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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3

by 최인표 2024. 1. 3.

三國史記 卷 第三 新羅本紀 第三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 宣撰

新羅本紀 第三 奈勿尼師今·實聖尼師今·訥祇麻立干·慈悲麻立干·炤知麻立干

 

삼국사기3, 신라본기3

수충정난정국찬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수태보 문하시중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가 상주국으로 벼슬을 그만 둔 신 김부식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하였다.

 

奈勿(一云那密)尼師今 立 姓金 仇道葛文王之孫也 父末仇角干 母金氏休禮夫人 妃金氏 味鄒王女 訖解薨 無子 奈勿繼之 末仇味鄒尼師今 兄弟也

論曰取妻不取同姓 以厚別也 是故 魯公之取於吳 晉侯之有四姬 陳司敗·鄭子産深譏之 若新羅 則不止取同姓而已 兄弟子·姑姨從姊妹 皆聘爲妻 雖外國各異俗 責之以中國之禮 則大悖矣 若匈奴之烝母報子 則又甚於此矣

내물(나밀이라 하기도 한다.)니사금이 즉위하였다. 성은 김씨로 구도갈문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말구각간이고,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이다. 왕비는 김씨로 미추왕의 딸이다. 흘해가 죽고 아들이 없어 내물이 이었다. 말구와 미추니사금은 형제이다.

논하여 말한다. 아내를 맞이할 때 같은 성에서 맞이하지 않는 것은 분별을 두터이 하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 공이 오나라에서 맞이하고, 진후가 네 여자를 둔 것에 대해 진나라 사패와 정나라 자산이 그것을 매우 잘 꾸짖었다. 신라 같은 경우에는 곧 다만 같은 성에서 취하였을 뿐만아니라 형제의 자식, 고모, 이모, 종자매를 모두 맞아 처로 삼는다. 비록 외국은 각각 풍속을 달리하지만 중국의 예를 가지고 따지면 곧 크게 어그러진 것이다. 흉노의 어머니와 자식이 상간하는 것과 같은 것은 곧 이보다 심한 것이다.

 

二年 春 發使撫問鰥寡孤獨 各賜穀三斛 孝悌有異行者 賜職一級

2(357) 봄에 사자를 보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늙은이를 위문하고 각기 곡식 3(30)을 내렸다. 효도하고 공경함에 특이한 행실이 있는 자에게 직급 한 등급씩을 내렸다.

 

三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紫雲盤旋廟上 神雀集於廟庭

3(358) 2월에 직접 시조묘에 제사하였는데 자색의 구름이 사당 위에 서려 돌고, 신작(신비로운 새들)이 사당 뜰에 모였다.

 

七年 夏四月 始祖廟庭樹連理

7(362) 여름 4월에 시조묘 뜰의 나무가 다른 나무와 이어져 하나가 되었다.

 

九年 夏四月 倭兵大至 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 倭人恃衆直進 伏發擊其不意 倭人大敗走 追擊殺之幾盡

9(364) 여름 4월 왜의 군대가 크게 이르렀다. 왕이 듣고 대적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여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지니게 하여 토함산 아래 벌여 세워두고, 용감한 군사 1천 명을 부현 동쪽 들판에 숨겨두었다. 왜인들이 사람이 많은 것을 믿고 곧바로 나오니 갑자기 숨어있던 군사를 내어 치니 dhodlsef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다.

 

十一年 春三月 百濟人來聘 夏四月 大水 山崩十三所

11(366) 3월 백제인이 방문하였다. 여름 4월 큰물이 져서 산이 무너진 곳이 13곳이었다.

 

十三年 春 百濟遣使 進良馬二匹

13(368) 봄 백제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올렸다.

 

十七年 春夏大旱 年荒民飢 多流亡 發使開倉廩賑之

17(372)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흉년이 들어 백성이 주리고 많이 떠돌아다니므로 사자를 내어 창고를 열고 구휼하게 하였다.

 

十八年 百濟禿山城主 率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 百濟王移書曰 兩國和好 約爲兄弟 今大王納我逃民 甚乖和親之意 非所望於大王也 請還之答曰 民者無常心 故思則來 斁則去 固其所也 大王不患民之不安 而責寡人 何其甚乎百濟聞之 不復言 夏五月 京都雨魚

18(373) 백제 독산성주가 사람 3백명을 통솔하여 와서 항복하니 왕이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왕이 글을 보내 말하기를 두 나라가 화평하고 사이가 좋아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는데 지금 대왕이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인 것은 화친의 뜻에 매우 어긋나니 대왕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돌려보내 줄 것을 청합니다.”했다. 답하여 말하기를 백성은 항상된 마음이 없기 때문에 생각하면 곧 오고, 싫으면 곧 가는 것은 진실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대왕은 백성의 편안하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고, 과인을 탓하는 것이 어찌 그리 심합니까?”했다. 백제가 그것을 듣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 경도(서울)에 물고기가 비에 섞여 떨어졌다.

