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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삼국유사 권제4 의해 제5 원광서학~현유가, 해화엄

by 최인표 2022. 6. 15.

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圓光西學

唐續高僧傳第十三卷載 新羅皇隆寺釋圓光 俗姓朴氏 本住三韓 卞韓辰韓馬韓 光卽辰韓人也 家世海東 祖習綿遠而神器恢廓 愛染篇章 校獵玄儒 討讎子史 文華騰翥於韓服 博贍猶愧於中原 遂割略親朋 發憤溟渤 年二十五 乘舶造于金陵 有陳之世 號稱文國 故得諮考先疑 詢猷了義 初 聽莊嚴旻公弟子講 素霑世典 謂理窮神 及聞釋宗 反同腐芥 虛尋名敎 實懼生涯 乃上啓陳主 請歸道法 有勅許焉 旣爰初落釆 卽禀具戒 遊歷講肆 具盡嘉謀 領牒微言 不謝光景

삼국유사 권제4

의해 제5

원광서학

당속고승전 제13권에 실려 있다. 신라 황륭()사 석 원광은 세속의 성이 박씨로 본래 삼한에서 살았는데 변한, 진한, 마한 중 원광은 진한 사람이다. 집은 대대로 해동에 살았는데 조상의 풍습이 오래 이어져 도량이 넓고 컷으며, 문장을 아끼고 사랑하여 현학(노장사상)과 유학을 섭렵하고, 제자와 사기를 검토하여 우리나라에서 문장이 화려하고 아름다워 (이름이) 높이 날아올랐다. (학문이)넓고 풍성하였으나 아직 중국에는 부끄러웠다.(중국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마침내 부모와 벗을 떠나 큰 바다(중국)에서 마음과 힘을 돋우어 일으키려 하였다. 나이 25세에 배를 타고 금릉에 나아가니 진나라가 있었는데 문국(문명국)이라 일컳었다. 그러므로 먼저 의심나던 것을 묻고, 상고하여 심오한 이치를 물어 뜻을 얻었다. 처음 장엄 민공의 제자로 강의를 들었다. 평소 세속의 전적에 젖어 이치를 궁구하는 데는 신과 같다고 일렀으나 석종(불교)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세속의 학문)썩은 겨자와 같이 여겼다. 명교(불교 이외 학문)를 헛되이 찾은 것은 실로 생애에 두려움이 된다 하여 이에 진나라 임금에게 아뢰어 도법에 돌아 갈 것을 청하니 칙명으로 허락하였다. 이에 처음으로 머리를 깍은 후 구족계를 받고 강석을 두루 찾아 아름다운 도리를 모두 다하고, 미묘한 말들을 습득하는 상태를 사양하지 않았다.(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故得成實涅槃 蘊括心府 三藏釋論 徧所披尋 末又投吳之虎()山 念定相沿 無忘覺觀 息心之衆 雲結林泉 並以綜涉四含 功流八定 明善易擬 筒直難虧 深副夙心 遂有終焉之慮 於卽頓絶人事 盤遊聖迹 攝想靑霄 緬謝終古 時有信士 宅居山下 請光出講 固辭不許 苦事邀延 遂從其志 創通成論 末講般若 皆思解俊徹 嘉問飛移 兼䋴以絢釆 織綜詞義 聽者欣欣 會其心府 從此因循舊章 開化成任 每法輪一動 輒傾注江湖 雖是異域通傳 而沐道頓除嫌郗

그러므로 성실, 열반을 얻어 마음속에 쌓아 간직하고 삼장과 석론을 두루 헤쳐 찾았다. 나중에는 오나라 호()산에 들어 가 염정을 서로 따랐으며 각관을 잊음이 없으니 식심의 무리(중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임천에 모였다. 아울러 사함(4 아함경)을 종합하여 읽으니 공이 팔정에 흘렀다. 명선을 쉽게 헤아렸고, 통직에 어그러짐이 없었으며 마음을 삼가기에 깊이 알맞아 마침내 마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사람의 일을 끊고 성인의 자취를 두루 돌면서 생각을 푸른 하늘(세상 밖)에 두고 영원히 세속과 단절하였다. 그 때 신사가 있어 집이 산 아래 있었는데 원광에게 강의해 줄 것을 청하였으니 굳게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굳게 맞아 가려 하므로 마침내 그 뜻을 따라 성실론을 말하고, 마지막에 반야를 강의하였다. 모든 생각과 풀이가 뛰어나고 아름다운 명예가 날아 옮겨졌다. 겸하여 문채 아름다움으로서 말의 뜻을 엮어 종합하니 듣는 자들이 기뻐하며 그 마음을 모았다. 이로부터 예전의 법을 따라 교화를 여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매 법륜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문득 강과 호수를 기우려 주입하였다.(문득 세상에 주입되어) 비록 다른 지역에서 통하고 전하는 것이나 도에 은택을 입어 싫어하고 꺼림이 갑자기 없어졌다.

 

故名望橫流 播于嶺表 披榛負橐而至者 相接如鱗 會隋后御宇 威加南國 曆窮其數 軍入揚都 遂被亂兵 將加刑戳 有大主將 望見寺塔火燒 走赴救之 了無火狀 但見光在塔前 被縛將殺 旣怪其異 卽解而放之 斯臨危達感如此也 光學通吳越 便欲觀化周秦

그러므로 명망이 널리 퍼져 영표(중국의 남쪽)에까지 퍼졌다. 덤불을 헤치고 부대를 지고 이르는 자들이 서로 붙어 고기비늘과 같았다. 수나라 임금이 다스리는 때를 만나 위엄이 남국에 가해지고, (진나라) 역수가 그 운수를 다하여 군대가 양도(양주)에 들어오니 마침내 난병에 잡혀 장차 죽임을 가해지려할 때 한 대장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 구하려 했다. (가까이 가니) 불난 모습은 없고 다만 원광만이 탑 앞에 있었는데 묶여 장차 죽임을 당하려하고 있었다. 그 이상함을 괴이하게 여겨 곧 풀어주고 놓아주었다. 그 위태로움에 임하여 영감에 이름이 이와 같았다. 원광이 오월에서는 (학문이)통달하였으니 곧 주나라와 진나라의 교화를 보고자 하였다.

 

開皇九年 來遊帝宇 値佛法初會 攝論肇興 奉佩文言 振績微緖 又馳慧解 宣譽京皐 勣業旣成 道東須繼 本國遠聞 上啓頻請 有勅厚加勞問 放歸桑梓 光往還累紀 老幼相欣 新羅王金氏面申虔敬 仰若聖人 光性在虛閑 情多汎愛 言常含笑 慍結不形

개황 9(수나라) 수도에 와 유학하였다. 불법의 처음 법회가 열림을 맞아 섭론이 처음 일어나니 글과 말을 받들어 차고 미묘한 단서를 떨치고 이었다. 또 지혜의 해석을 치달리니 명예가 경고(수나라 서울)에 펴지고 공업이 이미 이루어진 후 도가 동쪽에 반드시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본국(신라)이 멀리서 듣고 수나라 황제에게 아뢰어 돌려보내 줄 것을 자주 청하니 칙령으로 후하게 수고로움을 위문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원광이 여러 해 만에 돌아오자 늙은이에서 어린아이까지 서로 기뻐하고, 신라 왕 김씨가 만나고 정성을 다해 공경하여 마치 성인과 같이 우러렀다. 원광의 뜻은 비우고 한가로이 지내는 데 있었고, 정이 많아 널리 사랑하였다. 말을 하면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而牋表啓書 往還國命 並出自胸襟 一隅傾奉 皆委以治方 詢之道化 事異錦衣 請同觀國 乘機敷訓 垂範于今 年齒旣高 乘輿入內 衣服藥食 並王手自營 不許佐助 用希專福 其感敬爲此類也 將終之前 王親執慰 囑累遺法 兼濟民斯 爲說徵祥 被于海曲 以彼建福五十八年 少覺不念 經于七日 遺誡淸切 端坐終于所住皇隆寺中 春秋九十有九 卽唐貞觀四年也(宜云十四年)

상표문과 계서로 가고 돌아오는 나라의 명이 모두 흉금에서 나오니 한 모퉁이(한 나라)가 온통 받들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모두 맡기고 도로 교화하는 것을 물었다. 일은 비단 옷을 입은 것과는 다르나 함께 나라 볼 것을 청하니 기회를 타고 가르침을 펼쳐 오늘까지도 모범을 드리웠다. 나이가 이미 많아진 후에는 가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가고, 의복, 약과 먹는 것이 모두 왕의 손으로 스스로 마련하고 다른 사람이 돕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드물게도 복을 오로지하니 그 감복하고 공경함이 이러한 류였다. 장차 죽음을 앞두고 왕이 직접 손을 잡고 위로하며 여러 번 법을 남겨 백성을 구제할 일을 물었다. (원광이)자세하게 설명하니 해곡(나라 구석구석)에 미쳤다. 저 건복 58년에 몸이 조금 불편함을 깨닫고 7일이 지나 맑고 간절한 계를 남기고 살고 있던 황룡사 안에서 단정히 앉아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99세로 곧 당나라 정관 4년이다.(마땅히 14년이라 해야 한다.)

 

當終之時 寺東北虛中 音樂滿空 異香充院 道俗悲慶 知其靈感 遂葬于郊外 國給羽儀葬具 同於王禮 後有俗人兒胎死者 彼土諺云 當於有福人墓埋之 種胤不絶 乃私瘞於墳側 當日震此胎屍 擲于塋外 由此不懷敬者 率崇仰焉 有弟子圓安 神忘機穎 性希歷覽 慕仰幽求 遂北趣九都 東觀不耐 又西燕魏 後展帝京 備通方俗 尋諸經論 跨轢大綱 洞淸纖旨 晩歸心學 高軌光塵 初住京寺 以道素有聞 特進蕭瑀奏請住於藍田所造津梁寺 四事供給 無替六時矣

돌아가실 때를 당하여 절의 동북쪽 허공에 음악 소리가 가득하고 기이한 향이 원을 채웠다. 중과 세속 사람이 슬퍼하며 경사로 여기고 그 영감임을 알았다. 마침내 교외에서 장사지내니 나라에서 의식 때 쓰는 깃털과 장사할 때 쓰는 도구를 내려 왕의 (장사)예와 같이 하였다. 후에 세속 사람이 죽은 태아를 낳은 자가 있었는데 저 세간의 말에 복 있는 사람의 묘에 묻으면 후손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사사로이 무덤 곁에 묻었더니 그날에 이 죽은 태아의 시신에 벼락이 쳐서 무덤 밖으로 내던졌다. 이 때문에 공경함을 품지 않았던 자도 모두 높이 우러렀다. 제가 원안이 있었는데 정신(과 뜻)이 슬기롭고 영리하고, 성품이 두루 살피기를 바라며, 그윽이 (도를)구하는 것을 사모하고 (스승을)우러렀다. 마침내 북쪽으로 9도에 달려가고, 동쪽으로 불내를 보았다. 또 서쪽으로 연과 위를 갔다. 후에 황제의 서울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므로 각 지방의 풍속을 갖추어 통하고 여러 경론을 찾아 큰 줄거리를 섭렵하고 미세한 가르침을 밝게 알았다. 늦게 심학에 돌아왔는데 중생을 제도한 자취가 높았다. 처음 서울(장안)의 절에 살 때 도로서 평소 소문이 나자 특진 소우가 아뢰어 남전에 지은 진량사에 머물게 할 것을 청하고 사사의 공급이 육시에 변함이 없게 하였다.

 

安嘗叙光云 ?本國王染患 醫治不損 請光入宮 別省安置 夜別二時爲說深法 受戒懺悔 王大信奉 一時初夜 王見光首 金色晃然 有象日輪 隨身而至 王后宮女同共觀之 由是 重發勝心 克留疾所 不久遂差? 光於辰韓馬韓之間 盛通正法 每歲再講 匠成後學 䞋施之資 並充營寺 餘惟衣盋而已(載達函)

원안이 일찍이 원광을 기록하여 말하기를 본국(신라)의 왕이 병이 들었는데 의원이 다스려도 덜어지지(차도가 없자) 않자 원광이 궁에 들어 올 것을 청해 별성에 있게 하였다. 매일 밤 깊은 법을 말하여 계를 받게하고 참회하게 하였더니 왕이 크게 믿고 받들었다. 어느 날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니 금빛이 찬란하고 일륜의 상이 있어 몸을 따라 이르렀다. 왕후와 궁녀가 같이 그것을 보았다. 이로 말미암아 더욱 뛰어난 행실을 닦는 마음을 내어 병이 있는 장소(병든 왕이 있는 방)에 머물게 하였더니 오래지 않아 마침내 나았다.”했다. 원광은 진한, 마한의 사이에 성대히 바른 법이 통하니 매년 두 번씩 강론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시주한 재물을 보면 모두 절을 경영에 충당하여 남은 것은 옷과 발우뿐이었다.(달함에 실려 있다.)

 

又東京安逸戶長貞孝家在古本殊異傳載圓光法師傳曰 法師俗姓薛氏 王京人也 初爲僧學佛法 年三十歲 思靜居修道 獨居三岐山 後四年有一比丘來 所居不遠 別作蘭若 居二年 爲人强猛 好修呪述 法師夜獨坐誦經 忽有神聲呼其名 ?善哉善哉! 汝之修行 凡修者雖衆 如法者稀有 今見隣有比丘 徑修呪術而無所得 喧聲惱他靜念 住處礙我行路 每有去來 幾發惡心 法師爲我語告而使移遷 若久住者 恐我忽作罪業?

또 동경 안일호장 정효의 집에 있는 옛 본 수이전에 실려 있는 원광법사전에 법사의 세속 성은 설씨이니 왕경(서울)사람이다. 처음 중이 되어 불법을 배웠는데 나이 30세가 되자 고요히 머물러 수도할 것을 생각하고 홀로 삼기산에서 살았다. 4년 후 한 비구가 와 멀지 않은 곳에 살며 따로 절을 짓고 2년을 살았다. (그 중은) 사람됨이 강맹하고 주술 닦기를 좋아하였다. 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 불경을 외고 있었다. 홀연히 신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있었는데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너의 수행이여. 무릇 (도를) 닦는 자가 비록 많으나 법과 같이 하는 자는 적습니다. 지금 이웃에 비구가 있는데 급하게 주술을 닦는데 얻은 바가 없고 외치는 소리가 다른 이의 고요한 생각을 괴롭게 하고, 사는 곳이 나의 가는 길을 막아 매번 오고갈 때 거의 나쁜 마음을 내게 합니다. 법사는 나를 위해 말로 알려서 옮겨가게 하여 주십시오. 만약 오래 머문다면 내가 홀연히 죄업을 지을까 두렵습니다.’했다.

 

明日法師往而告曰 ?吾於昨夜有聽神言 比丘可移別處 不然應有餘殃? 比丘對曰 ?至行者爲魔所眩? 法師何憂狐鬼之言乎?? 其夜神又來曰 ?向我告事 比丘有何答乎?? 法師恐神瞋怒而對曰 ?終未了說 若强語者 何敢不聽? 神曰 ?吾已具聞 法師何須補說? 但可黙然見我所爲? 遂辭而去 夜中有聲如雷震 明日視之 山頹塡比丘所在蘭若 神亦來曰 ?師見如何??

다음날 법사가 가서 고하여 말하기를 내가 지난밤에 신을 말을 들은 것이 있는데 비구는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했다. 비구가 대답해 말하기를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구니에게 현혹되는 바가 있습니까? 법사께서는 어찌하여 여우 귀신의 말을 근심하십니까.’했다. 그날 밤 신이 또 와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고한 일에 비구가 어떤 대답을 하였습니까?’하니 법사가 신이 성내고 노할 것을 두려워하여 대답해 말하기를 끝내 아직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힘써 말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모두 들었는데 법사는 어찌하여 말을 꾸미십니까? 단지 묵묵히 내가 하는 바를 보십시오.’하고는 하직하고 갔다. 밤중에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있었다. 다음날 가서보니 산이 무너져 비구가 있던 절을 덮어버렸다. 신이 또 와서 말하기를 스님이 보니 어떠합니까?’했다.

 

法師對曰 ?見甚驚懼? 神曰 ?我歲幾於三千年 神術最壯 此是小事 何足爲驚 但復將來之事 無所不知 天下之事 無所不達 今思法師唯居此處 雖有自利之行 而無利他之功 現在不揚高名 未來不取勝果 盍採佛法於中國 導群迷於東海? 對曰 ?學道中國 是本所願 海陸逈阻 不能自通而已? 神詳誘歸中國所行之計 法師依其言歸中國 留十一年 博通三藏 兼學儒術

법사가 대답해 말하기를 보니 매우 놀라고 두려웠습니다.’했다. 신이 말하기를 내 나이가 삼천년에 가까워 신술이 가장 굳건합니다. 이는 작은 일이니 놀라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시 장래의 일을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천하의 일을 통달하지 못한 바가 없습니다. 지금 법사가 오직 이 곳에서만 산다면 비록 자신을 이롭게 하는 수행은 있으나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공은 없습니다. 현재는 높은 이름을 드날리지 못하나 미래에는 결과를 이루 다 취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찌하여 불법을 중국에서 캐내(배워) 동해에서 여러 미혹함을 인도하지 않으십니까?’했다. 대답해 말하기를 도를 중국에서 배우는 것은 본래 바라는 바이지만 바다와 육지에 막혀 스스로 통하지 못해서일 뿐입니다.’했다. 신이 중국에 갈 계책을 자세하게 말하였다. 법사가 그 말에 의지하여 중국에 들어가 11년을 머물며 삼장에 널리 통하고 겸하여 유술(유학(을 배웠다.

