塔像(第)(四)
迦葉佛宴坐石
玉龍集及慈藏傳與諸家傳紀皆云 新羅月城東龍宮南 有迦葉佛宴坐石 其地卽前佛時伽藍之墟也 今皇龍寺之地卽七伽藍之一也 按國史 眞興王卽位十四 開國三年癸酉二月 築新宮於月城東 有皇龍現其地 王疑之 改爲皇龍寺 宴坐石在佛殿後面 嘗一謁焉 石之高可五六尺來 圍僅三肘幢立而平頂 眞興創寺已來 再經災火 石有拆裂處 寺僧貼鐵爲護 乃有讚曰 惠日沈輝不記年 唯餘宴坐石依然 桑田幾度成滄海 可惜巍然尙未遷
삼국유사 권제 3, 탑상 제4
가섭불연좌석
옥룡집과 자장전과 여러 사람의 전기에 모두 말하기를 “신라 월성 동쪽 용궁남에 가섭불연좌석이 있다. 그 땅은 전불 시대 절터이다. 지금 황룡사 땅은 곧 일곱 개 절 중의 하나이다.”했다. 국사를 살펴보니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 3년 계유 2월 새로운 궁궐을 월성 동쪽에 짓는데 황룡이 그 땅에 나타났다. 왕이 그것을 의아하게 여겨 고쳐 황룡사라 했다. 연좌석은 불전 뒤쪽에 있는데 일찍이 본 적이 있다. 돌의 높이는 5, 6자 정도 되고, 둘레는 겨우 세 발정도로 깃발을 세운듯하고 위쪽은 평평했다. 진흥왕이 절을 창건한 이래로 두 번 화재를 만나 돌이 꺽이고 찢어진 곳이 있다. 절의 중 쇠로 붙이고 보호했다. 기려 말한다. “혜일(불교)가 빛남을 숨긴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오직 연좌석만 그대로 남았구나. 뽕나무 밭이 몇 번이나 푸른 바다가 됨이, 애석하구나! 우뚝함에 아직 옮기지 않았다.”
旣而西山大兵已後 殿塔煨燼而此石亦夷沒 而僅與地平矣 按阿含經 迦葉佛是賢去刀第三尊也 人壽二萬歲時 出現於世 據此以增減法計之 每成去刀初 皆壽無量歲 漸減至壽八萬歲時 爲住去刀之初 自此又百年減一歲 至壽十歲時爲一減 又增至人壽八萬歲時爲一增 如是二十減二十增爲一住去刀 此一住去刀中 有千佛出世 今本師釋迦是第四尊也 四尊皆現於第九減中 自釋尊百歲壽時 至迦葉佛二萬歲時 已得二百萬餘歲 若至賢去刀初第一尊拘留孫佛時 又幾萬歲也 自拘留孫佛時 上至去刀初無量歲壽時 又幾何也?
이윽고 서산대병(몽고군) 이후 불전과 불탑이 불타버렸다. 이 돌이 또한 흙에 파묻혀 겨우 지면과 함께 평평해졌다. 아함경을 살펴보니 “가섭불은 현겁의 세 번 째 부처이다. 사람의 나이로 2만세 때 세상에 나왔다.”하니 이에 근거하여 더하고 빼는 법으로서 계산하면 매 성겁의 초에는 모두 수명이 무량세였다. 점점 줄어들어 목숨이 8만세 때에 이르면 주겁의 초가 된다. 이로부터 또한 100년마다 1년을 감하여 수병이 10세에 이르렀을 때 1감이 된다. 또 더하여 사람의 나이로 8만세에 이르렀을 때가 1증이 된다. 이와 같이 20감, 20증한 것이 1주겁이 된다. 이 1주겁 안에 천 불이 세상에 나옴이 있다. 지금의 본사인 석가불은 제 4존이다.(네 번째 부처이다.) 4존이 모두 제 9감 중에 나타난다. 석존(석가모니불)이 100세 수 때로부터 가섭불에 이르는 2만세에 이르렀을 때까지 이미 2백만여 세이다. 만약 현겁초 제 1존인 구류손불 때까지 이르면 또한 몇 만세이다. 구류손불 때로부터 위로 겁초의 무량세 때에 이르기까지는 또한 얼마이겠는가?
自釋尊下至于今至元十八年辛巳歲 已得二千二百三十矣 自拘留孫佛歷迦葉佛時至于今 則直幾萬歲也 有本朝名士吳世文作歷代歌 從大金貞祐七年己卯 逆數至四萬九千六百餘歲 爲盤古開闢戊寅 又延禧宮錄事金希寧所撰大一歷法 自開闢上元甲子至元豊甲子 一百九十三萬七千六百四十一歲 又纂古圖云 開闢至獲麟 二百七十六萬歲 按諸經 且以迦葉佛時至于今 爲此石之壽 尙距於去刀初開闢時爲兒子矣 三家之說 尙不及玆兒石之年 其於開闢之說 疎之遠矣
석존으로부터 지금 지원 18년 신사년에 이르기까지 이미 2천3백 30년이고,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 때를 지나 지금에 이르면 곧 바로 몇 만년이다. 본조(고려)의 이름있는 선비 오세문이 역대가를 지었다. 그에 따르면 “대금 정우 7년 기묘로부터 거슬러 세어 4만9천6백세에 이르면 반고가 천지를 개벽한 무인년이 된다.”했다. 또 연희궁 녹사 김희녕이 지은 대일역법에 “천지를 개벽한 상원 갑자로부터 원풍 갑자에 이르기까지 193만7천641세이다.”했다. 또 찬고도에는 “개벽한 때로부터 기린을 잡은 해에 이르기까지 276만세이다.”했다. 여러 경전을 살펴보니 또한 가섭불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돌의 나이가 된다하니 겁초인 개벽 때로부터 떨어짐은 아이가 될 것이다. 세 사람의 설명이 오히려 이 아이 돌의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들은 개벽의 설에 있어서는 매우 소홀하였던 것이다.
遼東城育王塔
三寶感通錄載 高麗遼東城傍塔者 古老傳云 昔高麗聖王按行國界次 至此城 見五色雲覆地 往尋雲中 有僧執錫而立 旣至便滅 遠看還現 傍有土塔三重 上如覆釜 不知是何 更往覓僧 唯有荒草 掘尋一丈 得杖幷履 又掘得銘 上有梵書 侍臣識之 云?是佛塔? 王委曲問詰 答曰 ?漢國有之 彼名蒲圖王?(本作休屠王 祭天金人) 因生信 起木塔七重 後佛法始至 具知始末 今更損高 本塔朽壞 育王所統一閻浮提洲 處處立塔 不足可怪 又唐龍朔中 有事遼左 行軍薛仁貴行至隋主討遼古地 乃見山像 空曠蕭條 絶於行往
요동성 육왕탑
삼보감통록에 실린 것을 보면 “고려(고구려) 요동성 옆의 탑은 옛 늙은이들이 말하기를 ‘옛날 고구려 성왕이 나라 안을 살피러 돌아다니다 이 성에 이르러 5색의 구름이 덮힌 땅을 보고 가서 구름 속을 찾으니 중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곳에)이른 후에는 곧 사라지고 멀리 다시 나타난 것을 보았다. 옆에 3층의 토탑이 있었는데 위에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았으나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다시 가서 중을 찾았는데 오직 거친 풀이 있을 뿐이었다. 1장을 파고 찾다가 지팡이와 신을 얻었다. 또 파다 명을 얻었는데 위에 범서가 있었다. 모시는 신하가 그것을 알고 말하기를 이는 불탑입니다. 했다. 왕이 자세히 묻자 시신이 답해 말하기를 한나라에 있던 것으로 그 이름은 포도왕입니다.(본래 휴도왕이라 쓰는데 하늘에 제사하는 금인이다.)했다. 이 때문에 믿음이 생겨 7층 목탑을 세웠다. 그 후 불법이 비로소 이르자 시작과 끝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높이가 줄어들다 본 탑이 썩어 무너졌다.’”했다. 아육왕이 염부제를 통일하고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괴이할 것이 없다. 또 당나라 용삭 연간에 요좌(요동)에 일이 있었는데 행군 설인귀가 수나라 임금이 토벌한 요동의 옛 땅에 이르러 산의 상을 보았는데 텅 비어 있고, 몹시 쓸쓸하여 왕래가 끊어져 있었다.
問古老 云?是先代所現? 便圖寫來京師(具在若函) 按西漢與三國地理志 遼東城在鴨綠之外 屬漢幽州 高麗聖王 未知何君 或云東明聖帝 疑非也 東明以前漢元帝建昭二年卽位 成帝鴻嘉壬寅升遐 于時漢亦未見貝葉 何得海外陪臣已能識梵書乎 然稱佛爲蒲圖王 似在西漢之時 西域文字或有識之者 故云梵書爾 按古傳 育王命鬼徒 每於九億人居地立一塔 如是起八萬四千於閻浮界內 藏於巨石中 今處處有現瑞非一 蓋眞身舍利 感應難思矣 讚曰 育王寶塔遍塵寰 雨濕雲埋蘚纈斑 想像當年行路眼 幾人指點祭神墦
옛 늙은이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이는 선대에 나타난 것입니다.” 했다. 곧 그림으로 그려 경사(서울)에 왔다.(모두 약함에 있다.) 서한과 삼국 지리지를 살펴보니 요동성은 압록강 밖에 있으며 한나라 유주에 속한다. 고(구)려의 성왕은 어느 임금인지 알지 못한다. 혹은 동명성제라하나 아마도 아닐 것이다. 동명은 전한 원제 건소 2년에 즉위하여 성제 황가 임인에 승하하였다. 그 때 한나라도 또한 패엽(불경)을 보지 못하였는데 어찌 해외 황제의 신하가 범서를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불을 일컬어 포도왕이라 했으니 서한의 때에도 서역의 문자를 혹 알 수 있는 자가 있었을 듯하다. 그러므로 범서라 했을 것이다. 고전을(옛 전기를) 살펴보니 아육왕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매 9억 명의 사람이 사는 곳에 하나의 탑을 세우게 하였다고 한다. 이 같이하여 염부계 안에 8만4천개를 일으켜 큰 돌 안에 감추었다한다. 지금 곳곳에 상서로움이 나타남이 있는 것이 하나가 아니다. 대개 진신 사리는 감응됨을 생각하기(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기려 말한다.
“아육왕의 보탑은 속세에 두루 세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히어 이끼 끼어 무늬졌다. 회상하노니 그 해 길손의 눈은, 몇 사람이나 제신의 무덤을 가리켰나.”
金官城婆娑石塔
金官虎溪寺婆裟石塔者 昔此邑爲金官國時 世祖首露王之妃 許皇后名黃玉 以東漢建武二十四年甲申 自西域阿踰陁國所載來 初公主承二親之命 泛海將指東 阻波神之怒 不克而還 白父王 父王命載玆塔 乃獲利涉 來泊南涯 有緋帆茜旗珠玉之美 今云主浦 初解綾袴於岡上處曰綾峴 茜旗初入海涯曰旗出邊 首露王聘迎之 同御國一百五十餘年 然于時海東未有創寺奉法之事 蓋像敎未至 而土人不信伏
금관성 파사석탑
금관 호계사 파사석탑은 옛날 이 읍이 금관국이었을 때 세조 수로왕의 왕비 허황후 황옥이 동한 건무 24년 갑신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실어 온 것이다. 처음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에 떠 동쪽을 향하려 했다. 그 때 파신(수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부왕에게 말하니 부왕이 이 탑을 싣게 하였다. 곧 건넘에 이로움을 얻어 남쪽 언덕에 가 배를 댔다.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고, 주옥의 아름다움이 있어 지금 주포라 말한다. 처음 언덕에 올라 비단 바지를 벗은 곳을 능현이라 하고, 붉은 깃발을 달고 초음 바닷가에 들어 온 곳을 기출변이라 했다. 수로왕이 맞이하여 함께 150여년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이때 해동에는 절을 짓고, 법을 받드는 일이 있지 않았다. 대개 상교가 아직 이르지 않아 그 곳 사람들은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故本記無創寺之文 逮第八代銍知王二年壬辰 置寺於其地 又創王后寺(在阿道訥祗王之世 法興王之前) 至今奉福焉 兼以鎭南倭 具見本國本記 塔方四面五層 其彫鏤甚奇 石微赤斑色 其質良脆 非此方類也本草所云點鷄冠血爲驗者是也 金官國亦名駕洛國 具載本記 讚曰 載厭緋帆茜旆輕 乞靈遮莫海濤驚 豈徒到岸扶黃玉 千古南倭遏怒鯨
그러므로 본기에 절을 지은 글이 없다. 제 8대 질지왕 2년 임진에 그 땅에 절을 두고 또 왕후사를 세웠다.(아도는 눌지왕의 시대에 있으니 법흥왕의 앞이다.) 지금도 여기서 복을 받들고 겸하여 남쪽 왜를 진압하였다, 모두 본국본기에 보인다. 탑의 모난 4면이 5층으로 되어 있고, 그 새긴 것이 매우 기묘하다. 돌은 작은 붉은 색 반점이 있고, 그 ㅍㅁ질이 매우 좋아 이 지방의 것이 아니다. 본초에서 말한 닭 벼슬에 피를 찍어 시험했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이라 하는데 모두 본기에 실려 있다. 기려 말한다.
“염(염승, 석탑)을 싣은 붉은 돛과 붉은 깃발 단 배가 가볍고, 신령께 빌고 빌어 바다의 파도와 헤쳐 왔다. 어찌 한갓 황옥을 도와 이 언덕에 이르렀겠는가. 천년의 남쪽 왜의 노경을 막으려는 것이다.”
高麗靈塔寺
僧傳云 釋普德字智法 前高麗龍岡縣人也 詳見下本傳 常居平壤城 有山方老僧 來請講經 師固辭不免 赴講涅槃經四十餘卷 罷席 至城西大寶山嵓穴下禪觀 有神人來請 宜住此地 乃置錫杖於前 指其地曰此下有八面七級石塔 掘之果然 因立精舍 曰靈塔寺 以居之
고려 영탑사
승전에 “중 보덕의 자는 지법이니 전 고려 용강현 사람이다.”했다. 자세한 것은 아래 본전에 보인다. 항상 평양성에서 살았는데 산방에 늙은 중이 있어 와서 불경을 강의해 줄 것을 청하였다. 스님이 굳게 사양하였으나 면하지 못하고 나아가 열반경 40여 권을 강의하였다. 자리를 마치고 성(평양성) 서쪽 대보산 바위 굴 아래 이르러 선관(좌석)을 하고 있는데 신인이 와 청하기를 “마땅히 이 땅에 머물라.” 하고는 곧 앞에 지팡이를 두고 그 땅을 가리키며 “이 땅 아래 8면 7층 석탑이 있다.”고 말했다. 땅을 파니 과연 그러했다. 이 때문에 정사를 세우고 엽탑사라 이름하고 그곳에서 살았다.
皇龍寺丈六
新羅第二十四眞興王卽位十四年癸酉二月 將築紫宮於龍宮南 有黃龍現其地 乃改置爲佛寺 號黃龍寺 至己丑年 周圍墻宇 至十七年方畢 未幾 海南有一巨舫 來泊於河曲縣之絲浦(今蔚州谷浦也) 撿看有牒文云 西竺阿育王 聚黃鐵五萬七千斤黃金三萬分(別傳云 鐵四十萬七千斤金一千兩 恐誤 或云三萬七千斤) 將鑄釋迦三尊像 未就 載舡泛海而祝曰?願到有緣國土 成丈六尊容? 幷載模樣一佛二菩薩像 縣吏具狀上聞 勅使卜其縣之城東爽塏之地 創東竺寺 邀安其三尊 輸其金鐵於京師
황룡사 장육
신라 제 24 진흥왕 즉위 14년 계유 2월 장차 자궁(대궐)을 용궁남쪽에 짓는데 황룡이 그 땅에 나타났다. 이에 고쳐 불사로 만들고 황룡사라 불렀다. 기축년에 이르러 담장을 둘러싸 17년에 이르러 비로소 마쳤다. 얼마 되지 않아 바다 남쪽에 한 큰 배가 와 하곡현의 자포(울주 곡포이다.)에 댔다. 점검해보니 첩문이 있었는데 서천축의 아육왕이 황철 5만7천근, 황금 3만푼(다른 전에는 철 40만7천근, 금 1천량이라 하였는데 잘못일 것이다. 혹은 3만 7천근이라 한다.)을 모아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다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인연이 있는 국토에 이르러 장육존의 얼굴을 이루기를 원한다고 했다. 아울러 하나의 불상과 두 개의 보살상 모양을 실었다. 현의 관리가 갖추어 보고하니 그 현의 성 동쪽 높고 확트인 땅을 점쳐 동축사를 창건하고 그 삼존을 맞아 안치하고, 그 금과 철은 경사(서울)로 운반하게 하였다.
以大建六年甲午三月(寺中記云 癸巳十月十七日) 鑄成丈六尊像 一鼓而就 重三萬五千七斤 入黃金一萬一百九十八分 二菩薩入鐵一萬二千斤 黃金一萬一百三十六分 安於皇龍寺 明年像淚流至踵 沃地一尺 大王升遐之兆 或云像成在眞平之世者 謬也 別本云 阿育王在西竺大香華國 生佛後一百年間 恨不得供養眞身 歛化金鐵若干斤 三度鑄成無功
대건 6년 갑오 3월(절 안의 기록에는 계사 10월 17일이라 한다.) 장육존상을 주조하여 이루었는데 한 번 북을 쳐 나아갔다.(단번에 이루어졌다.) 그 무게는 3만5천 7근이고, 황금 10198푼이 들었다. 두 보살상은 철 12000근, 황금 10136푼이 들어갔다. (상을)황룡사에 안치하였다. 다음 해 장육존상이 눈물을 흘려 발꿈치에 이르렀는데 땅을 한 자나 젖었다. 대왕이 승하할 조짐이었다. 혹은 장육존상이 이루어진 것은 진평왕대에 있었다하나(일이라 하나) 그릇된 것이다. 별본에는 아육왕은 서천축 대향화국에 있었는데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100년 후에 태어났다. 진신(부처님)에 공양할 수 없음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철 몇 근을 거두어 세 번이나 주조하려 하였으나 공이 없었다.(이루지 못하였다.)
時王之太子獨不預斯事 王使詰之 太子奏云 ?獨力非功 曾知不就? 王然之 乃載舡泛海 南閻浮提十六大國五百中國十千小國八萬聚落 靡不周旋 皆鑄不成 最後到新羅國 眞興王鑄之於文仍林 像成 相好畢備 阿育此翻無憂 後大德慈藏西學到五臺山 感文殊現身授訣 仍囑云 ?汝國皇龍寺 乃釋迦與迦葉佛講演之地 宴坐石猶在 故天竺無憂王 聚黃鐵若干斤泛海 歷一千三百餘年 然後乃到而國成 安其寺 蓋威緣使然也?(與別記所載不同)
그 때 왕의 태자가 홀로 이 일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왕이 묻게 하니 태자가 “혼자 힘으로는 공을 이루지 못할 것을 일찍이 알고 나아가지 않았습니다.”하고 아뢰었다. 왕이 그렇다 여기고 이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다. 그 배가 남염부제 16개 대국과 500개 중간크기 나라, 십천(만여)개 작은 나라, 8만개의 마을을 두루 돌지 않음이 없었으나 모두 주조를 이루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신라국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에서 그것을 주조하여 장육존상을 이루었는데 좋은 모습을 모두 갖추었다. 아육왕은 이에 근심이 사라졌다. 후에 대덕 자장이 서학(당나라에 유학하여)하여 오대산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이 현신해서 감응하여 비결을 주고 부탁해 말하기를 “너희 나라 황룡사는 곧 석가와 가섭불이 강연하던 땅으로 연좌석이 아직도 있다. 그러므로 천축의 무우왕이 황금과 철 약간 근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300여년을 지난 후 너희 나라에 이르러 이루어지고 그 절에 안치되었던 것이다.”했다. 대개 위덕의 인연이 그렇게 하게 한 것이다. 했다. (별기에 기록된 것과는 같지 않다.)
像成後 東竺寺三尊亦移安寺中 寺記云 眞平五年甲辰 金堂造成 善德王代 寺初主眞骨歡喜師 第二主慈藏國統 次國統惠訓 次廂律師云 今兵火已來 大像與二菩薩皆融沒 而小釋迦猶存焉 讚曰 塵方何處匪眞鄕 香火因緣最我邦 不是育王難下手 月城來訪舊行藏
장육존상이 이루어진 후 동축사의 삼존을 또한 절(황룡사) 안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절의 기록에 진평왕 5년 갑진에 금당을 지어 이루었다. 선덕왕대에 절의 첫 주지는 진골 환히사였고, 제 2대 주지는 자장국통이고, 다음 국통은 혜훈, 다음은 상율 스님이다. 했다. 지금 전쟁의 화재로 대상과 두 보살은 모두 녹아없어졌고, 작은 석가불상은 아직도 남아있다. 기려 말한다. “세상 어디인들 참된 고향이 아니랴마는, 향화의 인연은 우리나라가 으뜸이다. 이는 아육왕이 착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 옛 터를 찾느라 그랬음이다.”
皇龍寺九層塔
新羅第二十七善德王卽位五年 貞觀十年丙申 慈藏法師西學 乃於五臺感文殊授法(詳見本傳) 文殊又云 汝國王是天竺刹利種王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然以山川崎嶮 故人性麤悖 多信邪見 而時或天神降禍 然有多聞比丘 在於國中 是以君臣安泰 萬庶和平矣 言已不現 藏知是大聖變化 泣血而退 經由中國太和池邊 忽有神人出問 胡爲至此?
황룡사 9층탑
신라 제 27대 선덕왕 즉위 5년 정관 10년 병신에 자장법사가 서학(당나라에 유학)하다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이 감응하여 법을 주었다.(본전에 자세히 보인다.) 문수보살이 또 “너희 나라 왕은 천축의 찰리종의 왕으로 이미 불기를 받았다. 그러므로 따로 인연이 있어 동이공공의 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성품이 거칠고 어그러져 삿된 견해를 많이 믿어 때로 혹 천신이 화를 내린다. 그러나 다문비구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임금과 신하가 편안하고, 만백성들이 화평하다.”했다. 말을 마치고 보이지 않았다. 자장이 대성의 변화임을 알고 피눈물을 흘리며 물러났다. 중국 태화지 가를 지나는데 홀연히 신인이 나와 “어찌하여 여기에 이르렀는가?” 하고 물었다.
藏答曰 求菩提故 神人禮拜 又問 汝國有何留難? 藏曰 我國北連靺鞨 南接倭人 麗濟二國 迭犯封陲 隣寇縱橫 是爲民梗 神人云 今汝國以女爲王 有德而無威 故隣國謀之 宜速歸本國 藏問 歸鄕將何爲利益乎? 神曰 皇龍寺護法龍 是吾長子 受梵王之命 來護是寺 歸本國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會 赦罪人 則外賊不能爲害 更爲我於京畿南岸置一精廬 共資予福 予亦報之德矣 言已遂奉玉而獻之 忽隱不現(寺中記云 於終南山圓香禪師處 受建塔因由)
자장이 보리를 구하려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신인이 예배하고 또 묻기를 “너희 나라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하니 자장이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연이어 있고, 남쪽으로 왜와 접하고 있으며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는 등 이웃이 종횡으로 도적질 합니다. 이것이 백성의 어려움이 됩니다.”했다. 신인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여자로서 왕을 삼았기 때문에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웃나라가 도모하려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십시오.” 했다. 자장이 묻기를 “고향으로 돌아가면 장차 어떤 이익이 있겠습니까?”하니 신인이 말하기를 “황룡사의 호법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의 명을 받고 가서 이 절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본국으로 돌아 가 9층의 탑을 절 안에 이루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한이 와서 조공할 것이니 왕조가 길이 편안할 것입니다. 탑을 세운 후 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여 풀어주면 곧 외적들이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나를 위해 경기 남쪽 언덕에 한 정려(절)를 두고 나의 복을 함께 빌어주면 내가 또한 그 은덕을 갚을 것입니다.”했다. 말을 마치 마침내 옥을 받들어 올리고 홀연히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절 안의 기록에 “종남산 원향선사가 있는 곳에서 탑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받았다.(들었다.) 했다.)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 將唐帝所賜 經像袈裟幣帛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德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 乃以寶帛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來 經營木石 伊干龍春(一作龍樹)幹蠱 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滅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 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 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皆隱不現 匠於是改悔 畢成其塔 刹柱記云鐵盤已上高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慈藏以五臺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幷通度寺戒壇及大和寺塔 以副池龍之請(大和寺在阿曲縣南 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靈蔭乎!
