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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1

by 최인표 2024. 1. 3.

三國史記 卷 第一 新羅本紀 第一

始祖赫居世居西干·南解次次雄·儒理尼師今·脫解尼師今·婆娑尼師今·祇摩尼師今·逸聖尼師今

始祖 赫居世居西干

 

始祖赫居世居西干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歲 岐嶷然夙成 六部人 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 或云呼貴人之稱

시조 혁거세거서간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1년 갑자(B.C.57) 4월 병진일(한편으로 정월 15일이라 한다.) 즉위하고 거서간이라 불렀다. 그 때 나이는 23세이다. 나라이름을 서나벌이라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았으니 하나는 알천 양산촌, 둘은 돌산 고허촌, 셋째는 자산 진지촌 혹은 간진촌, 넷째는 무산 대수촌,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이라 말한다. 이를 진한 6부라 한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에 올라 나정 옆 숲 사이를 바라보니 말이 꿇은 채 울고 있었다. 곧 가서 보니 갑자기 말이 보이지 않고 다만 커다란 알만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깨니 어린아이가 거기서 나왔다. 거두어 길렀다. 10여세에 이르니 재능과 지혜가 뛰어나고, 어린 나이에 노성함이 있었다. 6부 사람들이 그 태어남이 신이하였기 때문에 높여 대하고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 진나라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이라 하는데 처음 큰 알이 마치 표주박과 같았기 때문에 으로 성을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 말로 왕이다.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 한다.

 

四年 夏四月辛丑朔 日有食之

4(B.C.54) 여름 4월 신축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五年 春正月 龍見於閼英井 右脇誕生女兒 老嫗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名之 及長有德容 始祖聞之 納以爲妃 有賢行 能內輔 時人謂之二聖

5(B.C.53) 봄 정월에 용이 알영정에 나타났는데 오른 쪽 옆구리로 여자 아이를 낳으니 늙은 할머니가 보고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기르며 우물 이름으로서 이름을 지었다. 자라면서 덕과 용모가 있었다. 시조(혁거세)가 듣고 받아들여 왕비로 삼았는데 어진 행실이 있고 내조를 잘하니 그 때 사람들이 두 성인이라고 말하였다.

 

八年 倭人行兵 欲犯邊 聞始祖有神德 乃還

8(B.C.50) 왜인들이 군대로 변경을 침범하려다 시조에게 신이한 덕이 있다는 것을 듣고 곧 돌아갔다.

 

九年 春三月 有星孛于王良

9(B.C.49) 3월에 성패(혜성)가 왕랑에 있었다.

 

十四年 夏四月 有星孛于參

14(B.C.44) 여름 4월애 성패(혜성)(별이름)에 있었다.

 

十七年 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

17(B.C.41) 왕이 6부를 여러 곳에 돌아다니며 백성을 위로하였는데 왕비 알영이 여기에 따라다니며 농사를 권하고 독려하는 것으로서 땅의 이점을 다하게 하였다.

 

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

19(B.C.39) 봄 정월에 변한이 나라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是歲 高句麗始祖東明立

21(B.C.37)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 불렀다. 이 해 고구려 시조 동명이 즉위하였다.

 

二十四年 夏六月壬申晦 日有食之

24(B.C.34) 여름 6월 임신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六年 春正月 營宮室於金城

26(B.C.32) 봄 정월에 금성에 궁전을 지었다.

 

三十年 夏四月己亥晦 日有食之 樂浪人將兵來侵 見邊人夜戶不扃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不相盜 可謂有道之國 吾儕潛師而襲之 無異於盜 得不愧乎乃引還

30(B.C.28) 여름 4월 기해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 사람들이 군대를 이끌고 와 침범했다가 (서나벌)변경 사람들이 밤에 문을 닫지 않고, 곡식 낟가리가 들에 있는 것을 보고 서로 일러 말하기를 이 나라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으니 도가 있는 나라라 이를 만하다. 우리들이 몰래 군대를 가지고 엄습하는 것은 도둑과 다름이 없다. 부끄럽지 않은가?”하고는 곧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三十二年 秋八月乙卯晦 日有食之

32(B.C.26) 가을 8월 을묘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天時和 倉庾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寖 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38(B.C.20) 2월에 호공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내니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기를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이 되었는데 근년에 직공을 운반하지 않으니 사대의 예가 이 같은가?”했다. (호공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처음 흥기한 이래로 人事가 닦여지고 天時가 조화롭고 창고가 충실하며 백성들이 공경하고 사양하기 때문에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움을 품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우리 왕이 겸손히 저를 보내 교빙을 닦으라 하셨으니 예가 지나치다 이를 수 있음에도 대왕께서 크게 노하시어 군대로 겁을 주시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했다. 왕이 분노하여 죽이려 하니 좌우가 간하여 그만두고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앞서 중국 사람들로 나라가 어지러움을 괴롭게 여겨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는데 마한의 동쪽과 진한에 많이 정착하여 섞여 살았다. 이에 이르러 점차 번성해지자 마한이 꺼려서 이에 질책한 것이다. 호공은 그 씨족과 성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본래 왜인인데 처음 조롱박을 허리에 묶고 바다를 건너 왔으므로 호공이라 불렀다.

 

三十九年 馬韓王薨 或說上曰 西韓王前辱我使 今當其喪 征之其國 不足平也上曰 幸人之災 不仁也不從 乃遣使弔慰

39(B.C.19) 마한의 왕이 죽었다. 어떤 이가 임금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서한의 왕이 앞서 우리 사신을 욕되게 하였는데 지금 그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정벌하여 평정함은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인하지 않은 것이다.”하여 따르지 않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위로하였다.

 

四十年 百濟始祖溫祚立

40(B.C.18) 백제 시조 온조가 즉위하였다.

