帝 上元元年甲戌二月 劉仁軌爲雞林道摠管 以伐新羅 而鄕古記云 唐遣陸路將軍孔恭水路將軍有相 與新羅金庾信等戍()之 而此云仁問欽純等 無庾信 未詳) 時 唐之游兵諸將兵 有留鎭而將謀襲我者 王覺之 發兵之

8월 갑술년에 소정방 등이 고려(고구려)에 이르러 패강에서 싸우다 패하여 도망하였다. 건봉 1년 병인년 6월 방동선, 고임, 설인귀, 이근행 등으로서 후원하게 하였다. 9월 방동선이 고려(고구려)와 싸워 패하였다. 12월 기유에 이적으로서 요동도행대대총관을 삼아 6 총관의 군대를 통솔하여 고려(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총장 1년 무진년 9월 계사일에 이적이 고장왕(보장왕)을 잡고, 12월 정사일에 황제에게 포로를 바쳤다. 상원 1년 갑술 2월에 유인괘를 계림도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치게 하였다. 신라 고기에 이르기를 당이 육로장군 공공과 수로장군 유상을 보내 신라 김유신 등과 고구려를 멸망시켰다하는데 여기서는 김인문, 김흠순 등은 말하였으나 김유신이 없는 것은 자세하지 않다.) 그 때 당의 유병과 여러 장병들이 진에 머물며 장차 우리를 습격할 것을 도모함이 있었다. 왕이 그것을 깨닫고 군대를 일으켰다.

 

明年 高宗使召仁問等讓之曰 爾請我兵以滅麗 害之何耶? 乃下圓扉 鍊兵五十萬 以薛邦爲帥 欲伐新羅 時 義相師西學入唐 來見仁問 仁問以事諭之 相乃東還上聞 王甚憚之 會群臣問防禦策 角干金天尊曰 近有明朗法師入龍宮 傳秘法以來 請詔問之 朗奏曰 狼山之南有神遊林 創四天王寺於其地 開設道場則可矣 時有貞州使走報曰 唐兵無數至我境 廻槧海上 王召明朗曰 事已逼至如何?

다음해 고종이 김인문 등을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우리를 해치려하는 것은 어째서인가?”하고는 감옥에 가둔 다음 군대 50만을 훈련시키고, 설방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하였다. 이 때 의상 스님이 유학하러 당에 들어갔다가 와서 김인문을 만났다. 김인문이 일(신라를 치려는 일)을 깨우쳤다.(알렸다.) 의상이 이에 동쪽(신라)으로 돌아와 임금에게 알렸다. 왕이 매우 꺼려하여 여러 신하를 모아 방어할 계책을 물었다. 각간 김천존이 말하기를 최근에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서 비법을 전해 왔는데 조서로 청하여 물어보십시오.”했다. 명랑이 아뢰어 말하기를 낭산 남쪽에 신유림이 있는데 사천왕사를 그 땅에 창건하고 도량을 열면 될 것입니다.”했다. 그 때 정주 사자가 달려와 보고해 말하기를 당나라 군대가 헤아릴 수 없이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이 명랑을 불러 말하기를 일이 이미 급하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했다.

 

朗曰 以彩帛假搆矣 王以彩帛營寺 草搆五方神像 以瑜珈明僧十二員 明朗爲上首 作文豆婁秘密之法 時 唐羅兵未交接 風濤怒起 唐舡皆沒於水 後改刱寺 名四天王寺 至今不墜壇席(國史大改刱在調露元年己卯) 後年辛未 唐更遣趙憲爲帥 亦以五萬兵來征 又作其法 舡沒如前 是時 翰林郎朴文俊 隨仁問在獄中 高宗召文俊曰 汝國有何密法 再發大兵 無生還者 文俊奏曰 陪臣等來於上國一十餘年 不知本國之事 但遙聞一事爾 厚荷上國之恩 一統三國 欲報之德 新刱天王寺於狼山之南 祝皇壽萬年 長開法席而已

명랑이 말하기를 물들인 비단으로 임시로 세워야 합니다.”했다. 왕이 물들인 비단으로 절을 만들고 풀로 5방신을 엮고 유가명승 12명으로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 삼아 문두루비밀법을 쓰게 하였다. 그 때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가 아직 서로 접하지 않았는데 바람과 파도가 노한 듯이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가라앉았다. 후에 절을 고쳐짓고 사천왕사라 이름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석이 떨어지지(없어지지) 않았다.(국사에 크게 고쳐지은 것이 조로 1년 기묘에 있다.) 그 후 신미년에 당나라가 다시 조헌을 장수로 삼아 보내 또 5만의 군대로 와서 정벌하였는데 또 그 법(문두루비밀법)을 썼더니 배가 전과 같이 가라앉았다. 이 때 한림랑 박문준이 김인문을 따라(김인문과 함께) 옥중에 있었다. 고종이 박문준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 어떤 비밀법이 있어서 두 번이나 대군을 일으켰는데도 살아 돌아온 자가 없는가?”했다. 박문준이 아뢰어 말하기를 신들이 상국(당나라)에 온지 10여년이 되어 본국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 한 가지 일을 들었을 뿐이니 두터이 상국의 은혜를 입어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고 덕을 갚고자 하여 새로 낭산의 남쪽에 천왕사를 짓고, 황제의 수명이 만년에 이르기를 기도하는 법석(법회)을 길게 열었다고 합니다.”했다.

 

高宗聞之大悅 乃遣禮部侍郞樂鵬龜使於羅 審其寺 王先聞唐使將至 不宜見茲寺 乃別刱新寺於其南待之 使至曰 必先行香於皇帝祝壽之所天王寺 乃引見新寺 其使立於門前曰 不是四天王寺 乃望德遙山之寺 終不入 國人以金一千兩贈之 其使乃還奏曰 新羅刱天王寺 祝皇壽於新寺而已 因唐使之言 因名望德寺(或系孝昭王代 誤矣) 王聞文俊善奏 帝有寬赦之意 乃命强首先生作請放仁問表 以舍人遠禹奏於唐 帝見表流涕 赦仁問慰送之 仁問在獄時 國人爲刱寺名仁容寺 開設觀音道場 及仁問來還 死於海上 改爲彌陁道場 至今猶存 大王御國二十一年 以永隆陰二年辛巳崩 遺詔葬於東海中大巖上

고종이 그것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 낙붕구를 신라에 사신으로 가서 그 절을 살펴보게 하였다. 왕이 앞서 당나라 사신이 장차 이를 것이라는 것을 듣고 이 절(사천왕사)을 보여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므로 따로 그 남쪽에 새로운 절을 창건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사신이 이르러 말하기를 반드시 먼저 황제의 수명을 기도하는 곳인 천왕사에서 향을 피우겠다.”고 하였다. 이에 새로운 절로 인도하여 보이니 그 사신이 문 앞에 서서 말하기를 이는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의 절이다.”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이 금 1천량을 주니 그 사신이 이에 돌아 가 아뢰어 말하기를 신라가 천왕사를 창건하고 새로운 절에서 황제의 수명을 기도할 뿐이었습니다.”했다. 이 당나라 사신의 말 때문에 망덕사라 이름 하였다.(혹은 효소왕대의 일이라 하나 잘못이다.) 왕은 박문준이 좋게 아뢰어 황제가 너그러이 용서할 뜻이 있다는 것을 듣고 이에 강수선생으로 하여금 김인문의 석방을 청하는 표를 짓게하여 사인 원우로서 당나라에 아뢰게 하였다. 황제가 표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김인문을 석방하여 위로하고 보냈다. 김인문이 옥에 있을 때 나라 사람들이 절을 창건하고 인용사라 이름하고, 관음도량을 개설하였다. 김인문이 돌아오다 바다 위에서 죽자 미타도량이라 고쳤는데 지금까지 아직 남아있다. 대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만인 영륭 2년 신사에 죽었다. 동해 중 큰 바위 위에 장례하라고 유조(유언)하였다.

 

王平時常謂智義法師曰 朕身後願爲護國大龍 崇奉佛法 守護邦家 法師曰 龍爲畜報何? 王曰 我厭世間榮華久矣 若麤報爲畜 則雅合朕懷矣 王初卽位 置南山長倉 長五十步 廣十五步 貯米穀兵器 是爲右倉 天恩寺西北山上 是爲左倉 別本云 建福八年辛亥築南山城 周二千八百五十步 則乃眞德王代始築 而至此乃重修爾 又始築富山城 三年乃畢 安北河邊築鐵城 又欲築京師城郭 旣令眞吏 時義相法師聞之 致書報云 王之政敎明 則雖草丘畫地而爲城 民不敢踰 可以潔災進福 政敎苟不明 則雖有長城 災害未消

왕이 평시에 항상 지의법사에게 일러 말하기를 짐은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교를 높이 받들고 나라를 지키기를 원합니다.”했다. 지의법사가 말하기를 용은 짐승의 응보인데 어찌된 것입니까?”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것은 오래되었습니다. 추한 응보로 짐승이 된다면 곧 짐이 품었던 생각에 잘 부합합니다.”했다. 왕이 청음 즉위하여 남산에 장창을 두었는데 길이 50, 넓이 15보로 미곡과 병기를 저장하고 이를 우창이라 하고, 천은사 서북쪽 산 위의 이것을 좌창이라 했다. 별본에 이르기를 건복 8년 신해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850보인데 곧 진덕왕대에 처음 쌓아 이에 이르러 곧 거듭 수리한 것이다. 또 처음 부산성을 쌓기 시작하여 3년만에 마쳣다. 안북하 가에 철성을 쌓고 또 경사(서울)에 성곽을 쌓으려 하여 이미 진리(관리)에게 명령하였는데 그 때 의상법사가 듣고 글을 올려 말하기를 왕의 정사와 교화가 밝으면 곧 비록 풀 언덕 땅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하여도 백성들은 감히 넘지 않을 것이니 재앙을 깨끗이 하는 것으로서 복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정사와 교화가 밝지 못하면 곧 비록 장성이 있다하여도 재해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王於是囗罷其役 麟德三年丙寅三月十日 有人家婢名吉伊 一乳生三子 總章三年庚午正月七 漢歧部一山級干[一作成山阿干婢] 一乳生四子 一女三子 國給穀二百石以賞之 又伐高麗 以其國王孫還國 置之眞骨位 王一日召庶弟車得公曰 汝爲冢宰 均理百官 平章四海 公曰 陛下若以小臣爲宰 則臣願潛行國內 示民間徭役之勞逸租賦之輕重官吏之淸濁 然後就職 王聽之

왕이 이에 그 성 쌓는 일을 그만두었다. 인덕 3년 병인 310일에 어던 사람의 집 여종 길이가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총장 3년 경오 정월 7일 한기부 일산 급간(성산 아간의 여종이라 한다.)이 한 번에 네 아들을 낳았는데 여자 하나와 아들 셋이었다. 나라에서 곡식 200석을 상으로 주엇다. 또 고구려를 치고, 그 나라 왕의 손자를 데리고 나라에 돌아와 진골의 지위에 두었다. 왕이 하루는 서제(이복동생) 차득공에게 말하기를 너는 총재(재상)가 되어 백관을 고르게 다스리고 사해를 평안하고 빛나게 만들라.”했다. 차득공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만약 소신으로서 재상 삼으신다면 곧 신은 나라 안을 몰래 돌아다니며 민간의 요역의 수고로움과 편안함, 조부(세금)의 가벼움과 무거움, 관리의 맑음과 흐림을 살핀 후 관직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했다. 왕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公著緇衣把琵琶爲居士形 出京師 經由阿瑟羅州(今溟州)牛首州(今春州)北原京(今忠州) 至於武珍州(今海陽) 巡行里閈 州吏安吉見是異人 邀致其家 盡情供億 至夜安吉喚妻妾三人曰 今茲侍宿客居士者 終身偕老 二妻曰 寧不並居 何以於人同宿 其一妻曰 公若許終身並居 則承命矣 從之 詰旦居士欲辭行時曰 僕京師人也 吾家在皇龍皇聖二寺之間 吾名端午也(俗謂端午爲車衣) 主人若到京師 尋訪吾家幸矣

차득공이 승복을 입고 비파를 들어 거사의 형상을 하고 경사(서울을)를 나왔다. 아슬라주(지금의 명주), 우수주(지금의 춘천), 북원경(지금의 충주)을 거쳐 무진주(지금의 해양)이 이르렀다. 마을 사이를 돌아다니는데 주리(무진주의 관리) 안길이 이가 이인(보통사람이 아닌)임을 보고 그 맞아 그 집에 이르러 성의를 다해 대접하였다. 밤이 되자 안길이 처첩 3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지금 손님 거사를 모시고 잠을 자는 사람은 종신토록 함께 늙을 것이다.”했다. 두 처가 말하기를 차라리 함께 살지 않을지언정 어찌 다른 사람과 함께 잠을 자겠습니까?”했다. 그 중에 한 처가 말하기를 (안길)이 만약 종신토록 함께 사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곧 명을 받들겠습니다.”하고는 그것을 따랐다. 다음날 아침 거사가 하직하고 가려할 때 말하기를 나는 경사(서울)사람입니다. 내 집이 황룡사와 황성사 두 절 사이에 있고, 내 이름은 단오입니다.(세상에서 단오를 거의라 한다.) 주인(안길)께서 만약 경사(서울)에 이른다면 나의 집을 찾아 방문하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했다.

