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扶餘 前百濟 北扶餘已見上
扶餘郡者 前百濟王都也 或稱所夫里郡 按三國史記 百濟聖王二十六年戊午春 移都於泗泚 國號南扶餘[注曰 其地名所夫里 泗泚 今之古省津也 所夫里者 扶餘之別號也 已上注] 又按量田帳籍 曰所夫里郡田丁柱貼 今言扶餘郡者 復上古之名也 百濟王姓扶氏 故稱之 或稱餘州者 郡西資福寺高座之上 有繡帳焉 其繡文曰統和十五年丁酉五月日 餘州功德大寺繡帳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는 이미 위에 보았다.
부여군은 전백제의 왕도(서울)이다. 혹은 소부리군이라 하였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백제 성왕 26년 무오 봄에 도읍(서울)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주에 그 땅의 이름은 소부리이다. 사비는 지금의 고성진이다. 소부리는 부여의 다른 이름이다. 이상은 주이다.]라 했다. 또 양전장적을 살펴보니 “소부리군전정(농민) 주첨이다.” 했다. 지금 부여군이라 말하는 것은 상고의 이름을 회복한 것이다. 백제 왕실의 성씨가 부씨이기 때문에 일컬은 것이다. 혹은 여주라 말한 것은 군 서쪽 자복사 높은 자리 위에 수놓은 장막 이 있었는데 그 수놓은 무늬에 통화 15년 정유 5월 일 여주공덕대사 수장이라 써져 있었기 때문이다.
又昔者 河南置林州剌史 其時圖籍之內 有餘州二字 林州 今佳林郡也 餘州 今之扶餘郡也 百濟地理志曰後漢書曰 三韓凡七十八國 百濟是其一國焉 北史云 百濟東極新羅 西南限大海 北際漢江 其郡曰居拔城 又云固麻城 其外更有五方城 通典云 百濟南接新羅 北距高麗 西限大海 舊唐書云 百濟扶餘之別種 東北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 北高麗 其王所居 有東西兩城新 唐書云 百濟西界越州 南倭 皆踰海 北高麗
또 옛날에는 하남에 임주자사를 두었는데 그 때의 도적(지도와 호적) 안에 여주 두 글자가 있었다. 임주는 지금의 가림군이다.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백제 지리지에 “후한서에 삼한은 모두 78개 나라인데 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했다. 북사에는 “백제의 동쪽 끝은 신라이고, 서남쪽은 큰 바다에 닿고, 북쪽은 한강에 닿는다. 그 군을 거발성이라 하고 또 고마성이라 한다. 그 외 다시 5방성이 있다.”했다. 통전에 “백제의 남쪽은 신라에 접하고, 북쪽은 고려(고구려)에 막히고, 서쪽은 바다에 닿는다.”했다. 구당서에 “백제는 부여의 다른 종족이다.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른다. 북쪽으로 고려(고구려)이다. 그 왕이 사는 곳은 동서 두 성이 있다.”했다. 당서에 “백제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은 왜인데 모두 바다를 건넌다. 북쪽에는 고려(고구려)이다.
史本記云 百濟始祖溫祚 其父雛牟王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州之 王無子 只有三女 見朱蒙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州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恐後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岳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歸彌雛忽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漢成帝鴻佳三年也 沸流以彌雛忽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城 後以來時百姓樂悅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 後至聖王 移都於泗泚 今扶餘郡(彌雛忽 仁州 慰禮 今稷山)
사(삼국사기) 본기에 이르기를 “백제 시조는 온조이다. 그 아버지는 추모왕, 혹은 주몽이라 하는데 북부여에서 난리를 피해 도망하여 졸본부여주에 이르렀다. 왕은 아들이 없고 다만 딸만 셋 있을 뿐이었다. 주몽이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얼마 후 부여주의 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이어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을 비류라 했고, 둘째를 온조라 했다. 후에 (졸본부여주의)태자에게 용납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려 등과 열 명의 신하가 남쪽으로 가니 백성들이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가 둘렀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악에 기대었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늪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그 천험과 지리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서울)을 만드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는가?’ 했다. 비류가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에 가 살았다. 오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서울)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서 보익을 삼고, 국호를 십제라 했다. 이 때는 한 성제 홍가 3년이다. 비류의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 편안히 살지 못하였다. 위례성에 돌아 가 보니 도읍은 솥발처럼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였다.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들이 위례성에 돌아왔는데 이 이후로부터 백성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 나라 이름을 바꾸어 백제라 했다. 그 세계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해로서 씨를 삼았다. 후에 성왕에 이르러 도읍(서울)을 사비로 옮겼는데 지금의 부여군(미추홀은 인주이고, 위례성은 직산)이다.” 했다.
按古典記云 東明王第三子溫祚 以前漢鴻佳三年癸酉 自卒本扶餘至慰禮城 立都稱王 十四年丙辰 移都漢山(今廣州)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咸安元年 取高句麗南平壤 移都北漢城(今楊州) 歷一百五年 至二十二世文周王卽位 元徽三年乙卯 移都熊川(今公州) 歷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 移都所夫里 國號南扶餘 至三十一世義慈王 歷一百二十年 至唐顯慶五年 是義慈王在位二十年 新羅金庾信與蘇定方討平之 百濟國舊有五部 分統三十七郡二百濟城 七十六萬戶 唐以(其)地 分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等五都督府 仍(以)其酋長爲都督府剌史 未幾 新羅盡幷其地 置熊全武三州及諸郡縣
고전기를 살펴보니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유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서울)을 세우고 왕을 일컬었다. 14년 병진에 도읍(서울)을 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겨 389년을 지나 13세 근초고왕 함안 1년에 이르러 고구려 남평양을 취하고 도읍(서울)을 한성(지금의 양주)으로 옮겼다. 105년이 지나 22세 문주왕이 즉위한 원휘 3년 을묘에 이르러 도읍(서울)을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고 63년을 지나 26세 성왕에 이르러 도읍(서울)을 소부리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했다. 31세 의자왕에 이르러 120년을 지나 당나라 현경 5년 의자왕 재위 20년에 이르러 신라 김유신과 소정방이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백제에는 예전에 5부가 있었는데 37군 200성, 76만호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당나라가 그 땅을 나누어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도독부를 두고 그 추장(우두머리)을 도독부자사로 삼았다. 얼마 후 신라가 그 땅을 모두 합하고 웅주, 전주, 무주 3주와 여러 군현을 두었다.
又虎嵓寺有政事嵓 國家將議宰相 則書當選者名或三四 函封置嵓上 須臾取看 名上有印跡者爲相 故名之 又泗泚河邊有一嵓 蘇定方嘗坐此上 釣魚龍而出 故嵓上龍跪之跡 因名龍嵓 又郡中有三山 曰日山吳山浮山 國家全盛之時 各有神人居其上 飛相往來 朝夕不絶 又泗泚崖又有一石 坐十餘人 百濟王欲幸王興寺禮佛 先於此石望拜佛 其石自煖 因名火突石 又泗泚河兩崖如畫屛 百濟王每遊宴歌舞 故至今稱爲大王浦 又始祖溫祚乃東明第三子 體洪大 性孝友 善騎射 又多婁王 寬厚有威望 又沙沸王(一作沙伊王) 仇首崩 嗣位 而幼少不能政 卽癈而立古爾王 或云至樂初二年己未乃崩 古爾方立
또 호암사에 정사암이 있는데 국가에서 장차 재상을 의논할 때(재상을 선정할 때)곧 뽑을 자의 이름 3, 4명을 써서 함에 넣어 봉하여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 가져다 보고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자를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또한 사비하 가에 한 바위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이 위에 앉아 물고기와 룡을 낚시질 해 내었기 때문에 바위 위에 용이 꿇었던 자취가 있기 때문에 용암이라 이름하였다. 또 군 안에 세 산이 있는데 일산, 오산, 부산이라 한다. 국가 전성했을 때 각각 신인이 그 위에 있다가 날아 서로 왕래하여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또 사비애에 또 한 돌이 있는데 10여 명이 앉을 수 있다. 백제왕이 왕흥사에 가 예불하려할 때 먼저 이 돌에서 부처에게 절하였는데 그 돌이 스스로 따뜻하였기 때문에 화돌석이라 이름하였다. 또 사비하 두 벼랑이 꽃 병풍과 같아 배제 왕이 매번 연회할 때 노래하고 춤추었기 때문에 지금 대왕포라 일컬었다. 또 시조 온조는 곧 동명의 둘째 아들인데 몸이 크고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 또한 다루왕은 관후하고 위망이 있었다. 또 사비왕(사이왕이라 쓴다.)은 구수왕이 죽고 왕위를 이었다. 어려서 정사를 할 수 없어 곧 폐위되고 고이왕이 즉위하였다. 혹은 낙초 2년 기미에 이르러 곧 (사비왕이)죽으니 고이왕이 비로소 즉위했다고 한다.
武王(古本作武康 非也 百濟無武康)
第三十武王 名璋 母寡居 築室於京師南池邊 池龍交通而生 小名薯童 器量難測 常掘薯蕷 賣爲活業 國人因以爲名 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美艶無雙 剃髮來京師 以薯蕷餉閭里羣童 郡童親附之 乃作謠 誘羣童而唱之云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卵乙抱遣去如 童謠滿京 達於宮禁 百官極諫 竄流公主於遠方 將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 公主將至竄所 薯童出拜途中 將欲侍衛而行 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悅 因此隨行 潛通焉 然後知薯童名 乃信童謠之驗 同至百濟 出王后所贈金 將謀計活 薯童大笑曰 此何物也? 主曰 此是黃金 可致百年之富
무왕(옛 책에는 무강으로 썼는데 아니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
제 30 무왕은 이름이 장이다. 어머니가 홀로 살면서 경사(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지었는데 못의 용과 관계하여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으로 재주와 도량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개서 팔아 생계로 삼았기 때문에 나라사람들이 이름으로 삼았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선화라 쓴다)가 아름답기가 짝이 없다는 것을 들었다. 이에 머리를 깍고 경사(서울)에 와 마를 마을의 여러 아이들에게 먹여 여러 아이들과 친해졌다. 이에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유인하여 노래하게 하였다. 노래는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어러두고 서동방을 몰래 밤에 안고 간다.”했다. 동요가 서울에 널리 퍼져 대궐에 도달하였다. 백관들이 간곡히 간하여 공주를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게 했다. 장차 가려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가게 했다. 공주가 장차 귀양지에 이르려 할 때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하고 모시고 가고자 했다. 공주가 비록 그 온 곳을 알지 못하나 우연함을 믿고 기뻐하였다. 이로 인해 따라오게 하고 몰래 관계하였다. 그런 후 서동의 이름을 알게 되어 곧 동요의 징험을 믿게 되었다. 함께 백제에 이르자 왕후가 준 금을 꺼내 장차 살아갈 계책으로 삼으려 했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무슨 물건입니까?”하니 공주가 말하기를 “이는 황금으로 백년의 부에 이를 수 있습니다.”했다.