 

四十三年 春二月乙酉晦 日有食之

43(B.C.15) 2월 을유일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五十三年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匹 曰 寡君聞 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53(B.C.5) 동옥저 사신이 와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남쪽 한에 성인이 나왔다는 것을 듣고 저를 보내 드리게 하였습니다.”했다.

 

五十四年 春二月己酉 星孛于河鼓

54(B.C.4) 2월 기유일에 혜성이 하고에 있었다.

 

五十六年 春正月辛丑朔 日有食之

56(B.C.2) 봄 정월 신축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五十九年 秋九月戊申晦 日有食之

59(2) 가을 9월 무신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六十年 秋九月 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 震城南門

60(3) 가을 9월 두 용이 금성 우물 안에 나타났는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리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떨어졌다.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葬蛇陵 在曇巖寺北

61(4) 3월에 거서간이 돌아가시니 사릉에 장례하였는데 담암()사 북쪽에 있다.

 

南解次次雄 立 次次雄 或云慈充 金大問云 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 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爲慈充赫居世嫡子也 身長大 性沈厚 多智略 母閼英夫人 妃雲帝夫人 一云阿婁夫人 繼父卽位稱元

남해차차웅이 즉위하였다. ‘차차웅은 혹 자충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이 말하기를 방언에 (무당)’를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는데 마침내 존장자를 일컬어 慈充이라 한다.” 했다. 혁거세의 적자이다. 키가 크고 성품이 침착하고 심후하며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이고 왕비는 운제부인이라 하는데 한편으로 아루부인이라 한다.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올라 원년(1)을 일컬었다.

 

論曰 人君卽位 踰年稱元 其法詳於春秋 此先王不刊之典也 伊訓曰 成湯旣沒 太甲元年正義曰 成湯旣沒 其歲卽太甲元年然孟子曰 湯崩 太丁未立 外丙二年 仲壬四年則疑若尙書之脫簡 而正義之誤說也 或曰 古者 人君卽位 或踰月稱元年 或踰年而稱元年踰月而稱元年者 成湯旣沒太甲元年 是也

논하여 말한다. 임금이 즉위하면 해를 넘겨 원년(1)이라 말하는 것은 그 법이 춘추에 자세한데 이는 선왕의 고치지 말아야할 법이다. 서경이훈 편에 말하기를 성탕이 돌아가셨으므로 태갑 원년(1)이라 했다.”했고, 정의에 말하기를 성탕이 돌아가신 그 해가 곧 태갑 원년(1)이다.”했다. 그러나 맹자탕 임금이 죽고 태정은 즉위하지 못하고 죽고, 외병은 즉위한 지 2년에 죽고, 중임은 즉위한 지 4년에 죽었다.”했으니 곧 아마도 상서에는 탈락이 있는 듯하여 정의에 잘못 설명한 듯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임금이 즉위하면 혹 달을 넘겨 원년(1)을 일컬거나, 혹은 해를 넘겨 원년(1)을 일컬었다.”했다. 달을 넘겨 원년(1)을 일컬은 것은 성탕이 죽은 후 태갑 원년(1)이라 한 것이 이것이다.

맹자에 말하기를 “‘太丁未立은 태정은 즉위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外丙二年仲壬四年은 모두 태정의 아들로 태갑의 두 형인데 혹은 2년을 살고, 혹은 4년을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태갑이 탕왕을 이을 수 있었을 뿐이다.”했으니 사기에 문득 말한 이 중임과 외병을 두 임금이다.” 한 것은 잘못이다. 앞을 말미암으면 곧 앞의 임금이 죽은 해에 즉위하여 원년(1)을 일컳는 것이니 옳음이 아니며, 뒤를 말미암으면 곧 상나라 사람들이 예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 圍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棄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鄰國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妄以兵來 天必不祐 不足畏也賊俄而退歸

1(4) 가을 7월에 낙랑의 군대가 이르러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니 왕이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두 성인이 나라를 버리고 내가 나라 사람의 추대로 잘못 왕위에 올라 위태롭기가 개울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와서 침범하니 이는 나의 덕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했다. 좌우가 대답해 말하기를 적이 우리에게 상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겨 망녕되이 군대를 보냈으니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했다. 적이 갑자기 물러나 돌아갔다.

 

三年 春正月 立始祖廟 冬十月丙辰朔 日有食之

3(6) 봄 정월에 시조묘를 세웠다. 겨울 10월 병진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五年 春正月 王聞脫解之賢 以長女妻之

5(8) 봄 정월에 왕이 탈해가 현명하다는 것을 듣고 장녀(맏딸)를 시집보냈다.

 

七年 秋七月 以脫解爲大輔 委以軍國政事

7(10) 가을 7월 탈해를 대보로 삼고 군국의 정사를 맡겼다.

 

八年 春夏旱

8(11) 봄 여름에 가물었다.

 

十一年 倭人遣兵船百餘艘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以禦之 樂浪謂內虛 來攻金城 甚急 夜有流星 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六部兵一千人追之 自吐含山東至閼川 見石堆 知賊衆乃止

11(14) 왜인이 군대와 배 백여척을 보내 바닷가 백성들을 약탈하니 6부의 굳세고 강한 군대를 내어 막았다. 낙랑이 안이 비었다 말하며 와서 금성을 쳤는데 매우 급하게 하였다. 밤에 유성이 있어 적의 진영에 떨어지니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알천의 위에 주둔하고 돌무더기 20개를 만들어 놓고 갔다. 6부의 군대 일 천명이 추격하여 토함산 동쪽으로부터 알천에 이르러 돌무더기를 보고는 적이 많다는 것을 알고 이에 그만두었다.