 

遂行到京師 居冢宰 國之制 每以外州之吏一人上守京中諸曹 (注 今之其人也) 安吉當次上守至京師 問兩寺之間端午居士之家 人莫知者 安吉久立道左 有一老翁經過 聞其言 良久佇思曰 二寺間一家 殆大內也 端午者 乃車得令公也 潛行外郡時 殆汝有緣契乎 安吉陳其實 老人曰 汝去宮城之西歸正門 待宮女出入者告之 安吉從之 告武珍州安吉進於門矣 公聞而走出 携手入宮 喚出公之妃 與安吉共宴 具饌至五十味 聞於上 以星浮山(一作星損乎山)下爲武珍州上守繞木田 禁人樵採 人不敢近 內外欽羡之 山下有田三十畝 下種三石 此田稔歲 武珍州亦稔 否則亦否云

마침내 가서 경사(서울)에 이르러 총재(재상)가 되었다. 나라의 제도에 매번 외주(지방의 주)의 관리 한 사람을 서울 안의 여러 관아에 올려 보내 지키게 하였다.(지금의 기인이다.) 안길이 상수의 차례가 되어 경사(서울)에 이르러 두 절 사이 단오거사의 집을 물었다. 사람들이 아는 자가 없었다. 안길이 오래도록 길옆에 서 있는데 한 노옹이 있어 지나가다가 그 말을 듣고 오래 생각하다 말하기를 두 절 사이 한 집은 아마도 대궐일 것이고, 단오는 곧 차득공이다. 지방의 군을 잠행할 때 아마도 당신과 인연을 맺었던 듯하구나.”했다. 안길이 그 실정을 말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너는 궁성의 서쪽 귀정문으로 가 궁녀가 나고 드는 것을 기다리다가 말하라.”했다. 안길이 그것을 따라 무진주 안길이 문에 나아갔다고 알렸다. 차득공이 듣고 달려 나와 손을 잡고 궁에 들어가 차득공의 비를 불러내어 안길과 함께 연회를 열었다. 갖춘 음식에 50가지에 이르렀다. (임금)에게 아뢰어 성부산(성손호산이라 쓰기도 한다.)아래로서 무진주 상수소목전으로 삼아 사람들이 나무를 채취하는 것을 금하였다.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내외가 우러러 공경하고 부러워하였다. 산 아래 받 30묘가 있는데 종자 30석을 뿌렸다. 이 밭이 풍년이면 무진주가 또한 풍년이고, 아니면(흉작이면) 곧 또한 아니었다.(무진주가 또한 흉작이었다.)

 

萬波息笛

第三十一神文大王 諱政明 金氏 開耀元年辛巳七月七日卽位 爲聖考文武大王創感恩寺於東海邊(寺中記云 文武王欲鎭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立 開耀二年畢排 金堂砌下東向開一穴 乃龍之入寺旋繞之備 蓋遺詔之藏骨處 名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見臺) 明年壬午五月朔(一本云 天授元年 誤矣) 海官波珍喰朴夙淸奏曰 東海中有小山 浮來向感恩寺隨波往來 王異之 命日官金春質(一作春日)占之

만파식적

31 신문대왕은 휘(이름)가정명이고, 김씨로 개요 1년 신사 77일에 즉위하였다. 성고 문무대왕을 위해 감은사를 동해 가에 창건하고(절의 기록에 말하기를 문무왕이 왜병을 막고자 하였기 때문에 처음 이 절을 짓기 시작하여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해룡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개요 2년에 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 동쪽을 향해 한 구멍을 열어 절에 들어 와 돌아다니게 한 준비이다. 대개 유언으로 뼈를 감춘 곳을 대왕암이라 이름하고, 절 이름을 감은사라 했다. 후에 용이 형상을 나타난 것을 보던 곳을 이견대라 이름하였다. 했다.” 다음해 임오 5월 초하루(어떤 책에는 천수 1년이라 하였는데 잘못이다.) 해관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어 말하기를 동핸 안에 작은 산이 있는데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파도를 따라 왕래합니다.”했다. 왕이 이상하게 여기고 일관 김춘질(춘일로 쓰기도 한다.)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하였다.

 

曰 聖考今爲海龍 鎭護三韓 抑又金公庾信乃三十三天之一子 今降爲大臣 二聖同德 欲出守城之寶 若陛下行幸海邊 必得無價大寶 王喜 以其月七日 駕幸利見臺 望其山 遣使審之 山勢如龜頭 上有一竿竹 晝爲二 夜合一(一云 山亦晝夜開合如竹) 使來奏之 王御感恩寺宿 明日午時 竹合爲一 天地震動 風雨晦暗七日 至其月十六日風霽波平 王泛海入其山 有龍奉黑玉帶來獻 迎接共坐 問曰 此山與竹 或判或合 如何?

(김춘질이)말하기를 성고(문무왕)께서 지금 해룡이 되어 삼한을 지키고 있고, 또한 김유신은 곧 33천의 한 아들로 지금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하여 성을 지킬 보배를 내 주고자합니다. 만약 폐하께서 해변으로 가시면 반드시 값을 따질 수 없는 큰 보배를 얻을 것입니다.”했다. 왕이 기뻐하며 그 달 7일에 직접 이견대에 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산의 형세가 거북 머리와 같았다. 위에 한 줄기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합니다.(한편 산이 또한 낮과 밤에 열리고 합하는 것이 대나무와 같았다고 한다.) 사자가 와서 그것을 아뢰었다. 왕이 감은사에 가 잠을 잤다. 다음 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하여 하나가 되니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과 비로 7일간이나 어두컴컴하였다. 그 달 16일에 이르러 바람이 자고, 파도가 평온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흑옥대를 받들고 와서 바쳤다. (왕이)영접하여 함께 앉아 물어 말하기를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하는 것은 어째서인가?”했다.

 

龍曰 比如一手拍之無聲 二手拍則有聲 此竹之爲物 合之然後有聲 聖王以聲理天下之瑞也 王取此竹 作笛吹之 天下和平 今王考爲海中大龍 庾信復爲天神 二聖同心 出此無價大寶 令我獻之 王驚喜 以五色錦彩金玉酬賽之 勅使斫竹出海時 山與龍忽隱不現 王宿感恩寺 十七日 到祗林寺西溪邊 留駕晝饍 太子理恭(卽孝昭大王)守闕 聞此事 走馬來賀 徐察奏曰 此玉帶諸窠皆眞龍也 王曰 汝何知之? 太子曰 摘一窠沈水示之 乃摘左邊第二窠沈溪 卽成龍上天 其地成淵 因號龍淵 駕還 以其竹作笛 藏於月城天尊庫 吹此笛則兵退病愈 旱雨雨晴 風定波平 號萬波息笛 稱爲國寶 至孝昭大王代 天授四年癸巳 因失禮郞生還之異 更封號曰萬萬波波息笛 詳見彼傳

용이 말하기를 비유하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없고, 두 손으로 치면 곧 소리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의 물건 됨은 그것을 합한 후에 소리가 있습니다. 성스러운 왕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로 취하여(베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왕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바다 속 대룡이 되었고, 김유신이 다시 천신이 되었는데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이 값이 없는 큰 보배를 내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했다.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5색 비단, , 옥을 주고 사자로 하여금 대나무를 베어 바다를 나올게 할 때 산과 용이 홀연히 숨어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 묵었다. 17일 지림사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가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곧 효소대왕)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일을 듣고 말을 달려와 축하하고, 천천히 살펴본 뒤 아뢰어 말하기를 옥대의 여러 구멍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했다. 태자가 말하기를 하나의 구멍을 떼어 물에 넣어 보이겠습니다.”하고는 곧 왼쪽 두 번째 구멍을 떼어 시내에 넣었더니 곧 용을 이루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 때문에 용연이라 이름하였다. 왕이 돌아 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보관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곧 군대가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비가 올 때는 개고, 바람은 가라앉고 물결은 잔잔해졌다. 만파식적이라 이름하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대왕대에 이르러 천수 4년 계사에 실례랑(부례랑)이 살아 돌아 온 기이한 일로 인하여 다시 봉하여 말하기를 만만파파식적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에 보인다.

 

孝昭王代 竹旨郞(亦作竹曼 亦名智官)

第三十二孝昭王代 竹曼郞之徒有得烏(一云谷)級干 隷名於風流黃卷 追日仕進 隔旬日不見 郞喚其母 問爾子何在 母曰 幢典牟梁益宣阿干 以我子差富山城倉直 馳去行急 未暇告辭於郞 郞曰 汝子若私事適彼 則不須尋訪 今以公事進去 須歸享矣 乃以舌餅一合酒一缸 卒左人(鄕云皆叱知 言奴僕也)而行 郞徒百三十七人 亦具儀侍從 到富山城 問閽人 得烏失奚在 人曰 今在益宣田 隨例赴役 郞歸田 以所將酒餅饗之 請暇於益宣 將欲偕還 益宣固禁不許 時有使吏侃珍管收推火郡 能節租三十石 輸送城中 美郞之重士風味 鄙宣暗塞不通 乃以所領三十石 贈益宣助請 猶不許

효소왕대 죽지랑(또 죽만이라 쓰고, 또 지관이라 이름한다.)

32 효소왕대 죽만랑의 무리 중에 득오(득곡이라 하기도 한다.)급간이 있었는데 이름을 풍류황권에 올려 두고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근무지로 출근하더니 10여일간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이 그 어미를 불러 묻기를 너의 아들은 어디에 있는가?”하였다. 어미가 말하기를 당전(부대장) 모량부 익선 아간이 내 아들로서 부산성 창직(창고지기)으로 차출되어 달려감이 급하여 죽만랑에게 미처 인사를 알릴 겨를이 없었습니다.”했다. 죽만랑이 말하기를 너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그에게 갔다면 곧 반드시 찾아 볼 필요가 없을 것이나 지금 공공의 일로 나아갔으니 모름지기 돌아 가 대접할 것이다.”하고는 설병 일합과 술 한 항아리를 가지고 좌인(우리말에 개질지라 하는데 노복을 말한다.)을 데리고 갔다. 낭도 137명이 또한 의()를 갖추어 모시고 따랐다. 문지기에게 묻기를 득오실은 어디에 있는가?”하니 문지기가 말하기를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하고 있습니다.”했다. 죽만랑이 밭에 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대접하고 익선에게 휴가를 청해 함께 돌아가려 하였다. 익선이 굳게 금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 사리 간진이 추화군 능절조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운반하다가 죽만랑이 선비를 중하게 여기는 풍미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이 어둡고 막혀 통하지 않음을 비루하게 여겼다. 이에 가지고 있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득오실에게 휴가를 줄 것을)청하는 것을 도왔으나 아직 허락하지 않으므로 또 진절 사지가 타고 있던 말안장을 갖추어 주니 이에 허락하였다.

