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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9

by 최인표 2024. 1. 4.

三國史記卷第二十一 高句麗本紀第九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高句麗本紀第九 寶臧王 上

 

寶臧王 諱臧 或云寶臧 以失國故無諡 建武王弟大陽王之子也 建武王在位第二十五年 蓋蘇文弑之 立臧繼位 新羅謀伐百濟 遣金春秋乞師 不從

보장왕은 이름이 장(혹은 보장)이다.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시호가 없다. 건무왕의 동생 대양왕의 아들이다. 건무왕 25년 개소문이 살해하고 장을 세워 왕위를 이었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려 하여 김춘추를 보내 군대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二年 春正月 封父爲王 遣使入唐朝貢 三月 蘇文告王曰 三敎譬如鼎足 闕一不可 今儒釋並興 而道敎未盛 非所謂備天下之道術者也 伏請遣使於唐 求道敎以訓國人大王深然之 奉表陳請 太宗遣道士叔達等八人 兼賜老子道德經 王喜 取僧寺館之 閏六月 唐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而專國政 誠不可忍 以今日兵力取之不難 但不欲勞百姓 吾欲使契丹·靺鞨擾之 何如長孫無忌曰 蘇文自知罪大 畏大國之討 嚴設守備 陛下姑爲之隱忍 彼得以自安 必更驕惰 愈肆其惡 然後討之 未晩也

2(643) 봄 정월 아버지를 봉해 왕이라 하였다.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였다. 3월 개소문이 왕에게 알려 말하기를 삼교(유교, 불교, 도교)는 비유하면 솥발과 같아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 지금 유학과 불교가 나란히 흥기하고 도교는 번성하지 못하니 이른 바 천하의 도술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나라 사람을 가르칠 것을 청합니다.”했다. 대왕이 그렇다 여기고 표를 올려 (도교를 구하는)청을 말하니 태종이 도사 숙달 등 8인을 보내고, 겸하여 노자 도덕경을 내렸다. 왕이 기뻐하며 절을 빼앗아 도관으로 하였다. 6월 당나라 태종이 말하기를 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이고 나라의 정사를 마음대로 하니 진실로 차마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군대의 힘으로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다만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려고, 내가 거란과 말갈로 하여금 흔들게 하고자 하는 데 어떠한가?”했다. 장손무기가 말하기를 개소문이 스스로 죄가 큰 것을 알아 대국의 토벌을 두려워하여 엄격하게 지키고 대비할 것이니 폐하께서 우선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시면 그들은 스스로 편안하게 여겨 반드시 다시 교만하고 게을러져 더욱 그 악을 멋대로 행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들을 토벌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帝曰 遣使持節備禮冊命 詔曰 懷遠之規 前王令典 繼世之義 列代舊章 高句麗國王臧 器懷韶敏 識宇詳正 早習禮敎 德義有聞 肇承藩業 誠款先著 宜加爵命 允玆故實 可上柱國遼東郡王高句麗王秋九月 新羅遣使於唐 言 百濟攻取我四十餘城 復與高句麗連兵 謀絶入朝之路乞兵救援 十五日 夜明不見月 衆星西流

황제가 말하기를 좋다.”하고는 사신을 보내 지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책명 하였다. 조서에 말하기를 먼 나라를 품는 규범은 전 왕의 아름다운 법이고, 세대를 잇는 의리는 여러 왕대의 옛 법이다. 고구려 국왕 장은 재능과 생각이 밝고 민첩하며, 식견과 도량이 치밀하고 바라며 일찍이 예교를 익혀 덕과 의리로 명성이 있었다. 처음 번방의 기업을 이어 정성이 먼저 드러나 마땅히 작위를 더하여 옛 실제를 인정하여 상주국 요동군왕 고구려왕이라 했다. 가을 9월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백제가 우리의 40여 성을 쳐서 빼앗고, 다시 고구려와 군대를 이어 입조의 길을 끊으려 합니다.”하며 군대로 구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15일 밤이 밝아 달을 보지 못하고, 뭇 별들이 서쪽으로 흘렀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帝命司農丞相里玄奬 賚璽書賜王曰新羅委質國家 朝貢不乏 爾與百濟 各宜戢兵 若更攻之 明年發兵 擊爾國矣玄奬入境 蓋蘇文已將兵擊新羅 破其兩城 王使召之 乃還 玄奬諭以勿侵新羅 蓋蘇文謂玄奬曰 我與新羅 怨隙已久 往者 隋人入寇 新羅乘釁 奪我地五百里 其城邑皆據有之 自非歸我侵地 兵恐未能已

3(644) 봄 정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였다. 황제가 사농승상 이현장에게 명하여 새서를 가지고 왕에게 내려 말하기를 신라는 신복한 나라로 조공이 적지 않다. 너와 백제는 각각 마땅히 군대를 철수할 것이요 만약 다시 공격한다면 내년에 군대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했다. 이현장이 국경에 들어가니 개소문은 이미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 그 두 개 성을 깨트렸다. 왕이 사람을 시켜 부르니 이에 돌아왔다. 이현장이 신라를 침범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개소문이 이현장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와 신라는 원한이 매우 오래되었다. 지난번에 수나라 사람들이 침입해 왔을 때 신라가 틈을 타고 우리 땅 500리를 빼앗아 그 성읍을 모두 차지하고 소유하고 있으니 (신라가) 우리의 침범한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군대를 그만두지 못할 것입니다.”했다.