 

眞平王二十二年庚申(三國史云 明年辛酉來) 師將理策東還 乃隨中國朝聘使還國 法師欲謝神 至前住三岐山寺 夜中神亦來呼其名曰 ?海陸途間 往還如何?? 對曰 ?蒙神鴻恩 平安到訖? 神曰 ?吾亦授戒於神(?) 仍結生生相濟之約? 又請曰 ?神之眞容 可得見耶?? 神曰 ?法師若欲見我形 平旦可望東天之際? 法師明日望之 有大臂貫雲 接於天際 其夜神亦來曰 ?法師見我臂耶?? 對曰 ?見已 甚奇絶異? 因此俗號臂長山 神曰 ?雖有此身 不免無常之害 故吾無月日 捨身其嶺 法師來送長逝之魂? 待約日往看 有一老狐黑如漆 但吸吸無息 俄然而死

진평왕 22년 경신(삼국사에는 다음해 신유에 왔다고 했다.) 스님이 동쪽으로 돌아 올 계책을 찾다가 곧 중국 조빙사를 따라 나라에 돌아왔다. 법사가 신에게 감사하고자 앞서 살던 삼기산사에 이르니 밤중에 신이 또 와서 그 이름을 불러 말하기를 바다와 육지를 가는 중간에 가고 돌아옴이 어떠하였습니까?’했다. 대답해 말하기를 신의 넓은 은혜를 입어 편안히 마쳤습니다.’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또한 신(스님)에게 계를 주고 곧 태어나는 곳마다 서로 구제하기로 약속을 맺겠습니다.’했다. 또 청해 말하기를 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하니 신이 말하기를 법사가 만약 나의 형상을 보고자 한다면 날이 밝을 즈음 동쪽 하늘가를 바라보시오.’했다. 법사가 다음날 바라보니 큰 팔이 구름을 뚫고 하늘가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하기를 법사는 내 팔을 보았습니까?’하니 대답해 말하기를 보았습니다. 매우 기이하고 이상했습니다.’했다. 이 때문에 세속에서 비장산이라 불렀다. 신이 말하기를 비록 이 몸이 있다하여도 무상의 해는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날짜가 없어(얼마 후) 몸을 그 고개에 버릴 것이니 법사가 와서 길게 가는 혼을 보내주십시오.’했다. 약속한 날을 기다려 가서보니 한 늙은 여우가 있는데 검기가 옻칠과 같았다. 헐떡거리기만 하고 숨을 쉬지 못하다가 홀연히 죽었다.

 

法師始自中國來 本朝君臣敬重爲師 常講大乘經典 此時 高麗百濟常侵邊鄙 王甚患之 欲請兵於隋(宜作唐) 請法師作乞兵表 皇帝見以三十萬兵親征高麗 自此知法師旁通儒術也 享年八十四入寂 葬明活城西 又三國史列傳云 賢士貴山者牟梁部人也 與同里箒項爲友 二人相謂曰 ?我等期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持身 則恐不免於招辱 盍問道於賢者之側乎?? 時聞圓光法師入隋回 寓止嘉瑟岬(或作加西 又嘉栖 皆方言也 岬 俗云古尸 故或云古尸寺 猶言岬寺也 今雲門寺東九千步許 有加西峴 或云嘉瑟峴 峴之北洞有寺基 是也) 二人詣門進告曰 ?俗士顓蒙 無所知識 願賜一言 以爲終身之誡?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왔을 때 본조의 임금과 신하가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 스승으로 삼았다. 항상 대승경전을 강설하였다. 이 때 고(), 백제가 항상 변경을 침범하니 왕이 매우 근심하여 수(마땅히 당이라 써야한다.)나라에 군대를 청하고자 하여 법사에게 군대를 청하는 표 짓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보고 30만 군대로 직접 군대로 고()려를 정벌하였다. 이로부터 법사가 유술(유학)울 분명하고 자세히 안다는 것을 알았다. 84년을 누리고 입적하시니 명활성 서쪽에 장사하였다. 또 삼국사 열전에 어진 선비 귀산은 모량부 사람이다. 같은 마을의 추항과 벗이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우리들이 사군자들과 교유하기를 기약하면서 먼저 마음을 바로잡아 몸을 지니지 않는다면 곧 아마도 욕을 부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어찌 현명한 자의 옆에서 도를 묻지 않겠는가?’했다. 그 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가슬갑(혹은 가서, 또 가서라 쓰는데 모두 방언이다. 갑은 세속에서 고시라 한다. 그러므로 혹은 고시사라 하니 갑사라는 말과 같다. 지금 운문사 동쪽 9천보쯤 되는 곳에 가서현이 있고, 혹은 가슬현이라 하는데 현의 북쪽 마을에 있는 절터가 이것이다.)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두 사람이 문하에 나아가 고해 말하기를 속사는 우매하여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한 마디 말을 내려주시면 평생동안의 경계로 삼기를 원합니다.’했다.

 

光曰 ?佛敎有菩薩戒 其別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堪 今有世俗五戒 一曰 事君以忠 二曰 事親以孝 三曰 交友有信 四曰 臨戰無退 五曰 殺生有擇 若()行之無忽? 貴山等曰 他則旣受命矣 所謂殺生有擇 特未曉也? 光曰 ?六齋日春夏月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 謂馬牛犬雞 不殺細物 謂肉不足一臠 是擇物也 此亦唯其所用 不求多殺 此是世俗之善戒也?

원광이 말하기를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는데 10개의 조항이 있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의 신하이며 자식이 되어 아마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가 있으니 하나는 사군이충이요 둘째는 사친이효이고, 셋째는 교유유신이고, 넷째는 임전무퇴이고, 다섯째는 살생유택이다. 너희들이 그것을 행함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했다. 귀산 등이 말하기를 다른 것은 이미 명을 받았습니다만 이른바 살아있는 것을 죽이되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특히 깨닫지 못하겠습니다.’했다. 원광이 말하기를 ‘6재일과 봄, 여름에는 죽이지 않는 것이 때를 택한다는 것이다. 부리는 가축을 죽이지 말 것이니 말, , , 닭을 이른다. 작은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한 점 고기에 부족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물건을 가린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오직 그 쓰는 바로 할 것이요 많이 죽임을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세속의 좋은 경계이다.

 

貴山等曰 ?自今以後 奉以周旋 不敢失墜? 後 二人從軍事 皆有奇功於國家 又建福三十年癸酉(卽眞平王卽位三十五年也)秋 隋使王世儀至 於皇龍寺設百座道場 請諸高德說經 光最居上首 議曰 原宗興法已來 津梁始置 而未遑堂奧 故宜以歸戒滅懺之法 開曉愚迷 故光於所住嘉栖寺 置占察寶 以爲恒規

귀산 등이 말하기를 지금부터 이후로 받들고 두루 힘써 감히 실추시키지 않겠습니다.’했다. 후에 두 사람이 군대의 일에 종사하여 모두 국가에 큰 공이 있었다. 또 건복 30년 계유(곧 진평왕 즉위 35년이다.) 가을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가 이르렀다. 황룡사에 백좌도량을 열고 여러 이름 있는 중을 청해 경전을 설명할 것을 청하였는데 원광이 가장 윗자리에 앉았다. 논의하여 말한다. 원종이 법을 일으킨 이래 나루와 교량이 처음 설치되었지만 아직 진리가 있는 깊은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마땅히 불교에 귀의하여 괴로움을 없애고 참회하는 법으로 어리석고 미혹함을 열고 깨닫게 하였다. 그러므로 원광이 머물던 가서사에 점찰보를 두고 항상된 규칙으로 삼았다.

 

時有檀越尼 納田於占察寶 今東平郡之田一百結是也 古籍猶存 光性好虛靜 言常含笑 形無慍色 年臘旣邁 乘輿入內 當時群彦 德義攸屬 無敢出其右者 文藻之贍 一隅所傾 年八十餘 卒於貞觀間 浮圖在三岐山金谷寺(今安康之西南洞也 亦明活之西也)唐傳云 告寂皇隆寺 未詳其地 疑皇龍之訛也 如芬皇作王芬寺之例也 據如上唐鄕二傳之文 但姓氏之朴薛 出家之東西 如二人焉 不敢詳定 故兩存之

그 때 단월니가 있어 밭을 점찰보에 들였는데 지금 동평군의 밭 100결이 이것으로 옛 전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원광은 성품이 비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여 말을 하면 항상 웃음을 머금고 형상에는 노한 기색이 없었다. 나이가 많아진 후에는 가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갔는데 당시의 여러 선비들이 덕과 의리가 있었으나 감히 그 보다 뛰어난 자는 나오지 않았다. 문장의 멋이 넉넉하여 한 모퉁이를 기울게 하는 바였다.(한 나라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이 80여세가 되어 정관 연간에 죽었다. 부도는 삼기산 금곡사(지금 안강 서남쪽 동이다. 또한 명활의 서쪽이다.) 당전에는 황륭사에서 입적했다고 했는데 그 땅은 자세하지 않다. 아마 황룡사의 와전일 것이다. 분황을 왕분사라고 쓴 예와 같다. 위의 당전과 향전 두 전의 글에 의거하면 다만 성씨가 박, 설씨라 하였고, 출가도 동과 서로 되어 있어 두 사람인 듯하나 감히 자세히 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둘 다 남겨둔다.)

 

然彼諸傳記 皆無鵲岬璃目與雲門之事 而鄕人金陟明 謬以街巷之說 潤文作光師傳 濫記雲門開山祖寶壤師之事迹 合爲一傳 後撰海東僧傳者 承誤而錄之 故時人多惑之 因辨於此 不加減一字 載二傳之文詳矣 陳隋之世 海東人鮮有航海問道者 設有 猶未大振 及光之後 繼踵西學者憧憧焉 光乃啓途矣 讚曰 航海初穿漢地雲 幾人來往挹淸芬 昔年蹤迹靑山在 金谷嘉西事可聞

그러나 저 여러 전기는 모두 작갑이목과 운문의 일이 없다. 향인 김척명이 그릇되이 거리의 말로서 글을 윤색하여 원광 스님의 전기를 지으면서 함부로 운문의 개산조 보양스님의 사적을 기록하여 합하여 하나의 전으로 만들었다. 후에 해동고승정을 짓는 자가 잘못을 이어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 때 사람들이 많이 의혹하였다. 이 때문에 여기에서 판별하여 한 글자도 더하고 덜지 않고, 두 전의 글을 자세하게 실었다. 진나라 수나라 세대에 해동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도를 물은 자는 적었으며 설사 있다고 하여도 오히려 크게 떨치지는 못하였다. 원광의 뒤에 이르러 뒤를 이어 서학한 자들이 계속하여 끊이지 않았다. 원광이 곧 길을 열었던 것이다. 기려 말한다. “바다를 항해하여 한나라 땅 구름을 꿰뚫고, 몇 사람이 오가며 맑고 높은 덕행을 잡았다. 옛날의 자취 푸른 산에 있어 금곡, 가서의 일을 들을 수 있다.

 

寶壤梨木

釋寶壤傳 不載鄕井氏族 謹按淸道郡司籍 載天福八年癸酉(太祖卽位第二十六年也)正月日 淸道郡界里審使順英大乃末水文等柱貼公文 雲門山禪院長生 南阿尼岾 東嘉西峴(云云) 同藪三剛典主人寶壤和尙 院主玄會長老 貞座玄兩上座 直歲信元禪師(右公文淸道郡都田帳 傳准)

보양이목

석보양전에 고향과 씨족이 실려져 있지 않다. 삼가 청도군 관청 문서를 살펴보니 천복 8년 계유(태조 즉위 제 26년이다.) 정월 일에 청도군 계리 심사 순영, 대내말 수문 등의 주첩공문에 운문산 선원 장생은 남쪽은 아니점, 동쪽은 가서현이라 했다. 같은 절 삼강 전주인은 보양화상이고, 원주는 현회 장노이고, 정좌는 현양 상좌이고, 직세는 신원 선사이다.’”했다.(이상 공문은 청도군 도전장전에 의한 것이다.)

 

又開運三年丙辰雲門山禪院長生標塔公文一道 長生十一 阿尼岾嘉西峴畝峴 西北買峴(一作面知村) 北猪足門等 又庚寅年 晉陽府貼五道按察使 各道禪敎寺院始創年月形止 審檢成籍時 差使員東京掌書記李僐審檢記載 正豊六年辛巳(大金年號 本朝毅宗卽位十六年也)九月 郡中古籍裨補記准 淸道郡前副戶長禦侮副尉李則楨戶在古人消息 及諺傳記載 致仕上戶長金亮辛 致仕戶長旻育 戶長同正尹應 前其人珍奇等 與時上戶長用成等言語 時太守李思老戶長亮辛年八十九 餘輩皆七十已上 用成年六十已上(云云 次不准)

또 개운 3년 병진 운문산 선원 장생표탑 공문 한 통에 장생은 11이고, 아니점, 가서현, 묘현, 서북매현(면지촌이라 쓴다.) 북저족문 등이다.”했다. 또 경인년 진양부첩에는 “5도 안찰사가 각 도의 선종, 교종 사원이 처음 창건된 연월과 실제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여 문서를 만들 때 차사원 동경장서기 이선이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하여 실었다.”했다. 정풍 6년 신사(대근의 연호이니 본조(고려) 의종 즉위 16년이다.) 9월 군 안의 옛 문서인 비보기에 의하면 청도군 전부호장 어모부위 이칙정의 집에 있는 옛 사람들의 소식과 우리말로 전해내려오는 기록에는 치사 상호장 김양신, 치사 호장 민육, 호장 동정 윤응, 전기인 진기 등과 그 때의 상호장 용성 등의 말이다. 그 때 태수 이사노, 호장 양신은 나이가 89세이고, 나머지 무리들도 모두 70이상이었다. 용성은 나이가 60 이상이다.(운운이라 하였는데 다음은 쓰지 않는다.)”했다.

 

羅代已來 當郡寺院 鵲岬已下中小寺院 三韓亂亡間 大鵲岬小鵲岬所寶岬天門岬嘉西岬等五岬皆亡壞 五岬柱合在大鵲岬 祖師知識(上文云寶壤) 大國傳法來還 次西海中 龍邀入宮中念經 施金羅袈裟一領 兼施一子璃目 爲侍奉而追之 囑曰 于時 三國擾動 未有歸依佛法之君主 若與吾子歸本國 鵲岬創寺而居 可以避賊 抑亦不數年內 必有護法賢君 出定三國矣 言訖相別而來還 及至玆洞 忽有老僧 自稱圓光 抱印櫃而出 授之而沒(按 圓光以陳末入中國 開皇間東還 住嘉西岬而沒於皇隆 計至淸泰之初 無慮三百年矣 今悲嘆諸岬皆廢而喜見壤來而將興 故告之爾)

신라시대 이래로 청도군의 사원으로 작갑 이하 중소 사원이 삼한이 어지러운 사이에 대작갑, 소작갑, 소보갑, 천문갑, 가서갑 등 5갑이 모두 망하여 무너졌다. 5갑의 기둥을 합하여 대작갑에 두었다. 조사 지식(윗글에는 보양이라 했다.) 대국에서 법을 전해 받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 중에서 용이 맞아 궁중에 들어 가 경전을 외게 하더니 금빛의 가사 한 벌과 겸하여 한 아들인 이목을 주면서 모시고 따르게 하면서 부탁해 말하기를 때에(지금) 삼국이 소란스러워 아직 불법에 귀의한 임금이 있지 않습니다. 만약 내 아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 작갑에 절을 짓고 머물면 도적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몇 년 되지 않아 반드시 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안정시킬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서로 작별하고 돌아와 이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스스로 원광이라 하는 노승이 있어 도장 궤를 안고 나와 그것을 주고 사라졌다. (살펴보니 원광은 진나라 말기에 중국에 들어 가 개황 연간에 동쪽으로 돌아와 가서갑에서 살다가 황륭에서 죽었으니 계산하면 청태 초에 이르기까지 무려 300년이었다. 지금 여러 갑이 모두 없어진 것을 슬퍼하고, 보양이 와 장차 흥기함을 보게 된 것을 기뻐하였기 때문에 말하였을 뿐이다.)

 

於是 壤師將興廢寺 而登北嶺望之 庭有五層黃塔 下來尋之則無跡 再陟望之 有群鵲啄地 乃思海龍鵲岬之言 尋掘之 果有遺塼無數 聚而蘊崇之 塔成而無遺塼 知是前代伽藍墟也 畢創寺而住焉 因名鵲岬寺 未幾 太祖統一三國 聞師至此創院而居 乃合五岬田束五百結納寺 以淸泰四年丁酉 賜額曰雲門禪寺 以奉袈裟之靈蔭

이에 보양 스님이 장차 없어진 절을 일으키려 북쪽 고개에 올라 바라보니 뜰에 5층의 황탐이 있었다. 내려 가 찾으면 곧 자취가 없고, 다시 올라 바라보니 여러 까치가 땅을 쪼고 있었다. 이에 해룡이 작갑이라 말한 것을 생각해내고는 찾아 파니 과연 남은 벽돌이 헤아릴 수 없었다. 모아서 쌓으니 탑이 이루어졌는데 남은 벽돌이 없어 이것이 전대의 절터임을 알았다. 절 짓기를 마치고 살면서 인하여 작갑사라 이름했다. 얼마 후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고 스님이 이에 이르러 원을 짓고 산다는 것을 듣고 이에 5갑의 전속 500결을 합하여 절에 들이고 청태 4년 정유에 운문선사라는 이름을 내리고 가사의 신령스러운 음덕을 받들게 했다.