 

朝廷花主聞之 遣使取益宣 將洗浴其垢醜 宣逃隱 掠其長子而去 時 仲冬極寒之日 浴洗於城內池中 仍合凍死 大王聞之 勅牟梁里人從官者 並合黜遣 更不接公署 不著黑衣 若爲僧者 不合入鐘鼓寺中 勅史上侃珍子孫爲枰定戶孫 標異之 時 圓測法師是海東高德 以牟梁里人故不授僧職

조정의 화주가 그것을 듣고 사자를 보내 익선을 잡아 그 더럽고 추한 것을 씻어주려 하니 익선이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그 맏아들을 잡아 갔다. 그 때는 한 겨울로 매우 추운 날로 성 안 못에서 목욕시켰더니 그대로 얼어 죽었다. 대왕이 듣고 명령을 내려 모량리 사람으로 관직에 종사하는 자는 모두 쫓아 보내 다시 공서(관청)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검은 옷을 입지 못하게 하며, 만약 중이 된 자라면 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칙사가 간지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으로 삼고 특별히 표장하였다. 그 때 원측법사는 해동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주지 않았다.

 

初 述宗公爲朔州都督使 將歸理所 時三韓兵亂 以騎兵三千護送之 行至竹旨嶺 有一居士 平理其嶺路 公見之歎美 居士亦善公之威勢赫甚 相感於心 公赴州理 隔一朔 夢見居士入于房中 室家同夢 驚怪尤甚 翌日使人問其居士安否 人曰居士死有日矣 使來還告其死 與夢同日矣 公曰 殆居士誕於吾家爾 更發卒修葬於嶺上北峯 造石彌勒一軀 安於塚前 妻氏自夢之日有娠 旣誕 因名竹旨 壯而出仕 與庾信公爲副帥 統三韓 眞德太宗文武神文四代爲冢宰 安定厥邦 初 得烏谷慕

처음 술종공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장차 다스리는 곳으로 가려하였다. 그 때는 삼한이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기병 3천명으로서 호송하게 하였다. 행렬이 죽지령에 이르렀을 때 한 거사가 그 죽령 길을 평평하게 닦고 있었다. 술종공이 그것을 보고 감탄하여 칭찬하였다. 거사가 또한 술종공의 위엄과 형세가 매우 빛남을 좋게 여겨 서로 마음에 감동하였다. 숭종공이 주리에 부임한지 한 달이 되었다. 꿈에 거사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놀라고 괴이하게 여김이 더욱 심하였다. 다음날 사람을 시켜 그 거사의 안부를 묻게 하였더니 사람이 말하기를 거사가 죽은 지 며칠 되었습니다.”했다. 사자가 돌아와 그 죽음을 알렸는데 꿈과 같은 날이었다. 술종공이 말하기를 아마도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나려나보다.”하고 다시 병졸을 동원하여 재 위 북쪽 봉우리에 장례하고 석미륵 한 구를 조성하여(만들어) 무덤 앞에 안치하였다. (술종의)처가 꿈을 꾼 날로부터 임신하였고, 낳은 뒤에 인하여 이름을 죽지라 하였다. 장성해서 벼슬하여 김유신을 따라 부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였다. 진덕, 태종, 문무, 신문 4대에 걸쳐 총재(재상)가 되어 그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 득오곡이 낭(죽만랑)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어 부르니 다음과 같다.

 

郞而作歌曰

去隱春皆理米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皃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乎下是 郞也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지난 봄 그리워하매

모든 것이 시름하는데

아담하신 얼굴 주름살이 지시려는도다.

눈을 돌릴 사이에나마 뵙도록 하리라.

낭이여, 그리워하는 마음에 오고가는 길

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인들 있으리까.(시의 번역은 박성봉, 고경식 역, 삼국유사에 따름)

 

聖德王

第三十三聖德王 神龍二年丙午歲禾不登 人民飢甚 丁未正月初一日至七月三十日 救民給租 一口一日三升爲式 終事而計 三十萬五百碩也 王爲太宗大王刱奉德寺 設仁王道場七日 大赦 始有侍中職 (一本系孝成王)

성덕왕

33 성덕왕은 신룡 2년인 병오년에 벼가 익지 않아 백성들의 주림이 심하였다. 정미년 정월 초하루에서 730일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구휼하여 조(정미하지 않은 곡식)를 주었다. 한 사람당 하루 3되를 법으로 삼았는데 일을 마치고 계산하니 305백석이었다. 성덕왕이 태종대왕을 위하여 봉덕사를 창건하고 7일 동안 인왕도량을 베풀고, 죄수를 크게 용서하여 풀어주었다. 처음 시중의 관직을 두었다.(어떤 책에는 효성왕 때라 한다.)

 

水路夫人

聖德王代 純貞公赴江陵太守(今溟州) 行次海汀晝饍 傍有石嶂 如屛臨海 高千丈 上有躑躅花盛開 公之夫人水路見之 謂左右曰 折花獻者其誰? 從者曰 非人跡所到 皆辭不能 傍有老翁牽牸牛而過者 聞夫人言 折其花 亦作歌詞獻之 其翁不知何許人也 便行二日程 又有臨海亭 晝膳次 海龍忽攬夫人入海 公顚倒躄地 計無所出 又有一老人告曰 故人有言 衆口鑠金 今海中傍生 何不畏衆口乎? 宜進界內民 作歌唱之 以杖打岸 則可見夫人矣

성덕왕대 순정공이 강릉태수(지금의 명주)에 부임하였는데 길을 가는 도중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옆에 있는 바위 봉우리가 마치 병풍처럼 바다 가까이 있고, 높이는 천장이었다. 그 위에 철쭉꽃이 만발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누가 꽃을 꺽어 바칠 수 있는가?”했다. 종자(따르던 사람들)가 말하기를 사람이 이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하며 모두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옆에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옹(늙은 할아버지)이 있었는데 수로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꺽고, 또 노래 말을 지어 바쳤다. 그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인지 일지 못하였다. 2일을 더 가다 또 임해정(바다에 닿은 정자)가 있어 점심을 먹고 있을 때 해룡이 갑자기 수로부인을 납치하여 바다에 들어갔다. 순정공이 엎어지고 넘어졌으나 계책이 없었다. 또 어떤 한 노인이 알려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를 녹인다.’했습니다. 지금 바다 속의 짐승이 어찌 여러 사람의 말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경계 내의 백성을 동원하여 노래를 지어 부르며 지팡이(작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면 곧 수로부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公從之 龍奉夫人出海獻之 公問夫人海中事 曰 七寶宮殿 所饍甘滑香潔 非人間煙火 此夫人衣襲異香 非世所聞 水路姿容絶代 每經過深山大澤 屢被神物掠攬 衆人唱海歌詞曰 龜乎龜乎出水路 掠人婦女罪何極 汝若㥬逆不出獻 入網捕掠燔之喫 老人獻花歌曰 紫布岩乎 邊希執音乎 手母牛放敎遣 吾肹不喩慚肹伊賜等 花肹折叱可獻乎理音如

순정공이 그 말을 따르니 용이 수로부인을 받들고 바다를 나와 바쳤다. 순정공이 수로부인에게 바다 속의 일을 물었다. 수로부인이 말하기를 칠보로 장식된 궁전에 먹는 음식은 달고 향기로운 것이 인간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했다. 이 때 수로부인의 옷에서 기이한 향기가 났는데 세상에 맡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수로부인의 얼굴 자태가 견줄 이가 없어 매번 깊은 산과 큰 늪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에게 납치당하였다. 여러 사람이 부른 해가의 말은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 놓아라. 남의 부녀를 납치한 죄가 얼마나 지극한가. 네가 만약 거스르고 내어 바치지 않으면 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 먹을 것이다.”했고 노인의 꽃을 바칠 때 노래하기를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꺽어 바치오리다.” (양주동 역)했다.

 

孝成王

開元十年壬戌十月 始築關門於毛火郡 今毛火村 屬慶州東南境 乃防日本塞垣也 周廻六千七百九十二步五尺 役徒三萬九千二百六十二人 掌員元眞角干 開元二十一年癸酉 唐人欲征北狄 請兵新羅 客使六百四人來還國

효성왕

개원 10년 임술년 10월 처음 모화군에 관문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으로 경주 동남쪽 경계에 속하니 곧 일본을 방비하는 요새이다. 둘에는 67925자이니 역에 동원된 무리가 39262명이다. 감독한 사람은 원진 각간이다. 개원 21년 계유에 당나라 사람이 북적을 정벌하고자 하여 신라에 군대를 청하니 사객 604명이 왔다가 당나라로 돌아갔다.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德經等 大王備禮受之 王御國二十四年 五岳三山神等 時或現侍於殿庭 三月三日 王御歸正門樓上 謂左右曰 誰能途中得一員榮服僧來? 於是 適有一大德 威儀鮮潔 徜徉而行 左右望而引見之 王曰 非吾所謂榮僧也 退之 更有一僧 被衲衣負櫻筒(一作荷簣) 從南而來 王喜見之 邀致樓上 視其筒中 盛茶具已 曰 汝爲誰耶?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당나라에서) 덕경(도덕경) 등을 보내니 대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경덕왕 24) 오악, 삼산의 신들이 때로 혹 나타나 대궐의 뜰에서 모셨다. 33일 왕이 귀정문 누상에 행차하여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누가 길에서 한 명의 영복승(성대히 차려 입은 스님)을 데려 올 수 있겠는가?”했다. 이에 마침 한 대덕(큰 스님)이 있어 위의를 깨끗하게 하고 한가로이 가고 잇었다. 좌우가 바라보고 인도하여 (왕을) 뵙게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이른 바의 영승이 아니다.”하고 물러가게 하였다. 다시 한 스님이 있어 중의 옷을 입고 앵통(삼태기라고도 한다.)를 지고 남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왕이 그것을 보고 기뻐하며 누상으로 맞아 이르게 하였다. 그 통을 보니 다구가 담겨 있을 뿐이었다. (왕이) 말하기를 너는 누구라 하는가?”했다.

 

僧曰 忠談 曰 何所歸來? 僧曰 僧每重三重九之日 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今茲旣獻而還矣 王曰 寡人亦一甌茶有分乎? 僧乃煎茶獻之 茶之氣味異常 甌中異香郁烈 王曰 朕嘗聞師讚耆婆郞詞腦歌 其意甚高 是其果乎? 對曰 然 王曰 然則 爲朕作理安民歌 僧應時奉勅歌呈之 王佳之 封王師焉 僧再拜固辭不受 安民歌曰

중이 말하기를 충담입니다.” 하니 (왕이)말하기를 어디서 오는가?”했다. 중이 말하기를 저는 매 33(3월 삼짇날), 99(9월 중양절)에 차를 끓여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올립니다. 지금도 (차를)올리고 돌아오는 중입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에게도 또한 한 사발의 차를 나누어 줄 수 있는가?”하니 중이 곧 차를 끓여 올렸다. 차의 맛이 보통과 다르고, 사발 안에 보통과 다른 향이 강렬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스님의 기파랑을 기리는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러한가?”했다. (충담이) 대답해 말하기를 그러합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다스릴 노래를 지으라.”하니 중이 때에 맞추어 명을 받들어 노래를 바쳤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에 봉하였다. 중이 두 번 절하고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안민가에 말하기를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此肹喰惡支治良羅 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國惡支持以 支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國惡太平恨音叱如

임금은 아버지이고,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실지면, 백성은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면 나라 안의 유지됨을 알리라. 아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讚耆婆郞歌曰

咽嗚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皃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磧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高支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찬기파랑가는

헤치고 나타난 달이 흰구름 따라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기파랑의 모습이 잠겼구나. 일오천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뜻을 따르려 하노라. 아 잣나무 가지 드높다. 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이여.