 

玄奬曰 旣往之事 焉可追論 今遼東諸城 本皆中國郡縣 中國尙且不言 高句麗豈得必求故地莫離支竟不從 玄奬還 具言其狀 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賊其大臣 殘虐其民 今又違我詔命 不可以不討秋七月 帝將出兵 勑洪··江三州 造舡四百艘 以載軍糧 遣營州都督張儉等 帥幽·營二都督兵及契丹··靺鞨 先擊遼東 以觀其勢 以大理卿韋挺爲餽輸使 自河北諸州 皆受挺節度 聽以便宜從事 又命少卿蕭銳 轉河南諸州糧入海

이현장이 말하기를 지나간 일을 어찌 논하리오. 지금 요동의 여러 성들은 본래 중국의 군현으로 중국이 오히려 또한 말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어찌 반드시 옛 땅을 구할 수 있으리오!”했다. 막리지가 끝내 따르지 않으니 이현장이 돌아 가 그 모습을 모두 말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이고 그 대신을 해치며, 그 백성에게 잔인하고 사납게 대하였다. 지금 또한 나의 명령을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했다. 가을 7월 황제가 군대를 내려 하여 홍주, 요주, 강주 3개 주에 명하여 배 400척을 만들고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도독 장검등을 보내 유주, 영주 두 도독 군대와 거란, , 말갈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치는 것으로서 그 형세를 관찰하게 했다. 대리경 위정을 궤수사로 삼고, 하북 여러 주에서부터 모두 위정의 조절을 받게 하여 편의에 따라 일에 종사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소경 소예에게 명하여 하남 여러 주의 양식을 운반하여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다.

 

九月 莫離支貢白金於唐 禇遂良曰 莫離支弑其君 九夷所不容 今將討之 而納其金 此郜鼎之類也 臣謂不可受帝從之 使者又言 莫離支遣官五十 入宿衛帝怒謂使者曰 汝曹皆事高武 有官爵 莫離支弑逆 汝曹不能復讎 今更爲之遊說 以欺大國 罪孰大焉悉以屬大理 冬十月 平壤雪色赤 帝欲自將討之 召長安耆老 勞曰 遼東故中國地 而莫離支賊殺其主 朕將自行經略之 故與父老約 子若孫從我行者 我能拊循之 無容恤也則厚賜布粟 羣臣皆勸帝毋行

9월 막리지가 당나라에 백금을 바치니 저수량이 말하기를 막리지는 그 임금을 죽여 9이가 용납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지금 장차 토벌하려 하는데 그 금을 받는 것은 이는 곡정(뇌물)의 류입니다. 신은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했다. 황제가 그것을 따랐다. 사자가 또 말하기를 막리지가 관리 50 명을 보내 들어와 숙위하려 합니다.”했다. 황제가 노하여 사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고무를 섬겨 관작이 있다. 막리지가 임금을 죽였는데도 너희들은 복수하지 않고, 지금 다시 그를 위해 유세하는 것으로서 대국을 속이니 죄가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하고는 모두 대리에 속하게 했다. 겨울 10월 평양에 붉은 눈이 내렸다. 황제가 장차 스스로 토벌하려 하여 장안의 늙은이를 불러 위로하며 말하기를 요동은 옛 중국 땅인데 막리지가 그 임금을 해치고 죽였으니 짐이 장차 스스로 가서 공격하고 점령하여 다스리려 한다. 그러므로 어르신들과 약속하건대 자식이나 손자로 나를 따라 가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터이니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했다. 곧 베와 곡식을 후하게 내렸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황제가 가지 말 것을 권하였다.

 

 

帝曰 吾知之矣 去本以趣末 捨高以取下 釋近而之遠 三者爲不祥 伐高句麗是也 然蓋蘇文弑君 又戮大臣以逞 一國之人延頸待救 議者顧未亮耳於是 北輸粟營州 東儲粟古大人城 十一月 帝至洛陽 前宜州刺史鄭天璹已致仕 帝以其嘗從隋煬帝伐高句麗 召詣行在問之 對曰 遼東道遠 糧轉艱阻 東夷善守城 不可猝下帝曰 今日非隋之比 公但聽之以刑部尙書張亮爲平壤道行軍大摠管 帥江淮·嶺硤兵四萬·長安·洛陽募士三千·戰艦五百艘 自萊州泛海 趣平壤

황제가 말하기를 내가 그것을 안다. 근본을 버리고 지엽에 나아가고, 높음을 버리고, 낮음을 취하고,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곳으로 가는 3가지는 상서롭지 않음이 되니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개소문은 임금을 죽였고, 또 대신을 죽이는 것으로서 만족해 하니 한 나라들이 사람들이 (모두)목을 늘이고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돌아보지 못할 뿐이다.”했다. 이에 북쪽으로는 곡식을 영주에 운반하고, 동쪽으로 곡식을 고대인성에 쌓게 했다. 11월 황제가 낙양에 이르자 전 의주자사 정천숙은 이미 벼슬을 그만두었으나, 황제가 일찍이 수나라 양제를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였기 때문에 행재소로 불러 물으니 대답해 말하기를 요동도가 멀어 양식을 운반하는 것이 어렵고, 동이(고구려)는 성을 잘 지키니 갑자기 함락할 수 없습니다.”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오늘은 수나라 때에 비할 수 없다. 공은 다만 따르기만 하라.”했다.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강회, 영협의 군대 4, 장안, 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 전함 500척을 거느리고 내주에서 바다에 떠 평양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又以太子詹事左衛率李世勣爲遼東道行軍大摠管 帥步騎六萬及蘭·河二州降胡 趣遼東 兩軍合勢 大集於幽州 遣行軍摠管姜行本·少監丘行淹 先督衆工 造梯衝於安羅山 時 遠近勇士應募及獻攻城器械者 不可勝數 帝皆親加損益 取其便易 又手詔諭天下 以高句麗蓋蘇文弑主虐民 情何可忍 今欲巡幸幽·薊 問罪遼·碣 所過營頓 無爲勞費

또한 태자첨사좌위솔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을 삼아 보병, 기병 6만과 난주, 하주 두 주의 항복한 오랑캐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달려가게 하여 두 군대가 세력을 합하여 크게 유주에 모이게 했다. 행군총관 강행본, 소감 구행엄을 보내 먼저 여러 장인을 감독하여 안라산에서 사다리와 충차를 만들게 하였다. 그 때 멀고 가까운 곳의 용사들이 모집에 응하고, 공성기계를 바치는 자들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황제가 모두 직접 덜고 더하여 그 편하고 쉬운 것을 취하였다. 또 친필 조서로 천하를 깨우치기를 고구려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에게 사납게 하는 것을 실정상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유주, 계주를 순행하고, 요동과 갈성으로 가 죄를 물으려 하니 지나는 바의 군영과 숙소에서 수고로움과 허비가 됨이 없게 하라.”했다.