정관 17년 계묘 16일 당나라 황제가 내린 불경, 불상, 가사, 폐백을 가지고 나라에 돌아와 탑을 세우는 일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선덕왕(선덕여왕)이 여러 신하들과 논의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공장(장인)을 백제에게 청한 후에야 비로소 할 수 있습니다.”했다. 이에 보배와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게 청하게 하였다. 아비지라는 이름의 장인이 명을 받고 와 나무와 돌을 다듬었다. 이간 용춘(한편 용수라고도 쓴다.)이 일을 주관하였다. 거느린 소장이 200명이나 되었다. 처음 찰주(절의 기둥)를 세우던 날 장인(아비지)이 본국 백제가 멸망하는 모습의 꿈을 꾸었다. 장인이 이에 마음속으로 의심하여 손을 멈추었는데 갑자기 대지가 진동했다. 어둠 속에 한 노승과 한 장사가 있는데 금전문을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 중과 장사가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장인이 이에 뉘우치고 마침내 그 탑을 이루었다. 찰주(기둥)기에 “철반 이상 높이는 42자, 이하가 183자이다.”했다. 자장은 오대산에서 받은 사리 100립(개)을 찰주(기둥)안과 통도사 계단, 대화사 탑에 나누어 안치하는 것으로서 지룡의 청을 따른 것이다.(대화사는 아곡현 남쪽에 있는데 지금의 울주이다. 또 자장 스님이 창건하였다.) 탑을 세운 후 천지가 편안해지고, 삼한이 하나가 되었으니 어찌 탑의 신령스러운 도움이 아니라 하리오!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也 何謂也? 皇龍丈六幷九層塔 與眞平王天賜玉帶 遂寢其謀 周有九鼎 楚人不敢北窺 此之類也 讚曰 鬼拱神扶壓帝京 輝煌金碧動飛甍 登臨何啻九韓伏 始覺乾坤特地平
후에 고려왕이 장차 신라를 정벌하려다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어 범할 수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하니 “황룡사 장육과 9층탑, 진평왕 천사옥대입니다.”했다. 마침내 그 계획을 그만 두었다. 주나라에 9정이 있어 초나라 사람들이 감히 북쪽을 엿보지 못했다 하는데 이 같은 따위일 것이다. 기려 말한다.
“귀신의 도움으로 황제의 서울 위엄으로 누르니, 휘황한 금빛, 푸른 빛 용마루 날아오르는 듯하다. 올라 굽어보니 어찌 9한이 복종할 뿐이겠는가! 비로소 하늘과 땅이 특별히 편안함을 깨닫네.”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 新羅第二十七代 女王爲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若龍宮南皇龍寺建九層塔 則隣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 第九層穢貊
또 해동의 명현인 안홍이 지은 동도성립기에 “신라 제27대 여왕이 임금이 되어 비록 도는 있지만 위엄이 없어 9한이 침범하게 되었다. 만약 용궁남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곧 이웃나라의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니 제 1층은 일본, 제 2층은 중화, 제 3층은 오월, 제 4층은 탁라, 제 5층은 응유, 제 6층은 말갈, 제 7층은 단국, 제 8층은 여적, 제 9층은 예맥이다.”했다.
又按國史及寺中古記 眞興王癸酉創寺後 善德王代 貞觀十九年乙巳 塔初成 三十二孝昭王卽位七年 聖曆元年戊戌六月霹靂(寺中古記云 聖德王代 誤也 聖德王代無戊戌) 第三十三聖德王代庚申歲重成 四十八景文王代戊子六月 第二霹靂 同代第三重修 至本朝光宗卽位五年癸丑十月 第三霹靂 現(顯)宗十三年辛酉 第四重成 又靖宗二年乙亥 第四霹靂 又文宗甲辰年 第五重成 又憲宗末年乙亥 第五霹靂 肅宗丙子 第六重成 又高宗十六年戊戌冬月 西山兵火 塔寺丈六殿宇皆災
또 국사와 절 안의 엣기록을 살펴보니 진흥왕 계유에 절을 창건한 후 선덕왕대 정관 19년 을사에 탑이 처음 이루어졌다. 32대 효소왕 즉위 7년 성력 1년 무술 6월에 벽력(벼락)을 맞았다.(절 안 고기에 “성덕왕대”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성덕왕대에는 무술이 없다.) 제 33대 성덕왕대 경신에 중건하였다. 48대 경문왕대 무자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다. 같은 왕대 세 번째 중수하였다. 본조(고려) 광종 즉위 5년 계축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았다. 현종 13년 신유에 네 번째 중수 했다. 또 정종 2년 을해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다. 또 문종 갑진에 다섯 번째 중수했다. 또 헌종 말년 을해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고 숙종 병자에 여섯 번째 중수했다. 또 고종 16년 무술 겨울에 서산(몽고 군대)의 병화 탑과 절의 장육존상, 전우가 모두 재앙을 입었다.
皇龍寺鐘 芬皇寺藥師 奉德寺鍾
新羅第三十五景德大王 以天寶十三甲午 鑄皇龍寺鐘 長一丈三寸 厚九寸 入重四十九萬七千五百八十一斤 施主孝貞伊王三毛夫人 匠人里上宅下典 肅宗朝重成新鐘 長六尺八寸 又明年乙未 鑄芬皇藥師銅像 重三十萬六千七百斤 匠人本彼部强古乃未 又捨黃銅一十二萬斤 爲先考聖德王欲鑄巨鐘一口 未就而崩 其子惠恭大王乾運 以大曆庚戌十二月 命有司鳩工徒 乃克成之 安於奉德寺 寺乃孝成王開元二十六年戊寅 爲先考聖德大王奉福所創也 故鐘銘曰聖德大王神鐘之銘(聖德乃景德之考典光大王也 鐘本景德爲先考所施之金 故稱云聖德鐘爾) 朝散大夫前太子司議郎翰林郎金弼粤奉敎撰鐘銘 文煩不錄
황룡사 종, 분황사 약사, 봉덕사 종
신라 제 35대 경덕대왕 천보 13년 갑오에 황룡사 종을 주조하였는데 길이는 1장 3촌이요 두께는 9촌, 무게는 49만7천5백81근이었다. 시주는 효정이왕 삼모부인이고, 장인은 이상택 하전이다. (고려)숙종 조에 다시 새 종을 만들었는데 길이는 6척 8촌이다. 또 다음해 을미에 분황사 약사동상을 주조하였다. 무게는 30만6천7백근이고, 장인은 본피부 강고내말이다. 또 (경덕왕이)황동 12만근을 기부하여 돌아가신 아버지 성덕대왕이 큰 종 하나를 주조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 아들 혜공대왕 건운이 대력 경술 12월에 담당관청에 명하여 장인을 모아 이루고는(완성하고는) 봉덕사에 안치하였다. 절은 곧 효성왕 개원 26년 무인에 돌아가신 아버지 성덕대왕이 복을 받들기(빌기) 위해 창건하였다. 그러므로 종의 명에 “성덕대왕신종의 명(성덕은 곧 경덕의 ㅇ버지 전광대왕이다. 종은 본래 경덕왕이 죽은 아버지를 위해 베푼 바의(시주한) 금이었다. 그러므로 성덕왕의 종이라 했을 뿐이다.) 조산대부 전태자사의랑 한림랑 김필월이 왕의 명을 받고 종의 명을 지었다. 글이 번잡하여(길어) 기록하지 않는다.
靈妙寺丈六
善德王創寺塑像因緣 具載良志法師傳 景德王卽位二十三年 丈六改金 租二萬三千七百碩(良志傳 作像之初成之費 今兩存之)
영묘사장육
선덕왕이 절을 짓고 소상을 만든 인연은 모두 양지법사 전에 모두 실려있다. 경덕왕 즉위 23년 장육존상을 금으로 다시 칠하였는데 (비용은)조 2만3천7백석이었다.(양지 전에 상을 처음 만들 때의 비용이라 썼으므로 지금 둘 다 남겨둔다.)
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竹嶺東百許里 有山屹然高峙 眞平王九年甲申 忽有一大石 四面方丈 彫四方如來 皆以紅紗護之 自天墜其山頂 王聞之命駕瞻敬 遂創寺嵓側 額曰大乘寺 請比丘亡名誦蓮經者主寺 洒掃供石 香火不廢 號曰亦德山 或曰四佛山 比丘卒旣葬 塚上生蓮 又景德王遊幸栢栗寺 至山下聞地中有唱佛聲 命掘之 得大石 四面刻四方佛 因創寺 以掘佛爲號 今訛云掘石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
죽령 동쪽 100리 쯤 되는 곳에 우뚝 솟은 높은 산이 있다. 진평왕 9년 갑신에 홀연히 한 개 돌이 있었는데 사방여래가 새겨지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싸여 하늘로부터 그 산 정상에 떨어졌다. 왕이 듣고 가서 우러르고 공경하고는 마침내 바위 옆에 절을 짓고 대승사라 이름 했다. 연경을 외우는 비구 망명(이름을 알 수 없는)을 청해 머물게 하여 공석을 쓸고 향화가 끊어지지 않게 하고, 역덕산. 혹은 사불산이라 불렀다. 중이 죽어 장례한 무덤 위에 연이 났다. 또 경덕왕이 백율사에 갈 때 산 아래 이르러 땅 속에서 불성(염불) 소리가 들렸다. 그곳을 파게 하여 큰 돌을 얻었는데 4면에 사방불이 새겨져 있었다. 이 때문에 절을 짓고 굴불로서 이름을 삼았다. 지금은 와전되어 굴석이라 부른다.
王又聞唐代宗皇帝優崇釋氏 命工作五色氍毹 又彫沈檀木 與明珠美玉爲假山 高丈餘 置氍毹之上 山有巉嵓怪石澗穴區隔 每一區內 有歌舞伎樂列國山川之狀 微風入戶 蜂蝶翶翔 鷰雀飛舞 隱約視之 莫辨眞假 中安萬佛 大者逾方寸 小者八九分 其頭或巨黍者 或半菽者 螺䯻白毛 眉目的白歷 相好悉備 只可髣髴 莫得而詳 因號萬佛山
왕이 또한 당나라 대종황제가 석씨(불교)를 매우 숭상한다는 것을 듣고 장인으로 하여금 오색의 구유를 만들게 하고, 또 침단목을 조각하여 명주와 좋은 옥으로 가산을 만들게 하였는데 높이는 1장 쯤 되며 구유 위에 놓게 하였다. 산에는 가파른 산, 괴이한 돌, 물이 나오는 동굴이 구역지워져 있고, 매 구역마다 노래하고 춤추고 음악을 연주하고, 여러 나라의 산천의 형상이 있었다. 작은 바람이 문에 들어가면 벌과 나비가 날고 제비와 참새가 춤을 추는데 얼핏보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하였다. 그 안에는 1만 개의 부처를 안치하였는데 큰 것은 사방 1촌을 넘고, 작은 것은 8, 9푼이었다. 그 머리는 혹은 큰 기장만 하고, 혹은 반쪽의 콩만 하였다. 소라모양 상투와 백모, 눈썹과 눈이 선명하며 모든 형상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다만 비슷하게 할 수 있을 뿐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만불산이라 불렀다.
更鏤金玉爲流蘇幡蓋菴羅薝葍花果莊嚴 百步樓閣 臺殿堂榭 都大雖微 勢皆活動 前有旋遶比丘像千餘軀 下列紫金鐘三簴 皆有閣有蒲牢 鯨魚爲撞 有風而鐘鳴 旋遶僧皆仆拜至地 隱隱有梵音 盖關捩在乎鐘也 雖號萬佛 其實不可勝記 旣成 遣使獻之 代宗見之 嘆曰 新羅之巧 天造非巧也 乃以九光扇加置嵓岫間 因謂之佛光 四月八日 詔兩街僧徒 於內道場 禮萬佛山 命三藏不空念讚密部眞詮千遍以慶之 觀者皆嘆伏其巧 讚曰 天粧滿月四方裁 地湧明毫一夜開 妙手更煩彫萬佛 眞風要使遍三才
다시 금과 옥을 새겨 다섯가지 색의 실로 만든 깃발과 일산, 암라(망과), 담복(치자), 꽃과 과일로 꾸민 것과 백보 누각과 대전, 당사를 만들었다. 크기는 비록 작지만 형세는 모두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앞에는 돌고 있는 비구상 천여 구가 있고, 아래에는 자금종 셋을 벌려놓았는데 모두 종각이 있고 포뢰가 있는데 고래모양의 종치는 방망이도 있었다. 바람이 있으면 종이 울리고 돌고 있던 중들이 모두 엎드려 절하는데 (머리가) 땅에 닿았다. 은은한 염불소리가 있는데 대개 종과 관계가 있었다. 비록 만불이라 불렀으나 그 실제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완성되자 사신을 보내 바쳤다. 대종이 보고 탄복해 말하기를 “신라의 기교는 하늘이 만든 것이지 인간의 기교가 아니다.”하고는 곧 구광선을 바위 사이에 덧붙여두고 불광이라 이름하였다. 4월 8일 양가의 중들에게 명령하여 대도량에서 만불산에 예를 표시하게 하고, 삼장불공(삼장법사)으로 하여금 밀부(밀교)의 진리를 천 번 기리도록 하는 것으로서 축하하게 하니 보는 자들이 모두 그 공교로움에 탄복하였다. 기려 말한다. “하늘은 만월을 단장시켜 사방불 마련하였고, 땅은 명호를 하룻밤에 열었다. 묘한 솜씨로 다시 만불을 새기니, 부처님의 풍도 삼재에 두루하게 한다.”
生義寺石彌勒
善德王時 釋生義常住道中寺 夢有僧引上南山而行 令結草爲標 至山之南洞 謂曰 我埋此處 請師出安嶺上 旣覺 與友人尋所標 至其洞掘地 有石彌勒出 置於三花嶺上 善德王十二年甲辰歲 創寺而居 後名生義寺(今訛言性義寺 忠談師每歲重三重九 烹茶獻供者 是此尊也)
생의사 석미륵
선덕왕 때 중 생의는 평소 도중사에서 살았다. 꿈에 중이 인도하여 남산에 올라 가 풀을 엮어 표시하게 하고, 산의 남쪽 동에 이르러 일러 말하기를 “내가 이 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이 꺼내어 고개 위에 안치시켜 줄 것을 청합니다.”했다. 깨고 나서 벗들과 함께 표시 한 곳을 찾아 그 동에 이르러 땅을 파니 석미륵이 나왔으므로 삼화령 위에 두었다. 선덕왕 12년 갑진년에 절을 짓고 살았다. 후에 생의사라 이름하였다.(지금은 말이 와전되어 성의사라 한다. 충담사가 매년 3월 3일, 9월 9일 차를 끓여 공양한 것이 이 부처이다.)
興輪寺壁畵普賢
第五十四景明王時 興輪寺南門及左右廊廡 災焚未修 靖和弘繼二僧募緣將修 貞明七年辛巳五月十五日 帝釋降于寺之左經樓 留旬日 殿塔及草樹土石 皆發異香 五雲覆寺 南池魚龍喜躍跳擲 國人聚觀 嘆未曾有 玉帛粱稻施積丘山 工匠自來 不日成之 工旣畢 天帝將還 二僧白曰 天若欲還宮 請圖寫聖容 至誠供養 以報天恩 亦乃因玆留影 永鎭下方焉 帝曰 我之願力 不如彼普賢菩薩遍垂玄化 畵此菩薩像 虔設供養而不廢宜矣 二僧奉敎 敬畫普賢菩薩於壁間 至今猶存其像
흥륜사 벽화, 보현
제 54 경명왕 때 흥륜사 남문과 좌우 낭무가 불에 탔으나 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화와 홍계 두 중이 인연을 모아 수리하려 하였다. 정명 7년 신사 5월 15일 제석이 절의 왼쪽 경루에 내려와 10일을 머물렀다. 전탑과 풀, 나무, 토석이 모두 기이한 향을 풍기고, 오색의 구름이 절을 덮었다. 남지의 물고기와 용이 기뻐 뛰었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 보고 일찍이 있지 않았던 것이라 탄복하여 옥과 비단, 곡식을 시주하여 산 같이 쌓였고, 장인들이 스스로 와 하루가 되지 않아 이루어졌다. 공사를 마치자 천제가 장차 돌아가려 할 때 두 중이 말하기를 “천제게서 만일 궁에 돌아가고자 하시니 성스러운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 지극한 정성으로 공양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은혜를 갚을 수 있기를 청합니다. 또 이로 인하여 초상을 남겨 길이 이 세상을 길이 보호하게 하십시오.”했다. 천제가 말하기를 “나의 원력은 저 보현보살의 현묘한 교화를 두루 펴는 것보다 못하니 이 보살상을 그려 정성껏 공양하여 없애지 않는 것이 마당하다.”했다. 두 중이 가르침을 받들어 공경히 보현보살을 벽 사이에 그렸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상이 남아 있다.
三所觀音 衆生寺
新羅古傳云 中華天子有寵姬 美艶無雙 謂古今圖畫 尠有如此者 乃命善畫者寫眞(畵工傳失其名 或云張僧繇 則是吳人也 梁天監中爲武陵王國侍郎直秘閣知畫事 歷右將軍吳興太守 則乃中國梁陳間之天子也 而傳云唐帝者 海東人凡諸中國爲唐爾 其實未詳何代帝王 兩存之) 其人奉勅圖成 誤落筆汚赤毁於臍下 欲改之而不能 心疑赤誌必自天生 功畢獻之
삼소관음, 중생사
신라 고전에 “중화(중국) 천자에게 총애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아름답기가 작이 없었다. (천자가) ‘고금의 그림으로도 이 같은 자는 적었다.’하고는 곧 그림을 잘 그리는 자에게 참 모습을 그리게 했다.(화공은 그 이름을 잃었다. 혹은 장승요라 하는데 곧 오나라 사람이다. 양나라 천감 연간에 무릉왕국 시랑 직비각 지화사가 되었고, 우장군 오흥태수를 거쳤으니 곧 중국 양나라와 진나라 사이의 천자일 것이다. 전에 ‘당나라 황제’라 한 것은 해동 사람들이 모두 여러 중국을 당나라라 했을 뿐으로 그 실제는 어느 대의 제왕인지 자세하지 않다. 둘 다 적어둔다.) 그 사람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그림을 이루었는데 잘못하여 붓을 떨어뜨려 배꼽 아래에 붉은 점을 찍었다. 그것을 고치려 하였으나 할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반드시 태어날 때부터 있는 것이라 생각하여 일을 마치고 바쳤다.
帝目之曰 形則逼眞矣 其臍下之誌 乃所內秘 何得知之幷寫? 帝乃震怒 下圓扉 將加刑 丞相奏云 所謂伊人其心且直 願赦宥之 帝曰 彼旣賢直 朕昨夢之像 畫進 不差則宥之 其人乃畫十一面觀音像呈之 協於所夢 帝於是意解赦之 其人旣免 乃與博士芬節約曰 吾聞新羅國敬信佛法 與子乘桴于海 適彼同修佛事 廣益仁邦 不亦益乎 遂相與到新羅國 因成此寺大悲像 國人瞻仰 禳禱獲福 不可勝記
황제가 그것을 지목하여 말하기를 “형상은 곧 진짜와 같은데 그 배꼽 아래의 점은 안의 비밀스러운 곳인데 어떻게 알아 함께 그렸는가?”하였다. 황제가 이에 크게 노하여 화공을 옥에 가두고 형벌을 가하려 했다. 승상이 아뢰어 말하기를 “이른 바 저 사람은 도한 정직합니다. 풀어주어 용서해 주시기를 원합니다.”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그가 이미 어질고 곧다하니 짐의 꿈에 보인 상을 그려 바치도록 하라. 어긋나지 않는다면 곧 용서할 것이다.”했다. 그 사람이 곧 십일면관음상을 그려 올렸더니 꿈꾼 바와 부합하였다. 황제가 이에 풀어줄 것을 생각하였다. 그 사람이 (형벌을) 면한 후 박사 분절과 약속해 말하기를 “ 내가 들으니 신라국은 불법을 공경하고 믿는다하니 그대와 바다에서 뗏목을 타고 그 나라에 가 함께 불사를 닦아 널리 인의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이 또한 유익하지 않겠습니까?”했다. 마침내 서로 함께 신라국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이 절의 대비상(관세음보살상)을 이루니 나라 사람들이 우러르고 기도하여 복을 얻음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羅季天成中 正甫崔殷諴久無胤息 詣玆寺大慈前祈禱 有娠而生男 未盈三朔 百濟甄萱襲犯京師 城中大潰 殷諴抱兒來告曰 鄰兵奄至 事急矣 赤子累重 不能俱免 若誠大聖之所賜 願借大慈之力覆養之 令我父子再得相見 涕泣悲惋 三泣而三告之 裹以襁褓 藏諸猊座下 眷眷而去 經半月寇退 來尋之 肌膚如新浴 貌體嬛好 乳香尙痕於口 抱持歸養 及壯聰惠過人 是爲丞魯 位至正匡 丞魯生郎中崔肅 肅生郎中齊顔焉 自此繼嗣不絶 殷諴隨敬順王入本朝爲大姓
신라 말 천성 연간에 정ㅂ 최은함은 오라동안 자식이 없어 이 절의 대자(관세음보살) 앞에 나아가 기도하였더니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세 달이 되지 않아 후백제 견훤이 습격하여 경사(서울)를 범하였다. 성 안이 크게 무너지니 최은함이 아이를 싸고 와 고하여 말하기를 “이웃의 군대가 습격해 일이 급합니다. 아이에게 누가 겹친다면 모두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로 대성의 내린 바라면(대성이 내리신 아이라면) 대자의 힘을 빌려 덮어 기르시어 우리 부자가 다시 서로 만날 수 있게 하십시오.”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탄식하였다. 세 번 울고 세 번 고하고는 (아이를)강보에 싸서 예좌 아래 감추고 못잊어 하며 갔다. 반달이 지나 도적이 물러나고 와서 찾으니 피부는 새로 목욕한 것 같고, 몸은 우아하고, 젖 냄새가 아직도 입에서 났다. 싸서 데리고 돌아와 길렀다. 성장함에 이르러 총명하과 지혜가 보통사람보다 뛰어났다. 이가 승로이니 지위가 정광에 이르렀다.
丞魯生郎中崔肅 肅生郎中齊顔焉 自此繼嗣不絶 殷諴隨敬順王入本朝爲大姓 又統和十年三月 主寺釋性泰 跪於菩薩前 自言 弟子久住玆寺 精勤香火 晝夜匪懈 然以寺無田出 香祀無繼 將移他所 故來辭爾 是日 假寐夢大聖謂曰 師且住無遠離 我以緣化充齋費 僧忻然感悟 遂留不行 後十三日 忽有二人 馬載牛駄 到於門前 寺僧出問 何所而來? 曰 我等是金州界人 向有一比丘到我云 ?我住東京衆生寺久矣 欲以四事之難 緣化到此? 是以 歛施隣閭 得米六碩 鹽四碩 負載以來
승노는 낭중 숙을 낳고, 숙은 낭중 제안을 낳았다. 이로부터 후사가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은함이 경순왕을 따라 본조(고려)에 들어 와 큰 성(씨족)이 되었다. 또 통화 10년 3월 주지 중 성태가 보살 앞에 꿇고 스스로 말하기를 “제가 오래 동안 이 절에 머물면서 정성으로 부지런히 향을 피워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절에 밭에서 나오는 것이 없어 향기로운 제사를 이지 못하니 장차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해서 와서 하직합니다.”했다. 이날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대성이 일러 말하기를 “스님은 또한 머물고 멀리 떠나지 마시오. 내가 인연이 있는 이를 교화하는 것으로서 재의 비용을 채울 것입니다.”했다. 중이 기뻐하며 느끼고 깨달아 마침내 머물고 가지 않았다. 13일 후 홀연히 두 사람이 말과 소에 짐을 싣고 문 앞에 이르렀다. 중이 나와 묻기를 “어디서 왔습니까?”하니 말하기를 “우리는 금주 지방 사람인데 지난번에 한 비구가 우리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동경 중생사에 산지 오래되었는데 네가지 일의 어려움 때문에 인연이 있는 사람을 인도하여 교화하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웃에 베품을 거두어 쌀 6석, 소금 4석을 얻어 싣고 왔습니다.”했다.