 

王玉莖長八寸 無子廢之 封沙梁夫人 後妃滿月夫人 諡景垂太后 依忠角干之女也 王一日詔表訓大德曰 朕無祜 不獲其嗣 願大德請於上帝而有之 訓上告於天帝 還來奏云 帝有言 求女卽可 男卽不宜 王曰 願轉女成男 訓再上天請之 帝曰 可則可矣 然 有男則國殆矣 訓欲下時 帝又召曰 天與人不可亂 今師往來如隣里 漏洩天機 今後宜更不通 訓來以天語諭之

왕의 옥경(성기) 길이가 여덟 치였다. 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고, 사량부인으로 봉하고 후비인 만월부인의 시호는 경수태후이니 의충 각간의 딸이다. 왕이 하루는 표훈대덕에게 말하기를 짐이 복이 없어 그 후사를 얻지 못하였으니 대덕께서 상제에게 청하여 후사 두기를 원합니다.”했다. 표훈이 천제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 와 아뢰어 말하기를 천제가 말이 있었는데 딸을 구하면 가하나, 남자는 곧 마땅하지 않다고 합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딸을 바꾸어 아들을 이룰 것을 원합니다.”했다. 표훈이 하늘에 올라 가 청하니 천제가 말하기를 될 수는 있으나 남자를 두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했다. 표훈이 내려가려할 때 천제가 또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인간 사이는 어지럽힐 수 없다. 지금 스님이 왕래하기를 이웃 마을과 같이하고, 천기를 누설하니 지금 이후에는 마땅히 다시 통하지 말라.”했다. 표훈이 와서 하늘의 말로서 깨우쳤다.

 

王曰 國雖殆 得男而爲嗣足矣 於是 滿月王后生太子 王喜甚 至八歲王崩 太子卽位 是爲惠恭大王 幼冲故太后臨朝 政條不理 盜賊蜂起 不遑備禦 訓師之說驗矣 小帝旣女爲男故 自期晬至於登位 常爲婦女之戱 好佩錦囊 與道流爲戱 故國有大亂 修爲宣德與金良相所弑 自表訓後 聖人不生於新羅云

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비록 위태로워질지라도 남자를 얻어 후사로 삼으면 충분합니다.”했다. 이에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태자가 8세에 이르렀을 때 왕이 죽었다. 태자가 즉위하니 이가 혜공대왕이 된다. 어렸기 때문에 태후가 조정에 임하니(정사를 행하니) 정사가 잘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미처 막지 못하였다. 표훈 스님의 말이 증명된 것이다. 소제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항상 부녀의 놀이를 하고,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도교)와 희롱하였기(놀았기) 때문에 나라에 큰 난리가 생겨 마침내 선덕왕과 김양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표훈 이후로부터 성인이 신라에 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惠恭王

大曆之初 康州官署大堂之東 地漸陷成池(一本大寺東小池) 從十三尺 橫七尺 忽有鯉魚五六 相繼而漸大 淵亦隨大 至二年丁未 又天狗墜於東樓南 頭如瓮 尾三尺許 色如烈火 天地亦振 又是年 今浦縣稻田五頃中 皆米顆成穗 是年七月 北宮庭中 有二星墜地 又一星墜 三星皆沒入地 先時 宮北厠圊中 二莖蓮生 又奉聖寺田中生蓮 虎入禁城中 追覓失之 角干大恭家梨木上雀集無數 據安國兵法下卷云 天下兵大亂 於是大赦修省 七月三日 大恭角干賊起 王都及五道州郡幷九十六角干相戰大亂 大恭角干家亡 輸其家資寶帛于王宮 新城長倉火燒 逆黨之寶穀在沙梁牟梁等里中者 亦輸入王宮 亂彌三朔乃息 被賞者頗多 誅死者無算也 表訓之言國殆是也

혜공왕

대력 초에 강주 관청 큰 집의 동쪽에 땅이 정점 가라앉아 못을 이루었는데(어떤 책에는 대사(큰 절) 동쪽 작은 못이라 한다.) 길이 13, 7자였다. 홀연히 잉어 대여섯 마리가 서로 이어 점점 커지니 못이 또한 따라 커졌다. 2년 정미에 이르러 또한 천구가 동루 남쪽에 떨어졌는데 머리는 항아리 같고, 꼬리는 3자 정도였으며, 색은 뜨거운 불과 같고 천지가 또한 진동하였다. 또 이 해 금포현 도전() 5경이 모두 쌀알이 이삭을 이루었다. 이 해 7월 북궁의 뜰에 두 개의 별이 땅에 떨어지고, 또 하나의 별이 떨어졌는데 세 별이 모두 땅으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궁궐 북쪽 화장실 안에서 두 줄기 연이 났다. 또 봉성사 밭에서 연이 났고, 호랑이가 금성 안으로 들어왔는데 잡으려다 놓쳤다. 각간 대공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가 모였는데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안국병법 하권에 의하면 “(이런 일이 있으면)천하에 큰 병란(전란)이 일어난다.”하였다. 이에 (왕이)크게 죄수를 풀어주고 스스로를 닦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73일 대공간간의 적이 일어나니 왕도(서울)5도주군의 96각간이 서로 싸워 (나라가)크게 어지러워졌다. 대공간간의 집이 망하고 그 집의 재산과 비단을 왕궁으로 옮겼다. 신성의 장창이 불에 탔다. 거스르는 무리(역당)의 보물과 곡식으로 사량, 모량 등의 마을에 있던 것을 또 왕궁으로 옮겼다. 난이 세 달을 채우고 그쳤다. 상을 받은 자가 자못 많았고,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표훈이 말한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元聖大王

伊飱金周元 初爲上宰 王爲角干 居二宰 夢脫幞頭著素笠把十二絃琴 入於天官寺井中 覺而使人占之 曰 脫幞頭者 失職之兆 把琴者 著枷之兆 入井 入獄之兆 王聞之甚患 杜門不出 于時 阿飱餘三[或本餘山]來通謁 王辭以疾不出 再通曰 願得一見 王諾之 阿飱曰 公所忌何事? 王具說占夢之由 阿飱與拜曰 此乃吉祥之夢 公若登大位而不遺我 則爲公解之 王乃辟禁左右而請解之 曰 脫幞頭者 人無居上也 著素笠者 冕旒之兆也 把十二絃琴者 十二孫傳世之兆也 入天官井 入宮禁之瑞也 王曰 上有周元 何居上位?

원성대왕

이찬 김주원이 처음 상재가 되고, 왕은 각간이 되어 두 번째 재상에 있었다. 꿈에 복두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 12현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안에 들어갔다. 깨어 사람으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하였더니 (점친 자가)말하기를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이고, 거문고를 든 것은 형구()를 찰 징조입니다. 우물에 들어 간 것은 옥에 들어 갈 조짐입니다.”했다. 왕이 그것을 듣고 매우 근심하여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그 때 아손() 여삼(어떤 책에는 여산이라 했다.) 와서 뵙기를 통지하니 왕이 병을 핑계로 거절하고 나오지 않았다. 다시 통지하여 말하기를 한 번 뵐 수 있기를 원합니다.”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아찬이 말하기를 공이 꺼리는 바는 무슨 일입니까?”하니 왕이 꿈을 점친 이유를 갖추어 말하였다. 아손()이 절하며 말하기를 이는 곧 길하고 상서로운 꿈입니다. (원성왕)이 대위(왕위)에 오른 후에도 나를 잊지 않으신다면 곧 공(원성왕)을 위해 해석하겠습니다.”했다. 왕이 이에 좌우를 물리치고 해석해 줄 것을 청하였다. (아찬이) 말하기를 복두를 벗은 것은 다른 사람이 위에 있지 않은 것이고, 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12현금을 잡은 것은 12대손까지 세대를 전할 징조입니다. 천관정(천관사 우물)에 들어 간 것은 궁궐에 들어 갈 징조입니다.”했다. (원성왕)이 말하기를 위에 김주원이 있는데 어찌 윗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했다.

 

阿飱曰 請密祀北川神可矣 從之 未幾 宣德王崩 國人欲奉周元爲王 將迎入宮 家在川北 忽川漲不得渡 王先入宮卽位 上宰之徒衆 皆來附之 拜賀新登之主 是爲元聖大王諱敬信 金武() 盖厚夢之應也 周元退居溟州 王旣登極 時餘山已卒矣 召其子孫賜爵 王之孫有五人 惠忠太子憲平太子禮英匝干大龍夫人小龍夫人等也 大王誠知窮達之變 故有身空詞腦歌(歌亡未詳) 王之考大角干孝讓 傳祖宗萬波息笛 乃傳於王 王得之 故厚荷天恩 其德遠輝

아찬이 말하기를 비밀리에 북천의 신에게 제사하면 됩니다.”했다. 원성왕이 그것을 따랐다. 얼마되지 않아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고자하여 장차 궁궐에 맞아들이려 하였다. (김주원의)집이 내의 북쪽에 있었는데 홀연히 천이 불어 넘쳐 건널 수 없었다. 원성왕이 먼저 궁궐에 들어 가 왕위에 올랐다. 상재의 무리들이 모두 와서 붙어 절하며 새로 왕위에 오른 임금을 축하하였다. 이가 원성대왕이 되니 이름은 경신이고 성은 김씨이니 대개 꿈의 응함이었다. 김주원은 물러나 명주에서 살았다. 원성왕이 즉위했을 때 여산은 이미 죽은 후였다. (원성왕이)그 자손을 불러 벼슬을 내렸다. 왕의 자손이 5명 있었는데 혜충태자, 헌평태자, 예영잡간, 대룡부인, 소룡부인 등이다. 대왕은 진실로 가난함과 부귀의 변화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신공사뇌가(노래는 없어져 자세하지 않다.)를 지었다. 원성왕의 아버지 대각간 효양이 조상대대로 전해오던 만파식적을 원성왕에게 전했다. 왕은 만파식적을 얻었기 때문에 두터운 하늘의 은혜를 입어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다.

 

貞元二年丙寅十月十一日 日本王文慶(按日本帝紀 第五十五主文德王 疑是也 餘無文慶 或本云 是王太子) 擧兵欲伐新羅 聞新羅有萬波息笛退兵 以金五十兩 遣使請其笛 王謂使曰 朕聞上世眞平王代有之耳 今不知所在 明年七月七日 更遣使 以金一千兩請之曰 寡人願得見神物而還之矣 王亦辭以前對 以銀三千兩賜其使 還金而不受 八月 使還 藏其笛於內黃殿

정원 2년 병인 1011일 일본왕 문경(일본제기를 살펴보니 제55대 왕 문덕왕이라 했는데 아마도 이 왕일 것이다.)이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하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어 군대를 물리친다는 것을 듣고 금 50냥을 가지고 사신을 보내 그 피리를 청하였다. 원성왕이 사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짐이 윗세대 진평왕대에 그것일 있었다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 지금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했다. 다음해 77일 다시 사신을 보내 금 1천량을 가지고 청해 말하기를 과인이 신물을 보고 돌려보낼 것입니다.”했다. 원성왕이 또한 거절하고 전과 같이 말하고 은 3천량을 그 사신에게 내리고 금은 돌려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8월 사신이 돌아가고 그 피리를 내황전에 보관하였다.