 

且言 昔 隋煬帝殘暴其下 高句麗王仁愛其民 以思亂之軍擊安和之衆 故不能成功 今略言必勝之道有五 一曰 以大擊小 二曰 以順討逆 三曰 以理乘亂 四曰 以逸敵勞 五曰 以悅當怨 何憂不克 布告元元 勿爲疑懼於是 凡頓舍供備之具 減者太半 (十二月) 詔諸軍及新羅·百濟··契丹 分道擊之

또 말하기를 옛날 수나라 양제는 그 아래에게 잔인하고 사납게 하였는데, 고구려왕은 그 백성에게 어질고 아꼈다. 어지러움을 생각하는 군대로서 편안하고 화목한 무리를 치려하였기 때문에 공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금 대략적으로 말하면 반드시 이기는 방법은 다섯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큰 것으로서 작은 것을 치는 것이고, 둘째는 순으로서 거스름을 토벌하는 것이고, 셋째는 다스려지는 형세로서 어지러운 틈을 타는 것이요, 네 번째는 편안함으로서 수고로움을 대적하는 것, 다섯째 기쁨으로 원망함을 맞서는 것이다.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을 근심하는가? 백성들에게 펴 알리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했다. 이에 숙사, 공급, 설비의 기구를 줄인 것이 태반이었다. 여러 군사와 신라, 백제, , 거란에게 명하여 길을 나누어 치게 하였다.

 

四年 春正月 李世勣軍至幽州 三月 帝至定州 謂侍臣曰 遼東本中國之地 隋氏四出師 而不能得 朕今東征 欲爲中國 報子弟之讎 高句麗 雪君父之恥耳 且方隅大定 唯此未平 故及朕之未老 用士大夫餘力 以取之帝發定州 親佩弓矢 手結雨衣於鞍後 李世勣軍發柳城 多張形勢 若出懷遠鎭者 而潛師北趣甬道 出我不意

4(645) 봄 정월 이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이르렀다. 3월 황제가 정주에 이르러 시신(모시는 신하)에게 일러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으로 수나라가 네 번 군대를 내었으나 얻을 수 없었다. 짐이 지금 동쪽으로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자제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고, 고구려에게는 임금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려는 것일 뿐이다. 또한 ㅅ방이 크게 안정되었는데 오직 이 곳만 평정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짐이 늙지 않았을 때 사대부의 남은 힘을 써서 빼앗으려는 것이다.”했다. 황제가 정주를 출발하는데 직접 활과 화살을 차고 자기 손으로 비옷을 안장 뒤에 매었다. 이세적의 군대가 유성을 출발하여 형세를 과시하며 마치 회원진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였으나 몰래 군대를 북쪽 양쪽에 담이 있는 길(甬道)을 달려 우리가 생각지 못한 곳으로 나왔다.

 

夏四月 世勣自通定濟遼水 至玄菟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 副大摠管江夏王道宗 將兵數千 至新城 折衝都尉曹三良 引十餘騎 直壓城門 城中驚擾 無敢出者 營州都督張儉 將胡兵爲前鋒 進度遼水 趨建安城 破我兵 殺數千人 李世勣·江夏王道宗攻盖牟城 拔之 獲一萬人·糧十萬石 以其地爲盖州 張亮帥舟師 自東萊度海 襲卑沙城 城四面懸絶 惟西門可上 程名振引兵夜至 副摠管王大度先登 五月城陷 男女八千口沒焉

여름 4월 이세적이 통정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렀다. 우리의 성읍이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부대총관 강하왕 도종이 군대 수천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르자 절충도위 조삼랑이 10여기를 이끌고 곧바로 성문을 압박하니 성 안이 놀라고 소란해져 감히 나오는 자가 없었다. 영주 도독 장검이 호병(이민족 군대)을 거느리고 전봉(선봉)이 되어 나아가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달려 가 우리 군대를 깨트리고 수 천 명을 죽였다. 이세적, 강하왕도종이 개모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1만 명을 사로잡고 식량 10만석을 빼앗고, 그 땅을 개주라 하였다. 장량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비사성을 습격하였다. 성은 사방이 절벽인데 오직 서문만 오를 수 있었다. 정명진이 군대를 이끌고 밤에 이르자 부총관 왕대도가 먼저 올랐다. 5월에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李世勣進至遼東城下 帝至遼澤 泥淖二百餘里 人馬不可通 將作大匠閻立德布土作橋 軍不留行度澤東 王發新城·國內城步騎四萬 救遼東 江夏王道宗將四千騎逆之 軍中皆以爲衆寡懸絶 不若深溝高壘以待車駕之至 道宗曰 賊恃衆有輕我心 遠來疲頓 擊之必敗 當淸路以待乘輿 乃更以賊遺君父乎都尉馬文擧曰 不遇勍敵 何以顯壯士策馬奔擊 所向皆靡 衆心稍安 旣合戰 行軍摠管張君乂 退走 唐兵敗衄 道宗收散卒 登高而望見 我軍陣亂 與驍騎數千衝之 李世勣引兵助之 我軍大敗 死者千餘人

이세적이 나아가 요동성 아래에 이르고, 황제는 요택에 이르렀으나 진흙탕이 200여리여서 사람과 말이 통행할 수 없었다. 장작대장 염입덕이 흙을 펴고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군대가 머물지 않고 늪의 동쪽으로 건너갔다. 왕이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을 내어 요동을 구원하였다. 강하왕 도종이 4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맞이하였는데 군대 안이 모두 많고 적음이 현격하니 도랑을 깊게하고, 보루를 높이 하는 것으로서 황제의 수레가 이르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도종이 말하기를 적이 많음을 믿고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고, 멀리서 와 피로할 것이니 그들을 치면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마땅히 길을 깨끗하게 하고, 황제가 탄 수레를 기다려야 할 것인데 곧 다시 적을 임금에게 남겨야 하겠습니까?”했다. 도위 마문거가 말하기를 강한 적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장사임을 드러내리오.”하고는 말에 채찍하고 달려 치는데 향하는 곳마다 쓰러지니 무리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맏붙어 싸우게 되자 행군총관 장군예가 물러나 달아나니 당 나라 군대가 패배하였다. 도종이 흩어진 군졸을 거두어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니 우리 군대의 진이 어지러우므로 날랜 기병 수천으로 치고, 이세적이 군대를 이끌고 도우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여 죽은 이가 천여 명이었다.

