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卷第二十 高句麗本紀第八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高句麗本紀 第八 嬰陽王·榮留王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영류왕
嬰陽王(一云平陽) 諱元(一云大元) 平原王長子也 風神俊爽 以濟世安民自任 平原王在位七年 立爲太子 三十二年 王薨 太子卽位 隋文帝遣使拜王爲上開府儀同三司 襲爵遼東郡公 賜衣一襲
영양왕(또는 평양이라 한다) 이름은 원(또는 대원이다)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용모가 총명하고 이지적이고,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을 자신의 일로 여겼다. 평원왕 7년 세워 태자로 삼고, 32년 왕이 돌아가시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수나라 문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상개부의동삼사 작(작위)을 이어 요동군공을 삼고, 옷 한 벌을 내렸다.
二年 春正月 遣使入隋 奉表謝恩進奉 因請封王 帝許之 三月 策封爲高句麗王 仍賜車服 夏五月 遣使謝恩
2년(591) 봄 정월 사신을 보내 수나라에 들어 가 표를 올려 은혜에 감사하고 왕을 ᅟᅩᆼ해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3월 책봉하여 고구려왕을 삼고, 수레와 복식을 내렸다. 여름 5월 사신을 보내 은혜에 감사했다.
三年春正月 遣使入隋朝貢
3년(592) 봄 정월 사신을 보내 수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八年夏五月 遣使入隋朝貢
8년(597) 여름 5월 사신을 보내 수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九年春二月春二月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營州摠管韋冲擊退之 隋文帝聞而大怒 命漢王諒․王世積 並爲元帥 將水陸三十萬來伐 夏六月 帝下詔黜王官爵 漢王諒軍出臨渝關 値水潦 餽轉不繼 軍中乏食 復遇疾疫 周羅睺自東萊泛海 趣平壤城 亦遭風 舡多漂沒 秋九月 師還 死者十八九 王亦恐懼 遣使謝罪 上表稱遼東糞土臣某 帝於是罷兵 待之如初 百濟王昌遣使奉表 請爲軍導 帝下詔諭以高句麗服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王知其事 侵掠百濟之境
9년(598) 봄 2월, 봄 3월 왕이 말갈의 무리 만여 명을 통솔하고 요서를 침범하였는데 영주총관 위충이 쳐서 물리쳤다. 수나라 문제가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 왕세적을 나란히 원수로 삼고, 수군과 육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에)와서 쳤다. 여름 6월 황제가 조칙으로 왕의 관작을 빼앗았다. 한왕 양의 군대가 임유관을 나와서 홍수를 만나 군량 운반이 이어지지 않아 군중에 식량이 부족하고, 다시 전염병을 만났다. 주라후는 동쪽으로부터 바다에 떠서 평양성으로 달려갔는데 또한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표류하거나 침몰하였다. 가을 9월 군대가 돌아왔는데 죽은 자가 십에 팔, 구였다. 왕이 또한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표를 올려 “요동 분토의 신 모”라 하였다. 황제가 이에 군대를 그만두고, 그를 대하기를 처음과 같이하였다. 백제왕 창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군대의 길잡이가 될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깨우치기를 “고구려가 죄를 인정하여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니 정벌할 수 없다.”하고는 그 사신을 두터이 대접하여 보냈다. 왕이 그 일을 알고 백제 국경을 침략하였다.
十一年春正月 遣使入隋朝貢 詔大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11년(600) 봄 정월 사신을 보내 수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옛 역사를 요약하여 신집 5권을 만들었다. 나라 초에 처음 문자를 사용하였을 때 사람들이 일을 기록한 100권이 있어 이름을 유기라 하였다. 이에 이르러 깍고 다듬은 것이다.
十四年 秋八月 王遣將軍高勝 攻新羅北漢山城 羅王率兵過漢水 城中鼓噪相應 勝以彼衆我寡 恐不克而退
14년(603) 가을 8월 왕이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 북한산성을 공격하니 신라왕이 군대를 통솔하여 한수를 건넜다. 성 안에서 북을 치고 서로 응원하였다. 고승이 그들은 많고, 우리는 적다 여겨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났다.
十八年 初 煬帝之幸啓民帳也 我使者在啓民所 啓民不敢隱 與之見帝 黃門侍郞裴矩說帝曰 “高句麗本箕子所封之地 漢晋皆爲郡縣 今乃不臣 別爲異域 先帝欲征之久矣 但楊諒不肖 師出無功 當陛下之時 安可不取 使冠帶之境 遂爲蠻貊之鄕乎 今其使者 親見啓民 擧國從化 可因其恐懼 脅使入朝” 帝從之 勑牛弘宣旨曰 “朕以啓民誠心奉國 故親至其帳 明年當往涿郡 爾還日 語爾王 宜早來朝 勿自疑懼 存育之禮 當如啓民 苟或不朝 將帥啓民 往巡彼土” 王懼藩禮頗闕 帝將討之 啓民 突厥可汗也 夏五月 遣師攻百濟松山城 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還
18년(607) 처음 양제가 계민의 장막에 갔을 때 우리 사신이 계민이 있는 곳에 있었다. 계민이 감히 숨기지 못하고 함께 양제를 만났다. 황문시랑 배구가 양제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기자가 봉해진 땅이었고, 한나라, 진나라는 모두 군과 현으로 삼았다. 지금은 곧 신하노릇하지 않고, 따로 다른 영역이 되었으므로 선제께서 정벌하고자 한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다만 양양이 현명하지 못하여 군대가 나갔으나 공이 없었습니다. 폐하의 때를 당하여 어찌 빼앗지 않고, 예의의 경계로 하여금 마침내 예맥(오랑캐)의 지역으로 하겠습니까? 지금 그 사자가 직접 계민이 나라를 들어 교화를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려움으로 인하여 사자를 위협하면 입조하게 할 수 있습니다.”했다. 황제가 그것을 따라 우홍에게 칙명을 내리게 하여 말하기를 “짐은 계민이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나라를 받들었기 때문에 직접 그 장막에 이르렀다.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에 갈 것인데 너는 돌아가는 날 너희 왕에게 마땅히 일찍 와 조회하고,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도록 말하라. 보존하고 기르는 예를 마땅히 계민과 같이 하라. 만약 혹 조회하지 않는다면 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그 땅에 가서 돌아다닐 것이다.”했다. 왕이 번신의 예를 빠트려 양제가 토벌하는(쳐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계민은 돌궐의 가한이다. 여름 5월 군대를 보내 백제 송산성을 치게 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옮겨 석두성을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十九年 春二月 命將襲新羅北境 虜獲八千人 夏四月 拔新羅牛鳴山城
19년(608) 봄 2월 장수에게 명하여 신라 북쪽 경계를 습격하게 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았다. 여름 4월 신라 우명산성을 함락시켰다.