僧曰 此寺無人緣化者 爾輩恐聞之誤 其人曰 向之比丘率我輩而來 到此師見井邊曰 ?距寺不遠 我先往待之? 我輩隨逐而來 寺僧引入法堂前 其人瞻禮大聖 相謂曰 此緣化比丘之像也 驚嘆不已 故所納米鹽 追年不廢 又一夕寺門有火災 閭里奔救 升堂見像 不知所在 視之已立在庭中矣 問其出者誰 皆曰不知 乃知大聖靈威也
중이 말하기를 “이 절에서는 인연이 있는 사람을 인도하여 교화할 사람이 없으니 너희들은 아마도 잘못 들었을 것입니다.”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지난 번의 비구가 우리들을 이끌고 왔는데 이 사견정 가에 이르러 말하기를 ‘절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내가 먼저 가 기다리겠다.’하므로 우리들이 따라 온 것입니다.”했다. 절의 중이 법당 앞으로 인도하니 그 사람이 대성에게 예배하고 서로 일러 말하기를 “이가 인연이 있는 이를 인도하여 교화하던 비구의 상입니다.”하고는 놀라고 감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들이는 바의 쌀과 소금이 매년 없어지지 않았다. 또 어느 날 저녁 절 문에 불이 나니 마을(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불을 껏다. 법당에 올라 상을 불상을 보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여 살펴보니 이미 뜰 안에 서 있었다. 그 내온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으나 모두 일지 못한다고 했다. 이에 대성의 영험한 힘임을 알았다.
又大定十三年癸巳間 有僧占崇 得住玆寺 不解文字 性本純粹 精勤火香 有一僧欲奪其居 訴於襯衣天使曰 玆寺所以國家祈恩奉福之所 宜選會讀文疏者主之 天使然之 欲試其人 乃倒授疏文 占崇應手披讀如流 天使服膺 退坐房中 俾之再讀 崇鉗口無言 天使曰 上人良由大聖之所護也 終不奪之 當時 與崇同住者 處士金仁夫 傳諸鄕老 筆之于傳
또 대정 13년 계사 연간에 중 숭점이 있어 이 절에 살고 있었는데 문자는 알지 못하나 본성이 순수하여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향을 피웠다. 한 중이 있어 빼앗아 살고자 하여 친의천사에게 하소연하여 말하기를 “아 절은 국가의 은혜를 기도하고 복을 받드는 장소입니다. 마땅히 문소(호소문)를 읽을 수 있는 자를 선발하여 주관하게 해야 합니다.”했다. 천사가 그렇다 여기고 그 사람을 시험하고자 하여 이에 거꾸로 소문을 주니 점숭이 손으로 받아 펴 읽기를 물이 흐르는 것 같이 했다. 천사가 마음속에 간직하고는 물러나 방 안에 앉아 다시 읽게 하였더니 점숭이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천사가 말하기를 “지혜와 덕망을 갖춘 스님은 참으로 대성이 지켜주는 이입니다.”했다. 마침내 빼앗지 못하였다. 당시 점숭과 함께 살았던 처사 김인부가 여러 지방 노인에게 전하여 전에 기록되었다.
栢栗寺
雞林之北岳曰金剛嶺 山之陽有栢栗寺 寺有大悲之像一軀 不知作始 而靈異頗著 或云 是中國之神匠塑衆生寺像時幷造也 諺云 此大聖曾上忉利天 還來入法堂時 所履石上脚迹至今不刓 或云 救夫禮郎還來時之所視迹也 天授三年壬辰九月七日 孝昭王奉大玄薩喰之子夫禮郎爲國仙 珠履千徒 親安常尤甚 天授四年(□長壽二年)癸巳暮春之月 領徒遊金蘭 到北溟之境 被狄賊所掠而去 門客皆失措而還 獨安常追迹之 是三月十一日也
백율사
계림의 부쪽 산을 금강령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 백율사가 있고, 절에는 대비(관세음보살)상이 하나 있는데 처음 만들어진 때는 알지 못하나 영험하고 시이함이 자못 드러났다. 혹은 “이는 중국의 신 같은 장인이 중생사의 불상을 만들 때 같이 만든 것이다.” 했다. 또 세상에서는 “이는 대성이 일찍이 도리천에 올랐다가 돌아와 법당에 들어 갈 때 밟은 돌 위의 발자국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했다. 혹은 “부례랑을 구하여 돌아 올 때 보인 바의 자취이다.”했다. 천수 3년 임진 9월 7일 효소왕이 대현 살찬의 아들 부례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다. 주리(화랑)의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안상과 친하기가 더욱 심하였다. 천수 4년(장수 2년이다.) 계사 3월에 무리를 거느리고 금란에 놀러 갔다가 북명의 경계에 이르러 적적에게 사로잡혀 갔다. 문객들이 모두 어쩔 줄 몰라 하다 돌아갔으나 안상만은 자취를 쫓아갔다. 이 때가 3월 11일이다.
大王聞之 驚駭不勝曰 先君得神笛 傳于朕躬 今與玄琴藏在內庫 因何國仙忽爲賊俘 爲之奈何?(琴笛事具載別傳) 時有瑞雲覆天尊庫 王又震懼使檢之 庫內失琴笛二寶 乃曰 朕何不予 昨失國仙 又亡琴笛 乃囚司庫吏金貞高等五人 四月募於國曰 得琴笛者 賞之一歲租 五月十五日 郎二親就栢栗寺大悲像前 禋祈累夕 忽香卓上得琴笛二寶 而郎常二人來到於像後 二親顚喜 問其所由來
대왕이 그것을 듣고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여 말하기를 “돌아가신 임금께서 신적을 얻어 나에게 전해 주셔서 지금 현금과 함께 내고에 감추어 두었는데 무엇 때문에 국선이 홀연히 도적에게 사로잡혀 갔단 말인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했다.(현금과 신적의 일은 별전에 갖추어 실려 있다.) 그 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덮었다. 왕이 또한 크게 두려워하여 점검하게 하였더니 천존고 안에 있던 현금과 신적을 잃어버렸다. 이에 말하기를 “내가 어찌 참여치 않으리오.(짐에게 복이 없어?) 지난번에는 국선을 잃어버렸고, 또 현금과 신적을 잃어버렸다.”하고는 곧 천존고를 맡아 관리하던 관리 김정고 등 5명을 가두었다. 4월 나라에 모집하여 말하기를 “현금과 신적을 얻은 자는 1년의 조를 상으로 줄 것이다.”했다. 5월 15일 부례랑의 부모가 백율사 대비상 앞에 나아가 제사하고 여러 날 저녁을 기도하였다. 홀연히 향탁 위에서 현금과 신적 두 보배를 얻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이 불상 뒤에 와 있었다. 부모가 엎어질 듯 기뻐하며 오게 된 연유를 물었다.
郎曰 予自被掠 爲彼國大都仇羅家之牧子 放牧於大烏羅尼野(一本作都仇家奴 牧於大磨之野) 忽有一僧 容儀端正 手携琴笛來慰曰 ?憶桑梓乎?? 予不覺跪于前曰 ?眷戀君親 何論其極? 僧曰 ?然則 宜從我來!? 遂率至海壖 又與安常會 乃批笛爲兩分 與二人各乘一隻 自乘其琴 泛泛歸來 俄然至此矣
부례랑이 말하기를 “내가 납치당하고부터 그 나라 대도구라 집에서 말을 기르는 일을 하였는데 대오라니야(어떤 책에는 ‘도구 집의 종이 되어 대마의 들에서 말을 길렀다.’고 했다.)에서 방목하고 있었습니다. 홀연히 한 중이 있어 용모가 단정하고 손에 현금과 신적을 들고 와 위로해 말하기를 ‘고향을 생각하는가?’했습니다. 저는 깨닫지 못한 사이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임금과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며 그리워함이 어찌 다 논할 수 있겠습니까?’했습니다. 중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나를 따라오라!’하고는 마침내 인솔하여 바닷가에 이르러 또 안상과 만났습니다. 신적을 쳐 둘로 나누어 두 사람이 각각 하나를 타게 하고 자신은 그 현금을 타고 떠서 돌아왔는데 순식간에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했다.
於是 具事馳聞 王大驚使迎郎 隨琴笛入內 施鑄金銀五器二副各重五十兩 摩衲袈裟五領 大綃三千疋 田一萬頃納於寺 用答慈庥焉 大赦國內 賜人爵三級 復民租三年 主寺僧移住奉聖 封郞爲大角干(羅之冢宰爵名) 父大玄阿喰爲太大角干 母龍寶夫人爲沙梁部鏡井宮主 安常師爲大統 司庫五人皆免 賜爵各五級 六月十二日 有彗星孛于東方 十七日 又孛于西方 日官奏曰 不封爵於琴笛之瑞 於是 冊號神笛爲萬萬波波息 彗乃滅 後多靈異 文煩不載 世謂安常爲俊永郎徒 不之審也 永郎徒 唯眞才繁完等知名 皆亦不測人也(詳見別傳)
이에 일을 갖추어 아뢰었다. 왕이 크게 놀라 부례랑을 맞이하게 하니 현금과 신적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왕이)금과 은으로 주조한 그릇 두 벌은 각각의 무게는 50냥이고, 마납가사 다섯 벌, 대초 3천 필을 주고, 밭 1만경을 절에 소속시켜 부처님에게 보답하는데 쓰게 했다. 나라 안의 죄수를 크게 풀어주고, 사람들에게는 벼슬 3급씩을 내렸으며 백성의 조를 3년간 면제해 주었다. 머물던 중은 옮겨 봉성사에서 살게 하고 부례랑을 봉하여 대각간(신라의 총재 벼를 이름이다.)으로 삼았다. 아버지 대현 아찬은 태대각간을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을 사량부 경정궁주로 삼았다. 안상은 대통으로 삼았다. 창고를 담당하였던 다섯사람도 모두 죄를 면해 주고, 벼슬을 각각 5급을 주었다. 6월 12일 혜성이 동쪽 하늘에 나타났고, 17일에 또 서쪽 하늘에 나타났다. 일관이 아뢰어 말하기를 “현금과 신적에게 뼈슬을 봉하지 않은 징조입니다.”했다. 이에 신적을 책호하여 만만파파식적이라 하니 혜성이 곧 사라졌다. 후에 신령스럽고 기이한 일들이 많았으나 글이 번잡하여 싣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영랑이다.”했는데 자세히 알 수 없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직 진재, 번왕 등의 이름만 알려졌을 뿐인데 모두 또한 헤아릴 수 없는(알 수 없는) 사람이다.(별전에 자세히 보인다.)
敏藏寺
禺金里貧女寶開 有子名長春 從海賈而征 久無音耗 其母就敏藏寺(寺乃敏藏角干捨家爲寺)觀音前克祈七日 而長春忽至 問其由緖 曰 海中風飄舶壞 同侶皆不免 予乘隻板歸泊吳涯 吳人收之 俾耕于野 有異僧如鄕里來 吊慰勤勤 率我同行 前有深渠 僧掖我跳之 昏昏間如聞鄕音與哭泣之聲 見之乃已屆此矣 日哺時離吳 至此纔戌初 卽天寶四年乙酉四月八日也 景德王聞之 施田於寺 又納財幣焉
민장사
우금리의 가난한 여자 보개에게 장춘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바다의 장사꾼을 따라 갔는데 오래 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 어머니가 민장사(절은 곧 민장각간이 집을 내 절로 만든 것이다.)에 나아가 관세음보살 앞에서 7일을 기도하였더니 장춘이 홀연히 이르렀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장춘이 말하기를 “바다 안에서 회오리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져 동료들은 모두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널판을 타고 가 오나라 바닷가에 닿았습니다. 오나라 사람들이 거두어 들에서 밭을 갈게 하였는데 이상한 중이 있어 고향에서 온 듯이 위로하기를 은근하게 하고 나를 인솔하여 함께 갔습니다. 앞에 깊은 도랑이 있으니 중이 날르 옆구리에 끼고 뛰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한 사이에 고향의 소리와 곡하고 우는 소리를 듣고 보니 곧 내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오후 3시~5시(신시) 사이에 오나라를 떠나 여기에 이른 것이 오후 7시~8시(술시)초였습니다.곧 천보 4년 을유 4월 8일이다. 경덕왕이 그것을 듣고 밭을 절에 시주하고 또 재물과 비단을 들이게 하였다.(바쳤다.)
前後所將舍利
國史云 眞興王大淸三年己巳 梁使沈湖送舍利若干粒 善德王代貞觀十七年癸卯 慈藏法師所將佛頭骨佛牙佛舍利百粒 佛所著緋羅金點袈裟一領 其舍利分爲三 一分在皇龍寺 一分在太和塔 一分幷袈裟在通度寺戒壇 其餘未詳所在 壇有二級 上級之中 安石蓋如覆鑊 諺云 昔在本朝 相次有二廉使禮壇 擧石鑊而敬之 前感脩蟒在函中 後見巨蟾蹲石腹 自此不敢擧之 近有上將軍金公利生庾侍郞碩 以高廟朝受旨 指揮江東 仗節到寺 擬欲擧石瞻禮 寺僧以往事難之 二公令軍士固擧之 內有小石函 函襲之中 貯以瑠璃筒 筒中舍利只四粒 傳示瞻敬 筒有小傷裂處 於是庾公適蓄一水精函子 遂奉施兼藏焉 識之以記 移御江都四年乙未歲也
전후소장 사리
국사에 “진흥왕 대청 3년 기사에 양나라가 심호로 하여금 사리 약간 알을 보내왔다. 선덕왕대 정관 17년 계묘에 자장법사가 부처의 머리뼈, 부처의 이빨, 불사리 100알, 부처가 입었던 푸른 비단에 금 점이 있는 가사 1벌을 가져왔다. 그 사리를 세 몫으로 나누어 한 몫은 황룡사에 있고, 한 몫은 태화탑에 있고, 한몫과 가사는 통도사 계단에 있다. 그 나머지는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계단은 두 층이 있는데 위 층 가운데 돌 뚜껑을 안치하였는데 가마솥을 엎은 것과 같다.”고 했다. 속설에는 “옛날 본조(고려?)에서 서로 차례로 두 염사가 있어 단에 예를 표하고(절을 하고) 돌솥을 들고 공경하였다. 먼저는 구렁이가 함(상자)안에 있는 것을 보았고, 뒤에는 커다란 두꺼비가 웅크린 채 돌에 배를 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부터 감히 그것을 들지 못하였다. 최근에 상장군 김이생, 시랑 유석이 고종의 명을 받고 강동을 지휘할 때 부절을 가지고 절에 이르러 돌을 들고 예배를 하고자 생각하였다. 절의 중이 지난 일을 가지고 어렵게 여겼다. 두 공이 군사로 하여금 억지로 들게 하자 안에 작은 돌함이 있고, 돌함 안에 유리통이 담겨 있었는데 통 안에는 사리가 다만 4알뿐이었다. 돌려보며 우러러 공경하였다. 통에 약간 상한 곳이 있었다. 이에 유석이 마침 가지고 있던 하나의 수정함을 마침내 받들어 시주하고 겸하여 보관하게 하고 기록하여 알게 하였다. 강도(강화도)로 서울을 옮긴지 4년이 되던 을미년이다.”했다.
古記稱百枚分藏三處 今唯四爾 旣隱現隨人 多小不足怪也 又諺云 其皇龍寺塔災之日 石鑊之東面始有大斑 至今猶然 卽大遼應曆三年癸丑歲也 本朝光廟五載也 塔之第三災也 曹溪無衣子留詩云 聞道皇龍災塔日 連燒一面示無間 是也 自至元甲子已來 大朝使佐本國皇華 爭來瞻禮 四方雲水 輻湊來參 或擧不擧 眞身四枚外 變身舍利 碎如砂礫 現於鑊外 而異香郁烈 彌日不歇者 比比有之 此末季一方之奇事也
고기에는 “100개를 나누어 세 곳에 보관하였다.”했는데 지금은 네 개 뿐이다. 숨겨지고 나타나는 것이 사람을 따름이니 많고 적음은 괴이할 것이 없다. 또 속설에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돌솥의 동쪽 면에 처음 커다란 반점이 생겼는데 지금 아직도 그렇다.”했는데 곧 대요 응력 3년 계축년, 본조(고려) 광종 5년으로 탑이 세 번 째 불탔던 때이다. 조계의 무의자가 시를 남겨 “듣건데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이어 한 면을 불태워도 보일 틈이 없다.”라고 한 ㄱ서이 이것이다. 지원 갑자 이래로부터 대조(원나라)의 사신과 본국의 황화(사신)이 다투어 와서 예배하였고, 사방의 운수(중)들이 몰려 와 참배했으니 혹은 들기도하고 들지 않기도 하였다. 진신 사리 4개 외에 변신사리가 부서져 모래와 같은데 솥 밖에 나타났고(나와 있었고) 기이한 향기가 강하게 풍겨 여러 날 없어지지 않는 일이 반복하여 있었다. 이는 말세에 있는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이다.
唐大中五年辛未 入朝使元弘所將佛牙(今未詳所在 新羅文聖王代) 後唐同光元年癸未 本朝太祖卽位六年 入朝使尹質所將五百羅漢像 今在北崇山神光寺 大宋宣和元年己卯(睿廟十五年) 入貢使鄭克永李之美等所將佛牙 今內殿置奉者是也 相傳云 昔義湘法師入唐 到終南山至相寺智儼尊者處 隣有宣律師 常受天供 每齋時天廚送食
당나라 대중 5년 신미에 입조사(당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사신) 원홍이 가져온 부처의 어금니(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신라 문성왕대이다.) 후당 동광 1년 계미 본조(고려) 태조 즉위 6년 입조사(당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사신) 윤질이 500나한상을 가져왔다. 지금 북숭산 신광사에 있다. 대송 선화 1년 기묘(예종 15년이다.)에 입공사 정극영, 이지미 등이 가져온 부처의 어금니는 지금 내전에 두고 받들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의상전에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 들어 가 종남산 지상사 지엄존자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이웃에 선율 스님이 있었는데 항상 하늘의 공양을 받았다. 매 재를 올릴 때마다 하늘의 부엌에서 음식을 보냈다.
一日律師請湘公齋 湘至坐定旣久 天供過時不至 湘乃空鉢而歸 天使乃至 律師問 今日何故遲? 天使曰 滿洞有神兵遮擁 不能得入 於是 律師知湘公有神衛 乃服其道勝 仍留其供具 翌日又邀儼湘二師齋 具陳其由 湘公從容謂宣曰 師旣被天帝所敬 嘗聞帝釋宮有佛四十齒之一牙 爲我等輩 請下人間爲福如何? 律師後與天使傳其意於上帝 帝限七日送與湘公 致敬訖 邀安大內
하루는 선율스님이 의상을 재에 청하였다. 의상이 이르러 자리에 앉은 지 오래되어 하늘의 공양이 때를 지나도 이르지 않았다. 의상이 이에 빈 바릿대만 가지고 돌아가자 천사가 이에 이르렀다. 선율 스님이 묻기를 “오늘은 무슨 이유로 늦었습니까?”하니 천사가 말하기를 “마을에 가득 신병이 막고 있어서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했다. 이에 선율 스님이 신이 의상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곧 그 도가 나음을 인정하고, 하늘의 공양물을 모두 남겨두었다. 다음날 또 지엄과 의상 두 스님을 재에 맞이하여 그 이유(천사가 늦은 이유)를 모두 말하였다. 의상이 조용히 선율에게 일러 말하기를 “스님은 이미 천제의 공경함을 받고 있습니다. 일찍이 제석궁에 부처님 40개 이 중에 어금니 하나가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들을 위해 인간에게 내려 보낼 것을 청해 복이 되게하는 것이 어떠합니까?”했다. 선율 스님이 후에 천사와 그 뜻을 상제에게 전하니 상제가 7일을 기한으로 의상에게 보내주었다. (의상이)지극히 공경하기를 마친 뒤 맞아 대궐에 안치하였다.
後至大宋徽宗朝 崇奉左道 時國人傳圖讖曰 金人敗國 黃巾之徒 諷日官奏曰 金人者 佛敎之謂也 將不利於國家 議將破滅釋氏 坑諸沙門 焚燒經典 而別造小舡 載佛牙泛於大海 任隨緣流泊 于時 適有本朝使者 至宋聞其事 以天花茸五十領紵布三百疋 行賂於押舡內史 密授佛牙 但流空舡 使臣等旣得佛牙來奏
후에 대송 휘종 때에 이르러 좌도를 높이고 받들었다. 그 때 나라 사람들이 도참을 전해 말하기를 “금인들이 나라를 무너뜨릴 것이다.”했다. 황건의 무리가 일관에게 고하여 아뢰게 하니 (일관이)말하기를 “금인은 불교를 이릅니다. 장차 국가에 이롭지 않을 것이니 장차 석씨(불교)를 깨트려 없애고, 여러 사문을 구덩이에 묻고, 경전을 불태울 것을 논의해야 합니다. 따로 작은 배를 만들어 부처의 어금니를 싣고, 큰 바다에 뛰워 인연의 흐름을 따라 닿게 해야 합니다.”했다. 이때 마침 본조(고려)의 사신이 있었는데 송나라에 이르러 그 일을 듣고, 천화용 50령과 저포 300필을 배를 호송하는 관리에게 뇌물을 주니 비밀리 부처의 어금니를 주고 다만 빈 배만 흘려보냈다. 사신 등이 부처의 어금니를 얻어 와 아뢰었다.
於是睿宗大喜 奉安于十員殿左掖小殿 常鑰匙殿門 施香燈于外 每親幸日 開殿瞻敬 至壬辰歲移御次 內官悤遽中忘不收檢 至丙申四月 御願堂神孝寺釋蘊光請致敬佛牙 聞于上 勑令內臣遍檢宮中 無得也 時 栢臺侍御史崔冲命薛伸 急徵于諸謁者房 皆未知所措 內臣金承老奏曰 壬辰年移御時紫門日記推看 從之 記云 入內侍大府卿李白全受佛牙函云 召李詰之
이에 예종이 크게 기뻐하며 십원전 왼쪽의 작은 전각에 받들어 안치하였다. 항상 전각의 문을 잠그고 밖에 향과 등을 켜고 매번 왕이 직접 가는 날에만 전각의 문을 열고 예배하였다. 임진년에 서울을 (강화로)옮김에 이르러 내관이 몹시 급하고 바쁜 중에 거두어 점검하기를 잊어버렸다. 병신년 4월에 이르러 왕의 원당인 신효사 중 온광이 부처의 어금니에 공경을 다할 것을 청하였다. 왕에게 아뢰니 내신들로 하여금 두주 궁중을 검사하게 명령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그 때 백대 시어사 최충이 설신에게 명하여 급히 여러 알자들의 방을 다니며 물었으나 모두 둔 바를 알지 못하였다. 내신 김승노가 아뢰어 말하기를 “임진년에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를 검사해 보십시오.”했다. 그 말을 따랐다.
記云 入內侍大府卿李白全受佛牙函云 召李詰之
기록에 “입내시대부경 이백전이 부처의 어금니를 받았다.”라 했다. 이전을 불러 물었다.