 

二十一年 秋七月 夫沙郡進一角鹿 大有年

21(376) 가을 7월애 부사군에서 뿔이 하나인 사슴을 바쳤다. 큰 풍년이 들었다.

 

二十四年 夏四月 楊山有小雀 生大鳥

24(378) 여름 4월 양산에 작은 참새가 큰 새를 낳았다.

 

二十六年 春夏旱 年荒民飢 遣衛頭入苻秦 貢方物 苻堅問衛頭曰 卿言海東之事與古不同 何耶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 名號改易 今焉得同

26(380)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흉년으로 백성들이 주렸다. 위두를 보내 부진(전진)에 들어 가 나라의 물건을 바치게 하였다. 부견이 위두에게 물어 말하기를 경의 말에 해동의 일이 옛과 같지 않다 한 것은 무엇인가?”했다. 답하여 말하기를 또한 중국과 같이 시대가 변혁하고 명호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했다,

 

三十三年 夏四月 京都地震 六月 又震 冬 無氷

33(388) 여름 4월 경도(서울)에서 땅이 흔들렸다. 6월에 또 벼락이 쳤고,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三十四年 春正月 京都大疫 二月 雨土 秋七月 蝗 穀不登

34(389) 봄 정월 경도(서울) 큰 전염병이 돌았다. 2월에 비에 흙이 섞여 내렸다. 가을 7월에 누리떼가 있었고, 곡식이 익지 않았다.

 

三十七年 春正月 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强盛 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37(392) 봄 정월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냈다. 왕이 고구려가 강성하기 때문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게 하였다.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 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38(393) 여름 5월 왜인들이 와서 금성을 에워싸고 5일이 되어도 풀지 않으니 장사들이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깊이 들어와 죽을 땅에 있으니 예봉을 감당할 수 없다.”하고는 곧 성문을 닫으니 적이 공 없이 돌아갔다. 왕이 먼저 용감한 기병 200명을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게 하고, 또 보병 1천명을 보내 독산에서 따라잡아 협공하여 크게 무너뜨리고 매우 많은 무리를 죽이고 사로잡았다.

 

四十年 秋八月 靺鞨侵北邊 出師 大敗之於悉直之原

40(394)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니 군대를 내어 실직의 들에서 크게 무너뜨렸다.

 

四十二年 秋七月 北邊何瑟羅 旱蝗 年荒民飢 曲赦囚徒 復一年租調

42(396) 가을 7월 ㅂㄱ쪽 변경 하슬라에 가뭄과 누리의 재난을 흉년이 들어 백성이 즈리므로 죄수 무리를 풀어주고 1년의 조세(토지세)와 공물(호세)을 면제하였다.

 

四十四年 秋七月 飛蝗蔽野

44(398) 가을 7월 날아다니는 누리가 들을 가렸다.

 

四十五年 秋八月 星孛于東方 冬十月 王所嘗御內廐馬 跪膝流淚哀鳴

45(399) 가을 8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겨울 10월 왕이 타던 내구마가 무릎을 꿇고 슬프게 울었다.

 

四十六年 春夏旱 秋七月 高句麗質子實聖還

46(401) , 여름에 가물었다.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실성이 돌아왔다.

 

四十七年 春二月 王薨

47(402) 2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實聖尼師今 立 閼智裔孫 大西知伊湌之子 母伊利夫人 伊一作企

昔登保阿干之女 妃味鄒王女也 實聖身長七尺五寸 明達有遠識 奈勿薨 其子幼少 國人立實聖繼位

실성니사금이 즉위하였다. 알지의 후손으로 대서지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이부인(이는 기라도도 쓴다.)으로 석등보 아간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의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이고, 지혜롭고 학식이 뛰어났다. 내물왕이 돌아가시고 그 아들이 어렸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다.

 

元年 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1(402) 3월 왜국과 우호를 통하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으로 볼모을 삼게 하였다.

 

二年 春正月 以未斯品爲舒弗邯 委以軍國之事 秋七月 百濟侵邊

2(403) 봄 정월 미사품으로 서불함을 삼고 군국의 일을 맡겼다. 가을 7월 백제가 변경을 참범하엿다.