薯童曰 吾自小掘薯之地 委積如泥土 主聞大驚曰 此是天下至寶 君今知金之所在 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 薯童曰 可 於是 聚金積如丘陵 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 問輸金之計 師曰 吾以神力可輸 將金來矣 主作書 幷金置於師子前 師以神力 一夜輸置新羅宮中 眞平王異其神變 尊敬尤甚 常馳書問安否 薯童由此得人心 卽王位 一日王與夫人 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會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國史云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三國史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
서동이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땅에 진흙과 같이 쌓여 있습니다.”했다. 공주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는 천하의 지극한 보배로 그대가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곧 이 보물을 부모의 궁전으로 수송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했다. 서동이 말하기를 “좋습니다.”했다. 이에 금을 모으니 구릉과 같이 쌓이니 용화산 사자사 지면법사가 있는 곳에 나아가 금을 운반할 계책을 물었다. 지명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신력으로 운반할 수 있습니다. 금을 가지고 오시오.”했다. 공주가 글을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두니 지명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에 수송하여 신라 궁궐 안에 두었다. 진평왕이 그 신비로운 변화를 이상하게 여겨 존경하기를 더욱 심하게 했다. 항상 글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과 부인이 사자사에 가려하여 용화산 아래에 큰 못 가에 이르렀는데 미륵삼존이 못 안에서 나타났다. 가마를 멈추고 공경함을 지극히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모름지기 이 땅에 큰 절을 짓는 것이 진실로 바라는 바입니다.”했다. 왕이 허락하였다. 지명법사가 있는 곳에 나아가 못을 메꿀 일을 물었더니 신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꾸어 땅을 평평하게 하였다. 이에 (미륵삼존)상을 본받아 미를삼회전과 탑, 낭무 각 세 곳을 창건하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국사에는 왕흥사라 했다.) 진평왕이 온갖 장인을 보내 그것을 도왔다. 지금까지 그 절이 있다.(삼국사에 이를기를 “이는 법왕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이 전에는 홀로 산 여자(과부)의 아들이라 하니 자세하지 않다.)
後百濟 甄萱
三國史本傳云 甄萱尙州加恩縣人也 咸通八年丁亥生 本性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个 以農自活 光啓中據沙弗城(今尙州) 自稱將軍 有四子 皆知名於世 萱號傑出多智畧 李碑(磾)家記云 眞興大王妃思刀 諡曰白?夫人 第三子仇輪公之子波珍干善品之子角干酌珍 妻王咬巴里生角干元善 是爲阿慈个也 慈之弟一妻上院夫人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 其長子是尙父萱 二子將軍能哀 三子將軍龍盖 四子寶盖 五子將軍小盖 一女大主刀金
후백제 견훤
삼국사 본전에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다. 함통 8년 정해에 났다. 본 성은 이씨인데 후에 견으로 씨를 삼았다. 아버지는 아자개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광계 중에 사불성(지근의 상주)을 근거로 스스로 장군이라 불렀다. 아들이 넷인데 모두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는데 견훤이 훨씬 뛰어나 지략이 많다고 불려졌다. 이제가기에 이르기를 “진흥대왕의 비 사도는 시호가 백융부인이다. 셋째 아들 구륜공의 아들 파진간 선품의 아들 각간 작진이 왕교파리를 처로 맞아 각간 원선을 낳았으니 이가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 번째 아내는 상원부인이고, 두 번째 아내는 남원부인이다. 다섯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그 맏아들이 상부 견훤이고, 둘째 으들은 장군 능애이고, 셋째아들은 장군 용개이고, 넷째아들은 보개, 다섯째 아들은 장군 소개이고, 한 딸은 대주도금이다.
又古記云 昔一富人居光州北村 有一女子 姿容端正 謂父曰 ?每有一紫衣男到寢交婚? 父謂曰 ?汝以長絲貫針剌其衣? 從之至明尋絲於北墻下 針剌於大蚯蚓之腰 後因姙生一男 年十五 自稱甄萱 至景福元年壬子稱王 立都於完山郡 理四十三年 以淸泰元年甲午 萱之三子簒逆 萱投太祖 子金剛卽位 天福元年丙申 與高麗兵會戰於一善郡 百濟敗績國亡云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體貌雄奇 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또 옛 기록에 이르기를 옛날 한 부자가 광주 북촌에 살았는데 한 딸이 있어 모습이 단정하였다. 아버지에게 일러 말하기를 ‘매번 자색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침실에 이르러 관계합니다.’했다. 아버지가 일러 말하기를 ‘너는 긴 실을 바들에 꿰어 그 옷에 찔러두라.’했다. (딸이 그 말을) 따랐다. 날이 밝아 실을 북쪽 담장 아래서 찾았는데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꼿혀 있었다. 후에 임신하여 한 남자를 낳았다. 나이 15세에 스스로 견훤을 일컬었다. 경복 1년 임자에 이르러 왕이라 하고, 도읍을 완산군에 세우고 43년을 다스렸다. 청태 1년 감오에 견훤의 셋째 아들이 반역하자 견훤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아들 금강이 즉위하였다. 천복 1년 고려 군대와 일선군에서 싸워 백제가 패하여 나라가 망했다. 처음 견훤이 타어나 포대기에 싸여 있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가 (음식을)먹이면서 아이를 숲 아래 놓아두자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마을에서 들은 자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어른이 되자 몸과 모습이 웅위롭고 기이하고 뜻이 커서 남에게 얽매이지 않고 비범했다. 군대를 따라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쪽 바라를 지키러 가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 기운(용기가)이 항상 사졸의 선두가 되니 그 공로 때문에 비장이 되었다.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國權 綱紀紊弛 加之以飢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於是 萱竊有叛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南都統行全州刺史兼御史中承上柱國漢南郡開國公 龍化元年己酉也 一云景福元年壬子 是時 北原賊良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良吉職爲裨將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喜得人心 謂左右曰 百濟開國六百餘年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舡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歷黃山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予今敢不立都 以雪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당 소종 경복 1년 이는 신라 진성여왕 재위 6년이다. 총애 받는 내시들이 옆에 있어 몰래 나라의 권력을 농단하니 기강이 문란해지고 해이해지고, 게다가 기근으로 백성들이 떠돌아다녀 여러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이 속으로 배반하려는 마음이 있어 무리들을 불러 모아 서울 서남쪽 주와 현들을 공격하였다. (견훤이)이르는 곳마다 메아리처럼 응하니 한 달여 사이에 무리가 오천에 이르렀다. 마침내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오히려 감히 공공연히 왕을 일컳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 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한남군개국공이라 서명하였으니 (이 때가) 용화 1년 기유이다. 한편 경복 1년 임자라 하기도 한다. 이 때 북원의 도적 양길이 강대해지니 궁예가 스스로 들어 가 부하가 되었다. 견훤이 그것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으로 삼았다. 견훤은 서쪽을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백제가 개국한 지 600여년에 당 고종이 신라의 청에 따라 장군 소정방으로 하여금 배에 탄 군대 13만으로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신라 김유신은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황산을 지나 당나라 군대와 합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없앴다. 내가 지금 감히 도읍을 세우는 것으로서 묵은 분을 씻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후백제 왕이라 하고 벼슬과 직책을 나누었다 이때는 당나라 광화 3년 신라 효공왕 4년이었다.
貞明四年戊寅 鐵原京衆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遣使稱賀 遂獻孔雀扇 地理山竹箭等 萱與我太祖陽和陰剋 獻驄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今未詳) 太祖亦以精兵來與之角 萱兵銳 未決勝負 太祖欲權和 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攻取居西(今未詳)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都督行全州剌史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정명 4년 무인에 철원경의 여러 마음들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즉위하게 했다. 견훤이 극서을 듣고 사신을 보내 축하하고, 공작선,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 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했으나 속으로는 깍아 내렸다.(시기했다.) (견훤이) 총마를 태조에게 바쳤다. 3년 겨울 10월에 견훤은 3천의 기병을 이끌고 조물성(지금은 자세하지 않다.)에 이르니 태조가 또한 정예군대를 이끌고 와 그와 싸웠으나 견훤의 군대가 날래 승부가 결정되지 않았다. 태조가 임시로 화친하는 것으로서 (견훤의) 군사들이 지치기를 기다리기 위해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면서 당제 왕신을 인질로 삼았다. 경훤이 또한 생질 진호를 인질로 교환하였다. 12월 거서(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등 20여성을 빼앗고, 사신을 보내 후당에 들어 가 번신이라 일컬었다. 후당이 (경훤을)책봉하여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를 주고, 그전대로 도독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백제왕이라 하고 식읍을 2천5백호로 했다.
四年眞虎暴卒 疑故殺 卽囚王信 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天成二年丁亥九月 萱攻取近品城(今山陽縣)燒之 新羅王求救於太祖 太祖將出師 萱襲取高鬱府(今蔚州) 進軍族始林(一云鷄林西郊) 卒入新羅王都 新羅王與夫人出遊鮑石亭 時由是甚敗 萱强引夫人亂之 以王之族弟金傅嗣位
4년에 진호가 갑자기 죽자 일부러 죽였다고 의심하여 곧 왕신을 옥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전년에 보냈던 총마를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웃으며 돌려주었다. 천성 2년 정해 9월 견훤이 근품성(지금의 산양현)을 쳐서 태웠다.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내었다. 견훤이 고을부(지금의 울주)를 습격하고 족시림(한편 계림 서쪽 교외라 한다.)으로 진군하여 마침내 신라 왕도(서울)에 들어갔다. 신라 왕과 부인은 포석정에 나가 놀고 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크게 패하였다. 견훤이 억지로 부인을 어지럽히고 왕의 족제 김부로서 왕위를 잇게 하였다.
然後 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之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 太祖僅以身免 而不與相抵 使盈其貫 萱乘勝轉掠大木城(今若木(縣))京山府((今)(星)(州))康州((今)(晋)(州)) 攻缶谷城((今)(不)(詳)) 又義成府之守洪述 拒戰而死 太祖聞之曰 吾失右手矣 四十二年庚寅 萱欲攻古昌郡(今安東(府)) 大擧而石山營寨
그런 후 왕의 동생 효렴, 재상 영경을 사로잡고, 또 나라의 보배와 무기, 자녀, 모든 장인 중 뛰어난 자를 잡아 따르게 하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으로서 견훤을 공산아래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태조의 장수 김락, 숭겸이 죽고 여러 군대가 패하였다. 태조는 겨우 죽음을 면하였으나 대항하지 못하여 견훤으로 하여금 그 죄를 가득하게 하였다. 견훤이 이김을 타고 돌려 대목성(지금의 약목현), 경산부(지금의 성주), 강주(지금의 진주)를 약탈하고, 부곡성(지금은 자세하지 않다.)을 쳤다. 또 의성부를 지키던 홍술이 막아 싸우다 죽었다. 태조가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나의 오른 손을 잃었다.”했다. 43년 경인에 견훤이 고창군(지금의 안동부)을 치려하여 크게 (군대를)일으켜 석산에 영채를 세웠다.