對曰 請歸家更尋私記 到家檢看 得左番謁者金瑞龍佛牙函准受記 來呈 召問瑞龍 無辭以對 又以金承老所奏云 壬辰至今丙申五年間 御佛堂及景靈殿上守等 囚禁問當 依違未決 隔三日 夜中瑞龍家園墻裏 有投擲物聲 以火檢看 乃佛牙函也 函本內一重沈香合 次重純金合 次外重白銀函 次外重瑠璃函 次外重螺鈿函 各幅子如之 今但瑠璃函爾 喜得之 入達于內 有司議 金瑞龍及兩殿上守皆誅 晋陽府奏云 因佛事 不合多傷人 皆免之
대답해 말하기를 “집에 돌아 가 다시 개인 기록을 찾아 볼 것을 청합니다.”했다. 집에 이르러 점검해 보니 좌번 알자 김서룡이 부처의 어금니 함을 얻었다는 기록을 찿아 올렸다. 김서룡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는 말이 없었다. 또한 김승노가 아뢴 바로서 말하였다. 임진년에서 지금 병신에 이르기까지 5년간 어불당과 경령전의 수직한 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하였으나 주저하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3일이 지나 밤중에 서룡의 집 담 안으로 물건을 던지는 소리가 있어 불을 켜고 찾아보니 곧 부처의 어금니 함이었다. 함은 본래 안의한 겹은 침향합이고, 다음 한 겹은 순금합이고, 다음 바깥 겹은 백은합이고, 다음 바같 겹은 유리함이고 다음 바깥 겹은 나전함이었다. 각각의 폭은 꼭 맞았다. 지금은 다만 유리함뿐이었다. 그것을 얻음을 기뻐하며 (대궐)안으로 들어갔다. 담당관청에서는 김서룡과 두 전(어불당, 경령전)을 지키던 관리들을 모두 죽이려 하였다. 진양부에서 아뢰어 말하기를 “불사 때문에 많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하니 모두 죄를 면하게 되었다.
更勑十員殿中庭特造佛牙殿安之 令將士守之 擇吉日 請神孝寺上房蘊光 領徒三十人 入內設齋敬之 其日入直承宣崔弘上將軍崔公衍李令長內侍茶房等侍立于殿庭 依次頂戴敬之 佛牙區穴間 舍利不知數 晋陽府以白銀合貯而安之 時 主上謂臣下曰 朕自亡佛牙已來 自生四疑 一疑 天宮七日限滿而上天矣 二疑 國亂如此 牙旣神物 且移有緣無事之邦矣 三疑 貪財小人 盜取函幅 棄之溝壑矣 四疑 盜取珍利 而無計自露 匿藏家中矣 今第四疑當之矣 乃放聲大哭 滿庭皆洒涕獻壽 至有煉頂燒臂者 不可勝計 得此實錄於當時內殿焚修前祗林寺大禪師覺猷 言親所眼見 使予錄之
다시 명하여 십원전 가운데 뜰에 특별히 불아전을 짓고 안치하게 하고 장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길일을 가려 신효사 상방(주지) 온광을 청하니 무리 30명을 거느리고 안으로 들어 와 재를 베풀고 공경하였다. 그날 입직(당직) 승선 최홍, 상장군 최공연, 이령장, 내시 다방 등이 전각의 뜰에 모시고 서서 차례에 의해 머리에 이고 공경하였는데 불아함 구멍 사이 사리가 수를 알지 못하였다. 진양부가 백은함에 담아 안치하였다. 그 때 인금이 신하에게 일러 말하기를 “짐은 부처의 어금니를 잃어버린 이래로 스스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겨났다. 첫 번째 의심은 천궁의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간 것인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 의심은 나라가 어지럽기가 이 같으니 어금니는 신물이라 또 인연이 있고, 일이 없는 나라로 옮겨 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의심은 재물을 탐하는 소인이 함을 훔치고 (불아를) 구렁에 버렸을까 하는 것이었다. 네 번째 의심은 보물을 훔쳐 취하였으나 스스로 드러낼 계책이 없어 집 안에 숨기는 것이었다. 지금 네 번째 의심이 해당한다.”하고는 크게 소리 내어 우니 뜰에 가득한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헌수하고, 연정(정수리를 불로 떠서 참회하는 불교 의식)과 소비(팔에 향을 피우며 기도하는 불교의식)하는 자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실록은 당시 내전에서 향을 피우고 기도하던 전 지(기)림사 대선사 각유에게서 얻은 것인데 (각유가)직접 눈으로 본 바를 말하고 나로 하여금 기록하게 한 것이다.
又至庚午出都之亂 顚沛之甚 過於壬辰 十員殿監主禪師心鑑亡身佩持 獲免於賊難 達於大內 大賞其功 移授名刹 今住氷山寺 是亦親聞於彼 眞興王代天嘉六年乙酉 陳使劉思與釋明觀 載送佛經論一千七百餘卷 貞觀十七年 慈藏法師載三藏四百餘函來 安于通度寺 興德王代大和元年丁未 入學僧高麗釋丘德 齎佛經若干函來 王與諸寺僧徒出迎于興輪寺前路
또 경오년 환도할 때의 어지러움에 이르러 엎어지고 자빠짐의 심함은 임진년보다 더하였다. 십원전의 감주 선사 심감이 자신을 없이하고(위험을 무릅쓰고) (불아함을) 지니고 아와 적난에서 면할 수 있었다. (이 일이) 대궐에 알려지니 그 공에 대해 크게 상주고 이름있는 절을 주어 옮기게 하여 지금의 빙산사에 살게 하였다. 이 것 또한 직접 그에게서 들은 것이다. 진흥왕대 천가 6년 을유에 진나라가 유사와 중 명관으로 하여금 불경과 논 1700권을 실어 보내게 하였다. 정관 17년 자장법사가 삼장(경, 률, 논) 400여 함을 싣고 오니 통도사에 안치하였다. 흥덕왕대 대화 1년 정미에 입학승 고(구)려 중 구덕이 불경 약간 상자를 싣고 오니 왕과 여러 절의 중들이 나와 흥륜사 앞길에서 맞이하였다.
大中五年 入朝使元弘 齎佛經若干軸來 羅末普耀禪師再至吳越 載大藏經來 卽海龍王寺開山祖也 大宋元祐甲戌 有人眞讚云 偉哉初祖 巍乎眞容 再至吳越 大藏成功 賜함(?)普耀 鳳詔四封 若問其德 白月淸風
대중 5년 입조사 원홍이 불경 약간 축을 가지고 왔다. 신라 말 보요선사가 다시 오월에 이르러 대장경을 싣고 왔는데 곧 해용왕사 개산조이다. 대송 원우 갑술년에 어떤 사람이 진영을 기려 말하기를
“위대하다 개조 스님이여! 참모습 우뚝하다. 다시 오월에 이르러 대장경을 가져온 공을 이루니 보요라는 직함 내렸다. 네 번이나 조서를 내리셨으니 만일 그 덕을 묻거든 밝은 달 맑은 바람이어라.”
又大定中漢南管記彭祖逖留詩云 水雲蘭若住空王 况是神龍穩一場 畢竟名藍誰得似 初傳像敎自南方
또 대정 연간에 한남의 관기 팽조적이 시를 남겼다.
“물, 구름 조용한 절에 부처님 머무시니 더욱이 신룡이 이 지경을 보호한다. 마침내 이 좋은 절 누가 얻을까? 처음 불교가 남쪽에서 전해졌네.”
有跋云 昔普耀禪師始求大藏於南越 洎旋返次 海風忽起 扁舟出沒於波間 師卽言曰 ?意者 神龍欲留經耶!? 遂呪願乃誠 兼奉龍歸焉 於是風靜波息 旣得還國 遍賞山川 求可以安邀處 至此山 忽見瑞雲起於山上 乃與高第弘慶經營蓮社 然則 像敎之東漸 實始乎此漢南管記彭祖逖題 寺有龍王堂 頗多靈異 乃當時隨經而來止者也 至今猶存
발문에 “옛날 보요선사가 처음 대장경을 남월에서 구하여 돌아오는데 바닷바람이 홀연히 일어 조각배가 물결 사이를 나왔다 들어갔다. 했다. 스님이 곧 말하기를 ‘생각해보니 신룡이 대장경을 머물게 하려해서인가?’하고는 마침내 주문으로 축원하기를 정성껏하고, 겸하여 용을 받들고 돌아왔다. 이에 바람이 고요해지고, 물결이 잔잔해졌다. 나라에 돌아 온 뒤 두루 산천을 돌아보며 안치할만한 것을 찾았다. 이 산에 이르자 홀연히 구름이 산 위에서 일어났다. 이에 수제자 홍경과 절을 경영하였다. 그러한 즉 불교가 동쪽에 무젖게 된 것은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한남 관기 팽조적이 제한다.”했다. 절에는 용왕당이 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기이함이 많았다. 곧 당시(용왕이) 대장경을 따라 와 머물렀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남아있다.
又天成三年戊子 黙和尙入唐 亦載大藏經來 本朝睿廟時 慧照國師奉詔西學 市遼本大藏三部而來 一本今在定惠寺(海印寺有一本 許參政宅有一本) 大安二年 本朝宣宗代 祐世僧統義天入宋 多將天台敎觀而來 此外方冊所不載 高僧信士往來所齎 不可詳記 大敎東漸 洋洋乎慶矣哉 讚曰 華月夷風尙隔煙 鹿園鶴樹二千年 流傳海外眞堪賀 東震西乾共一天
또 천성 3년 무자에 묵화상이 당나라에 들어 가 또 대장경을 싣고 왔다. 본조(고려) 예종 때 혜조국사가 조서를 받들어 중국으로 유학하고 요본 대장경 세 부를 사서 왔다. 한 본은 지금 정혜사에 있다.(해인사에 한 본이 있고, 허 참정 댁에 한 본이 있다.) 대안 2년 본조(고려) 선종대에 우세승통 의천이 송에 들어 가 많은 천태교관을 가지고 왔다. 이 외 방책에 실리지 않은 뛰어난 중과 진자들이 왕래하면서 가져온 바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대교(불교)가 동쪽에 무젖고 양양하니 경사로운 일이다. 기려 말한다.
“중국과 동방은 아직 연기로 막혔는데 녹야원에서 부처님이 열반 한 후 2천년이 지났다. 해외에 흘러 전해지니 참으로 경사롭다. 우리나라와 중구이 한 하늘을 함께 하리라.” 했다.
按此錄義湘傳云 永徽初 入唐謁智儼 然據浮石本碑 湘武德八年生 丱歲出家 永徽元年庚戌 與元曉同伴欲西入 至高麗有難而廻 至龍朔元年辛酉入唐 就學於智儼 總章元年 儼遷化 咸享二年 湘來還新羅 長安二年壬寅示滅 年七十八 則疑與儼公齋於宣律師處 請天宮佛牙 在辛酉至戊辰七八年間也 本朝高廟入江都壬辰年 疑天宮七日限滿者 誤矣
여기에 기록된 의상전을 살펴보니 “영휘 초 당나라에 들어 가 지엄을 뵈었다.”했으나 부석본비에 근거하면 “의상은 무덕 8년에 태어났다. 어린나이에 출가하여 영휘 1년 경술에 원효와 함께 서쪽으로 들어가려 하여 고(구)려에 이르렀으나 어려움이 있어 돌아왔다. 용삭 1년 신유에 당나라에 들어 가 지엄에게 나아가 배웠다. 총장 1년 지엄이 죽고 함형 2년 의상이 신라에 돌아왔다. 장안 2년 임인년에 입적하였다. 나이는 78세였다.”했다. 곧 지엄과 선율 스님이 있는 곳에서 재에 참석하였다가 천궁의 부처 어금니를 청한 것은 신유에서 무진에 이르기까지가 7, 8년간이다. 본조(고려) 고종 때 강도로 옮긴 임진년이니 천궁의 7일 기한이 찼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일 것이다.
忉利天一日夜當人間一百歲 且從湘公初入唐辛酉 計至高廟壬辰 六百九十三歲也 至庚子年 始滿七百年而七日限已滿矣 至出都至元七年庚午 則七百三十年 若如天言而七日後還天宮 則禪師心鑑出都時 佩持出獻者 恐非眞佛牙也 於是 年春出都前 於大內集諸宗名德 乞佛牙舍利 精勤雖切而不得一枚 則七日限滿上天者 幾矣 二十一年甲申 修補國淸寺金塔 國主與莊穆王后 幸妙覺寺 集衆慶讚訖 右佛牙與洛山水精念珠如意珠 君臣與大衆 皆瞻奉頂戴 後幷納金塔內 予亦預斯會 而親見所謂佛牙者 長三寸許 而無舍利焉 無極記
도리천의 하루는 인간의 100년에 해당한다. 또 의상이 처음 당나라에 들어 간 신유로부터 고종 임진년에 이르기까지 계산하면 693년이다. 경자년에 이르러야 비로소 700년이 차니 7일 기한이 이미 찬 것이다. 강도에서 나옹 지원 7년 경오에 이르면 곧 730년이다. 만일 하늘이 말한 것과 같이 7일 후에 천궁으로 돌아갔다면 곧 선사 심감이 강도를 나올 때 지니고 나와 바친 것은 아마도 참된 부처의 어금니가 아닐 것이다. 이에 이 해 봄 강도에서 나오기 전 대궐에 여러 종파의 이름 있는 스님들을 모여 부처의 어금니와 사리를 정성스고 부지런하게 청하기를 비록 간절히 하였으나 한 매도 얻지 못하였다. 곧 7일의 기한이 차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 것이 (사실에)가까울 것이다. (지원)21년 갑신에 국청사 금탑을 수리하였다. 국주(임금)와 장목왕후가 묘각사에 가 무리들을 모아 축하하고 기리기를 마치고 부처의 어금니와 낙산의 수정염주, 여의주를 임금과 신하, 대중들이 모두 함께 우러러 받들어 머리에 이고 금탑 안에 넣었다. 내가 또한 이 모임에 참석하여 직접 부처의 어금니를 보았는데 길이는 3촌 정도 되고 사리는 없었다. 무극이 기록한다.
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
第二十四眞興王 姓金氏 名彡麥宗 一作深麥宗 以梁大同六年庚申卽位 慕伯父法興之志 一心奉佛 廣興佛寺 度人爲僧尼 又天性風味 多尙神仙 擇人家娘子美艶者 捧爲原花 要聚徒選士 敎之以孝悌忠信 亦理國之大要也 乃取南毛娘姣貞娘兩花 聚徒三四百人 姣貞者嫉妬毛娘 多置酒飮毛娘 至醉潛舁去北川中 擧石埋殺之 其徒罔知去處 悲泣而散 有人知其謀者 作歌誘街巷小童 唱於街 其徒聞之 尋得其尸於北川中 乃殺姣貞娘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
제 24대 진흥왕은 성이 김씨이고, 이름은 삼맥종, 혹은 심맥종이라 썼다. 양나라 대동 6년 경신에 즉위하였다. 백부 법흥왕의 뜻을 사모하여 한마음으로 붜를 받들어 널리 절을 일으키고, 사람들이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또 타고난 성품이 멋스럽고 아름다워 신선을 많이 숭상하였다. 인가의 낭자들 중에 아름다운 자를 가려 받들어 원화라 하고, 무리를 모으고 선비를 뽑아 효도, 공경, 충성, 신의로서 가르쳤는데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큰 요점이었다. 이에 남모랑과 교정랑의 두 원화를 취하니(뽑으니) 무리 3, 4백 명이 모였다. 교정이 남모랑을 질투하여 많은 술을 두고 남모랑에게 마시게 하여 취함에 이르자 몰래 마주 들고 북천으로 가 돌을 들어 묻어 죽였다. 그 무리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하여 슬피 울며 흩어졌다. 어떤 사람이 그 음모를 알고 노래를 지어 거리의 아이들을 꼬여 거리에서 노래하게 하였다. 그 무리들이 그것을 듣고 그 시신을 북천 중에서 찾아내었다.
於是 大王下令 廢原花 累年王又念欲興邦國 須先風月道 更下今(令)選良家男子有德行者 改爲花娘 始奉薛原郞爲國仙 此花郎國仙之始 故竪碑於溟州 自此使人悛惡更善 上敬下順 五常六藝 三師六正 廣行於代(國史 眞智王大建八年庚申 始奉花郎 恐史傳乃誤)
이에 대왕이 명령을 내려 원화를 없앴다. 몇 해가 지나 왕이 도한 나라를 흥기시키고자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먼저 해야 한다하여 다시 명령을 내려 양가의 남자 중에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고쳐 화랑이라 하였다. 처음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이라 하니 이것이 화랑국선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명주에 비를 세웠다. 이로부터 사람으로 하여금 악한 일을 고쳐 선한 일을 하게하고, 위 사람을 공경하고, 아래 사람에게 순하게 하니 5상, 6예, 3사, 6정이 (왕의)대에 널리 행해졌다.(국사에 “진지왕 대건 8년 경신에 처음 화랑을 받들었다.” 한 것은 아마도 사전의 잘못일 것이다.)
及眞智王代 有興輪寺僧眞慈(一作貞慈也) 每就堂主彌勒像前發原誓言 願我大聖化作花郎 出現於世 我常親近晬容 奉以□周旋 其誠懇至禱之情 日益彌篤 一夕夢有僧謂曰 汝往熊川(今公州)水源寺 得見彌勒仙花也 慈覺而驚喜 尋其寺 行十日程 一步一禮 及到其寺 門外有一郎 濃纖不爽 盼倩而迎 引入小門 邀致賓軒 慈且升且揖曰 郎君素昧平昔 何見待殷勤如此?
진지왕 대에 이르러 흥륜사 중 진자(정자라고도 쓴다.)가 항상 당주 미륵 상 앞에 가 발원하여 맹서하는 말을 하기를 “우리 대성께서 화랑으로 변화해 세상에 나타나시면 내가 항상 미륵불을 가까이 뵙고 받드는 것으로서 시중을 들겠습니다.”했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한 지극한 기도의 정이 날로 더욱 돈독하였다. 어느 날 꿈에 중이 일러 말하기를 “네가 웅천(지금의 공주) 수원사에 가면 미륵선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했다. 진자가 깨어 놀라고 기뻐하여 그 절을 찾아가는데 열흘정도를 가면서 한 걸음에 한 번 예를 올렸다. 그 절에 이르러 문 밖에서 한 낭(남자가)이 있어 탐스럽고 섬세하여 어긋나지 않고 눈매와 입모양이 이름다웠다. (그가) 맞이하고 인도하여 작은 문으로 들어 가 손님의 집(방)에 이르렀다. 진자가 또한 오르면서 또 읍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평소에 나를 모르는데 어찌하여 나를 대하기를 이토록 은근히 합니까?”했다.
郎曰 我亦京師人也 見師高蹈遠屆 勞來之爾 俄而出門 不知所在 慈謂偶爾 不甚異之 但與寺僧叙曩昔之夢 與來之之意 且曰 暫寓下榻 欲待彌勒仙花何如? 寺僧欺其情蕩然而見其懃恪 乃曰 此去南隣有千山 自古賢哲寓止 多有冥感 盍歸彼居? 慈從之 至於山下 山靈變老人出迎曰 到此奚爲?
낭이 말하기를 “내가 또한 경사(서울)사람이다. 스님이 멀리서 오는 것을 위로했을 따름입니다.”하고는 문을 나갔는데 있는 곳(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진자가 우연한 일이라 생각하고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의 중들에게 지난번의 꿈과 온 뜻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잠시 머물면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떠합니까?”했다. 절의 중이 그 실정이 흔들림을 업신여겼으나 그 살뜰하고 정성스러운 것을 보고 이에 말하기를 “여기서 남쪽 가까운 곳에 천산이 있는데 옛날부터 어질고 밝은 사람이 머물러 그윽히 마음을 움직임이 많습니다. 어찌 그곳에 돌아 가 살지 않습니까?”했다. 진자가 그 말에 따라 산 아래 이르니 산신령이 노인으로 변해 나와 맞으며 말하기를 “여기에 무엇하러 왔는가?”했다.
答曰 願見彌勒仙花爾 老人曰 向於水源寺之門外 已見彌勒仙花 更來何求? 慈聞卽驚汗 驟還本寺 居月餘 眞智王聞之 徵詔問其由 曰 郎旣自稱京師人 聖不虛言 盍覓城中乎? 慈奉宸旨 會徒衆 遍於閭閻間 物色求之 有一小郎子 斷紅齊具 眉彩秀麗 靈妙寺之東北路傍樹下 婆娑而遊 慈迓之驚曰 此彌勒仙花也 乃就而問曰 郎家何在 願聞芳氏?
답하여 말하기를 “미륵선화 보기를 원할 뿐입니다.”했다. 노인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수원사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와 무엇을 구하는가?”했다. 진자가 듣고 놀라 땀을 흘렸다. 본사로 달려 돌아 와 한 달 정도 머물렀다. 진지왕이 그것을 듣고 불러 그 사유를 물었다. (진자가)말하기를 “낭이 이미 스스로 경사인(서울 사람)이라 했다. 성인은 빈말을 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성중에서 찾지 않는가?”했다. 진자가 명을 받들어 무리를 모아 두루 백성들 사이에서 두루 찾으니 한 작은 아이가 있었는데 단장을 가지런히 갖추고, 얼굴모양이 아름다웠다. 영묘사 동북쪽 길 옆 나무 아래서 빙빙돌며 놀고 있었다. 진자가 그를 만나자 놀라 말하기를 “이가 미륵선화이다.”하고는 곧 나아가 물어 말하기를 “난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씨는 무엇인지 듣기를 원합니다.”했다.
郎答曰 我名未尸 兒孩時爺孃俱歿 未知何姓 於是 肩輿而入見於王 王敬愛之 奉爲國仙 其和睦子弟 禮義風敎 不類於常 風流耀世幾七年 忽亡所在 慈哀懷殆甚 然飮沐慈澤 呢承淸化 能自悔改 精修爲道 晩年亦不知所終 說者曰 未與彌聲相近 尸與力形相類 乃託其其近似而相謎也
낭이 답하여 말하기를 “ 내 이름은 미시입니다. 아이 때 부모가 모두 돌아가셔서 어떤 성인지 알지 못합니다.”했다. 이에 가마에 태워 (대궐에)들어 가 왕을 뵈었다. 왕이 공경하고 아껴서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다. 그 화목하기는 자제와 같고, 예의와 풍교는 보통과 달랐다. 풍류를 세상에 빛내더니 거의 7년이 되어 홀연히 있는 바를 알 수 없었다. 진자가 슬퍼하고 그리워함이 자못 심하였다. 그러나 자비와 은택을 마시고 목욕하였고, 맑은 교화를 받들었으므로 스스로 뉘우치고 고쳐서 정밀히 도를 닦았다. 만년에 또한 마친 바(어디서 죽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해설하는 자가 말하기를 “未와 彌는 소리가 서로 비슷하고, 尸와 力은 형태가 서로 비슷하다. 곧 그 가까움에 기대어 서로 헛갈린 것이다.
大聖不獨感慈之誠款也 抑有緣于玆土 故比比示現焉 至今國人稱神仙曰彌勒仙花 凡有媒係於人者曰未尸 皆慈氏之遺風也 路傍樹至今名見郎 又俚言似如樹(一作印如樹) 讚曰 尋芳一步一瞻風 到處栽培一樣功 驀地春歸無覓處 誰知頃刻上林紅
대성이 진자의 정성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미르선화라 하고, 다른 사람을 중매하는 사람을 미시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자씨(미륵불)의 유풍이다. 길 옆의 나무를 지금까지도 견랑이라 하고, 또 우리말로 사여수라고 한다.(인여수라 쓰기도 한다.)
기려 말한다.
꽃다움(선화) 찾아 한 걸음에 한 번 풍모를 우러르고, 이르는 곳마다 하나의 모양과 공을 북돋운다. 문득 봄은 가고 찾을 곳 없으니 누가 알겠는가? 상림원의 봄이 잠깐인 것을.