 

三年 春二月 親謁始祖廟

3(404) 2월 직접 시조묘를 배알하였다.

 

四年 夏四月 倭兵來攻明活城 不克而歸 王率騎兵 要之獨山之南 再戰破之 殺獲三百餘級

4(405) 여름 4월 왜의 군대가와서 명활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기병을 통솔하여 독산의 남쪽에서 기다리다 두 번 싸워 깨트리고 300여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五年 秋七月 國西蝗 害穀 冬十月 京都地震 十一月 無氷

5(406) 가을 7월 나라 서쪽에 누리떼가 곡식을 해쳤다. 겨울 10월 경도(서울)의 땅이 흔들렸다.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六年 春三月 倭人侵東邊 夏六月 又侵南邊 奪掠一百人

6(407) 3월에 왜인들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여름 6월에 또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100여명을 노략질하였다.

 

七年 春二月 王聞 倭人於對馬島置營 貯以兵革資粮 以謀襲我 我欲先其未發 揀精兵擊破兵儲 舒弗邯未斯品曰 臣聞 兵凶器 戰危事況涉巨浸以伐人 萬一失利 則悔不可追 不若依嶮設關 來則禦之 使不得侵猾 便則出而禽之 此所謂致人而不致於人 策之上也王從之

7(408) 2월 왕이 왜인들이 대마도에 진영을 두고 군대와 식량을 저장하는 것으로서 우리를 습격할 것을 도모한다는 것을 듣고 우리가 먼저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정예 군대를 훈련하여 쳐서 진영을 깨트리려 하였다. 서불함 미사품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무기는 흉한 기물이고 싸움은 위태로운 일이라 합니다. 하물며 큰물(바다)을 건너 다른 사람을 치다가 만에 하나 이로움을 잃으면 곧 뉘우쳐도 따를 수 없습니다. 험한 곳에 기대어 관을 만들고 오면 곧 그들을 막아 침범하여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고, 율할 때 나가 그들을 사로잡는 것만 못합니다.(낫습니다.) 이것이 이른 바 다른 사람을 유인하여도 다른 사람에게 유인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했다. 왕이 따랐다.

 

十一年 以奈勿王子卜好 質於高句麗

11(412)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十二年 秋八月 雲起狼山 望之如樓閣 香氣郁然 久而不歇 王謂 是必仙靈降遊 應是福地從此後 禁人斬伐樹木 新成平壤州大橋

12(413) 가을 8월 구름이 낭산에서 일어났는데 그것을 바라보니 누각과 같고, 향기가 가득 퍼져 오래되어 없어지지 않았다. 왕이 이르기를 이는 반드시 선령(신선) 내려와 노니는 것이니 응당 이곳은 복지일 것이다.”하고는 이로부터 사람들이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하였다. 새로 평양주에 큰 다리를 만들었다.

 

十四年 秋七月 大閱於穴城原 又御金城南門觀射 八月 與倭人戰於風島 克之

14(415) 가을 ㅂ7월 혈성 들판에서 크게 열병하고, 또 금성 남문에 가서 활 쏘는 것을 보았다. 8월에 왜인들과 풍도에서 싸워 이겼다.

 

十五年 春三月 東海邊獲大魚 有角 其大盈車 夏五月 吐含山崩 泉水湧 高三丈

15(416) 봄 정월 동해 가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뿔이 있고 크기가 수레에 가득 찼다. 여름 5월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이 솟았는데 높이가 세 길이었다.

 

十六年 夏五月 王薨

16(417) 여름 5월 왕이 돌아 가셨다.

 

訥祇麻立干 立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橛也 橛謂諴操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奈勿王子也 母保反夫人 一云內禮吉怖 味鄒王女也 妃實聖王之女 奈勿王三十七年 以實聖質於高句麗 及實聖還爲王 怨奈勿質己於外國 欲害其子以報怨 遣人招在高句麗時相知人 因密告 見訥祇則殺之遂令訥祇往 逆於中路 麗人見訥祇 形神爽雅 有君子之風 遂告曰 爾國王使我害君 今見君 不忍賊害乃歸 訥祇怨之 反弑王自立