二十二年 春二月 煬帝下詔 討高句麗 夏四月 車駕至涿郡之臨朔宮 四方兵皆集涿郡
22년(611) 봄 2월 양제가 명령을 내려 고구려를 토벌하라고 했다. 여름 4월 (양제의)수레가 탁군의 임삭궁에 이르니 사방의 군대가 모두 탁군에 모였다.
二十三年 春正月壬午 帝下詔曰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勃碣之間 荐食遼濊之境 雖復漢魏誅戮 巢穴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寔繁以訖今 睠彼華壤 翦爲夷類 歷年永久 惡稔旣盈 天道禍淫 亡徵已兆 亂常敗德 非可勝圖 掩慝懷姦 唯日不足 移告之嚴 未嘗面受 朝覲之禮 莫肯躬親 誘納亡叛 不知紀極 充斥邊垂 亟勞烽候 關柝以之不靜 生人爲之廢業 在昔薄伐 已漏天網 旣緩前禽之戮 未卽後服之誅
23년(612) 봄 정월 임오 양제가 명을 내려 말하기를 “고구려는 작고 추하며 미욱하여 공손하지 않아 발해와 갈석의 사이에 모이고 요수와 예수 경계를 잠식하였다. 비록 한나라와 위나라가 거듭 주륙하였으나 둥지가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막힘이 많자 부족이 돌아 와 모여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숲에 모여 지금까지 번성하였다. 돌아 보건대 저 중국 땅이 베어져 오랑캐 부류가 되었다. 지난해가 오래되어 악이 쌓여 이미 가득차니, 하늘의 도가 음란한 이는 재앙을 내리고, 망할 징조가 이미 드러났다. 떳떳함을 어지럽히고 덕을 무너뜨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악을 가리고 간사함을 품은 것은 날이 부족할 뿐이다. (조서를)보내 알림을 엄격하게 한 것도 일찍이 얼굴을 맞대고 받지 않았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도 즐겨 몸소 직접 하지 않았다. 배반하여 도망한 이를 유인하여 받아들임이 끝을 알지 못하고, 변방에 가득하여 봉후를 수고롭게 하니 빗장과 딱따기가 이로서 고요하지 못하고, 백성이 그를 위하여 생업을 폐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할 때 하늘의 그물에서 빠졌으며, 이전에 사로잡아 죽일 것도 늦추어주고, 뒷날 복종하여 목베임도 당하지 않게 해주었다.
曾不懷恩 翻爲長惡 乃兼契丹之黨 虔劉海戍 習靺鞨之服 侵軼遼西 又靑丘之表 咸修職貢 碧海之濱 同稟正朔 遂復敓攘琛賮 遏絶往來 虐及弗辜 誠而遇禍 輶車奉使 爰曁海東 旌節所次 途經藩境 而擁塞道路 拒絶王人 無事君之心 豈爲臣之禮 此而可忍 孰不可容 且法令苛酷 賦斂煩重 强臣豪族 咸執國鈞 朋黨比周 以之成俗 賄貨如市 寃枉莫申 重以仍歲災凶 比屋饑饉 兵戈不息 徭役無期 力竭轉輸 身塡溝壑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쌓아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의 수자리 군사를 죽이고, 말갈의 습관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 또 청구의 밖에서 모두 직공을 닦고, 푸른 바다 가에서 함께 정삭을 받아 마침내 다시 보물을 빼앗고 오고가는 길을 막고 끊어 잔학함이 죄 없는 이에게 미쳤으니 정성스럽게 하면서도 재앙을 만났습니다. 수레를 탄 사신이 해동에 미치고, 정절이 도달하려면 번국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람을 막고 끊어 임금을 섬기는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됨의 예라 할 수 있는가? 이것에도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을 용납할 수 없겠는가? 또한 법령이 가혹하고 세금이 번거롭고 무거우며, 강한 신하와 호족이 모두 나라의 기틀을 잡아 붕당이 가까이하고 주루하는 것으로서 풍속을 이루고, 뇌물을 주고받음이 물건을 사고파는 것과 같아 억울하고 굽은 것이 펴지지 않는다. 거듭된 재앙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쉬지 않으며, 요역이 기한이 없으니 군량 운반하느라 힘이 다하고 몸은 도랑과 구덩이를 메웠다.