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白月山兩聖成道記云 白月山在新羅仇史郡之北(古之屈自郡 今義安郡) 峯巒奇秀 延袤數百里 眞巨鎭也 古老相傳云 昔唐皇帝嘗鑿一池 每月望前 月色滉朗 中有一山 嵓石如師子 隱映花間之影 現於池中 上命畵工圖其狀 遣使搜訪天下 至海東見此山有大師子嵓 山之西南二步許有三山 其名花山(其山一體三首 故云三山) 與圖相近 然未知眞僞 以隻履懸於師子嵓之頂 使還奏聞 履影亦現池 帝乃異之 賜名曰白月山(望前白月影現 故以名之) 然後池中無影
남백월 2성, 노힐부득 달달박박
백월산양성성도기에 “백월산은 신라 구사군의 북쪽(옛 구자군인데 지금의 의안군이다.)이다. 봉우리가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수 백리를 종횡으로 길게 뻗어 참으로 거진이었다.”했다. 옛 늙은이들이 서로 말하기를 “옛날 당나라 환제가 한 못을 팠다. 매 달 보름을 앞두고 달빛이 밝으면 (못)안에 한 산이 있고, 바위가 사자와 같은데 은은히 꽃 사이로 그림자가 못 안에 나타났다. 황제가 화공으로 하여금 그 모양을 그리게 하고, 사신을 보내 천하에서 찾게 하였더니 해동에 이르러 이 산에 사자암이 있는 것을 보았다. 산의 서남쪽 2보쯤에 삼산이 있고, 그 이름을 화산(그 산은 한 몸에 머리가 셋이기 때문에 삼산이라 한 것이다.)이라 하는데 그림과 비슷했다. 그러나 진위를 알 수 없어 신발 한 짝을 사자암의 정상에 걸어두고 돌아와 아뢰었다. 신발의 그림자가 또한 못에 나타났다. 황제가 이에 기이하게 여겨 백월산이란 이름을 내렸다.(보름 앞 밝은 달의 그림자가 나타났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그런 후 못 안의 그림자가 없어졌다.”했다.
山之東南三千步許 有仙川村 村有二人 其一曰努肹夫得(一作等) 父名月藏 母味勝 其一曰怛怛朴朴 父名修梵 母名梵摩(鄕傳云雉山村 誤矣 二士之名方言 二家各以二士心行 騰騰苦節二義 名之爾) 皆風骨不凡 有域外遐想 而相與友善 年皆弱冠 往依村之東北嶺外法積房 剃髮爲僧
산의 동남쪽 3000보쯤 되는 곳에 선천촌이 있고, 촌에 두 사람이 있는데 그 한 명을 노힐부득(등이라 쓰기도 한다.)이라 하는데 아버지 이름은 월장이고, 어머니는 미승이다. 다른 한 명은 달달박박으로 아버지 이름은 수범이고, 어머니 이름은 범마(향전에는 “치산촌이라 하는데 잘못이다. 두 선비의 이름은 방언이다. 두 집이 각기 두 선비의 마음과 행동이 날아오르는 듯하고, 굳은 절개 의 두 가지 뜻에서 이름했을 뿐이다.)이다. 모두 풍채와 골격이 범상하지 않고 속세를 초월한 높은 사상이 있어 서로 더불어 좋은 벗이었다. 나이가 모두 약관(20세)가 되자 의촌의 동북쪽 고개 밖 법적방에 가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未幾 聞西南雉山村法宗谷僧道村有古寺 可以拪眞 同往大佛田小佛田二洞各居焉 夫得寓懷眞庵 一云壤寺(今懷眞洞有古寺基 是也) 朴朴居瑠璃光寺(今梨山上有寺基 是也) 皆挈妻子而居 經營産業 交相來往 棲神安養 方外之志 未常暫廢 觀身世無常 因相謂曰 腴田美歲良利也 不如衣食之應念而至 自然得飽煖也 婦女屋宅情好也 不如蓮池華藏千聖共遊 鸚鵡孔雀以相娛也 况學佛當成佛 修眞必得眞! 今我等旣落彩爲僧 當脫略纏結 成無上道 豈宜汨沒風塵 與俗輩無異也!
얼마지나 서남쪽 치산촌 법종곡 승도촌에 옛 절이 있는데 정신을 수련할만하다는 것을 듣고 함게 대일전, 소일전 두 동에 가서 각각 살았다. 부득은 진암을 마음에 두었는데 양사라고도 한다.(지금 회진동에 옛 절터가 있는데 이것이다.) 박박은 유리광사에 살았다.(지금 이산 위에 있는 절터가 이것이다.) 모두 처자를 데리고 살면서 산업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하며 정신을 수양하여 속세를 떠날 뜻을 잠시도 폐하지(없애지) 않았다. 몸과 세상이 무상함을 보고 서로 일러 말하기를 “비옥한 밭과 풍년든 해는 좋은 이득이나 의식이 생각에 대응하여 이르고, 스스로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합니다. 부녀와 집이 정이 좋습니다만 연화장세계, 화장세계에서 여러 부처와 함께 노닐고, 앵무, 공작과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합니다. 하물며 불법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를 이루고 참을 닦아 참을 얻음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이 이미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얽매여 있는 것을 벗어버리고 위가 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는데, 어찌 세속의 혼탁하고 시끄러운 속에 열중하고 있으니 세속의 무리들과 다름이 없겠는가?”했다.
遂唾謝人間世 將隱於深谷 夜夢白毫光自西而至 光中垂金色臂 摩二人頂 及覺說夢 與之符同 皆感嘆久之
마침내 인간 세상에 침을 뱉고(인간세상을 하직하고)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하였다. (어느 날)밤 꿈에 백호의 빛이 서쪽으로부터 이르렀는데 빛 안에서 금색의 팔이 드리워져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꿈에서 개어 꿈을 이야기하니 같이 부합하였다. 모두 감탄하기를 오래하였다.
遂入白月山無等谷(今南洞也) 朴朴師占北鎭嶺師子嵓 作板屋八尺房而居 故云板房 夫得師占東嶺磊石下有水處 亦成方丈而居焉 故云磊房(鄕傳云 夫得處山北瑠璃洞 今板房 朴朴居山南法精洞磊房 與此相反 以今驗之鄕傳誤矣) 各庵而居 夫得勤求彌勒 朴朴禮念彌陁
마침내 백월산 무등곡(지금의 남동이다.)에 들어갔다. 박박스님은 북쪽 산 고개 사자암을 차지하고 널판으로 8자의 방을 짓고 살았다. 그러므로 판방이라 한 것이다. 부득스님은 동쪽 고개 돌무더기 아래 물이 있는 곳에 또한 방장을 이루고 여기에 살았다. 그러므로 뢰방(향전에 부득은 산 북쪽 유리동에 자리하였으니 지금의 판방이다. 박박은 산 남쪽 법정동 뢰방에서 살았다하여 이와는 서로 반대가 된다. 지금 그것을 증명해보면 향전이 잘못된 것이다.) 각각 암자에 살면서 부득은 부지런히 미륵을 찾았고, 박박은 미타를 경례하였다.
未盈三載 景龍三年己酉四月八日 聖德王卽位八年也 日將夕 有一娘子年幾二十 姿儀殊妙 氣襲蘭麝 俄然到北庵(鄕傳云南庵) 請寄宿焉 因投詞曰 行逢日落千山暮 路隔城遙絶四隣 今日欲投庵下宿 慈悲和尙莫生嗔 朴朴曰 蘭若護凈爲務 非爾所取近 行矣 無滯此處! 閉門而入(記云 我百念灰冷 無以血囊見試) 娘歸南庵(傳曰北庵)
3년니 되지 않은 경룡 3년 기유 4월 8일 성덕왕 즉위 8년이다. 날이 장차 저녁이 되려할 때 한 20세쯤 되는 낭자가 있었는데 모습이 매우 아름답고 난초와 사향을 풍기고 있었다. 갑자기 북암(향전에는 남암이라 한다.) 거기에서 묵을 것을 청하며 글을 지어 바쳤다. 그 글은 “가는 길 해 저물어 온 산이 저무는 것을 만났으니, 길은 막히고 성은 먼데 사방이 고요하다. 오늘 암자에 들어 묵고자 하니 자비로운 화상께서는 성내지 마십시오.”했다. 박박이 말하기를 “난야는(절은) 깨끗함을 지키는 것을 일로 삼습니다. 당신이 가까이 할 바가 아니니 가십시오. 이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다.(기에 말하기를 “나는 모든 생각이 차가워졌으니(모든 잡념을 떨쳤으니) 피주머니(육체적 유혹)로서 시험하지 마시오.”했다.) 낭자가 남암(전에는 북암이라 한다.)으로 갔다.
又請如前 夫得曰 汝從何處 犯夜而來? 娘答曰 湛然與太虛同體 何有往來! 但聞賢士志願深重 德行高堅 將欲助成菩提□ 因投一偈曰 日暮千山路 行行絶四隣 竹松陰轉邃 溪洞響猶新 乞宿非迷路 尊師欲指津 願惟從我請 且莫問何人 師聞之驚駭 謂曰 此地非婦女相汚 然隨順衆生 亦菩薩行之一也 況窮谷夜暗 其可忽視歟! 乃迎揖庵中而置之 至夜淸心礪操 微燈半壁 誦念厭厭 及夜將艾
또 전과 같이 청하니 부득이 말하기를 “당신은 어디서 밤을 무릅쓰고 왔습니까?”하니 낭자가 대답해 말하기를 “담연함은 태허와 같은데 어찌 가고 옴이 있으리오! 다만 어진 선비의 바라는 뜻이 깊고 중하며, 덕행이 높고 견고하니 장차 도와 보리를 이루고자 할 뿐입니다.”하고는 인하여 하나의 게를 던져 말하기를 “천개 산의 길 날이 저문데, 가고가도 사방에 이웃이 끊어졌다. 대나무, 소나무 그늘 한층 그윽하고, 골짜기 물소리 더욱 새롭다. 묵기를 청함은 길을 잃어서가 아니요, 스님을 높여 나루를 가리키려 함이다. 오직 내 청을 들어줄 것을 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인지를 묻지 마시오.”했다. 스님이 듣고 놀라 일러 말하기를 “이 땅은 부녀가 더럽힐 곳이 아니나 중생을 따라 순히 함도 또한 보살행의 하나이다. 하물며 막힌 골짜기에 밤이 어두우니 소홀히 볼 수 있겠는가!”하고는 이에 암자 안으로 맞이해 읍하고 있게 하였다. 밤이 되자 맑은 마음으로 지조를 갈아 희미한 등불아래 벽 한 쪽에서 염불하였다. 밤이 장차 그치려할 때
娘呼曰 予不幸適有産憂 乞和尙排備苫草 夫得悲矜莫逆 燭火殷勤 娘旣産 又請浴 弩肹慚懼交心 然哀憫之情有加無已 又備盆槽 坐娘於中 薪湯以浴之 旣而槽中之水春氣郁烈 變成金液 弩肹大駭 娘曰 吾師亦宜浴此 肹勉强從之 忽覺精神爽凉 肌膚金色 視其傍忽生一蓮臺 娘勸之坐 因謂曰 我是觀音菩薩 來助大師 成大菩提矣 言訖不現 朴朴謂肹今夜必染戒 將歸听之 旣至 見肹坐蓮臺 作彌勒尊像 放光明 身彩檀金 不覺扣頭而禮曰 何得至於此乎? 肹具叙其由
낭자가 불러 말하기를 “내가 불행하게도 출산의 근심이 있으니 화상께 거적과 풀을 청합니다.”했다. 부득이 불쌍하게 여겨 거스르지 않고 촛불들고 정성스럽게 하였다. 낭자가 출산한 후 또 목욕할 것을 청하였다. 노힐부득은 마음을 털어 놓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웠으나 불상하게 여기는 정에 더욱 그만 둘 수 없었다. 또 목욕통을 준비하여 낭자를 안에 앉게 하고 섶으로 물을 끓여 목욕하게 하였다. 이윽고 목욕통 안의 물에서 봄기운이(향기가) 진동하면서 (물이)변해 금액이 되었다. 노힐부득이 크게 놀랐다. 낭자가 말하기를 “우리 스님 또한 마땅히 여기에서 목욕하시오.”했다. 노힐부득이 마지못해 따랐다. 홀연히 정신이 상쾌함을 깨달았는데 피부가 금색으로 변했다. 그 옆을 보니 홀연히 한 연대가 생겨났는데 낭자가 앉기를 권하며 말하기를 “나는 관음보살인데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를 이루게 한 것입니다.”하는 말을 마치고 보이지 않았다. 박달달박박이 생각하기를 “노힐부득은 오늘 밤 반드시 계를 더럽혔을 것이므로 장차 가서 비웃어 줄 것이다.”했다. 이른 후 노힐부득이 연대에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미륵존상을 하고 있는데 광명을 뿜고, 몸에는 단금으로 칠해져 있었다. (달달박박)이 모리를 찧으며 절하고 말하기를 “어떻게 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까?”하니 노힐부득이 그 연유를 모두 말하였다.
朴朴嘆曰 我乃障重 幸逢大聖 而反不遇 大德至仁 先吾著鞭 願無忘昔日之契 事須同攝 肹曰 槽有餘液 但可浴之 朴朴又浴 亦如前成無量壽 二尊相對儼然 山下村民聞之 競來瞻仰 嘆曰 希有 希有! 二聖爲說法要 全身躡雲而逝 天寶十四年乙未 新羅景德王卽位(古記云 天鑑二十四年乙未法興卽位 何先後倒錯之甚如此) 聞斯事 以丁酉歲遣使創大伽藍 號白月山南寺
달달박박이 탄식해 말하기를 “나는 곧 마음속에 가리움이 많아 다행히도 대성을 만났으되 도리어 만나지 못한 것이 되었습니다. 큰 덕과 지극한 인으로 나에 앞서 출발하였으니(뜻을 이루었으니) 옛날의 약속을 잊지 말고 일이 모름지기 함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했다. 노힐부득이 말하기를 “목욕통에 남은 액이 있으니 목욕할 수 있습니다.”했다. 달달박박이 또 목욕하였더니 또한 앞에서와 같이 무량수를 이루어 두 부처님이 엄연히 서로 마주하였다. 산 아래 촌민들이 그것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르며 탄복하여 말하기를 “드문 일이고 드문 일이로다!”했다. 두 성인이 불법의 요점을 말하고 온 몸이 구름을 타고 갔다. 천보 14년 을미 신라 경덕왕이 즉위(고기에 “천감 24년 을미 법흥왕 즉위했다.”하니 어찌 앞뒤가 뒤바뀜이 심하기가 이 같은가?)하여 이 일을 듣고 정유년에 사자를 보내 큰 절을 짓게 하고 백월산 남사라 불렀다.
廣德二年(古記云大曆元年 亦誤)甲辰七月十五日 寺成 更塑彌勒尊像 安於金堂 額曰現身成道彌勒之殿 又塑彌陁像安於講堂 餘液不足 塗浴未周 故彌陁像亦有斑駁之痕 額曰現身成道無量壽殿 議曰 娘可謂應以婦女身攝化者也 華嚴經摩耶夫人善知識 寄十一地 生佛如幻解脫門 今娘之桷産微意在此 觀其投詞 哀婉可愛 宛轉有天仙之趣
광덕 2년(고기에 “대력 1년”이라 한 것은 또한 잘못이다.) 갑진 7월 15일 절이 이루어지니 다시 미륵존상을 만들어 금당에 안치하고, 편액을 “현신성도미륵지전”이라 했다. 또 미타상을 만들어 강당에 안치하였다. 남은 액이 충분하지 않아 목욕으로 칠함이 두루하지(골고루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미타상에는 또한 얼룩진 흔적이 있다. 편액을 “현신성도무량수전”이라 했다. 논의해 말한다. “낭자는 부녀의 몸으로서 중생을 거두어 보살펴 교화한 것에 대응되는 것이라 이를 만하다. 화엄경에 마야부인 선지식이 11지에 살며 부처를 낳아 해탈문을 나타내 보인 것과 같다. 지금 낭자가 순산의 숨은 뜻이 여기에 있고, 그가 준 글을 보면 슬프고 간곡하며 사랑스러워 완연히 천선의 뜻이 있다.
嗚呼! 使娘婆不解隨順衆生語言陁羅尼 其能若是乎? 其末聯宜云淸風一榻莫予嗔! 然不爾云者 盖不欲同乎流俗語爾 讚曰 滴翠嵓前剝啄聲 何人日暮扣雲扃 南庵且近宜尋去 莫踏蒼苔汚我庭 右北庵 谷暗何歸已暝煙 南窗有簟且流連 夜闌百八深深轉 只恐成喧惱客眠 右南庵 十里松陰一徑迷 訪僧來試夜招提 三槽浴罷天將曉 生下雙兒擲向西 右聖娘
아! 가령 낭자가 중생을 따라 다리니를 말하는 것을 풀지 못하였다면 이 같이 될 수 있었겠는가? 그 글의 마지막 연에 “맑은 바람이 한 자리함을 꾸짖지 마시오!”했어야 하지만 말하지 않은 것은 대개 세속의 말과 같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려 말한다. “물방울이 푸른 바위 앞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누가 해 저문 저녁에 구름 속 빗장을 두드리는가. 남암이 또한 가까우니 마땅히 찾아 가시고, 푸른 이끼를 밟아 내 뜰을 더럽히지 마시오.”했다. 이상은 북암을 기린 것이다.
“골짜기 어두워 이미 어둑하니 어디로 돌아갈꼬. 남창에 대자리 있으니 또 머무시오. 깊은 밤 백팔염주 깊이 굴리니 시끄러운 소리에 손님 잠못들까 두렵다.” 했다. 이상은 남암을 기린 것이다. 십리 솔 그늘 한 줄기 길 헤매다 밤에 절로 와 중을 찾아 시험했다. 세 통 목욕 끝나 날 새려할 때 쌍둥이 낳아 서쪽을 향해 던졌다. 이상은 성랑(성스러운 낭자를)을 기린 것이다.
芬皇寺千手大悲 盲兒得眼
景德王代 漢歧里女希明之兒 生五稔而忽盲 一日其母抱兒詣芬皇寺左殿北壁畫千手大悲前 令兒作歌禱之 遂得明 其詞曰 膝肹古召旀 二尸掌音毛乎支內良 千手觀音叱前良中 祈以支白屋尸置內乎多 千隱手□叱千隱目肹 一等下叱放一等肹除惡支 二于萬隱吾羅 一等沙隱賜以古只內乎叱等 邪阿邪也 吾良遺知支賜尸等焉 放冬矣用屋尸慈悲也根古 讚曰 竹馬葱笙戱陌塵 一朝雙碧失瞳人 不因大士廻慈眼 虛度楊花幾社春
분황사 천수대비 맹아득안(분황사 천수대비(관세음보살이)가 장님 아이 눈을 뜨게 하다.)
경덕왕대 한기리 여자 희명의 아이는 태어난 지 5년만에 홀연히 눈이 멀었다. 하루는 그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 왼쪽 전각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 앞에 나아가 아이로 하여금 노래를 지어 기도하게 하여 마침내 밝음을 얻었다. 그 노래에 말하기를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비옵나니 1천 손 하나를 내어 1천 눈 중 하나를 덜고, 둘 다 없는 이 몸에게 하나만이라도 주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오시면, 그 자비 얼마나 크리오.
기려 말한다.
“죽마타고 파로 만든 피리 불며 티끌세상에 놀더니, 하루아침에 두눈 잃어버렸네. 대사의 자비로움 눈 아니 돌렸다면 버들 꽃 못 본 채 몇 사춘(춘사)을 지냈을까?”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昔 義湘法師始自唐來還 聞大悲眞身住此海邊窟內 故因名洛山 盖西域寶陁洛伽山 此云小白華 乃白衣大士眞身住處 故借此名之 齋戒七日 浮座具晨水上 龍天八部侍從 引入崛內 叅禮空中 出水精念珠一貫給之 湘領受而退 東海龍亦獻如意寶珠一顆 師捧出 更齋七日 乃見眞容
낙산 2대성, 관음, 정취 조신
옛날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 와 대비(관세음보살)의 진신이 이 바닷가 굴 안에 머문다는 것을 듣고 인하여 낙산이라 이름 했다.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이 있는데 이를 소백화라 했으니 곧 백의대사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이 이름을 빌린 것이다. 재계한 지 7일만에 좌구를 새벽에 물 위에 뛰웠더니 용천팔부의 시종들이 인도하여 굴 안으로 들어갔다. 공중을 향해 뵙는 예를 행하였더니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어 주었다. 의상이 받아 물러났다. 동해용이 또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쳤다. 스님이 받들고 나와 다시 7일을 재계한 후 참모습을 뵈었다.
謂曰 於座上山頂雙竹湧生 當其地作殿宜矣 師聞之出崛 果有竹從地湧出 乃作金堂 塑像而安之 圓容麗質 儼若天生 其竹還沒 方知正是眞身住也 因名其寺曰洛山 師以所受二珠 鎭安于聖殿而去 後有元曉法師 繼踵而來 欲求瞻禮
(관음보살이)일러 말하기를 “자리 위 산 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다. 마땅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 스님이 극서을 듣고 굴을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상(관음상)을 만들어 안치하였다.(모셨다.) 둥근 얼굴과 아름다운 바탕이 의젓하여 하늘이 낸 것과 같았다. 그 대나무가 사라지자 비로소 바로 이곳에 진신이 머무는 것을 알았다. 이 때문에 그 절 이름을 낙산이라 하였다. 스님이 받은 2개의 구슬을 성전에 봉안하고 갔다. 후에 원효법사가 (의상의)뒤를 따라 와 우러러 예를 표하고자 하였다.
初 至於南郊水田中 有一白衣女人刈稻 師戱請其禾 女以稻荒戱答之 又行至橋下 一女洗月水帛 師乞水 女酌其穢水獻之 師覆棄之 更酌天水而飮之 時 野中松上有一靑鳥 呼曰休醍醐和尙! 忽隱不現 其松下有一隻脫鞋 師旣到寺 觀音座下又有前所見脫鞋一隻 方知前所遇聖女乃眞身也 故 時人謂之觀音松 師欲入聖崛 更覩眞容 風浪大作 不得入而去
처음 남교의 수전(논) 중에 이르렀는데 한 백의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스님(원효)이 희롱으로 그 벼를 청하니 여자가 벼가 익지 않았다고 희롱하여 답하였다. 또 가다가 다리 아래 이르니 한 여자가 월수백을 빨고 있었다. 스님이 물을 청하니 여자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쳤다. 스님이 그것을 뒤집어 버리고 다시 빗물(깨끗한 물)을 떠 마셨다. 그 때 들 가운데 소나무 위에 한 마리 파랑새가 있었는데 불러 말하기를 “제호스님은 쉬시오!”하고는 홀연히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그 소나무 아래 벗어놓은 한 짝의 짚신이 있었다. 스님이 절에 도착한 후 관음의 자리 아래 또 앞에서 본 바 있던 벗어놓은 짚신 한 짝이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앞에서 만난 바의 성녀가 곧 진신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 때 사람들이 관음송이라 하였다. 스님이 성굴에 들어가 다시 참된 얼굴을 뵈려하였으나 바람과 물결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갔다.
後有崛山祖師梵日 太和年中入唐 到明州開國寺 有一沙彌截左耳 在衆僧之末 與師言曰 吾亦鄕人也 家在溟州界翼嶺縣德耆坊 師他日若還本國 須成吾舍 旣而遍遊叢席 得法於鹽官(事具在本傳) 以會昌七年丁卯還國 先創崛山寺而傳敎 大中十二年戊寅二月十五日 夜夢昔所見沙彌到窗下 曰 昔在明州開國寺 與師有約 旣蒙見諾 何其晩也?
후에 굴산조사 범일이 있었다. 태화 연간에 당나라에 들어 가 명주 개국사에 이르렀는데 왼쪽 귀가 잘린 한 어린 사미가 있어 여러 중들의 끝에 있었다. 스님과 함께 말하기를 “내개 또한 고향사람입니다. 집이 경부 경계 익령현 기방에 있습니다. 스님이 다른 날 만약 본국으로 돌아가신다면 반드시 내 집을 이루어 주십시오.”했다. 이윽고 두루 스님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돌아보고 염관에게서 법을 얻어(일이 본전에 갖추어 있다.) 회창 7년 정묘에 나라로 돌아왔다. 먼저 굴산사를 창건하고 가르침을 전하였다. 대중 12년 무인 2월 15일 밤 꿈에 옛날에 보았던 사미가 창 아래 이르러 말하기를 “옛날 명주 개국사에 있을 때 스님과 약속하여 이미 허락함을 입었는데 어찌 늦어집니까?”했다.