눌지마립간이 즉위하였다.(김대문이 말하기를 마립는 방언에 말뚝을 일컫는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는데 자리에 기준하여 두었다. 곧 왕의 말뚝이 주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아래에 벌려두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했다.) 내물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보반부인(내례길포라 하기도 한다.)으로 미추왕의 딸이다. 왕비는 실성왕의 딸이다. 내물왕 37년 실성을 고구려에 보내 볼모로 삼았는데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었다. (실성이) 내물왕이 자기를 외국에 보내 볼모로 삼은 것을 원망하여 그 아들을 해치는 것으로서 원한을 갚으려 하였였다.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있을 때 서로 알았던 사람을 불러 몰래 말하기를 눌지를 보면 곧 죽이라.” 했다. 마침내 눌지로 하여금 가게 하여 중간에서 (고구려 사람들을)만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눌지를 보니 시원하고 아름다워 군자의 풍모가 있었다. 마침내 알려 말하기를 너희 나라 왕이 우리로 하여금 그대를 해치게 하였다.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해칠 수 없다.”하고는 곧 돌아갔다. 눌ㅈ가 그것을 원망하여 도리어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正月 親謁始祖廟 王弟卜好 自高句麗 與堤上奈麻還來 秋 王弟未斯欣 自倭國逃還

2(418) 봄 정월 직접 시조묘를 배알하였다. 왕의 동생 복호가 고구려에서 제상 나마와 같이 돌아왔다. 가을에 왕의 동생 미사흔이 왜국에서 도망하여 돌아왔다.

 

三年 夏四月 牛谷水湧

3(419) 여름 4월에 우곡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四年 春夏大旱 秋七月 隕霜殺穀 民飢 有賣子孫者 慮囚原罪

4(420)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이니 백성이 주려 자손을 파는 자가 있었다. 죄수를 헤아려 죄를 용서해 주었다.

 

七年 夏四月 養老於南堂 王親執食 賜穀帛有差

7(423) 여름 4월 남당에서 노인들을 접대하였는데 왕이 직접 음식을 집어주고 곡식과 비단을 차등있게 내렷다.

 

八年 春二月 遣使高句麗修聘

8(424) 2월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선물을 가지고 방문하게 하였다.

 

十三年 新築矢堤 岸長二千一百七十步

13(429) 새로이 시제를 쌓았는데 길이가 2170보였다.

 

十五年 夏四月 倭兵來侵東邊 圍明活城 無功而退 秋七月 霜雹殺穀

15(431) 여름 4월에 왜의 군대가 와서 동쪽 변경을 침범하고 명활성을 에워쌌으나 공 없이 물러났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죽였다.

 

十六年 春 穀貴 人食松樹皮

16(432) 봄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소나무 껍질을 먹었다.

 

十七年 夏五月 未斯欣卒 贈舒弗邯 秋七月 百濟遣使請和 從之

17(433) 여름 5월 미사흔이 죽으니 서불함을 증직하였다. 가을 7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하므로 따랐다.

 

十八年 春二月 百濟王送良馬二匹 秋九月 又送白鷹 冬十月 王以黃金·明珠 報聘百濟

18(434) 2월에 백제왕이 좋은 말 2필을 보냈다. 가을 9월에 또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에 왕이 황금과 명주를 예물로 백제에 보내 갚았다.

 

十九年 春正月 大風拔木 二月 修葺歷代園陵 夏四月 祀始祖廟

19(435) 봄 정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2월에 역대 원릉(왕릉)을 수리하였다. 여름 4월에 시조묘에 제사하였다.

 

二十年 夏四月 雨雹 慮囚

20(436) 여름 4월 비와 우박이 내렸다. 죄수의 정상을 조사하였다.

 

二十二年 夏四月 牛頭郡山水暴至 漂流五十餘家 京都大風雨雹 敎民牛車之法

22(438) 여름 4월 우두군 산의 물이 갑자기 이르러 50여 채 집이 떠내려갔다. 경도(서울)에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렸다. 백성들에게 우차의 사용법을 가르쳤다.

 

二十四年 倭人侵南邊 掠取生口而去 夏六月 又侵東邊

24(440) 왜인들이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백성들을 잡아 갔다. 여름 6월 또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二十五年 春二月 史勿縣進長尾白雉 王嘉之 賜縣吏穀

25(441) 2월 사물현이 꼬리가 긴 흰꿩을 바치니 왕이 아름답게 여겨 현의 관리에게 곡식을 내렸다.