 

璃目常在寺側小潭 陰隲法化 忽一年亢旱 田蔬焦槁 壤勑璃目行雨 一境告足 天帝將誅不識 璃目告急於師 師藏於床下 俄有天使到庭 請出璃目 師指庭前梨木 乃震之而上天 梨木萎摧 龍撫之卽穌(一云師呪之而生) 其木近年倒地 有人作楗椎 安置善法堂及食堂 其椎柄有銘 初師入唐廻 先止于推火之奉聖寺 適太祖東征至淸道境 山賊嘯聚于犬城(有山岑臨水峭立 今俗惡 其名改云犬城) 驕傲不格

이목은 항상 절 옆의 작은 못에 살면서 뒤에서 법의 교화를 뒤에서 도왔다. 홀연히 어느 해 크게 가물어 밭의 채소가 타서 마르자 보양이 이목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게 하니 한 경계(지방)가 흡족하였다. 천제가 할 일이 아님을 행하였다고 장차 죽이려 하자 이목이 스님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스님이 의자 아래에 숨겼는데 홀연히 천사가 뜰에 이르러 이목을 내어줄 것을 청하였다. 스님이 뜰 앞의 배나무를 가리키니 곧 그것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시들시들 말라죽어가자 용이 어루만졌더니 곧 살아났다,(스님이 주문을 외웠더니 살아났다고 한다.) 그 나무가 최근에 땅에 쓰러졌다. 어떤 사람이 문빗장 몽치를 만들어 선법당과 식장에 두었다. 그 몽치 자루에 새긴 글이 있다. 처음 스님이 당에 들어갔다 돌아와 먼저 추화군의 봉성사에 머물렀다. 마침 태조가 동쪽으로 정벌하여 청도군 경계에 이르렀는데 산적이 견성에 서로 불러 모여(산 봉우리가 물에 임하여 뾰족하게 서 있었다. 지금 세속에서 그것을 싫어하여 그 이름을 바꾸어 견성이라 하였다.) 교만하고 오만을 부리며 잘못을 고치지 않았다.

 

太祖至于山下 問師以易制之述 師答曰 夫犬之爲物 司夜而不司晝 守前而忘其後 宜以晝擊其北 祖從之 果敗降 太祖嘉乃神謀 歲給近縣租五十碩 以供香火 是以寺安二聖眞容 因名奉聖寺 後遷至鵲岬 而大創終焉 師之行狀 古傳不載 諺云 與石崛備虛師(一作毗虛)爲昆弟 奉聖石崛雲門三寺 連峯櫛比 交相往還爾 後人改作新羅異傳 濫記鵲塔璃目之事于圓光傳中 系犬城事於毗虛傳 旣謬矣 又作海東僧傳者 從而潤文 使寶壤無傳而疑誤後人 誣妄幾何

태조가 산 아래 이르러 스님에게 쉽게 제어할 방법을 물었다. 스님이 답하여 말하기를 대저 개라는 물건은 밤에 지키고 낮에는 지키지 않고, 앞은 지키지만 구 뒤는 잊어버립니다.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치십시오.”했다. 태조가 따랐더니 과연 무너져 항복하였다. 태조가 이에 신 같은 꾀를 아름답게 여겨(좋게 여겨) 매년 가까운 현의 조 50석을 주어 향화를 받들게 하였다. 이 때문에 절에 두 성인의 참된 얼굴을 안치하고 봉성사라 이름했다. 후에 옮겨 작갑에 이르러 크게 창건하고 세상을 마쳤다. 스님의 행장은 고전에 실리지 않았고, 민간에서 말하기를 석굴의 비허스님(비허라고 쓰기도 한다)과는 형제가 되어 봉성, 석굴, 운문 세 절이 봉우리를 이어 나란히 늘어서 서로 왕래하였다. 후세 사람이 신라이전을 고치면서 함부로 작탑과 이목의 일을 원광전 안에 잘 못 기록하였다. 견성의 일을 비허전에 단 것도 잘못된 것인데 또 해동고승전을 지은 자가 따라서 글을 윤색하고, 보양의 전기가 없게 하였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의심하고 잘못 알게 하였으니 사실을 속이고 왜곡해 비방하니 어떠한가.

 

良志使錫

釋良志 未詳祖考鄕邑 唯現迹於善德王朝 錫杖頭掛一布帒 錫自飛至檀越家 振拂而鳴 戶知之納齋費 帒滿則飛還 故名其所住曰錫杖寺 其神異莫測皆類此 旁通雜譽 神妙絶比 又善筆札 靈廟丈六三尊天王像幷殿塔之瓦 天王寺塔下八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書靈廟法林二寺額 又嘗彫磚造一小塔 竝造三千佛 安其塔置於寺中 致敬焉

양지사석

석양지는 조상과 고향이 자세하지 않다. 오직 선덕왕대에 자취가 드러날 뿐이다. 지팡이 끝에 하나의 포대를 걸면 지팡이가 스스로 날아 단월가에 이르러 떨어 울리면 집에서 알고 재비를 들인다. 포대가 차면 곧 날아 돌아간다. 그러므로 그 사는 곳을 석장사라 이름한다. 그 신이함를 헤아릴 수 없음이 모두 이런 류였다. 여러 재주에 통달하여 신묘하기가 견줄 데가 없었다. 또 글씨, 그림 들을 잘하여 영묘사 장육 삼존, 천왕상과 전탑의 기와, 천왕사 탑 아래 팔부신장, 법림사 주불삼존, 좌우 금강신 등을 모두 만들었다. 영묘, 법림 두 절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한 소탑과 삼천불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두고 공경을 다하였다.

 

其塑靈廟之丈六也 自入定以正受所對爲揉式 故傾城士女爭運泥土 風謠云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至今 土人舂相役作皆用之 蓋始于此 像()成之費 入穀二萬三千七百碩(()()金時租) 議曰 師可謂才全德充 而以大方隱於末技者也 讚曰 齋罷堂前錫杖閑 靜裝爐鴨自焚檀 殘經讀了無餘事 聊塑圓容合掌看

그가 만든 영묘사 장육을 만들 때 스스로 입정하여 정수로서 대함을 법식으로 삼았기 때문에 온 성 안의 사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하였다. 풍요에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인생은 슬프더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 닦으러 오네.”했다. 지금에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질하거나 일을 할 때 모두 그것을 쓰는 것은 대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상을 처음 만들 때의 바용은 곡식 23700석이 들었다.(혹은 금을 칠 할 때의 조라 한다.) 논의해 말한다. “스님은 재능이 완전하고, 덕이 채워졌고 대가로서 지엽적인 기술을 드러내고 자기의 실력은 나타내지 않았다고 말할만하다.” 기려 말한다. “재를 마치니 법당 앞에 석장은 한가한데, 노압에 손질하여 홀로 단향을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어 할 일 없으니, 소상의 둥근 얼굴 합장하고 쳐다보네.”

 

歸竺諸師

廣函求法高僧傳云 釋阿離那(一作耶)跋摩(一作) 新羅人也 初希正敎 早入中華 思覲聖踪 勇銳彌增 以貞觀年中離長安 到五天 住那蘭陀寺 多閱律論 抄寫貝莢 痛矣歸心 所期不遂 忽於寺中無常 齡七十餘 繼此有惠業玄泰求本玄恪惠輪玄遊 復有二亡名法師等 皆忘身順法 觀化中天 而或夭於中途 或生存住彼寺者 竟未有能復雞貴與唐室者 唯玄泰師克返歸唐 亦莫知所終

귀축제사

광함의 구법고승전에 석아이나(야라 쓴다.)발타(라 쓴다.)는 신라 사람이다. 처음에 바른 가르침이 적어 일찍 중국에 들어가 성인의 자취를 보려하여 용맹스럽게 나아가려는 생각이 더욱 더하였다. 정관 연간에 장안을 떠나 5천에 이르러 나난타사에 머물면서 율론을 많이 열람하고 패겹에 많이 베껴 썼다. 돌아가려는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기약한 바를 이루지 못하였다. 홀연히 절 안에서 죽었는데 나이는 70세였다. 혜업, 현태, 구본, 현각, 혜륜, 현유와 다시 두 이름을 잃은 법사 등이 있어 이를 이었다. 모두 몸을 잊고 법을 따라 중천에서 교화를 보았는데 혹은 도중에 요절하고, 혹은 살아서 그 절에 머무는 자가 있었다. 마침내 돌아와 당나라와 함께 할 수 있었던 자는 오직 현태 스님만 당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또한 죽은 곳을 알지 못한다.

 

天竺人呼海東云矩矩吒䃜說羅 矩矩吒言雞也 䃜說羅言貴也 彼土相傳云 其國敬雞神而取尊 故戴翎羽而表飾也 讚曰 天竺天遙萬疊山 可憐遊士力登攀 幾回月送孤帆去 未見雲隨一杖還

천축 사람들은 해동을 불러 구구탁예설라라 하였는데 구구탁은 닭을 말하고, 예설라는 귀함을 말한다. 그 나라에서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그 나라는 닭 신을 공경하여 높음을 취하였기 때문에 깃을 꼿아 꾸민다.”했다. 기려 말한다. “천축의 먼 길 만첩의 산이다. 가련한 유사들 힘써 오르는구나. 몇 번인가 달을 보낸 외로운 배는 구름따라 돌아오는 이 한 사람 도 못 보았다.”

 

二惠同塵

釋惠宿 沈光於好世郎徒 郎旣讓名黃卷 師亦隱居赤善村(今安康縣有赤谷村)二十餘年 時國仙瞿公嘗往其郊 縱獵一日 宿出於道左 攬轡而請曰 庸僧亦願隨從 可乎? 公許之 於是 縱橫馳突 裸袒相先 公旣悅 及休勞坐 數炮烹相餉 宿亦與啖囓 略無忤色 旣而進於前曰 今有美鮮於此 益薦之何? 公曰 善 宿屛人割其股 寘盤以薦 衣血淋漓 公愕然曰 何至此耶? 宿曰 始吾謂公仁人也 能恕己通物也 故從之爾 今察公所好 唯殺戳之耽篤 害彼自養而已 豈仁人君子之所爲? 非吾徒也 遂拂衣而行

이혜동진

석혜숙이 호세낭도에서 빛을 숨기자(자취를 숨기자) 호세랑이 이름을 황권에서 지워버렸다. 스님이 또한 적선촌(지금 안강현에 적곡촌에 있다.)에서 20여년을 숨어 살았다. 그 때 국선 구참공이 일찍이 그 교외에 가서 하루를 사냥하는데 혜숙이 길 왼쪽에서 나와 말고삐를 잡고 청해 말하기를 용렬한 중이 또한 따르기를 원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하니 구참공이 허락하였다. 이에 종횡으로 치달리며 부딪치는데 웃통을 벗어던지고 서로 앞장서니 공이 기뻐했다. 앉아 쉬며 피로를 푸는데 빠르게 굽고 삶아 서로 먹었다.(먹기를 권하였다.) 혜숙이 또한 함께 씹어 먹으면서 대략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이윽고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이것보다 맛있는 것이 있어서 더 올리려 하는데 어떠합니까?”했다. 구참공이 말하기를 좋습니다.”했다. 혜숙이 사람을 가리고 그 다리를 베어 쟁반에 담아 바치니 옷에 피가 흘러 뚝뚝 떨어졌다. 구참공이 놀라 어찌하여 이에 이르렀습니까?”하니 혜숙이 말하기를 처음에 나는 공이 어진사람이라 여겨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이 다른 물건에게도 통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따랐습니다. 지금 구참공이 좋아하는 바를 살펴보니 오직 죽이는 것을 매우 좋아하여 남을 해쳐 자기를 기를 뿐입니다. 어찌 어진 사람이나 군자가 할 바이겠습니까? 나의 무리가 아닙니다.”하고는 마침내 옷을 떨치고 갔다.

 

公大慚 視其所食 盤中鮮胾不滅 公甚異之 歸奏於朝 眞平王聞之 遣使徵迎 宿示臥婦床而寢 中使陋焉 返行七八里 逢師於途 問其所從來 曰 城中檀越家 赴七日齋 席罷而來矣 中使以其語達於上 又遣人檢檀越家 其事亦實 未幾 宿忽死 村人轝葬於耳峴(一作硎峴)東 其村人有自峴西來者 逢宿於途中 問其何往 曰 久居此地 欲遊他方爾 相揖而別 行半許里 躡雲而逝 其人至峴東 見葬者未散 具說其由 開塚視之 唯芒鞋一隻而已 今安康縣之北 有寺名惠宿 乃其所居云 亦有浮圖焉

구참공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그가 먹은 것을 보니 반 중의 신선한 고기점이 없어지지 않았다. 공이 매우 기이하게 여겨 돌아가 조정에 아뢰었다. 진평왕이 그것을 듣고 사자를 보내 맞아들이게 하였는데 혜숙이 부인과 침상에 누워 잠자고 있는 것을 보고 중사(사자)가 비루하게 여겼다. 7, 8리를 돌아가다 스님을 길에서 만났다. 혜숙이 말하기를 성안의 신도 집에서 7일 재를 갔다가 자리가 끝나 오는 중입니다.”했다. 중사가 그 말로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또 사람을 보내 신도 집을 찾아보니 그 일 또한 사실이었다. 얼마 후 혜숙이 홀연히 죽자 촌의 사람들이 가마에 실어 이현( 형현이라 쓰기도 한다) 동쪽에 장사하였다. 그 촌의 사람이 고개 서쪽에서 오는 자가 있었는데 도중에 혜숙을 만나 어디로 가는지를 물었다. 혜숙이 말하기를 이 땅에 오래 살았으니 다른 지방을 돌아다니고자 할 뿐입니다,”했다. 서로 읍하고 헤어져 반리쯤 가다가 구름을 밟고 갔다. 그 사람이 고개 동쪽에 이르러 장례하는 자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모두 말하고 무덤을 열어 보니 오직 짚신 한 짝뿐이었다. 지금 안강현 북쪽에 혜숙이라는 이름의 절이 있는데 곧 그가 살던 곳이라 한다. 또 여기에 부도가 있다.

 

釋惠空 天眞公之家傭嫗之子 小名憂助(盖方言也) 公嘗患瘡濱於死 而候慰塡街 憂助年七歲 謂其母曰 家有何事 賓客之多也? 母曰 家公發惡疾 將死矣 爾何不知? 助曰 吾能右之 母異其言 告於公 公使喚來 至坐床下 無一語 須臾瘡潰 公謂偶爾 不甚異之

석혜공은 천진공의 집에서 고용살이하던 노파의 아들이다. 어릴 적 이름은 우조(대개 방언이다.)이다. 천진공이 일찍이 부스럼에 걸려 죽음을 근심하니 위문하는 사람이 거리를 메웠다. 우조의 나이는 7살이었는데 그 어머니에게 일러 말하기를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손님이 많습니까?”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집의 천진공에게 나쁜 병이 생겨 장차 죽으려 한다. 너는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했다. 우조가 말하기를 내가 도울 수 있습니다.”했다. 어머니가 그 말을 이상하게 여겨 천진공에게 말하니 천진공이 불러오게 하였다. (우조가) 앉아 있는 참상 아래 이르러 한마디 말도 없었는데 잠시 후 부스럼이 나았다. 종기가 터졌다. 천진공은 우연일 뿐이라 말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旣壯 爲公養鷹 甚愜公意 初 公之弟 有得官赴外者 請公之選鷹歸治所 一夕公忽憶其鷹 明晨擬遣助取之 助已先知之 俄頃取鷹 昧爽獻之 公大驚悟 方知昔日救瘡之事 皆叵測也 謂曰 僕不知至聖之托吾家 狂言非禮汚辱之 厥罪何雪 而後乃今願爲導師導我也 遂下拜 靈異旣著 遂出家爲僧 易名惠空 常住一小寺 每猖狂大醉 負簣歌舞於街巷 號負簣和尙 所居寺因名夫蓋寺 乃簣之鄕言也 每入寺之井中 數月不出 因以師名名其井 每出有碧衣神童先湧 故寺僧以此爲候 旣出 衣裳不濕

장성한 후에는 천진공을 위해 매를 길렀는데 매우 천진공의 뜻에 맞았다. 처음 천진공의 동생으로 관직을 얻어 밖으로(지방관으로) 나가는 자가 있었는데 천진공의 매를 뽑아 치소(임지)로 갈 것을 청하였다. 어느 날 저녁 공이 홀연히 그 매를 기억해내고 새벽에 날이 밝으면 우조를 보내 매를 가져오게 하려 했다. 우조가 먼저 그것을 알고 홀연히 매를 가져다 새벽에 바쳤다. 천진공이 크게 놀라고 깨달아 비로소 옛날 종기를 낫게 하였던 일이 모두 헤아리기 어려운 것임을 알았다. (천진공이 우조에게)일러 말하기를 나는 지극한 성인이 나의 집에 의탁하고 있을 알지 못하고 미친 말과 예의가 아닌 것으로 더럽히고 욕되게 하였으니 그 죄를 어떻게 씻을 수 있겠습니까? 이후 곧 지금부터 인도하는 스승이 되어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하고는 마침내 내려가 절을 하였다. 신령스럽고 기이함이 이미 드러났으므로 마침내 출가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바꾸어 혜공이라 하였다. 항상 한 작은 절에서 살면서 매번 방탕하듯이 크게 술에 취해 삼태기를 메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므로 부궤화상이라 불럿다. 이로 인해 살고 있는 절을 부개사라 이름하였으니 곧 우리말의 삼태기이다. 매번 절의 우물 안에 들어가 몇 달이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스님의 이름으로서 그 우물의 이름을 삼았다. 매번 (우물에서) 나올 때 푸른 옷을 입은 신동이 먼저 솟아 나왔기 때문에 절의 중들이 이로서 (혜공이 나오는) 징조로 삼았고 우물에서 나왔음에도 옷이 젖지 않았다.

