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遺事卷第三
興法第三
順道肇麗(道公之次 亦有法深義淵曇嚴之流 相繼而興敎 然 古傳無文 今亦不敢編次 詳見僧傳)
高麗本記云 小獸林王卽位二年壬申 乃東晉咸安二年 孝武帝卽位之年也 前秦符堅遣使及僧順道 送佛像經文(時堅都關中 卽長安) 又四年甲戌 阿道來自晋 明年乙亥二月 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高麗佛法之始僧傳作二道來自魏云者 誤矣 實自前秦而來 又云肖門寺今興國 伊弗蘭寺今興福 亦誤 按 麗時都安市城 一名安丁忽 在遼水之北 遼水一名鴨淥 今云安民江 豈有松京之興國寺名! 讚曰 鴨淥春深渚草鮮 白沙鷗鷺等閑眠 忽驚柔櫓一聲遠 何處漁舟客到烟
삼국유사 권제3
흥법제3
순도조려(도공(순도)의 다음에 또 법심, 의연, 담엄의 류가 있는데 서로 이어 불교를 일으켰으나 옛 전함에 글이 없어 지금 또한 감히 순서에 따라 편집할 수 없다. 자세한 것은 승전(해동고승전)에 보인다.)
고려본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소수림왕 즉위 2년 임신은 곧 동진 함안 2년 효무제가 즉위한 해이다.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보내고 불상과 불경을 보냈다.(이때 부견은 관중에 도읍하였으니 곧 장안이다.) 또 4년 갑술에 아도가 진으로부터 왔다. 다음해 을해 2월에 초문사를 짓고, 순도를 두었고. 또 이불란사를 지어 아도를 두게 하였다. 이것이 고려 불법의 시작이다. 승전에 두 도(순도와 아도)가 위나라에서 왔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실제는 전진에서 온 것이다. 또 초문사는 지금의 흥국사이고, 이불란사는 지금의 흥복사라 한 것도 또한 잘못이다. 살펴보니 고구려의 당시 도읍은 안시성이며 다른 이름은 안정홀로 요수의 북쪽에 있다. 요수는 압록이라고도 이름하는데 지금의 안민강을 말하는 것이니 어찌 송경(개성)의 흥국사의 이름이 있을 수 있으랴! 기려 말한다.
압록강에 봄이 깊으니 물풀은 선명하고(곱고)
백사장의 갈매기 한가로이 존다.
문득 저 멀리 들리는 노 젓는 소리!
어느 곳 고깃배인지 길손이 벌써 이르렀다.
難陁闢濟
百濟本記云 第十五(僧傳云十四 誤)沈流王卽位甲申(東晋孝武帝大元九年) 胡僧摩羅難陁自晋 迎置宮中禮敬 明年乙酉 創佛寺於新都漢山州 度僧十人 此百濟佛法之始 又阿莘王卽位大元十七年二月 下敎崇信佛法求福 摩羅難陁 譯云童學(其異跡詳見僧傳) 讚曰 天造從來草昧間 大都爲伎也應難 翁翁自解呈歌舞 引得旁人借眼看
백제 본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 15(승전에 14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침류왕 즉위 갑신(동진 효무제 대원 9년)에 호승 마라난타가 진에서 오니 맞이하여 궁중에 두고 예경하였다. 다음해 을유에 불사(절을)를 새로운 도읍 한산주에 세우고 중 10명을 두었는데 이것이 백제 불교의 시작이다. 또 아신왕 즉위 대원 17년 2월 명을 내려 불교를 높이고 믿어 복을 구하라고 했다. 마라난타를 번역하면 동학(그 기이한 자취는 승전에 자세히 보인다.) 기려 말한다.
하늘의 조화는 예부터 아득하니
대개 잔재주로 솜씨보기 어려워라.
어른들은 스스로 노래와 춤으로
옆 사람을 이끌어 눈뜨게 했네.
阿道基羅(一作我道 又阿頭)
新羅本記第四云 第十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麗至一善郡 郡人毛禮(或作毛祿) 於家中作堀室安置 時梁遣使賜衣著香物(高得相詠史詩云 梁遣使僧曰元表 宣送溟檀及經像)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遍問國中 墨胡子見之曰 此之謂香也 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神聖未有過於三寶 若燒此發願 則必靈應(訥祗在晋宋之世 而云梁遣使 恐誤)
아도기라(한편 아도, 또 아두라 쓰기도 한다)
신라본기 제4에 말하였다. 제 19 눌지왕 때 사문 묵호자가 고려(고구려)에서 일선군에 이르니 일선군 사람 모례(모록이라 쓰기도 한다.)가 집 안에 굴을 만들고 편안히 있게 하였다. 그 때 양나라가 사신을 보내 옷과 향(고득상의 영사시에 말하였다. 양나라가 사자인 중 원표를 보내 명단과 불상을 보냈다고 한다.) 임금과 신하가 그 향의 이름과 그 쓰이는 바를 알지 못하여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나라 안을 두루 돌며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는 향이라 하는데 그것을 태우면 곧 향기가 짙게 풍기는데 이는 정성이 신성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신성함으로는 삼보보다 나은 것이 있지 않습니다. 만약 이를 사르며 소원을 빌면 곧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눌지는 진과 송의 시대에 있었으니 양나라가 사자를 보냈다고 한 것은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時 王女病革 使召墨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喜 厚加賚貺 俄而不知所歸 又至二十一毗處王時 有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疾而終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有注云 與本碑及諸傳記殊異 又高僧傳云西竺人 或云從吳來)
그 때 왕녀가 병이 들자 묵호자를 부르게 하여 향을 사르며 축원하게 하였더니 왕녀의 병이 나았다. 왕이 기뻐하며 후하게 주었는데 갑자기 돌아간 바를 알지 못하였다. 또 21대 비처왕 땡에 이르러 아도화상이 시자 세 명과 또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몇 년이 지나 병 없이 죽었다. 그 시자 세 사람이 머물면서 경과 율을 강독하니 종종 믿고 받드는 자가 있었다.(주에 “본비와 여러 전기가 다르다.”고 했다. 또 고승전에 “서천축 사람이라 했고, 혹은 오나라에서 왔다.”했다.)