 

帝度遼水 撤橋以堅士卒之心 軍於馬首山 勞賜江夏王道宗 超拜馬文擧中郞將 斬張君乂 帝自將數百騎 至遼東城下 見士卒負土塡塹 帝分其尤重者 於馬上持之 從官爭負土置城下 李世勣攻遼東城 晝夜不息 旬有二日 帝引精兵會之 圍其城數百重 鼓噪聲振天地 城有朱蒙祠 祠有鎖甲銛矛 妄言前燕世天所降 方圍急 飾美女以婦神 巫言 朱蒙悅 城必完勣列砲車 飛大石過三百步 所當輒潰 吾人積木爲樓 結絙罔 不能拒 以衝車撞陴屋碎之

황제가 요수를 건너자 사리를 철거하는 것으로서 군사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에 진을 쳤다. 강하왕 도종을 위로하여 (선물을) 내리고, 마문거는 승진시켜 중랑장을 삼고, 장군예는 머리를 베어 죽였다. 황제가 스스로 수백 기를 거느리고 요동성 아래에 이르러 군사들이 흙을 져서 구덩이를 메꾸는 것을 보았다. 황제가 그 매우 무거운 것을 나누어 말 위에 얹으니 따르던 관리들이 다투어 흙을 져다 성 아래 두었다. 이세적이 요동성 공격하는 것을 밤과 낮으로 쉬지 않고 하기를 12일이 지났다. 황제도 정예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여 그 성을 수 백겹 에워쌌다. 북치는 소리와 외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성에 주몽의 사당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녕되게 말하기를 전연 대에 하늘이 내린 것이라 하였다. 바야흐로 에워싸여 위급해지자 미녀를 꾸며 부신이라 하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시니 성은 반드시 완전할 것이다.(함락되지 않을 것이다.) 했다. 이적이 포차를 벌여 놓고 큰 돌을 날리니 300보를 지나 맞는 것마다 문득 무너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무를 쌓아 다락을 만들고 끈으로 그물을 엮었으나 막을 수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충차로 성가퀴를 쳐서 부수었다.

 

時 百濟上金髹鎧 又以玄金爲文鎧 士被以從 帝與勣會 甲光炫日 南風急 帝遣銳卒 登衝竿之末 爇其西南樓 火延燒城中 因揮將士登城 我軍力戰不克 死者萬餘人 見捉勝兵萬餘人·男女四萬口·糧五十萬石 以其城爲遼州 李世勣進攻白巖城西南 帝臨其西北 城主孫代音 潛遣腹心請降 臨城投刀鉞爲信曰 奴願降 城中有不從者帝以唐幟與其使曰 必降者 宜立之城上代音立幟 城中人以爲唐兵已登城 皆從之 帝之克遼東也 白巖城請降 旣而中悔 帝怒其反覆 令軍中曰 得城 當悉以人物賞戰士

그 때 백제가 검붉게 칠한 쇠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무늬있는 갑옷을 만들어 마치니 군사들이 입고 따랐다. 황제와 이적이 만나니 갑옷의 빛이 태양에 빛났다. 남풍이 세차게 불자 황제가 날랜 군사를 보내 충차의 장대 끝에 올라가 그 서남쪽 다락을 불사르게 하니 불이 이어져 성안을 태웠다. 이로 인하여 장사를 지휘하여 성에 오르게 하니 우리 군대가 힘써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만여 명, 사로잡힌 이기는 군사가(무적의 군사) 만여 명, 남녀 4만 명, 양식 50만석을 빼앗겼다. (당나라가) 그 성을 요주라 했다. 이 세적은 나아가 백암성 서남쪽을 공격하고, 황제는 그 서북쪽에 이르니 성주 손대음이 몰래 복심(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그 사신이) 성에 이르렀을 때 칼과 도끼를 던져 신표로 삼아 말하기를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나 성안에는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했다. 황제가 당나라 깃발을 그 사신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반드시 항복하려 한다면 마땅히 그 것을 성위에 세우라.”했다. 손대음이 깃발을 세우자 성 안의 사람들이 당나라 군대가 이미 성에 오른 것으로 여겨 모두 따랐다. 황제가 요동성을 이겼을 때 백암성이 항복을 청하였다가 얼마 후 뉘우쳤다. 황제가 그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에 노하여 군대 안에 명령하기를 성을 얻으면 마땅히 모든 사람들과 물건을 전사들에게 상으로 할 것이다.”했다.

 

李世勣見帝將受其降 帥甲士數十人 請曰 士卒所以爭冒矢石 不顧其死者 貪虜獲耳 今城垂拔 奈何更受其降 孤戰士之心帝下馬謝曰 將軍言是也 然縱兵殺人而虜其妻孥 朕所不忍 將軍麾下有功者 朕以庫物賞之 庶因將軍贖此一城世勣乃退 得城中男女萬餘口 臨水設幄 受其降 仍賜之食 八十已上 賜帛有差 他城之兵在白巖者 悉慰諭給糧仗 任其所之 先是 遼東城長史 爲部下所殺 其省事奉其妻子 奔白巖 帝憐其有義 賜帛五匹 爲長史造靈輿 歸之平壤 以白巖城爲巖州 以孫代音爲刺史