 

晩年移止恒沙寺(今迎日縣吾魚寺 諺云恒沙人出世 故名恒沙洞) 時 元曉撰諸經疏 每就師質疑 或相調戱 一日二公沿溪掇魚蝦而啖之 放便於石上 公指之戱曰 汝屎吾魚 故因名吾魚寺

만년에 항사사(지금 영일현 오어사이다. 세상에서는 항사처럼 사람이 세상에 나왔으므로 이름을 항사동이라 했다. 한다.)에 옮겨 머물렀다. 그 때 원효가 여러 경전의 소를 짓다가 매번 스님에게 나아가 의심나는 것을 묻고, 혹은 서로 희롱하였다. 하루는 두 공(원효와 혜공)이 시내를 따라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 먹고, 돌 위에 똥을 누었다. (혜공)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해 말하기를 너의 똥은 나의 물고기이다.”했다. 그러므로 절 이름을 오어사라 했다.

 

或人以此爲曉師之語 濫也 鄕俗訛呼其溪曰芼矣川 瞿旵公嘗遊山 見公死僵於山路中 其屍逢脹 爛生虫蛆 悲嘆久之 及廻轡入城 見公大醉歌舞於市中 又一日將草索綯 入靈廟寺 圍結於金堂 與左右經樓及南門廊廡 告剛司 此索須三日後取之 剛司異焉而從之 果三日善德王駕幸入寺 志鬼心火出燒其塔 唯結索處獲免

어떤 사람은 이것을 원효 스님의 말이라 하나 잘못이다. 민간에서는 그 시내를 그릇되이 불러 모의천이라 한다. 구참공이 일찍이 산에서 노닐다 공(혜공)이 산길 가운데서 죽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시체가 붓고 썪어 구더기가 생긴 것을 보고 슬퍼하며 탄식하기를 오래 했다. 말고삐를 돌려 성에 들어갔을 때 공(혜공)이 크게 취하여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았다. 또 하루는 풀로 새끼를 꼬아 영묘사에 들어가 금당과 좌우 경루와 남문 낭무를 둘러 묶고는 강사에 이 새끼는 반드시 삼일 후 취하라(풀라).”고 말햇다. 강사가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 따랐다. 과연 삼일 만에 선덕왕이 행차하여 절에 들어왔다. 지귀의 심화가 나와 그 탑을 태웠는데 오직 새끼로 묶은 곳만 면하였다.

 

又神印祖師明郎 新創金剛寺 設落成會 龍象畢集 唯師不赴 朗卽焚香虔禱 小選公至 時方大雨 衣袴不濕 足不沾泥 謂明朗曰 辱召懃懃 故玆來矣 靈迹頗多 及終 浮空告寂 舍利莫知其數 嘗見肇論曰 是吾昔所撰也 乃知僧肇之後有也 讚曰 草原縱獵床頭臥 洒肆狂歌井底眠 隻履浮空何處去 一雙珍重火中蓮

또 신인조사 명랑이 새로 금강사를 창건하고 낙성회를 열었는데 고승들은 다모였으나 오직 스님(혜공)만은 나아가지 않았다. 명랑이 향을 사르고 정성껏 기도하니 잠시 후 공(혜공)이 이르렀다. 그 때 막 큰 비가 내렸는데 옷이 젖지 않았고 발에는 진흙이 묻지 않았다. 명랑에게 일러 말하기를 부름이 은근하기 때문에 왔습니다.”했다. 신령스러운 자취가 자못 많았다. 죽을 때는 공중에 떠서 입적을 알렸는데 사리는 그 수를 아리 못하였다. 일찍이 조론을 보고 말하기를 이는 내가 옛날에 지은 것이다.”했다. 이에 승조의 후신임을 알았다. 기려 말한다. “초원에서 사냥하고 침대머리에 누웠고, 술 집에서 미친 듯 노래하고 우물에서 잠잤다. 한 짝 짚신과 공중에 떠 어디로 갔는가? 한 쌍의 보래로운 화중련이로다.

 

慈藏定律

大德慈藏 金氏 本辰韓眞骨蘇判(三級爵名)茂林之子 其父歷官淸要 絶無後胤 乃歸心三寶 造于千部觀音 希生一息 祝曰 若生男子 捨作法海津梁 母忽夢星墜入懷 因有娠 及誕 與釋尊同日 名善宗郎 神志澄睿 文思日贍 而無染世趣 早喪二親 轉厭塵譁 捐妻息 捨田園爲元寧寺 獨處幽險 不避狼虎 修枯骨觀 微或倦弊 乃作小室 周障荊棘 裸坐其中 動輒箴剌 頭懸在梁 以袪昏暝 適台輔有闕 門閥當議 累徵不赴 王乃勅曰 不就斬之

자장정율

대덕 자장은 김씨로 본래 진한 진골 소판(삼급의 벼슬 이름이다.) 무림의 아들이다. 그 아저지가 청관 요직을 지냈다. 후손이 끊겨 없자 이에 마음을 삼보에 귀의하여 천부관음을 만들고 하나의 자식 낳기를 바라면서 축원해 말하기 만약 남자를 낳는다면 내놓아서 법의 바다(불교)의 나루터와 들보가 되게 하겠습니다.”했다. 어머니가 홀연히 꿈에 별이 떨어져 배에 들어왔는데 잉태하였다. 태어난 날은 석존과 같은 날이었으므로 이름을 선종랑이라 했다. 정신과 뜻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문사가 넉넉해져 세상의 취미에 물들지 않았다. 일찍 두 부모를 잃고 티끌과 시끄러움을 싫어하여 처와 자식을 버리고 전원을 내어 원녕사를 세웠다. 홀로 그윽하고 험한 곳에 처하여 이리와 범을 피하지 않았다. 고골관을 닦았는데 조금 혹 게으름이 일면 곧 작은 집을 짓어 둘레를 가시로 막고 벌거벗은 채 그 안에 앉았다. 움직이면 문득 가시에 찔리게 하였으며, 머리를 들보에 거는 것으로서 어둡고 흐릿한 것을 열었다. 마침 태보가 비자 문벌로 논의에 해당하여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왕이 이에 명령해 말하기를 나오지 않으면 베어 죽이겠다.”했다.

 

藏聞之曰 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 事聞 上許令出家 乃深隱岩叢 粮粒不恤 時有異禽 含菓來供 就手而喰 俄夢天人來授五戒 方始出谷 鄕邑士女 爭來受戒 藏自嘆邊生 西希大化

자장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하루동안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100년동안 계를 깨트리기를 원하지 않는다.”했다. 이 말을 듣고 왕이 축가를 허락하였다. 이에 빽빽한 바위 안에 깊이 숨으니 (아무도) 양식 한 톨을 구휼하지 않았다. 그 때 이상한 짐승이 있어 과일을 물고 와 바치자 손을 내밀어 받아먹었다. 홀연히 꿈에 천인이 와 5계를 주었다. 비로소 골짜기를 나오니 향읍의 남녀가 다투어 와 계를 받았다. 자장이 스스로 변방에 태어난 것을 탄식하다 서쪽에서 크게 교화하기를 바랐다.

 

以仁平三年丙申歲(卽貞觀十年也)受勅 與門人僧實等十餘輩 西入唐 謁淸凉山 山有曼殊大聖塑相 彼國相傳云 帝釋天將工來彫也 藏於像前禱祈冥感 夢像摩頂授梵偈 覺而未解 及旦有異僧來釋云(已出皇龍塔篇) 又曰 雖學萬敎 未有過此 又以袈裟舍利等付之而滅(藏公初匿之 故唐僧傳不載) 藏知已蒙聖莂 乃下北臺 抵太和池 入京師

인평 3년 병신년(즉 정관 10년이다.) 칙명을 받아 문인인 중 실 등 10여명과 함께 서쪽으로 당나라에 들어 가 청량산에서 (성인을)뵈었다. 산에는 만수대성릐 소상이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서로 전하기를 제석천이 장을 데리고 와 조각했다.”고 한다. 자장이 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에 잠기니 꿈에 상이 이마를 쓰다듬으며 범어로 된 게를 주었다. 꿈에서 깨었으나 풀지(해석하지) 못하였다. 아침이 되자 이상한 중이 와 풀어 말하였다.(이미 황룡사 탑 편에 나왔다.) 또 말하기를 비록 만 가지 가르침을 배울지라도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했다. 또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 사라졌다.(자장공이 처음에 그것을 숨겼기 때문에 승전에는 실리지 않았다.) 자장이 이미 문수대성의 기별을 입은 것을 알고 이에 북대를 내려가 태화지에 이르러 경사(당의 서울 장안)에 들어갔다.

 

太宗勅使慰撫 安置勝光別院 寵賜頗厚 藏嫌其繁 擁啓表入終南雲際寺之東崿 架嵓爲室 居三年 人神受戒 靈應日錯 辭煩不載 旣而再入京 又蒙勅慰 賜絹二百匹 用資衣費 貞觀十七年癸卯 本國善德王上表乞還 詔許 引入宮 賜絹一領 雜綵五百端 東宮亦賜二百端 又多禮貺

태종이 명령으로 위로하게 하고 승광별원에 머물게 하였다. 은총과 내린 물건이 자못 많았으나 자장이 그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표를 올려 종남산 운제사의 종쪽 절벽에 들어 가 바위에 나무를 걸쳐 방을 만들고 3년을 살았다. 사람과 신이 계를 받아 신령스러운 응대가 날로 많아졌으나 말이 번잡하여 싣지 않는다. 이윽고 다시 서울에 들어오자 황제가 칙사를 보내 위로하고 비단 200필을 내려 의복의 비용으로 쓰게 했다. 정관 17년 계묘에 본국의 선덕왕이 표를 올려 돌려보내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고, 궁으로 이끌어 들여 비단 1령과 잡채 500단을 내렸다. 동궁이 또한 200단을 내리주고 또 많은 예물을 주었다.

 

藏以本朝經像未充 乞齎藏經一部 洎諸幡幢花蓋 堪爲福利者皆載之 旣至 洎擧國欣迎 命住芬皇寺(唐傳作王芬) 給侍稠渥 一夏請至宮中 講大乘論 又於皇龍寺演菩薩戒本七日七夜 天降甘澍 雲霧暗靄 覆所講堂 四衆咸服其異 朝廷議曰 佛敎東漸 雖百千齡 其於住持修奉 軌儀闕如也 非夫綱理 無以肅淸 啓勅藏爲大國統 凡僧尼一切規猷 總委僧統主之

자장이 본조(신라)에 경전과 불상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장경 1, 여러 가지 번당과 화개에 이르기까지 복리가 될 만한 것을 청해 모두 실었다. 돌아오니 온 나라가 기쁘게 맞이하였다. 왕이 분황사(당전에는 왕분이라 썼다.)에 머물게 하고, 급여와 시위는 많고 극진했다. 어느 여름에 궁중에 이르러 대승 경전을 강론하게 하였고, 또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7일 낮, 7일 밤을 강연하게 하니 하늘에서 단 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강당을 덮었다. 4부대중이 모두 그 신이함에 감탄하였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말하기를 불교가 동쪽으로 무젖은 것이 비로 백, 천년이지만 그 주지를 받들고 닦는 규범이 빠져 있었다. 대저 통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그릇된 일을 바로잡을 수 없다.”했다. 이에 칙명으로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고 모든 중들의 일체 규율을 승통에게 총괄하여 맡겨 주관하게 하였다.

 

(按 北齊天寶中 國置十統 有司卷宜甄異之 於是 宣帝以法上法師爲大統 餘爲通統 又梁陳之間 有國統州統國都州都僧都僧正都維乃等名 總屬昭玄曹 曹卽領僧尼官名 唐初又有十大德之盛 新羅眞興王十一年庚午 以安藏法師爲大書省一人 又有小書省二人 明年辛未 以高麗惠亮法師爲國統 亦云寺主 寶良法師爲大都維那一人 及州統九人 郡統十八人等 至藏更置大國統一人 蓋非常職也 亦猶夫禮郎爲大角干金庾信大大角干 後至元聖大王元年 又置僧官名政法典 以大舍一人史二人爲司 揀僧中有才行者爲之 有故卽替 無定年限 故今紫衣之徒 亦律寺之別也 鄕傳云 藏入唐 太宗迎至武乾殿 請講華嚴 天降甘露 開爲國師云者 妄矣 唐傳與國史皆無文)

(살펴보니 북제 천보 연간에는 나라에 십통을 두었는데 유사가 아뢰기를 마땅히 직위를 다르게 해야 합니다.”했다. 이에 선제가 법상법사로서 대통을 삼고, 나머지는 통통으로 삼았다. 또 양나라 시기와 진나라 시가 사이에는 국통, 주통, 국욱, 주욱, 승정, 도유내 등의 이름이 있었는데 모두 소현조에 속하게 했다. 소현조는 곧 중들을 거느리는 관직 이름이다. 당나라 초에 또한 10 대덕의 성대함이 있었다. 신라 진흥왕 11년 경오에 안장법사로서 대서성을 삼았는데 한 사람뿐이었다. 또 소서성이 있는데 두 사람이 있었다. 다음해 신미에 고려 혜량법사로서 국통을 삼았는데 또 사주라고도 한다. 보량법사를 대도유나로 삼았는데 한 사람이었고, 주통은 9, 군통은 18명 등이었다. 자장이 이르자 다시 대국통 한 사람을 두었는데 대개 항상있는 직은 아니었다. 또 부례랑을 대각간, 김유신을 대대각간으로 삼은 것과 같다. 후에 원성대왕 1년에 이르러 또 승관을 두었는데 정법전이라 이름하고, 대사 한 사람, 사 두 사람으로 사를 삼았다.(일을 맡게 하였다.) 중들 중에 재능과 행실이 있는 자를 가려 삼았다. 일이 있으면 곧 바꾸는데 정해진 연한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자의의 무리들은 또한 율사와는 구별된다. 향전에 자장이 당나라에 들어가니 태종이 맞아 무건전에 이르자 화엄을 강론해 줄 것을 청하였다. 하늘에서 단 이슬이 내리자 비로소 국사로 삼았다 한 것은 잘못이다. 당전과 국사에는 모두 글이 없다.)

 

藏値斯嘉會 勇激弘通 令會尼五部各增舊學 半月說戒 冬春惣試 令知持犯 置員管維持之 又遣巡使 歷檢外寺 誡礪僧失 嚴飾經像爲恒式 一代護法 於斯盛矣 如夫子自衛返魯 樂正雅頌 各得其宜 當此之際 國中之人 受戒奉佛 十室八九 祝髮請度 歲月增至 乃創通度寺 築戒壇以度四來(戒壇事已出上) 又改營生緣里第元寧寺 設落成會 講雜花萬偈 感五十二女現身證聽 使門人植樹如其數 以旌厥異 因號知識樹

자장은 이런 좋은 기회를 만나 용맹하게 나아가 널리 불교를 전파했다. 승니 5부에 각각 구학을 더 증가시키고 보름마다 계를 설명하며 겨울과 봄에는 모아 시험하여 지범을 알게 하고 관원을 두어 유지하게 하였다. 또 순사를 보내 밖에 있는 절들을 점검하여 중의 잘못을 경계하고(징계하고) 불경과 불상을 엄밀히 꾸미는 것을 항상된 법으로 삼으니 일대의 법을 보호함이 이에 성대하게 되었다. 마치 부자(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와 음악을 바로잡자 아송이 각각 그 마땅함을 얻은 것과 같았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나라 안의 사람들이 게를 받고, 부처를 받드는 것이 10 집 중 8, 9 집이었다. 머리를 깍고 중이 되기를 청하는 이들이 해와 달로 더욱 늘어남에 이르렀다. 이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계단을 쌓는 것으로서 사방에서 오는 이를 제도하였다.(계단의 일은 이미 위에 나왔다.) 또 태어난 인연이 있는 마을의 집을 고쳐 지어 원녕사라 하고, 낙성회를 열고, 잡화(화엄) 만 게를 강론하니 52녀가 감동하여 몸을 드러내 강론을 들었다. 문인으로 하여금 나무를 심되 그 수와 같게 하는 것으로서 그 기이함을 표시하고 지식수라 이름하였다.

 

嘗以邦國服章不同諸夏 擧議於朝 簽允曰臧 乃以眞德王三年己酉 始服中朝衣冠 明年庚戌又奉正朔 始行永徽號 自後每有朝覲 列在上蕃 藏之功也 暮年謝辭京輦 於江陵郡(今冥州也)創水多寺居焉 復夢異僧 狀北臺所見 來告曰 明日見汝於大松汀 驚悸而起 早行至松汀 果感文殊來格 諮詢法要

일찍이 나라의 복식이 중국과 같지 않아 조정에 건의하니 허락하면서 좋다고 했다. 곧 진덕왕 3년 기유에 처음 중국의 의관을 입게 되었다. 다음해 경술에 또 정삭(연호)을 받들어 처음 영휘의 호를 행하였다. 이후로부터 매번 조근할 때마다 서열이 제후의 윗자리에 있은 것은 자장의 공이다. 만년에는 서울을 하직하고 강릉군(지금의 명주이다.)에 수다사를 창건하고 여기에 살았다. 다시 이상한 중이 꿈에 보였는데 모습이 북대에서 본바와 같았다. 그 중이 와서 고하여 말하기를 내일 대송정에서 너를 보겠다.”했다. 놀라 두근거리며 일어나 일찍 가서 대송정에 이르니 과연 문수보살이 감응하여 이르니 불법의 요점을 물었다.