 

十三年 秋七月戊子晦 日有食之

13(16) 가을 7월 무자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十五年 京城旱 秋七月 蝗 民饑 發倉廩救之

15(18) 경성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에 누리의 재해가 있어 백성이 즈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十六年 春二月 北溟人耕田 得濊王印獻之

16(19) 2월에 북병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 인을 얻어 바쳤다.

 

十九年 大疫 人多死 冬十一月 無氷

19(22) 큰 질병이 돌아 사람이 많이 죽었다. 겨울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二十年 秋 太白入太微

20(23) 가을 태백성이 태미성에 들어갔다.

 

二十一年 秋九月 蝗 王薨 葬蛇陵園內

21(24) 가을 9월에 누리의 재난이 있었다. 왕이 돌아가시므로 사릉원 안에 장례하였다.

 

儒理尼師今 立 南解太子也 母雲帝夫人 妃日知葛文王之女也 或云妃姓朴 許婁王之女 初南解薨 儒理當立 以大輔脫解 素有德望 推讓其位 脫解曰 神器大寶 非庸人所堪 吾聞聖智人多齒 試以餠噬之儒理齒理多 乃與左右奉立之 號尼師今 古傳如此 金大問則云 尼師今方言也 謂齒理 昔南解將死 謂男儒理·壻脫解曰 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而嗣位焉其後 金姓亦興 三姓以齒長相嗣 故稱尼師今

유리 니사금이 즉위했다. 남해차차웅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고, 왕비는 일지갈문왕의 딸이다. 혹 왕비의 성은 박씨로 허루왕의 딸이라 한다. 처음 남해차차웅이 죽고 유리가 마땅히 즉위해야 하는데 대보 탈해가 평소 덕망이 있다하여 그 자리(왕의 자리)를 사양하였다. 탈해가 말하기를 신시대보(왕은)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내가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무는 것으로서 시험해 보자했다. 유리가 잇금이 많자 좌우가 받들어 즉위시키고 니사금이라 불렀다. 옛 전함이 이와 같다. 김대문이 곧 말하기를 니사금은 방언이다. 齒理(잇금)란 말은 옛날 남해 차차웅이 장차 죽으려할 때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 너희 박, 석 두 성 중에서 나이가 많은 이로서 왕위를 잇게 하라.’했다. 그 후 김씨 성이 또한 흥기하여 세 성 중에서 나이가 많은 이가 서로 이었다. 그러므로 니사금이라 말했다. 한다.”했다.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大赦

2(25) 2월에 직접 시조묘에서 제사하고 크게 풀어주었다.

 

五年 冬十一月 王巡行國內 見一老嫗飢凍將死曰 予以眇身居上 不能養民 使老幼至於此極 是予之罪也解衣以覆之 推食以食之 仍命有司 在處存問 鰥寡孤獨 老病不能自活者 給養之 於是 鄰國百姓 聞而來者衆矣 是年 民俗歡康 始製兜率歌 此歌樂之始也

5(28) 겨울 11월 왕이 나라 안을 순행하다 한 늙은 할머니가 주리고 얼어 죽으려 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보잘 것 없는 몸으로 윗자리에 있으면서 백성을 봉양하지 못하여 늙은이와 어린애로 하여금 이러한 극한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하고는 옷을 벗어 덮어주고 음식을 먹였다. 이어 담당 관청에 명하여 곳곳에 있는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늙은이와 늙고 병들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를 위문하고 곡식을 주어 부양하게 하였다. 이에 이웃 나라 백성들이 듣고 온 자가 많았다. 이 해 백성의 풍속이 즐겁고 편안하여 처음 도솔가를 지었다. 이것이 노래와 음악의 시작이다.

 

九年 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部爲漸梁部 一云牟梁 姓孫 干珍部爲本彼部 姓鄭 加利部爲漢祇部 姓裴 明活部爲習比部 姓薛 又設官有十七等 一伊伐湌 二伊尺湌 三迊湌 四波珍湌 五大阿湌 六阿湌 七一吉湌 八沙湌 九級伐湌 十大奈麻 十一奈麻 十二大舍 十三小舍 十四吉士 十五大烏 十六小烏 十七造位 王旣定六部 中分爲二 使王女二人 各率部內女子 分朋造黨 自秋七月旣望 每日早集大部之庭績麻 乙夜而罷 至八月十五日 考其功之多小 負者置酒食 以謝勝者 於是 歌舞百戲 皆作 謂之嘉俳 是時 負家一女子 起舞嘆曰 會蘇 會蘇其音哀雅 後人因其聲而作歌 名會蘇曲

9(32)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그대로 성을 내렸다. 양산부는 양부, 성을 이씨로 하였다. 고허부는 사량부라 하고 성을 최씨라 하였다. 대수부는 점량부, 한편으로는 모량이라 하고, 성은 손씨라 하였다. 감진부는 본피부라 하고 성은 정씨라 하였다. 가리부는 한기부라 하고 성은 배씨라 하였다. 명활부는 습비부라 하고, 성은 설씨라 하였다. 또 관을 설치하였는데 17등급이 있었다. 첫째는 이벌찬, 둘째는 이척찬, 셋째는 잡찬, 넷째는 파진찬, 다섯째는 대아찬, 여섯째는 아찬, 일곱째는 일길찬, 여덟째는 사찬, 아홉째는 급벌찬, 열째는 대나마, 열한째는 나(), 열둘째는 대사, 열세째는 소사, 열네째는 길사, 열다섯째는 대오, 열여섯째는 소오, 열일곱째는 조위이다. 왕이 6부를 정한 뒤 이들을 둘로 나누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 안의 여자들을 통솔하여 무리를 나누어 편을 만들어 가을 7월 기망(16)부터 매일 일찍 대부의 들에 모여 길쌈하는데 을야(오후 9~11)에 그쳤다. 815일에 이르러 그 일의 많고 적음을 조사하여 진편은 술과 음식을 내는 것으로서 이긴 편에 사례하였다. 이에 노래와 춤, 온갖 놀이를 모두 하였는데 이를 가배라 일렀다. 이 때 진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해 말하기를 회소, 회소하였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도 아름다워 후세 사람들이 그 소리로 인하여 노래를 지어 회소곡이라 이름하였다.