 

二十八年 夏四月 倭兵圍金城十日 糧盡乃歸 王欲出兵追之 左右曰 兵家之說曰 窮寇勿追王其舍之不聽 率數千餘騎 追及於獨山之東 合戰爲賊所敗 將士死者過半 王蒼黃棄馬上山 賊圍之數重 忽昏霧 不辨咫尺 賊謂 有陰助收兵退歸

28(444) 여름 4월 왜병이 금성을 10일이나 에워쌌으나 식량이 다하여 돌아갔다. 왕이 군대를 내어 추격하려 하였으나 좌우가 말하기를 병가(병법가)의 말에 궁박한 도적은 쫒지 말라.’하였습니다. 왕께서는 그만하십시오.”하였다. 왕이 듣지 않고 수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독산의 동쪽에 이르러 싸워 적에게 패하여 죽은 장사들이 반을 넘었다. 왕이 당황하여 말을 버리고 산에 오르자 적이 여러 겹으로 에워쌌는데 갑자기 짙은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적이 이르기를 숨은 도움이 있다.”하고는 군대를 거두고 물러나 돌아갔다.

 

三十四年 秋七月 高句麗邊將 獵於悉直之原 何瑟羅城主三直 出兵掩殺之 麗王聞之怒 使來告曰 孤與大王 修好至歡也 今出兵殺我邊將 是何義耶乃興師侵我西邊 王卑辭 謝之 乃歸

34(450) 가을 7월 고구려 변경의 장수가 실직의 들에서 사냥하는데 하슬라 성주 삼직이 군대를 내어 습격하여 죽였다. 고구려 왕이 그것을 듣고 노하여 사신을 보내 알려 말하기를 나와 대왕은 우호를 닦음을 지극히 기뻐하였습니다. 지금 군대를 내어 우리 변경의 장수를 죽인 것은 무슨 뜻입니까?”하였다. 곧 군대를 일으켜 우리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말을 낮추어 사가하니 이에 물러났다.

 

三十六年 秋七月 大山郡進嘉禾

36(452) 가을 7월 대산군이 낟알이 많은 벼(상서로운 벼)를 바쳤다.

 

三十七年 春夏旱 秋七月 羣狼入始林

37(453)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가을 7월 여러 이라가 시림에 들어왔다.

 

三十八年 秋七月 霜雹害穀 八月 高句麗侵北邊

38(454) 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三十九年 冬十月 高句麗侵百濟 王遣兵救之

39(455) 겨울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니 왕이 군대를 보내 구원하였다.

 

四十一年 春二月 大風拔木 夏四月 隕霜傷麥

41(457) 2월 근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四十二年 春二月 地震 金城南門自毁 秋八月 王薨

42(458) 2월에 땅이 흔들이고 감성의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慈悲麻立干 立 訥祇王長子 母金氏 實聖之女也

자비마립간이 즉위하였다. 눌지왕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실성왕의 딸이다.

 

二年 春二月 謁始祖廟 夏四月 倭人以兵船百餘艘 襲東邊 進圍月城 四面矢石如雨 王城守 賊將退 出兵擊敗之 追北至海口 賊溺死者過半

2(459) 2월에 시조묘를 배알하였다. 여름 4월 왜인들이 병선(군함) 100여척으로 동쪽 변경을 습격하고 나아가 월성을 에워싸고 사방으로 화살과 돌을 비오듯 퍼부었다. 왕이 성을 지키다 적이 장차 물러 가려하자 군대를 내어 쳐서 무뜨리고 추격하여 바다가에 이르니 물에 빠져 죽은 적이 반을 넘었다.

 

四年 春二月 王納舒弗邯未斯欣女爲妃 夏四月 龍見金城井中

4(461) 2월에 왕이 서불함 미사흔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다. 여름 4월 용이 금성의 우물에 나타났다.

 

五年 夏五月 倭人襲破活開城 虜人一千而去

5(462) 여름 5월 왜인들이 명활성을 습격하여 깨트리고 1천 명의 포로를 잡아갔다.

 

六年 春二月 倭人侵歃良城 不克而去 王命伐智·德智 領兵伏候於路 要擊大敗之 王以倭人屢侵疆埸 緣邊築二城 秋七月 大閱

6(463) 2월 왜인들이 삽량성을 침범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갔다. 왕이 벌지, 덕지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길에 숨어 기다리다 맞아치게 하여 크게 무너뜨렸다.(이겼다.) 왕이 왜인들이 자주 영토를 침범하므로 변경에 두 개의 성을 쌓게 하였다. 가을 7월에 크게 열병하였다.

 

八年 夏四月 大水 山崩一十七所 五月 沙伐郡蝗

8(464) 여름 4월에 큰물이 져서 17 곳의 산이 무너졌다. 5월 사벌군에 누리떼가 있었다.