太祖隔百步而郡北甁山營寨 累戰萱敗 獲侍郎金渥 翌日萱收卒 襲破順(州)城 城主元逢不能禦 棄城宵遁 太祖赫怒 貶爲下枝縣(今豐山縣 元逢本順(州)城人故也) 新羅君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萱聞之 又欲入王都作惡 恐太祖先之 寄書于太祖曰
태조는 100보 떨어진 군(고창군) 북쪽 병산에 영채를 세우고 여러 번 싸워 견훤을 패하게 하고, 시랑 김악을 사로잡았다. 다은 말 견원이 군대를 거두어 순(주)성을 습격하여 깨트리니 성주 원봉이 막을 수 없어 성을 버리고 밤에 달아나 숨었다. 태조가 크게 노하여 낮추어 하지현(지금의 풍산현, 원봉은 본래 순주성 사람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나라가 쇠퇴하여 다시 일으키기 어렵다 여기고 우리 태조를 이끌어 우호를 맺어 후원을 삼으려 하였다. 견훤이 그것을 듣고 또 왕도(신라 서울)에 들어 가 악을 지으려 하면서 태조가 먼저 들어 갈 것을 두려워하여 태조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昨者 (新)(羅)國相金雄廉等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準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以先著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皎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奸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表弟獻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曝骸(於)美利寺前 殺獲居多 追禽不小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飯馬於浿江之水
“지난번에 국상 김웅렴 등이 족하(왕건)를 불러 서울에 들어오게 하는 것은 작은 자라는 큰 자라에의 울음에 호응하여 우는 것과 같다. 이는 종달새가 매의 날개를 찢고자 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백성으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하고, 종묘와 사직을 폐허로 만들 것입니다. 나는 이 때문에 먼저 조적의 말채찍을 쥐고 홀로 한금호의 도끼를 휘두르며 백관들에게 맹서하기를 흰 해와 같이 하였습니다. 6부를 의리의 풍도로서 깨우쳤더니 생각지 않게 간사한 신하들은 숨고 도망하고 나라의 임금(경애왕)은 죽었습니다. 마침내 경명왕의 외종제인 헌강왕의 외손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만드니 없던 임금이 여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족하(왕건)가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떠도는 말을 듣고 온갖 계책으로 노려보며 여러 방면으로 침입하고 소란스럽게 하였으나 오히려 내 말의 머리를 보지도 못하고, 내 소의 털을 뽑을 수 없었습니다. 겨울 초에 도두 색상이 성산진 밑에서 손을 묶었고, 그 달 안에 좌장군 감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드러내었습니다.(죽었습니다.) 죽이고 얻음이 다수를 차지하고, 뒤를 쫓아 사로잡은 것이 적지 않습니다. 강함과 약함이 이 같으니 승패를 알 수 있습니다. 기대하는(바라는) 바는 활을 평양의 누각에 걸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知卿與高麗 久通和好 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慮足下欲罷不能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兎獹迭憊 終心貽譏 蛙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誡 無後悔之自貽
그러나 전달 7일 오월국의 사신 반상서가 글을 가지고 이르러 왕의 조지(명령을)를 전하였습니다. 그 글에 ‘경은 고려와 오래 동안 우호를 통하고 함께 이웃과 맹약을 맺었다. 최근에 인질이 둘 다 죽었기 때문에 마침내 화친의 옛 우호를 잃고 서로 경계를 침범하여 간벌(전쟁)이 거두어지지(그치지) 않았다. 지금 오로지할 사신을 내어 경의 본도에 보내고, 또 글을 고려에도 보냈으니 마당히 각각 서로 화친하여 길이 평화롭게 하라.’했습니다. 내가 의리를 두텁게 하고 왕을 높이며, 큰 것을 섬기는 정을 깊이 하여 명령을 듣자 곧 공경히 받들려 하였습니다. 다만 족하(그대)가 그만두려 해도 하지 못하여 곤궁에 빠졌음에도 오히려 싸우려 하는 것을 염려할 뿐입니다. 지금 조서를 기록하여 보내니 유의하여 자세히 살피기 바랍니다. 또 토끼와 사냥개가 함께 지치면 마침내는 남의 조롱을 받게 될 것입니다.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면 또한 비웃음을 받게 될 터이니 마땅히 어리석은 잘못을 회복하는 경계를 하여 뉘우침이 스스로에게 끼침이 없게 하십시오. 했다.
(天)(成)二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班尙書所傳詔旨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叙事者 伏以華軺膚使 爰到制書 尺素好音 兼蒙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袵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其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爲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癸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乃交兵 足下始輕敵以直前 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渝盟 神其殛矣?
(천성)2년 정월 태조가 답하여 말하기를
엎드려 오월국 통화사인 반상서가 전한 바의 조지 글 한 통을 받들었고, 겸하여 족하(그대)가 길게 써 일을 서술하여 보인 것을 받았습니다. 화려한 수레를 타고 온 선량한 사자가 가지고 온 조서와 좋은 소식이 담겨짐 편지가 이르렀고, 겸하여 가르침을 입었습니다. 조서를 받들어 비록 감격함을 더하였으나 편지를 펴보고 의심스러운 마음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 돌아가는 사신에 기대 문득 옷깃을 바로 함을 폈습니다. 나는 우러러 하늘을 받들었고, 굽어서는 사람의 추대를 받아 외람되게도 장수의 권한을 맡아 천하를 경영할 기회를 얻어 나아갔던 것입니다. 지난번에 삼한이 곤액을 만나 구토(모든 국토)가 흉년으로 황폐해지니 백성들이 많이 황건(도적)에 속하고 전야(토지)가 적토(흉년으로 곡식이 없는 빈 땅)가 아님이 없었습니다. 풍진(전쟁)의 두려움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앙을 구원하기를 바랐습니다. 이에 스스로 선린의 우로를 맺었더니 과연 수 천리가 농짓고 베자는 생업을 즐기고 7, 8년 동안 군사들이 한가로이 쉬었습니다. 계유년 유시양월(10월)애 이르러 갑자기 일이 생겨 이에 서로 전쟁에 이르렀습니다. 그대가 처음에 적을 가벼이 여겨 곧장 전진함이 마치 당랑(사마귀)이 수레바퀴를 막는 것 같더니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히 물러남이 마치 모기가 산을 진 듯하였습니다. 손을 모아 말하고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 길이 기쁘게 우호하겠습니다. 만약 혹 맹세를 어긴다면 신이 죽일 것입니다.’했습니다.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卽我有大德於南人也 豈期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侵害於生民 狼虎之狂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奸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主 焚燒宮闕 葅醢卿佐 虔劉士民 姬妾則取以同車 珍寶奪之相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獍梟
내가 또한 전쟁을 그치는 무력을 숭상하여 죽이지 않음의 인을 약속하여 마침내 여러 겹으로 둘러 싼 것을 푸는 것으로서 피로한 군사를 쉬게 하고 인질을 거절하지 않고, 다만 백성을 편안히 하고자 할 뿐이었습니다. 이는 곧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입니다. 어찌 삽혈을 한 약속이 마르기도 전에 흉한 세력이 다시 일어나 벌과 전갈의 독이 백성에게 해를 끼치고, 이리와 호랑이의 미침으로 서울 땅을 통하지 않게 하여 금성이 궁색하고 왕궁을 몹시 놀라게 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대의에 기대 주나라를 높임에 누가 환공과 문공의 패업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틈을 타 한나라를 도모한 이는 오직 왕망과 동탁의 간사함에서 볼 뿐입니다. 왕의 지극히 높음으로 하여금 굽혀 그대에게 아들을 칭하게 하였으니 높고, 낮음의 차례를 잃게 하여 상하가 같이 근심하였습니다. 큰 보좌(원보)의 충순이 아니라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여기겠습니까? 내 마음에는 숨긴 악이 없고 뜻은 왕을 높이는 것을 간절히 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나라에서 위태로움을 구해내려 하였습니다. 그대는 터럭만한 작은 이익을 보아 하늘과 땅의 두터운 은혜를 잊어버리고 임금을 베어 죽이고, 궁궐을 불태우며 대신을 갈기갈기 찢어 죽였으며 사민(백성)을 죽이고 도적질 하였습니다. 희첩은 곧 잡아 같은 수레에 태우고, 보물을 빼앗아 (수레에)실었으니 큰 악은 걸과 주보다 더하고, 인하지 않은 것은 경과 올빼미 보다 심합니다.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約效鷹鸇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激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卿於海岸 積甲如山 禽雛造於城邊 伏屍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疑伊山郡)城(邊) 戮隨晤於纛下 拔任存(今大興郡)之日 刑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川(尙州領內縣名)縣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今桐華寺)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나는 임금의 죽음의 원한이 지극히 깊어 창을 휘둘러 해를 돌리는 정성을 깊이하고 매의 쫓음을 본받는 것으로서 개와 말의 부지런함(임금에 대한 충성)을 펼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다시 군대를 일으켜 해가 두 번 바뀌었습니다. 땅으로 치면 곧 우레가 달리고 번개처럼 격렬하고, 물로 치면 곧 호랑이가 치고 용이 날아오르는 하고, 움직이면 반드시 공을 이루며, 거사하면 헛되이 맞추지 못함이 없었습니다. 윤경을 해안에서 쫓을 때는 갑옷을 쌓은 것이 산과 같았고, 추조를 성 가에서 잡았을 때는 누운 시체가 들을 가렸습니다. 연산군 근처에서는 군대 앞에서 길환을 베어 죽였고, 마리(아마도 이산군일 것이다.)성에서는 수로를 깃발 아래서 죽였습니다. 임존(지금의 대흥군)성을 함락시킨 날에는 형적 등 수 백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청천(상주 관할 하의 현 이름)현을 깨트렸을 때는 (직심) 등 4-5명이 머리를 주었습니다.(바쳤습니다.) 동수(지금의 동화사)에서는 깃발을 바라보고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에서는 구슬을 입에 물고 들어 와 항복하였으며, 강주는 곧 남쪽으로부터 왔고, 나부는 곧 서쪽으로부터 옮겨 속하였습니다. 침공함이 이 같으니 거두어 회복할 날이 어찌 멀리오!
必期泜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心 竟息風波 永淸寰海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戢難於靑丘 旣奉訓謨 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旨 悉戢凶機 不唯副上國之仁恩 抑可紹東海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書乃崔致遠作也)
반드시 저수의 진영 안에서 장이의 천 가지 한을 갚고, 오강 기슭에서 한왕의 한번 싸움에 이기려는 마음을 이루니 마침내 바람과 물결이 쉬고 길이 천하를 맑게 하겠습니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이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하물며 오월왕 전하의 덕은 먼 곳에 있는 사람을 포함하기에 흡족하고, 인은 조그만 나라 백성들 까지도 깊습니다. 특히 단금(대궐)에서 윤음을 내려 청구에서 어려움을 거두라고 깨우쳤습니다. 이미 가르침을 받들었으니 어찌 높이고 받들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공경히 천자를 받든다면 흉한 싸움을 그친다면 다만 상국의 어진 은혜를 갚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해의 끊어진 전통을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허물에도 고치지 않는다면 만일 뉘우친다하여도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글은 곧 최치원이 지은 것이다.) 했다.