按我道本碑云 我道高麗人也 母高道寧 正始間 曹魏人我(姓我也)堀摩奉使句麗 私之而還 因而有娠 師生五歲 其母令出家 年十六歸魏 省覲堀摩 投玄彰和尙講下就業 年十九又歸寧於母 母謂曰 此國于今不知佛法 爾後三千餘月 鷄林有聖王出 大興佛敎 其京都內有七處伽藍之墟 一曰金橋東天鏡林(今興輪寺 金橋謂西川之橋 俗訛呼云松橋也 寺自我道始基而中廢 至法興王丁未草創 乙卯大開 眞興王畢成) 二曰三川歧(今永興寺 與興輪開同代)
아도본비를 살펴보니 아도는 고려(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이다. 정시 연간에 조위 사람인 아(성이 아씨이다.)굴마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그와 사통하고 돌아갔다. 이로 인하여 잉태하였다. 스님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 어머니가 출가하게 하였다. 나이 16세에 위나라로 가서 아굴마를 뵙고 현창화상이 강독하는 곳에 들어 가 불교를 배웠다. 나이 19세에 또 돌아와 어머니를 뵈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이 나라는 지금 불법(불교)을 알지 못하는데 이후 3000여 달이 지나면 계림에 성스러운 임금이 있어 크게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그 서울 안에 일곱 개의 절터가 있는데 첫째는 금교 동쪽 천경림(자금의 흥륜사이다. 금교는 서천의 다리를 말하는데 속명으로는 송교라 한다. 절은 아도가 처음 터를 잡았는데 중간에 중지되었다가 법흥왕 정미년에 이르러 짓기 시작하고, 을묘년에 크게 열고, 진흥왕이 공사를 마치고 이루었다.) 둘째는 삼천기(지금의 영흥사이다. 흥륜사와 같은 대에 열었다.)이다.
三曰龍宮南(今黃龍寺 眞興王癸酉始開) 四曰龍宮北(今芬皇寺 善德甲午始開) 五曰沙川尾(今靈妙寺 善德王乙未始開) 六曰神遊林(今天王寺 文武王己卯開) 七曰婿請田(今曇嚴寺) 皆前佛時伽藍之墟 法水長流之地 爾歸彼而播揚大敎 當東嚮於釋祀矣 道禀敎至雞林 寓止王城西里 今嚴莊寺 于時未雛王卽位二年癸未也 詣闕請行敎法 世以前所未見爲嫌 至有將殺之者 乃逃隱于續林(今一善縣)毛祿家(祿與禮形近之訛 古記云 ?法師初來毛祿家 時天地震驚 時人不知僧名而云阿頭彡麽 彡麽者乃鄕言之稱僧也 猶言沙彌也?)
셋째는 용궁남(지금의 황룡사이다. 진흥왕 계유년에 처음 열었다.)이다. 넷째는 용궁북(지금의 분황사이다. 선덕왕 갑오년에 처음 열었다.) 다섯째는 사천미(지금의 영묘사이다. 선덕왕 을미년에 처음 열었다.) 여섯째는 신유림(지금의 천왕사이다. 문무왕 기묘년에 열었다.) 일곱째는 서청전(지금의 담엄사이다.)이다. 모두 전불(석가모니 이전의 부처) 때의 절터로 불법이 길이 흐를 땅이다. 네가 거기에 가 대교(불교)를 전파하면 마땅히 부처에게 드리는 공양이 동쪽으로 향할 것이다. 했다. 아도가 명을 받고 계림에 이르러 왕성 서쪽 마을에서 살았으니 지금의 엄장사이다. 이때는 미추왕 즉위 2년 계미이다. 대궐에 나아가 교법(불교)을 행할 것을 청하였다. 세상에서는 앞서 보지 못한 바이기 때문에 의심하여 장차 죽이려는 자가 있기에 이르렀다. 이에 도망하여 속림(지금의 일선현) 모록의 집(록과 예의 글자 형태가 비슷하여 생긴 잘못일 것이다. 고기에 ‘법사가 처음 모록의 집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중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하여 아두삼마라 불렀다. 삼마는 곧 우리말에 중을 말하는 것이니 사미라는 말과 같다.’했다.)으로 도망하여 숨었다.
三年 時 成國公主疾 巫醫不效 勅使四方求醫 師率然赴闕 其疾遂理 王大悅 問其所須 對曰 ?貧道百無所求 但願創佛寺於天鏡林 大興佛敎 奉福邦家爾? 王許之 命興工 俗方質儉 編茅葺屋 住而講演 時或天花落地 號興輪寺 毛祿之妹名史氏 投師爲尼 亦於三川歧 創寺而居 名永興寺 未幾 末雛王卽世 國人將害之 師還毛祿家 自作塚 閉戶自絶 遂不復現 因此大敎亦廢 至二十三法興大王 以蕭梁天監十三年甲午登位 乃興釋氏 距末雛王癸未之歲二百五十二年 道寧所言三千餘月 驗矣 據此本記與本碑 二說相戾不同如此
3년 그 때 성국공주가 병에 걸렸는데 무당과 의원의 효험이 없자 칙사를 사방에 보내 의원을 구하였다. 스님이 급히 대궐에 나아가 그 병을 다스렸다(고쳤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그 필요한 바를 물으니 대답해 말하기를 ‘빈도는 구하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불사(절)을 천경림에 지어 크게 불교를 일으키고 나라의 복을 받들기를 원할 뿐입니다.’했다. 왕이 그것을 허락하고 공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풍속은 질박하고 검소하여 띠풀 집을 지어 살면서 불법을 강연하니 혹 하늘의 꽃이 땅에 떨어졌다. 절을 흥륜사라 불렀다. 모록의 누이 이름은 사씨인데 스님에게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는데 또한 삼천기에 절을 짓고 살면서 영흥사라 이름했다. 얼마되지 않아 말(미)추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 하자 모록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파 문을 닫고 스스로 끊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교(불교)가 또 중지되었다. 23대 법흥대왕이 소량 천감13년 갑오에 왕위에 올라 불교를 일으키니 미추왕 계미년으로부터 252년 사이가 있다. 이로면 고도령이 말한 3000여 월이 증명된 것이다. 여기서 본기와 본비에 의거하면 두 말이 어그러져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嘗試論之 梁唐二僧傳 及三國本史皆載 麗濟二國佛敎之始 在晋末大元之間 則二道法師 以小獸林甲戌 到高麗明矣 此傳不誤 若以毗處王時方始到羅 則是阿道留高麗百餘歲乃來也 雖大聖行止出沒不常 未必皆爾 抑亦新羅奉佛 非晩甚如此 又若在末雛之世 則却超先於到麗甲戌百餘年矣 于時 雞林未有文物禮敎 國號猶未定 何暇阿道來請奉佛之事? 又不合高麗未到而越至于羅也 設使暫興還廢 何其間寂寥無聞 而尙不識香名哉! 一何大後 一何大先 揆夫東漸之勢 必始于麗濟而終乎羅 則訥祗旣與獸林世相接也 阿道之辭麗抵羅 宜在訥祗之世