百姓愁苦 爰誰適從 境內哀惶 不勝其弊 廻首面內 各懷性命之圖 黃髮稚齒 咸興酷毒之歎 省俗觀風 爰屆幽·朔 弔人問罪 無俟再駕 於是 親摠六師 用申九伐 拯厥阽危 恊從天意 殄玆逋穢 剋嗣先謨 今宜授律啓行 分麾届路 掩渤海而雷震 歷扶餘以電掃 比戈按甲誓旅而後行 三令五申 必勝而後戰 左十二軍 出鏤方·長岑·溟海·蓋馬·建安·南蘇·遼東·玄菟·扶餘·朝鮮·沃沮·樂浪等道 右十二軍 出黏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踏頓·肅愼·碣石·東𦖮·帶方·襄平等道 絡繹引途 摠集平壤』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니 누구를 따를 것이냐. 나라 안이 슬프고, 그 폐단을 이기지 못하였다. 머리를 돌려 안으로 보고 제각기 생명을 도모할 생각을 품고, 노인과 어린아이들도 모두 혹독하다는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유주와 삭주에 이르러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는 일이 두 번 걸음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에 직접 6사를 거느리고, 9벌을 펴서 그 위태로움을 구제하고 하늘의 뜻에 합하고 따르며, 달아난 무리를 죽여 선조의 꾀를 이으려 한다. 지금 마땅히 율을 주어 출발하고 지휘를 나누어 길에 이르러 발해를 덮쳐 우레와 같이 떨쳐 부여를 지나 번개처럼 쓸어버리라. 방패를 나란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 군사들에게 경계하여 일러둔 후 가며, 거듭 알리고 타일러서 필승을 기한 후 싸우라. 왼족 12군은 누방, 장잠, 명해,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 등의 길을 나아가고, 오른쪽 12군은 염제, 함자, 혼비, 임둔, 후성, 제해, 답돈, 숙신, 갈석, 동이, 대방, 양평 등의 길로 나아가 연락이 끊어지지 않게 길을 이어 모두 평양에 집결하라.”했다.
凡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 號二百萬 其餽輸者倍之 宜社於南桑乾水上 類上帝於臨朔宮南 祭馬祖於薊城北 帝親授節度 每軍上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團各有偏將一人 其鎧胄纓拂旗旛 每團異色 日遣一軍 相去四十里 連營漸進 終四十日 發乃盡 首尾相繼 鼓角相聞 旌旗亘九百六十里 御營內 合十二衛·三臺·五省·九寺分隸 內外前後左右六軍 次後發 又亘八十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모두 113만 3천8백 명인데 2백만이라 불렀으며, 그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였다. 남쪽 산건수 가에서 사제를 지내고, 임삭궁 남쪽에서 상제에게 유제사하고, 마조를 계송 북쪽에서 제사하였다. 황제가 직접 조절하여 매 군마다 상장, 아장 각 1명, 기병은 40대로 대마다 100명, 10대를 단으로 하였다. 보졸(보병)은 80대로 하고, 나누어 네 개의 단으로 하였다. 단은 각각 편장 1명이다. 그 갑옷, 투구, 갓끈, 인장끈, 깃발은 매 단마다 색을 달리하였다. 매일 1군씩을 보내 40리를 떨어지게 하고, 진영을 이어 점차적으로 나아가게 하여 40일 만에 출발을 다하여 마쳤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뻗혔다. 어영 안에 12위, 3대, 5성, 9시를 합쳐 나누어 소속시키고, 내외, 전후, 좌우 6군을 뒤에 ㅊㄹ발시켜 또한 80리를 뻗혔다. 과거와 현재에 군대를 내는 성대함이 이 같음이 있지 않았다.
二月 帝御師 進至遼水 衆軍摠會 臨水爲大陣 我兵阻水拒守 隋兵不得濟 帝命工部尙書宇文愷 造浮橋三道於遼水西岸 旣成 引橋趣東岸 短不及岸丈餘 我兵大至 隋兵驍勇者 爭赴水接戰 我兵乘高擊之 隋兵不得登岸 死者甚衆 麥鐵杖躍登岸 與錢士雄·孟叉等 皆戰死 乃斂兵引橋 復就西岸 更命少府監何稠接橋 二日而成 諸軍相次繼進 大戰于東岸 我兵大敗 死者萬計 諸軍乘勝 進圍遼東城 則漢之襄平城也 車駕到遼 下詔赦天下 命刑部尙書衛文昇等 撫遼左之民 給復十年 建置郡縣 以相統攝
2월 황제가 군대를 몰아 나아가 요수에 이르렀다. 여러 군사가 모두 모여 물가에 다다라 큰 진을 이루었다. 우리군대가 물을 막고 지켰으므로 수나라 군대가 건너지 못하였다. 황제가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명하여 요수 서쪽 언덕에 부교 3개를 만들게 하였다. 이루어지자 다리를 당겨 동쪽 언덕으로 갔으나 짧아 한 길 정도 언덕에 미치지 못하였다. 우리 군대가 크게 이르니 수나라 군대 중 날래고 용맹한 자들이 다투어 물에 나아가 싸웠다. 우리 군대가 높은 곳에 올라 치니 수나라 군대가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맥철장이 뛰어 언덕에 올라 전사웅, 맹차 등과 모두 싸우다 죽었다. 이에 군대를 거두고 다리를 당겨 다시 서쪽 언덕으로 나아가게 하고, 다시 소부감 하조에게 명하여 다리를 붙이게 하였더니 2일 만에 이루어졌다. 여러 군사들이 차례로 이어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워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는데 죽은 자가 만을 헤아렸다. 여러 군사들이 이김을 타고 나아가 요동성을 에워쌌는데 곧 한나라의 양평성이다. 황제의 수레가 요에 이르러 명을 내려 천하를 용서하게 하고, 형부상서 위문승 등에게 명하여 요하 동쪽의 백성을 위로하게 하고, 10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주고, 군현을 두어 서로 통섭하게 하였다.