長興三年甄萱臣龔直 勇而有智畧 來降太祖 萱捉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 以舡兵入高麗禮城江 留三曰 取鹽白眞三州船一百艘 焚之而去(云云)
장흥 3년 경훤의 신하인 공직은 용맹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견훤이 공직의 두 아들과 한 딸을 잡아다 다리의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 가을 9월 견훤이 일길을 보내 수군으로서 도려 예성강에 들어 가 3일을 머물면서 염주, 백주, 진주의 배 100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갔다한다.
淸泰元年甲午 萱聞太祖屯運州(未詳) 遂簡甲士 蓐食而至 未及營壘 將軍黔弼以勁騎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 術士宗訓醫者之謙勇將尙逢雀弼等降於太祖 丙申正月 萱謂子曰 老夫新羅之季 立後百濟名 有年于今矣 兵倍於北軍 尙爾不利 殆天假手爲高麗 盍歸順於北王 保首領矣?
청태 1년 갑오에 견훤이 태조가 운주(자세하지 않다.)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마침내 갑사를 가려 뽑아 새벽 일찍 밥을 먹고 이르게 하였는데 미처 진영을 세우기도 전에 장군 유금필이 굳센 기병으로서 그들을 쳐서 3000여급을 베었다. 웅진 이북 30여성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견훤의 부하 술사 종훈, 의원인 지겸, 용감한 장수 상봉, 작필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병신년 정월 견훤이 아들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노부는(내가) 신라 말기에 후백제의 이름을 세워 지금 여러 해가 되었다. 군대가 북쪽 군대의 배나 되는데도 오히려 이롭지 않으니 자못 하늘이 고려를 위해 돕는 듯하다. 어찌 북쪽 왕에게 귀순하여 수령(우두머리, 생명)을 보존하지 않겠는가?”했다.
其子神劍龍劍良劍等三人皆不應 李磾家記云 萱有九子 長曰神劍(一云甄成) 二子太師謙腦 三子佐承龍述 四子太師聰智 五子大阿干宗祐 六子闕 七子佐承位興 八子太師靑丘 一女國大夫人 皆上院夫人所生也 萱多妻妾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位 其兄神劍良劍龍劍知之憂憫 時 良劍爲康州都督 龍劍爲武州都督 獨神劍在側 伊飧能奐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劍等謀 至淸泰二年乙未春三月 與英順等勸神劍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劍自稱大王 赦境內(云云)
그 아들 신검, 용검, 양검 등 세 사람이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제 가기에 “견훤은 아홉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신검(견성이라 하기도 한다.)이고, 둘째는 태사 겸뇌, 셋째는 좌승 용술, 넷째는 태사 총지, 다섯째는 대아간 종우, 여섯째는 빠졌고, 일곱째는 좌승 위흥, 여덟째는 태사 청구이고, 한 딸은 국대부인인데 모두 상원부인이 낳았다.”했다. 견훤은 처첩이 많아 아들 10여명을 두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이 특히 아껴 왕위를 전하여 생각하였다. 그 형 신검, 양검, 용검이 그것을 알고 근심하고 번민할 때 양검은 강주 도독이 되고, 용검은 무주 도독이 되고, 오직 신검만이 (견훤의)곁에 있었다. 이찬 능환이 사람을 시켜 강주와 무주 두 주에 가 양검 등과 모의하였다. 청태 2년 을미 춤3월에 이르러 영순 등과 신검을 권하여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죽인 후 신검이 스스로 대왕이라 일컬었다. 나라 안에 죄수를 풀어주었다. 한다.
初 萱寢未起 遙聞宮庭呼喊聲 問是何聲歟? 告父曰 王年老 暗於軍國政要 長子神劍攝父王位 而諸將歡賀聲也 俄移父於金山佛宇 以巴達等壯士三十人守之 童謠曰 可憐完山兒 失父涕連酒 萱與後宮年少男女二人侍婢古比女內人能又男等囚繫 至四月 釀酒而飮醉守卒三十人 而與小元甫香又吳琰忠質等以海路迎之 旣至 以萱爲十年之長 尊號爲尙父 安置于南宮 賜楊州食邑田庄 奴婢四十口 馬九匹 以其國來降者信康爲衙前
처음 견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때 멀리 궁의 뜰에서 함성이 울리는 것을 듣고,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를 물었다. 아버지에게 알려 말하기를 “왕께서는 나이가 많아 군국의 정사에 어두워 맏아들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대신하였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고 축하하는 소리입니다.”했다. 잠시 후 아버지를 금산사에 옮기고 파달 등 장사 30명으로서 지키게 하였다. 동요에 “불쌍한 완산 아이, 아버지 잃고 눈물을 물처럼 흘린다.”했다. 견훤은 후궁관 나이어린 남녀 두 사람, 시비 고비녀, 나인 능우남 등과 갇혀 있었다. 4월에 이르러 술을 빚어 지키는 군사 30명에게 먹여 취하게 하고(고려로 도망하였다. 이에 태조는?) 소원보 향우와 오담, 충질, 등으로 하여금 해로로 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견훤이) 이른 후 견훤의 나이가 열 살 연장이었으므로 호를 높여 상부라 하고, 남궁에 편안히 있게 하고, 양주의 식읍과 전장, 노비 40명, 말 9필을 내리고, 그 나라에서 와서 항복한 신강을 아전으로 삼았다.
甄萱婿將軍英規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以家人之禍 失地從於高麗 夫貞女不可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 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仁厚懃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盍致書以安慰我王 兼慇懃於王公 以圖後來之福乎? 妻曰 子之言是吾意也 於是 天福元年丙申二月 遣人致意於太祖曰 君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太祖喜 厚賜其使者遣之 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卽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姊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 神皆聞此語
견훤의 사위 장군 영규가 비밀리 그 처에게 말하기를 “대왕께서 40여년을 부지런히 수고하여 공업을 이루었는데 하루아침에 집안사람의 화를 입어 땅을 잃고 고려를 따랐습니다. 대저 정숙한 여자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 내가 임금을 버리고 거스른 아들을 섬긴다면 곧 무슨 얼굴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를 볼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인후근검하여 민심을 얻고 있다하니 아마도 하늘의 계시로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어찌 글을 보내는 것으로서 우리 왕을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에게 은근하게 하는 것으로서 뒤에 올 복을 도모하지 않겠습니까?”했다. 처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바로 나의 뜻입니다.”했다. 이에 천복 1년 병신년 2월 사람을 보내 뜻을 태조에게 이르게 하여 말하기를 “임금께서 의로운 깃발을 드시면 안에서 응하는 것으로서 왕의 군대를 맞이할 것을 청합니다.”했다. 태조가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후하게 내리고 보내고 영규에게 사례하고 말하기를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합해 도로의 막힘이 없어진다면 곧 먼저 장군에게 이르러 뵌 후 당에 올라 부인에게 절하고 형으로 섬기고 누이로 높여 반드시 끝까지 후한 보답이 있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귀와 신이 모두 이 말을 들었습니다.”했다.
六月 萱告太祖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 大人借以神兵 殲其賊亂 臣雖死無憾 太祖曰 非不欲討之 待其時也 先遣太子及武將軍述希 領步騎十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劍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相對 王師背艮向坤而陣 太祖與萱觀兵 忽白雲狀如劍戟 起我師向彼行焉 乃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哀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將帥所在
6월 견훤이 태조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노신이 전하에게 몸을 던진 까닭은 전하의 존엄한 위엄에 의지하여 거스른 아들을 죽이려해서일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데 대인께서 신 같은 군대를 빌어 적자와 난신을 죽일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했다. 태조가 말하기를 “토벌하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먼저 태자 무, 장군 박술희를 보내 보병과 기병 10만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달려가게 하였다. 가을 9월 태조가 삼군을 통솔하고 천안에 이르러 군대를 합하고 일선군으로 진군하자 신검이 군대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감오에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였는데 왕의 군대는 간 방향(동북쪽)을 등지고, 곤 방향(서남쪽)을 향해 진을 쳤다. 태조와 견훤이 군대를 보는데 홀연히 우리군대에서 검과 창 모양의 흰구름이 일어나 그들(신검의 군대)을 향해 갔다. 이에 북을 치며 진군하니 백제의 장군 효봉, 덕술, 원술, 명길 등이 (고려의) 군대 형세가 크고, 정돈된 것을 바라보고는 갑옷을 버리고 진 앞에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물었다.
孝奉等曰 元帥神劒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等 三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至黃山炭峴 神劍與二弟將軍富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太祖受降 餘皆勞之 許令與妻子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劍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 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 甄萱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九月八日也 壽七十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州縣安堵 老幼皆呼萬歲 謂英規曰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之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許職左承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효봉 등이 말하기를 “원수 신검은 중군에 있습니다.”했다. 태조가 장군 공훤 등에게 명하여 3군이 일제히 나아가 협공하니 백제 군대가 무너져 달아났다. 황산 탄현에 이르러 신검과 두 동생, 장군 부달, 능환 등 40여 명이 항복하였다. 태조가 항복을 받고 나머지도 모두 위로하고 처자와 함께 서울에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능환에게 말하기를 “처음 양검 등과 비밀리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너의 꾀이다. 신하된 의리로 이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한가?”하니 능환이 머리를 숙인 채 말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죽이라고 명하였다. 신검은 왕위를 빼앗았으나 다른 사람의 위협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 본래 마음이 아니다. 또한 항복하여 죄를 청하였으니 특히 그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견훤이 근심하다 등창이 생겨 며칠 만에 황산의 불사(절)에서 죽었는데 9월 8일로 나이는 70세였다. 태조는 군령이 엄하고 분명하여 사족들이 조금도 범하지 않으니 주현이 안도하고, 노유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 영규에게 일러 말하기를 “전왕이 나라를 잃은 후 그 신하된 사람으로 한 사람도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유독 경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글을 보내 성의를 지극히 하고 겸하여 나에게 아름다움을 돌렸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하고는 좌승의 벼슬과 밭 1천경을 내리고, 역마 35필을 빌리는 것을 허락하여 가족을 맞아오게 하였다. 그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晋天福元年 共四十五年 丙申滅 史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本新羅王子 而反以家國爲讎 至斬先祖之畫像 其爲不仁甚矣 甄萱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若禽獸 實天下之元惡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况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견훤은 당 경복 1년에 일어나 진 천복 1년에 이르렀으니 모두 45년만인 병신년에 멸하였다. 사론에 “신라의 운수가 다하고 도를 잃어 하늘의 돕는 바가 없으니 백성들이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에 여러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그 심한 자가 궁예와 견훤이었을 뿐이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 배반하여 나라를 원수로 여겨 선조의 초상을 벰에 이르렀으니 그 인하지 못함이 심하다. 견훤은 잔신이 신라의 백성으로 일어나고 신라의 녹을 먹다가 재앙의 마음을 감추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다행으로 여기고, 도읍을 침범하여 임금과 신하를 짐승과 같이 죽이고 도적질하니 진실로 천하의 큰 악이었다. 그러므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을 당하였고, 견훤은 그 아들에게서 재앙이 생겨났으니 모두 스스로 그것을 취한 것이니 또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비록 항우와 이밀의 뛰어난 재능이라 할지라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흥기를 대적할 수 없었다. 하물며 궁예와 견훤 같은 흉한 사람이 어찌 우리 태조와 서로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했다.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開闢之後 此地未有邦國之號 亦無君臣之稱 越有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五天干神鬼干等九干者 是酋長 領總百姓 凡一百戶 七萬五千人 多以自都山野 鑿井而飮 耕田而食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浴之日 所居北龜旨(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而發其音曰 此有人否?