 

十一年 京都 地裂泉湧 夏六月 大水

11(34) 경도(서울:경주)에 땅이 갈라지고 샘이 솟았다. 여름 6월에 큰물이 졌다.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13(36) 가을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쳐 함락시켰다.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14(37) 고구려왕 무휼(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낙랑) 사람 오천이 외서 투항함으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17(40) 가을 9월에 화려, 불내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무의하여 기별을 통솔하여 북쪽 변경을 침범하니 맥국의 우두머리가 군대로 곡하 서쪽에서 막아 무너뜨렸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十九年 秋八月 貊帥獵得禽獸獻之

19(42) 가을 8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하여 잡은 짐승을 바쳤다.

 

三十一年 春二月 星孛于紫宮

31(54) 2월에 혜성이 자궁(별자리)에 나타났다.

 

三十三年 夏四月 龍見金城井 有頃 暴雨自西北來 五月 大風拔木

33(56) 여름 4월에 용이 금성의 우물에 나타나고 잠시 후 사나운 비가 서북쪽으로부터 왔다. 5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三十四年 秋九月 王不豫 謂臣寮曰 脫解身聯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遠矣 吾死之後 俾卽大位 以無忘我遺訓冬十月 王薨 葬蛇陵園內

34(57) 가을 9월에 왕이 병이 들자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탈해는 몸이 나라의 인척과 연관이 있고, 지위는 보필하는 신하에 처하여(재상이 되어) 여러 번 공과 이름이 들어났다. 짐의 두 아들은 그 재능이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 대위(왕위)에 오르게 하는 것으로서 내가 남기 기르침을 잊지 말라.”했다. 겨울 10월에 왕이 돌아가시므로 사릉원 안에 장례하였다.

 

脫解尼師今 立 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其國王 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不祥也 宜棄之其女不忍 以帛裹卵 並寶物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不取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 在位三十九年也 時海邊老母 以繩引繫海岸 開櫝見之 有一小兒在焉 其母取養之 及壯身 長九尺 風神秀朗 知識過人 或曰 此兒不知姓氏 初櫝來時 有一鵲飛鳴而隨之 宜省鵲字 以昔爲氏 又解韞櫝而出 宜名脫解脫解始以漁釣爲業 供養其母 未嘗有懈色 母謂曰 汝非常人 骨相殊異 宜從學 以立功名於是 專精學問 兼知地理 望楊山下瓠公宅 以爲吉地 設詭計 以取而居之 其地後爲月城 至南解王五年 聞其賢 以其女妻之 至七年 登庸爲大輔 委以政事 儒理將死曰 先王顧命曰 吾死後 無論子壻 以年長且賢者 繼位是以寡人先立 今也宜傳其位焉

탈해 니사금이 즉위하였다. 한편으로 토해라 말한다. 이 때 나이는 62세로 성은 석씨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에서 동북쪽 천리에 있다. 처음 그 나라 왕이 여국 왕의 딸에게 장가들어 처로 삼았는데 인심한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그를 버리는 것이 마당하다.”했다. 그 여자가 차마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 안에 두고 바다에 띄워 그 가는 바에 맡겼다. 처음 금관국 바닷가에 이르자 금관국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않았다. 또 진한 아진포구에 이르렀다. 이때는 시조혁거세가 왕위에 있은 지 39년째였다. 그 때 바닷가의 노모가 노끈으로 당겨 바닷가에 매어두고 궤를 열어 보니 한 어린아이가 거기에 있었다. 그 어미가 취하여 길렀다. 장성함에 이르러 키가 9자이고 모습이 빼어나고 맑으며 지식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알지 못하는데 처음 궤가 왔을 때 한 까치가 날아와 울며 따랐으니 자를 생략하여 으로 를 삼는 것이 마땅하다. 또 궤에 들어 있다가 열고 나왔으니 脫解라 이름하는 것이 마당하다.”했다. 탈해가 처음에 물고기를 잡는 것으로서 생업을 삼아 그 어미를 봉양하였는데 일찍이 게을리하는 기색이 있지 않았다. 어미가 일러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골상이 다르니 마땅히 학문에 종사하여 공과 이름을 세워야 한다.”했다. 이에 학문에 전념하고 겸하여 지리도 알았다. 양산 아래 호공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로 여겨 속이는 계책을 써서 취하여 살았다. 그 땅은 후에 월성이 되었다. 남해왕 5년에 이르러 그가 현명하다는 것을 듣고 그 딸를 시집보냈다. 7년에 이르러 등용하여 대보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가 장차 죽으로 할 때 말하기를 돌아가신 왕(남해차차웅)이 남긴 명에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 아들과 사위를 논하지 말고 나이가 많고, 또한 현명한 자로서 왕위를 잇게 하라했기 때문에 내가 먼저 즉위한 것이다. 지금은 마땅히 그에게 왕위를 전해야 한다.”했다.

 

二年 春正月 拜瓠公爲大輔 二月 親祀始祖廟

2(58) 봄 정월에 호공에게 벼슬을 주어 대보로 삼고, 2월에 직접 시조묘에 제사하였다.