 

乃曰 重期於太伯葛蟠地 遂隱不現(松汀 至今不生荊剌 亦不棲鷹鸇之類云) 藏往太伯山尋之 見巨蟒蟠結樹下 謂侍者曰 此所謂葛蟠地 乃創石南院(今淨岩寺) 以候聖降 粤有老居士 方袍襤縷 荷葛簣 盛死狗兒 來謂侍者曰 欲見慈藏來爾 門者曰 自奉巾箒 未見忤犯吾師諱者 汝何人 斯爾狂言乎? 居士曰 但告汝師 遂入告 藏不之覺曰 殆狂者耶! 門人出詬逐之 居士曰 歸歟歸歟! 有我相者 焉得見我 乃倒簣拂之 狗變爲師子寶座 陞坐放光而去

이에 말하기를 다시 태백 갈반지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는 마침내 보이지 않았다.(송정은 지금에도 가시가 나지 않고, 또 매와 새매 따위가 깃들지 않는다한다.) 자장이 태백산에 가 찾는데 커다란 구렁이가 나무 아래 서리어 있는 것을 보고 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여기가 이른 바 갈반지이다.”했ᄃᆞ. 이에 석남원(지금의 정암사)을 창건하고 성인(문수대성)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거사 한사람이 남루한 옷을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고 와 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자장을 보려고 왔다.”했다. 문지기가 말하기를 수건과 빗자루를 받들고부터 우리 스님의 이름을 거스르고 범하는(함부로 부르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너는 누구인데 이런 미친 말을 하는가?”했다. 거사가 말하기를 단지 어의 스승에게 알리기만 하라.”했다. 마침내 들어 가 고하니 자장이 깨닫지 못하고 말하기를 아마도 미친 자일 것이다.”했다. 문인이 나와 꾸짖으며 내쫒았다. 거사가 말하기를 돌아갈거나! 돌아갈거나! 아상을 둔자가 어찌 나를 만날 수 있겠는가?”하고는 곧 삼태기를 뒤집어 흔드니 개가 사자보좌로 변하였다. 올라 앉아 빛을 뿌리며 갔다.

 

藏聞之 方具威儀 尋光而趨登南嶺 已杳然不及 遂殞身而卒 茶毗安骨於石穴中 凡藏之締構寺塔 十有餘所 每日與造必有異祥 故蒲塞供塡市 不日而成 藏之道具布襪 幷大和龍所獻木鴨枕 與釋尊由衣等 合在通度寺 又巘陽縣(今彦陽)有鴨遊寺 枕鴨嘗遊此現異 故名之 又有釋圓勝者 先藏西學 而同還桑梓 助弘律部云 讚曰 曾向淸凉夢破廻 七篇三聚一時開 欲令緇素衣慚愧 東國衣冠上國裁

자장이 그것을 듣고 비로소 위의를 갖추어 빛을 찾아 달려 남쪽 고개에 올랐으나 이미 아득하여 미치지 못하였다. 마침내 몸을 던져 죽었다. (시체를) 화장하여 뼈를 돌구멍 안에 안치하였다. 자장이 세운 절과 탑이 10여 곳으로 매번 만들 때마다 기이한 상서로움이 있었다. 그러므로 포색(우바새)들의 바침이 거리를 메우고, 하루가 되지 않아 이루어졌다. 자장의 도구, 옷감, 버선과 대화지의 용이 용이 바친 나무오리 베개와 석존의 유의 등은 모두 모아 통도사에 두었다. 또 헌양현(지금의 언양)에 압유사가 있는데 침압이 일찍이 여기에서 노니는 이상한 일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또 중 원승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자장이 서학하기에 앞서 유학하고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널리 율부를 펴는 것을 도왔다. 기려 말한다.

일찍이 청량산에 가 꿈을 깨트리고 돌아오니 73취가 한꺼번에 열렸다. 치소의 옷을 부끄럽게 여겨 동국의 의관을 중국처럼 만들었다.”했다.

 

元曉不覊

聖師元曉 俗姓薛氏 祖仍皮公 亦云赤大公 今赤大淵側有仍皮公廟 父談捺乃末 初 示生于押梁郡南(今章山郡)佛地村北 栗谷娑羅樹下 村名佛地 或作發智村(俚云弗等乙村) 娑羅樹者 諺云 師之家本住此谷西南 母旣娠而月滿 適過此谷栗樹下 忽分産 而倉皇不能歸家 且以夫衣掛樹 而寢處其中 因號樹曰娑羅樹 其樹之實亦異於常 至今稱娑羅栗

원효불기

성사(성스러운 스님) 원효는 세속의 성이 설씨로 할아버지 잉피공 또한 적대공이라 한다. 지금 적대연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날내말이다. 처음 압량군 남쪽(지금의 장산군이다.) 불지촌 북쪽 율곡(밤나무골) 사라수 아래서 태어났다. 촌 이름은 불지, 혹은 발지촌(속언에 불등을촌이라 한다.)이라 쓴다. 사라수는 민간에서 말하기를 스님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어머니가 임신하여 달이 차서 이 골짜기 밤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문득 해산하게 되었다. 몹시 급하였으므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여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안에서 누워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나무를 사라수라 불렀다. 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보통과 달라 지금도 사라율이라 부른다.

 

古傳 昔有主寺者 給寺奴一人 一夕饌栗二枚 奴訟于官 官吏怪之 取栗檢之 一枚盈一鉢 乃反自判給一枚 故因名栗谷 師旣出家 捨其宅爲寺 名初開 樹之旁置寺曰娑羅 師之行狀云 是京師人 從祖考 唐僧傳云 本下湘州之人

옛날부터 전해지기로는 옛날에 절을 주관하는 자가 있었는데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밥으로 밤 2개를 주었다. 종이 관청에 소송을 하니 관리가 괴이하게 여겨 밤을 가져다 점검해보니 하나가 하나의 대접에 가득찼다. 이에 도리어 판결 이후로부터는 하나씩을 주게 하였다. 그 때문에 율곡(밤나무골)이라 했다.”한다. 스님이 출가한 후 그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이름을 초개사라 했다. 나무(사라수) 옆에 절을 두고 사라사라 했다. 스님의 행장에 경사인(서울 사람)이다.”한 것은 할아버지를 따른 것이다. 당승전에는 본래 하상주 사람이다.”했다.

 

 

按 麟德二年間 文武王割上州下州之地 置歃良州 則下州乃今之昌寧郡也 押梁郡本下州之屬縣 上州則今尙州 亦作湘州也 佛地村今屬慈仁縣 則乃押梁之所分開也 師生小名誓幢 第名新幢(幢者俗云毛也) 初母夢流星入懷 因而有娠 及將産 有五色雲覆地 眞平王三十九年 大業十三年丁丑歲也

살펴보니 인덕 연간에 문무왕이 상주, 하주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에 두었으니 곧 하주는 지금의 창녕군이다. 압량군은 본래 하주의 속현이었고, 상주는 곧 지금의 상주이니 도한 상주라고도 쓴다.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에 속하니 곧 압량에서 나누어진 것이다. 스님이 태어나 어렸을 때 이름은 서당이고, 다음으로 신당(당은 속에서 털이다.)이라 했다. 처음 어머니가 유성이 흘러 배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낳을 때가 되자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 진평왕 39년 대업 13년 정축년이다.

 

生而穎異 學不從師 其遊方始末 弘通茂跡 具載唐傳與行狀 不可具載 唯鄕傳所記有一二段異事 師嘗一日風顚唱街云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人皆未喩 時 太宗聞之曰 此師殆欲得貴婦 産賢子之謂也 國有大賢 利莫大焉

나면서 총명하여 배움에 스승을 따르지 않고 사방을 돌아다닌 시작과 끝, 불교를 널리 통하게 한 무성한 자취는 모두 당전과 행장에 실려 있으니 모두 싣지 않고 오직 향전에 기록된 하나 둘의 기이한 일이 있다. 스님이 일찍이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나 거리에 노래 불러 이르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허락하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깍겠다.”했다. 사람들이 모두 미처 깨닫지 못하였는데 태종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이 스님이 자못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자 해서 하는 말이다. 나라에 크데 어진이가 있으면 이로움이 이보다 큼이 없을 것이다.”했다.

 

時瑤石宮(今學院是也)有寡公主 勅宮吏覓曉引入 宮吏奉勅將求之 已自南山來過蚊川橋(沙川 俗云年川 又蚊川 又橋名楡橋也)遇之 佯墮水中濕衣袴 吏引師於宮 褫衣曬㫰 因留宿焉 公主果有娠 生薛聰 聰生而睿敏 博通經史 新羅十賢中一也

以方音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 至今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

그때 요석궁(지금의 학원이 이것이다.)에 과부공주가 있었다. 궁궐이 관리에게 명하여 원효와 함께 궁궐에 들어오게 하였다. 궁궐의 관리가 명을 받들어 찾다가 이미 남산에서 와 문천교(사천, 세속에서는 연천이라 한다. 또 문천이라 하고, 또 다리의 이름을 유교라 한다.)를 지나는 것을 만나게 되었다. (원효가) 거짓으로 물 안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 관리가 스님을 이끌고 궁에 들어 가 옷을 말리게 하였다. 이 때문에 여기서(요석궁) 묵게 되었다. 공주가 과연 잉태하여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 지혜롭고 민첩하고 경전과 역사서에 널리 통하였으니 신라 10현 중의 한 사람이다. 신라의 음으로서 중국과 오랑캐 지방의 풍속과 물건의 이름을 통하고 6경과 문학을 풀어 해석하였다. 지금까지 명경을 업으로 하는 자들이 전해 받아 이어지고 있다.

 

曉旣失戒生聰 已後易俗服 自號小姓居士 偶得優人舞弄大瓠 其狀瑰奇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經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 命名曰無㝵 仍作歌流于世 嘗持此 千村萬落且歌且舞 化詠而歸 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佛陀之號 咸作南無之稱 曉之化大矣哉!

원효가 설총을 낳아 계를 잃은 이후에 세속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이름하였다. 우연히 광대가 춤추며 희롱하는 큰 조롱박을 얻었는데 그 형상이 괴상했다. 그 형상에 따라 도구를 만들고, 화엄경의 일체 장애가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벗어난다.”는 글귀를 따 무애라 이름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하게 하였다. 일찍이 이것을 지니고 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읇다가 돌아오니 가난한 사람과 원숭이를 잡는 무리(몽매한 무리)들이 모구 불타의 이름을 알았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의 일컳게 하였으니 원효의 교화가 크도다!

 

其生緣之村名佛地 寺名初開 自稱元曉者 蓋初輝佛日之意也 元曉亦是方言也 當時人皆以鄕言稱之始旦也 會住芬皇寺 纂華嚴䟽 至第四十廻向品 終乃絶筆 又嘗因訟 分軀於百松 故皆謂位階初地矣 亦因海龍之誘 承詔於路上 撰三昧經䟽 置筆硯於牛之兩角上 因謂之角乘 亦表本始二覺之微旨也 大安法師排來而粘紙 亦知音唱和也

그가 태어잔 촌의 이름을 불지라 하고, 절의 이름을 초개라 하고, 스스로 이름을 원효라 한 것은 대개 처음 불교를 빛나게 한다는 뜻이다. 원효는 또한 방언이며, 당시 사람들이 모두 향언으로 새벽이라 하였다. (원효는)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소를 찬술하다가 제40 회향품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놓았다. 또 일찍이 송사로 말미암아 몸을 백송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모두 위계의 초지라 일렀다. 또한 해룡의 권유로 인하여 길 위에서 조서를 받들어 삼매경소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두었기 때문에 각승이라 이름하였으니 또한 본시 두 각의 미묘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가 와서 종이를 붙였는데 또한 지음하여 서로 창화한 것이다.

 

旣入寂 聰碎遺骸 塑眞容 安芬皇寺 以表敬慕終天之志 聰時旁禮 像忽廻顧 至今猶顧矣 曉嘗所居穴寺旁 有聰家之墟云 讚曰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眼去 門掩芬皇顧影空 廻顧至

입적한 후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소상으로 참된 얼굴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여 공경하고 사모하여 한평생 슬픈 한의 뜻을 표시하였다. 설총이 곁에서 예배할 때는 홀연히 상이 돌아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본 것과 같다.(돌아 본 그대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살았던 혈사 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한다. 기려 말한다. “각승이 처음 삼매의 축을 열었고, 춤추며 희롱하던 병은 마침내 온갖 거리의 바람으로 걸렸다.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자고 떠나니 문 닫힌 분황사에는 돌아보는 모습만 비었다. 돌아봄이 지극하다.

 

義湘傳敎

法師義湘 考曰韓信 金氏 年二十九依京師皇福寺落髮 未幾 西圖觀化 遂與元曉道出遼東 邊戍邏之爲諜者 囚閉者累旬 僅免而還(事在崔侯本傳 及曉師行狀等) 永徽初 會唐使舡有西還者 寓載入中國 初止揚州 州將劉至仁請留衙內 供養豊贍 尋往終南山至相寺 謁智儼 儼前夕夢一大樹生海東 枝葉溥布 來蔭神州 上有鳳巢 登視之 有一摩尼寶珠 光明屬遠 覺而驚異 洒掃而待

의상전교

법사의상은 아버지가 한신이고, 김씨이다. 나이 29세에 경사(서울) 황복사에서 머리를 깍고 얼마 후 서쪽으로 교화를 볼 것을 도모하였다. 마침내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다. 변경의 순라가 첩자로 여겨 가두어진 지 수십일에야 겨우 면하고 돌아왔다.(일은 최후 본전과 원효 스님 행장 등에 있다.) 영휘초 당나라 사신의 배를 만나 서쪽으로 가는 자가 있어 (배를)타고 중국에 들어갔다. 처음에 양주에 머물렀는데 양주의 장수 유지인이 관청 안에 머물 것을 청하고 공양을 풍성하고 넉넉하게 하였다. 종남산 지상사에 찾아 가 지엄을 뵈었다. 지엄이 앞서 저녁 꿈에 하나의 큰 나무가 해동에 났는데 가지와 잎이 넓게 퍼졌는데 신주까지 와 덮었다. (나무)위에는 봉의 둥지가 있어 올라가 보니 하나의 마니보주가 있었는데 그 빛이 멀리까지 비추었다. 개고나서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 물 뿌리고 비질하고 기다렸다.

 

湘乃至 殊禮迎際 從容謂曰 吾昨者之夢 子來投我之兆 許爲入室 雜花妙旨 剖析幽微 儼喜逢郢質 克發新致 可謂鉤深索隱 藍茜沮本色 旣而本國承相金欽純(一作仁問)良圖等 往囚於唐 高宗將大擧東征 欽純等密遣湘誘而先之 以咸享元年庚午還國 聞事於朝 命神印大德明朗 假設密壇法禳之 國乃免

의상이 곧 이르자 특별한 예로 맞으며 조용히 일러 말하기를 나의 어젯밤 꿈은 그대가 와 나에게 들어올 조짐이었구나.”하고는 입실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의상은) 잡화(화엄)의 현묘한 뜻을 그윽하고 은미한 부분까지 해석하였다. 이엄이 학문을 서로 논의할 만한 상대를 기쁘게 만나 새로운 이치를 개발할 수 있었으니 깊이 숨은 것을 찿아 내니 남초와 천초가 본래 색을 막은 것이라 하겠다. 이윽고 본국에서 승상 김흠순(인문이라 쓰기도 한다.), 양도 등이 당나라에 갔다가 갇혀 있었다. 고종이 장차 큰 군대를 일으켜 동쪽을 정벌하려하자 김흠순 등이 비밀리에 의상에게 먼저 돌아 갈 것을 권하였다. 함형 1년 경오에 나라로 돌아와 조정에 일을 알리니 신인종 대덕 명랑으로 하여금 밀단을 가설하고 기도하였더니 나라가 곧 면할 수 있었다.

 

儀鳳元年 湘歸太伯山 奉朝旨創浮石寺 敷敞大乘 靈感頗著 終南門人賢首撰搜玄疏 送副本於湘處 幷奉書懃懇 曰 西京崇福寺僧法藏 致書於海東新羅華嚴法師侍者 一從分別二十餘年 傾望之誠 豈離心首 加以烟雲萬里 海陸千重 恨此一身不復再面 抱懷戀戀 夫何可言 故由夙世同因 今生同業 得於此報 俱沐大經 特蒙先師授玆奧典 仰承上人歸鄕之後 開演華嚴 宣揚法界無盡緣起 重重帝網 新新佛國 利益弘廣 喜躍增深

의봉 1년 의상이 태백산에 가 조정의 명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대승을 폈더니 영감이 자못 드러났다. 종남 문인 현수가 수현소를 지어 부본을 의상이 있는 곳에 보내면서 아울러 은근한 뜻이 담긴 글을 받들었다. 편지에 서경 숭복사 중 법장은 해동 신라 화엄법사의 시자에게 들을 보냅니다. 한번 작별한지 20여년이 되었으니 바람을 다하는 정성이 어찌 마음과 머리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연기와 구름이 만 리나 되고, 바다와 땅이 쳔 겹이나 쌓였으니 이 한 몸이 다시 보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회포에 연연함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전생의 같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지금 세상에서 함께 업을 내는 이런 과보를 얻어 대경(화엄경)에 목욕하고, 특히 선사(지엄)가 준 이 오묘한(깊은) 법을 입었습니다. 우러러 듣건 데 상인(의상)이 고향에 돌아 간 뒤 화엄을 강연하여 법계무진연기를 펴 드날려 겹겹의 제망(무진연기)으로 부처의 교화가 성대한 나라를 새롭고 새롭게 하여 이익을 넓혔다. 하니 기뻐 뜀이 더욱 깊습니다.