가락국기(문묘조(문종) 때인 대강 연간에 금관 지주사로 있던 문인이 지은 것이다. 지금 대략적으로 싣는다.)
개벽 후 이 땅에는 나라의 호칭이 있지 않고, 또한 임금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에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이 있었는데 이는 추장으로 백성을 총괄하여 거느렸다. 모두 100호, 75000명이었다. 많이 스스로 산과 들에 도읍하고, 우물을 파 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다.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계욕일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족 구지(이는 산봉우리 이름인데 마치 10붕(거북)이 엎드린 형상이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에 보통과는 다른 소리와 기운으로 부르는 소리가 있어 무리 2, 300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와 같음이 있으나 그 형상은 숨기고 그 소리를 내어 말하기를 “여기에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했다.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爲何? 對云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玆故降矣 你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忻而歌舞 未幾 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裹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尋還裹著 抱持而歸我刀家 寘榻上 其衆各散
9간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있습니다.”하니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바를 무엇이라 하는가?”했다. 대답하여 “구지라고 합니다.”했다. 또 말하기를 “황천이 나에게 명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어 다스리라 하였기 때문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정상을 파 흙을 뿌리며 노래하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드러내라. 만약 드러내지 않는다면 구워먹겠다.’하면서 춤을 추면 곧 이는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춤추게 될 것이다.”했다. 9간 등이 그 말과 같이 모두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우러러 보니 자색의 근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끈의 아래를 찾아보니 곧 붉은 보자기에 금 상자가 싸여 있었다. 열어 보니 황금알 6개가 있는데 태양과 같았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기뻐하며 모두 백번 절하고 일어나 다시 보자기에 싸 가지고 아도의 집에 돌아 가 걸상 위에 두고 그 무리들이 각자 흩어졌다.
過浹辰 翌日平明 衆庶復相聚集開合 而六卵化爲童子 容貌甚偉 仍坐於床 衆庶拜賀 盡恭敬止 日日而大 踰十餘晨昏 身長九尺則殷之天乙 顔如龍焉則漢之高祖 眉之八彩則有唐之高 眼之重瞳則有虞之舜 其於月望日卽位也 始現故諱首露 或云首陵(首陵是崩後諡也)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12일이 지난 다음날 날이 밝자 무리들이 다시 서로모여 상자를 열었더니 6개의 알이 변하여 동자가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위대하였다. 그대로 상에 앉으니 무리들이 절하고 축하하여 지극히 공경함을 다하였다. 나날이 커져 10여일이 지나자 키가 아홉 자이니 곧 은나라의 천을과 같았다. 얼굴은 용과 같음은 곧 한나라의 고조와 같고, 눈썹은 팔자로 빛나는 것은 곧 요임금과 같음이 있었다. 눈에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순과 같음이 있었다. 그 보름에 즉위하였다. 처음 나타났기 때문에 휘를 수로라 하고, 혹은 수릉(수릉은 죽은 후 시호이다.)이라 하고, 나라를 대가락이라 일컳고, 또 가야국이라 한 것은 곧 6가야의 하나이다.
餘五人各歸爲五伽耶主 東以黃山江 西南以滄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耶山 南而爲國尾 俾創假宮而人御 但要質儉 茅茨不剪 土階三尺 二年癸卯春正月 王若曰 朕欲定置京都 仍駕幸假宮之南新畓坪(是古來閑田 新耕作故云也 畓乃俗文也) 四望山嶽 顧左右曰 此地狹小如蓼葉 然而秀異 可爲十六羅漢住地 何况 自一成三 自三成七 七聖住地 固合于是 托土開疆 終然允臧歟 築置一千五百步周廻羅城宮禁殿宇及諸有司屋宇虎庫倉廩之地 事訖還宮
나머지 5명아 가기 돌아 가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동족은 황산강이고, 서쪽은 바다이고, 서북쪽은 지리산이고, 동북쪽은 가야산이고 남쪽은 나라의 끝이다. 임시로 궁을 세우게 하고 사람들을 머물게 하였는데 질박하고 검소할 따름이니 억새로 만든 지붕은 자르지 않았고, 흙 계단은 세 자였다. 2년 계묘 촘 정월 왕이 말하기를 “짐이 서울을 정해 두려한다.”하고는 그대로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이는 옛날부터 묵은 땅인데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畓은 곧 속자이다.)으로 갔다. 사방으로 산악이 바라보다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 땅은 좁아 여뀌 잎사귀 같으나 빼어나고 기이하여 16나한이 머물만하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므로 7성이 살 땅으로 진실로 이에 부합한다. 땅을 바탕으로 강역을 열어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떠한가?”했다. 1500보 둘레의 나성(외성)과 궁궐, 전각과 여러 관청의 집과 무기고, 창고를 쌓을 땅을 마련하는 이을 마친 뒤 궁으로 돌아갔다.
徧徵國內丁壯人夫工匠 以其月二十日資始金陽(湯) 曁三月十日役畢 其宮闕屋舍 俟農隙而作之 經始于厥年十月 逮甲辰二月而成 涓吉辰御新宮 理萬機而懃庶務 忽有琓夏國含達王之夫人妊娠 彌月生卵 化爲人 名曰脫解 從海而來 身長三尺 頭圍一尺 悅焉詣闕 語於王云 我欲奪王之位 故來耳
두루 나라 안의 장정, 인부, 장인을 뽑아 그 달 20일 성을 쌓기 시작하여 3월 10일 역을 마쳤다. 그 궁궐과 옥사는 농한기를 기다렸기 때문에 그 해 10월에 시작하여 이루었다. 좋은 날을 가려 새로운 궁궐에 가서 모든 정사를 다스리며, 모든 일에 부지런하였다. 홀연히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부인이 임신하였는데 달이 차 알을 낳았는데 변화하여 사람이 되니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바다로부터 왔는데 키가 세 자, 머리 둘레가 한 자였다. 기뻐하며 궁궐에 나아가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지위를 빼앗으려 해서 왔을 뿐입니다.”했다.
王答曰 天命我俾卽于位 將令安中國而綏下民 不敢違天之命以與之位 又不敢以吾國吾民 付囑於汝 解云 若爾可爭其術 王曰可也 俄頃之間 解化爲鷹 王化爲鷲 又解化爲雀 王化爲鸇 于此際也 寸陰未移 解還本身 王亦復然 解乃伏膺曰 僕也適於角術之場 鷹之鷲 雀之於鸇 獲免焉 此盖聖人惡殺之仁而然乎! 僕之與王 爭位良難 便拜辭而出 到麟郊外渡頭 將中朝來泊之水道而行 王竊恐滯留謀亂 急發舟師五百艘而追之 解奔入雞林地界 舟師盡還 事記所載多異與新羅 屬
왕이 답해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왕위에 나아가게 한 것은 장차 중국(나라)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으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지위를 줄 수 없다. 또 감히 나의 나라, 나의 백성을 너에게 부탁할 수도 없다.”했다. 탈해가 말하기를 “너는 그 술법을 겨룰 수 있겠는가?”하니 왕이 말하기를 “좋습니다.”했다. 잠간 사이에 탈해가 변화하여 매가 되니 왕이 변화하여 독수리가 되었다. 또 탈해가 변화하여 참새가 되니 왕이 변화하여 새매가 되었다. 이런 때는 조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래 몸으로 돌아오니 왕이 또한 (본래의 모습으로)돌아왔다. 탈해가 이에 엎드려 항복하여 말하기를 “내가 각술을 다투는 마당에 매가 독수리에게, 참개가 새매에게 있어서 집히기를 면한 것은 이는 대개 성인이 죽이기를 미워하는 인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내가 왕에 대해 지위를 다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하고는 곧 절한 후 하직하고 나간 후 교외에 나가 가까운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의 배가 와 닿는 수로로 갔다. 왕이 머물러 난을 꾀할 것을 두려워하여 급히 수군을 500척을 내어 추격하였다. 탈해가 달아나 계림 땅 경계에 들어가니 수군이 모두 돌아왔다. 일의 기록은 신라와는 많이 다르다.
建武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 九干等朝謁之次 獻言曰 大王降靈已來 好仇未得 請臣等所有處女絶好者 選入宮闈 俾爲伉儷 王曰 朕降于玆天命也 配朕而作后 亦天之命 卿等無慮 遂命留天干押輕舟 持駿馬 到望山島立待 申命神鬼干就乘岾(望山島 京南島嶼也 乘岾 輦下國也) 忽自海之西南隅 掛緋帆 張茜旗 而指乎北 留天等先擧火於島上 則競渡下陸 爭奔而來 神鬼望之 走闕奏之 上聞欣欣 尋遣九干等 整蘭橈 揚桂楫而迎之 旋欲陪入內 王后乃曰 我與(爾)等素昧平生 焉敢輕忽相隨而去!
건무 24년 무신 7월 27일 9간 등이 왕을 조회하여 뵐 때 말을 올려 말하기를 “대왕께서 강림한 이래로 좋은 짝을 얻지 못하였으니 신들이 있는바 처녀 중에 매우 좋은 자가 있으니 선발하여 궁궐에 들여 부부가 될 것을 청합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여기에 내려 온 것은 하늘의 명이다. 짐에게 짝을 지워 왕후로 만드는 것도 또한 하늘이 명할 것이다. 경들은 근심할 것이 없다.”했다. 마침내 유천간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좋은 말을 가지고 망산도에 이르러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망산도는 서울 남쪽 섬이다. 승점은 연하국이다.)에 나아가게 하였다. 홀연히 바다의 서남쪽 모퉁이에서 붉은 색 돛을 달고 붉은 색 깃발을 펴고 북쪽을 향해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섬 위에서 불을 드니 곧 배를 빨리 저어 다투어 육지에 내려 달려왔다. 신귀간 등이 그것을 바라보고 대궐에 달려 가 아뢰었다. 임금이 듣고 기뻐하며 9간 등을 보내 목련으로 만든 키를 정돈하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여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였다. 왕후가 곧 말하기를 “나와 너희들은 평생 알지 못하였는데 어찌 소홀히 서로 따라 갈수 있겠는가!”했다.
