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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10

by 최인표 2024. 1. 4.

三國史記卷第二十二 高句麗本紀第十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高句麗本紀 第十 寶臧王 下

 

六年 (春二月)太宗將復行師 朝議以爲 高句麗 依山爲城 不可猝拔 前大駕親征 國人不得耕種 所克之城 實收其穀 繼以旱災 民太半乏食 今若數遣偏師 更迭擾其疆埸 使彼疲於奔命 釋耒入堡 數年之間 千里蕭條 則人心自離 鴨淥之北 可不戰而取矣帝從之 以左武衛大將軍牛進達 爲靑丘道行軍大摠管 右武衛將軍李海岸副之 發兵萬餘人 乘樓舡 自萊州泛海而入 又以太子詹事李世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右武衛將軍孫貳郞等副之 將兵三千人 因營州都督府兵 自新城道入 兩軍 皆選習水善戰者 配之

6(647) (2) 당나라 태종이 장차 다시 군대를 보내려 하니 조정이 의논하기를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삼아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앞서 황제가 직접 정벌하여 나라 사람들이 농사에 씨를 뿌리지 못하였습니다. 이긴 바의 성도 실제는 그 곡식을 거두었고, 가뭄과 재난이 이어져 백성의 태반이 식량이 모자랍니다. 지금 만약 자주 작은 군대를 보내 다시 교대로 그 나라를 흔들어 그들로 하여금 분주한 명령에 피로하게 하면 쟁기를 풀고 보로 들어가게 되어 수년 사이에 천리가 고요하고 쓸쓸하게 되면 곧 인심이 저절로 떠나게 되어 압록의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빼앗을 수 있습니다.”했다. 황제가 그것을 따랐다. 좌무위대장군 우진달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을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을 부총관으로 삼아 만여 명을 징발하여 배를 타고 내주에서 바다에 떠 들어 갔다. 또 태자첨사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을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 등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대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 도독부 군대를 앞세우고 신성도에서 들어가게 하였다. 두 군대는 모두 물에 익숙하고 싸움을 잘 하는 자로 배치하게 했다.

 

(夏五月) 李世勣軍旣度遼 歷南蘇等數城 皆背城拒戰 世勣擊破之 焚其羅郭而還 秋七月 牛進達·李海岸入我境 凡百餘戰 攻石城拔之 進至積利城下 我兵萬餘人出戰 李海岸擊克之 我軍死者三千人 (八月) 太宗勑宋州刺史王波利等 發江南十二州工人 造大舡數百艘 欲以伐我 冬十二月 王使第二子莫離支任武 入謝罪 帝許之

(여름 5) 이세적의 군대가 요하를 건너 남소 등 몇 개의 성을 지나는데 (고구려 군대가) 모두 성을 등지고 막아 싸웠으나 이세적이 그들을 쳐서 깨트리고 그 나곽(나성)을 불사른 후 돌아왔다. 가을 7월 우진달, 이해안이 우리 경계에 들어와 무릇 100여 번 싸웠는데 석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나아가 적리성 아래에 이르렀다. 우리 군대 만여 명이 나가 싸우니 이해안이 쳐서 이겼다. 우리 군대의 죽은 자가 3천여 명이었다. (8) 태종이 종주자사 왕파리 등에게 명하여 강남 12주의 장인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어 우리를 치고자 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둘째아들 막리지 임무로 하여금 (당나라에)들어 가 사죄하게 하니 황제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七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帝詔右武衛大將軍薛萬徹 爲靑丘道行軍大摠管 右衛將軍裴行方副之 將兵三萬餘人及樓舡戰艦 自萊州 泛海來擊 夏四月 烏胡鎭將古神感將兵浮海來擊 遇我步騎五千 戰於易山 破之 其夜 我軍萬餘人 襲神感舡 神感伏發 乃敗 (六月) 帝謂我困弊 議以明年發三十萬衆 一擧滅之 或以爲大軍東征 須備經歲之糧 非畜乘所能載 宜具舟 艦 爲水轉 隋末 劒南獨無寇盜 屬者遼東之役 劒南復不預及 其百姓富庶 宜使之造舟艦 帝從之