시험삼아 논의해 본다. 양과 당의 두 승전과 삼국본사에 모두 실려 있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불교의 시작이 진나라 말 대원 연간에 있으니 곧 두 도(순도와 아도) 법사가 소수림왕 갑술에 고구려에 이른 것은 분명하다. 이 전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만약 비처왕 때 바야흐로 처음 신라에 이르렀다면 곧 이는 아도가 고구려에 100여년을 머물다 온 것이 된다. 비록 대성인일지라도 행동거지와 출몰이 보통과 다르다 할지라도 반드시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또 신라 신라가 부처를 받든 것이 이 같이 늦음이 심한 것은 아닐 것이다. 또 만약 말추(미추)의 대에 있었다면 고구려에 이른 것보다 100여년 앞선다. 이 때 계림은 아직 문물과 예교가 있지 않았고, 국호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느 틈에 아도가 와 부처를 받드는 일을 청하였겠는가? 또 고구려에도 이르지 않았는데 넘어 신라에 이르렀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가령 잠간 (불교가)일어났다가 폐해졌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사이에 적적하고 고요하여 들음이 없고, 향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였겠는가? 하나는 어찌 크게 뒤지고, 하나는 어찌 크게 앞선단 말인가? 불교가 동쪽으로 무젖어가던 형세는 반드시 고구려, 백제에서 시작하고 신라에서 마쳤을 것이다. 곧 눌지왕은 이미 소수림왕과 시대가 서로 접하니 아도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에 이른 것은 눌지의 시대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又王女救病 皆傳爲阿道之事 則所謂墨胡者非眞名也 乃指目之辭 如梁人指達摩爲碧眼胡 晋調釋道安爲柒道人類也 乃阿道危行避諱 而不言名姓故也 蓋國人隨其所聞 以墨胡阿道二名 分作二人爲傳爾 況云阿道儀表似墨胡 則以此可驗其一人也 道寧之序七處 直以創開先後預言之 兩傳失之 故今以沙川尾躋於五次 三千餘月 未必盡信書 自訥祗之世 抵乎丁未 无慮一百餘年 若曰一千餘月 則殆幾矣 姓我單名 疑贗難詳
또한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로 전하니 곧 이른바 묵호자는 진실된 이름이 아니라 곧 지목하는 말일 것이다. 마치 양나라 사람들이 달마를 가리켜 벽안호라 하고, 진나라에서는 중 도안을 불러 칠도인이라 한 것과 같은 것이다. 곧 아도의 고상한 행동으로 피하여 성명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개 나라 사람들이 그 들은 바에 따라 묵호, 아도 두 이름으로서 나누어 두 사람으로 지어 전하였을 뿐이다. 하물며 아도의 모습이 묵호와 비슷하다고 하다고 하니 곧 이로서 그가 한 사람임을 징험할 수 있다. 도령이 일곱 곳을 차례한 것은 바로 절은 짓는 선후로서 미리 말한 것이다. 두 전(승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지금 사천미를 다섯 번째에 올린 것이다. 3000여 달이란 것도 반드시 글을 모두 믿을 필요는 없다. 눌지의 대로부터 정미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년이 된다. 만일 1000여 달이라 말한다면 곧 자못 가까울 것이다. 성씨를 아라 하고, 외자 이름은 거짓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又按元魏釋曇始(一云惠始)傳云 始關中人 自出家已後 多有異迹 晋孝武大元九年末 齎經律數十部 往遼東宣化 現授三乘 立以歸戒 盖高麗聞道之始也 義熙初復還關中 開導三輔 始足白於面 雖涉泥水 未嘗沾濕 天下咸稱白足和尙云 晋末 朔方凶奴赫連勃勃 破獲關中 斬戮無數 時始亦遇害 刀不能傷 勃勃嗟嘆之 普赦沙門 悉皆不殺 始於是潛遁山澤 修頭陁行 拓拔燾復剋長安 擅威關洛 時有博陵崔皓 小習左道 猜嫉釋敎 旣位居僞輔 爲燾所信 乃與天師寇謙之說燾 佛敎無益 有傷民利 勸令廢之云云
또 원위 중 담시(한편 혜시라 한다.)전에 말하였다. 담시는 관중 사람이다. 출가한 이후로부터 기이한 자취가 많이 있었다. 진 효무제 대원 9년 말 경장과 율장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에 가 교화를 베풀고, 삼승을 드러내 주어 불계에 귀의하게 하였다. 대개 고구려가 도(불교의 교리)를 들은 시작일 것이다. 의희 초 다시 관중으로 돌아가 삼보지역을 깨우쳐 인도하였다. 담시는 발이 얼굴보다 희어서 비록 진흙물을 건너도 일직이 더러워지고 젖지 않았다. 천하가 모두 백족화상이라 불렀다. 진 말기에 북쪽 흉노족 혁련발발이 관중을 깨트리고 빼앗아 베어 죽인 것이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 때 담시가 또한 해침을 당했으나 칼이 상하게 하지 못하였다. 혁련발발이 감탄하여 모든 중들을 놓아주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담시가 이에 산과 늪에 숨어 두타행을 닦다가 척발도가 장안을 회복하여 이기고 위세를 관중과 낙양에 함부로 행사하였다. 그 때 박릉에 최호가 있었는데 어려서 좌도(도교)를 익혀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였다. 지위가 위보에 있은 뒤 척발도에게 믿음을 받자 곧 천사(도교의 교주) 구겸지와 함께 척발도에게 “불교는 이익이 없고, 백성의 이익을 해침이 있을 뿐입니다.”하고, 불교를 폐하게 할 것을 권하였다. 한다.
大平之末 始方知燾將化時至 乃以元會之日 忽杖錫到宮門 燾聞令斬之 屢不傷 燾自斬之亦無傷 飼北園所養虎 亦不敢近 燾大生慚懼 遂感癘疾 崔寇二人 相次發惡病 燾以過由於彼 於是誅滅二家門族 宣下國中 大張佛法 始 後不知所終 議曰 曇始以大元末到海東 義熙初還關中 則留此十餘年 何東史無文? 始旣恢詭不測之人 而與阿道墨胡難陁 年事相同 三人中疑一必其變諱也 讚曰 雪擁金橋凍不開 雞林春色未全廻 可怜靑帝多才思 先着毛郞宅裏梅
대평 말에 담시는 비로소 척발도를 교화할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이에 정원 초하루 날에 홀연히 지팡이를 짚고 대궐 문에 이르니 척발도가 듣고 베어 죽이게 하였다. 여러 번 하여도 상하게 하지 못하자 척발도가 스스로 베려하였으나 또한 해치지 못하였다. 북쪽 정원에서 기르던 호랑이에게 먹게 하였으나 호랑이가 감히 가까이가지 않았다. 척발도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크게 생겨 마침내 여질(열병)에 걸렸다.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도 서로 차례로 나쁜 병이 났다. 척발도는 허물이 그들(최호와 구겸지)에게서 말미암았다 여겨 이에 두 가문의 종족을 베어 죽여 없애고, 나라 안에 크게 불법(불교)를 펼 것을 선언하였다. 담시가 후에 죽은 곳을 알지 못한다. 논평하여 말한다. 담시는 대원 말에 해동에 이르러 의희 초에 관중에 돌아갔으면 곧 여기(해동)에서 10여년을 머물렀는데 어찌하여 동국 역사에 글이 없는가? 담시는 이미 괴이하고 이상하여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인데 연대와 사적이 서로 같으니 세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름을 바꾼 것이 틀림없다.
讚曰 雪擁金橋凍不開 雞林春色未全廻 可怜靑帝多才思 先着毛郞宅裏梅
기려 말한다.