 

王卽位十一年乙亥 唐使來京 留一朔而還 後一日 有二女進內庭 奏曰 妾等乃東池靑池(靑池卽東泉寺之泉也 寺記云 泉乃東海龍往來聽法之地 寺乃眞平王所造 五百聖衆五層塔 幷納田民焉)二龍之妻也 唐使將河西國二人而來 呪我夫二龍及芬皇寺井等三龍 變爲小魚 筒貯而歸 願陛下勅二人 留我夫等護國龍也 王追至河陽館 親賜享宴 勅河西人曰 爾輩何得取我三龍至此? 若不以實告 必加極刑 於是 出三魚獻之 使放於三處 各湧水丈餘 喜躍而逝

원성왕 즉위 11년 을해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 한 달을 머물다 돌아갔다. 그 후 하루는 두 여자가 내정에 나아와 아뢰어 말하기를 첩들은 곧 공지와 청지(동지는 곧 동천사의 샘이다. 절의 기록에 샘은 곧 동해용이 왕래하며 불법을 듣던 땅이다. 절은 곧 진평왕이 지었는데 오백성중, 오층탑과 아울러 전민을 바쳤다.’했다.) 두 용의 처입니다. 당의 사신이 하서국 사람 두 명을 데리고 왔다가 주문으로 우리 남편 두 용과 분황사 우물 등 세 용을 변화시켜 작은 물고기로 만들어 통에 담아 돌아갔습니다. 폐하께서 두 사람에게 명하여 우리 남편 등 호국용을 남겨두라고 해주시기를 원합니다.”했다. 원성왕이 뒤를 쫓아 하양관에 이르러 직접 연회를 내리고 하서사람에게 명해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찌하여 우리 세 용을 취해 여기에 이르렀는가? 만약 사실로서 고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극형을 가할 것이다.”했다. 이에 세 마리 물고기를 내어 바쳤다. 세 곳에 놓아주게 하였더니 각각 물이 한 길 정도나 용솟음치고 기뻐 뛰면서 갔다.

 

唐人服王之明聖 王一日請皇龍寺[注 或本云 華嚴寺又金剛寺囗 蓋以寺名經名 囗混之也]釋智海入內 稱華嚴經五旬 沙彌妙正 每洗鉢於金光井(因大賢法師得名)邊 有一黿浮沈井中 沙彌每以殘食 餽而爲戲 席將罷 沙彌謂黿曰 吾德汝日久 何以報之? 隔數日 黿吐一小珠 如欲贈遺 沙彌得其珠 繫於帶端 自後大王見沙彌愛重 邀致內殿 不離左右

당나라 사람들이 원성왕의 밝은 성스러움에 탄복하였다. 원성왕이 하루는 황룡사(주 어떤 책에는 화엄사, 또 금강사라 하는데 대개 절 이름과 불경의 이름이 섞인 듯하다.) 석지해를 궁궐에 들여 와 화엄경을 50일간 말하게 하엿는데 사미 묘정이 매번 금광정(대현법사로 인하여 이름을 얻었다.) 가에서 사발을 씻었다. 한 자라가 우물 안에서 떳다 가라앉았다. 사미 묘정이 매번 남은 밥을 먹이며 놀았다. 법석이 장차 다하려 할 때 사미가 자라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덕을 베픈 것이 오래되었는데 무엇으로서 갚을 것이냐?”했다. 며칠 후 자라가 하나의 작은 구슬을 토하여 주려는 듯하였다. 사미가 그 구슬을 얻어 허리 띠 끝에 달았다. 이후로부터 원성대왕이 사미를 보면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겨 내전에 맞아들여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時有一匝干 奉使於唐 亦愛沙彌 請與俱行 王許之 同入於唐 唐帝亦見沙彌而寵愛 承相左右莫不尊信 有一相士奏曰 審此沙彌 無一吉相 得人信敬 必有所將異物 使人檢看 得帶端小珠 帝曰 朕有如意珠四枚 前年失一个 今見此珠 乃吾所失也 帝問沙彌 沙彌具陳其事 帝內失珠之日 與沙彌得珠同日 帝留其珠而遣之 後人無愛信此沙彌者 王之陵在吐含岳西洞鵠寺(今崇福寺) 有崔致遠撰碑 又刱報恩寺又望德樓 追封祖訓入匝干爲興平大王 曾祖義官匝干爲神英大王 高祖法宣大阿干爲玄聖大王 玄聖大王 玄聖之考卽摩叱次匝干

그 때 한 잡간이 당나라에 사신을 가게 되었는데 또한 사미를 아껴 함께 가기를 청하였다. 원성왕이 허락하였다.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 황제가 또한 사미를 보고 총애하였고, 승상과 좌우가 높이고 신뢰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 관상쟁이가 있어 아뢰어 말하기를 이 사미를 살펴보니 하나의 갈한 상이 없는데 사람들이 믿고 공경함을 얻으니 반드시 기이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했다. 사람을 시켜 검사하여 허리띠 끝에서 작은 구슬을 얻었다. 황제가 말하기를 짐이 여의주 세 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난 해 한 개를 잃어버렸다. 지금 이 구슬을 보니 곧 내가 잃어버렸던 것이다.”했다. 황제가 사미에게 물으니 사미가 그 일을 모두 말하였다. 황제가 안에서 구슬을 잃어버린 날과 사미가 구슬을 얻은 것이 같은 날이었다. 황제가 그 구슬을 남겨두고 보냈다. 그 후 사람들이 이 사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았다. 원성왕의 무덤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지금의 숭복사)에 있는데 최치원이 지은 비가 있다. 또 보은사를 창건하고 또 망덕루를 지었다. 할아버지 훈입 잡간을 흥평대왕이라 하고, 증조 의관잡간을신영대왕이라 하고, 고조 법선대아간을 현성대왕이라 하였다. 현성의 아버지가 곧 마질차 잡간이다.

 

早雪

第四十哀莊王 末年戊子 八月十五日有雪

第四十一憲德王 元和十三年戊戌 三月十四日大雪(一本作丙寅 誤矣 元和盡十五 無丙寅)

第四十六文聖王 己未五月十九日大雪 八月一日天地晦暗

조설(일찍 내린 눈)

40 애장왕 말년 무자 815일 눈이 내렸다.

41 헌덕왕 원화 13년 무술 314일 큰 눈이 내렸다.(어떤 책에는 병인이라 썼으나 잘못이다. 원화는 15년으로 끝나고, 병인이 없다.)

46 문성왕 기미 519일 큰 눈이 내렸다. 81일 천지가 어두웠다.

 

興德王 鸚鵡

第四十二興德大王 寶曆二年丙午卽位 未幾 有人奉使於唐 將鸚鵡一雙而至 不久雌死 而孤雄哀鳴不已 王使人掛鏡於前 鳥見鏡中影 擬其得偶 乃啄其鏡而知其影 乃哀鳴而死 王作歌云 未詳

흥덕왕 앵무

42 흥덕대왕은 보력 2년 병오에 즉위하였는데 얼마되지 않아 어떤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을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는데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고, 홀로 된 수컷이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왕이 사람으로 하여금 앞에 거울을 걸게 하였다. 새가 거울 안의 그림자를 보고 그 짝을 얻은 것으로 여겨 그 거울을 쪼다가 그것이 그림자임을 알고 슬피 울다 죽었다. 왕이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자세하지 않다.

 

神武大王 閻長 弓巴

第四十五神武大王潛邸時 謂俠士弓巴曰 我有不同天之讎 汝能爲我除之 獲居大位 則娶爾女爲妃 弓巴許之 協心同力 擧兵犯京師 能成其事 旣簒位 欲以巴之女爲妃 群臣極諫曰 巴側微 上以其女爲妃則不可 王從之 時 巴在淸海鎭爲軍戍 怨王之違言 欲謀亂 時 將軍閻長聞之 奏曰 巴將爲不忠 小臣請除之 王喜許之 閻長承旨歸淸海鎭

신무대왕, 염장, 궁파

45 신무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협사 궁파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에게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는 원수가 있는데 너는 나를 위해 제거해 줄 수 있는가 대위(왕위)를 빼앗으면 곧 너의 딸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할 것이다.”했다. 궁파가 허락하여 마음을 합하고 힘을 같이하여 군대를 일으켜 경사(서울)을 침범하여 그 일을 이룰 수 있었다. 이미 왕위를 빼앗은 후 궁파의 딸로서 왕비를 삼고자 하니 여러 신하들이 극간하여 말하기를 궁파는 측미(신분이 미천)하여 상(임금)이 그 딸을 왕비로 삼는 것은 안 됩니다.”했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그 때 궁파는 청해진에서 그 곳을 지키고 있다가 왕이 말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 때 장군 염장이 그것을 듣고 아뢰어 말하기를 궁파가 장차 충성하지 않으려 하니 소신이 그를 제거할 것을 청합니다.”했다. 왕이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염장이 명을 받들어 청해진으로 갔다.

 

見謁者通曰 僕有小怨於國君 欲投明公 以全身命 巴聞之大怒曰 爾輩諫於王而廢我女 胡顧見我乎? 長復通曰 是百官之所諫 我不預謀 明公無嫌也 巴聞之 引入廳事 謂曰 卿以何事來此? 長曰 有忤於王 欲投幕下而免害爾 巴曰 幸矣 置酒歡甚 長取巴之長劍斬之 麾下軍士 驚懾皆伏地 長引至京師 復命曰 已斬弓巴矣 上喜賞之 賜爵阿干

(염장이) 만남을 알리는 사람을 만나 통지해 말하기를 나는 나라의 임금에게 조그만 원망이 있어 명공(궁파)에게 들어가(의지하여) 몸과 목숨을 보존하려 합니다.”했다. 궁파가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왕에게 간하여 내 딸을 폐하였는데 어찌 나를 돌아보려 하는가?”했다. 염장이 다시 통지해 말하기를 이는 백관들이 간한 바이지 제가 미리 도모한 것이 아닙니다. 명공(궁파)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했다. 궁파가 그것을 듣고 청사에 인도해 들어오게 하고 일러 말하기를 경은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하니 염장이 말하기를 경은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하니 염장이 말하기를 왕을 거스름이 있어 막하에 들어 가 해를 면하고자 할 따름입니다.”했다. 궁파가 말하기를 다행입니다.”하고는 술을 두고(마시며) 매우 기뻐하였다. 염장이 궁파의 검을 취하여 베어 죽였다. 휘하의 군사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땅에 엎드렸다. 염장이 이끌고 경사(서울)에 이르러 복명하여 말하기를 이미 궁파를 제어 죽였습니다.”하니 임금이 기뻐하며 상을 주고, 아간의 벼슬을 내렸다.

 

四十八景文大王

王諱膺廉 年十八爲國仙 至於弱冠 憲安大王召郞 宴於殿中 問曰 郞爲國仙 優遊四方 見何異事? 郞曰 臣見有美行者三 王曰 請聞其說 郞曰 有人爲人上者 而撝謙坐於人下 其一也 有人豪富而衣儉易 其二也 有人本貴勢而不用其威者 三也 王聞其言而知其賢 不覺墮淚而謂曰 朕有二女 請以奉巾櫛 郞避席而拜之 稽首而退 告於父母 父母驚喜 會其子弟議曰 王之上公主貌甚寒寢 第二公主甚美 娶之幸矣

48 경문대왕

왕의 이름은 응렴이니 나이 18세에 국선이 되었다. 약관에 이르렀을 때 헌안대왕이 낭(응렴)을 불러 궁궐 안에서 연회를 열고 물어 말하기를 (응렴)은 국선이 되어 한가로이 사방을 노닐었는데 어떤 보통과 다른 일을 보았는가?”했다. (응렴)이 말하기를 신이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 자 셋을 보았습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그 이야기를 듣기를 청한다.”하니 낭(응렴)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윗자리에 있으면서도 남을 높이고 나를 낮추어 다른 사람 아래에 앉은 것이 그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은 강하고 부유하면서도 입은 옷이 검소하니 그 두 번째입니다.어떤 사람은 본래 귀하고 세력이 있으나 그 위엄을 쓰지 않은 것이 세 번째입니다.”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그 어짐을 알아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일러 말하기를 짐에게 두 딸이 있는데 건즐(수건과 빗 곧 아내)을 받들게 하기를 청한다.”했다. (응렴)이 자리를 피해 절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나 부모에게 고하였다. 부모가 놀라고 기뻐하며 그 자제들을 모아 의논해 말하기를 왕의 맏공주는 모습이 매우 초라하고, 둘째 공주가 매우 아름다우니 그에게 장가드는 것이 다행일 것이다.”했다.