이세적은 황제가 그 항복을 받는 것을 보고 갑사 수십명을 거느리고 청하여 말하기를 군사들이 다투어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 그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그 포로 잡는 것을 탐해서일 뿐입니다. 지금 성이 함락되려하는데 어찌하여 다시 그 항복을 받아 전사의 마음을 외롭게 하는(저버리는) 것입니까?” 했다. 황제가 말에서 내려 사과하며 말하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차마 하지 못하는 바이다. 장군 휘하의 공이 있는 자는 짐이 창고의 물건으로 상줄 것이니 장군은 이 하나의 성을 바꾸기 바란다.”했다. 이세적이 이에 물러났다. (황제가)성안의 남녀 만여 명을 얻어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 항복을 받고 음식을 내렸으며, 80세 이상에게는 비단을 차이 있게 내리고, 다른 성의 군사로 백암성에 있는 자들은 모두 위로하고 타일러 식량과 무기를 주고 그 가는 바대로 맡겨두었다. 이에 앞서 요동성의 장자가 부하에게 죽음을 당하자 그 성사가 그 처자를 받들고 백암으로 달아났다. 황제가 의리 있음을 불쌍하게 여겨 비단 5필을 내리고 장사를 위하여 영여를 만들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백암성을 암주라 하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初 莫離支遣加尸城七百人 戍盖牟城 李世勣盡虜之 其人請從軍自効 帝曰 汝家皆在加尸 汝爲我戰 莫離支必殺汝妻子 得一人之力而滅一家 吾不忍也皆廩賜遣之 以盖牟城爲蓋州 帝至安市城 進兵攻之 北部耨薩高延壽·南部耨薩高惠眞 帥我軍及靺鞨兵十五萬 救安市 帝謂侍臣曰 今爲延壽策有三 引兵直前 連安市城爲壘 據高山之險 食城中之粟 縱靺鞨掠吾牛馬 攻之不可猝下 欲歸則泥潦爲阻 坐困吾軍 上策也 拔城中之衆 與之宵遯 中策也 不度智能 來與吾戰 下策也 卿曹觀之 彼必出下策 成擒在吾目中矣

처음 막리지가 가시성의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모두 사로잡았다. 그 사람들이 군대를 따라 공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너희들의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는데 너희들이 나를 위하여 싸운다면 막리지가 반드시 너의 처자를 죽일 것이니 한 사람의 힘을 얻으려 한 집안을 없애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한다.”하고는 모두에게 양식을 주어 보냈다. 개모성을 개주로 삼았다. 황제가 안시성에 이르러 군대를 나아가게 하여 공격하였다. 북부욕살 고연수, 남부욕살 고혜진이 우리 군대와 말갈 군대 15만을 이끌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모시는 신하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고연수의 계책으로는 3가지가 있다. 군대를 이끌고 곧바로 전진하여 안시성을 연이어 보루로 삼고, 높은 산의 험함을 차지하고 성아의 고식을 먹으며 말갈을 놓아 우리 소와 말을 약탈하게 한다면 그들을 공격하여도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고, (우리가)돌아가려하면 진흙탕에 막힐 것이니 앉아서 우리 군대를 곤궁하게 하는 것으로 상책이다. 성 안의 무리를 뽑아 그들과 밤에 달아나는 것은 중책이다. 지혜와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와서 우리와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 그대들은 보아라. 그들은 반드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사로잡는 것은 내 눈에 달려 있다.”했다.

 

時 對盧高正義年老習事 謂延壽曰 秦王內芟羣雄 外服戎狄 獨立爲帝 此命世之才 今擧海內之衆而來 不可敵也 爲吾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遣奇兵 斷其糧道 糧食旣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乃可勝延壽不從 引軍直進 去安市城四十里 帝恐其低徊不至 命大將軍阿史那社尒 將突厥千騎以誘之 兵始交而僞走 延壽曰 易與耳競進乘之 至安市城東南八里 依山而陣

그 때 대로 고정의는 나이가 많아 일을 잘 알았는데 고연수에게 일러 말하기를 진나라 왕이 안으로 군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융적(오랑캐)을 복속하여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일세의 뛰어난 인재입니다. 지금 천하의 무리를 데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습니다. 내가 계책으로 삼은 것은 군대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고, 날을 보내며 오래 동안 버티다 기습 군대를 나누어 보내 그 식량 길을 끊는 것이 낫습니다. 식량이 다하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해도 길이 없어 곧 이길 수 있습니다.”했다. 고연수가 따르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바로 나아가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까지 갔다. 황제는 그가 머뭇거리고 이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대장군 아사나사이에게 명령하여 돌궐의 1000기를 거느리고 유인하게 하였다. 군대가 첫 교전하자 거짓으로 달아나니 고연수가 말하기를 상대하기 쉽구나!”하고는 다투어 나아가 이김을 타고, 안시성 동남쪽 8리에 이르러 산에 기대 진을 쳤다.

 

帝悉召諸將問計 長孫無忌對曰 臣聞 臨敵將戰 必先觀士卒之情臣適行經諸營 見士卒聞高句麗至 皆拔刀結旆 喜形於色 此必勝之兵也 陛下未冠 身親行陣 凡出奇制勝 皆上稟聖謀 諸將奉成筭耳 今日之事 乞陛下指蹤

황제가 여러 장수를 불러 계책을 물었다. 장손무기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적을 대하여 장차 싸우려할 때는 반드시 먼저 군사의 실정을 관찰해야 한다.’합니다. 신이 마침 여러 진영을 지나가는데 군사들이 고구려가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 모두 칼을 뽑고, 깃발을 매면서 얼굴에 기뻐하는 형상이 있었습니다. 이는 반드시 이기는 군대입니다. 폐하께서 관례하기 이전(20세 이전)에 직접 진영에 가 기습하는 군대를 내어 승리하였으니 모두 위로 성스러운 꾀(황제의 꾀)를 받고, 여러 장수들이 받들어 이루었을 뿐입니다. 오늘의 일은 폐하를 따를 것을 청합니다.”했다.