留天等返達后之語 王然之 率有司動蹕 從闕下西南六十步許地 山邊設幔殿祗候 王后於山外別浦津頭 維舟登陸 憩於高嶠 解所著綾袴爲贄 遺于山靈也 其地侍從媵臣二員 名曰申輔趙匡 其妻二人 號慕貞慕良 或臧獲幷計二十餘口 所齎錦繡綾羅衣裳疋段金銀珠玉瓊玖服玩器 不可勝記 王后漸近行在 上出迎之 同入帷宮 媵臣已下衆人 就階下而見之卽退
유천간 등이 돌아 가 왕후의 말을 알렸다. 왕이 그렇다 여기고, 유사를 통솔하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서 서남쪽으로 60보 정도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후가 산 밖의 별포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었다. 입었던 비단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에게 남겼다. 그 땅에서 모시고 따르던 잉신 2명이 있었는데 신보와 조광이었다. 그 처 두 사람은 모정, 모량이라 불렀고, 혹 노비가 모두 20여명이었다. 가진 수놓은 비단, 능라 옷과 필단, 금은주옥, 구슬로 만든 패물 등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왕후가 점차 왕이 있는 곳에 이르자 임금이 나가 맞이하여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이 계단 아래로 나아가 뵙고 곧 물러났다.
上命有司引媵臣夫妻 曰 人各以一房安置 已下臧獲各一房五六人安置 給之以蘭液蕙醑 寢之以文茵彩薦 至於衣服疋段寶貨之類 多以軍夫遴集而護之 於是 王與后共在御國寢 從容語王曰 妾是阿踰陁國公主也 姓許名黃玉 年二八矣 在本國時 今年五月中 父王與皇后顧妾而語曰 ?爺孃一昨夢中 同見皇天上帝 謂曰 駕洛國元君首露者 天所降而俾御大寶 乃神乃聖 惟其人乎! 且以新蒞家邦 未定匹偶 卿等湏遣公主而配之 言訖升天 形開之後 上帝之言 其猶在耳 你於此而忽辭親 向彼乎往矣?
임금이 유사에게 명하여 잉신 부처를 인도하게 하고, 말하기를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5, 6명이 편안히 있게 하고,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도록 했으며, 의복과 필단, 보화의 류를 주고, 많은 군인을 선발하여 지키라”고 했다. 이에 왕과 왕후가 함께 잠자리에 들어 조용한 말로 왕에게 말하기를 첩은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으로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올해 5월 중에 부왕과 황후가 첩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와 어머니가 어젯밤 꿈에 같이 황천상제를 보았는데 일러 말하기를 가락국 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 대보(임금의 자리)를 다스리게 하였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이는 오직 그 사람이다. 또 새로이 나라를 다스림에도 아직 짝을 정하지 못하였다. 경들은 공주를 보내 배필이 되게 하라.’하는 말을 마치고 하늘에 올라갔다. 꿈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귀에 있다. 너는 여기에서 곧 부모를 하직하고, 그를 향해 가라. 했습니다.
妾也浮海遐尋於蒸棗 移天夐赴於蟠桃 螓首敢叨 龍顔是近 王答曰 朕生而頗聖 先知公主自遠而屆 下臣有納妃之請 不敢從焉 今也淑質自臻 眇躬多幸 遂以合歡 兩過淸宵 一經白晝 於是 遂還來船 篙工楫師共十有五人 各賜粮粳米十碩布三十疋 令歸本國
첩이 바다에 떠 멀리 신선이 먹는 대추를 찾고 하늘로 옮겨 번도(선도)에 나아가 미인의 이마를 감히 욕심내어(모양을 가다듬고) 용안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했다. 왕이 답하여 말하기를 “짐이 나면서 자못 신성하여 먼저 공주가 멀리서 이를 것을 먼저 알았으므로 신하들이 왕비를 들이라는 청이 있었으나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빼어난 자질(의 공주가) 스스로 이르렀으니 저로서는 다행입니다.”했다. 마침내 함께 기쁨을 나눈 뒤 두 밤을 지나고 하루의 낮을 지냈다. 이에 마침내 온 배를 돌아가게 하였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포 30필을 내리고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다.
八月一日廻鑾 與后同輦 媵臣夫妻齊鑣並駕 其漢肆雜物 感使乘載 徐徐入闕 時銅壺欲午 王后爰處中宮 勑賜媵臣夫妻 私屬空閑二室分入 餘外從者以賓舘一坐二十餘間 酌定人數 區別安置 日給豊羡 其所載珍物 藏於內庫 以爲王后四時之費
8월 1일 왕과 왕후가 같은 수레를 타고 돌아갔다. 잉신 부처도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그 한(중국의)에서 나는 갖가지 물품도 무두 수레에 싣게하고 천천히 궁궐에 들어갔다. 그 때는 오정에 가까웠다. 왕후는 이에 중궁에 거처하고, 잉신부처에게는 개인에 속한 비어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어가도록 명하고, 그 나머지 따라 온자 들은 빈관 한 채 20여 간을 사람 수에 따라 배정하고, 나누어 편안히 있게 하였으며, 매일 풍족히 주고 실었던 바 보배는 내고에 보관하여 왕후의 사시의 비용으로 삼았다.
一日上語臣下曰 九干等俱爲庶僚之長 其位與名 皆是宵人野夫之號 頓非簪履職位之稱 儻化外傳聞 必有嗤笑之耻 遂改我刀爲我躬汝刀爲汝諧彼刀爲彼藏五方爲五常 留水留天之名 不動上字 改下字留功留德 (神)(天)改爲神道 五天改爲五能 神鬼之音不易 改訓爲臣貴 取雞林職儀 置角干阿叱干級干之秩 其下官僚 以周判漢儀而分定之 斯所以革古鼎 新設官分職之道歟! 於是乎 理國齊家 愛民如子 其敎不肅而威 其政不嚴而理 况與王后而居也 比如天之有地日之有月陽之有陰 其功也塗山翼夏 唐煖興嬌 頻年有得熊羆之兆 誕生太子居登公 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一日后崩 壽一百五十七
하루는 임금이 신하에게 말하기를 “9간 등은 모두 여러 관료의 장이 되었는데 그 자리와 이름이 모두 소인과 농부의 칭호이니 높은 벼슬의 칭호가 아니다. 만약 밖으로 알려진다면 반드시 비웃음의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했다. 마침내 고쳐 아도를 아궁, 여도를 여해, 피도를 피장, 5방을 5상이라 하였다. 유수와 유천의 이름은 윗 글자를 움직이지 않고, 아래 글자를 고쳐 유공, 유덕이라 하였다. 신천을 고쳐 신도라 하고, 5천을 고쳐 5능이라 하였다. 신귀의 음은 바꾸지 않고 훈을 고쳐 신귀라 한 것은 계림의 직책과 모습을 취해 각간, 아질간, 급간의 차례를 두고, 그 아래 관료는 주나라와 한나라의 모습으로 나누어 정하였다. 이는 옛 것을 고쳐 새롭게 관청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방법이다. 이에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 하니 그 교화가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사가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하물며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비유하면 마치 하늘에 대해 땅이 있고, 해에 대해서 달이 있는 것 같고, 양에 대해서 음이 있는 것과 같으니 그 공이 도산이 하를 돕고 당원이 교를 일으킨 것과 같다. 해마다 웅비의 조짐(사내아이를 낳을 징조)을 얻음이 있어 태자 거등공이 태어났다. 영제 중평 6년 기사 3월 1일 왕후가 죽었는데 나이는 157세였다.
國人如嘆坤崩 葬於龜旨東北塢 遂欲忘子愛下民之惠 因號初來下纜渡頭村曰主浦村 解綾袴高岡曰綾峴 茜旗行入海涯曰旗出邊 媵臣泉府卿申輔宗正監趙匡等到國三十年後 各産二女焉 夫與婦踰一二年而皆?信也 其餘臧獲之輩 自來七八年間 未有玆子生 唯抱懷土之悲 皆首丘而沒 所舍賓館 圓其無人 元君乃每歌鰥枕 悲嘆良多 隔二五歲 以獻帝立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而殂落 壽一百五十八歲矣
나라 사람들이 땅이 무너지듯이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하였다. 마침내 자식처럼 백성을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처음 와 닻을 내렸던 도두천을 주포촌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었던 높은 언덕을 능현이라 했다. 붉은 깃발로 들어 간 바닷가를 기출변이라 했다. 잉신 천부경 신보와 종정감 조광 등이 나라에 이른지 30년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남편과 부인은 12년을 지나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나머지 노비들은 온지 7, 8년 사이에 자식을 낳음이 없고, 오직 고향을 그리는 슬픔을 품고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다 죽으니 머물던 빈관은 비어 사람이 없었다. 원군(임금)이 이에 매양 외로이 베개에 의지하여 슬퍼하며 탄식하다 25년 후인 헌제 입안 4년 기묘 3월 20일에 죽었다. 나이는 158세였다.
國中之人若亡天只 悲慟甚於后崩之日 遂於闕之艮方平地 造立殯宮 高一丈 周三百步而葬之 號首陵王廟也 自嗣子居登王 洎九代孫仇衝 之享是廟 須以每歲孟春三之日七之日仲夏五之日仲秋初五之日十五之日 豊潔之奠 相繼不絶 洎新羅第三十王法敏 龍朔元年辛酉三月日 有制曰
나라 사란들이 마치 하늘(부모를)을 잃은 듯 슬퍼함이 왕후가 죽은 날보다 심하였다. 마침내 궁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세웠는데 높이는 1장, 둘레 300보로 장사하고, 수릉왕묘라 불렀다. 아들 거등왕으로부터 9대손인 구형까지 이 사당에 제사하였다. 매년 정월 3일, 7일, 5월 5일, 8월 5일, 15일에 풍부하고 께끗한 제물로 제사하였는데 서로 이어 끊어지지 않았다. 신라 제30대왕 법민 용삭 1년 신유 3월일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朕是伽耶國元君九代孫仇衝王降于當國也 所率來子世宗之子率友公之子庶云匝干之女 文明皇后寔生我者 玆故元君於幼冲人 乃爲十五代始祖也 所御國者已曾敗 所葬廟者今尙存 合于宗祧 續乃祀事 仍遣使於黍離之趾 囗近廟上上田三十頃 爲供營之資 號稱王位田 付屬本土 王之十七代孫賡世級干祗禀朝旨 主掌厥田 每歲 時釀醪醴 設以餠飯茶菓庶羞等奠 年年不墜 其祭日不失居登王之所定年內五日也 芬苾孝祀 於是乎在於我
“짐은 가야국 시조 9대손 구형왕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의 아들 솔우공의 서운잡간의 딸 문명황후가 나를 낳으셨다. 그러므로 시조는 나에게 곧 15대 시조가 된다. 다스리던 나라는 이미 일찍이 무너졌고 그 사당이 지금도 아직 있으니 종묘에 합하여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했다. 이에 사자를 옛 터에 보내 사당에서 가까운 상상전 30경을 바쳐 경영(제사를 지낼)할 밑천으로 삼고 왕위전이라 부르고 본토에 붙였다. 왕(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이 조정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관리하면서 매년 때에 따라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과 밥, 차, 과일 등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 매년 거르지 않았다. 그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연간 5일을 변하지 않았고, 향기로운 제사가 이에 우리에 있게 되었다.