祖師驚覺 押數十人 到翼嶺境 尋訪其居 有一女居洛山下村 問其名 曰德耆 女有一子年才八歲 常出遊於村南石橋邊 告其母曰 吾所與遊者 有金色童子 母以告于師 師驚喜 與其子尋所遊橋下 水中有一石佛舁出之 截左耳 類前所見沙彌 卽正趣菩薩之像也 乃作簡子 卜其營構之地 洛山上方吉 乃作殿三間安其像(古本載梵日事在前 湘曉二師在後 然按湘曉二師厼□於高宗之代 梵日在於會昌之後 相去一百七十餘歲 故今前却而編次之 或云 梵日爲湘之門人 謬妄也)
(범일)조사가 놀라 깨어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 경계에 이르러 그 거처를 찾으니 한 여자가 낙산 아래 촌에 살고 있었다. 그 이름을 물으니 “덕기”라 했다. 여자에게 여덟살 된 한 아들이 있는데 항상 촌 남쪽 돌다리 가에 나가 놀았다. 그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나와 함께 노는 아이 중에 금빛 나는 동자가 있습니다.”했다. 어머니가 스님에게 알리니 스님이 놀라고 기뻐하여 그 아들과 함께 놀던 다리에서 찾다가 물 안에 한 석불이 있어 마주 들고 나왔다. 왼쪽 귀가 잘려 있는 것이 앞에서 보았던 사미와 같았으니 곧 정취보살의 상이었다. 곧 간자를 만들어 건물을 지을 땅을 점쳤더니 낙산 위쪽이 길하였다. 이에 전각 세 칸을 지어 그 상을 안치하였다.(고본에는 범일의 일이 앞에 있고, 의상과 원효 두 스님은 뒤에 있다. 그러나 의상과 원효 두 스님을 살펴보면 당나라 고종 때이고, 범일은 회창의 뒤에 있었으니 서로 170여년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지금 앞을 뒤로하여 순서를 따라 엮었다. 혹은 범일은 의상의 문인이라 하였는데 잘못되고 망녕된 것이다.)
後百餘年 野火連延到此山 唯二聖殿獨免其災 餘皆煨燼 及西山大兵已來 癸丑甲寅年間 二聖眞容及二寶珠 移入襄州城 大兵來攻甚急 城將陷時 住持禪師阿行(古名希玄)以銀合盛二珠 佩持將逃逸 寺奴名乞升奪取 深埋於地 誓曰 我若不免死於兵 則二寶珠終不現於人間 人無知者 我若不死 當奉二寶獻於邦家矣 甲寅十月二十二日城陷 阿行不免而乞升獲免 兵退後掘出 納於溟州道監倉使 時 郎中李祿綏爲監倉使 受而藏於監倉庫中 每交代傳受
100여년 후 들 불이 연이어 이 산에 이르렀는데 오직 관음과 정취보살 두 성인을 모시는 불전만 그 불타는 것을 면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서산의 대병(몽고의 침략)이 이른 이후 계축과 갑인년 사이에 두 성인의 참된 얼굴(불상)과 두 보주를 옮겨 양주성으로 들였다. 대군이 와 공격을 매우 급하게 하여 성이 장차 함락하려 할 때 주지 선사 아행(옛 이름은 희현이다.) 은합에 두 구슬을 담아 지니고 달아나려하였다. 절의 종 걸승이 빼앗아 깊이 땅에 묻고 맹서해 말하기를 “내가 만약 군대에게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곧 두 보주는 끝내 인간에게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아는 자가 없으니 내가 만약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두 보주를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했다. 갑인년 10월 22일 성이 함락되었을 때 아행은 면하지 못하였으나 걸승은 면하였다. 군대가 물러간 후 캐내어 명주도 감창사에게 들였다. 그 때 낭중 이록수가 감창사가 되었는데 받아 감창고 안에 보관하고 매 교대할 때마다 전하고 받았다.
至戊午十月 本業老宿祗林寺住持大禪師覺猷奏曰 洛山三珠 國家神寶 襄州城陷時 寺奴乞升埋於城中 兵退 取納監倉使 藏在溟州營庫中 今溟州城殆不能守矣 宜輸安御府 主上允可 發夜別抄十人 率乞升 取於溟州城 入安於內府 時使介十人各賜銀一斤米五石
무오년 10월에 이르러 본업의 늙은 중 기림사 주지 대선사 각유가 아뢰어 말하기를 “낙산의 세 구슬은 국가의 신보인데 양주성이 함락될 때 절의 종 걸승이 성안에 묻었습니다. 군대가 물러가자 가져다 감창사에게 들여 명주에 있는 군영 창고 안에 보고나하였습니다. 지금 명주성이 위태로워 지킬 수 없습니다. 마땅히 운반하여 궁궐의 창고에 보관해야 합니다.”했다. 주상(임금)이 허락하였다. 야별초 10명을 뽑아 걸승을 데리고 명주성에서 취하여 대궐 창고에 넣어 안치하였다. 그 때 사잘 갔던 10명에게도 각각 은 한 근, 쌀 5석을 내렸다.
昔 新羅爲京師時 有世逵寺(今興敎寺也)之莊舍 在溟州㮈李郡(按地理志 溟州無㮈李郡 唯有㮈城郡 本㮈生郡 今寧越 又牛首州領縣有㮈靈郡 本㮈已郡 今剛州 牛首州今春州 今言㮈李郡 未知孰是) 本寺遺僧調信爲知莊 信到莊上 悅(太)守金昕公之女 惑之深 屢就洛山大悲前 潛祈得幸 方數年間 其女已有配矣 又往堂前怨大悲之不遂己 哀泣至日暮 情思倦憊 俄成假寢 忽夢金氏娘 容豫入門 粲然啓齒而謂曰 兒早識上人於半面 心乎愛矣 未嘗暫忘 迫於父母之命 强從人矣 今願爲同穴之友 故來爾
옛날 신라가 서울이 되었을 때 세규사(지금의 흥교사이다.) 농장건물이 명주 내리군(자리지를 살펴보니 명주에는 내리군이 없고, 오직 내성군이 있을 뿐이다. (내성군은) 본래 내생군으로 지금의 영월이다. 또 우수주 영현에 내령군이 있으니 본래 내기(이)군으로 지금의 강주이다. 우수주는 지금의 춘주이다. 지금 말한 내리군은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본사에서 중 조신을 보내 지장으로 삼았다. 조신이 농장에 이르렀다. (조신이) 태수 김흔의 딸을 좋아하여 혹됨이 깊었다. 여러 번 낙산 대비전에 나아가 몰래 사랑을 얻을 것을 기도하였다. 바야흐로 몇 년 사이에 그 여자가 짝이 있게 되자 또 당(대비전) 앞에 가 대비(관세음보살)가 자기의 바람을 이루어주지 않음을 원망하였다. 슬퍼하며 울다가 해가 저물 무렵에 이르도록 그리워하다 지쳐 잠깐 잠이 들었다. 홀연히 꿈에 김씨 낭자가 기뻐하는 얼굴로 문을 들어 와 환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하기를 “제가 일찍이 상인을 잠깐 뵙고 알아 마음으로 사랑하여 일찍이 잠시도 잊지 못하였으나 부모의 명을 따라 억지로 다른 사람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죽어서 같은 구멍(무덤)에 들어 갈 벗(부부가)이 되기를 원하여 왔을 따름입니다.”했다.
信乃顚喜 同歸鄕里 計活四十餘霜 有兒息五 家徒四壁 藜藿不給 遂乃落魄扶攜 糊其口於四方 如是十年 周流草野 懸鶉百結 亦不掩體 適過溟州蟹縣嶺 大兒十五歲者忽餧死 痛哭收瘞於道 從率餘四口 到羽曲縣(今羽縣也) 結茅於路傍而舍 夫婦老且病 飢不能興 十歲女兒巡乞 乃爲里獒所噬 號痛臥於前 父母爲之歔欷 泣下數行
조신이 이에 엎어질 듯이 기뻐하며 함께 고향으로 돌아 가 40여년을 함께 살면서 다섯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집은 한갓 4벽뿐이고, 거친 음식도 갖추지 못하였다. 마침내 보잘 것 없어져 부축하고 손으로 끌며(식구를 이끌고) 사방에서 그 입에 풀칠하였다.(구걸하며 지냈다.) 10년을 이 같이 하며 초야를 두루 돌아다니니 100번을 기운 낡고 헤진 옷은 또한 몸을 가리지 못하였다. 마침 명주 해현령을 지낭 때 15살 된 큰 아이가 홀연히 주려 죽었다. 통곡하며 길에 묻고 나머지 4명을 데리고 우곡현(지금의 우현이다.)에 이르러 길옆에 띠풀로 집을 지었다. 부부가 늘고 또 병든데다 주려 일어날 수 없었다. 10살된 딸이 구걸을 돌다 마을 개에게 물려 아프다고 소리치며 앞에 누워 있으니 부모가 흐느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婦乃□澁拭涕 倉卒而語曰 予之始遇君也 色美年芳 衣袴稠鮮 一味之甘 得與子分之 數尺之煖 得與子共之 出處五十年 情鍾莫逆 恩愛綢繆 可謂厚緣 自比年來 衰病日益深 飢寒日益迫 傍舍壺漿 人不容乞 千門之恥 重似丘山 兒寒兒飢 未遑計補 何暇有愛悅夫婦之心哉 紅顔巧笑 草上之露 約束芝蘭 柳絮飄風 君有我而爲累 我爲君而足憂 細思昔日之歡 適爲憂患所階 君乎予乎 奚至此極 與其衆鳥之同餧 焉知隻鸞之有鏡 寒棄炎附 情所不堪 然而行止非人 離合有數 請從此辭 信聞之大喜 各分二兒將行
부인이 이에 눈물을 닦고 갑자기 말하기를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옷도 깨끗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그대와 나누었고, 몇 자의 따뜻한 옷을 얻으면 그대와 함께 하였습니다.(입었습니다.) 집을 나온 지 50년 동안 정을 주어 거스르지 않았고, 은혜와 사랑이 자세하고 꼼꼼하게 준비되었으니 두터운 인연이라 알 수 있습니다. 근래로부터 쇠퇴하고 병듦이 날로 심해지고, 주림과 추위는 더욱 핍박하는데 곁방살이와 단지 안의 간장도 사람들이 구걸을 용납하지 않아 이집 저집을 떠도는 부끄러움이 언덕과 산 같이 무겁습니다. 아이들은 추워하고 주리는데도 도움을 헤아릴 겨를이 없으니 어느 겨를에 사랑하고 기뻐하는 부부의 마음이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아름다운 미소는 풀 위의 이슬 같고, 지초와 난초 향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들개지 같습니다. 그대에게 내가 있음은 누가 되고, 나에게 그대는 근심거리가 되니 자세히 지난날의 기쁨을 생각해 보니 마침 우환이 되는 계단이 되었습니다. 그대와 내가 어쩌다 이렇게 지극함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여러 새와 함께 같이 주리기보다는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향해 짝을 부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하는 것은 인정으로 견디지 못할 바입니다. 그러나 행하고 그침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떠나고 합하는 것은 운수가 있으니 이제부터 헤어질 것을 청합니다.”했다.
信聞之大喜 各分二兒將行 女曰 我向桑梓 君其南矣 方分手進途而形開 殘燈翳吐 夜色將闌 及旦鬚髮盡白 惘惘然殊無人世意 已厭勞生 如飫百年苦 貪染之心 洒然氷釋 於是 慚對聖容 懺滌無已 歸撥蟹峴所埋兒 乃石彌勒也 灌洗奉安于隣寺 還京師 免莊任 傾私財 創淨土寺 懃修白業 後莫知所終
조신이 그것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각각 두 아이씩 나누어 장차 가려하는데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고향을 향하니 근대는 남쪽으로 가시오.”했다. 바야흐로 손을 나누고 길에 나아가려 하는데 꿈에서 깨어났다. 남은 등불이 가림을 토하고 밤도 새려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하얗고, 아득하여 달리 인간 세상에 뜻이 없었다. 이미 수고로운 삶에 싫증이 나고, 100년의 괴로움에 배부른 듯하고, 재물을 탐하여 더럽혀진 마음이 어름 풀리 듯 하였다. 이에 성인의 얼굴을 대하기 부끄럽고 잘못을 뉘우침을 그만둘 수 없었다. 해현으로 돌아가 묻었던 아이를 파보니 곧 석미륵이었다. 씻어서 이웃 절에 받들어 안치하고 서울로 돌아 와 농장의 맡음을 그만두고 개인 재물을 기우려 정토사를 창건하고 부지런히 모든 일을 닦았다. 후에 어디서 마쳤는지(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議曰 讀此傳 掩卷而追繹之 何必信師之夢爲然! 今皆知其人世之爲樂 欣欣然役役然 特未覺爾 乃作詞誡之曰 快滴須臾意已閑 暗從愁裏老蒼顔 不須更待黃粱熟 方悟勞生一夢間 治身臧否先誠意 鰥夢蛾眉賊夢藏 何以秋來淸夜夢 時時合眼到淸凉
논의해 말한다. 이 전기를 읽고 책을 덮고 미루어 생각하니 어찌 조신 스님의 꿈만 그러하겠는가? 지금 모든 사람들이 세속의 즐거움 되는 것을 알고서 기뻐하며 애쓰고 있는 것은 단지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시를 지어 경계한다.
잠시의 생각 마음에 맞아 이미 한가롭더니, 근심 따라 남모르게 늙어졌다. 모름지기 누른 좁쌀 익기를 기다리지 말고, 바야흐로 수고로운 삶이 하나의 꿈임을 깨달아하리. 자신을 닦음의 잘잘못은 먼저 성의에 달린 것, 홀아비는 미인을 꿈꾸고, 도적은 창고를 꿈꾼다. 어찌 가을 날 하룻밤 꿈만으로 때때로 눈만 감아도 청량에 이른다네.
魚山佛影
古記云 萬魚寺者古之慈成山也 又阿耶斯山(當作摩耶斯 此云魚也) 傍有呵囉國 昔天卵下于海邊 作人御國 卽首露王 當此時 境內有玉池 池有毒龍焉 萬魚山有五羅刹女 往來交通 故時降電雨 歷四年 五穀不成 王呪禁不能 稽首請佛說法 然後羅刹女受五戒而無後害 故東海魚龍遂化爲滿洞之石 各有鍾磬之聲(已上古記) 又按 大定十二年庚子 卽明宗十一年也 始創萬魚寺 棟梁寶林狀奏所稱 山中奇異之迹 與北天竺訶羅國佛影事符同者有三 一 山之側近地梁州界玉池 亦毒龍所蟄是也 二 有時自江邊雲氣始出來 到山頂 雲中有音樂之聲是也 三 影之西北有盤石 常貯水不絶 云是佛浣濯袈裟之地是也 已上皆寶林之說 今親來瞻禮 亦乃彰彰可敬信者有二 洞中之石 凡三分之二皆有金玉之聲 是一也 遠瞻卽現 近瞻不見 或見覓等 是一也 北天之文 具錄於後
어산불영
고기에 “만어사는 옛날의 자성산, 또는 아야사산(마땅히 마야사라 써야 한다. 이는 물고기를 말한다.)이니 옆에 가라국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에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곧 수로왕이다. 이때를 당하여 나라 안에 옥지가 있었는데 못에 독룡이 있었고, 만어산에는 다섯 나찰녀가 있어 왕래하며 서로 사귀었다. 그러므로 때로 번개치고 비가 내려 4년동안이나 옥오곡이 익지 못하였다. 왕이 주술로 금하였으나 할 수 없어 공경히 머리를 조아리며 부처를 청해 설법을 한 후 나찰녀가 오계를 받은 후부터 해가 없었다. 그러므로 동해의 어룡이 변화를 이루어 고을을 가득 채우는 돌이 되는데 각각 송과 경쇠의 소리를 내었다.”했다.(이상은 고기이다.) 또 살펴보니 대정 12년 경자는 곧 명종 11년이다. 처음 만어사를 창건하였다. 동량 보림이 글을 올려 아뢰어 말한 바에는 “산 속 기이한 자취는 북천축 가라국 부처의 그림자와 일이 부합하는 것이 셋이 있습니다. 하나는 산 옆 가까운 땅이 양주 옥지인데 또한 독룡이 숨어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둘째는 때로 강가로부터 구름의 기운이 처음 나와 산마루에 이르는데 구름 속에서 음악소리가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셋째는 그림자의 서북쪽에 반석이 있는데 항상 물이 고여 끊어지지(마르지) 않습니다. 이를 부처가 가사를 빨던 땅이라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했다. 이상은 모두 보림의 말인데 지금 직접 와서 참례하고 보니 또한 분명히 공경하고 믿을만한 것이 둘이 있다. 고을 안의 돌은 무릇 3분의 2가 모두 금과 옥의 소리를 내는 것이 하나이고, 멀리서 보면 곧 나타났다가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고 혹은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이 하나이다. 북천축의 글은 뒤에 갖추어 기록하였다.
可函觀佛三昧經第七卷云 佛到耶乾訶羅國古仙山 薝葍花林毒龍之側 靑蓮花泉北 羅刹穴中 阿那斯山南 爾時 彼穴有五羅刹 化作女龍 與毒龍通 龍復降雹 羅刹亂行 飢饉疾疫 已歷四年 王驚懼 禱祀神祗 於事無益 時有梵志聰明多智 白言大王?伽毗羅淨飯王子 今者成道號釋迦文? 王聞是語 心大歡喜 向佛作禮曰云 ?何今日佛日已興 不到此國?? 爾時 如來勅諸比丘 得六神通者 隨從佛後 受那乾訶羅王弗婆浮提請 爾時 世尊頂放光明 化作一萬諸大化佛 往至彼國 爾時 龍王及羅刹女 五體投地 求佛受戒 佛卽爲說三歸五戒 龍王聞已 長跪合掌?勸請世尊常住此間 佛若不在 我有惡心 無由得成阿耨菩提? 時 梵天王復來禮佛 請婆伽婆爲未來世諸衆生故 莫獨偏爲此一小龍 百千梵王皆作是請 時 龍王出七寶臺 奉上如來 佛告龍王 ?不須此臺 汝今但以羅刹石窟持以施我? 龍歎喜(云云) 爾時 如來安慰龍王 ?我受汝請 坐汝窟中 經千五百歲? 佛湧身入石 猶如明鏡 人見面像 諸龍皆現 佛在石內 映現於外 爾時 諸龍合掌歡喜 不出其地 常見佛日 爾時 世尊結伽趺坐在石壁內 衆生見時 遠望卽現 近則不現 諸天供養佛影 影亦說法 又云 佛蹴嵓石之上 卽便成金玉之聲
가(자)함의 관불삼매경 7권에 “부처가 야건가라국 고선산 첨복화림 독룡의 옆 청련화천 북쪽 나찰혈 가운데에 있는 아나사산 남쪽에 이르렀다. 이 때 그 구멍에 다섯 나찰이 있었는데 변화하여 여룡이 되어 독룡과 통하였다.(사귀고 있었다.) 용은 다시(반복하여) 우박을 내리고, 나찰녀는 못된 행동을 하니 기근(굶주림)과 질병이 유행한지 4년이 지났다. 왕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천신과 지신에게 기도하고 제사하였으나 일에 이익이 없었다. 그 때 범지가 총명하고 지혜가 많았는데 대왕에게 말하기를 ‘가비라국의 정반왕의 왕자가 지금 도를 이루어 석가문이라 불립니다.’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부처를 향해 예를 하고 말하기를 ‘어찌하여 오늘 부처의 해(불교)가 이미 일어났는데 이 나라에는 이르지 않으십니까?’했다. 이 때 여래가 여러 비구에게 명하여 6신통을 얻은 자는 부처의 뒤를 따르게 하고, 나건가라왕, 불파부제의 청을 받게 하였다.(들어주려 하였다.) 이때 세존의 이마에서 빛이 뻗어 나와 일만의 여러 대화불을 변화시켜 보이고 가서 그 나라에 이르렀다. 이때 용왕과 나찰녀가 온 몸을 땅에 던지고 부처의 게 받기를 청하였다. 부처가 곧 삼귀오계를 말하였다. 왕왕이 듣기를 마치고 갈게 꿇고 손을 모으고(꿇어 앉아 합장하고) ‘세존이 항상 이 사이에 머물 것을 청합니다. 부처가 있지 않으면 나에게 나쁜 마음이 생겨 말미암아 아누보리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했다. 그 때 범천왕이 다시 와서 부처에게 예를 표하고 ‘파가파께서는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의 (앞으로 올 세상의) 여러 중생을 위하시고 오직 치우쳐 이 하나의 작은 용만을 위하지 마십시오.’했다. 백천 범왕이 모두 이런 청을 하였다. 그 때 용왕이 나와 칠보대를 여래에게 받들어 올렸다. 부처가 용왕에게 말하기를 ‘이 대는 필요하지 않다. 너는 지금 다만 나찰 석굴을 지니는 것으로서 나에게 베풀라.’했다. 용이 기뻐하였다. 한다. 이 때 여래가 용왕을 위로하여 ‘내가 너의 청을 받아 너의 굴 안에 앉아 1500년을 지내겠다.’했다. 부처가 몸을 솟구쳐 돌에 들어가니 이내 밝은 거울과 같아져 사람들이 얼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러 용이 모두 나타나고 부처는 돌 안에 있는데도 밖으로 비쳐 나타났다. 이때 여러 용이 합장하고 기뻐하며 그 땅을 나가지 않고 항상 부처를 불 수 있었다. 이 때 세존은 결가부좌하고 돌 벽 안에 있었는데 중생들이 볼 때 멀리서 바라보면 곧 나타나고, 가까이하면 곧 나타나지 않았다. 제천이 부처의 그림자에 공양하면 부처의 그림자가 또한 설법하였다. 또 이르기를 ‘부처가 바위의 위를 밟으니 문득 금옥의 소리가 났다.’”했다.
高僧傳云 惠遠聞天竺有佛影 昔爲龍所留之影 在北天竺月支國那竭呵城南古仙人石室中(云云) 又法現西域傳云 至那竭國界 那竭城南半由旬有石室 博山西南面 佛留影此中 去十餘步觀之 如佛眞形 光明炳著 轉遠轉微 諸國王遣工摹寫 莫能髣髴 國人傳云 賢劫千佛 皆當於此留影 影之西百步許 有佛在時剃髮剪爪之地(云云)
고승전에 “혜원이 천축에 부처의 그림자가 있는데 옛날 용을 위해 머물렀던 그림자로 북천축 월지국 나갈가성 남쪽 고선인의 석실 안에 있다는 것을 들었다.”했다. 또 볍현의 서역전에 “나갈국 경계에 이르면 나갈성 남쪽으로 반 유순되는 곳에 석실이 있는데 박산의 서남쪽으로 부처가 이 안에 그림자를 남겼다. 10여보 떨어진 곳엣 보면 마친 부처의 참모습처럼 광명이 환하게 드러나지만(나타나지만)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하게 보인다. 여러 나라의 왕들이 장인을 보내 베껴 그리려 했으나 비슷하게 할 수 없었다. 나라 사람들이 전하여 말하기를 ‘현겁의 천불이 모두 마땅히 이 곳에 그림자를 남길 것이다. 그 그림자의 서쪽 100보쯤 부처가 살아있을(이 세상에 있을) 때 머리를 깍고 손톱을 깍던 땅이다.”했다.