夏五月 初 諸將之東下也 帝戒之曰 “凡軍士進止 皆須奏聞待報 無得專擅” 遼東數出戰不利 乃嬰城固守 帝命諸軍攻之 又勑諸將 “高句麗若降 卽宜撫納 不得縱兵” 遼東城將陷 城中人 輒言請降 諸將奉旨不敢赴期 先令馳奏 比報至 城中守禦亦備 隨出拒戰 如此再三 帝終不悟 旣而城久不下
여름 5월 초 여러 장수들이 동쪽으로 내려올 때 황제가 그것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무릇 군사들이 나아가고 멈추는 것은 모두 반드시 아뢰고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했다. 요동에서 (우리 군대가) 여러 번 나가 싸웠으나 이롭지 않아 이에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황제가 여러 군대에게 명하여 치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기를 “고구려가 만약 항복한다면 곧 마땅히 위로하고 받아들여 군대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풀어주어서는 안 된다.”했다. 요동성이 장차 함락되려할 때 성 안의 사람들이 문득 항복을 청한다고 말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명을 받들어 감히 때에 맞추어 바로 가지 못하고, 먼저 달려 가 아뢰게 하였는데, 회답이 이를 때는 성안에서 지키는 것도 또한 갖추어져 있었다. 수나라가 나가 막아 싸웠다. 이렇게 하기를 2번 3번하여도 황제가 끝내 깨닫지 못하였다. 후에까지 성이 오래 동안 떨어지지(함락되지) 않았다.
六月己未 帝幸遼東城南 觀其城池形勢 因召諸將 詰責之曰 “公等自以官高 又恃家世 欲以暗懦待我耶 在都之日 公等皆不願我來 恐見病敗耳 我今來此 正欲觀公等所爲 斬公輩爾 公今畏死 莫肯盡力 謂我不能殺公耶” 諸將咸戰懼失色 帝因留止城西數里 御六合城 我諸城堅守不下 左翊衛大將軍來護兒帥江淮水軍 舳艫數百里 浮海先進 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與我軍相遇 進擊大破之 護兒欲乘勝趣其城 副摠管周法尙止之 請俟諸軍至俱進 護兒不聽 簡精甲數萬 直造城下 我將伏兵於羅郭內空寺中 出兵與護兒戰而僞敗 護兒逐之入城 縱兵俘掠 無復部伍 伏兵發 護兒大敗 僅而獲免 士卒還者不過數千人
6월 기미 황제가 요동성 남쪽에 거둥하여 그 성의 못과 형세를 살펴보고, 인하여 여러 장수를 불러 힐책하여 말하기를 “공들은 스스로 관직이 높다 여기고, 또한 가문을 믿고, 나를 어둡고 나약한 사람으로 대접하려 하는가? 도읍에 있던 날 공들이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병폐(낭패)를 볼가 두려워했기 때문일 뿐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공들이 하는 바를 보아 공들을 베어 죽이려 해서이다. 공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즐겨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은 내가 공들을 죽이지 못할 것으로 여겨서 인가?”했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얼굴빛을 잃었다. 황제가 인하여 성 서쪽 몇 리에 머물며, 육합성에 머물렀는데 우리 여러 성들이 굳게 지키고 함락되지 않았다. 좌익위 대장군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을 거느리고, 배를 수백 리에 뻗쳐서 바다에 떠 앞서 나아가 먼저 패수로부터 들어 왔다. 평양성에서 60리 거리에서 우리 군대와 서로 만나자 진격하여 (우리 군대를) 크게 깨트렸다. 내호아가 이김을 타고 그 성에 나아가고자 하니 부총관 주법상이 그것을 말리며, 여러 군사들이 이르러 함께 나아갈 것을 청하였다. 내호아가 듣지 않고, 날랜 군사 수만을 가려 바로 성 아래에 나아갔다. 우리 장수가 복병을 거느리고 나성 안의 빈 절 안에 숨겨두었다가 군대를 내어 내호아와 싸우다 거짓으로 패한 채 하였다. 내호아가 그를 따라 성으로 들어 가 군대를 풀어 약탈하여 다시 대오를 갖추지 못하였다. (이 때)숨은 군사들이 나가니 내호아가 크게 패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였으며, 사졸들 중에 돌아 온자가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我軍追至舡所 周法尙整陣待之 我軍乃退 護兒引兵還屯海浦 不敢復留應接諸軍 左翊衛大將軍宇文述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出樂浪道 左驍衛大將軍荊元恒出遼東道 右翊衛大將軍薛世雄出沃沮道 右屯衛將軍辛世雄出玄菟道 右禦衛將軍張瑾出襄平道 右武侯將軍趙孝才出碣石道 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出遂城道 檢校右禦衛虎賁郞將衛文昇出增地道 皆會於鴨淥水西 述等兵 自瀘河·懷遠二鎭 人馬皆給百日糧 又給排甲·槍矟幷衣資·戎具·火幕 人別三石已上 重莫能勝致
우리 군대가 추격하여 배가 있는 곳에 이르니 주법상이 진을 정돈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군대가 이에 물러났다. 내호아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 가 해포에 주둔하고, 감히 다시는 감히 여러 군대에 호응하지 못하였다.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를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를 나오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도를 나왔다. 우익위대장군 설세웅은 옥저도를 나오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도를 나오고, 우어위장군 잘근은 양평도를 나왔다.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를 나오고,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은 수성도를 나오고, 검교우어위 호분랑장 위문승은 증지도를 나와 모두 압록수 서쪽에서 만났다. 우문술 등의 군대가 노하, 회원 두 진에서부터 사람과 말에게 모두 100일의 식량을 지급하고, 또 방패, 갑옷, 창과 옷감, 무기, 화막을 지급하니 사람마다 3석 이상이 되어 무거워 능히 운반할 수 없었다.