 

是知如來滅後 光輝佛日 再轉法輪 令法久住者 其唯法師矣 藏進趣無成 周旋寡況 仰念玆典 愧荷先師 隨分受持 不能捨離 希憑此業 用結來因 但以和尙章踈 義豊文簡 致令後人多難趣入 是以錄和尙微言妙旨 勒成義記 近因勝詮法師抄寫還鄕 傳之彼土 請上人詳檢臧否 幸示箴誨 伏願當當來世 捨身受身 相與同於廬舍那 聽受如此無盡妙法 修行如此無量普賢願行 儻餘惡業 一朝顚墜 伏希上人不遺宿昔 在諸趣中 示以正道 人信之次 時訪存沒 不具(文載大文類)

이에 여래께서 돌아가신 후 부처의 빛을 빛나게 하고, 다시 법의 수레바퀴를 굴려 법을 오래 머물게 한자는 오직 법사임을 알았습니다. 법장은 나아가려하나 이룸은 없고, 주선함도 모자랍니다.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하매 선사에게 부끄러울 뿐입니다. 분수를 따라 받아 지녀 버리고 떠날 수 없으니 이 업에 의지해 오는 인연을 써 맺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화상의 장소는 뜻은 풍부하나 글이 간략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많이 달려 들어가기 어렵게 함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화상의 은미한 말과 현묘한 가르침을 기록하여 의기를 이루었습니다. 요즘 승전법사가 베껴 써 고향을 돌아갔으니 그 땅에 전할 것입니다. 상인께서는 좋고 나쁨을 자세하게 검토하여 가르침을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엎드려(내가) 원하는 것은 마땅히 내세에는 몸을 버리고 몸을 받아 서로 더물어 함께 노사나의 이 같은 다함이 없는 현묘한 법을 들어 받고, 이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보현원행을 수행하면 남은 악업이 하루아침에 뒤집어지고 떨어질 것입니다. 엎드려(내가) 바라는 것은 상인께서 묵은 것을 남기지 마시고(옛일을 잊지 마시고) 여러 취 가운데서 바른 도를 보여주십시오. 인편이 있을 때 때로 안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안부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갖추지 않습니다.(글은 대문류에 실려 있다.)

 

湘乃令十刹傳敎 太伯山浮石寺 原州毗摩羅 伽耶之海印 毗瑟之玉泉 金井之梵魚 南嶽華嚴寺等 是也 又著法界圖書印幷畧䟽 括盡一乘樞要 千載龜鏡 競所珍佩 餘無撰述 嘗鼎味一臠足矣 圖成總章元年戊辰 是年儼亦歸寂 如孔氏之絶筆於獲麟矣

의상은 이에 10(10개 절)로 하여금 가르침을 전하게 하였다. 태백산 부석사, 원주 비마라,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남악 화엄 등이 이것이다. 또 법계도서인과 약소를 지어 일승의 중요한 요점을 모두 다하여 천년의 귀감이 되게 하니 다투어 보배로 여겨 지녔다. 나머지 지어 설명한 것이 없으나 솥의 맛은 한 점 고기를 맛보면 충분한 것이다. 도가 이루어진 것은 총장 1년 무진이니 이 해는 지엄이 또한 돌아가신 해로 공씨(공자)가 기린을 잡음에서 붓을 놓은 것과 같다.

 

世傳湘乃金山寶蓋之幻有也 徒弟悟眞智通表訓眞定眞藏道融良圓相源能仁義寂等十大德爲領首 皆亞聖也 各有傳 眞嘗處下柯山鶻嵒寺 每夜伸臂點浮石室燈 通著錐洞記 蓋承親訓 故辭多詣妙 訓曾住佛國寺 常往來天宮 湘住皇福寺時 與徒衆繞塔 每步虛而上 不以階升 故其塔不設梯磴 其徒離階三尺 履空而旋 湘乃顧謂曰 世人見此 必以爲怪 不可以訓世 餘如崔侯所撰本傳 讚曰 披榛跨海冒烟塵 至相門開接瑞珍 釆釆雜花栽故國 終南太伯一般春

세상에서 전하기로 의상은 곧 금산보개의 화신이라 한다. 제자로는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도 상원, 능인, 의적 등 10대덕이 우두머리가 되는데 모두 성인에 버금가고, 각각 전기가 있다.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 골암사에 있었는데 매일 밤 팔을 뻗어 부석사 석등에 불을 켰다. 지통은 추동기를 저술하였는데 대개 친히 의상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말에 많이 정묘하였다. 표훈은 불국사에서 살면서 항상 천궁을 왕래하였다. 의상이 황보가에 살 때 무리들과 함께 탑을 도는데 매번 허공을 밟고 오르고, 계단으로 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탑은 계단을 만들지 않았다. 그 무리들도 계단을 3자나 떠서 허공을 밟고 돌았다. 의상이 이에 돌아보며 일러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보면 반드시 괴이하게 여길 것이니 세상에 가르칠 수 없다.”했다. 나머지는 최후가 지은 본전과 같다. 기려 말한다. “덤불과 연기, 먼지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니 지상사 문 열려 귀한 손으로 대접하였다. 잡화(화엄)를 꺽어 고국에 심으니 종남산(지상사)과 태백산(부석사)이 같은 봄이로다.”

 

虫也福不言

京師萬善北里有寡女 不夫而孕 旣産 年至十二歲 不語亦不起 因號虫也童(下或作虫也卜 又巴又伏等 皆言童也) 一日其母死 時元曉住高仙寺 曉見之迎禮 福不答拜而曰 君我昔日駄經牸牛 今已亡矣 偕葬何如? 曉曰諾 遂與到家 令曉布薩授戒 臨尸祝曰 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 福曰 詞煩 更之曰 死生苦兮!

사복불언

경사(서울) 만선리 북쪽 마을에 한 과부가 있었다.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낳았는데 나이가 12세에 이르도록 말하지도 또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이 때문에 충야동(아래서는 혹 충야복, 또 파우복 등이라 썼는데 모두 아이를 말한다.) 하루는 그 어미가 죽었다. 그 때 원효가 고선사에서 살고 있었다. (사복이 찾아오자) 원효가 그를 보고 우러러 예를 하였다. 사복이 대답 없이 절하며 말하기를 그대와 내가 옛날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지금 죽었다. 함께 장사하는 것이 어떠한가?”했다. 원효가 허락하고 마침내 함께 집에 이르렀는데 (사복이) 원효로 하여금 포살하고 계를 주게하니 (원효가) 시신을 마주하고 축원하여 말하기를 태어나지 말지어다. 그 죽음이 괴롭구나! 죽지 말지어다. 그 태어남이 괴롭구나!”했다. 사복이 말하기를 말이 번거롭다고 하자.” (원효가)고쳐 말하기를 죽음과 삶이 괴로움이로다!’”했다.

 

二公轝歸活里山東麓 曉曰 葬智惠虎於智惠林中 不亦宜乎? 福乃作偈曰 往昔釋迦牟尼佛 裟羅樹間入涅槃 于今亦有如彼者 欲入蓮花藏界寬 言訖拔茅莖 下有世界 晃朗淸虛 七寶欄楯 樓閣莊嚴 殆非人間世 福負尸共入 其地奄然而合 曉乃還 後人爲創寺於金剛山東南 額曰道場寺 每年三月十四日 行占察會爲恒規 福之應世 唯示此爾 俚諺多以荒唐之說託焉 可笑! 讚曰 淵黙龍眠豈等閑 臨行一曲沒多般 苦兮生死元非苦 華藏浮休世界寬

두 공이 상여를 메고 활리산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범을 지혜의 숲에 장사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는가?” 했다. 사복이 이에 게를 지어 말하기를 지난 옛날 석가모니부처께서는 사라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셨고, 지금에 또한 그 같은 자가 있어 연화장세계로 들고자 하네.”하는 말을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아래에 세계가 있는데 명랑하고 청허하며, 칠보로 장식된 누각이 장엄하여 반드시 인간의 세상이 아니었다. 사복이 시체를 지고 함께 들어가니 그 땅이 문득 합쳐졌다. 원효가 곧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이 금강산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도장사라 했다. 매년 314일 점찰회를 여는 것을 항상된 규칙으로 삼았다. 사복에 세상에 응한 것은 오직 이를 보였을 뿐이다. 세상에서는 황당한 얘기를 덧붙였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기려 말한다. 못의 말없이 잠자는 용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임종에 부른 한 곡 간단하기도 해라. 괴로운 삶과 죽음은 원래 괴로움이 아닌데 연화장세계가 넓어보인다.

 

眞表傳簡

釋眞表 完山州(今全州牧)萬頃縣人(或作豆乃山縣 或作那山縣 今萬頃 古名豆乃山縣也 貫寧傳釋之鄕里 云金山縣人 以寺名及縣名混之也) 父曰眞乃末 母吉寶娘 姓井氏 年至十二歲 投金山寺崇濟法師講下 落彩請業 其師嘗謂曰 吾曾入唐 受業於善道三藏 然後入五臺 感文殊菩薩現受五戒

진표전간

석진표는 완산주(지금의 전주목) 만경현 사람이다.(혹은 두내산현, 혹은 나산현이라 쓴다. 지금의 만경현은 옛 이름이 두내산 현이다. 관녕전에 중의 고향마을로 금산현 사람이라 하였는데 절 이름과 현의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 아버지는 진내말이고, 어머니는 길보랑이며 성은 정씨이다. 나이 12세가 되었을 때 금산사 숭제법사 강석 아래 들어 가 머리를 깍고 업을 청하였다. 그 스승이 일찍이 일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 가 선도삼장에게서 업을 받은 후 오대산에 들어 가 문수보살의 현신에 감응하여 오계를 받았다.”했다.

 

表啓曰 勤修幾何 得戒耶? 濟曰 精至則不過一年 表聞師之言 遍遊名岳 止錫仙溪山不思議菴 該鍊三業 以亡身懺□□□ 初以七宵爲期 五輪撲石 膝腕俱碎 雨血嵒崖 若無聖應 決志捐捨 更期七日 二七日終 見地藏菩薩 現受淨戒 卽開元二十八年庚辰三月十五日辰時也 時齡二十餘三矣 然 志存慈氏 故不敢中止 乃移靈山寺(一名邊山 又楞伽山) 又懃勇如初 果感彌力現授占察經兩卷(此經乃陳隋間外國所譯 非今始出也 慈氏以經授之耳)並證果簡子一百八十九介 謂曰

진표가 아뢰어 말하기를 얼마를 부지런히 닦아야 계를 얻을 수 있습니까?”하니 숭제법사가 말하기를 정성이 지극하다면 1년을 지나지 않을 것이다.”했다. 진표가 스승의 말을 듣고 두 이름있는 산을 돌아다니다 선계산 불사의암에 머물면서 삼업을 닦아 망신 참법으로 □□□ 하였다.(계를 얻었다.) 처음 7일 밤을 기한으로 하여 오륜(오체)을 돌에 치니 무릅과 팔뚝이 모두 부서지고 낭떠러지에 피가 비 오듯 하였다. 성인(부처)의 감응이 없자 몸을 버릴 것을 결심하고 다시 7일을 기한으로 하였다. 2(14)의 마지막에 지장보살을 뵙고 정계를 받았으니 곧 개원 28년 경진 315일 진시이다. 그 때 나이 23세였다. 그러나 뜻이 자씨(미륵보살)에게 있었기 때문에 감히 중간에 그만둘 수 없었다. 이에 영산사로 옮겨(변산, 또는 능가산이라 한다.) 또 부지런하고 용맹히 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더니 과연 미륵보살이 감응하여 나타나 점찰경 두 권(이 경은 곧 진나라와 수나라 사이 외국에서 번역된 것으로 지금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자씨(미륵보살)가 경으로서 주었을 뿐이다.)과 증과간자 189개를 주면서 일러 말하기를

 

於中第八簡子 喩新得妙戒 第九簡子 喩增得具戒 斯二簡子是我手指骨 餘皆沈檀木造 喩諸煩惱 汝以此傳法於世 作濟人津筏 表旣受聖莂 來住金山 每歲開壇恢張法施 壇席精嚴 末季未之有也 風化旣周 遊涉到阿瑟羅州 島嶼間魚鼇成橋 迎入水中 講法受戒 卽天寶十一載壬辰二月望日也 或本云元和六年 誤矣 元和在憲德王代(去聖德幾七十年矣)

그 가운데 제 8간자는 새로 얻은 현묘한 계를 비유하고, 9간자는 더하여 구계를 얻음에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단목으로 만든 것으로 여러 번뇌를 비유한 것이다. 너는 이로 법을 세상에 전하여 사람을 구제하는 나루와 뗏목을 만들라.”했다. 진표가 성별을 받은 후 금산사에 와 살면서 매 해 단을 열고 법시를 널리 베풀었다. 단석의 정결하고 엄격함은 말세에 있지 않은 것이었다. 교화가 두루 이루어진 후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아슬라주에 이르니 섬 사이에 물고기, 자라들이 다리를 이루어 물 안으로 맞아들였다. (진표가)법을 강론하니 (물고기, 자라들이)계를 받았다. 곧 천보 11년 임진 2월 보름이다. 어떤 본에는 원화 6년이라 하였는데 잘못이다. 원화는 헌덕왕대(성덕왕으로부터 거의 70년 떨어져 있다.)

 

景德王聞之 迎入宮闥 受菩薩戒 嚫租七萬七千石 椒庭列岳皆受戒品 施絹五百端 黃金五十兩 皆容受之 分施諸山 廣興佛事 其骨石今在鉢淵寺 卽爲海族演戒之地 得法之袖領 曰永深寶宗信芳體珍珍海眞善釋忠等 皆爲山門祖 深則眞表簡子 住俗離山 爲克家子 作壇之法 與占察六輪稍異 修如山中所傳本規

경덕왕이 그것을 듣고 맞아 궁궐에 맞아들여 보살계를 받고 곡식 77,000석을 내렸다. 초정(왕비의 궁전)과 열악(외척)이 모두 계를 받고, 비단 500, 황금 50냥을 베프므로 모두 받아 여려 산에 나누어 널리 불사를 일으켰다. 그의 사리는 지금 금강산 발연사에 있으니 곧 해족(물고기 등)을 위래 계를 주던 곳이다. (진표의) 법을 얻은 영수로는 영심, 보종, 신방, 체진, 진해, 진선, 석충 등이다. 모두 산문의 개산조가 되었다. 영심은 곧 진표의 간자를 가지고 속리산에서 살면서 법통을 이은 제자인데 단을 짓는 법과 점찰육륜은 조금 다르나 닦음은 산 중에 전하는 본규와 같았다.

 

按唐僧傳云 開皇十三年 廣州有僧行懺法 以皮作帖子二枚 書善惡兩字 令人擲之 得善者吉 又行自撲懺法 以爲滅罪而男女合匝 妄承密行 靑州接響 同行官司檢察 謂是妖妄 彼云 ?此搭懺法依占察經 撲懺法依諸經中 五體投地如大山崩? 時以奏聞 乃勅內史侍郎李元撰 就大興寺問諸大德 有大沙門法經彦琮等對曰 ?占察經見有兩卷 首題菩提登在外國譯文 似近代所出 亦有寫而傳者 檢勘群錄 並無正名譯人時處 搭懺與衆經復異 不可依行? 因勅禁之

당 승전을 살펴보니 개황 13년 광주에 참법을 행하는 중이 있었는데 가죽으로 표제 두 개를 만들고 선악 두 글자를 써서 사람으로 하여금 던지게 하여 선을 얻은 자는 길하다고 했다. 또 스스로 박참법을 행하여 죄를 멸한다고 했다. 이에 남녀가 한데 어울려 망녕되이 비밀리 행하니 이것이 청주에 알려졌다. 함께 갔던 관사가 이를 조사하여 보고 요망하다 일렀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 박참법은 여러 경전 중에 의한 것인데 오체를 땅에 던지는 것이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듯이 하였다.’”했다. 그 때 이를 아뢰자 곧 내사시랑 이원찬에게 명하여 대흥사에 가 여러 대덕에게 묻게 하였더니 대사문 법경, 언종 등이 있어 대답해 말하기를 점찰경은 두 권이 있습니다. 책머리에 보제등이 외국에서 번역한 글이라 하니 근래에 나온 듯합니다. 또 사본으로 전하는 것도 있는데 여러 기록을 검사해 보아도 바른 이름, 번역한 사람, 번역된 때, 번역된 곳이 없습니다. 탑참법은 여러 가지 경과는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의해서 행해서는 안 됩니다.”했다. 이 때문에 금할 것을 명령하였다.