自居登王卽位己卯年置便房 降及仇衝(衡)朝未(末) 三百三十載之中 享廟禮曲 永無違者 其乃仇衝失位去國 逮龍朔元年辛酉 六十年之間 享是廟禮或闕如也 美矣哉! 文武王(法敏王諡也) 先奉尊祖 孝乎惟孝 繼泯絶之祀 復行之也 新羅季末有忠至匝干者 攻取金官高城 而爲城主將軍 爰有英規阿干 假威於將軍 奪廟享而淫祀 當端午而致告祠 堂梁無故折墜 因覆壓而死焉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편방을 둔 후부터 내려와 구충(형)왕 말에 이르기까지 330년 동안 사당에 제사지내 길이 어김이 없었다. 구충(형)왕이 지위를 잃고 나라를 떠남으로부터 용삭 1년 신유에 이르는 60년간은 이 사당의 제사가 혹은 빠지기도 하였다. 아름답도다! 문무왕(법민왕의 시호이다.)이 먼저 조상을 받들어 높이고 끊어졌던 제사를 이어 다시 행하였다. 신라 말 충지 잡간이라는 자가 있어 금관고성을 쳐서 빼앗고 성주장군이 되었다. 이에 영규아간이 있어 장군의 위세를 빌어 사당에 대한 제사를 빼앗아 함부로 제사하였다. 단오 날에 제사를 지내던 중 집의 대들보가 이유 없이 부러져 떨어져 깔려 죽었다.
於是 將軍自謂 宿因多幸 辱爲聖王所御國城之奠 宜我畫其眞影 香燈供之 以酬玄恩 遂以鮫絹三尺 摸出眞影 安於壁上 旦夕膏炷 瞻仰虔至 才三日 影之二目 流下血淚 而貯於地上 幾一斗矣 將軍大懼 捧持其眞 就廟而焚之 卽召王之眞孫圭林而謂曰 昨有不祥事 一何重疊! 是必廟之威靈 震怒余之圖畫而供養不孫 英規旣死 余甚怪畏 影已燒矣 必受陰誅 卿是王之眞孫 信合依舊以祭之 圭林繼世奠酹 年及八十八歲而卒 其子間元卿 續而克禋
이에 장군이 스스로 이르기를 “다행히 전생에 맺은 인연으로 분수에 넘치게 성스러운 왕이 다스리던 나라의 성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내가 그 진영(초상화)을 그리고 향과 등을 받드는 것으로서 은혜를 갚아야겠다.”하고는 마침내 비단 세 자에 초상을 그려 벽 위에 안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고 우러러보고 정성을 다하였다. 겨우 3일에 초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땅위에 고여 거의 한 말이나 되었다. 장군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 초상을 받들고 사당에 나아가 태우고, 곧 왕의 참된 후손 규림을 불러 말하기를 “어제 상서롭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거듭 일어나는가? 이는 반드시 사당의 위령이 내가 그림을 그리고 공양함이 불손하다고 크게 노하신 것 같다. 영규가 죽은 것을 내가 매우 괴이하고 두렵게 여겨 초상을 이미 불살랐으나 반드시 베어 죽임을 받을 것이다. 경은 왕(수로왕)의 참된 후손이니 진실로 옛 예에 의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했다.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다 나이 88세에 이르러 죽었다.
其子間元卿 續而克禋 端午日 謁廟之祭 英規之子俊必又發狂 來詣廟 俾徹間元之奠以己奠陳享 三獻未終 得暴疾 歸家而斃然 古人有言淫祀無福 反受其殃 前有英規後有俊必父子之謂乎! 又有賊徒 謂廟中多有金玉 將來盜焉 初之來也 有躬擐甲冑張弓挾矢猛士一人從廟中出 四面雨射 中殺七八人 賊徒奔走 數日再來 有大蟒長三十餘尺 眼光如電 自廟旁出 咬殺八九人 粗得完免者 皆僵仆而散 故知陵園表裡 必有神物護之
그 아들 간원경이 이어 제사하였다. 단오날 알묘제 때 영규의 아들 준필이 또 미쳐서 사당에 와 간원의 제물을 거두고 자기의 제물을 진설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세 번의 술잔 올리기를 마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병을 얻어 집에 돌아가 죽었다. 옛 사람이 한 말 중에 “음사는 복이 없고,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했다. 앞서는 영규가 있었고, 뒤에는 준필 부자가 있음을 이르는가! 또 도적의 무리가 사당 안에 많은 금옥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잔차 와서 이를 훔치려 하였다. 처음 왔을 때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에 화살을 재운 용맹한 군사 한 사람이 사당 안에서 나와 사방으로 비오듯 화살을 쏘아 7, 8명을 맞추니 도적의 무리들이 달아났다. 며칠 후 다시 오니 30여 자되는 큰 구렁이가 있어 눈빛이 번개 같은데 사당 옆에서 나와 8, 9명을 물어 죽였다. 겨우 완전히 (죽음을) 면한 자들이 모두 엎어지면서 흩어졌다. 그러므로 능원 안과 밖에 반드시 신물이 있어 보호함이 있다는 것을 알겠다.
自建安四年己卯始造 逮今上御圖(國)三十一載 大康二年丙辰 凡八百七十八年 所封美土 不騫不崩 所植佳木 不枯不朽 况所排列萬蘊玉之片片 亦不頹坼 由是觀之 辛替否曰自古迄今 豈有不亡之國不破之墳? 唯此駕洛國之昔曾亡 則替否之言有徵矣 首露廟之不毁 則替否之言 未足信也 此中更有戱樂思慕之事 每以七月二十九日 土人吏卒 陟乘岾 設帷幕 酒食歡呼 而東西送目 壯健人夫 分類以左右之 自望山島 駮蹄駸駸而競湊於陸 鷁首泛泛而相推於水 北指古浦而爭趨 盖此昔留天神鬼等望后之來 急促告君之遺跡也
건안 4년 기묘에 처음 (사당을)지은 때로부터 지금 임금이 나라를 다스린 지 31년에 이른 대강 2년 병진까지 무릇 878년인데 쌓았던 아름다운 흙이 허물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심은 아름다운 나무는 마르거나 썩지 않았다. 더하여 배열한 만 개 온옥의 조각이 또한 무너지거나 갈라진 것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것을 보면 신체부가 말한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와 깨트려지지 않은 무덤이 있겠는가?”했지만 오직 이 가락국만은 옛날에 일찍이 망하여 곧 신체부가 말한 것이 증명함이 있다할 것이나 수로왕의 사당이 훼손되지 않은 것은 곧 신체부의 말을 믿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이 가운데 다시 (수로왕을) 놀이하며 사모하는 일이 있는데 매 7월 29일 이 지방 사람들과 아전, 군졸들이 승점에 올라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고, 환호한다. 동쪽과 서족으로 눈을 보내면(눈짓하면) 건장한 인부들이 좌우로 나누어 망산도에서 말발굽을 달려 육지로 내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에서 서로 밀며 북쪽 고포를 향해 다투어 달린다. 대개 이는 옛날 유천, 신귀 등이 왕후(허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임금에게 알리던 남은 자취이다.
國亡之後 代代稱號不一 新羅第三十一政明王卽位 開耀元年辛巳 號爲金官京 置太守 後二百五十九年 屬我太祖統合之後 代代爲臨海縣 置排岸使 四十八年也 次爲臨海郡 或爲金海府 置都護府 二十七年也 又置防禦使 六十四年也
나라가 망한 후에 대대로 칭호가 하나가 아니다. 신라 제 31대 정명왕이 즉위한 개요 1년 신사에는 금관경이라 하고 태수를 두었고, 그 후 259년에 우리 태조가 통합 한 후에는 대대로 임해현이라 하고 배안사를 두어 48년이었다. 다음으로는 임해군이라 하고 혹은 김해부라 하고 도호부를 두어 27년이었다. 또 방어사를 두어 64년이었다.
淳化二年金海府量田使中大夫趙文善申省狀稱 首露陵王廟屬田結數多也 宜以十五結仍舊貫 其餘分折於府之役丁 所司傳狀奏聞 時廟朝宣旨曰 天所降卵 化爲聖君 居位而延齡 則一百五十八年也 自彼三皇而下 鮮克比肩者歟! 崩後自先代俾屬廟之壟畝 而今減除 良堪疑懼 而不允 使又申省 朝廷然之 半不動於陵廟中 半分給於鄕人之丁也 節使(量田使稚也)受朝旨 乃以半屬於陵園 半以支給於府之徭役戶丁也 幾臨事畢 而甚勞倦
순화 2년 김해부 양전사 중대부 조문선이 살펴본 보고에 “수로왕의 능묘에 속한 밭이 많으므로 마땅히 15결은 옛 관례에 따르고, 그 나머지부분은 부의 역정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했다. 맡은 관청에서 그 보고서를 전하여 아뢰자 그 때의 조정에서 명을 내려 말하기를 “하늘에서 내린 알이 변화하여 성스러운 임금이 되어 왕위에 머물러 나이가 곧 158년이니 저 삼황으로부터 내려와 능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가 적을 것이다. (수로왕이)죽은 후 선대로부터 (수로왕)사당에 속하게 한 전답을 지금 줄여 없애게 하는 것은 참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할만한 것이므로 허락하지 않는다.”했다. 양전사가 또 거듭 아뢰자 조정이 그렇다 여기고, 반은 능묘 중에서 움직이지 않게 하고, 반은 고을의 호정에게 나누어 주게 했다. 절사(양전사를 말한다.)가 조정의 명을 받아 이에 반을 능원에 속하게 하고 반은 부의 요역호정에게 지급하였다. 거의 일이 마쳐질 때 쯤 매우 피곤하였다.
忽一夕夢見七八介鬼神 執縲紲 握刀而至 云儞有大憝 故加斬戳 其使以謂受刑而慟楚 驚懼而覺 仍有疾瘵 勿令人知之 宵遁而行 其病不間 渡關而死 是故 量田都帳不著印也 後人奉使來 審檢厥田 才一結十二負九束也 不足者三結八十七負一束矣 乃推鞫斜入處 報告內外官 勅理足支給焉 又有古今所嘆息者
홀연히 어느 날 저녁 꿈에 7, 8개의 귀신을 보았는데 밧줄과 칼을 잡고 이르러 말하기를 “너에게 큰 원한이 있기 때문에 베어 죽인다.”했다. 양전사가 형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 놀라고 두려워 깨어났는데 곧 병이 들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알지 못하게 하고 밤에 달아나 갔다. 그 병이 낫지 않아 고나을 건너다 죽었다. 이 때문에 양전도장에 도장이 찍히지 못하였다. 후세 사람이 사신을 받들고 와 그 밭을 자세히 점검하니 겨우 1결 12부 9속뿐이었다. 부족한 것이 3결 87부 1속이었다. 이에 바르지 못하게 들어 간곳을 조사하여 내외관(조정의 관리와 지방관)에게 보고하니 임금의 명으로 충분히 지급하라고 했다. 또한 고금에 탄식할 일이다.