 

十年 春 命有司修理戰艦 秋九月 天赤 大星自北流東南

10(466) 봄 담당관청으로 하여금 전함(군함)을 수리하게 하였다. 가을 9월 하늘이 붉어지고 큰 별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렀다.

 

十一年 春 高句麗與靺鞨 襲北邊悉直城 秋九月 徵何瑟羅人年十五已上 築城於泥河 泥河一名泥川

11(467) 봄 고구려와 말갈이 북족 변경 실직성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에 15세 이상 하슬라 사람을 동원하여 니하에 성을 쌓았다. 니하는 일명 니천이라 한다.

 

十二年 春正月 定京都坊里名 夏四月 國西大水 漂毁民戶 秋七月 王巡撫經水州郡

12(468) 봄 정월 경도(서울)의 방리 명을 정하였다. 여름 4월애 나라 서쪽에 큰물이 져 백성들의 집이 떠다니고 무너졌다. 가을 7월 왕이 물이 지난 주와 군을 순행하였다.

 

十三年 築三年山城 三年者 自興役 始終三年訖功 故名之

13(469) 3년 산성을 쌓았다.(3년은 공사를 일으키고부터 3년만에 일을 마쳤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十四年 春二月 築芼老城 三月 京都地裂 廣袤二丈 濁水湧 冬十月 大疫

14(470) 2월 모로성을 쌓았다. 3월 경도(서울)의 땅이 갈라졌는데 가로세로가 두 길로 흐린 물이 솟아올랐다. 겨울 10월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였다.

 

十六年 春正月 以阿湌伐智·級湌德智爲左·右將軍 秋七月 葺明活城

16(472) 봄 정월 아찬 벌지, 급찬 덕지를 좌, 우 장군으로 삼았다. 가을 7월 명활성을 수리하였다.

 

十七年 築一牟·沙尸·廣石·沓達·仇禮·坐羅等城 秋七月 高句麗王巨連 親率兵攻百濟 百濟王慶 遣子文周求援 王出兵救之 未至百濟已陷 慶 亦被害

17(473) 일모, 사시, 광석, 답달, 구례, 좌라 등의 성을 쌓았다. 가을 7월 고구려 왕 거련이 직접 군대를 통솔하여 백제를 치니 백제왕 경(개로왕)이 아들 문주를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왕이 군대를 내어 구원하려하였으나 이르기 전에 이미 함락되고, (개로왕)이 또한 해를 입었다,

 

十八年 春正月 王移居明活城

18(474) 봄 정월 왕이 명활성으로 옮겨 살았다.

 

十九年 夏六月 倭人侵東邊 王命將軍德智擊敗之 殺虜二百餘人

19(475) 여름 6월 왜인들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니 왕이 장군 덕지로 하여금 치게 하여 무너뜨리고 2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二十年 夏五月 倭人擧兵 五道來侵 竟無功而還

20(476) 여름 5월 왜인들이 군대를 일으켜 다섯 길로 와서 침범하였으나 마침내 공 없이 돌아갔다.

 

二十一年 春二月 夜赤光如匹練 自地至天 冬十月 京都地震

21(477) 2월 밤에 붉은 빛이 비단과 같았는데 땅에서 하늘에 이르렀다. 겨울 10월에 경도(서울)에 땅이 흔들였다.

 

二十二年 春二月三日 王薨

22(478) 23일 왕이 돌아가셨다.

 

炤知(一云毗處)麻立干 立 慈悲王長子 母金氏 舒弗邯未斯欣之女 妃善兮夫人 乃宿伊伐湌女也 炤知幼有孝行 謙恭自守 人咸服之

소지(비처라고도 한다)마립간이 즉위하였다. 자비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로 서불함 미사흔의 딸이다. 왕비는 선혜부인이니 내숙이벌찬의 딸이다. 소지는 어려서 효행이 있었고, 겸손과 공손으로 스스로를 지키니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였다.(인정하였다.)

 

元年 大赦 賜百官爵一級

1(479) 크게 풀어주었다. 백관에게 벼슬 1급씩을 내려주었다.

 

二年 春二月 祀始祖廟 夏五月 京都旱 冬十月 民飢 出倉穀賑給之 十一月 靺鞨侵北邊

2(480) 2월 시조묘에 제사하였다. 여름 5월에 경도(서울)가 가물었다. 겨울 10월 백성들이 주리므로 창고를 열고 구휼하여 주었다. 11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三年 春二月 幸比列城 存撫軍士 賜征袍 三月 高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彌秩夫 我軍與百濟·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 斬首千餘級

3(481) 2월 비열성에 가서 군사들을 위로하고 군복을 내렸다. 3월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에 들어와 호명 등 일곱 개 성을 취하고, 또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대와 백제, 가야 구원병이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이 패하고 물러났다. 추격하여 니하 서쪽에서 깨트리고 천 여 명을 죽였다.