 

帝笑曰 諸公以此見讓 朕當爲諸公商度乃與無忌等 從數百騎 乘高望之 觀山川形勢 可以伏兵及出入之所 我軍與靺鞨合兵爲陣 長四十里 帝望之 有懼色 江夏王道宗曰 高句麗傾國以拒王師 平壤之守必弱 願假臣精卒五千 覆其本根 則數十萬之衆 可不戰而降帝不應 遣使紿延壽曰 我以爾國强臣弑其主 故來問罪 至於交戰 非吾本心 入爾境 芻粟不給 故取爾數城 俟爾國修臣禮 則所失必復矣延壽信之 不復設備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여러 공들이 이로서 양보하니 짐은 마땅히 여러 공들을 위하여 생각하고 헤아리겠다.”했다. 이에 장손무기 등이 따르는 수백 기와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며 산천의 형세를 관찰하여 복병과 나고 들 만한 곳을 보았다. 우리 군대와 말갈이 군대를 합하여 진영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40리였다. 황제가 그것을 바라보고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강하왕 도종이 말하기를 고구려가 나라를 기우려 왕사(당나라 군대)를 막으니 평양의 지킴은 반드시 약할 것입니다. 원하건대 신에게 정예군대 5천을 빌려주시어 그 뿌리를 뒤엎는다면 곧 수십만의 무리를 싸우지 않고도 항복할 것입니다.”했다. 황제가 대답하지 않고, 사신을 고연수에게 보내 말하기를 나는 너희 나라의 강한 신하가 그 임금을 죽였기 때문에 와서 죄를 묻는 것으로 서로 싸움에 이른 것은 내 본 마음이 아니다. 너희 국경에 들어갔을 때 식량이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 몇 개의 성을 빼앗았다.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를 닦는 것을 기다려 잃은 바(빼앗은 것)을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했다. 고연수가 그것을 믿고 다시 대비하지 않았다.

 

帝夜召文武計事 命李世勣將步騎萬五千 陣於西嶺 長孫無忌·牛進達 將精兵萬一千爲奇兵 自山北出於狹谷 以衝其後 帝自將步騎四千 挾鼓角 偃旗幟 登山 帝勑諸軍 聞鼓角 齊出奮擊 因命有司 張受降幕於朝堂之側 是夜 流星墜延壽營 旦日 延壽等獨見李世勣軍少 勒兵欲戰 帝望見無忌軍塵起 命作鼓角 擧旗幟 諸軍鼓噪並進 延壽等懼 欲分兵禦之 而其陣已亂 會有雷電 龍門人薛仁貴 著奇服 大呼陷陣 所向無敵 我軍披靡 大軍乘之 我軍大潰 死者二萬餘人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부러 일을 계획하고, 이세적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15천을 거느리고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 우진달은 정예 군대 11천을 거느리고 기습군대로 삼아 산 북쪽으로부터 협곡을 나와 그 뒤를 치게 하고, 황제 자신은 보병과 기병 4천을 거느리고 북과 나팔을 가지고 깃발을 눕혀 산에 올랐다. 황제가 여러 군대에 명령하기를 북과 나팔소리가 울리면 일제히 나와 떨쳐 쳤다. 인하여 유사(담당관청)에 명하여 조당 옆에 항복을 받을 장막을 설치하게 했다. 이날 밤 유성이 고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다음 날 고연수 등은 홀로 이세적의 군대가 적은 것을 보고 군대를 정돈하여 싸우려고 했다. 황제가 장무기의 군대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들고 여러 군대가 북을 울리고 소리 지르며 나란히 나아가게 하였다. 고연수 등이 두려워하여 군대를 나누어 막고자 하였으나 그 진이 이미 어지러워지고,

마침 우레와 번개가 쳤다. 용문사람 설인귀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부르짖으며 진영을 함락시키니 향하는 바마다 우리 군대가 무너졌다. 대군이 그것을 타니 우리 군대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2만여 명이었다.

 

帝望見仁貴 拜遊擊將軍 延壽等將餘衆 依山自固 帝命諸軍圍之 長孫無忌悉撤橋梁 斷其歸路 延壽·惠眞帥其衆三萬六千八百人 請降 入軍門拜伏請命 帝簡耨薩已下官長三千五百人 遷之內地 餘皆縱之 使還平壤 收靺鞨三千三百人 悉坑之 獲馬五萬匹·牛五萬頭·明光鎧萬領 它器械稱是 更名所幸山曰駐驆山 以高延壽爲鴻臚卿 高惠眞爲司農卿 帝之克白巖也 謂李世勣曰 吾聞 安市城險而兵精 其城主材勇 莫離支之亂 城守不服 莫離支擊之 不能下 因而與之 建安兵弱而糧少 若出其不意 攻之必克 公可先攻建安 建安下 則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謂城有所不攻者也

황제가 설인귀를 보고 유격장군을 주었다. 고연수 등이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산에 의하여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황제가 여러 군대로 그들을 에워싸게 하였다. 장손무기가 모든 다리를 철거하여 그 돌아가는 길을 끊으니 고연수, 혜진이 그 무리 36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였다. 군문(진영 문)에 들어 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살려줄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욕살 이하 관리 35백 명을 가려 내지(중국)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고, 말갈 33백 명을 거두어 모두 땅에 묻었다. 5만필, 5만 마리, 명광개 1만 벌을 빼앗았다. 다른 기계들도 이에 걸맞았다. (황제가 갔던)산 이름을 바꾸어 주필산이라 하였다. 고연수를 홍로경을 삼고,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았다. 황제가 백암성을 이기고 이세적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안시성은 험하고 군대가 정예롭고, 그 성주가 재능과 용기가 있어 막리지의 난 때 성을 지키고 복종하지 않으니 막리지가 그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때문에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건안성은 군대가 약하고, 양식이 적다. 만약 그 생각지 못하는 때 나와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공이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라. 건안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면 곧 안시성은 나의 배 안에 있는 것이다. 이는 병법에 이른 바 성에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 있다.”했다.