星函西域記第二卷云 昔 如來在世之時 此龍爲牧牛之士 供王乳酪 進奏失宜 旣獲譴嘖 心懷恚恨 以金錢買花供養 授記窣堵婆 願爲惡龍破國害王 特趣石壁 投身而死 遂居此窟爲大龍王 適起惡心 如來鑑此 變神通力而來至 此龍見佛 毒心遂止 受不殺戒 因請如來?常居此穴 常受我供? 佛言 ?吾將寂滅 爲汝留影 汝若毒忿 常觀吾影 毒心當止? 攝神獨入石室 遠望卽現 近則不現 又令石上蹴爲七寶(云云) 已上皆經文 大畧如此 海東人名此山爲阿那斯 當作摩那斯 此翻爲魚 盖取彼北天事而稱之爾
성함의 서역기 제 2권에 “옛날 여래가 세상에 있을 때 이 용이 소를 기르는 사람이 되어 왕에게 젖을 바쳤는데 나아가 아뢸 때 마땅함을 잃어 꾸짖음을 들었다. 마음속으로 원망을 품어 돈으로 꽃을 사 바치고 솔도파에 수기한 후 나쁜 용이 되어 나라를 깨트리고, 왕을 해칠 것을 발원하고는 돌 벽에 나아가 몸믕 던져 죽었다. 마침내 대용왕이 되어 이 굴에 살면서 악한 마음을 일으켰다. 여래가 이를 보고 신통력으로 변하여 이르렀다. 이 용이 부처를 보자 독한 마음을 마침내 그치고 불살계를 받았다. 이 때문에 여래에게 청하기를 ‘항상 이 굴에 살면서 항상 저의 공양을 받으십시오.’했다. 무처가 말하기를 ‘나는 장차 적멸할 것이다. 너를 위해 그림자를 남겨 둘 터이니 네가 만약 독한 분노가 일어날 때 항상 내 그림자를 보면 독한 마음이 마땅히 그칠 것이다.’했다. 섭신(부처?)만 홀로 석실에 들어갔는데 머리서 바라보면 곧 나타나고, 또 가까이하면 곧 나타나지 않았다. 또 돌 위에 발자국을 내어 칠보로 삼았다.”했다. 이상은 모두 경전의 글인데 대략 이 같다. 해동 사람들은 이 산을 이름하여 아나사라 했는데 마땅히 마나사라 써야 한다. 이를 번역하면 어(물고기)가 되니 대개 저 북천의 일을 취하여 불렀기 때문이다.
臺山五萬眞身
按山中古傳 此山之署名眞聖住處者 始自慈藏法師 初 法師欲見中國五臺山文殊眞身 以善德王代 貞觀十年丙申(唐僧傳云十二年 今從三國本史)入唐 初至中國太和池邊 石文殊處 虔祈七日 忽夢大聖授四句偈 覺而記憶 然皆梵語 罔然不解 明旦忽有一僧 將緋羅金點袈裟一領佛鉢一具佛頭骨一片 到于師邊 問 何以無聊? 師答以夢所受四句偈 梵音不解爲辭 僧譯之云 呵囉婆佐曩 是曰了知一切法 達㘑哆佉嘢 云自性無所有 曩伽呬伽曩 云如是解法性 達㘑盧舍那 云卽見盧舍那 仍以所將袈裟等 付而囑云 此是本師釋迦尊之道具也 汝善護持
대산 오만진신
산중 고전을 살펴보니 “진성이 머무는 곳이라 이름 한 것은 시작이 자장법사로부터이다.”했다. 처음 법사(자장)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진신을 뵙고자 하여 선덕왕대인 정관 10년 병신에(당 승전에는 12년이라 했다. 지금 삼국본사를 따른다.) 당에 들어갔다. 처음 중국 태화지 가에 이르러 돌로 만든 문수보살이 있는 곳에서 경건히 7일을 기도하였다. 홀연히 꿈에 대성이 4구의 게를 주었다. (꿈에서)깨어 기억해보았으나 모두 범어였다. 망연하여 풀지 못하고 있었다. 밝은 아침에 홀연히 한 중이 있는데 푸른 비단에 금 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의 바릿대 한 개,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스님의 옆에 이르러 묻기를 “무슨 까닭으로 수심에 잠겨있습니까?”했다. 스님(자장)이 꿈에 받았던 4구의 게가 범어여서 풀지 못하기 때문이란 말로 답하였다. 중이 번역하여 말하기를 “하라파좌낭은 일체의 법을 알았다는 것이고, 달예다가야는 본래의 성품은 있는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낭가사가낭은 이 같이 법성을 풀었다는(알았다는) 것이다. 달예노사나는 곧 노사나를 뵙는다는 것입니다,”했다. 이어 가지고 있던 가사 등을 주고 부탁하여 말하기를 “이는 본사 석가존의 도구입니다. 당신이 잘 지키고 지니십시오.”했다.
又曰 汝本國艮方溟州界有五臺山 一萬文殊常住在彼 汝往見之 言已不現 遍尋靈迹 將欲東遺 太和池龍現身請齋 供養七日 乃告云 昔之傳偈老僧 是眞文殊也 亦有叮囑創寺立塔之事 具載別傳 師以貞觀十七年來到此山 欲覩眞身 三日晦陰 不果而還 復住元寧寺 乃見 文殊云 至葛蟠處 今淨嵓寺是(亦載別傳) 後有頭陁信義 乃梵日之門人也 來尋藏師憩息之地 創庵而居 信義旣卒 庵亦久廢
또 말하기를 “당신의 본국 간방(동북쪽)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일만의 문수가 항상 거기에 머물고 있으니 당신은 가서 뵙도록 하십시오.”하는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두루 신령한 자취를 찾아보고 장차 동쪽으로 돌아가려하는데 태화지의 용이 몸을 드러내어 재를 청하였다. 7일을 공양하더니 이에 고하여 말하기를 “옛날 게를 전한 노승은 참 문수입니다.”했다. 또한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단단히 부탁한 일은 다른 전에 보두 실려 있다. 스님이 정관 17년에 이 산(오대산)에 이르러 진신을 뵙고자 하였으나 3일이나 어둡고 그늘이 져서 뵙지 못하고 돌아갔다. 다시 원녕사에 머물다 문수를 뵈었다. 문수보살이 말하기를 “칡덩쿨이 서려있는 곳으로 가라.”했다. 지금의 정암사가 이것이다.(또한 다른 전에 실려있다.) 후에 두타 신의는 곧 범일의 문인인데 와서 자장스님이 쉬던 곳을 찾아 암자를 세우고 살았다. 신의가 죽은 후 암자가 또한 오래 동안 헐어져 있었다.
有水多寺長老有緣 重創而居 今月精寺是也 藏師之返新羅 淨神大王太子寶川孝明二昆弟(按國史 新羅無淨神寶川孝明三父子明文 然此記下文云神龍元年開土立寺 則神龍乃聖德王卽位四年乙巳也 王名興光 本名隆基 神文之第二子也 聖德之兄孝照名理恭 一作洪 亦神文之子 神文政明字日照 則淨神恐政明神文之訛也 孝明 乃孝照一作昭之訛也 記云孝明卽位而神龍年開土立寺云者 亦不細詳言之爾 神龍年立寺者乃聖德王也)
수다사 장로 유연이 중창하여 살았다. 지금의 월정사가 이것이다. 자장 스님이 신라로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의 태자 보천과 효명 두 형제(삼국사를 살펴보니 신라에는 정신, 보천, 효명 삼부자의 명문이 없다. 그러나 이 아래 글에 “신룡 1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기록하였으니 곧 신룡은 성덕왕 즉위 4년 을사이다. 왕의 이름은 흥광이니 본명은 융기로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덕의 형 효조는 이름이 이공으로 이홍이라 쓰기도 한다. 또 신문의 아들이다. 신문왕 정명의 자는 일조이니 곧 정신은 아마도 정명 신문의 잘못일 것이다. 효명은 곧 효조이니 효소의 잘못일 것이다. 기록에는 효명이 즉위한 것만 말하고, 신룡 연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말한 것은 또한 자세히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신룡 연간에 절을 세운 이는 곧 성덕왕이다.)
到河西府(今溟州及有河西郡是也 一作河曲縣 今蔚州非是也)世獻角干之家留一宿 翌日過大嶺 各領千徒 到省烏坪 遊覽累日 忽一夕昆弟二人 密約方外之志 不令人知 逃隱入五臺山(古記云 太和元年戊申八月初 王隱山中 恐此文大誤 按孝照一作昭 以天授三年壬辰卽位 時年十六 長安二年壬寅崩 壽二十六 聖德以是年卽位 年二十二 若曰太和元年戊申 則先於孝照卽位甲辰已過四十五歲 乃太宗文武王之世也 以此知此文爲誤 故不取之) 侍衛不知所歸 於是還國
하서부(지금의 명주에 하서부가 있으니 이곳이다. 하곡현이라 써 지금의 울주라 하는데 옳은 것이 아니다.)에 이르러 세헌 각간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큰 고개를 지나 각기 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성오평에 이르렀다. 유람하기를 여러 날 하다가 홀연히 어느 날 저녁 형제 두 사람이 비밀리에 속세를 벗어날 뜻을 약속하고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한 후 도망하여 오대산에 숨어 들어갔다.(고기에 “태화 1년 무신 8월 초 왕이 산 중에 숨었다.”하였는데 아마도 이 글은 크게 잘못된 것 같다. 살펴보니 효조는 소라고도 쓰는데 천수 3년 임진에 즉위하였다. 그 때 나이 16세였다. 장안 2년 임인에 죽으니 나이는 26세였다. 성덕왕이 이 해 즉위하였는데 나이는 22세였다. 만약 태화 1년이 무신이라 한다면 곧 효조가 즉위한 갑진보다 앞서 이미 45년을 지났으니 곧 태종, 문무왕의 세상이다, 이로서 글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으니 곧 태종, 문무왕의 세대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취하지 않는다.) 시위들이 돌아갈 바를 알지 못하여 이에 나라로 돌아왔다.
二太子到山中 靑蓮忽開地上 兄太子結庵而止住 是曰寶川庵 向東北行六百餘步 北臺南麓亦有靑蓮開處 弟太子孝明又結庵而止 各懃修業 一日同上五峯瞻禮次 東臺滿月山 有一萬觀音眞身現在 南臺麒麟山 八大菩薩爲首一萬地藏 西臺長嶺山 無量壽如來爲首一萬大勢至 北臺象王山 釋迦如來爲首五百大阿羅漢 中臺風盧山亦名地盧山 毗盧遮那爲首一萬文殊 如是五萬眞身一一瞻禮
두 태자가 산중에 이르니 청련이 홀연히 땅위에 피니 형 태자가 암자를 짓고 머물러 살았다. 이를 보천암이라 한다. 동쪽을 향해 600여보를 가 북대 남쪽 기슭에 또 청련이 핀 곳이 있는데 동생 태자 효명이 또한 암자를 짓고 머물렀다. 각각 부지런히 업을 닦았다. 하루는 같이 차례로 참례하러 다섯 봉우리에 오르니 동대 만월산에는 일만의 관음진신이 나타나 있고, 남대 기린산에는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하는 일만 지장이 있고, 서대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하는 일만의 대세지가 있고, 북대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하는 오백대아라한이 있고, 중대 퐁로산은 또 지로산이라 이름하는데 비로자나를 우두머리로 하는 일만의 문수가 있었다. 이 같이 오만 진신을 일일이 참례하였다.
每日寅朝 文殊大聖到眞如院今上院 變現三十六種形 或時現佛面形 或作寶珠形 或作佛眼形 或作佛手形 或作寶塔形 或萬佛頭形 或作萬燈形 或作金橋形 或作金鼓形 或作金鐘形 或作神通形 或作金樓形 或作金輪形 或作金剛杵形 或作金甕形 或作金鈿形 或五色光明形 或五色圓光形 或吉祥草形 或靑蓮花形 或作金田形 或作銀田形 或作佛足形 或作雷電形 或(如)來湧出形 或地神湧出形 或作金鳳形 或作金烏形 或馬産師子形 或雞産鳳形 或作靑龍形 或作白象形 或作鵲鳥形 或牛産師子形 或作遊猪形 或作靑蛇形
매일 이른 아침이면 문수대성이 진여원, 지금의 상원에 이르러 36가지 형상으로 변해 나타났다. 혹은 때로 부처의 얼굴 형상으로 나타나고, 혹은 보주의 형상을 하고, 혹은 부처의 눈 형상을 하고, 혹은 부처의 손 모양을 하고, 혹은 보탑의 형상을 하고, 혹은 만부처의 머리 형상을 하고, 혹은 만가지 등의 형상을 하고, 혹은 금 다리의 형상을 하고, 혹은 금 북 형상을 하고, 혹은 금 종 형상을 하고, 혹은 금 누각의 형상을 하고, 혹은 금 수레바퀴의 형상을 하고, 혹은 금강저의 형상을 하고, 혹은 금 항아리 형상을 하고, 혹은 금비녀 형상을 하고 혹은 오색광명의 형상을 하고, 혹은 오색 원광 형상을 하고, 혹은 길상초 형상을 하고 혹은 쳥령화 형상을 하고, 혹은 금전 형상을 하고, 혹은 은전 형상을 하고, 혹은 부처의 발 형상을 하고, 혹은 우레와 번개 형상을 하고, 혹은 여래가 솟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혹은 지신이 솟아나오는 형상을 하고, 혹은 금봉형상을 하고, 호근 소가 사자를 낳는 형상을 하고, 혹은 유저의 형상을 하고 혹은 푸른 뱀의 형상을 하고 나타났다.
二公每汲洞中水 煎茶獻供 至夜各庵修道 淨神王之弟與王爭位 國人廢之 遣將軍四人到山迎之 先到孝明庵前呼萬歲 時有五色雲 七日垂覆 國人尋雲而畢至 排列鹵簿 將邀兩太子而歸 寶川哭泣以辭 乃奉孝明歸卽位 理國有年(記云 在位二十餘年 盖崩年壽二十六之訛也 在位但十年爾 又神文之弟爭位 事國史無文 未詳) 以神龍元年(乃唐中宗復位之年 聖德王卽位四年也)乙巳三月初四日始改創眞如院
두 공(보천과 효명)이 골짜기 안의 물을 길어 차를 끓여 바치고, 밤이 되면 각 암자에서 도를 닦았다. 정신왕의 동생이 왕과 왕위를 다투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하고, 장군 4명을 보내 산에 이르러 그들을 맞아 오게 하였다. 먼저 효명의 암자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불렀는데 그 때 오색의 구름이 있어 7일이나 덮었다. 나라 사람들이 구름을 찾아 모두 이르러 임금의 의장을 늘어놓고 두 태자를 맞이하여 돌아가려 하였다. 보천이 곡하고 울며 사양하였다. 이에 보명을 받들어 돌아가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여러 해가 지나고(기에 “왕위에 있은 것은 20여년이라 했으나 대개 죽을 때의 나이가 26세라 한 것은 잘못이다. 왕위에 있었던 것은 다만 10여년일 뿐이다. 또 신문왕의 동생이 왕위를 다투었다 하는 것도 일이 국사에는 글이 없으므로 자세하지 않다.) 신룡 1년(곧 당나라 중종이 다시 왕위에 오른 때이다. 성덕왕 즉위 4년이다.) 을사 삼월 초사일에 처음 진여원을 고쳐지었다.
大王親率百寮到山 營搆殿堂 竝塑泥像文殊大聖安于堂中 以知識靈卞等五員 長轉華嚴經 仍結爲華嚴社 長年供費 每歲春秋 各給近山州縣倉租一百石淨油一石 以爲恒規 自院西行六千步 至牟尼岾古伊峴外 柴地十五結 栗枝六結 坐位二結 創置莊舍焉 寶川常汲服其靈洞之水 故晩年肉身飛空 到流沙江外蔚珍國掌天窟停止 誦隨求陁羅尼 日夕爲課 窟神現身白云 我爲窟神已二千年 今日始聞隨求眞詮 請受菩薩戒 旣受已 翌日窟亦無形 寶川驚異 留二十日乃還五臺山神聖窟
대왕이 직접 많은 관리를 거느리고 산에 이르러 전당을 짓고 아울러 진흙으로 문수대성를 만들어 당 안에 안치하고, 지식(승려) 영변 등 다섯 명으로서 길이 화엄경을 읽게 하였다. 그리고 화엄사를 결성하게 하여 오래 동안의 공양 비용을 대게 하였는데 매년 봄과 가을에 각각 산에서 가까운 주와 현의 조 100석, 깨끗한 기름 1석을 지금하는 것으로서 항상된 규칙으로 삼았다. 원(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000보를 가면 모니점 고이현 밖에 이르는 시지 15결, 밤나무 밭 6결, 좌위 2결로 장사(농장)를 만들게 하였다. 보천이 항상 그 영동의 물을 길어 마셨다. 그러므로 만년에 육신이 공중을 날아 유사강 밖 울진국 장천굴에 이르러 멈추어 수구다라니를 외는 것으로서 밤낮의 과업으로 삼았다. 굴의 신이 몸을 나타내어 말하기를 “나는 굴의 신이 된지 2000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비로소(처음) 수구다라니의 진리를 들었습니다.”하고는 보살계 받기를 청하였다. 계를 받은 후 다음날 굴이 또한 형상이 없어졌다. 보천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20일을 머물다 오대산 신성굴로 돌아왔다.
又修眞五十年 忉利天神三時聽法 淨居天衆烹茶供獻 四十聖騰空十尺 常時護衛 所持錫杖一日三時作聲 遶房三匝 用此爲鐘磬 隨時修業 文殊或灌水寶川頂 爲授成道記莂 川將圓寂之日 留記後來山中所行輔益邦家之事云
또 참을 50년 닦으니 도리천의 신이 삼시로 법을 듣고, 정거천의 무리들이 차를 끓여 바쳤고, 40의 성인이 공중에 10자를 올라 항상 호위하였으며 지닌 바 지팡이는 하루 세 번을 소리내며 방을 세 번 돌았다. 이를 써서 종과 경쇠로 삼아 때에 따라 업을 닦았다. 문수보살이 혹 물을 보천의 이마에 붓고 성도기별을 주었다. 보천이 원적(입적)하던 날 산 중에 와 나라를 돕고, 이익 되게 할 일을 기록하여 남겨 말하기를
此山乃白頭山之大脉 各臺眞身常住之地 靑在東臺北角下北臺南麓之末 宜置觀音房 安圓像觀音及靑地畫一萬觀音像 福田五員 晝讀八卷金經仁王般若千手呪 夜念觀音禮懺 稱名圓通社 赤任南臺南面 置地藏房 安圓像地藏及赤地畫八大菩薩爲首一萬地藏像 福田五員 晝讀地藏經金剛般若 夜占察禮懺 稱金剛社 白方西臺南面 置彌陁房 安圓像無量壽及白地畫無量壽如來爲首一萬大勢至 福田五員 晝讀八卷法華 夜念彌陁禮懺 稱水精社 黑地北臺南面 置羅漢堂 安圓像釋迦及黑地畫釋迦如來爲首五百羅漢 福田五員 晝讀佛報恩經涅槃經 夜念涅槃禮懺 稱白蓮社
“이 산은 곧 백두산의 큰 맥으로 각 대는 진신이 항상 머무는 땅이다. 청색 방위인 동대 북쪽 모퉁이 아래와 북대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을 두고 원상 관음보살상과 청색바탕의 일만 관음상을 그리리라. 복전(승려) 5명을 두어 낮에는 8권의 금경(금광명경), 인왕반야경(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심경), 천수주(천수다리니)를 읽고, 밤에는 관음경 예참을 염송하고 원통사라 일컬으라. 적색 방향인 남대 남쪽 면에는 지장방을 두고 원상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하는 일만 지장상을 그려 모시고 복전(승려) 5명을 두어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를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 예참을 읽게하여 금강사라 일컳으라. 백색 방향인 서대의 남쪽에는 미타방을 두고 원상무량수와 흰색바탕에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하는 일만 대세지를 그리고 복전(중) 5명을 두어 낮에는 8권 법화를 읽고, 밤에는 미타예참을 염송하게하여 수정사라 일컬으라. 검은색 방향인 북대 남쪽 면에는 나한당을 두고 원상석가와 흑색 바탕에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하는 오백나한을 그리고 복전 5명을 두어 낮에는 불보은경, 열반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열반예참을 염송케하며 백련사라 일컬으라.
黃處中臺 眞如院中 安泥像文殊不動 後壁安黃地畫毗盧遮那爲首三十六化形 福田五員 晝讀華嚴經六百般若 夜念文殊禮懺 稱華嚴社 寶川庵改創華藏寺 安圓像毗盧遮那三尊及大藏經 福田五員長門藏經 夜念華嚴神衆 每年設華嚴會一百日 稱名法輪社 以此華藏寺爲五臺社之本寺 堅固護持 命淨行福田 鎭長香火 則國王千秋 人民安泰 文虎和平 百穀豊穰矣 又加排下院文殊岬寺爲社之都會 福田七員 晝夜常行華嚴神衆禮懺 上件三十七員齋料衣費 以河西府道內八州之稅 充爲四事之資 代代君王 不忘遵行幸矣
황색 방항인 중대의 진여원 안에는 진흙으로 만든 문수보살 부동상을 안치하고, 윗벽에는 황색바탕에 비로자나를 우두머리로 하는 삼십육 변화하는 형상을 그리고, 복전(중) 5명을 두어 낮에는 화엄경, 육백반야를 읽게 하고, 밤에는 문수참례를 염송하게하고 화엄사라 일컬으라. 보천암을 화장사라 고쳐 세우고 원상 비로자나 삼존상과 대장경을 안치하고, 복전(중) 다섯 명을 두어 낮에는 문장경(대장경)을 읽고, 밤에는 화엄신중을 염송하게 하라. 매년 화엄법회를 일백일 동안 열고 법륜사라 부르라. 이로서 화장사는 오대사의 본사를 삼아 굳게 지키라. 정행 복전(중)으로 하여금 길이 향화를 행하면 곧 국왕은 천년을 살고, 백성은 편안하며 문무관이 화평하고 오곡이 풍성하게 될 것이다. 또 하원에 문수갑사를 배치하여 사의 도회로 삼으라. 복전(중) 일곱명을 두어 밤낮으로 항상 화엄신중 예참을 행하고, 위으 37명이 재에 쓰는 의복과 비용은 하서부 도내 8주의 세금으로서 채워 네 가지 일의 자금으로 하라. 대대의 임금이 잊지 않고 따라 행한다면 다행일 것이다. 했다.
溟州(古河西府也)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
新羅淨神太子寶叱徒 與弟孝明太子 到河西府世獻角干家一宿 翌日踰大嶺 各領一千人到省烏坪 累日遊翫 太和元年八月五日 兄弟同隱入五臺山 徒中侍衛等推覓不得 並皆還國 兄太子見中臺南下眞如院土基下山末靑蓮開 其地結草菴而居 弟孝明見北臺南山末靑蓮開 亦結草菴而居
명주(옛 하서부이다.) 오대산 보질도 태자 전기
신라 정신태자 보질도와 동생 효명태자가 하서부 세헌각간의 집에 이를 하루를 자고, 다음 날 대령을 넘어 각기 일천 인을 거느리고 성오평에 이르러 여러 날을 즐기고 놀았다. 태화 1년 8월 5일 형제가 함께 오대산에 들어 가 숨었다. 무리들 중 시위가 쫓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함께 모두 나라로 돌아갔다. 형인 태자는 중대 남쪽 아래 진여원 땅(터) 아래 산자락에 푸른 연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 땅에 풀을 엮어 암자를 짓고 살았다. 동생 효명은 북대 산 끝자락에 푸름 연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또한 풀을 엮어 암자를 짓고 살았다.
兄弟二人禮念修行 五臺進敬禮拜 靑在東臺滿月形山 觀音眞身一萬常住 南臺麒麟山 八萬菩薩爲首一萬地藏菩薩常住 白方西臺長嶺山 無量壽如來爲首一萬大勢至菩薩常住 黑掌北臺相王山 釋迦如來爲首五百大阿羅漢常住 黃處中臺風爐山 亦名地爐山 毗盧遮那爲首一萬文殊常住 眞如院地 文殊大聖每日寅朝化現三十六形(三十六形見臺山五萬眞身傳)
형제 두 사람이 예배하고 염불하며 수행하면서 오대에 나아가 공경히 예배하였다. 청색 방향인 동대 만월형 산에는 관음진신 일만이 항상 머물러 있고, 남대의 기린산에는 팔만보살을 우두머리로 하는 일만 지장보살이 항상 머물렀고, 백색 방향인 서대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하는 일만 대세지보살이 항상 머물렀고, 검은 색 방향인 북대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하는 오백 대아라한이 항상 머물렀고, 황색 방향인 중대 풍노산은 또한 지로산이라 이름하는데 비로자나를 우두머리로 하는 일만 문수가 항상 머물고, 진여원 땅에는 문수대성이 매일 이른 아침에 33가지 형상(36형상은 대산 오만진신전에 보인다.)으로 변화해 나타났다.