下令軍中 “遺棄米粟者斬” 士卒皆於幕下掘坑埋之 纔行及中路 糧已將盡 王遣大臣乙支文德 詣其營詐降 實欲觀虛實 于仲文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者 必擒之” 仲文將執之 尙書右丞劉士龍爲慰撫使 固止之 仲文遂聽 文德還 旣而悔之 遣人紿文德曰 “更欲有言 可復來” 文德不顧 濟鴨淥水而去 仲文與述等 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糧盡欲還 仲文議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군중에 명령을 내려 “쌀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벤다.”하니 사졸들이 모두 장막아래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겨우 중간쯤 갔을 때 양식이 이미 장차 다하려 했다. 왕이 대신 을지문덕을 보내 그 진영에 나아가 거짓으로 항복하고, 실제는 허실을 관찰하려 했다. 우중문이 앞서 비밀 명령을 받았는데 “만약 (고구려)왕과 을지문덕을 만나면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것이었다. 우중문이 장차 잡으려 하는데 상서우승 유사룡이 위무사가 되어 굳게 말렸다. 우중문이 마침내 받아들였다. 을지문덕이 돌아간 후 뉘우치고는 사람을 보내 을지문덕을 속여 말하기를 “다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니 다시 오라.”했다. 을지문덕이 돌아보지 않고, 압록수를 건너갔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이 을지문덕을 놓친 후 속으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우문술은 양식이 다하자 돌아가려하였으나 우중문은 날랜 군래로 을지문덕을 추격하면 공이 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述固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之衆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且仲文此行 固知無功 何則古之良將能成功者 軍中之事 決在一人 今人各有心 何以勝敵” 時帝以仲文有計畫 令諸軍諮稟節度 故有此言 由是 述等不得已而從之 與諸將渡水追文德 文德見述軍士有饑色 故欲疲之 每戰輒走 述一日之中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於是 遂進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復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度難猝拔 遂因其詐而還 述等爲方陣而行 我軍四面鈔擊 述等且戰且行
우문술이 강하게 말리자 우중문이 노하여 말하기를 “장군은 10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작은 도적을 깨트리지 못하니 무슨 낮으로 황제를 뵈려하는가? 또한 (나)우중문은 이번 길에 공이 없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이냐 곧 옛날의 훌륭한 장수가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군대 안의 일을 결정함이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사람마다 각각 마음이 있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했다. 그 때 황제가 우중문에게 계획이 있을 것으로 여겨 여러 군들로 하여금 자문을 구하고 보고하여 조절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러 말을 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은 부득이 그것을 따라 여러 장수들과 물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로하게 하고자 매 싸움마다 문득 달아나니 우문술은 하루에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기자 자주 이김을 믿고, 또한 여러 사람의 주장에 강제되어 이에 마침내 나아가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만들었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고 우문술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만약 군대를 돌린다면 마땅히 왕을 받들고, 행재소에 조회하겠습니다.”했다. 우문술이 사졸들이 피폐해진 것을 보니 다시 싸울 수 없었다. 또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그 거짓으로 인하여 돌아갔다. 우문술 등이 네모 진을 치고 가는데, 우리 군대가 사방에서 습격하니 우문술 등이 또한 싸우고, 또한 행군하였다.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淥水 行四百五十里 將軍天水王仁恭爲殿 擊我軍却之 來護兒聞述等敗 亦引還 唯衛文昇一軍獨全 初 九軍度遼 凡三十萬五千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資儲器械巨萬計 失亡蕩盡
가을 7월 살수에 이르러 군대가 반쯤 건넜을 때 우리 군대가 뒤에서 그 후군을 치니,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싸우다 죽었다. 이에 여러 군사들이 모두 무너지는데 금할 수 없었다. 장수와 군사들이 달아나 돌아가는데 하루 낮 하루 밤 만에 압록수에 이르러 450리를 행군하였다. 장군 천수 사람 왕인공이 후군이 되어 우리 군대를 쳐서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술 등이 패하였다는 것을 듣고, 또한 이끌고 돌아갔는데 오직 위문승 1군만 홀로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수를 건널 때 모두 30만 5천이었는데 돌아와 요동성에 이르렀을 때는 오직 2700명 뿐이었다. 쌓아둔 기계가 거만을 헤아렸는데 모두 잃어버려 없어졌다.
帝大怒 鎖繫述等 癸卯引還 初 百濟王璋遣使 請討高句麗 帝使之覘我動靜 璋內與我潛通 隋軍將出 璋使其臣國智牟 入隋請師期 帝大悅 厚加賞賜 遣尙書起部郞席律 詣百濟 告以期會 及隋軍渡遼 百濟亦嚴兵境上 聲言助隋 實持兩端 是行也 唯於遼水西 拔我武厲邏 置遼東郡及通定鎭而已
황제가 크게 노하여 쇠사슬로 우문술 등을 묶고 계묘일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처음 백제왕 장(무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그를 시켜 우리의 동정을 엿보게 하니 장(무왕)이 우리와 몰래 통하였다. 수나라 군대가 장차 나오려하자 장(무왕)이 그 신하 국지모에게 시켜 수나라에 들어 가 군대의 (출병)기일을 청하게 했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후한 상을 내리고, 상서기부랑 석율을 보내 백제에 나아가 모일 기일을 알렸다. 수나라 군대가 요수를 건넘에 이르러 백제가 또한 국경에 군사를 엄히 배치하고,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 하면서 실제로는 양 다리를 걸쳤다. 이 정벌에는 다만 요수 서쪽에서 우리 무려라를 함락하고, 요동군과 통정진을 두었을 뿐이다.