금교에 눈 쌓이고 얼어 풀리지 않고
계림의 봄 색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어여뻐라 봄의 신 재능도 많구나.
모랑의 집에 매화꽃이 먼저 피게 했다.
原宗興法(距訥祗世一百餘年) 厭髑滅身
新羅本記 法興大王卽位十四年 小臣異次頓爲法滅身 卽蕭梁普通八年丁未 西竺達摩來金陵之歲也 是年 朗智法師亦始住靈鷲山開法 則大敎興衰 必遠近相感一時 於此可信 元和中 南澗寺沙門一念 撰髑香墳禮佛結社文 載此事甚詳 其畧曰 昔在法興大王垂拱紫極之殿 俯察扶桑之域 以謂?昔漢明感夢 佛法東流 寡人自登位 願爲蒼生 欲造修福滅罪之處?
원종흥법(눌지로부터 100여년이 떨어졌다. 염촉멸신
신라본기에 보면 법흥대왕 즉위 14년 소신 이차돈이 법(불교)을 위해 자신을 죽였다. 곧 소양 보통 8년 정미 서천축의 달마가 금릉에 온 해이다. 이 해는 낭지법사가 또한 처음 영취산에 머물며 법을 열었던 해이다. 곧 대교(불교)의 흥하고 쇠퇴함은 반드시 멀고 가까운 곳에서 한 시기에 서로 감응하는 것을 여기에서 믿을 수 있다.(알 수 있다.) 원화 중(연간)에 남간사 중 일념이 촉향분예불결사문을 지었는데 이 일이 매우 자세하게 실려 있다. 대략적으로 말한다. 옛날 법흥대왕이 자극전에서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팔짱을 끼고 있을 때(왕위에 올랐을 때) 부상(동쪽)지역을 굽어 살피고 말하기를 ‘옛날 한나라 명제가 꿈에 감응하여 불법(불교)이 동쪽으로 흘렀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 백성을 위해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 지을 것을 원하였다.’했다.
於是 朝臣(鄕傳云 工目謁恭等)未測深意 唯遵理國之大義 不從建寺之神略 大王嘆曰 ?於戱! 寡人以不德 丕承大業 上虧陰陽之造化 下無黎庶之歡 萬機之暇 留心釋風 誰與爲伴?? 粤有內養者 姓朴字厭髑(或作異次 或云伊處 方音之別也 譯云厭也 髑頓道覩獨等皆隨書者之便 乃助辭也 今譯上不譯下 故云厭髑 又厭覩等也) 其父未詳 祖阿珍宗 卽習寶葛文王之子也(新羅官爵凡十七級 其第四曰波珍喰 亦云阿珍喰也 宗其名也 習寶亦名也 羅人凡追封王者 皆稱葛文王 其實 史臣亦云未詳 又按金用行撰阿道碑 舍人時年二十六 父吉升 祖功漢 曾祖乞解大王)
이에 조정의 신하(향전에는 공목, 알공 등이라 했다.) 미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오직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만 따를 뿐 설을 세움의 신 같은 뜻을 따르지 않았다. 법흥대왕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아! 나는 덕이 없는 이로서 대업(왕위)을 이었다. 위로는 음과 양의 조화를 무너뜨렸고, 아래로는 백성의 기뻐함이 없다. 정사를 보는 여가에 마음을 불교에 두었으니 누가 함께 따르겠는가?’했다. 내양자가 있었는데 성은 박씨이고, 자는 염촉(혹은 이차라 쓰고 혹은 이처라 하는데 방음의 다르다. 한자로 번역하여 염이라 한 것이다. 촉, 돈, 도, 도, 독 등은 모두 글을 쓰는 자의 편의를 따른 것이니 곧 조사이다. 지금 윗 글자는 번역하고 아래 글자는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염촉이라 말하고, 또 염도 등이라 한 것이다.) 그 아버지는 자세하지 않다. 할아버지는 이진종으로 곧 습보갈문왕의 아들이다.(신라 관작은 모두 17등급인데 제 4등급을 파진찬이라 하고, 또는 아진찬이라고 한다. 종은 그 이름이고, 습보 또한 이름이다. 신라 사람들은 모든 추봉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 하였다. 그 실제는 사관도 또한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한다. 또 김용행이 지은 아도비를 살펴보니 사인은 그 때 나이 26세로 아버지는 길승이고, 할아버지는 공한이고, 증조는 걸해대왕이라 했다.)
挺竹柏而爲質 抱水鏡而爲志 積善曾孫 望宮內之爪牙 聖朝忠臣 企河淸之登侍 時年二十二 當充舍人(羅爵有大舍小舍等 蓋下士之秩) 瞻仰龍顔 知情擊目 奏云 ?臣聞古人 問策蒭蕘 願以危罪啓諮? 王曰 ?非爾所爲? 舍人曰 ?爲國亡身 臣之大節 爲君盡命 民之直義 以謬傳辭 刑臣斬首 則萬民咸伏 不敢違敎?
(박염촉은) 대나무와 잣나무 같은 자질과 수경과 같은 뜻을 품었으며 선을 쌓은 집안의 증손으로 궁 안의 왕을 보좌하는 무신이 되기를 희망하였고, 성스러운 조정의 충신으로 하청에 등시할 것을 기대했다. 그 때 나이 22세로 사인(신라의 관작에 대사, 소사 등이 있는데 대개 하사의 등급이다.)의 직책에 있었는데 왕의 얼굴을 우러러보고 실정을 눈치 채어 알고는 아뢰어 말하기를 “신이 옛 사람에게 들으니 꼴 베는 사람과 나무하는 사람에게도 계책을 묻는다.”고 합니다. 큰 죄를 무릅쓰고 여쭙기를 원합니다.’ 했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할 바가 아니다.” 했다. 사인이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이고, 임금을 위해 목숨을 다하는 것은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잘못 말을 전한 것으로서 신을 죄주어 머리를 벤다면 곧 모든 백성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했다.
王曰 ?解肉枰軀 將贖一鳥 洒血摧命 自怜七獸 朕意利人 何殺無罪! 汝雖作功德 不如避罪? 舍人曰 ?一切難捨 不過身命 然 小臣夕死 大敎朝行 佛日再中 聖主長安? 王曰 ?鸞鳳之子 幼有凌霄之心 鴻鵠之兒 生懷截波之勢 爾得如是 可謂大士之行乎!? 於焉 大王權整威儀 風刁東西 霜仗南北 以召群臣 乃問 ?卿等於我欲造精舍 故作留難?(鄕傳云 髑爲以王命傳下興工創寺之意 群臣來諫 王乃責怒於髑 刑以僞傳王命)
왕이 말하기를 “자기의 고기를 베어내어 저울에 달아 한 마리 새를 살리려 하였고, 피를 뿌려 목숨을 끊어 스스로 일곱 마리 짐승을 불쌍하게 여겼다. 짐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것인데 어찌 죄 없는 이를 죽이겠는가! 너는 비록 공덕을 남기려는 것이지만 죄를 피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했다. 사인이 말하기를 “일체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신명에 지나지 않으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 대교(불교)가 아침에 행해지면 불교가 다시 일어나 성스러운 임금께서는 길이 편안해 질 것입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난새와 봉황의 새끼는 어려서부터 하늘을 뚫을 마음이 있고, 홍곡의 새끼는 나면서부터 물결을 끊을 기세를 품고 있다. 네가 이 같음을 얻었으니 대사(보살)의 행실이라 할 만하구나!”했다. 이에 대왕이 일부러 위의를 정돈하고 동쪽과 서쪽에 바람을 일으킬 만한 칼을 두고, 남쪽과 북쪽에 서릿발 같은 장대를 두고(무시무시한 형벌도구를 벌여놓고) 여러 신하를 불러 묻기를 “경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하는 것을 일부러 지연시켰다.(향전에는 ‘염촉이 왕의 명으로 공사를 일으켜 절을 지으려는 뜻을 전하자 여러 신하들이 와서 간하였다. 왕이 이에 노하여 염촉을 꾸짖고 거짓으로 왕의 명령을 전하였기 때문에 형벌을 주었다.’ 한다.)