 

今試論之 靑州居士等搭懺等事 如大儒以詩書發塚 可謂畫虎不成 類狗者矣 佛所預防 正爲此爾 若曰占察經無譯人時處 爲可疑也 是亦擔麻棄金也 何則 詳彼經文 乃悉壇深密 洗滌穢瑕 激昻懶夫者 莫如玆典 故亦名大乘懺 又云出六根聚中

지금 시험삼아 논해보면 청주거사 등의 탑참 등의 일은 마치 대유가 시서발총과 같아서 호랑이를 그리려다 이루지 못하고, 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부처가 미리 방비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일 뿐입니다. 만약 점찰경을 번역한 사람과 때, 곳이 없다하여 의심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이 또한 삼을 취하기 위해 쇠를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문을 자세히 보면 곧 모든 단이 깊고 비밀스러워 더러운 것과 흠결을 씻어주고 게으른 자를 격앙시킴이 이 경전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대승참이라 이름했다. 또한 6근이 모인 중에서 나왔다고 했다.

 

開元貞元二釋敎錄中 編入正藏 雖外乎性宗 其相敎大乘殆亦優矣 豈與搭撲二懺 同日而語哉! 如舍利佛問經 佛告長者子邠若多羅曰 汝可七日七夜悔汝先罪 皆使淸淨 多羅奉敎 日夜懇惻 至第五夕 於其室中 雨種種物 若巾若帊若拂箒若刀錐斧等 墮其目前 多羅歡喜 問於佛 佛言是離塵之相 割拂之物也 據此 則與占察經擲輪得相之事 奚以異哉 乃知表公翹懺得簡 聞法見佛 可謂不誣 况此經若僞妄 則慈氏何以親授表師 又此經如可禁舍利問經亦可禁乎? 琮輩可謂攫金不見人 讀者詳焉 讚曰 現身澆季激慵聾 靈岳仙溪感應通 莫謂翹懃傳搭懺 作橋東海化魚龍

개원, 정원 두 석교록 중에 정장으로 편입되었으니 비록 성종에서는 벗어났으나 그 상교의 대승으로는 자못 또한 넉넉하다. 어찌 탑, 박 두 참법을 같은 날 말할 수 있으리오! 사리불문경에 부처가 장자 자빈약다라에게 일러 말하기를 네가 7일 낮, 7일 밤 너의 앞선 죄를 뉘우쳐 모두 청정하게 하라.’했다. 다라가 가르침을 받들어 밤낮으로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하였다. 5일 저녁에 이르러 그 방 안에 여러 가지 물건이 비처럼 쏟아지더니 수건, , 총채, , 송곳, 도끼 등이 그 눈앞에서 떨어졌다. 다라가 기뻐하며 부처에게 물으니 부처가 말하기를 이는 먼지(물욕)를 떠나는 상으로 가르고, 떠는 물건이다.’”했다. 이에 기대면 곧 점찰경에서 윤(바퀴)을 던져 상을 얻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으로 진표공이 참회를 일으켜 간자를 얻고, 불법을 듣고, 부처를 본 것은 거짓이 아니라고 이를 수 있다. 하물며 이 경(점찰경)이 만약 거짓이고 망녕된 것이라 한다면 곧 자씨(미륵보살)가 어찌 직접 진표 스님에게 전수했겠는가? 또 이 경이 만약 금할만한 것이라면 사리문경 또한 금 할 만 한 것인가? 언종의 무리들은 금을 훔치면서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격이니 읽는 자들은 자세히 해야 할(알아야 할) 것이다. 기려 말한다.

말세에 현신하여 게으르고 귀먹은 사람을 일깨웠다. 신령스러운 산과 신선의 시내에 감응해 통했다. 정성으로 탑참을 전하였다 말하지 말라. 동해에 다리놓은 어룡도 교화되었다.

 

關東楓岳鉢淵藪石記(此記乃寺主瑩岑所撰 承安四年己未之石)

眞表律師 全州碧骨郡都那山村大井里人也 年至十二 志求出家 父許之 師往金山藪順濟法師處零染 濟授沙彌戒法 傳敎供養次第秘法一卷占察善惡業報經二卷曰 ?汝持此戒法 於彌勒地藏兩聖前 懇求懺悔 親受戒法 流傳於世? 師奉敎辭退 遍歷名山 年已二十七歲 於上元元年庚子 蒸二十斗米 乃乾爲粮 詣保安縣 入邊山不思議房 以五合米爲一日費 除一合米養鼠

관동 풍악 발연수 석기(이 기록은 곧 사주 영잠이 지었다. 승안 4년 기미에 돌을 세웠다.)

진표율사는 전주 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이르자 출가할 것에 뜻을 두자 아버지가 허락하였다. 스님이 금산수 순제법사가 있는 곳에 가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순제가 사미계법을 주고 공양차제비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 2권을 전하고 가르치며 말하기를 너는 이 계법을 지니고 미륵보살과 지장보살 두 성인 앞에 참회를 간절히 구하여 직접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했다. 스님이 가르침을 받들어 하직하고 물러나 두루 이름 있는 산을 돌아다녔다. 나이 27세가 되었을 때인 상원 1년 경자에 20말의 살을 쪄서 말려 식량을 만들고 보안현에 나아가 변산 불사의방에 들어갔다. 5홉의 쌀을 하루의 비용으로 삼고, 1홉의 쌀을 덜어 쥐를 길렀다.

 

師勤求戒法於彌勒像前 三年而未得授記 發憤捨身嵓下 忽有靑衣童 手捧而置石上 師更發志願 約三七日 日夜勤修 扣石懺悔 至三日手臂折落 至七日夜 地藏菩薩手搖金錫 來爲加持 手臂如舊 菩薩遂與袈裟及鉢 師感其靈應 倍加精進 滿三七日 卽得天眼 見兜率天衆來儀之相 於是 地藏慈氏摩師頂曰 ?善哉大丈夫! 求如是戒 不惜身命 懇求懺悔? 地藏授與戒本 慈氏復與二栍 一題曰九者 一題八者

스님이 부지런히 미륵상 앞에서 계법을 청한 지 3년이 되어도 수기를 얻지 못하자 분발하여 몸을 바위 아래로 던졌다. 홀연히 푸름 옷을 입은 동자가 손으로 받들어(받아) 돌 위에 두니 스님이 다시 뜻을 두고 원함을 내었다. 3, 7(21)을 밤낮으로 부지런히 닦으며 돌에 (, 몸을)치며 참회하였다. 3일이 되자 손과 팔이 부러져 떨어졌다. 7일 밤이 되었을 때 지장보살이 손으로 쇠 지팡이를 흔들며 와 지탱하였더니(도왔더니) 손과 팔이 옛과 같아졌다.(나았다.) 지장보살이 마침내 가사와 발우를 주었다. 스님이 그 신령스러운 응함에 감동하여 정진하기를 배로 하였다. 3, 7일을 채우니 곧 천안을 얻어 도솔천중들이 오는 모습을 보았다. 이에 지장보살과 자씨(미륵보살) 스님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좋구나 대장부여! 이 같이 계를 구하여 몸과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간절히 참회를 구하는구나.(참회를 하는구나.)”했다. 지장보살은 계본을 주고 자씨(미륵보살)가 다시 목간자 2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아홉 번째 간자, 하나에는 여덟 번째 간자라 쓰여 있었다.

 

告師曰 ?此二簡子者 是吾手指骨 此喩始本二覺 又九者法爾 八者新熏成佛種子 以此當知果報 汝捨此身 受大國王身 後生於兜率? 如是語已 兩聖卽隱 時壬寅四月二十七日也 師受敎法已 欲創金山寺 下山而來 至大淵津 忽有龍王 出獻玉袈裟 將八萬眷屬 侍往金山藪 四方子來 不日成之 復感慈氏從兜率駕雲而下 與師受戒法 師勸檀緣 鑄成彌勒丈六像 復畵下降受戒威儀之相於金堂南壁 於甲辰六月九日鑄成 丙午五月一日 安置金堂 是歲大曆元年也

(미륵보살이) 스님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인데 이는 시와 본의 두 각을 비유(상징)하는 것이다. 또 아홉 번째 간자는 법이고, 여덟 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이다. 이로서 마땅히 과보를 알 것이다. 너는 이 몸을 버리고 대국왕의 몸을 받고, 후에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다.”했다. 이 같이 말을 한 후 두 성인이 곧 숨었다. 이 때는 임인 427일이다. 스님이 교법을 받은 후 금산사를 창건하려하여 산을 내려 와 대연진에 이르렀다. 홀연히 용왕이 있어 나와 옥가사를 바치고 팔만 권속을 거느리고 모시고 금산수에 갔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와 하루가 되지 않아 (금산사가)이루어졌다. 다시 자씨(미륵보살)가 감동하여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스님에게 계법을 주었다. 스님이 단연(신자)를 권하여 미륵장육상을 주조하여 이루고, 다시 (미륵보살이)내려와 계를 주는 위의의 모습을 금당 남벽에 그렸다. 갑진 69일에 주조하여 이루고, 병오 51일 금당에 안치하였는데 이 해는 대력 1년이다.

 

師出金山 向俗離山 路逢駕牛乘車者 其牛等向師前 跪膝而泣 乘車人下問 ?何故此牛等見和尙泣耶? 和尙從何而來?? 師曰 ?我是金山藪眞表僧 予曾入邊山不思議房 於彌勒地藏兩聖前 親受戒法眞栍 欲覓創寺鎭長修道之處 故來爾 此牛等外愚內明 知我受戒法 爲重法故 跪膝而泣?

스님이 금산사를 나와 속리산을 향하다 길에서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있는 자를 만났다. 그 소들이 스님을 향해 앞을 나와 무릎을 꿇고, 울었다. 수레를 탔던 사람이 내려 묻기를 무슨 이유로 이 소들이 화상(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화상(스님)은 어디에서 왔습니까?”하니 스님이 말하기를 나는 금산수 진표 중입니다. 내가 일찍이 변산 불사의방에 들어 가 미륵보살과 지장보살 두 성인앞에서 직접 계법진생(증과간자)을 받았습니다. (간자를)절을 지어 오래 동안 지키고 수도할 곳을 찾으려 했기 때문에 왔습니다. 이 소들은 밖은 어리석으나 안은 밝아서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했다.

 

其人聞已乃曰 ?畜生尙有如是信心 況我爲人 豈無心乎!? 卽以手執鎌 自斷頭髮 師以悲心 更爲祝髮受戒 行至俗離山洞裏 見吉祥草所生處而識之 還向溟州海邊 徐行次 有魚鼈黿鼉等類 出海向師前 綴身如陸 師踏而入海 唱念戒法還出 行至高城郡 入皆骨山 始創鉢淵藪 開占察法會 住七年 時溟州界年穀不登 人民飢饉 師爲說戒法 人人奉持 致敬三寶 俄於高城海邊 有無數魚類 自死而出 人民賣此爲食 得免死

그 사람이 듣기를 마치고 곧 말하기를 축생도 오히려 이 같은 심심이 있는데 하물며 내가 사람이 되어 어찌 마음이 없겠는가?”하고는 곧 손으로 낫을 들어 스스로 머리털을 잘랐다. 스님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다시 머리를 깍고 계를 주었다. 가서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가 난 곳을 보고 그것을 표시해 두었다. 명주 해변을 돌아 천천히 가는데 물고기, 자라 등의 류가 바다를 나와 스님 앞을 향해 몸을 엮으니 육지와 같았다. 스님이 밟고 바다에 들어 가 계법을 소리쳐 외우고 돌아 나왔다. 가서 고성군에 이르러 개골산에 들어가 처음으로 발연수를 창건하고 점찰법회를 열고 7년을 살았다. 그 때 명주지역에 곡식이 익지 않아 인민들이 주렸다. 스님이 계법을 설명하자 사람들이 받들어 지니고 지극히 삼보를 공경하니 갑자기 고성 바닷가에 헤아릴 수 없는 물고기들이 저절로 죽어 나왔다. 인민들이 이를 팔아 밥을 삼아(마련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師出鉢淵 復到不思議房 然後往詣家邑謁父 或到眞門大德房居住 時俗離山大德永深與大德融宗佛陀等 同詣律師所 伸請曰 ?我等不遠千里 來求戒法 願授法門? 師黙然不答 三人者乘桃樹上 倒墮於地 勇猛懺悔 師乃傳敎灌頂 遂與袈裟及鉢供養次第秘法一卷日察善惡業報經二卷一百八十九栍 復與彌勒眞栍九者八者 誡曰 ?九者法爾 八者新熏成佛種子 我已付囑汝等 持此還歸俗離山 山有吉祥草生處 於此創立精舍 依此敎法 廣度人天 流布後世? 永深等奉敎 直往俗離 尋吉祥草生處 創寺名曰吉祥

스님이 발연수를 나와 다시 불사의방에 이른 후 집에 가서 아버지를 뵙고, 혹은 진문대덕방에 이르러 살았다. 그 때 속리산 대덕 영심과 대덕 융종, 불타 등이 함께 율사가 있는 곳에 나아가 청해 말하기를 우리들은 천리가 멀다하지 않고 와서 계법을 청하니 법문을 주시기를 원합니다.”했다. 스님이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복숭아나무 위에 올라가 거꾸로 땅에 떨어지며 용맹히 참회하였다. 스님이 이에 가르침을 전해 관정하고 마침내 가사와 발, 공양차제비법 1, 일찰선악업보경 2, 189개 간자를 주었다. 다시 미륵진생 아홉 번째와 여덟 번째를 주며 경계해 말하기를 아홉 번째는 법이고, 여덟 번째는 신훈성불종자이다. 내가 이미 너희들에게 부촉하였으니 이를 가지고 속리산에 돌아가면 산에 길상초가 난 곳이 있는데 여기에 정사를 창건하고 이 교법에 의하여 널리 인간계와 천상계를 제도하고, 후세에 널리 펴라.”했다.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어 바로 속리산에 가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창건하고 길상사라 이름 했다.

 

永深於此始設占察法會 律師與父復到鉢淵 同修道業而終孝之 師遷化時 登於寺東大巖上示滅 弟子等不動眞軆而供養 至于骸骨散落 於是以土覆藏 乃爲幽宮 有靑松卽出 歲月久遠而枯 復生一樹 後更生一樹 其根一也 至今雙樹存焉 凡有致敬者 松下覓骨 或得或不得 予恐聖骨堙滅 丁巳九月 特詣松下 拾骨盛筒 有三合許 於大嵓上雙樹下 立石安骨焉云云 此錄所載眞表事跡 與鉢淵石記 互有不同 故刪取瑩岑所記而載之 後賢宜考之 無極記

영심이 여기에서 점처음 찰법회를 베풀렀다. 율사와 아버지가 다시 발연수에 이르러 함께 도업을 닦아 효도를 다하였다. 스님이 돌아가실 때 절의 동쪽 바위 위에 올라 죽었다. 제자들이 진체(시신)를 옮기지 않고 공양하다가 해골이 흩어져 떨어짐에 이르자 이에 흙을 덮고 유궁(무덤)으로 삼았다. 푸른 솔이 난 것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마르고, 다시 한 나무가 났고, 후에 다시 한 나무가 났는데 그 뿌리는 하나였다. 지금까지 두 그루 나무가 있다. 무릇 지극히 존경함이 있는 자가 소나무 아래서 뼈를 찾아 혹은 얻기도 하고, 혹은 얻지 못하기도 하였다. 내가 성스러운 뼈가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정사년 9월에 특히 소나무 아래 나아가 뼈를 거두어 통에 담으니 세 홉 정도였다. 큰 바위 위 두 그루 소나무 아래 돌을 세우고 뼈를 여기에 안치하였다. 이 기록은 진표의 사적에 실린 것인데 발연수 석기와는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러므로 영잠이 기록한 것을 깍고 취하여 실었다. 후의 현명한 이는 마땅히 상고해야 할 것이다. 무극이 기록한다.