 

三年 春三月 王登吐含山 有玄雲如蓋 浮王頭上 良久而散 夏五月 與倭國結好交聘 六月 有星孛于天船

3(59) 3월 왕이 토함산에 올랐는데 검은 구름이 뚜껑처럼 덮인 것이 있었는데 왕의 머리 위에 떠 있다가 오래 있은 후 흩어졌다. 여름 5월 왜국과 우호를 맺고 사신이 오고 갔다. 6월에 혜성이 천선 별에 있었다.

 

五年 秋八月 馬韓將孟召 以覆巖城降

5(61) 가을 8월 마한의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七年 冬十月 百濟王拓地 至娘子谷城 遣使請會 王不行

7(63) 겨울 10월 백제왕이 당을 개척하여 낭자곡성에 이르러 사자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다. 왕이 가지 않았다.

 

八年 秋八月 百濟遣兵 攻蛙山城 冬十月 又攻狗壤城 王遣騎二千 擊走之 十二月 地震 無雪

8(64) 가을 8월 백제가 군대를 보내 와산성을 쳤다. 겨울 10월에 또 구양성을 치므로 왕이 기병 2천을 보내 치니 달아났다. 12월에 땅이 흔들렸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九年 春三月 王夜聞 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 掛樹枝 白雞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奇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乃收養之 及長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改始林名雞林 因以爲國號

9(65) 3월에 왕이 밤에 들으니 금성 서쪽 시림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있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 보게 하였더니 금색의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가 고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다 열게 하였더니 어린 남자 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용모가 뛰어나게 좋고 훌륭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보낸 아들이 아니겠는가?”하고는 곧 거두어 길렀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에 이름을 알지라 하였다. 금 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 하고, 시림의 이름을 고쳐 계림이라 하고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十年 百濟攻取蛙山城 留二百人居守 尋取之

10(66) 백제가 와산성을 쳐서 빼앗고 200명을 남겨 지키게 하였는데 곧 빼앗았다.

 

十一年 春正月 以朴氏貴戚 分理國內州郡 號爲州主·郡主 二月 以順貞爲伊伐湌 委以政事

11(67) 봄 정월 박씨 귀척으로서 나라 안 주와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이름을 주주, 군주라 하였다. 2월에 순정으로서 이벌찬을 삼고 정사를 맡겼다.

 

十四年 百濟來侵

14(70) 백제가 와서 침범하였다.

 

十七年 倭人侵木出島 王遣角干羽烏禦之 不克 羽烏死之

17(73) 왜인들이 목출도를 침범하니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지키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가 죽었다.

 

十八年 秋八月 百濟寇邊 遣兵拒之

18(74) 가을 8월에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니 군대를 보내 막았다.

 

十九年 大旱 民饑 發倉賑給 冬十月 百濟攻西鄙蛙山城 拔之

19(75) 크게 가물어 백성이 주리니 창고를 열어 곡식을 주어 구휼하였다. 겨울 10월에 백제가 서쪽 시골 와산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二十年 秋九月 遣兵伐百濟 復取蛙山城 自百濟來居者二百餘人 盡殺之

20(76) 가을 9월 군대를 보내 백제를 정벌하고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백제에서 와 살고 있던 200여명을 모두 죽였다.

 

二十一年 秋八月 阿湌吉門與加耶兵 戰於黃山津口 獲一千餘級 以吉門爲波珍湌 賞功也

21(77) 가을 8월에 아찬 길문과 가야 군대가 황산 나루 입구에서 싸워 1천여명의 머리를 얻었으므로 길문을 파진찬으로 삼고 공을 상주었다.

 

二十三年 春二月 慧星見東方 又見北方 二十日乃滅

23(79) 2월에 혜성이 동쪽에 보였고, 또 북쪽에도 보였는데 20일만에 사라졌다.

 

二十四年 夏四月 京都大風 金城東門自壞 秋八月 王薨 葬城北壤井丘

24(80) 여름 4월에 경도(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의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시므로 성 북쪽 양정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婆娑尼師今 立 儒理王第二子也 或云儒理弟奈老之子也 妃金氏史省夫人 許婁葛文王之女也 初脫解薨 臣僚欲立儒理太子逸聖 或謂 逸聖雖嫡嗣 而威明不及婆娑遂立之 婆娑節儉省用而愛民 國人嘉之

파사니사금이 즉위하였다.(80)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다. 혹은 유리왕의 동생 나로의 아들이라 한다. 왕비는 김씨 사성부인으로 허루갈문왕의 딸이다. 처음 탈해왕이 죽었을 때 신하들이 유리왕의 태자 일성을 세우고자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일성이 비록 맏아들이나 위엄과 밝음이 파사에게 미치지 못한다.”했다. 마침내 즉위하였다. 파사가 절약하고 검소하고, 백성을 사랑하니 나라사람들이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三月 巡撫州郡 發倉賑給 慮獄囚 非二罪悉原之

2(81) 2월에 직접 시조묘에서 제사하였다. 3월에 주와 군을 돌아다니며 위문하고 창고를 열어 곡식을 주어 구휼하고, 옥에 갇힌 죄수들의 실정을 살펴 두 가지 죽일 죄가 아니면 모두 풀어주었다.

 

三年 春正月 下令曰 今倉廩空匱 戎器頑鈍 儻有水旱之災 邊鄙之警 其何以禦之 宜令有司 勸農桑 練兵革以備不虞

3(82) 봄 정월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지금 창고가 비고, 무기가 무디어졌으니 갑자기 홍수와 가뭄의 재해와 외딴 시골지방의 경계가 있다면 어떻게 막을 것인가? 마땅히 담당관청으로 하여금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하고 무기를 벼리는 것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일에 대비하라.”했다.