二十四年 春正月 帝詔徵天下兵 集涿郡 募民爲驍果 修遼東古城 以貯軍糧 二月 帝謂侍臣曰 “高句麗小虜 侮慢上國 今拔海移山 猶望克果 况此虜乎” 乃復議伐 左光祿大夫郭榮諫曰 “戎狄失禮 臣下之事 千鈞之弩 不爲鼷鼠發機 奈何親辱萬乘 以敵小寇乎” 帝不聽
24년(613) 봄 정월 황제가 천하의 군대를 징발하여 탁군에 모이도록 명령하였
다. 백성을 모아 효과라 하고,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고, 군량을 저장하였다. 2월 황제가 모시는 신하(시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고구려 같은 하찮은 것들이 상국을 업신여기니 바다를 뽑고 산을 옮는 일도 오히려 해낼 수 있기를 바라는데 하물며 이런 오랑캐쯤이랴!”했다. 이에 다시 정벌을 논의하였는데 좌공록대부 곽영이 간하여 말하기를 “오랑캐가 예를 잃은 것은 신하의 일이고, 천균무게의 활은 쥐를 위해 발사하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직접 만승(황제)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서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 하십니까?”했다. 황제가 듣지 않았다.
夏四月 車駕度遼 遣宇文述與楊義臣 趣平壤 王仁恭出扶餘道 進軍至新城 我兵數萬拒戰 仁恭帥勁騎一千 擊破之 我軍嬰城固守 帝命諸將攻遼東 聽以便宜從事 飛樓․橦․雲梯․地道 四面俱進 晝夜不息 我應變拒之 二十餘日不拔 主客死者甚衆 衝梯竿長十五丈 驍果沈光升其端 臨城與我軍戰 短兵接殺十數人 我軍競擊之而墜未及地 適遇竿有垂絙 光接而復上 帝望見壯之 卽拜朝散大夫
여름 4월 황제의 수레가 요수를 건넌 뒤 우문술과 양의신을 보내 평양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왕인공이 부여도를 나와 진군하여 신성에 이르니 우리 군대 수만이 막아 싸웠다. 왕인공이 굳센 기병 1천을 거느리고 쳐서 깨트리니 우리군대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요동을 공격하게 하면서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게 하였기 때문에 비루, 당, 운제, 지도 가지고 사면에서 함께 진군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위리가 변화에 응하여 막아내니 20여일이 지나도 함락되지 않았다. 적과 아군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충제의 장대 길이가 15길이었는데, 효과 심광이 그 끝에 올라 성을 대하고 우리 군대와 싸우는데 짧은 무기로 맞붙어서 수십 명을 죽였다. 우리 군대가 다투어 그것을 쳐서 떨어뜨려 땅에 이르기 전에 마침 장대에 줄이 늘어져 있어 심광이 잡고 다시 올라갔다. 황제가 보고 장하게 여겨 곧 조산대부에 임명하였다.
遼東城久不下 帝遣造布囊百餘萬口 滿貯土 欲積爲魚梁大道 闊三十步 高與城齊 使戰士登而攻之 又作八輪樓車 高出於城 夾魚梁道 欲俯射城內 指期將攻 城內危蹙 會 楊玄感叛書至 帝大懼 又聞達官子弟皆在玄感所 益憂之 兵部侍郞斛斯政素與玄感善 內不自安 來奔 帝夜密召諸將 使引軍還 軍資器械攻具 積如丘山 營壘帳幕 案堵不動 衆心忷懼 無復部分 諸道分散
요동성이 오래 동안 함락되지 않자 황제가 베주머니 100여만 개를 만들어 보내 가득 흙을 담아 쌓아 어량대도를 만들고자 하였는데 넓이는 30보, 높이는 성과 같았다. 전사로 하여금 올라가 공격하게 하고, 또 바퀴 여덟 개 달린 누거를 만들었는데 성보다 높게하여 어량도를 끼고, 내려다보면서 성 안으로 활을 쏘게 하면서 기일을 지정해 장차 공격하려 하였으므로 성 안이 위태로웠다. 마침 양현감이 반역하였다는 글이 이르자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으며, 또 고관의 자제들이 모두 양현감이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였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본래 양현감과 친하였으므로 속으로 스스로 펀안하지 못하여 (고구려에)도망해 왔다. 황제가 밤에 비밀리 여러 장수를 불러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게 하면서 군수품과 기계, 공격하는 도구를 쌓으니 산과 같았고, 보루와 장막은 그대로 두고 움직이지 않았으나 군사들이 마음으로 떨며 두려워져 다시 부를 나눌 새도 없이 여러 길로 나뉘어 흩어졌다.