兩太子並禮拜 每日早朝汲于洞水 煎茶供養一萬眞身文殊 淨神太子弟副君 在新羅爭位誅滅 國人遣將軍四人到五臺山 孝明太子前呼萬歲 卽是有五色雲 自五臺至新羅 七日七夜浮光 國人尋光到五臺 欲陪兩太子還國 寶叱徒太子涕泣不歸 陪孝明太子歸國卽位 在位二十餘年 神龍元年三月八日始開眞如院(云云) 寶叱徒太子常服于洞靈水 肉身登空 到流沙江 入蔚珍大國掌天窟修道 還至五臺神聖窟 五十年修道(云云) 五臺山是白頭山之根脈 各臺眞身常住(云云)
두 태자가 함게 예배하고 매일 이른 아침 골짜기 물을 길어다 찰르 끓여 일만진신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하였다. 정신태자의 동생 부군이 신라에 있으면서 왕위를 다투다 죽음을 당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장군 네 명을 보냈더니 오대산에 이르러 효명태자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곧 이 때 다섯 색의 구름이 오대로부터 신라에 이르러 7일 낮과 밤을 빛났다. 나라 사람들이 빛을 찾아 오대에 이르러 두 태자를 모시고 나라로 돌아가려 하였다. 보질도 태자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려하지 않자 효명태자를 모시고 나라에 돌아 가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20여년인 신룡 1년 3월 8일 처음 진여원을 열었다고 한다. 보질도태자가 항상 골짜기의 신령스러운 물을 마시고 육신을 공중에 뛰워 유사강에 이르러 울진대국의 장천굴에 들어 가 도를 닦다 오대 신성굴에 돌아 와 50여년 도를 닦았다고 한다. 오대산은 백두산의 근본 줄기로 각 대에는 진신이 항상 머문다고 한다.
臺山月精寺五類聖衆
按寺中所傳古記云 慈藏法師初至五臺 欲覩眞身 於山麓結茅而住 七日不見 而到妙梵山創淨岩寺 後有信孝居士者 或云幼童菩薩化身 家在公州 養母純孝 母非肉不食 士求肉出行山野 路見五鶴射之 有一鶴落一羽而去 士執其羽 遮眼而見人 人皆是畜生 故不得肉 而因割股肉進母 後乃出家 捨其家爲寺 今爲孝家院 士自慶州界至河率 見人多是人形 因有居住之志 路見老婦 問可住處 婦云 過西嶺有北向洞可居 言訖不現 士知觀音所敎 因過省烏坪 入慈藏初結茅處而住
대산 월정사 오류성중
산 중에 전해지는 고기를 살펴보니 말하기를 “자장법사가 처음 오대에 이르러 진신을 뵙고자 하여 산기슭에 띠풀을 엮고 머물렀는데 7일이 되어도 (진신이)나타나지 않았다. (이에)묘범산으로 가서 정암사를 세웠다. 후에 신료거사람 자가 있었는데 혹은 유동보살의 화신이라 하기도 한다. (신효거사는)집이 공주에 있었는데 어머니를 봉양하며 효를 다하였다. 어머니는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않았다. 신효거사가 고기를 구하러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 길에서 다섯 마리 학을 보고 활을 쏘았다. 한 마리 학이 하나의 깃을 떨어뜨리고 갔다. 신효거사가 그 깃을 잡아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았더니 사람들이 모두 축생이었다. 그러므로 고기를 얻지 못하고 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에게 올렸다. 후에 출가하여 그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았으니 지금의 효가원이다. 신효거사가 경주 경계로부터 하솔에 이르러 사람을 보니(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사람의 형상을 한 이가 많았다. 이로 인하여 머물러 살 뜻이 있었다. 길에서 늙은 부인을 만나 머물만한 곳을 물었더니 부인이 말하기를 ‘서쪽 고개를 지나 북쪽을 향한 골짜기가 살만합니다.’하는 말을 마치고 보이지 않았다. 신효거사가 관음의 가르침인 것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성오평을 지나 자장이 처음 띠 풀을 엮었던 곳으로 들어 가 머물렀다.
俄有五比丘到云 汝之持來袈裟一幅今何在? 士茫然 比丘云 汝所執見人之羽 是也 士乃出呈 比丘乃置羽於袈裟闕幅中相合 而非羽乃布也 士與五比丘別 後方知是五類聖衆化身也 此月精寺 慈藏初結茅 次信孝居士來住 次梵日門人信義頭陁來 創庵而住 後有水多寺長老有緣來住 而漸成大寺 寺之五類聖衆 九層石塔皆聖跡也 相地者云 國內名山 此地最勝 佛法長興之處云云
홀연히 다섯 비구가 이르러 말하기를 “네가 가지고 온 가사 한 폭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했다. 신효거사가 아득해 하였다. 비구가 말하기를 “네가 잡아 사람을 본 깃이 이것이다.”했다. 신효거사가 이에 내어 올렸다. 비구가 곧 깃을 가사의 빠진 폭에 두니 서로 부합하였는데 깃이 아니라 곧 베였다. 신효거사가 비구와 헤어진 후 비로소 이들이 5류성중의 화신임을 알았다. 이 월정사는 자장이 처음 띠풀을 엮었고, 다음으로 신효거사가 와 살았고, 다음으로 범일의 문인 신의두타가 와 암자를 창건하고 살았다. 후에 수다사 장로 유연이 와서 살았는데 점차 큰 절을 이루었다. 절의 5류성중, 9층석탑은 모두 성스러운 자취이다. 땅을 보는 자(지관)가 말하기를 “나라 안의 이름 있는 산 중에 이 땅이 가장 낫고, 불법이 길이 흥왕할 곳이다.”했다.
南月山(亦名甘山寺)
寺在京城東南二十許里 金堂主彌勒尊像火光後記云 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 重阿喰全忘誠 爲亡考仁章一吉干亡妃(妣)觀肖里夫人 敬造甘山寺一所石彌勒一軀 兼及愷元伊喰第(弟)懇誠小舍玄度師姊古巴里前妻古老里後妻阿好里 兼庶族及漠一吉喰一幢薩喰聰敏大舍妹首肹買等 同營玆善 亡妣肖里夫人 古人成之東海攸友邊散也(古人成之以下 文未詳其意 但存古文而已 下同)
남월산(또한 감산사라 이름 한다.)
절은 경성(신라 서울) 동남 쪽 20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금당주 미륵존상화광후기에 “개원 7년 기미 2월 15일 중아찬 전망성(김지성)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부인을 위하여 정성을 다해 감산사 한 곳과 석미륵 1구를 만들었다. 겸하여 개원 이찬과 동생 간성 소사, 현도 스님, 누이 고파리, 전처 고노리, 후처 아호리, 겸하여 서족 급막 일길찬, 일당 살찬, 총민대사, 누이 수힐매 등에 이르기까지 함께 이 선을 베풀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이 되자 동해유누변산야”라 했다.(고인성지 이하는 글은 그 뜻이 자세하지 않아 다만 옛 글을 적어둘 뿐이다. 아래도 같다.)
彌陁佛火光後記云 重阿喰金志全 曾以尙衣奉御 又執事侍郎 年六十七 致仕閑居 奉爲國主大王伊喰愷元亡考仁章一吉干亡妃亡弟小舍梁誠沙門玄度亡妻古路里亡妹古巴里 又爲妻阿好里等 捨甘山莊田建伽藍 仍造石彌陀一軀 奉爲亡考仁章一吉干 古人成云東海攸友邊散也(按帝系 金愷元乃太宗春秋之弟太子愷元角干也 乃文熙之所生也 誠志全乃仁章一吉干之子 東海攸反恐法敏葬東海也)
미타불화광후기에 이르기를 “중아찬 김지전은 일찍이 상의봉어와 또 집사시랑이었다. 나이 67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로이 살았다. 국주대왕, 이찬 개원, 죽은 아버지 인장 일길간, 죽은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 양성, 중 현도, 죽은 처 고로리, 죽은 여동생 고파리, 받들어 위하고 또 처 아호리 등을 위해 감산사 정전을 내어 가람(절)을 세웠다. 석미타 1구를 만들고, 죽은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받들어 위하였는데 돌아가시므로 동해유우변산”이라 했다.(제계를 살펴보면 김개원은 곧 태종 김춘추의 동생 태자 개원각간이니 곧 문희가 낳았다. 성지전은 곧 인장 일길간의 아들이다. 동해유반(우)은 아마도 법민을 동해에 장례한 것인 듯하다.)
天龍寺
東都南山之南 有一峯屹起 俗云高位山 山之陽有寺 俚云高寺 或云天龍寺討論三韓集云 雞林土內有客水二條逆水一條 其逆水客水二源 不鎭天災 則致天龍覆沒之災 俗傳云 逆水者 州之南馬等烏村南流川 是 又是水之源致天龍寺 中國來使樂鵬龜來見云 破此寺則國亡無日矣
동도(경주) 남산의 남쪽에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세속에서는 고위산이라 했다. 산의 남쪽에 절이 있는데 속칭 고사라 하고, 혹은 천룡사라 했다. 토론삼한집에 “계림 땅 안에 객수 두 줄기와 역수 한 줄기가 있다.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하늘의 재난을 진압하지 못하면(막지 못하면) 곧 천룡사가 뒤집혀 빠지는 재앙에 이른다.”했다. 세속에 전하기를 “역수는 주의 남쪽 마등오촌의 남쪽으로 흐르는 시내”라 한것이 이것이다. 또 이 물의 근원은 천룡사에 이른다.(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이다.) 중국에서 온 사신 악불귀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을 깨트리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날이 없다.(나라가 망할 것이다.)”했다.
又相傳云 昔有檀越 有二女 曰天女龍女 二親爲二女創寺因名之 境地異常助道之場 羅季殘破久矣 衆生寺大聖所乳崔殷諴之子承魯 魯生肅 肅生侍中齊顔 顔乃重修起廢 仍置釋迦萬日道場 受朝旨 兼有信書 願文留于寺 旣卒 爲護伽藍神 頗著靈異
또 서로 전해 말하기를 “옛날에 단월이 있었는데 두 딸이 있어 천녀, 용녀라 했다. 부모가 두 딸을 위해 절을 짓고 이로 인하여 이름 하였다.”했다. 땅이 보통과 다른 도를 돕는 도량(절)이었는데 신라 말에 파괴되어 오래되었다. 중생사 대성이 젖먹여 최은함의 아들은 최승노이고, 최승노는 최숙을 낳고, 최숙은 시중 최제안을 낳았다. 최제안이 곧 중수하여 폐한 것을 일으키고 석가 만일도량을 두고 조정의 명을 받았으며 겸하여 신서와 원문을 절에 남겨 두었다. 죽은 후 절을 지키는 신이 되었는데 자못 신령하고 기이한 일이 나타났다.
其信書略曰 檀越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柱國崔齊顔狀 東京高位山天龍寺殘破有年 弟子特爲聖壽天長民國安泰之願 殿堂廊閣房舍廚庫 已來興構畢具 石造泥塑佛聖數軀 開置釋迦萬日道場 旣爲國修營 官家差定主人亦可 然當遞換交代之時 道場僧衆不得安心 側觀入田 稠足寺院 如公山地藏寺入田二百結 毗瑟山道仙寺入田二十結 西京之四面山寺各田二十結例 皆勿論有職無職 須擇戒備才高者 社中衆望 連次住持焚修 以爲恒規 弟子聞風而悅 我此天龍寺 亦於社衆之中 擇選才德雙高大德兼爲棟梁 差主人鎭長焚修 具錄文字 付在剛司 自當時主人爲始 受留守官文通 示道場諸衆 各宜知悉 重熙九年六月日 具衘如前署 按 重熙乃契丹興宗年號 本朝靖宗七年庚辰歲也
그 신서를 대략적으로 말하면 “단월인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주국최제안이 쓴다. 동경 고위산의 천룡사가 쇠잔하여 깨트려진 것이 여러 해가 되었다. 제자가 특히 성수(임금의 수명)가 무강하시고 국가가 편안하고 태평하기를 원하여 전당, 낭각, 방사, 주고를 일으켜 엮기를 마침 후 돌과 진흙으로 불상 몇 구를 만들어 석가만일도량을 열었다. 이미 나라를 위하여 수리하였으므로 관가(관청)에서 주인을 정해 보내는 것이 또한 옳은 일이다. 그러나 (주지를)차례로 바꾸어 교대하는 때를 당하면 도량의 중들의 마음이 편안 할 수 없었다. (절에) 들인 밭으로 사원에 충족함을 보면 팔공산 지장사 같은 절은 들인 밭 200결이 있었고, 비슬산 도선사는 들인 밭이 20결이었다. 서경의 4면에 있는 산사들도 각각 20결씩 이었다. 모두 관직이 있고 없고를 논하지 않고 모름지기 계를 갖추고 재능 높은 자를 택하여 절의 무리들의 바람에 의하여 차례로 계속하여 주지로 삼아 분향 수도하게 하는 것으로서 항상된 규칙으로 삼아 왔다. 제자가 풍습을 듣고 기뻐하여 우리 이 천룡사에서도 또한 절의 무리 중에서 재주와 덕이 모두 뛰어난 고승으로 동량을 삼을 이를 뽑아 주지(주인)로 보내 길이 분향 수도하게 하려한다. 문자로 갖추어 모두 기록하여 강사에 맡겨두었다. 지금 맡고 있는 주인을 시작으로 삼아 유수관의 공문을 받아 절의 여러 무리들에게 보일 것이다. 각각 마땅히 모두 알아야 한다. 중희 9년 6월 일 갖추어 앞과 같이 서명한다. 했다. 살펴보니 중희는 곧 계단(거란) 흥종의 연호이니 본조(고려) 정종 7년 경진년이다.
鍪藏寺彌陁殿
京城之東北二十許里 暗谷村之北有鍪藏寺 第三十八元聖大王之考大阿干孝讓追封明德大王之爲叔父波珍喰追崇所創也 幽谷逈絶 類似削成 所寄冥奧 自生虛白 乃息心樂道之靈境也 寺之上方 有彌陁古殿 乃昭成(一作聖)大王之妃桂花王后爲大王先逝 中宮乃充充焉皇皇焉 哀戚之至 泣血棘心 思所以幽贊明休 光啓玄福者 聞西方有大聖曰彌陀 至誠歸仰 則善救來迎 是眞語者 豈欺我哉! 乃捨六衣之盛服 罄九府之貯財 召彼名匠 敎造彌陀像一軀 幷造神衆以安之
무장사 미타전
경성(서울, 경주)의 동북쪽 20리 쯤되는 암곡촌의 북쪽에 무장사가 있다. 제 38대 원성대왕의 아버지 대아간 효양 곧 추봉된 명덕대왕의 숙부되는 파진찬을 추모하여 창건하였다. 그윽한 골짜기는 멀고 끊어져 있어 마치 깍아 이룬 것과 같았다. 어둡고 깊숙함에 자리하여(차지하여) 저절로 마음이 순정하고 욕심이 없어지니 곧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기는 신령스러운 땅이다. 절의 위쪽으로 미타 옛 전각이 있다. 곧 소성(성이라 쓰기도 한다.)대왕의 왕비 계화왕후가 대왕이 먼저 죽자 중궁이 곧 근심이 가득하고 슬픔이 지극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심장이 가시에 찔린 듯했다. 그윽히 밝고 아름다운 일을 돕고 죽은 뒤에 저승에서 누릴 행복을 도울 것을 생각하였다. 서방에 대성이 있으니 미타(아미타)라 하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귀의하여 우러르면 곧 잘 구원해 맞이해 준다는 것을 들었다. “이것이 참된 말이니 어찌 나를 속이리오!”하고는 곧 육의(왕후가 입던 여섯가지 옷)의 성대한 옷을 버리고, 구부(아홉 개 관청)에 저장되어 있던 재물을 다 희사하고, 저 이름 있는 장인을 불러 미타상 1구를 만들게하고 아울러 신중을 만들어 안치하게 했다.
先是 寺有一老僧 忽夢眞人坐於石塔東南岡上 向西爲大衆說法 意謂此地必佛法所住也 心秘之而不向人說 嵓石巉崒 流澗邀迅 匠者不顧 咸謂不臧 及乎辟地 乃得平坦之地 可容堂宇 宛似神基 見者莫不愕然稱善 近古來殿則壞圮 而寺獨在 諺傳太宗統三已後 藏兵鍪於谷中 因名之
이에 앞서 절에 한 늙은 중이 있었는데 홀연히 꿈에 진인이 석탑의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 서쪽을 향해 대중을 위해 설법하고 있었다. 속으로 말하기를 “이 땅은 반드시 불법이 머물 곳이다.”하고는 마음에 그것을 숨기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곳은)바위가 험준하고 시내는 격렬하고 빠르게 흘러 장인이 돌아보지 않았으며, 모두 좋지 않다고 했다. 땅을 열게 됨에(땅을 닦음에) 이르러서는 곧 평탄한 땅을 얻어 당우(건물)를 수용할만하여(세울만하여) 완연히 신령한 터 같았다. 보는 자들이 깜짝 놀라며 좋다고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다. 멀지 않은 때에 전각은 무너지고 절만 홀로 있게 되었다. 세간에 전하는 말에 “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 무기와 투구를 골짜기 안에 감추었기 때문에 (무장사라) 이름 한 것이다.”했다.
伯嚴寺石塔舍利
開運三年丙午十月二十九日 康州界任道大監柱貼云 伯嚴禪寺坐草八縣(今草溪) 寺僧 偘遊上座 年三十九 云寺之經始則不知 但古傳云 前代新羅時 北宅廳基捨置玆寺 中間久廢 去丙寅年中 沙木谷陽孚和尙 改造住持 丁丑遷化 乙酉年曦陽山兢讓和尙 來住十年 又乙未年却返曦陽 時有神卓和尙 自南原白嵓藪 來入當院 如法住持
백엄사 석탑사리기
개운 3년 병오 10월 29일 강주계 임도대감 주첩에 이르기를 “백엄선사는 초팔현(지금의 초계)에 있다. 절의 중 간유 상좌는 나이가 39세이고, 절을 경영한 시작은 곧 알지 못한다.” 했다. 다만 고전에 이르기를 “전대 신라 때 북택청 터를 희사하여 이 절을 두었다. 중간에 오래 폐해졌다가 지난 병인년 중에 사목곡 양부화상이 고쳐짓고 주지하다 정축년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년에 희양산 긍양화상이 와서 10년을 머물다 또 을미년에 희양산으로 돌아갔다. 그 때 신탁화상이 남월 백암수에서 와 절에 들어 가 법과 같이 주지하였다.
又咸雍元年十一月 當院住持得奧微定大師釋秀立 定院中常規十條 新竪五層石塔 眞身佛舍利四十二粒安邀 以私財立寶 追年供養條 第一當寺護法敬僧嚴欣伯欣兩明神及近岳等三位前 立寶供養條(諺傳嚴欣伯欣二人 捨家爲寺 因名曰伯嚴 仍爲護法神) 金堂藥師前木鉢 月朔遞米條等 已下不錄
또 함옹 1년 11월 절의 주지 득오미정대사 석수립이 절의 상규 10조를 정하고 새로 5층석탑을 세우고 진신 불사리 42알을 맞아 안치하였다. 개인 재산으로 보를 세우고 해마다 공양할 일, 특히 절의 법을 지키던 경승 엄흔, 백흔 두 명신과 근악 등 3위 앞에 보를 세워 공양한 일(세속에 전하기를 ‘엄흔, 백흔 두 사람이 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았으므로 백엄사라 이름했으며, 호법신이 되었다고 한다.), 금당약사 앞 나무 주발에 매달 초하루에 쌀을 바꾸던 일 등을 정했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靈鷲寺
寺中古記云 新羅眞骨第三十一主神文王代 永淳二年癸未(本文云元年 誤) 宰相忠元公 萇山國(卽東萊縣 亦名萊山國)溫井沐浴 還城次 到屈井驛桐旨野駐歇 忽見一人放鷹而逐雉 雉飛過金岳 杳無蹤迹 聞鈴尋之 到屈井縣官北井邊 鷹坐樹上 雉在井中 水渾血色 雉開兩翅 抱二雛焉 鷹亦如相惻隱而不敢攫也 公見之惻然有感 卜問此地 云可立寺 歸京啓於王 移其縣於他所 創寺於其地 名靈鷲寺焉
영취사
절의 고기에 “신라 진골 제 31대 임금인 신문왕대인 영순 2년 계미년(본문에 1년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에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지금의 동래현이니 또한 내산국이라 이름한다.)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오던 길에 굴정역 동지야에 이르러 머물러 쉬고 있었다. 홀연히 한 사람이 매를 놓아 꿩을 쫓는 것을 보았다. 꿩이 날아 금악을 넘어 아득히 자취가 없었다. 방울소리를 듣고 찾아 굴정현 관청 북쪽 우물가에 이르니 매는 나무 위에 앉아있고, 꿩은 우물 안에 있었다. 물이 핏빛이었다. 꿩은 두 날개를 벌리고 두 새끼를 품고 있었다. 매 또한 불쌍하게 여겨서 감히 낚아채지 않고 있었다. 공이 그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있어 이 땅을 점쳐 물어보니 설을 세울만 하다고 했다. 서울에 돌아 가 왕에게 아뢰어 그 현의 관청을 다른 장소로 옮기고 그 땅에 절을 짓고 이름을 영취사라 했다.
有德寺
新羅大大角干崔有德 捨私第爲寺 以有德名之 遠孫三韓功臣崔彦撝 掛安眞影 仍有碑云
유덕사
신라 대대각간 최유덕이 개인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고 유덕으로서 이름하였다. 먼 후손인 삼한공신 최언위가 (최유덕의)진영을 걸어 안치하고, 비를 두었다.
五臺山文殊寺石塔記
庭畔石塔 盖新羅人所立也 制作雖淳朴不巧 然甚有靈響 不可勝記 就中一事 聞之諸古老云 昔 連谷縣人具船沿海而漁 忽見一塔隨逐舟楫 凡水族見其影者 皆逆散四走 以故漁人一無所得 不堪憤恚 尋影而至 盖此塔也 於是 共揮斤斫之而去 今此塔四隅皆缺者以此也 予驚嘆無已 然怪其置塔 稍東而不中
오대산 문수사 석탑기
뜰 가의 석탑은 대개 신라인이 세운 것이다. 제작이 비록 순박하여 공교롭지는 않으나 매우 신령스러운 울림이 있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안의 한 가지 일에 나아가 여러 노인에게서 들은 것을 말하면 “옛날 연곡현 사람이 배를 갖추어 바다 가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홀연히 한 탑이 배와 노를 따라오니 모든 수족(물고기)이 그 그림자를 보고는 모두 거스르고 흩어져 사방으로 달아났다. 때문에 물고기 잡는 사람이 하나도 얻은 바가 없어 분노하고 성내기를 견뎌내지 못하고 그림자를 찾아 이르니 이 탑이었다. 이에 도끼를 휘둘러 깨트리고 갔다. 지금 이 탑 사방 모퉁이가 모두 빠진(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했다. 내가 놀라 탄복하기를 그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탑을 둔 곳이 조금 동쪽으로 치우치고 중앙이 아닌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
於是仰見一懸板云 比丘處玄曾住此院 輒移置庭心 則二十餘年間寂無靈應 及日者求基抵此 乃嘆曰 ?是中庭地 非安塔之所 胡不移東乎?? 於是 衆僧乃悟 復移舊處 今所立者是也 余非好怪者 然見其佛之威神 其急於現迹利物如此 爲佛子者詎可黙而無言耶 時正豊元年丙子十月日 白雲子記
이에 쳐다보니 한 현판에 말하기를 “비구 처현이 일찍이 이 원에 살면서 문득 뜰 가운데로 옮겨 두었더니 20여 년간 신령스러운 흥함이 없었다. 일자(지관)가 터를 구하다 여기에 이르러 이에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뜰 가운데 당은 탑을 안치할 장소가 아닌데 어찌하여 동쪽으로 옮기지 않는가?’했다. 이에 여러 중들이 곧 깨닫고 다시 옛 장소로 옮겼다.”했다. 지금 세워져 있는 곳이 이것이다. 내가 괴이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나 그 부처의 위신이 자취를 나타내어 사물을 이롭게 함이 이처럼 급한 것(빠른 것)을 보고 불자 된 자로 잠잠히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으랴! 때는 정풍 1년 병자 10월 일 백운자가 기록한다.
三國遺事 卷第三(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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