 

勝詮髑髏

釋勝詮 未詳其所自也 常附舶指中國 詣賢首國師講下 領受玄言 硏微積慮 惠鑒超穎 探賾索隱 妙盡隅奧 思欲赴感有緣 當還國里 始賢首與義湘同學 俱禀儼和尙慈訓 首就於師說 演述義科 因詮法師還鄕寄示 湘仍寄書(云云) 別幅云 探玄記二十卷 兩卷未成敎分記三卷玄義章等雜義一卷華嚴梵語一卷起信䟽兩卷十二門䟽一卷法界無差別論䟽一卷 並因勝詮法師抄寫還鄕

승전촉루

석 승전은 그 내력이 자세하지 않다. 늘 배에 붙어 중국을 가리키고(배를 타고 중국에 가) 현수 국사 강석 아래 나아가 현묘한 말을 받아 정미한 것을 연구하여 생각을 쌓으니 보는 것이 지혜롭고 빼어나 깊은 것과 숨은 것을 찾아내니 묘함이 모퉁이와 깊음을 다하였다. 인연이 있는 곳을 가 마땅히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였다. 처음 현수와 의상이 같이 배워 지엄화상에게 자비로운 가르침을 모두 받았다. 현수가 스승의 설에 나아가 뜻과 과목을 서술하였다. 이 때문에 승전법사가 고향에 돌아 갈 때 글을 보냈는데 의상이 곧 글을 보냈다고 한다. 별폭에 이르기를 탐현기 20권 중에서 두 권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교분기 세 권, 의장등잡의 1, 화엄범어 1, 기신소 2, 12문소 1, 법계무차별논소 1권을 모두 승전법사가 옮겨 써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頃新羅僧孝忠遺金九分 云是上人所寄 雖不得書 頂荷無盡 今附西國軍持澡灌一口 用表微誠 幸願檢領 謹宣 師旣還 寄信于義湘 湘乃目閱藏文 如耳聆儼訓 探討數旬 而授門弟子 廣演斯文 語在湘傳 按 此圓融之敎誨 遍洽于靑丘者 寔師之功也 厥後有僧梵修 遠適彼國 求得新譯後分華嚴經觀師義疏 言還疏演 時當貞元己卯 斯亦求法洪揚之流乎 詮乃於尙州領內開寧郡境 開創精廬 以石髑髏爲官屬 開講華嚴

근래 신라 중 효충이 금 9분을 갖다 주면서 이는 상인(의상)이 붙인 바라 말하였습니다. 비록 글을 받지 못하였으나 은혜가 다함이 없습니다. 지금 서국의 군지조관 1개를 부쳐서 작은 정성을 표하는데 씁니다. 받아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아룁니다. 했다. 스님이 돌아 온 후 편지를 의상에게 전하니 의상이 곧 눈으로 법장의 글을 조자 마치 귀에 지엄의 가르침이 울리는 것과 같았다. 수 십일을 탐구하고 검토한 후 문하 제자들에게 주고, 널리 이 글을 강연하게 하였다. 말이 의상전에 있다. 살펴보니 이 원융의 가르침이 두루 청구에 흡족하게 된 것은 스님(승전)의 공이다. 그 후 중 범수가 있어 멀리 그 나라에 가 새로 번역된 후분화엄경, 관사의소를 구해 얻어 돌아와 소를 널리 연술했다. 한다. 이 때는 정원 기묘년이다. 이것이 또한 불법을 구해 널리 드날린 류라 하겠다. 승전은 곧 상주 영내 개령군 경계에 절을 개창하고 돌과 해골들을 관속으로 삼아 화엄경을 개강하였다.

 

新羅沙門可歸 頗聰明識道理 有傳燈之續 乃撰心源章 其畧云 勝詮法師領石徒衆 論議講演 今葛項寺也 其髑髏八十餘枚 至今爲綱司所傳 頗有靈異 其他事迹具載碑文 如大覺國師實綠中

신라 중 가귀가 자못 총명하고 도리를 알아 법의 등불을 전함을 계속하더니 곧 심원장을 지었다. 그 대략을 보면 승전 법사가 거느린 돌들을 거느리고 논의하고 강연하였다.” 한다. 그곳은 지금의 갈항사이다. 그 해골 80여개는 지금 강사에 전하는데 자못 신령하고 기이함이 있다. 기타 일의 사적은 비문에 모두 실려 있으니 대각국사의 실록 중에 있는 것과 같다.

 

心地繼祖

釋心地 辰韓第四十一主憲德大王金氏之子也 生而孝悌 天性冲睿 志學之年 落采從師 拳懃于道 寓止中岳(今公山) 適聞俗離山深公傳表律師佛骨簡子 設果訂法會 決意披尋 旣至後期 不許叅例 乃席地扣庭 隨衆禮懺 經七日 天大雨雪 所立地方十尺許 雪飄不下 衆見其神異 許引入堂地 撝謙稱恙 退處房中 向堂潛禮 肘顙俱血 類表公之仙溪山也

심지계조

석 심지는 진한 제 41대 헌덕대왕 김씨의 아들이다. 나면서 효성스러우며 우애가 있고, 천성이 맑고 지혜로웠다.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15)에 머리를 깍고 스승을 따라 도에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웠다. 중악(지금의 공산)에 머물고 있을 때 마침 속리산의 심공(영심)이 진표율사의 불골간자를 전해받아 과정법회를 개설한다는 것을 듣고, 뜻을 결단하여 찾아 갔으나 이미 기일이 지난 후여서 참례를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에 땅에 앉아 뜰을 두드리며 무리를 따라 예참하였다. 7일이 지나자 하늘에서 크게 비와 눈이 내렸는데 서 있던 땅 410자 정도에는 눈이 휘날려 내리지 않았다. 무리들이 그 신이함을 보고 인도하여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으나 사양하고 거짓으로 병을 핑계대고 물러나 방안에서 당을 향해 몰래 예를 행하였다. 팔꿈치와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진표공의 선계산의 일과 같은 류였다.

 

地藏菩薩日來問慰 洎席罷還山 途中見二簡子貼在衣褶間 持廻告於深 深曰 簡在函中 那得至此? 檢之封題依舊 開視亡矣 深深異之 重襲而藏之 又行如初 再廻告之 深曰 佛意在子 子其奉行 乃授簡子 地頂戴歸山 岳神率二仙子 迎至山椒 引地坐於嵒上 歸伏嵒下 謹受下戒 地曰 今將擇地奉安聖簡 非吾輩所能指定 請與三君 憑高擲簡以卜之 乃與神等陟峯巓 向西擲之 簡乃風颺而飛 時 神作歌曰 礙嵒遠退砥平兮 落葉飛散生明兮 覓得佛骨簡子兮 邀於淨處投誠兮 旣唱而得簡於林泉中 卽其地構堂安之 今桐華寺籤堂北有小井是也

지장보살이 매일 와 위문하였다. 법석이 끝나고 산에 돌아가는데 도중에 두 간자가 온 주름 사이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가지고 영심에게 돌아가 알리니 염심이 말하기를 간자는 함안에 있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하고는 함을 검사하니 옛과 같이 봉해져 있었는데 열어보니 없었다. 영심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 거듭 싸서 감추어 두었다. 또 가는데 처음과 같아 다시 돌아 가 말하였다. 영심이 말하기를 부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가 받들어 행하시오.”하고는 곧 간자를 주었다. 심지가 머리에 이고 산에 돌아오니 산신이 두 아들을 이끌고 산꼭대기에서 맞아 심지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게 하고, 바위 아래에 엎드려 삼가 계를 받았다. 심지가 말하기를 이제 땅을 가려서 성스러운 간자를 받들어 안치하려하는데 우리들이 정하여 가리킬 바가 아닙니다. 삼군(세 산신)과 함께 높은 곳에 의지하여 간자를 던져 점을 치기를 청합니다.” 했다. 곧 산신들과 함께 봉우리에 올라 서쪽을 향해 던지니 간자가 곧 바람에 휘날려 날아갔다. 그 때 신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노래는

막혔던 바위 저멀리 물러가 숫돌처럼 평평하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삶이 밝아진다. 불골 간자를 구해 얻어 정결한 곳 찾아 정성을 바친다.” 했다. 노래부르기를 마치고 숲 속 샘에서 간자를 얻고, 곧 그 땅에 당을 지어 안치하였다. 지금 동화사 첨당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이것이다.

 

本朝睿王嘗取迎聖簡 致內瞻敬 忽失九者一簡 以牙代之 送還本寺 今則漸變同一色 難卞新古 其質乃非牙非玉 按占察經上卷 叙一百八十九簡之名 一者求上乘得不退 二者所求果現當證 第三第四求中下乘得不退 五者求神通得成就 六者修四梵得成就 七者修世禪得成就 八者所欲受得妙戒 九者所曾受得戒具(以此文訂 知慈氏所言新得戒者 謂今生始得戒也 舊得戒者 謂過去曾受 今生又增受也 非謂修生本有之新舊也) 十者求下乘未住信

본조(고려) 예종이 일찍이 성스러운 간자를 취해 맞아 궁궐 안에 이르자 우러러 보고 공경하다가 홀연히 아홉 번째 하나의 간자를 잃어버려 이빨로서 대신하여 본사로 돌려보냈다. 지금은 곧 점차 변하여 같은 색이 되어 새것과 옛 것을 분별하기 어렵다. 그 바탕은 곧 이빨도 아니고 옥도 아니다. 점찰경 상권을 살펴보니 189개 간자의 이름을 써놓았다. 첫 번째는 상승을 구하여 물러나지 않음을 얻음이고, 둘째는 구하는 바의 과가 마땅한 증을 드러내는 것이고, 세 번째, 네 번째는 중, 하승을 얻어 물러나지 않음을 얻음이고, 다섯 번째는 신통을 구해 성취를 얻음이고, 여섯 번째는 사범을 닦아 성취를 얻음이고, 일곱 번 째는 세선을 닦아 성취를 얻음이고, 여덟 번 째는 받고자 하는 바로 묘계를 얻음이고, 아홉 번 째는 일찍이 받은 바로 구계를 얻음이다.(이 글을 가지고 바로잡으면 자씨(미륵불)가 말한 새로이 계를 얻었다.’는 것은 금생에 처음 얻은 계를 이르고, ‘옛날에 얻은 계라는 것은 과거에 일찍이 받고, 금생에 또 더하여 받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수생, 본유의 새로운 것과 옛것을 이르는 것이 아님을 알겠다.) 열 번째는 하승을 구하여 아직 믿음에 머물지 못함이다.

 

次求中乘未住信 如是乃至一百七十二 皆過現世中 或善或惡得失事也 第一百七十三者 捨身已入地獄(已上皆未來之果也) 一百七十四者 死已作畜生 如是乃至餓鬼修羅人人王天天王聞法出家値聖僧生兜率生淨土尋見佛住下乘住中乘住上乘得解脫第一百八十九等是也(上言住下乘至上乘得不退 今言上乘得解脫等 以此爲別爾) 皆三世善惡果報差別之相

다음은 중승을 구하여 아직 믿음에 머물지 못함이다. 이 같이하여 172에 이르니 모두 과거와 현세 중에 혹은 선하고, 혹은 악하며 얻고, 잃고, 얻는 일이다. 173은 몸을 버려 이미 지옥에 들어감이며(이상은 모두 미래의 과보이다.) 174는 죽은 후 축생을 지음이다. 이 같이하여 곧 아귀, 수라, , 인왕, , 천왕, 문법, 출가, 성승을 만나는 것, 도솔천에 태어나는 것, 정토에 태어나는 것, 부처를 찾아뵙는 것, 하승에 사는 것, 중승에 사는 것, 상승에 사는 것, 해탈을 얻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제 189 등이 이것이다.(위에서 말한 것은 하승에 살다 상승에 이르러 물러나지 않음을 얻는 것까지이고, 지금 상승에서 해탈 등을 말한 것은 이로서 분별한 것일 뿐이다.) 모두 3세 선악, 과보의 차별우모습이다.

 

以此占看 得與心所行事相當 則爲感應 否則爲不至心 名爲虛謬 則此八九二簡 但從百八十九中而來者也 而宋傳但云百八籤子 何也? 恐認彼百八煩惱之名而稱之 不揆尋經文爾 又按本朝文士金寬毅所撰王代宗錄二卷云 羅末 新羅大德釋冲 獻太祖以表律師袈裟一領 戒簡百八十九枚 今與桐華寺所傳簡子 未詳同異 讚曰 生長金閨早脫籠 儉懃聰惠自天鍾 滿庭積雪偸神簡 來放桐華最上峰

이로서 점을 쳐보고 마음과 행한 일이 서로 마땅한 바를 얻으면 곧 감응되고, 그렇지 않으면 곧 지극한 마음이 아니니 이름하여 허류라 한다. 곧 이 89의 두 간자는 다만 189 가운데서 따라 나온 것이다. 송전에서 다만 108첨자라고만 한 것은 왜인가? 아마도 그 108번뇌의 이름으로 알고 말한 듯하다. 경전의 글을 헤아려 보지도 않은 듯하다. 또 본조(고려)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 2권에 이르기를 신라 말 신라대덕 석충이 태조에게 진표율사의 가사 한 벌, 계간 189개를 바쳤다. 지금 동화사에서 전하는 간자와는 같고, 다름이 자세하지 않다. 기려 말한다.

귀족 집안에서 일찍이 조롱을 벗어났고, 근검, 총명함은 하늘이 주었다. 뜰에 가득 쌓인 눈 속에서 신간을 뽑아 와 동화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노아 주었다.

 

賢瑜珈 海華嚴

瑜珈祖大德大賢 住南山茸長寺 寺有慈氏石丈六 賢常旋繞 像亦隨賢轉面 賢惠辯精敏 決擇了然 大抵相宗銓量 旨理幽深 難爲剖析 中國名士白居易 當窮之未能 乃曰 唯識幽難破 因明擘不開 是以學者難承禀者尙矣 賢獨刊定邪謬 暫開幽奧 恢恢游刃 東園後進 咸遵其訓 中華學士 往往得此爲眼目

현유가 해화엄

유가 조사 대덕 대현은 남산 용장사에 살았다. 절에는 자씨(미륵불)의 돌로 만든 장육상이 있는데 대현이 항상 돌때마다 미륵상이 또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대현은 슬기롭고 분명하며 정밀하고 민첩해서 결단하고 가림이 분명하였다. 대개 법상종의 진리와 헤아림은 가르침과 이치가 그윽하고 깊어 해석하기가 어려웠다. 중국의 이름 있는 선비 백거이가 연구하였으나 해내지 못하자 이에 말하기를 유식은 그윽하여 깨트리기 어렵고, 인명은 쪼개도 열리지 않는다.”했다. 이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받아 잇는 것이 아직 어려워하였다. 대현이 홀로 삿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잠간사이에 그윽하고 깊은 뜻을 열어 자유로이 칼을 놀렸다.(사리에 통달하여 쉽게 이치를 분석하였다.) 동국의 후진들이 모두 그 가르침을 따랐고, 중국의 학사들도 자주 이를 얻어 안목으로 삼았다.

 

景德王天寶十二年癸巳 夏大旱 詔入內殿 講金光經 以祈甘霔 一日齋次 展鉢良久而淨水獻遲 監吏詰之 供者曰宮井枯涸 汲遠故遲爾 賢聞之曰何不早云 及晝講時 捧爐黙然 斯須井水湧出 高七丈許 與刹幢齊 闔宮驚駭 因名其井曰金光井 賢嘗自號靑丘沙門 讚曰 遶佛南山像逐旋 靑丘佛日再中懸 解敎宮井淸波湧 誰識金爐一炷烟

경덕왕 천보 12년 계사 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조서로 궁궐에 들어오게 하여 금강경을 강론하게 하는 것으로서 단비를 기도하게 하였다. 어느 날 재를 지낼 때 바릿대를 벌려놓은 지 오래되었는데도 정수의 올림이 늦었다. 감독하는 관리가 그것을 따져 물으니 바치는 자가 말하기를 궁궐의 우물이 말라 멀리서 길어 오느라 늦었습니다.”했다. 대현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어찌하여 일찍 말하지 않았는가?” 했다. 낮에 강론할 때 향로를 받들고 말없이 있었더니 잠간 사이에 우물물이 솟아나왔는데 높이가 7장이 넘어 찰당과 같게 되었다. 궁중에서 놀라워했다. 이 때문에 그 우물의 이름을 금광정이라 했다. 대현이 일찍이 스스로 청구사문이라 이름 하였다. 기려 말한다.

남산의 불상을 도니 불상이 따라 돌더니, 청구의 불일이 다시 중천에 걸렸다. 궁궐 우물에 맑은 물결 솟게 하였는데, 누가 한줄기 향연임을 알겠는가.

 

明年甲午夏 王又請大德法海於皇龍寺 講華嚴經 駕幸行香 從容謂曰 前夏大賢法師講金光經 井水湧七丈 此公法道如何? 海曰 特爲細事 何足稱乎! 直使傾滄海 襄東岳 流京師 亦非所難 王未之信 謂戱言爾 至午講 引爐沉寂 須臾內禁忽有哭泣聲 宮吏走報曰東池已溢 漂流內殿五十餘間 王罔然自失 海笑謂之曰 東海欲傾 水脉先漲爾 王不覺興拜 翌日感恩寺奏 昨日午時海水漲溢 至佛殿階前 晡時而還 王益信敬之 讚曰 法海波瀾法界寬 四海盈縮未爲難 莫言百億須彌大 都在吾師一指端(石海云)

三國遺事 卷第四()

 

다음 해 갑오 여름에 왕이 또 황룡사에서 대덕 법해를 청해 화엄경을 강론하게 하고, 가서 향을 피우고 조용히 일러 말하기를 지난여름 대현법사가 금광경을 강론하였더니 우물물리 7장이나 솟구쳤습니다. (법해)의 법도는 어떠합니까?”했다. 법해가 말하기를 다만 작은 일일뿐입니다. 어찌 칭찬하십니까? 이제 창해를 기울게 하여 동악을 잠기게 하고, 경사(서울)가 떠내려가게 하는 것도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했다. 왕이 믿지 않고 희롱하는 말을 하였다. 오시에 이르러 강론하면서 향로를 당겨 고요히 있었다. 잠간 사이에 내금(궁궐 안)에서 홀연히 곡하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궁궐의 관리가 달려와 보고하기를 동지가 넘쳐 내정(궁궐 안) 50여 간이 떠다닙니다.”했다. 왕이 망연자실하였다. 법해가 웃으며 일러 말하기를 동해를 기우리고자 하여 수맥을 먼저 불린 것뿐입니다.”했다. 왕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절하였다. 다음날 감은사에서 아뢰기를 어제 오시쯤 바닷물이 넘쳐 불전 계단 앞에 이르렀다가 저녁때쯤 물러갔습니다.”했다. 왕이 더욱 믿고 공경하였다. 법해의 물결을 보니 법계를 보는 듯하구나. 사해를 늘이고 줄이는 것을 어렵다하지 않는다. 백억의 수미산 크다 말하지 말라. 모두가 우리 스님 한 손가락 끝에 달렸다.(석해가 말한 것이다.)

 삼국유사 권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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