於是 群臣戰戰兢懼 傯侗作誓 指手東西 王喚舍人而詰之 舍人失色 無辭以對 大王忿怒 勅令斬之 有司縛到衙下 舍人作誓 獄吏斬之 白乳湧出一丈(鄕傳云 舍人誓曰 ?大聖法王 欲興佛敎 不顧身命 多卻結緣 天垂瑞祥 遍示人庶? 於是 其頭飛出 落於金剛山頂云云)
이에 여러 신하들이 무서워 벌벌 떨며 두려워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며 황망히 맹세하며 동쪽과 서쪽을 가리켰다. 왕이 사인을 불러 꾸짖었다. 사인이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로서 대답하지 못하였다. 대왕이 분노하여 명을 내여 베어 죽이라 했다. 담당 관리가 묶어 관청에 이르니 사인이 맹세를(맹세하는 글을 지었다.) 하였다. 옥리가 베어 죽이니 흰 젖이 일장이나 솟아 나왔다.(향전에 사인이 맹서해 말하기를 “크게 성스러운 법왕께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시니 신명을 돌아보지 않고, 맺은 인연을 많이 버리니 하늘에서 상서로움이 드리워 두루 사람들에게 보여주십시오.”했다. 이에 그 머리가 날아나가 금강산 정상에 떨어졌다고 말한다.)
天四黯黲 斜景爲之晦明 地六震動 雨花爲之飄落 聖人哀戚 沾悲淚於龍衣 冢宰憂傷 流輕汗於蟬冕 甘泉忽渴 魚鼈爭躍 直木先折 猿猱群鳴 春宮連鑣之侶 泣血相顧 月庭交袖之朋 斷膓惜別 望柩聞聲 如喪考妣 咸謂?子推割股 未足比其苦節 弘演刳腹 詎能方其壯烈 此乃扶丹墀之信力 成阿道之本心 聖者也? 遂乃葬北山之西嶺(卽金剛山也 傳云 頭飛落處 因葬其地 今不言何也?) 內人哀之 卜勝地 造蘭若 名曰刺楸寺 於是 家家作禮 必獲世榮 人人行道 當曉法利 眞興大王卽位五年甲子 造大興輪寺(按國史與鄕傳 ?實 法興王十四年丁未始開 二十一年乙卯大伐天鏡林 始興工 梁棟之材 皆於其林中取足 而階礎石龕皆有之 至眞興王甲子寺成? 故云甲子僧傅云七年 誤)
하늘이 어두워져 기운 햇살이 어두워지고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내렸다. 성인이 슬퍼하여 눈물이 임금의 옷을 적셨다. 재상들은 근심하고 마음이 아파 가 땀이 선면에 흘러 배어나왔다. 감천은 홀연히 마르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고, 곧은 나무가 먼저 부러지니 원숭이들이 무리지어 울었다. 춘궁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하던 벗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 돌아보고 월정에서 서로 소매를 마주하던 벗들이 창자가 끊어지듯 이별하였다. 관을 바라보며 우는 소리가 및;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듯했다. 모두 이르기를 “개자추가 다리 살을 벤 일도 그 굳은 절개에 견주기 충분하지 않고, 홍연이 배를 가른 것도 어찌 그 장렬함에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 이는 곧 단위(붉은 칠을 한 궁전 앞 섬돌, 임금)의 신력을 붙들어 아도의 본래 마음을 이루었으니 성스러운 자이다. 했다.) 마침내 북산의 서쪽 고개(곧 금강산이다. 전에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그 땅에 장례한 것이다. 지금 말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내인들이 슬퍼하여 좋은 땅을 가려 난야(절)를 짓고 자추사라 이름했다. 집들이 예를 지으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었고, 사람들이 도를 행하면 마땅히 법의 이익을 깨달았다. 진흥대왕 즉위 5년 갑자에 대흥륜사(국사와 향전을 살펴보니 ‘실제는 법흥왕 14년 정미에 처음 열고(터를 닦고) 21년 을묘에 크게 천경림을 베어내고 처음 공사를 일으켰는데 들보와 기둥의 재목은 모두 그 숲에서 충분히 취하였다. 계단과 주춧돌, 석감도 모두 두었다. 진흥왕 갑자에 이르러 절이 이루어졌다.’ 했다. 그러므로 갑자라 한 것이다. 승전에서 7년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大淸之初 梁使沈湖將舍利 天嘉六年 陳使劉思幷僧明觀 奉內經幷次 寺寺星張 塔塔鴈行 竪法幢 懸梵鏡 龍象釋徒 爲寰中之福田 大小乘法 爲京國之慈雲 他方菩薩出現於世(謂芬皇之陳那 浮石寶蓋 以至洛山五臺等是也) 西域名僧降臨於境 由是倂三韓而爲邦 掩四海爲家 故書德名於天?之樹 影神跡於星河之水 豈非三聖威之所致也(謂我道法興厭髑也) 降有國統惠隆法主孝圓金相郎大統鹿風大書省眞怒波珍喰金嶷等 建舊塋 樹豊碑
태청초에 양나라 사신 심호가 사리를 가지고 왔다. 천가 6년 진나라 사신 유사와 중 명관이 불경을 받들고 왔는데 절들이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이 기러기가 날아가는 것처럼 늘어서고, 법당을 세우고 범종을 달았다. 용상의 중들은 천하의 복전이 되고, 대승과 소승의 법은 서울의 자운이 되었다. 다른 지방의 보살이 세상에 나와 나타나고(부석사의 진나, 부석사의 보개, 낙산의 오대에 이르기까지가 이것이다.) 서역의 이름있는 중이 경계 오고 이로 말미암아 삼한을 합하여 나라가 되고, 사해가 합하여 한 집안이 되었다. 그러므로 덕명은 천구의 나무에서 쓰이고, 신 같은 자취는 은하수 물에 그림자를 비추니 이것이 어찌 세 성인의 이른 바가 아니라 하겠는가?(아도, 법흥, 염촉을 이른다.) 그 뒤에 국통 혜륭과 법주, 효원 김상랑, 대통 녹풍, 대서성 진노, 파진찬 김의 등이 옛 무덤을 수축하고 큰 비석을 세운다. 했다.