我軍卽時覺之 然不敢出 但於城內鼓噪 至來日午時 方漸出外 猶疑隋軍詐之 經二日 乃出數千兵追躡 畏隋軍之衆 不敢逼 常相去八九十里 將至遼水 知御營畢度 乃敢逼後軍 時 後軍猶數萬人 我軍隨而鈔擊 殺略數千人
우리 군사들이 즉시 깨달았으나 감히 나가지 못하고, 다만 성 안에서 북을 치고, 떠들썩할 뿐이었다. 다음날 오시에 이르러서야 바야흐로 밖에 나갔으나 아직 수나라 군사들이 속이는 것을 의심하였다. 2일이 지난 후 수천 명의 군사를 내어 뒤를 밟아 쫓았으나 수나라 군사가 많음을 두려워하여 감히 핍박하지 못하고, 항상 8, 90리의 거리를 두었다. 장차 요수에 이르러 황제의 진영이 건너기를 마친 것을 알고, 이에 감히 후군을 핍박하였다. 이 때 후군도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우리 군대가 따라가 습격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二十五年 春二月 帝詔百寮 議伐高句麗 數日無敢言者 詔復徵天下兵 百道俱進 秋七月 車駕次懷遠鎭 時 天下已亂 所徵兵多失期不至 吾國亦困弊 來護兒至卑奢城 我兵逆戰 護兒擊克之 將趣平壤 王懼遣使乞降 囚送斛斯政 帝大悅 遣使持節 召護兒還 八月 帝自懷遠鎭班師 冬十月 帝還西京 以我使者及斛斯政告大廟 仍徵王入朝 王竟不從 勑將帥嚴裝 更圖後擧 竟不果行
25년(614) 봄 2월 봄 2월 황제가 백관에게 명하여 고구려 정벌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며칠이 지나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조서로 다시 천하의 군대를 징발하여 모든 길로 모두 나아가게 하였다. 가을 7월 임금의 수레가 회원진에 행차하였다. 그때는 천하가 이미 혼란스럽고, 징발했던 군대도 기일을 잃고(어기고), 이르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또한 괴롭고 피곤하였다. 내호아가 비사성에 이르자 우리 군대가 맞아 싸웠는데, 내호아가 쳐서 이기고 평양으로 달려가려 했다.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구걸하게 하고, 가두어 놓았던 곡사정을 돌려보냈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부절을 지닌 사신을 보내 내호아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8월 황제가 스스로 회원진에서 군대를 돌렸다. 겨울 10월 황제가 서경에 돌아 와 우리 사신과 곡사정을 데리고 대묘에 고하고, 왕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왕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장수에게 명하여 무장을 엄하게 하고, 다시 후일의 거사를 꾀하였으나 마침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二十九年 秋九月 王薨 號曰嬰陽王
29년(618) 가을 9월 왕이 돌아가시니 왕호를 영양왕이라 했다.
榮留王 諱建武(一云成) 嬰陽王異母弟也 嬰陽在位二十九年薨 卽位
영류왕은 이름이 건무(또는 성)로 영양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영양왕이 재위 29년에 돌아가시므로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二月 遣使如唐朝貢 夏四月 王幸卒本 祀始祖廟 五月 王至自卒本
2년(619) 봄 2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여름 4월 왕이 졸본에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했다. 5월 왕이 졸본에서 (왕궁에)이르렀다.
四年 秋七月 遣使如唐朝貢
4년(621) 가을 7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五年 遣使如唐朝貢 唐高祖 感隋末戰士多陷於此 賜王詔書曰 『朕恭膺寶命 君臨率土 祗順三靈 懷柔萬國 普天之下 情均撫字 日月所炤 咸使乂安 王統攝遼左 世居藩服 思稟正朔 遠循職貢 故遣使者 跋涉山川 申布誠懇 朕甚嘉焉 方今 六合寧晏 四海淸平 玉帛旣通 道路無壅 方申緝睦 永敦聘好 各保疆埸 豈非盛美 但隋氏季年 連兵構難 攻戰之所 各失其氓 遂使骨肉乖離 室家分析 多歷年歲 怨曠不申 今二國通和 義無阻異 在此所有高句麗人等 已令追括 尋卽遣送 彼處所有此國人者 王可放還 務盡綏育之方 共弘仁恕之道』 於是 悉搜括華人以送之 數至萬餘 高祖大喜
5년(622)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였다. 당나라 고조가 수나라 말에 전사들이 많이 여기에서 많이 사로잡힌 것을 유감으로 여겨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짐이 공손히 보배로운 명을 받아(천명을 받아) 땅에 군림하고, 3령에 공손히 순종하여 모든 나라를 불러 쓰다듬으며, 넓은 하늘 아래를 골고루 어루만지고,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을 모두 편안하게 하였다. 왕은 요동을 다스리며 대대로 번복에 머물면서 정삭을 받들고 멀리서도 조공을 바치려고 사신을 보내 산천을 넘어 정성을 폈으니 짐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이제 하늘땅과 사방이 편안하고, 사해가 맑고, 편안해지고(잘 다스려 져서) 옥백이 이미 통하고, 도로가 막힘이 없으니 바야흐로 화목함을 펴서 길이 교분과 의의를 두텁게 하고, 각각의 나라를 보존하면 어찌 성대한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다만 수나라 말기 군대가(전쟁이) 연이어 어려움을 얽으니 싸우는 곳에서 각각 그 백성을 잃어 마침내 골육이 헤어지고, 가족이 나뉘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홀어미와 홀어미의 원한을 풀어주지 못하였다. 지금 두 나라가 통하고 우호하여 의리상 막힘과 다름이 없p 되었으므로 이곳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을 모아서 곧 보내려 한다. 그 곳(고구려)에 있는 이 나라(당 나라) 사람들을 왕이 놓아 돌려보내 편안히 기름의 방도를 힘써 다하고, 어질고 딱하게 여기는 도리를 함께 넓혀야 할 것이다.”했다. 이에 중국 사람을 모두 찾아 모아서 보냈는데 수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六年 冬十二月 遣使如唐朝貢
6년(623) 겨울 12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七年 春二月 王遣使如唐 請班曆 遣刑部尙書沈叔安 策王爲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國王 命道士 以天尊像及道法 往爲之講老子 王及國人聽之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7년(624) 봄 2월 왕이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가 역법을 ㅂㄴ포해 줄 것을 청하였다. (당나라가) 형부상서심숙안을 보내 왕을 책봉하여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국왕이라 하고, 도사에게 명하여 천존상과 도법을 가지고 가서 그들을 위해 노자를 강론하게 했다. (고구려)왕과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들었다. 겨울 12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八年 王遣人入唐求學佛老敎法 帝許之
8년(625) 왕이 사람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불교와 노자의 교법을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九年 新羅․百濟遣使於唐 上言 “高句麗閉道 使不得朝 又屢相侵掠” 帝遣散騎侍郞朱子奢 持節諭和 王奉表謝罪 請與二國平
9년(626) 신라, 백제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말을 올리기를 “고구려가 길을 막아 사신이 조회하지 못합니다. 또 여러 번 침범하고 약탈하였습니다.”했다. 황제가 산기상시랑 주자서를 보내 부절을 가지고 화친하라고 타일렀다. 왕이 표를 받들어 사죄하고, 두나라와 화평할 것을 청하였다.