 

郞之徒上首範敎師者聞之 至於家問郞曰 大王欲以公主妻公 信乎? 郞曰 然 曰 奚娶? 郞曰 二親命我宜弟 師曰 郞若娶弟 則予必死於郞之面前 娶其兄 則必有三美 誡之哉 郞曰 聞命矣 旣而王擇辰而使於郞曰 二女惟公所命 使歸以郞意奏曰 奉長公主爾 旣而過三朔 王疾革 召群臣曰 朕無男孫 窀穸之事 宜長女之夫膺廉繼之 翌日王崩 郞奉遺詔卽位 於是 範敎師詣於王曰 吾所陳三美者 今皆著矣 娶長故 今登位一也 昔之欽艶弟主 今易可取二也 娶兄故 王與夫人喜甚三也 王德其言 爵爲大德 賜金一百三十兩 王崩 諡曰景文

(응렴)의 무리 중 우두머리인 법교사가 그것을 듣고 집에 이르러 낭(응렴)에게 물어 말하기를 대왕께서 공루로서 공(응렴)의 처로 하고자 한다는데 사실입니까?”하니 낭(응렴)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했다. (범교사가) 말하기를 누구에게 장가들려 하십니까?”하니 낭(응렴)이 말하기를 부모님이 나에게 동생(둘째 공주)이 마땅하다고 합니다.”했다. 범교사가 말하기를 (응렴)께서 만약 둘재 공주에게 장가들면 곧 나는 반드시 낭(응렴)의 얼굴 앞에서 죽겠습니다. 첫째 공주에게 장가들면 곧 반드시 세 가지 좋음이 있습니다. 경계하십시오.”했다. (응렴)이 말하기를 명을 듣겠습니다.”했다. 이윽고 왕이 날을 가려 낭(응렴)에게 사자를 보내 말하기를 두 딸은 오직 공이 명한 바로 할 것이다.”했다. 사자가 돌아 가 낭(응렴)의 뜻을 아뢰어 말하기를 맏공주를 받들겠다고 합니다.”했다. 며칠이 지나 왕이 병들자 여러 신하를 불러 말하기를 짐은 남자 후손이 없으니 무덤의 일(죽고난 후의 일)은 마땅히 맏딸의 지아비인 응렴으로 잇게 하라.”했다. 다음날 왕이 죽었다. (응렴)이 유졸르 받들어 즉위하였다. 이에 범교사가 왕을 뵙고 말하기를 제가 말한 바 세 가지가 지금 모두 드러났습니다. 맏이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에 지금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 옛날 흠모하던 아름다운 둘째 공주를 지금 쉽게 취할 수 있음이 두 번째입니다. 형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에 왕과 부인이 매우 기뻐한 것이 세 번째입니다.”했다. 왕이 그 말를 덕으로 여겨 벼슬을 대덕이라 하고, 1130냥을 내렷다. 왕이 돌아가시고 시호를 경문이라 했다.

 

王之寢殿 每日暮無數衆蛇俱集 宮人驚怖 將驅遣之 王曰 寡人若無蛇不得安寢 宜無禁 每寢吐舌滿胸鋪之 乃登位 王耳忽長如驢耳 王后及宮人皆未知 唯幞頭匠一人知之 然 生平不向人說 其人將死 入道林寺竹林中無人處 向竹唱云吾君耳 如驢耳 其後風吹 [則竹聲云 吾君耳如驢耳 王惡之 乃伐竹而植山茱萸] 風吹 則但聲云吾君耳長(道林寺舊在入都林邊) 國仙邀元郞譽昕郞桂元叔宗郞等遊覽金蘭 暗有爲君主理邦國之意 乃作歌三首 使心弼舍知授針卷 送大炬和尙處 令作三歌 初名玄琴抱曲 第二大道曲 第三問群曲 入奏於王 王大喜稱賞 歌未詳

왕의 침실에 매일 저녁 무수한 뭇 뱀들이 모였다. 궁인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몰아 보내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만약 뱀이 없다면 편안히 잠잘 수 없으니 마땅히 금하지 말라.”했다. 매번 잠잘 때마다 혀를 내밀었는데 가슴을 가득 덮었다. 왕위에 오르고 나서 왕의 귀가 홀연히 길어져 나귀의 귀와 같았다. 왕후와 궁인들이 모두 알지 못하고, 오직 복두를 만드는 장인 한 사람만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평생동안 다른 사람을 향해 말하지 못하였다. 그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할 때 도림사 대나무 숲속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 가 대나무를 향해 소리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와 같다.”했다. [그 후 바람이 불때마다 곧 대나무가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와 같다.”는 소리를 냈다. 왕이 그것을 미워하여 이에 대나무를 베어내고 산수유를 심었더니] 바람이 불 때마다 곧 다만 우리 임금의 귀는 길다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도림사는 옛날에 도읍(서울)에 들어가는 숲가에 있다.) 국선 요원랑, 예흔랑, 계원, 숙종랑 등이 금란(통천)을 유람할 때 은근히 임금을 위해 나라를 다스릴 뜻이 있었다. 이에 노래 세 수를 짓고, 심필 사지로 하여금 침권(공책)을 주고 대구화상이 있는 곳에 보내 노래 세 수를 짓게 했다. 첫째는 현금포곡, 둘째는 대도곡, 셋째는 문군곡이다. 들어 가 왕에게 아뢰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칭찬하고 상을 주었다. 노래는 자세하지 않다.

 

處容郎 望海寺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 於是 大王遊開雲浦(在鶴城西南今蔚州) 王將還駕 晝歇於汀邊 忽雲霧冥曀 迷失道路 怪問左右 日官奏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以解之 於是 勅有司 爲龍刱佛寺近境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東海龍喜 乃率七子現於駕前 讚德獻舞奏樂 其一子隨駕入京 輔佐王政 名曰處容 王以美女妻之 欲留其意 又賜級干職

처용랑, 망해사

49 헌강대왕대에 경사(서울)로부터 해내에 이르기까지 집이 나란하고 담장이 서로 이었는데 하나의 초가도 없었다. 악기를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가 도로에 끊어지지 않았고, 사계절 바람과 비가 순조로웠다. 이에 대왕이 개운포(학성 서남쪽 지금의 울주이다.)에서 노닐었다. 왕이 돌아가다 물가에서 점심을 먹는데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끼어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좌우에 물으니 일관이 아뢰어 말하기를 이는 동해의 용의 조화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서 풀어야 합니다.”했다. 이에 유사(담당관청)에 명하여 용을 위해 가까운 경계에 절을 창건하게 했다. 명령이 나오자 말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 때문에 개운포라 이름하였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이에 일곱 아들을 이끌고 임금의 가마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는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가마를 따라 서울에 들어 와 왕의 정사를 보좌하였는데 처용이라 이름하였다. 왕이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하여 그 마음을 머물게 하고자 하고, 또 급간의 관직을 내렸다.

 

其妻甚美 疫神欽慕之 變爲人 夜至其家 竊與之宿 處容自外至其家 見寢有二人 乃唱歌作舞而退 歌曰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時 神現形 跪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 公不見怒 感而美之 誓今已後 見畫公之形容 不入其門矣

그 처가 매우 아름다워 역신이 그를 흠모하여 변해 사람이 되어 밤에 그 집에 이르러 몰래 그와 잤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이르러 잠자고 있는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동경 발근 달에 밤드리 노닐다가, 들어 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일러라. 둘은 내해인데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앗겼으니 어이하리.”했다. 그 때 역신이 형상을 드러내어 앞에 꿇고 말하기를 내가 공(처용)의 처를 사랑하여 지금 그를 범하였습니다. (처용)이 노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감동하고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맹세하건데 지금 이후로 공(처용)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면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했다.

 

因此 國人門帖處容之形 以僻邪進慶 王旣還 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 曰望海寺 亦名新房寺 乃爲龍而置也 又幸鮑石亭 南山神現舞於御前 左右不見 王獨見之 有人現舞於前 王自作舞 以像示之 神之名或曰祥審 故至今國人傳此舞 曰御舞祥審 或曰御舞山神 或云 旣神出舞 審象其貌 命工摹刻 以示後代 故云象審 或云霜髥舞 此乃以其形稱之

이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이는 것으로서 삿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로운 일을 맞아들였다. 왕이 돌아 온 후 영취()산 동쪽 기슭 좋은 땅에 절을 두고 망해사라 이름했다. 또 신방사라 이름하니 곧 용을 위해 둔 것이다. 또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임금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왕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에는 보이지 않고 왕만 홀로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앞에서 춤을 추므로 왕이 스스로 춤을 추는 것으로서 형상을 보였다. 신의 이름은 혹 상심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고, ‘어무상심이라 말하였다. 혹은 어무산신이라 하였다. 신이 나와 춤을 춘 후 그 모습을 자세하게 본떠 장인으로 하여금 조각하게 하여 후대에 보이게 하였다. 그러므로 상심이라 하고, 혹은 상염무라 하였는데 이는 곧 그 형상으로서 말한 것이다.

 

又幸於金剛嶺時 北岳神呈舞 名玉刀鈐 又同禮殿宴時 地神出舞 名地伯級干 語法集云 于時 山神獻舞 唱歌云 智理多都波都波等者 盖言以智理國者 知而多逃 都邑將破云謂也 乃地神山神知國將亡 故作舞以警之 國人不悟 謂爲現瑞 耽樂滋甚 故國終亡

또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신이 춤을 올렸는데 옥도령이라 이름 하였다. 또 동례전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지백급간이라 이름하였다. 어법집에 말하기를 이 때 산신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말하기를 지리다도파도파라 했는데 대개 지혜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알아서 많이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깨트려질 것을 말한 것이다.”했다. 곧 지신과 산신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춤을 추어 경계한 것인데 나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움이 나타났다 여기고 주색과 오락에 빠져 마음껏 즐김을 더욱 심하게 하였기 때문에 나라가 끝내 망한 것이다.

 

眞聖女大王 居陁知

第五十一眞聖女王 臨朝有年 乳母鳧好夫人 與其夫魏弘匝干等三四寵臣 擅權撓政 盜賊蜂起 國人患之 乃作陁羅尼隱語 書投路上 王與權臣等得之 謂曰 此非王居仁 誰作此文? 乃囚居仁於獄 居仁作詩訴于天 天乃震其獄囚以免之 詩曰 燕丹泣血虹穿日 鄒衍含悲夏落霜 今我失途還似舊 皇天何事不垂祥 陁羅尼曰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 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裟婆訶 說者云 刹尼那帝者 言女主也 判尼判尼蘇判尼者 言二蘇判也 蘇判爵名 于于三阿干[者言三四寵臣]也 鳧伊者 言鳧好也

진성여대왕 거타지

51 진성여대왕은 조정에 임한지 여러 해에 유모 부호부인과 그 지아비 위홍잡간 등 서너 명의 총애하는 신하들이 권력을 함부로 하고 정사를 흔드니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근심하여 다라니 은어을 지어 글을 길 위에 던졌다. 왕과 권력을 가진 신하들이 그것을 얻고는 일러 말하기를 이를 왕거인이 아니면 누가 이 글을 지을 수 있겠는가?”하고는 곧 왕거인을 옥에 가두었다. 왕거인이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였다. 하늘에서 곧 그 옥에 벼락을 쳐 (왕거인은)가두어지는 것을 면하였다. 시에 말하기를 연나라 태자 단이 피눈물을 흘리니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추연이 슬픔을 머금으니 여름에 서리가 내린다. 지금 내가 길을 잃음이(나의 불우함이) 도리어 옛과 같은데, 황천은 무슨 일로 상서를 드리우지 않는가했다. 다라니에 말하기를 남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파하했다. 해설하는 자가 말하기를 찰니나제는 여주(여자 임금)를 말하는 것이다.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을 말하는 것이다. 소판은 관직의 이름이고, 우우삼아간은 3, 4 총신을 말한다. 부이는 부호를 말한다.”했다.