元和十二年丁酉八月五日 卽第四十一憲德大王九年也 興輪寺永秀禪師(于時 瑜伽諸德皆稱禪師) 結湊斯塚禮佛之香徒 每月五日 爲魂之妙願 營壇作梵 又鄕傳云 鄕老每當忌旦 設社會於興輪寺 則今月初五 乃舍人捐軀順法之晨也 鳴呼! 無是君無是臣 無是臣無是功 可謂劉葛魚水 雲龍感會之美歟? 法興王旣擧廢立寺 寺成 謝冕旒披方袍 施宮戚爲寺隸(寺隸至今稱王孫 後至太宗王時 宰輔金良圖信向佛法 有二女曰花寶蓮寶 捨身爲此寺婢 又以逆臣毛尺之族 沒寺爲隸 二族之裔至今不絶) 主住其寺 躬任弘化 眞興乃繼德重聖 承袞職處九五 威率百僚 號令畢備 因賜額大王興輪寺
원화 12년 정유 8월 5일 곧 재 41 헌덕대왕 9년이다. 흥륜사 영수 선사(이때 유가 여러 스님을 모두 선사라 말하였다.) 이 무덤에 예불할 향도를 모아 매월 5일 혼의 현묘한 원을 위해 단을 쌓고, 법회를 열었다. 또 향전에 말하기를 “고을의 노인들이 매 기일 아침에 사를 만들고 흥륜사에 모였다.”했다. 곧 이갈 초 5일은 곧 사인이 몸을 버리고 법(불법)을 따른 새벽이다. 아! 이러한 임금이 없으면 이런 신하가 없고, 이런 신하가 없으면 이런 공이 없을 것이니 유비와 제갈공명, 물과 고기의 관계와 같고, 구름과 용이 서로 감응한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법흥왕은 이미 폐지된 것을 일으켜 절을 세우고, 절이 이루어지자 면류관을 벗고 중이 입는 가사를 입었으며, 궁궐에 있는 친척을 나누어 절의 종으로(사예는 지근의 왕손을 말한다. 후에 태종왕 때에 이르러 재상 김양도가 불법(불교)을 믿었다. (김양도에게는)화보, 연보라는 두 딸이 있었는데, 몸을 버려 이 절의 종이 되게 했다. 또 역신 모척의 종족을 절에 데려다 종으로 삼았다. 두 종족의 후예들이 지금에도 끊어지지 않았다.)로 삼고, (자신이)그 절에 머물며 몸소 널리 교화하였다. 진흥왕은 곧 덕을 이은 성스러운 임금이기 때문에 왕위를 이어 구오(임금의 자리)에 처하여 위엄으로 백관을 통솔하니 위엄이 다 갖추어졌다. 이 때문에 대흥륜사라 사액하였다.
前王姓金氏 出家法雲 字法空(僧傳與諸說亦以王妃出家名法雲 又眞興王爲法雲 又以爲眞興之妃名法雲 頗多疑混)冊府元龜云 姓募 名秦 初興役之乙卯歲 王妃亦創永興寺 慕史氏之遺風 同王落彩爲尼 名妙法 亦住永興寺 有年而終 國史云 建福三十一年 永興寺塑像自壞 眞興王妃比丘尼卒 按 眞興乃法興之姪子 妃思刀夫人朴氏 牟梁里英失角干之女 亦出家爲尼 而非永興寺之創主也 則恐眞字當作法 謂法興之妃巴刁(刀)夫人爲尼者之卒也 乃創寺立像之主故也 二興捨位出家 史不書 非經世之訓也?
전왕은 성이 김씨인데 출가한 이름은 법운이고, 자는 법공(승전의 여러 설에는 또한 왕비도 출가하여 법운이라 이름했다. 또 진흥왕을 법운이라 했고, 또 진응왕의 왕비 이름을 법운이라 하니 의심스럽고 혼동된 것이 많다.) 책부원구에 이르기를 “성은 모이고 이름은 진이다. 처음 역을 일으키던 을묘년에 왕비가 또한 영흥사를 창건하였는데 사씨의 유풍을 사모하여 왕과 같이 낙채(낙발,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어 이름을 묘법이라 하고 또한 영흥사에 머물렀다. 몇 년 지나 죽었다.”했다. 국사에 “건복 31년 영흥사 소상이 저절로 무너지고 진흥왕 왕비 비구니가 죽었다.”했다. 살펴보니 진흥왕은 곧 법흥왕의 조카이고, 왕비는 사도부인 박씨로 모량리 영실각간의 딸인데 또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나 영흥사를 창건한 주인은 아니다. 곧 추측하건데 진자를 마땅히 법이라 쓸 수 있다면 법흥왕의 왕비 파조(도)부인이 비구니가 되었다가 죽은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곧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세운 주인이기 때문이다. 두 흥(법흥왕,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것을 사관이 쓰지 않은 것은 세상을 경영하는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又於大通元年丁未 爲梁帝創寺於熊川州 名大通寺(熊川卽公州也 時屬新羅故也 然恐非丁未也 乃中大通元年己酉歲所創也 始創興輪之丁未 未暇及於他郡立寺也) 讚曰 聖智從來萬世謀 區區輿議謾秋毫 法輪解逐金輪轉 舜日方將佛日高 右原宗 徇義輕生已足驚 天花白乳更多情 俄然一釰身亡後 院院鍾聲動帝京 右厭髑
또 대통 1년 정미에 양나라 황제를 위해 웅천주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대통사라 했다.(웅천은 지금의 공주이다. 그 때 신라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정미가 아니라 곧 중대통 1년 기유년에 창건되었다.) 처음 흥륜사를 창건한 정미에는 아직 다른 군에 절을 세울 틈이 없었다.) 기려 말한다.
성인의 지혜는 만년을 따라 꾀해오니
구구한 여론은 가을 터럭처럼 하찮다.
법륜이 풀려 금륜을 따라 구르니
태평한 세상에 장차 부처의 해가 높이 뜬다.
이상은 원종을 기린 것이다.
의를 따라 삶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이미 놀라기에 충분하고
하늘의 꽃과 흰 젓은 다시 정이 많다.
갑자기 한 칼에 몸이 죽은 후에
절마다 울리는 종소리 서울을 움직이게 한다.
이상은 염촉을 기린 것이다.