 

五年 春二月 以明宣爲伊湌 允良爲波珍湌 夏五月 古陁郡主獻靑牛 南新縣麥連歧 大有年 行者不䝴糧

5(84) 2월에 명선으로서 이찬을 삼고, 윤량을 파진찬으로 삼았다. 여름 5월에 고타군주가 푸른 소를 바쳤다. 남신현에서 보리 줄기 하나에 이삭이 여러개였다. 큰 풍년이 들어 길을 가는 자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六年 春正月 百濟犯邊 二月 以吉元爲阿湌 夏四月 客星入紫微

6(85) 봄 정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2월에 길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객성이 자미에 들어 갔다.

 

八年 秋七月 下令曰 朕以不德 有此國家 西鄰百濟 南接加耶 德不能綏 威不足畏 宜繕葺城壘 以待侵軼是月 築加召·馬頭二城

8(87) 가을 7월에 명을 내려 말하기를 짐이 부덕함에도 이 나라를 소유하였다. 서쪽으로는 백제를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하였다. 덕으로는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으로는 두렵게 하지 못하니 마땅히 성과 보루를 수선하는 것으로서 침범에 대비하라.” 했다. 이 달에 가소성, 마두 두 성을 쌓았다.

 

十一年 秋七月 分遣使十人 廉察州郡主 不勤公事 致田野多荒者 貶黜之

11(90) 가을 7월 사자 10명을 나누어 보내 주·군의 관리를 살펴보고 공적인 일에 부지런하지 않거나, 토지를 많이 황폐하게 만든 자를 내쫒았다.

 

十四年 春正月 拜允良爲伊湌 啓其爲波珍湌 二月 巡幸古所夫里郡 親問高年賜穀 冬十月 京都地震

14(93) 좀 정월 윤랑에게 벼슬을 주어 이찬으로 삼고, 계기를 파진찬으로 삼았다. 2월에 고소부리군을 순행하고 직접 나이 많은 이를 위문하고 곡식을 내렸다. 겨울 10월 경도에서 땅이 흔들였다.

 

十五年 春二月 加耶賊圍馬頭城 遣阿湌吉元 將騎一千擊走之 秋八月 閱兵於閼川

15(94) 2월에 가야의 도적이 마두성을 포위하므로 아찬 길원을 보내 기병 1천을 거느리고 치니 달아났다. 가을 8월에 알천에서 열병하였다.

 

十七年 秋七月 暴風自南 拔金城南大樹 九月 加耶人襲南鄙 遣加城主長世拒之 爲賊所殺 王怒率勇士五千 出戰敗之 虜獲甚多

17(96) 가을 7월에 사나운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금성 남쪽 큰 나무가 뽑혔다. 9월에 가야 사람이 남쪽 시골을 습격하니 성주 장세를 보내 막았으나 적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왕이 노하여 용감한 군사 5천을 통솔하여 나가 싸워 무너뜨렸는데 사로잡은 이가 매우 많았다.

 

十八年 春正月 擧兵欲伐加耶 其國主遣使請 罪 乃止

18(97) 봄 정월에 군대를 일으켜 가야를 치려다 그 나라 임금이 사자를 보내 죄를 청하므로(인정하므로) 이에 그쳤다.

 

十九年 夏四月 京都旱

19(98) 여름 4월 경도(서울)이 가물었다.

 

二十一年 秋七月 雨雹 飛鳥死 冬十月 京都地震 倒民屋有死者

21(100) 가을 7월 우박이 내렸는데 날아가던 새가 (맞아)죽었다. 겨울 10월에 경도(서울)의 땅이 흔들려 백성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자가 있었다.

 

二十二年 春二月 築城名月城 秋七月 王移居月城

22(101) 2월 성을 쌓고 이름을 월성이라 했다.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 갔다.

 

二十三年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 謂金官國首露王 年老多智識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部皆以伊湌爲主 唯漢祇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 殺漢祇部主保齊而歸 奴逃依音汁伐主陁鄒干家 王使人索其奴 陁鄒不送 王怒 以兵伐音汁伐國 其主與衆自降 悉直·押督二國王來降 冬十月 桃李華

23(102) 가을 8월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경계를 다투다 왕을 뵙고 결단을 청하였다. 왕이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의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하고는 불러 물었다. 수로왕이 의논하여 다투던 바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왕을 대접하는 모임에 모이게 하였다. 5부는 모두 이찬으로서 주인을 삼았는데 오직 한기부만은 지위가 낮은 자로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왕이 노하여 종 탐하리로 하여금 한기부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그 종이 달아나 음즙벌국 우두머리 타추간 집에 의지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게 하였다. 타추가 보내지 않으니 왕이 노하여 군대로 음즙벌국을 치게 하였더니 그 우두머리와 무리들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 압독 두 나라 임금이 와서 항복하였다. 겨울 2월에 복숭아, 오얏 꽃이 피었다.

 

二十五年 春正月 衆星隕如雨 不至地 秋七月 悉直叛 發兵討平之 徙其餘衆於南鄙

25(104) 봄 정월에 뭇별이 비 오듯이 떨어졌으나 땅에 이르지는 않았다. 가을 7월에 실직국이 배반하므로 군대를 내어 쳐서 평정하고 그 남은 무리들을 남쪽 시골로 옮겼다.

 

二十六年 春正月 百濟遣使請和 二月 京都雪三尺

26(105) 봄 정월 백제가 사자를 보내 화평을 청하였다. 2월에 경도(서울)에 눈이 세 자나 쌓였다.

 

二十七年 春正月 幸押督賑貧窮 三月 至自押督 秋八月 命馬頭城主 伐加耶

27(106) 봄 정월 왕이 압독에 가 가난한 이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3월에 압독에서 돌아왔다. 가을 8월에 마두성주에게 명하여 가야를 치게 하였다.