元君八代孫金銍王克勤爲政 又切崇眞 爲世祖母許皇后奉資冥福 以元嘉二十九年壬辰 於元君與皇后合婚之地創寺 額曰王后寺 遣使審量近側平田十結 以爲供億三寶之費 自有是寺五百後 置長遊寺 所納田柴幷三百結 於是右寺三剛 以王后寺在寺柴地東南標內 罷寺爲莊 作秋收冬藏之場 秣馬養牛之廐 悲夫! 世祖已下九代孫曆數 委錄于下 銘曰
시조 임금(수로왕)의 8대손 김질왕이 부지런히 정사를 하였고, 참됨을 지극히(매우) 숭상하여 세조모 허황후의 명복을 받들기 위해 원가 29년 임진에 시조 임금(수로왕)과 황후가 혼인한 자리에 절을 짓고 왕후사라 이름했다. 사자를 보내 절 가까이 평전 10결을 헤아려 삼보를 공양할 비용으로 삼았다. 이 절이 있은 지 500년이 지난 후에 장유사를 두었는데 들인 바의 전시가 모두 300결이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은 왕후사가 절(장유사)의 시지 동남쪽 표 안(경계)에 있다하여 왕후사를 없애고 장사로 삼고 가을에 거둔 것을 겨울에 저장하는 창고와 말을 먹이고 소를 기르는 마굿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프다. 세조이하 9대손의 역수는 아래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명은 이러하다.
元胎肇啓 利眼初明 人倫雖誕 君位未成 中朝累世 東國分京 雞林先定 駕洛後營 自無銓宰 誰察民氓 遂玆玄造 顧彼蒼生 用授符命 特遣精靈 山中降卵 霧裏藏刑 內猶漠漠 外亦冥冥 望如無象 聞乃有聲 群歌而奏 衆舞而呈 七日而後 一時所寧 風吹雲卷 空碧天靑 下六圓卵 垂一紫纓 殊方異土 比屋連甍 觀者如堵 覩者如羹 五歸各邑 一在玆城 同時同迹 如弟如兄 實天生德 爲世作程 寶位初陟 寰區欲淸 華構徵古 土階尙平 萬機始勉 庶政施行 無偏無儻 惟一惟精 行者讓路 農者讓耕 四方奠枕 萬姓迓衡 俄晞薤露 靡保椿齡 乾坤變氣 朝野痛情 金相其躅 玉振其聲 來苗不絶 薦藻惟馨 日月雖逝 規儀不傾
천지가 처음 열리고 해와 달이 밝았다. 인륜은 비록 생겨났으나 임금의 자리는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중국은 여러 세대가 지났으나 동국은 서울이 나누어져있다. 계림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은 뒤에 경영되었다. 스스로 맡아 다스릴 자 없으니 누가 백성을 살필까. 마침내 저 상제께서 저 창생을 돌아보았다. 부명을 주어 특히 정령을 보냈다. 산 중에 알이 내려오니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안은 오히려 아득하고, 밖은 또한 캄캄하다. 바라보아도 상은 없는 것 같고 들으니 곧 소리가 있다. 여럿이서 노래하여 아뢰고 무리들이 춤추어 올렸다. 7일 후 일시에 편안해지고, 바람 불어 구름 걷힌다. 허공의 푸른 하늘은 맑고, 여섯 개의 둥근 알이 내려온다. 하나의 자색 끈이 내려와 다른 쪽 다른 땅에 집이 즐비하게 연이어 있다. 보는 자는 담처럼 둘러있고, 보는 자가 국처럼 우글거린다. 다섯이 각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다. 같은 때 같은 자취는 형과 같고 아우 같다. 진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다. 임금의 자리에 처음 올라 천하를 맑게 하고자 한다. 궁전 구조는 옛 것을 ᅟᅩᆫ받고 흙 계단은 오히려 평평하다. 정사에 비로소 힘쓰니 뭇 정사가 시행되었다. 치우침도 없고 기울지도 않으니 오로지 하나로 하고 오로지 세밀히 하였다. 길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는 밭을 양보한다. 사방은 모두 베개를 높이하고 모든 백성들은 태평을 맞이했다. 풀 밑의 이슬과 같아 문득 대춘의 수병을 보전치 못한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변하고 조정과 재야가 슬퍼하였다. 발자취 금과 같고, 그 명성 옥과 같다.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매 영묘의 제전은 향기롭기도 하다. 비록 세월은 흘러갔지만 그 규범은 기울어지지 않았다.
居登王
父首露王 母許王后 立安四年己卯三月囗十三日卽位 治三十九年 嘉平五年癸酉九月十七日崩 王妃泉府卿申輔女慕貞 生太子麻品 開皇曆云 姓金氏 盖國世祖從金卵而生 故以金爲姓爾
거등왕
아버지는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허왕후이다. 입안 4년 기묘 3월 13일 즉위하여 39년을 다스리고 가평 5년 계유 9월 17일 죽었다. 왕비는 천부경 신보의 딸 모정이다. 태자 마품을 낳았다. 개황력에 이르기를 “성은 김씨이니 대개 세조가 금색 알에서 낳기 때문에 김으로 성을 삼았을 뿐이다.
麻品王
一云馬品 金氏 嘉平五年癸酉卽位 治三十九年 永平元年辛亥一月二十九日崩 王妃宗正監趙匡孫女好仇 生太子居叱彌
마품왕
한편 마품이라 한다. 김씨이다. 가평 5년 계유에 즉위하여 39년을 다스리다 영평 1년 신해 1월 29일 죽었다. 왕비는 종정감 조광의 손녀 호구이니 태자 거질미를 낳았다.
居叱彌王
一云今勿 金氏 永平元年卽位 治五十六年 永和二年丙午七月八日崩 王妃阿躬阿干孫女阿志 生王子伊品
거질미왕
한편으로 금물이라 한다. 김씨이고, 영평 1년 즉위하여 56년을 다스리다 영화 병오 7월 8일 죽었다. 왕비는 아궁아간의 손녀 아지이니 왕자 이품을 낳았다.
伊尸品王
金氏 永和二年卽位 治六十二年 義凞三年丁未四月十日崩 王妃司農卿克忠女貞信 生王子坐知
이시품왕
김시로 영화 2년 즉위하였고, 62년을 다스리다 의희 3년 정미 4월 10일 죽었다. 왕비는 사농경 극충의 딸 정신이니 왕자 좌지를 낳았다.
坐知王
一云金叱 義凞三年卽位 娶傭女 以女黨爲官 國內擾亂 雞林國以謀欲伐 有一臣名朴元道 諫曰 遺草閱閱亦含羽 況乃人乎! 天亡地陷 人保何基? 又卜士筮得解卦 其辭曰 解而拇 朋至斯孚 君鑑易卦乎? 王謝曰 可 擯傭女 貶於荷山島 改行其政 長御安民也 治十五年 永初二年辛酉五月十二日崩 王妃道寧大阿干女福壽 生子吹希
좌지왕
한편 김질이라 하기도 한다. 의희 3년 즉위하였다. 용녀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삼으니 나라 안이 소란해졌다. 계림국이 정벌하고자 꾀를 내었다. 박원도라는 이름의 한 신하가 있어 간하여 말하기를 “유초를 하나하나 점검하여도 또한 깃을 머금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늘이 없어지고 땅이 꺼지면 사람은 어느 터에서 보존하겠습니까? 또 복사가 점을 쳐 해괘를 얻었는데 그 점사에 말하기를 ‘너의 엄지발가락을 풀면 벗이 이르러 믿으리라.(소인을 없애면 군자가 와서 도우리라)’하였으니 임금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펴보십시오.”했다. 왕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옳습니다.” 하고는 용녀를 내쳐 하산도로 쫓아내고 그 정사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히 다스렸다. 15년을 다스리고 영초 2년 신유 5월 12일에 죽었다. 왕비는 도녕대아간읜 딸 복수이니 아들 취희를 낳았다.
吹希王
一云叱嘉 金氏 永初二年卽位 治三十一年 元喜二十八年辛卯二月三日崩 王妃進思角干女仁德 生王子銍知
취희왕
한편 질가라고도 한다. 김시로 영초 2년에 즉위하여 31년을 다스렸다. 원가 28년 신묘 2월 3일 죽었다. 왕비는 진사각간의 딸 인덕으로 왕자 질지를 낳았다.
銍知王
一云金銍王 元嘉二十八年卽位 明年爲世祖許黃玉王后 奉資冥福於初與世祖合御之地 創寺曰王后寺 納田十結充之 治四十二年 永明十年壬申十月四日崩 王妃金相沙干女邦媛 生王子鉗知
질지왕
한편으로 김질왕이라 한다. 원가 28년 즉위하여 이듬해 세조(시조)와 허황옥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처음 세조(시조)와 만났던 땅에 절을 짓고 왕후사라하고, 밭 10결을 주어 비용에 쓰게 했다. 42년능 다스리고 영명 10년 임신 10월 4일에 죽었다. 왕비는 김상사간의 딸 방원인데 왕자 겸지를 낳았다.
鉗知王
一云金鉗王 永明十年卽位 治三十年 正光二年辛丑四月七日崩 王妃出忠角干女淑 生王子仇衡
겸지왕
한편 김겸왕이라 한다. 영명 10년에 즉위하여 30년을 다스렸다. 정광 2년 신축 4월 7일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각간의 딸 숙으로 왕자 구형을 낳았다.
仇衡王
金氏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年 保定二年壬午九月 新羅第二十四君眞興王 興兵薄伐 王使親軍卒 彼衆我寡 不堪對戰也 仍遣同氣脫知爾叱今留在於國 王子上孫卒支公等 降入新羅 王妃分叱水爾叱女桂花 生三子 一世宗角干 二茂刀角干 三茂得角干開皇錄云 梁中大通四年壬子 降于新羅
구형왕
김씨로 정광 2년에 즉위하여 42년을 다스렸다. 보정 2년 임오 9월 신라 제 24대 임금인 진흥왕이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왕이 직접 군졸을 부렸다.(군졸을 지휘하였다.) 그들(신라 군대)은 많고 우리는 적어 서로 맞싸우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이에 동기 탈지이질금을 보내 나라에 남아있게 하고, 왕자, 상손(장손) 졸지공 등과 함께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의 딸 계화로 세 아들을 낳았으니 첫째는 세종각간, 둘째는 무도각간, 셋째는 무득각간이다. 개황력에 이르기를 “양 중대통 4년 임자에 신라에 항복했다.”한다.
議曰 案三國史 仇衡以梁中大涌(通)四年壬子 納土投羅 則計自首露初卽位東漢建武十八年壬寅 至仇衡末壬子 得四百九十年矣 若以此記考之 納土在元魏保定二年壬午 則更三十年 總五百二十年矣 今兩存之
三國遺事卷第二(終)
논의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를 살펴보니 구형은 양 중대통 4년 임자에 땅을 바쳐 신라에 들어왔으니 곧 계산하면 수로왕이 즉위한 동한 건무 18년 임인에서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에 이르기까지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으로서 상고해보면 땅을 준 것은 원위 보정 2년 임오에 있었으니 곧 30년을 고치면(더하면) 모두 520년이다. 지금 둘을 함께 적어둔다.
삼국유사 권제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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