 

此王代阿飧良貝 王之季子也 奉使於唐 聞百濟海賊梗於津鳧 選弓士五十人隨之 舡次鵠島(鄕云骨大島) 風濤大作 信宿浹旬 公患之 使人卜之 曰 島有神池 祭之可矣 於是 具奠於池上 池水湧高丈餘 夜夢有老人 謂公曰 善射一人 留此島中 可得便風 公覺而以事諮於左右曰 留誰可矣? 衆人曰 宜以木簡五十片 書我輩名 沈水而鬮之 公從之 軍士有居陁知者 名沈水中 乃留其人 便風忽起 舡進無滯 居陁愁立島嶼 忽有老人 從池而出 謂曰 我是西海若 每一沙彌 日出之時 從天而降 誦陁羅尼 三繞此池 我之夫婦子孫皆浮水上 沙彌取吾子孫肝腸 食之盡矣 唯存吾夫婦與一女爾 來朝又必來 請君射之

이 왕대에 아손() 양패는 왕의 막내아들이다. 당나라에 사신을 갈 때 ()백제 해적이 진부()에서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을 듣고 궁사 50명을 선발하여 따르게 하였다. 배가 곡도(우리말로는 골대도라 한다.)에 이르렀을 때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어 10여일을 묵게 되었다. (양패)이 그것을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였더니 (점을 친 사람이)말하기를 섬에 신지가 있는데 제사하면 됩니다.”했다. 이에 못 위에 제물을 차려놓았더니 못의 물이 일장 넘게 치솟았다. 밤 꿈에 노인이 있어 공(양패)에게 일러 말하기를 활 잘 쏘는 사람 한 명을 이 섬 안에 남겨두면 순풍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했다. (양패)이 깨서 (꿈의)일을 가지고 좌우에 물어 말하기를 누구를 머물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했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마땅히 목간 50개에 우리들 이름을 써서 물에 가라앉혀 제비를 뽑으면 됩니다.”했다. (양패)이 그 말을 따랐다. 군사들 중에 거타지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물속에 가라앉았다. 이에 그 사람을 남겨두니 순풍이 홀연히 일어나 배가 나아감에 막힘이 없었다. 거타지가 근심에 쌓여 섬에 서 있었는데 홀연히 노인이 못에서 나와 일러 말하기를 나는 이 서해의 약()인데 매일 한 사미가 해 뜰 무렵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외우며 이 못을 세 번 돌면 나의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에 떠오릅니다. 사미가 나의 자손의 간장을 취해 먹습니다. 오직 우리 부부와 한 딸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또 반드시 올 것이니 그대가 활로 쏘아 줄 것을 청합니다.”했다.

 

居陁曰 弓矢之事 吾所長也 聞命矣 老人謝之而沒 居陁隱伏而待 明日扶桑旣暾 沙彌果來 誦呪如前 欲取老龍肝 時居陁射之中 沙彌卽變老狐 墜地而斃 於是 老人出而謝曰 受公之賜 全我性命 請以女子妻之 居陁曰 見賜不遺 固所願也 老人以其女 變作一枝花 納之懷中 仍命二龍 捧居陁知及使舡 仍護其舡 入於唐境 唐人見新羅舡有二龍負之 具事上聞 帝曰 新羅之使 必非常人 賜宴坐於群臣之上 厚以金帛遺之 旣還國 居陁出花枝 變女同居焉

거타가 말하기를 궁시의 일(활쏘는 일)은 나의 장기이니 명을 따르겠습니다.”했다. 노인이 감사하고 사라졌다. 거타가 숨어 기다렸다. 다음날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자 사미가 관연 와 전과 같이 주문을 외우고 늙은 용의 간을 취하려 했다. 그 때 거타가 활을 쏘아 적중시키니 사미가 곧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떨어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감사해 말하기를 (거타)(은혜의)내림을 받아 우리가 목숨을 온전히 할 수 있었습니다. 딸로서 아내로 삼을 것을 청합니다.”했다. 거타가 말하기를 “(딸을)내려주시고 남아있게 하지 않으신다면 진실로 원하는 바입니다.”했다. 노인이 그 딸을 한 가지 꽃으로 변화시켜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지를 받들고 사신의 배에 이르러 그 배를 호위하게 하였다. 당나라 경계에 들어가니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 배를 두 용이 지고 있는 것을 보고 일을 갖추어 윗사람에게 보고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신라의 사신은 반드시 보통사람이 아닐 것이다.”하고는 연회를 열고 여러 신하의 윗자리에 앉게 하고, 금과 비단을 많이 주었다. 나라에 돌아 온 후 거타가 꽃가지를 내어 여자로 변화시켜 함께 살았다.

 

孝恭王

第五十二孝恭王 光化十五年壬申(實朱梁乾化二年也) 奉聖寺外門東西二十一間鵲巢 又神德王卽位四年乙亥(古本云天祐十二年 當作貞明元年) 靈廟寺內行廊鵲巢三十四烏巢四十 又三月 再降霜 六月 斬浦水與海水波相鬪三日

효공왕

52 효공왕은 광화15년 임신(실제는 주양 건화 2년이다.) 봉성사 외문에 동서로 21간을 까치가 둥지를 지었다. 또 신덕왕 즉위 4년 을해)옛 책에는 천우 12년이라 하는데 마땅히 정명 1년이라 써야 한다.) 영묘사 안 내행랑에 까치 둥지 34, 까마귀 둥지가 40개였다. 3월에 두 번이나 서리가 내렸다. 6월에 참포의 물과 바닷물의 물결이 삼일 동안 서로 싸웠다.

 

景明王

第五十四景明王代 貞明五年戊寅 四天王寺壁畫狗鳴 說經三日禳之 大半日又鳴 七年庚辰二月 皇龍寺塔影 倒立於今毛舍知家庭中一朔 又十月 四天王寺五方神 弓弦皆絶 壁畫狗出走庭中 還入壁中

경명왕

54 경명왕대 정명 5년 무인 사천왕사 벽화의 개가 울었다. 삼일 동안 불경을 외어 무리쳤으나 한나절이 지나 또 울었다. 7년 경진 2월 황룡사 탑 그림자가 금모 사지의 집 뜰에 한 달이나 거꾸로 서 있었다. 10월에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나와 뜰 안을 뛰어다니다 돌아와 벽 속으로 들어갔다.

 

景哀王

第五十五景哀王卽位 同光二年甲辰二月十九日 皇龍寺說百座說經 兼飯禪僧三百 大王親行香致供 此百座通說禪敎之始

경애왕

55 경애왕 즉위 동광 2년 갑진 219일 황룡사 백좌를 열어 불경을 풀이했다. 겸하여 선승 300명에게 밥을 먹였는데 대왕이 직접 향을 피우고 불공을 지극히 하였다. 이것이 백좌가 선종과 교종을 통틀어 설명하는 시작이었다.

 

金傅大王

第五十六金傅大王 諡敬順 天成二年丁亥九月 百濟甄萱侵羅至高鬱府 景哀王請救於我太祖 命將以勁兵一萬往救之 救兵未至 萱以冬十一月掩入王京 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 四散奔走 爲賊所虜 無貴賤匍匐乞爲奴婢 萱縱兵摽掠公私財物 入處王宮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數人匿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進 而强淫王妃 縱其下亂其嬪妾 乃立王之族弟傅爲王 王爲萱所擧卽位 前王尸殯於西堂 與群下慟哭

김부대왕

56 김부다왕은 시호가 경순이다. 천성 2년 정해 9()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여 고울부에 이르렀다. 경애왕이 우리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니 굳센 군대 일만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구원병이 미처 이르기 전에 견훤이 겨울 11월 서울을 습격해 들어 왔다. 왕과 왕비, , 종척들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어 놀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가 이르는 것을 알지 못하여 창졸간에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왕과 왕비가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적과 공경대부,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 적에게 포로가 되니 귀천을 가리지 않고 기면서 노비가 될 것을 구걸하였다. 견훤이 군대를 놓아 공사의 재물을 약탈하게 하고 왕궁에 들어가 자리하였다. 곧 좌우로 하여금 왕을 찾게 하니 왕과 비첩들 몇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끌려 군중에 이르렀다. 경애왕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강제로 왕비를 욕보이고 그 부하를 놓아 그 빈첩들을 욕보였다. 곧 왕의 족제 김부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워 즉위한 것이 되었다. 전왕(경애왕)의 시신을 서당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통곡했다.

 

我太祖遣使吊祭 明年戊子春三月 太祖率五十餘騎 巡到京畿 王與百官郊迎 入()相對 曲盡情禮 置宴臨海殿 酒酣王言曰 吾以不天 浸致禍亂 甄萱恣行不義 喪我國家 何()如之 因泫然涕泣 左右莫不鳴咽 太祖亦流涕 因留數旬 乃廻駕 麾下肅靜 不犯秋毫 都人士女相慶曰 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 如見父母

우리 태조가 사자를 보내 조문했다. 다음 해 무자 봄 3월 태조가 50여기를 거느리고 순행하여 신라 경기에 이르자 왕과 백관들이 교외에서 맞이하였다. 궁에 들어가 서로 마주하고 정과 예를 곡진히 하고, 임해전에서 연회를 열었다. 술이 얼큰해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화란이 점점 이르렀고, 견훤이 불의를 자행하여 우리나라를 망쳐 놓았습니다.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했다. 인하여 눈물을 뚝뚝흘리며 우니 좌우가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조가 또한 눈물을 흘렸다. 수십 일을 머물다 돌아갔는데 부하들이 엄정하여 추호도 범함이 없으니 서울의 사녀들이 서로 축하하며 말하기를 옛날 견씨가 왔을 때는 마치 승냥이와 호랑이를 만난 듯하였는데, 지금 왕공(왕건)이 이르니 마치 부모를 만난 것과 같다.”했다.

 

八月 太祖遣使遺王錦衫鞍馬 幷賜群僚將士有差 淸泰二年乙未十月 以四方()地盡爲他有 國弱勢孤 不()自安 乃與群下謀 擧土降太祖 群臣可否 紛然不已 王太子曰 國之存亡 必有天命 當與忠臣義士收合()心 力盡而後巳 豈可以一千年之社稷 輕以與人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忍也 乃使侍郎金封休齎書 請降於太祖 太子哭泣辭王 往皆骨山 ()()()() 麻衣草食 以終其身 季子祝髮 隸華嚴 爲浮圖 名梵空 後住法水海印寺云

8월 태조가 사자를 보내 왕에게 금삼과 안장을 얹은 말을 주고, 아울러 여러 관료와 장사들에게도 차이가 있게 내려주었다. 천태 2년 을미 10월 사방의 땅이 모두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고, 나라가 약해지고 형세가 외로워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땅을 들어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도모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가부를 말하며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왕태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고, 마땅히 충신, 의로운 선비와 함께 민심을 수합하여 힘을 다한 후에 그치는 것이지 어찌 일천년의 사직을 가벼이 다른 사람에게 주려합니까?”했다. 왕이 말하기를 외롭고 위태롭기가 이 같고, 형세는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다. 죄 없는 백성들의 간뇌가 땅에 뿌려지게 함에 이르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다.”했다. 이에 시랑 김봉휴로 하여금 글을 가지고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했다. 태자가 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에 가 바위에 기대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죽었다. 막내아들은 머리를 깍고 화엄종에 들어 가 중이 되었는데 이름을 범공이라 하였다. 후에 법수사, 해인사에 있었다고 한다.