 

二十九年 夏五月 大水 民飢 發使十道 開倉賑給 遣兵伐比只國·多伐國·草八國幷之

29(108) 여름 5월에 큰물이 지고 백성들이 주리자 사자를 사방으로 보내 창고를 열고 곡식을 주어 구휼하였다. 군대를 보내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쳐서 병합하였다.

 

三十年 秋七月 蝗害穀 王遍祭山川 以祈禳之 蝗滅 有年

30(109) 가을 7월에 누리 떼가 곡식을 해치니 왕이 두루 산천에 제사하고, 기도하였더니 누리 떼가 사라지고 풍년이 들었다.

 

三十二年 夏四月 城門自毁 自五月至秋七月 不雨

32(111) 여름 4월 성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5월부터 가을 7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三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蛇陵園內

33(112) 겨울 10월에 왕이 돌아가시므로 사릉원 안에 장례하였다.

 

祇摩尼師今 立 或云祇味 婆娑王嫡子 母史省夫人 妃金氏愛禮夫人 葛文王摩帝之女也 初婆娑王獵於楡湌之澤 太子從焉 獵後 過韓歧部 伊湌許婁饗之 酒酣 許婁之妻 携少女子出舞 摩帝伊湌之妻 亦引出其女 太子見而悅之 許婁不悅 王謂許婁曰 此地名大庖 公於此 置盛饌美醞 以宴衎之 宜位酒多 在伊湌之上以摩帝之女 配太子焉 酒多後云角干

지마니사금이 즉위하였다(112).(혹은 지미라 한다.) 파사왕의 맏아들이이고, 어머니는 사성부인이다. 왕비는 김씨로 애례부인인데 갈문왕 마제의 딸이다. 처음 파사왕이 유찬의 늪에서 사냥할 때 태자가 따라갔다. 사냥 후 한기부를 지날 때 이찬 허루가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얼큰해졌을 때 허루의 처가 어린여자를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 마제 이찬의 처가 또한 그 딸을 이끌고 나오니 태자가 보고 기뻐하였다. 허루는 기뻐하지 않았다. 왕이 허루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땅의 이름이 대포인데 공이 여기에 훌률한 음식과 맛있는 술을 내어 연회를 열고 즐기게 하였으니 마땅히 주다의 자리를 주어 이찬의 위에 있게 하겠다.”했다. 마제의 딸로서 태자의 짝을 삼게 하였다. 주다는 후에 각간이라 불려졌다.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拜昌永爲伊湌 以參政事 玉權爲波珍湌 申權爲一吉湌 順宣爲級湌 三月 百濟遣使來聘

2(113) 직접 시조묘에 제사하고, 창영에게 벼슬을 주어 이찬으로 삼아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옥권을 파진찬, 신권을 일길찬, 순선을 급찬으로 삼았다. 3월에 백제가 사자를 보내 선물을 가지고 방문하였다.

 

三年 春三月 雨雹 麥苗傷 夏四月 大水 慮囚 除死罪 餘悉原之

3(11) 3월에 우박이 내려 보리 싹을 해쳤다. 여름 4월에 큰물이 졌는데 죄수를 헤아려 죽을 죄(사형 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었다.

 

四年 春二月 加耶寇南邊 秋七月 親征加耶 帥步騎度黃山河 加耶人伏兵林薄以待之 王不覺直前 伏發圍數重 王揮軍奮擊 決圍而退

4(115) 2월에 가야가 남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직접 가야를 정벌하려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를 건넜다. 가야 사람들이 군대를 무성한 숲 속에 숨기고 기다렸다. 왕이 깨닫지 못하고 똑바로 나아가니 복병이 일어나 여러겹 포위하였다. 왕이 군대를 지휘하여 떨쳐 치면서 포위를 뚫고 물러났다.

 

五年 秋八月 遣將侵加耶 王帥精兵一萬以繼之 加耶嬰城固守 會久雨 乃還

5(116) 가을 8월에 장군을 보내 가야를 침범하게 하고 왕이 정예군대 일만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가야가 영성을 굳게 지키고, 오래 동안 내리는 비를 만나자 이에 돌아왔다.

 

九年 春二月 大星墜月城西 聲如雷 三月 京都大疫

9(120) 2월에 큰 별이 월성 서쪽에 떨어졌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4월에 경도(서울)에 큰 전염병이 있었다.

 

十年 春正月 以翌宗爲伊湌 昕連爲波珍湌 林權爲阿湌 二月 築大甑山城 夏四月 倭人侵東邊

10(121) 봄 정월에 익종을 이찬, 흔련을 파진찬, 임권을 아찬으로 삼았다. 2월에 대증산성을 쌓았다. 여름 4월에 왜인들이 동쪽 변경을 침범했다.

 

十一年 夏四月 大風東來 折木飛瓦 至夕而止 都人訛言 倭兵大來爭遁山谷 王命伊湌翌宗等諭止之 秋七月 飛蝗害穀 年饑多盜

11(122) 여름 4월에 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 와 나무를 꺽고 기와를 날렸는데 저녁에 이르러 그쳤다. 도읍의 사람들이 말을 퍼트리기를 왜의 군대가 크게 온다.”하니 다투어 산과 골짜기로 숨었다. 왕이 이찬 익종 등으로 하여금 깨우쳐 그치게 하였다,

 

十二年 春三月 與倭國講和 夏四月 隕霜 五月 金城東民屋 陷爲池芙蕖生

12(123) 3월에 왜국과 강화하였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5월에 금성 동쪽 백성들의 집이 빠져 못이 되었고, 연꽃이 났다.

 

十三年 秋九月庚申晦 日有食之

13(124) 가을 9월 경신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十四年 春正月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王移書百濟請救 百濟遣五將軍助之 賊聞而退

14(125) 봄 정월 말갈이 크게 북쪽 경계에 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또 대령책을 습격하고, 니하를 건너니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돕게 하니 적이 듣고 물러났다.