 

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將若之何 不如先攻安市 安市下 則鼓行而取建安耳帝曰 以公爲將 安得不用公策 勿誤吾事世勣遂攻安市 安市人望見帝旗蓋 輒乘城鼓噪 帝怒 世勣請克城之日 男子皆坑之 安市人聞之 益堅守 攻久不下

대답해 말하기를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습니다. 우리 군대의 식량은 모두 요동에 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식량 길을 끊는다면 장차 어떻게 하시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는 것이 낫습니다. 안시성이 함락되면 곧 북을 치고 가기만 하면 건안성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공으로서 장수를 삼았으니 어찌 공의 계책을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일을 그르치지 마십시오.”했다. 이세적이 마침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황제의 깃발과 번개를 바라보고 번번이 성에 올라 북을 치고 떠들어대니 황제가 노하였다. 이세적이 성을 이기는 말 남자는 모두 땅에 묻을 것을 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그 것을 듣고 더욱 굳게 지켰다. 공격해도 오래 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高延壽·高惠眞請於帝曰 奴旣委身大國 不敢不獻其誠 欲天子早成大功 奴得與妻子相見 安市人顧惜其家 人自爲戰 未易猝拔 今 奴以高句麗十餘萬衆 望旗沮潰 國人膽破 烏骨城耨薩老耄 不能堅守 移兵臨之 朝至夕克 其餘當道小城 必望風奔潰 然後收其資糧 鼓行而前 平壤必不守矣

고연수, 고혜진이 황제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제가 이미 몸을 대국에 맡겼으니 그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일찍 큰 공을 이루시어 저희들이 처자와 서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 들의 집안을 돌아보고 아껴서 사람들이 스스로 싸움을 하니 쉽게 갑자기 함락시키지 못합니다. 지금 저희들의 고구려 10여 만 무리가 깃발만 바라보고도 무너졌으니 나라 사람들의 쓸개가 터질 것입니다. 오골성 욕살은 늙어 굳게 지키지 못합니다. 군대를 옮겨 대하면 아침에 이르러 저녁에 이길 것입니다. 그 나머지 길을 막는 작은 성들은 반드시 높은 명망을 듣고 달아나고 무너질 것입니다. 그런 후 그 재물과 식량을 거두어 북을 치며 행군하여 앞으로 가면 평양은 반드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했다.

 

羣臣亦言 張亮兵在沙城 召之 信宿可至 乘高句麗忷懼 倂力拔烏骨城 度鴨淥水 直取平壤 在此擧矣帝將從之 獨長孫無忌以爲 天子親征異於諸將 不可乘危徼幸 今建安·新城之虜衆 猶十萬 若向烏骨 皆躡吾後 不如先破安市 取建安 然後長驅而進 此萬全之策也帝乃止 諸將急攻安市 帝聞城中雞彘聲 謂世勣曰 圍城積久 城中烟火日微 今鷄彘甚喧 此必饗士 欲夜出襲我 宜嚴兵備之

여러 신하들이 또한 말하기를 장량의 군대가 사성에 있으니 그를 부르면 이틀 밤이면 이를 수 있을 것이니 고구려가 두려워하는 것을 타고 힘을 합쳐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수를 건너 곧바로 평양성을 빼앗는 것이 이번 싸움에 달려 있습니다.”했다. 황제가 장차 그것을 따르려 하는데 유독 장손무기만은 천자가 직접 정벌하는 것은 여러 장수들과는 달라서 위태로움을 타고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지금 건안성, 신성의 적의 무리들이 아직 10만이나 됩니다. 만약 오골성을 향한다면 모두 우리의 뒤를 밟을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깨트리고, 건안성을 빼앗은 후 멀리 몰아 나아간다면 이는 모든 완전한 계책일 것입니다.”했다. 황제가 이에 그만두었다. 여러장수들이 급히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성 안의 닭과 돼지 소리를 듣고 이세적에게 일러 말하기를 성을 에워싼 것이 오래되어 성안에서 연기가 날로 작아졌는데 지금 닭과 돼지 가 매우 시끄럽습니다. 이는 바로 군사들에게 먹이는 것이니 밤에 나와 우리를 습격하려는 것입니다. 마땅히 군대를 엄히 하고 대비해야 할 것이다.”했다.

 

是夜 我軍數百人 縋城而下 帝聞之 自至城下 召兵急擊 我軍死者數十人 餘軍退走 江夏王道宗 督衆築土山於城東南隅 浸逼其城 城中亦增高其城 以拒之 士卒分番 交戰日六七合 衝車礮石 壞其樓堞 城中隨立木柵 以塞其缺 道宗傷足 帝親爲之針 築山晝夜不息 凡六旬 用功五十萬 山頂去城數丈 下臨城中 道宗使果毅傅伏愛 將兵屯山頂以備敵 山頹壓城 城崩

이날 밤 우리 군대 수백 명이 성에 밧줄을 늘어뜨리고 내려갔다. 황제가 그것을 듣고 스스로 성 아래 이르러 군대를 불러 급히 공격하니 우리 군대가 수십 명이 죽고, 나머지 군사는 물러나 달아났다. 강하왕 도종이 무리를 감독하여 성 동쪽 모퉁이에 토산을 쌓아 그 성을 점차 핍박하였다. 성 안에 또한 그 성에 높이를 더하는 것으로서 막았다. 사졸들이 번을 나누어 서로 싸웠는데 날마다 6, 7번 맞붙었다. 충차와 포석으로 그 누첩을 무너뜨리면 성 안에서 따라 목책을 세우는 것으로서 그 빠진 곳을 막았다. 강하왕 도종이 발을 다치자 황제가 직접 침을 놓았다. 산을 쌓기를 주야로 하여 쉬지 않고, 60일 동안 일을 쓴 것이(인력을 들인 것이) 50만이었다. 산꼭대기는 성과 몇 길 떨어져 있었으므로 밑으로 성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강하왕 도종이 과의 부복애를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주둔하여 적을 대비하게 하였는데 산이 무너지면서 성성이 눌려 성이 무너졌다.