 

四年 春二月 大風拔木 金城南門火 夏四月 久雨 命內外有司慮囚 五月 倭人侵邊

4(482) 2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금성의 남문에 불이 났다. 여름 4월에 오래동안 비가 내리므로 내외 관청에 명하여 죄수를 조사하게 하였다. 5월에 왜인들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五年 夏四月 大水 秋七月 大水 冬十月 幸一善界 存問遘災百姓 賜穀有差 十一月 雷 京都大疫

5(483) 여름 4월 큰물이 졌다. 가을 7월 큰물이 졌다. 겨울 10월 일선계에 가서 재난을 만난 백성을 위문하고 곡식을 차등있게 내렸다. 11월에 우레가 울렸다. 경도(서울)에 큰 전염병이 돌았다.

 

六年 春正月 以烏含爲伊伐湌 三月 土星犯月 雨雹 秋七月 高句麗侵北邊 我軍與百濟 合擊於母山城下 大破之

6(484) 봄 정월 오함을 이벌찬으로 삼았다. 3월 토성이 달을 범하였다.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니 우리 군대가 백제와 합하여 모산성 아래에서 크게 깨트렸다.

 

七年 春二月 築仇伐城 夏四月 親祀始祖廟 增置守廟二十家 五月 百濟來聘

7(485) 2월 구벌성을 쌓았다. 여름 4월 직접 시조묘에 제사하고 수묘(사당을 지키는 사람들) 20가를 더해 두었다. 5월 백제가 선물을 가지고 방문하였다.

 

八年 春正月 拜伊湌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千 改築三年·屈山二城 二月 以乃宿爲伊伐湌 以參國政 夏四月 倭人犯邊 秋八月 大閱於狼山之南

8(486) 봄 정월 이찬 실죽에게 벼슬을 주어 장군으로 삼고 일선계의 장정 3천 명을 동원하여 삼년, 굴산 두 성을 고쳐 쌓았다. 2월에 내숙을 이벌찬으로 삼고 국정에 참여시켰다. 여름 4월에 왜인들이 변경을 침범라였다. 가을 8월 낭산 남쪽에서 크게 열병하였다.

 

九年 春二月 置神宮於奈乙 奈乙始祖初生之處也 三月 始置四方郵驛 命所司修理官道 秋七月 葺月城 冬十月 雷

9(487) 2월 봄 2월 나을에 신궁을 두었는데 신궁은 시조가 처음 태어난 곳이다. 3월 사방에 우역을 두고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관도를 수리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월성을 수리하였다. 가을 10월에 우레가 울렸다.

 

十年 春正月 王移居月城 二月 幸一善郡 存問鰥寡孤獨 賜穀有差 三月 至自一善 所歷州郡獄囚 除二死 悉原之 夏六月 東陽獻六眼龜 腹下有文字 秋七月 築刀那城

10(488) 봄 정월 왕이 월성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2월 일선궁에 가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늙은이를 위로하고 곡식을 차등있게 내렸다. 3월 일선군에서 돌아왔는데 지나던 주, 군의 옥에 갖힌 죄수들 중에 죽을 죄 두 가지를 제외하고 모두 풀어주었다. 여름 6월 동양군에서 눈이 여섯 개인 거북을 바쳤는데 배 아래에 분자가 있었다. 가을 7월 도나성을 쌓았다.

 

十一年 春正月 驅游食百姓歸農 秋九月 高句麗襲北邊 至戈峴 冬十月 陷狐山城

11(489) 봄 정월 놀고먹는 백성들을 몰아 농사를 짓게 하였다. 가을 9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과현에 이르렀다. 겨울 10월에 호산성을 함락시켰다.

 

十二年 春二月 重築鄙羅城 三月 龍見鄒羅井 初開京師市肆 以通四方之貨

12(490) 2월 다시 비라성을 쌓았다. 3월 용이 추라정에 나타났다. 처음을 경사(서울)에 시장을 열고 4방의 재화를 통하게 했다.

 

十四年 春夏旱 王責己 減常膳

14(492)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자기 책임으로 여겨 평상시 먹던 반찬의 수를 줄였다.

 

十五年 春三月 百濟王牟大 遣使請婚 王以伊伐湌比智女送之 秋七月 置臨海·長嶺二鎭 以備倭賊

15(493) 3월 백제왕 모대가 사신을 보내 온인을 청하므로 왕이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냈다. 가을 7월 임해와 장령 두 진을 두고 왜적을 대비하였다.