 

十六年 秋七月甲戌朔 日有食之

16(127) 가을 7월 갑술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十七年 秋八月 長星竟天 冬十月 國東地震 十一月 雷

17(128) 가을 8월에 장성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겨울 10월 나라동쪽에 땅이 흔들렸고, 11월에 우레가 울렸다.

 

十八年 伊湌昌永卒 以波珍湌玉權爲伊湌 以參政事

18(129) 이찬 창영이 죽었다. 파진찬 옥권을 이찬으로 삼아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二十年 夏五月 大雨 漂沒民戶

20(131) 여름 5월에 큰 비가 내려 백성의 집들이 떠다니고 잠겼다.

 

二十一年 春二月 宮南門災

21(132) 2월에 군 남쪽 문에 불이 났다.

 

二十三年 春夏旱 秋八月 王薨 無子

23(134)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다.

 

逸聖尼師今 立 儒理王之長子 或云日知葛文王之子 妃朴氏 支所禮王之女

일성니사금이 즉위하였다.(134) 유리왕의 장자이다. (혹은 일지갈문왕의 아들이라 한다.) 왕비는 박씨로 지소례왕의 딸이다.

 

元年 九月 大赦

1(134) 9월에 (죄수들을)크게 풀어주었다.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2(135) 봄 정월에 직접 시조묘에 제사하였다.

 

三年 春正月 拜雄宣爲伊湌 兼知內外兵馬事 近宗爲一吉湌

3(136) 봄 정월에 웅선에게 벼슬을 주어 이찬으로 삼고 겸하여 내외 군대이 일을 맡게 하였다. 근종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四年 春二月 靺鞨入塞 燒長嶺五柵

3(137) 봄 정월에 말갈이 변경 요새로 들어 와 장령의 다섯 책을 불태웠다.

 

五年 春二月 置政事堂於金城 秋七月 大閱閼川西 冬十月 北巡 親祀太白山

5(138) 2월에 금성에 정사당을 두었다. 가을 7월에 알천 서쪽에서 크게 열병하였다. 겨울 10월에 북쪽으로 순행하고 직접 태백산에 제사하였다.

 

六年 秋七月 隕霜殺菽 八月 靺鞨襲長嶺 虜掠民口 冬十月 又來 雪甚乃退

6(139)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콩을 죽였다. 8월에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여 백성을 포로로하고 약탈하였다. 겨울 10월에 또 왔으나 눈이 많이 내려 이에 돌아갔다.

 

七年 春二月 立柵長嶺 以防靺鞨

7(140) 2월에 장령에 책을 세워 말갈을 방비하였다.

 

八年 秋九月辛亥晦 日有食之

8(141) 가을 9월 신해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九年 秋七月 召羣公議征靺鞨 伊湌雄宣上言不可 乃止

9(142) 가을 7월 여러 공들을 불러 말갈 정벌을 의논하였는데 이찬 웅선이 불가하다고 말을 올리니 이에 그만두었다.

 

十年 春二月 修葺宮室 夏六月乙丑 熒惑犯鎭星 冬十一月 雷

10(143) 2월에 궁실을 수리하였다. 여름 6월 을축일에 형혹성이 진성을 범하였다. 겨울 11월에 우레가 울렸다.

 

十一年 春二月 下令 農者政本 食惟民天 諸州郡修完堤坊 廣闢田野又下令 禁民間用金銀珠玉

11(144) 2월에 명을 내리기를 농사는 정사의 근본이고, 밥은 백성이 하늘이라 생각한다. 여러 주와 군은 제방을 수리하고 밭을 넓게 열라.”했다. 또 명령을 내려 민간에서 금, , 구슬, 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十二年 春夏旱 南地最甚 民飢 移其粟賑給之

12(145) 봄 여름에 가뭄이 들었는데 남쪽 땅이 가장 심하였다. 백성이 주리자 그 곡식을 옮겨 주어 구휼하였다.

 

十三年 冬十月 押督叛 發兵討平之 徙其餘衆於南地

13(146) 겨울 10월에 압독국이 배반하므로 군대를 내어 쳐서 평정하고, 그 남은 무리들을 남쪽 땅으로 옮겼다.

 

十四年 秋七月 命臣寮 各擧智勇堪爲將帥者

14(147) 가을 7월 신하들에게 명하여 각각 지혜와 용맹이 있어 장수로 삼을 수 있는 이를 추천하게 하였다.

 

十五年 封朴阿道爲葛文王 新羅追封王 皆稱葛文王 其義未詳

15(148) 박아도를 봉하여 갈문왕으로 삼았다. 신라의 추봉왕은 모두 갈문왕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

 

十六年 春正月 以得訓爲沙湌 宣忠爲奈麻 秋八月 有星孛于天市 冬十一月 雷 京都大疫

16(149) 봄 정월에 득훈을 사찬으로 삼고 선충을 나마로 삼았다. 가을 8월에 성패(혜성)이 천시에 있었다. 겨울 11월에 우레가 울리고 경도(서울)에 크게 전염병이 유행하였다.

 

十七年 自夏四月不雨 至秋七月乃雨

17(150) 여름 4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가을 7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十八年 春二月 伊湌雄宣卒 以大宣爲伊湌 兼知內外兵馬事 三月 雨雹

18(151) 2월 이찬 웅선이 죽자 대선을 이찬으로 삼고 겸하여 내외 군대의 일을 맡게 하였다. 3월에 우박이 내렸다.

 

二十年 冬十月 宮門災 彗星見東方 又見東北方

20(153) 겨울 10월 궁문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혜성이 동쪽에 나타나고 또 동북쪽에도 나타났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薨

21(154) 2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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