法王禁殺
百濟第二十九法王諱宣 或云孝順 開皇十年己未卽位 是年冬 下詔禁殺生 放民家所養鷹鸇之類 焚漁獵之具 一切禁止 明年庚申 度僧三十人 創王興寺於時都泗泚城(今扶餘) 始立栽而升遐 武王繼統 父基子構 歷數紀而畢成 其寺亦名彌勒寺 附山臨水 花木秀麗 四時之美具焉 王每命舟 沿河入寺 賞其形勝壯麗(與古記所載小異 武王是貧母與池龍通交而所生 小名薯蕷 卽位後諡號武王 初與王妃草創也) 讚曰 詔寬䎉䎉千丘惠 澤洽豚魚四海仁 莫辱聖君輕下世 上方兜率正芳春
법왕 금살
백제 제 29대 법왕은 이름을 선이라 하고, 혹은 효순이라 한다. 개황 10년 기미에 즉위하였다. 이 해 겨울 명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백성의 집에서 기르던 매와 새매의 종류와 물고기 잡는 도구를 불살라 일체를 금지하게 하였다. 다음해 경신에 도승 30명을 두었다. 왕흥사를 그 때의 도읍인 사비성(지금의 부여)에 세우려 하여 처음 터를 닦다가 죽었다. 무왕이 왕위를 이어 아버지가 닦은 터에 아들이 일으켜 몇 기(12년)를 지나 완성하였다. 그 절은 또한 미륵사라 이름하였는데 산을 등지고 물을 대하였고, 꽃과 나무가 빼어나고 아름다워 네 계절의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왕은 매번 배를 타고 강을 다라 절에 들어 가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했다.(고기에 실린 것과는 조금 다르다. 무왕은 가난한 어머니가 못의 용과 관계하여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여라하였고, 즉위 후 시호는 무왕이다. 처음에는 왕비와 창건한 것이라 한다.)
기려 말한다.
너그러운 명령으로 짐승을 보호함은 은혜가 천구에 미치고
돼지, 물고기를 흡족하게 하는 은택과 어짐이 사해에 미쳤다.
성스러운 임금이 가벼이 세상을 버렸다 욕하지 마시오.
상방의 도솔천은 바로 봄이 무르익었다오.
寶藏奉老 普德移庵
高麗本記云 麗季武德貞觀間 國人爭奉五斗米敎 唐高祖聞之 遣道士 送天尊像來 講道德經 王與國人聽之 卽第二十七代榮留王卽位七年 武德七年甲申也 明年遣使往唐 求學佛老 唐帝(謂高祖也)許之 及寶藏王卽位(貞觀十六年壬寅也) 亦欲倂興三敎 時寵相蓋蘇文 說王以儒釋並熾而黃冠未盛 特使於唐求道敎 時 普德和尙住盤龍寺 憫左道匹正 國祚危矣 屢諫不聽 乃以神力飛方丈 南移于完山州(今全州也)孤大山而居焉 卽永徽元年庚戌六月也(又本傳云 乾封二年丁卯三月三日也) 未幾國滅(以摠章元年戊辰國滅 則計距庚戌十九年矣) 今景福寺有飛來方丈是也云云(已上國史)
보장봉노 보덕이암
고려본기(고구려본기)에 이르기를 “고구려 말 무덕과 정관 연간에 나라 사람들이 오두미교를 다투어 받들었다. 당나라 고조가 그것을 듣고 도사를 보내 천존상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니 왕과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들었다.”했다. 곧 제27대 영류왕 즉위 7년, 무덕 7년 갑신이다. 다음 해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가 불교와 노장을 배울 것을 청하였다. 당나라 황제(고조를 이른다.)가 허락하였다. 보장왕이 즉위하자(정관 16년 임인이다.) 또한 3교를 나란히 일으키려 하였다. 그 때 총애 받던 재상 개소문이 왕을 설득하여 “유학과 불교는 같이 성하게 일어나지만 황관(도교)는 아직 성대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도록 하십시오.”했다. 그 때 보덕화상은 반룡사에 머물렀는데 좌도(도교)가 바름(불교)에 짝하는 것은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을 민망하게 여겨 여러 번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신력으로 방장을 날려 남쪽의 완산주(지금의 전주이다.) 고대산으로 옮겨 여기에 살았으니 곧 영휘 1년 경술 6월이다.(또 본전에 이르기를 건봉 2년 정묘 3월 3일이다. 했다.)얼마되지 않아 나라가 없어졌다.(총장 1년 무진에 나라가 없어졌다. 곧 계산해보면 경술과는 19년 떨어져 있다.) 지금 경복사에 있는 비래방장이 이것이다.(이상은 국사에 기록된 것이다.)
眞樂公留詩在堂 文烈公著傳行世 又按唐書云 先是 隋煬帝征遼東 有裨將羊皿 不利於軍 將死有誓曰?必爲寵臣滅彼國矣? 及蓋氏擅朝 以盖爲氏 乃以羊皿是之應也 又按高麗古記云 隋煬帝以大業八年壬申 領三十萬兵 渡海來征 十年甲戌十月 高麗王(時第三十六代嬰陽王立二十五年也)上表乞降 時有一人 密持小弩於懷中 隨持表使到煬帝舡中 帝奉表讀之 弩發中帝胸 帝將旋師 謂左右曰
진락공(이자현)은 시를 지어 당에 남겨두었고, 문열공(김부식)은 그의 전기를 저술하였는데 세상에 전한다. 또 당서를 살펴보니 “이에 앞서 수나라 양제가 요동을 정벌할 때 비장 양명이 있어 군대(전쟁이)가 이롭지 않아 장차 죽게 되었을 때 맹세해 말하기를 ‘반드시 총애받는 신하가 되어 그 나라를 없앨 것이다. 했다.”한다. 개씨가 조정을 함부로 함에 이르러 개로 씨를 삼으니 곧 양명이 이것에 부합한다. 또 고려 고기에 “수나라 양제가 대업 8년 임신에 30만 군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정벌하였다. 10년 갑술 10월에 고려왕(그 때는 제 36대 영양왕이 즉위한 25년이다.)이 표를 올려 항복을 청하였다. 그 때 한 사람이 있어 비밀리에 작은 활을 품속에 가지고, 표를 지닌 사신을 따라 양제의 배 안에 이르렀다. 양제가 표를 받아 읽을 때 활을 쏘아 황제의 가슴에 적중시켰다. 양제가 장차 군대를 돌리려 하여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朕爲天下之主 親征小國而不利 萬代之所嗤? 時右相羊皿奏曰 ?臣死爲高麗大臣 必滅國 報帝王之讎? 帝崩後 生於高麗 十五聰明神武 時 武陽王聞其賢(國史榮留王名建武 或云建成 而此云武陽 未詳) 徵入爲臣 自稱姓盖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唐書云 ?盖蘇文自謂莫離支 猶中書令?
‘짐이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소국을 정벌하다 이기지 못하였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다.’했다. 그 때 우상 양명이 아뢰어 말하기를 ‘신이 죽어 고려의 대신이 되어 반드시 나라를 없애 제왕의 원수를 갚겠습니다.’했다. 황제가 죽은 후 고려(고구려)에 태어났다. 15세에 총명하고 신 같은 무용이 있었다. 그 때 무양왕이 그 어짐을 듣고(국사에는 영류왕은 이름이 건무이다. 혹은 건성이라 이르는데 여기서는 무양이라 말하니 자세하지 않다.)불러들여 신하로 삼으니 스스로 성을 개씨, 이름을 금이라 했다. 지위가 소문에 이르렀으니 곧 시중이다.(당서에 “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라 했는데 중서령과같다.)