 

太祖受書 送太相王鐵迎之 王率百僚歸()我太祖 香車寶馬 連亙三十餘里 道路塡咽 觀者如堵 太祖出郊迎勞 賜宮東一區(今正承院) 以長女樂浪公主妻之 以王謝自國居他國 故以鸞喩之 改號神鸞公主 諡孝穆 封爲正承 位在太子之上 給祿一千石 侍從員將皆錄用之 改新羅爲慶州 以爲公之食邑 初王納土來降

태조가 글을 받고 태상 왕철을 보내 맞이하였다. 왕이 백료(모든 관료)를 이끌고 우리 태조에게 들어오는데 화려한 수레와 훌륭한 말이 30여리에 이어지고 도로를 꽉 메우니 보는 자들이 담과 같았다. 태조가 교에 나가 맞아 위로하였다. 대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원)을 내리고 맏딸인 낙랑공주로서 처를 삼게 하였다. 왕이 자기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에 살았기 때문에 난새에 비유하여 호를 바꾸어 신난공주라 했다. 시호를 효목이라 하고 봉해 정승으로 삼았는데 지위가 태자의 위였다. 녹으로 1천석을 주고 시종, 관리, 장수들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공(경순왕)의 식읍으로 삼았다.

 

初王納土來降 太祖喜甚 待之()厚禮 使告曰 今王以國與寡人 其爲賜大矣 願結婚於宗室 以永甥舅之好 王答曰 我伯父億廉(王之考孝宗角干追封神興大王之弟也)有女子 德容雙美 非是無以備內政 太祖娶之 是爲神成王后金氏(本朝登仕郎金寬毅所撰王代宗錄云 神成王后李氏 本慶州大尉李正言爲俠州守時 太祖幸此州 納爲妃 故或云俠州君 願堂玄化寺三月二十五日立忌 葬貞陵 生一子 安宗也 此外二十五妃主中不載金氏之事 未詳 然而史臣之論 亦以安宗爲新羅外孫 當以史傳爲是)

처음 왕이 땅을 바치고 와서 항복하니 태조가 매우 기뻐하며 훌륭한 예로 대우하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지금 왕이 나라를 과인에게 주니 그 내림이 크다 할 것입니다. 종실과 결혼하는 것으로서 사위와 장인의 좋음을 길이하기를 원합니다.”했다. (김부)이 답해 말하기를 나의 백부 김억렴(왕의 아버지 효종각간은 추봉된 신흥대왕의 동생이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가 아니면 내정을 갖출 수 없을 것입니다.”했다. 태조가 장가들었다. 이가 신성왕후 김씨(본조(고려) 등사랑 김관의가 편찬한 왕대종록에 말하기를 신성왕후 이씨는 본래 경주 태위 이정언이 협주 태수가 되었을 때 태조가 이 주에 갔다가 받아들여 비로 삼았기 때문에 혹은 협주군이라 불렀다. 그의 원당은 현화사이고, 325일이 기일이고, 정릉에 장례하였다. 한 아들을 낳았으니 안종이다.”했다. 이 외 25비주 중에 김씨의 일을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하지 않다. 그러하되 사신(사관)의 논에 또한 안종을 신라의 외손이라 하였으니 마땅히 사전으로서 옳은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太祖之孫景宗伷 聘政承公之女爲妃 是爲憲承皇后 仍封政承爲尙父 太平興國三年戊寅崩 諡曰敬順 冊尙父誥曰 勅 姬周啓聖之初 先封呂望 劉漢興王之始 首冊蕭何 自()大定寰區 廣開基業 立龍圖三十代 躡麟趾四百年 日月重明 乾坤交泰 雖自無()之主 乃開致理之臣 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承食邑八千戶金傅 世()鷄林 官分王爵 英烈振凌雲之氣 文章騰擲地之才 富有春秋 貴居茅土 六韜三畧 恂入胸襟 七縱五申 撮歸指掌

태조의 손자 경종 주가 정승공(김부)의 딸을 들여 비로 삼았는데 이가 헌승왕후가 된다. 그대로 정승을 봉해 상부라 하였다. 태평흥국 3년 무인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이라 하였다. 상부를 책봉하는 공문서에 말하기를 칙을 내린다. 희씨의 주나라가 나라를 연 초기에 먼저 여망(강태공)을 봉하였고, 유씨 한나라가 흥왕하던 처음에 먼저 소하를 책봉하여 이로부터 환구(천하)가 크게 정해져 널리 기업(나라)을 열었다. 용마가 그림을 지고와 30대를 세워 국운이 400년을 이었다. 해와 달이 거듭 밝고, 하늘과 땅이 서로 조화를 이룬 것은 비록 무위의 임금으로부터 하였으나 지극한 다스림을 연 것은 신하였다. 관광순화위국고인 상주국낙랑왕 정승 식읍 8천호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살았고, 관직은 왕의 작을 나누어 받았다. 걸출한 공적은 하늘을 찌르는 기세를 떨치고 문장은 땅을 진동시킬만한 재능이 있었다. 부유함은 오래 동안 계속되었고, 귀하기로는 모토(봉토)에 살았다. 육도삼략이 가슴에 들어있고,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주고 군기가 엄정함을 손바닥 안에서 움직였다.

 

我太祖()()()()之好 早認餘風 尋頒駙馬之姻 內酬大節 家國旣歸於一統 君臣宛合於三韓 顯播令名 光崇懿範 可加號尙父都省令 仍賜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號 勳封如故 食邑通前爲一萬戶 有司擇日備禮冊命 主者施行 開寶八年十月日

우리 태조가 비로소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우호를 닦으시니 일찍이 남은 풍도를 알아 부마의 인척을 반포하시어 안으로 큰 절개에 보답하였다. 나라는 이미 통일로 돌아가고, 임금과 신하는 완전히 삼한을 합하여 아름다운 이름이 드러났다. 아름다운 규범을 빛나게 높였으니 상부도성령의 호를 더할만하다. 그대로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호를 내린다. 훈봉은 옛과 같으니 식읍은 앞과 통합하여 일만호로 한다. 담당관청은 날을 가리고, 예를 갖추어 책봉을 명하니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라. 개보 810월 일 이라 했다.

 

大匡內議令兼摠翰林臣翮宣奉行 奉勅如右 牒到奉行 開寶八年十月日

대광내의령 겸 총한림 신 격선은 받들어 행하여 위와 같이 칙령을 받들어 첩이 이르면 받들어 행하라. 개보 810월 일

 

侍中署 侍中署 內奉令署 軍部令署 軍部令無署 兵部令無署 兵部令署 廣坪侍郎署 廣坪侍郎無署 內奉侍郎無署 內奉侍郎署 軍部卿無署 軍部卿署 兵部卿無署 兵部卿署

시중 서명, 시중 서명, 내봉령 서명, 군부령 무서, 병부령 무서, 병부령 서명, 광평시랑 서명, 광평시랑 무서, 내보시랑 무서, 내봉시랑 서명, 군부경 무서, 군부경 서명, 병부경 무서, 병부경 서명

 

告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尙父都省令上柱國樂浪都()王食邑一萬戶金傅 奉勅如右 符到奉行 主事無名 郎中無名 書令史無名 孔目無名 開寶八月()十月日下

추충신의 숭덕수절공신 상부도성령 상주국 낙랑군왕 식읍 일만호 김부에게 알리니 칙명을 이상과 같이 받들고, 부절이 이르면 받들어 행하라. 주사 무명, 낭중 무명, 서령사 무명, 공목 무명 개보 810월 일에 내림

 

史論曰 新羅朴氏昔氏 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櫃而降 或云乘金車 此尤詭怪不可信 然 世俗相傳爲實事 今但原厥初 在上者 其爲己也儉 其爲人也寬 其設官也畧 其行事也簡 以至誠事中國 梯航朝聘之使 相續不絶 常遣子弟 造朝()宿衛 入學而誦習 于以襲聖賢之風化 革鴻荒之俗 爲禮義之邦 又憑王師之威靈 平百濟高句麗 取其地郡縣() 可謂盛矣 然而奉浮屠之法 不知其弊 至使閭里比其塔廟 齊民逃於緇褐 兵農浸小 而國家日衰 幾何其不亂且亡也哉? 於是時 景哀王加之以荒樂 與宮人左右出遊鮑石亭 置酒燕衛() 不知甄萱之至 與()門外韓擒虎 樓頭張麗華 無以異矣 若敬順之歸命太祖 雖非獲已 亦可佳矣 向若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則必覆其宗族 害及于無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籍郡縣以歸之 其有功於朝廷 有德於生民甚大 昔錢氏以吳越入宋 蘇子瞻謂之忠臣 今新羅功德 過於彼遠矣 我太祖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顯宗自新羅外孫卽寶位 此後繼統者 皆其子孫 豈非陰德也歟 新羅旣納土國除 阿干神會罷外署還 見都城離潰 有黍離離嘆 乃作歌 歌亡未詳

사론에 신라는 박씨. 석씨가 모두 알에서 나왔고, 김씨는 하늘에서 금궤에 담겨 내려왔다. 혹은 금수레를 탔다고 했다. 이는 매우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서로 전하여 시제 일이라 한다. 지금 다만 그 처음을 찾아보면 위에 있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는 검소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너그러웠고, 관직을 설치함에는 간략했으며 그 일을 행함에는 간소했다. 지극한 정성으로 중국을 섬겨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멀리 조빙의 사신이 서로 이어 끊어지지 않았다. 항상 자제를 보내 조정에 나아가 숙위하고 학교에 들어 가 외우고 익혀 현성의 풍화를 이어 넓고 거친(오랑캐의) 풍속을 바꾸어 예의의 나라가 되었다. 왕사(당나라 군대)의 위세에 기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취해 군현으로 만들었으니 성대하다 이를만하다. 그러나 불교의 법을 받들어 그 폐단을 알지 못하여 마을마다 그 탑묘를 즐비하게 함에 이르게 하였다. 백성들이 도망하여 승려가 되니 군대와 농민이 점점 적어져 국가가 날로 쇠퇴해지니 어찌 어지럽고 또한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때에 경애왕이 주색에 빠짐을 더하고, 궁인, 좌우와 함께 포석정에 나가 술을 두고 잔치를 열어 즐기다가 견원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였으니 문 밖의 한금호와 누각 위의 장려화와 다름이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이 비록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는 하나 또한 아름답다 할 수 있다. 만약 힘써 싸워 죽기로 지키는 것으로서 왕사(태조의 군대)에 대항하였다면 힘은 꺽이고 기세가 다하여 반드시 그 종족을 무너뜨리고 해가 죄없는 백성에게 미쳤을 것이다. 이에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창고를 봉하고 군현의 이름을 기록하여 귀순하니 조정에는 공이 있고, 백성에게는 덕이 있음이 매우 컷다. 옛날 전씨가 오와 월의 땅을 가지고 송에 들어간 것을 소자첨은 충신이라 말하였다.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더 낫다고 할 것이다. 우리 태조의 비빈이 많고, 그 자손이 또한 번성했다. 현종은 신라 외손으로 즉위하여 이후 왕통을 계승한 이들이 모두 그 자손이었으니 어찌 음덕이라 하지 않으리오.” 했다. 신라가 이미 땅을 바쳐 나라가 업어지자 아간 신회는 외관을 그만두고 돌아와 도성이 황폐해진 것을 보고 서리리의 탄식함이 있어 노래를 지었다. 노래는 없어져 자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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