 

會 伏愛私離所部 我軍數百人 從城缺出戰 遂奪據土山 塹而守之 帝怒斬伏愛以徇 命諸將攻之 三日不能克 道宗徒跣詣旗下 請罪 帝曰 汝罪當死 但朕以漢武殺王恢 不如秦穆用孟明 且有破盖牟·遼東之功 故特赦汝耳帝以遼左早寒 草枯水凍 士馬難久留 且糧食將盡 勑班師 先拔遼·盖二州戶口 度遼 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 城中皆屛跡不出 城主登城拜辭 帝嘉其固守 賜縑百疋 以勵事君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부대를 떠났을 때 우리 군대 수백 명이 성의 빠진 곳(무너진 곳)으로부터 나와 싸워 마침내 토산을 차지하고 구덩이(해자)를 파고 지켰다. 황제가 노하여 부복애를 목 베어 죽이고 돌렸다.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3일이 되어도 이길 수 없었다. 강하왕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너의 죄는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짐은 한나라 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이 진나라 목공이 맹명을 쓴 것과 같지 못하다 여기고, 또한 개모, 요동을 깨트린 공이 있다. 그러므로 특별히 너를 용서할 뿐이다.”했다. 황제가 요좌(요동)가 일찍 추워져 풀이 마르고 물이 얼자 군사와 말이 오래 남아 있기 어렵다고 여겼다. 또한 양식이 장차 다하려하므로 군대를 돌릴 것을 명령하였다. 먼저 요주, 개주 두 주의 호구(백성)을 뽑아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아래에서 군대의 위엄을 보인 후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고, 성주가 성에 올라 절하며 하직하였다 황제가 굳게 지킴을 아름답게 여겨 비단 100필을 내리는 것으로서 임금 섬기는 것을 격려하였다.

 

命世勣·道宗 將步騎四萬爲殿 至遼東度遼水 遼澤泥潦 車馬不通 命無忌 將萬人 翦草塡道 水深處 以車爲梁 帝自繫薪於馬鞘 以助役冬十月 帝至蒲溝 駐馬 督塡道 諸軍度渤錯水 暴風雪 士卒沾濕多死者 勑燃火於道以待之 凡拔玄菟·橫山·盖牟·磨米·遼東·白巖·卑沙·夾谷·銀山·後黃十城徙遼··巖三州戶口入中國者七萬人 高延壽自降後 常憤歎 尋以憂死 惠眞竟至長安 新城·建安·駐蹕三大戰 我軍及唐兵馬死亡者 甚衆 帝以不能成功 深悔之 嘆曰 魏徵若在 不使我有是行也

이세적, 강하왕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4만을 거느리고 전(후군)이 되게 하고,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넜는데 요택이 진흙탕이어서 수레와 말이 통과하지 못하였다. (황제가)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고,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황제가 스스로 말 채찍으로 섶을 묶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 황제가 포구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길을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발착수를 건너니 사나운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려 군사들이 젖어 죽는 자가 많았다. 명령을 내려 길가에 불을 피우고 기다리게 했다. 무릇 현도, 횡산, 개모, 마미, 요동, 백암, 비사, 협곡, 은산, 후황 10성을 함락시키고, 요주, 개주, 암주 3개 주 호구(백성)를 옮겨 중국으로 들어 온 자가 7만 명이었다. 고연수는 스스로 항복한 후 항상 분개하고 탄식하다 얼마 후 근심으로 죽었다. 고헤진은 마침내 장안에 이르렀는데 신성, 건안성, 주필의 3대 싸움에서 우리 군대와 당나라 군대로 죽고 도망한 자가 매우 많았다. 황제가 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여겨 깊이 뉘우치고 탄식해 말하기를 위징이 많약 살아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반 걸음을 하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했다.

 

論曰唐太宗 聖明不世出之君 除亂比於湯武 致理幾於成康 至於用兵之際 出奇無窮 所向無敵 而東征之功 敗於安市 則其城主 可謂豪傑非常者矣 而史失其姓名 與楊子所云 齊魯大臣 史失其名無異 甚可惜也

論曰당나라 태종이 성스러운 밝음으로 불세출의 임금으로 어지러움을 없앤 것으로는 탕왕과 무왕에 견주어지고, 다스림에 이르러서는 성왕과 강왕에 가깝다. 군대를 씀에 이르러서는 기이함을 끝없이 내어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이가 없었다. 동방을 정벌한 일은 안시성에서 패하였으니 곧 그 성주는 호걸로 보통사람이 아니다라고 이를 만하다. 역사에 그 성과 이름을 잃어 버렸다.(그 성과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양자가 말한 바 제나라와 노나라의 대신은 역사에 그 이름을 잃었다.”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매우 애석해 할만하다.

 

五年 春二月 太宗還京師 謂李靖曰 吾以天下之衆 困於小夷 何也靖曰 此 道宗所解帝顧問 道宗具陳 在駐蹕時 乘虛取平壤之言 帝悵然曰 當時悤悤 吾不憶也夏五月 王及莫離支蓋金 遣使謝罪 幷獻二美女 帝還之 謂使者曰 色者人所重 然憫其去親戚以傷乃心 我不取也東明王母塑像 泣血三日 初 帝將還 帝以弓服賜蓋蘇文 受之不謝 而又益驕恣 雖遣使奉表 其言率皆詭誕 又待唐使者倨傲 常窺伺邊隙 屢勑令不攻新羅 而侵凌不止 太宗詔勿受其朝貢 更議討之

5(646) 2월 태종이 경사(서울:장안)에 돌아와 이정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무리로 작은 오랑캐에게 곤궁함을 당한 것은 왜입니까?”했다. 이정이 말하기를 이는 도정이 푼 바입니다.(알 것입니다.)”했다. 황제가 돌아보고 물으니 도종이 주필산에 있을 때빈틈을 타고 평양을 빼앗아야 한다고 한 말을 모두 말하였다. 황제가 원망하며 말하기를 당시에 바뻐서 내가 기억하지 못하였다.” 했다. 여름 5월 왕과 막리지 개금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두 미녀를 바쳤다. 황제가 돌려보내고, 사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여색은 사람이 중하게 여기는 것이나 친척을 떠남으로서 마음을 상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내가 취하지 않는다.”했다. 동명왕의 어머니 소상이 3일간 피눈물을 흘렸다. 처음 황제가 장차 돌아가려 할 때 황제가 활과 옷을 개소문에게 내렸는데 그것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았다. 또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였다. 비록 사신을 보내 표를 받들었는데(올렸는데) 그 말이 모두 괴이하고 황당하였다. 또 당나라 사신을 접대함에도 거만하고 오만하였고,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았으며, 여러 번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나 침범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조칙으로 그 조공을 받지 말라하고, 다시 토벌을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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