 

十六年 夏四月 大水 秋七月 將軍實竹等與高句麗 戰薩水之原 不克 退保犬牙城 高句麗兵圍之 百濟王牟大 遣兵三千 救解圍

16(494) 여름 4월 큰물이 졌다. 가을 7월 장군 실죽 등과 고구려가 살수의 들에서 싸웠는데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견아성을 지켰다. 고구려 군대가 에워쌌는데 백제왕 모대가 군대 3천 명을 보내 구원하자 (고구려가)에워싼 것을 풀었다.

 

十七年 春正月 王親祀神宮 秋八月 高句麗圍百濟雉壤城 百濟請救 王命將軍德智 率兵以救之 高句麗衆潰 百濟王遣使來謝

17(495)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하였다. 가을 8월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을 에워싸자 백제가 구원을 청하였다.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하여 군대를 통솔하여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 무리들이 무너졌다.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 와서 사례하였다.

 

十八年 春二月 加耶國送白雉 尾長五尺 三月 重修宮室 夏五月 大雨 閼川水漲 漂沒二百餘家 秋七月 高句麗來攻牛山城 將軍實竹出擊 泥河上破之 八月 幸南郊觀稼

18(496) 2월 가야국이 흰꿩을 꼬리 길이가 다섯 자였다. 3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여름 5월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넘쳐 200여 채의 집이 떠내려갔다. 가을 7월 고구려가 와서 우산성을 치므로 장군 실죽이 나가 쳐서 니하 가에서 깨트렸다. 8월에 남쪽 교외에 가서 농사짓는 것을 살펴보았다.

 

十九年 夏四月 倭人犯邊 秋七月 旱蝗 命羣官 擧才堪牧民者各一人 八月 高句麗攻陷牛山城

19(497) 여름 4월 왜인들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가을 7월 가물고 누리 데가 있었다. 여러 관리들에게 명하여 재능있고, 백성 다스리는 것을 감당할만한 자 각 한 명씩을 추천하게 하였다. 8월 고구려가 우산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二十二年 春三月 倭人攻陷長峰鎭 夏四月 暴風拔木 龍見金城井京都黃霧四塞 秋九月 王幸捺已郡 郡人波路有女子 名曰碧花 年十六歲 眞國色也 其父衣之以錦繡 置轝羃以色絹獻王 王以爲饋食 開見之 斂然幼女 怪而不納 及還宮 思念不已 再三微行 往其家幸之 路經古陁郡 宿於老嫗之家 因問曰 今之人 以國王爲何如主乎嫗對曰 衆以爲聖人 妾獨疑之 何者 竊聞王幸捺已之女 屢微服而來 夫龍爲魚服 爲漁者所制 今王以萬乘之位 不自愼重 此而爲聖 孰非聖乎王聞之大慙 則潛逆其女 置於別室 至生一子 冬十一月 王薨

22(500) 3월 왜인들이 장봉진을 쳐서 함락시켰다. 여름 4월 사낭ㄴ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나고 경도(서울)에 누른 안개가 끼어 사방이 막혔다. 가을 9월 왕이 날리군에 거둥하였다. 군 사람 파로에게 딸이 있었는데 이름을 벽화라고 했다. 나이는 16세로 참으로 나라 안의 미인이었다. 그 아버지가 비단 수를 놓은 옷을 입히고 수레에 태우고 색 비단을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으로 여겨 열고 보니 어린 여자가 타고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받지 않았다. 궁으로 돌아왔으나 생각이 그치지 않아 두 번 세 번 몰래 그 집에 가 (그 여자를) 가까이하였다. 길을 가다 고타군를 지나면서 늙은 할머니의 집에 묵었다. 인하여 물어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임금을 어떻다고 합니까?”하니 할머니가 대답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여기지만 나는 홀로 그것을 의심합니다. 왜냐하면 가만히 들으니 왕께서는 날리군의 여자를 가까이하여 여러 번 평범한 옷을 입고 온다고 하는데 대저 용이 물고기 옷을 입으면 어부에게 제압됩니다. 지금 왕이 만승(임금)의 지위에 있으면서 스스로 삼가고 중하게 여기지 않으니 이를 성인이라 한다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습니까?했다. 왕이 듣고 크게 부끄러워하여 곧 그 여자를 몰래 맞아 별실에 두었는데 한 아들을 낳았다. 겨울 11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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