又按神誌秘詞序云 ?蘇文大英弘序幷注? 則蘇文乃職名 有文證 而傳云?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 金奏曰 ?鼎有三足 國有三敎 臣見國中 唯有儒釋 無道敎 故國危矣? 王然之 奏唐請之 太宗遣叙達等道士八人(國史云 ?武德八年乙酉 遣使入唐求佛老 唐帝許之? 據此則羊皿自甲戌年死 而托生于此 則才年十餘歲矣 而云寵宰說王遣請 其年月必有一誤 今兩存)
또 신지비사 서문을 살펴보면 “소문 대영홍이 서문을 쓰고 아울러 주를 달았다.”했다. 곧 소문은 곧 관직의 이름이다. 문증이 있다. 전에 “‘문인소영홍서’라 하였는데 무엇이 옳은 지 자세하지 않다.) 개금(연개소문)이 아뢰기를 ‘솥에는 세 개의 발이 있고, 나라에는 3교가 있습니다. 신이 나라 안을 보니 오직 유학과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것입니다.’했다. 왕이 그렇다 여기고 당나라에 아뢰어 청한 것이다. 태종이 서달 등 도사 여덟 명을 보냈다.(국사에 ‘무덕 8년 을유에 사신을 보내 당에 들어 가 불교와 도교를 청하니 당나라 황제가 허락하였다.’했다. 이에 근거하면 곧 양명이 갑술년에 죽고 여기에 기대 태어났다면 곧 겨우 나이가 10여세에 총재가 되고, 왕을 설득하여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도교를 청했다고 하는 것은 그 연월일에 반드시 한 가지 잘못이 있을 것이다. 지금 두 가지를 기록해둔다.)
王喜以佛寺爲道館 尊道士 坐儒士之上 道士等行鎭國內有名山川 古平壤城勢新月城也 道士等呪勑南河龍 加築爲滿月城 因名龍堰城 作讖曰龍堰堵 且云千年寶藏堵 或鑿破靈石(俗云都帝嵓 亦云朝天石 蓋昔聖帝騎此石 朝上帝故也) 盖金又奏築長城東北西南 時 男役女耕 役至十六年乃畢 及寶藏王之世 唐太宗親統 以六軍來征 又不利而還
왕이 기뻐하며 불사(절)를 도관으로 하고, 도사를 높여 유사(유학자)의 윗자리에 앉게 하였다. 도사들이 나라 안의 이름 있는 산천을 돌아다니며 진압시켰는데 옛 평양성의 형세가 신월성이라 하여 도사들이 주문을 외워 남하의 용에게 명령하여 만월성을 더해 쌓게하고 용언성이라 이름했다. 참서를 지어 말하기를 “용언도, 또는 천년보장도라 했다. 혹은 영석을 파 깨트리고(민간에서는 도제암이라 하고, 또 조천석이라 하는데 대개 옛날 성제가 이 돌을 타고 상제를 뵈었기 때문이다.) 개금(연개소문)이 또 아뢰어 동북쪽과 서남쪽에 긴 성을 쌓게 했다. 그 때 남자는 부역에 나가고, 여자는 밭을 갈았다. (성 쌓는)부역은 16년에 이르러 마쳤다. 보장왕의 시대에 이르러 당나라 태종이 직접 6군을 통솔해 와서 정벌하였으나 또 이롭지 않아 돌아갔다.
高宗總章元年戊辰右相劉仁軌大將軍李勣新羅金仁問等攻破國滅 擒王歸唐 寶藏王庶子率四千餘家 投于新羅(與國史少殊 故幷錄) 大安八年辛未 祐世僧統到孤大山景福寺飛來方丈 禮普聖師之眞 有詩云涅槃方等敎 傳受自吾師云云 至可惜飛房後 東明古國危 跋云 高麗藏王 惑於道敎 不信佛法 師乃飛房 南至此山 後有神人 現於高麗馬嶺 告人云?汝國敗亡無日矣?
(당나라)고종 총장 1년 무진에 우상 유인궤, 대장군 이적, 신라 김인문 등이 나라를 쳐서 깨트려 없애고 왕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보장왕의 서자가 4천여 가를 이끌고 신라에 들어갔다.(국사와는 조금 다르므로 아울러 기록해 둔다.) 대안 8년 신미에 우세승통이 고대산 경복사 비래방장에 이르러 보덕성사의 인영에 예를 표하고, 시를 지었는데 “열반의 평등한 가르침 우리의 스승으로부터 전해졌다고 말한다. 애석하구나! 방을 날려 온 후 동명의 옛 나라가 위태로워졌다.” 했다. 발문에 말하기를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에 미혹하여 불교를 믿지 않으니 스님이 이에 방을 날려 남쪽으로 이 산에 이르렀다. 후에 신인이 있어 고구려 마령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알려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패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했다.
具如國史 餘具載本傳與僧傳 師有高弟十一人 無上和尙與弟子金趣等 創金洞寺 寂滅義融二師創珍丘寺 智藪創大乘寺 一乘與心正大原等 創大原寺 水淨創維摩寺 四大與契育等 創中臺寺 開原和尙創開原寺 明德創燕口寺 開心與普明亦有傳 皆如本傳
모두 국사와 같고, 나머지도 모두 본전과 승전에 실려 있다. 스님에게는 높은 제자 11 명이 있었는데 무상화상과 제자 김취 등이 금동사를 창건하였고, 적멸, 의융 두 스님은 진구사를 창건하였고, 지수는 대승사를 창건하였고, 일승과 심정, 대원 등은 대원사를 창건하였다. 수정은 유마사를 창건하였고, 사대와 계육 등은 중대사를 창건하였고, 개원화상은 개원사를 창건하였고, 명덕은 연구사를 창건하였고 개심과 보명 또한 전이 있는데 모두 본전과 같다.
讚曰 釋氏汪洋海不窮 百川儒老盡朝宗 麗王可笑封沮洳 不省滄溟徒臥龍
기려 말한다.
불교는 드넓어 바다처럼 끝이 없어, 백천의 유, 도교를 모두 한 곳으로 모은다. 고구려 왕이 가소롭게도 강을 막으려하니 와룡이 넓고 큰 바다로 옮겨감을 살피지 못하였다.
東京興輪寺金堂十聖
東壁坐庚向泥塑 我道 厭髑 惠宿 安含 義湘
西璧坐甲向泥塑 表訓 虫也巴 元曉 惠空 慈藏
동경 흥륜사 금당 10성
동쪽 벽에 앉아 서쪽으로 향한 진흙으로 만든 상으로는 아도, 염촉, 혜숙, 안함, 의상이다. 서쪽 벽에 앉아 동쪽을 향한 진흙으로 만든 상으로는 표훈, 충야파, 원효, 혜공, 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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