十一年 秋九月 遣使入唐 賀太宗擒突厥頡利可汗 兼上封域圖
11년(628) 가을 9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태종이 돌궐 힐리가한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겸하여 봉역도(고구려 지도)를 올렸다.
十二年 秋八月 新羅將軍金庾信 來侵東邊 破娘臂城 九月 遣使入唐朝貢
12년(629) 가을 8월 신라 장군 김유신이 동쪽 변경에 와 침범하고 낭비성을 깨트렸다. 9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였다.
十四年 唐遣廣州司馬長孫師 臨瘞隋戰士骸骨 祭之 毁當時所立京觀 春二月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 千有餘里 凡一十六年畢功
14년(631) 당나라가 광주사마 장손사를 보내 수나라 전사의 해골을 묻은 데 와서 제사하고, 당시에 새웠던 경관을 허물었다. 봄 2월 왕이 무리를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동북쪽으로 부여성에서 동남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는데 1000여리로 16년만에 일을 마쳤다.
二十一年 冬十月 侵新羅北邊七重城 新羅將軍閼川逆之 戰於七重城外 我兵敗衄
21년(638) 겨울 10월 신라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입하였더니 신라장군 알천이 맞이하여 칠중성 밖에서 싸워 우리(고구려) 군대가 패하였다.
二十三年 春二月 遣世子桓權入唐朝貢 太宗勞慰 賜𧶘之特厚 遣王子弟入唐 請入國學 秋九月 日無光 經三日復明
23년(640) 봄 2월 세자 환권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태종이 수고를 위로하고, 선물을 특히 후하게 주었다. 왕이 자제를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국학에 들 것을 청하였다. 가을 9월 해가 빛이 없어지고, 3일이 지나 다시 밝아졌다.
二十四年 帝以我太子入朝 遣職方郞中陳大德答勞 大德入境 所至城邑 以綾綺厚餉官守者曰 “吾雅好山水 此有勝處 吾欲觀之” 守者喜導之 遊歷無所不至 由是 悉得其纖曲 見華人隋末 從軍沒留者 爲道親戚存亡 人人垂涕 故所至士女夾道觀之 王盛陳兵衛 引見使者 大德因 奉使覘國虛實 吾人不知 大德還奏 帝悅
24년(641) 황제는 우리 태자가 입조하였기 때문에 직방랑중 진대덕을 보내 수고에 보답하였다. 진대덕이 국경에 들어가 이르는 성읍마다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산수를 좋아하는데 여기에 경치좋은 곳이 있으면 내가 그것을 보려고 한다.”했다. 관리가 기뻐하며 인도하여 놀며 지나가는데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모두 그 자세한 곡절을 알 수 있었다. 중국 사람으로 수나라 말기 군대에 복무하다 숨어 머물고 있던 자를 보면 친척의 살아있음과 죽음을 말해주니 사람들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러므로 이르는 곳마다 남녀가 길 양 쪽에서 보았다. 왕이 군대를 성대히 진열하여 호위하게 하고, 사자를 이끌어 만났다. 대덕이 이 때문에 사신으로 와 나라의 허실을 엿볼 수 있는데 우리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진대덕이 돌아 가 아뢰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大德言於帝曰 “其國聞高昌亡大懼 館候之勤 加於常數” 帝曰 “高句麗本四郡地耳 吾發卒數萬攻遼東 彼必傾國救之 別遣舟師出東萊 自海道趨平壤 水陸合勢 取之不難 但山東州縣凋瘵未復 吾不欲勞之耳”
진대덕이 황제에게 말하기를 “그 나라에서 고창이 망한 것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객사에서 접대하는 것이 은근하여 보통보다 더합니다.”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4군의 땅일 뿐이다. 내가 군대 수만을 징발하여 요동을 치면 그들은 반드시 나라를 기우려 구원할 것이다. 따로 수군을 보내 동래를 나와 바닷길로부터 평양으로 달려 가 수군과 육군이 세력을 합하여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산동의 주현이 피폐해져 회복되지 않아 내가 그들을 수고롭게 하고자 하지 않을 뿐이다.”했다.
二十五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王命西部大人蓋蘇文 監長城之役 冬十月 蓋蘇文弑王 十一月 太宗聞王死 擧哀於苑中 詔贈物三百段 遣使持節吊祭
25년(642) 봄 정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였다. 왕이 서부 대인 개소문에게 명하여 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게 했다. 겨울 10월 개소문이 왕을 죽였다. 11월 태종은 왕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동산에서 조의를 표하고, 물건 300단을 주고 부절을 지닌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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