7(648) 봄 정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황제가 우무위대장군 설만철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을 삼고, 우위장군 배행방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대 3만여 명과 누선, 전함을 거느리고 내주에서 바다에 떠 가서 치게 하였다. 여름 4월 오호진 장수 고신감이 군대를 거느리고 바다에 떠 와서 쳤는데, 우리의 보병과 기병 5천을 만나 역산에서 싸워 그들을 깨트렸다. 그날 밤 우리 군인 1만여 명이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니 고신감이 복병을 내니 (우리군대가) 패하였다. (6) 황제는 우리가 곤궁하고 피폐하다 여기고 내년에 30만 무리를 징발하여 한 번에 없앨 것을 의논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대군이 동쪽을 정벌하려면 반드시 해를 지날 양식을 갖추어야 하는데 짐승과 배에 실을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마땅히 배를 갖추어 수로로 운반해야 합니다. 수나라 말에 검남 지방은 유독 도적이 없었고, 근자에 요동의 역(요동의 전쟁)에 검남은 또 참여치 않아서 백성들이 부유하고 많습니다. 마땅히 그들로 하여금 배를 만들게 하십시오.”했다. 황제가 따랐다.

 

秋七月 王都女産子 一身兩頭 太宗遣左領左右府長史强偉於劒南道 伐木造舟艦 大者或長百尺 其廣半之 別遣使行水道 自巫峽 抵江楊 趣萊州 九月 羣獐渡河西走 羣狼向西行 三日不絶 太宗遣將軍薛萬徹等來伐 渡海入鴨淥 至泊灼城南四十里 止營 泊灼城主所夫孫 帥步騎萬餘 拒之 萬徹遣右衛將軍裴行方 領步卒及諸軍乘之 我兵潰 行方等進兵圍之 泊灼城因山設險 阻鴨淥水以爲固 攻之不拔 我將高文率烏骨·安地諸城兵三萬餘人 來援 分置兩陣 萬徹分軍以當之 我軍敗潰 帝又詔萊州刺史李道裕 轉糧及器械 貯於烏胡島 將欲大擧

가을 7월 왕도(수도)의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태종이 좌령좌우부 장사 강위를 검남도에 보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큰 것은 혹 길이가 100자이고, 그 넓이는 그 반이었다. 따로 사신을 보내 물길을 가게 하였는데 무협에서 강주, 양주에 이르러 내주로 나아가게 하였다. 9월 뭇 노루가 물을 건너 서쪽을 향해 달아났고, 여러 이리가 서쪽을 향해 갔는데 3일 동안을 끊이지 않았다.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을 보내 가서 치게 하니 바다를 건너 압록에 들어가고, 박작성 남쪽 40리에 이르러 진영을 세웠다. 박작성주 소부손이 보병과 기병 만여를 거느리고 막았다. 설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쳐서 이기니 우리 군대가 무너졌다. 배행방 등이 군대로 나아가 에워쌌으나, 박작성은 산에 의지하여 험함을 세웠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기 때문에 공격하여도 함락되지 않았다. 우리 장수 고문율이 오골, 안지 등 여러 성의 군대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는데 진을 두개로 나누어 두었다. 설만철이 군대를 나누어 막으니 우리 군대가 패하여 무너졌다. 황제가 또 내주자사 이도유에게 명하여 군량과 기계를 운반하여 오호도에 저장하여 장차 크게 일으키려 하였다.

 

八年 夏四月 唐太宗崩 遺詔罷遼東之役

8(649) 여름 4월 당나라 태종이 죽었다. 유언으로 요동의 전쟁을 그만두게 하였다.

 

論曰初 太宗有事於遼東也 諫者非一 又自安市旋軍之後 自以不能成功 深悔之 歎曰 若使魏徵在 不使我有此行也及其將復伐也 司空房玄齡病中上表 諫以爲 老子曰 知足不辱 知止不殆陛下威名功德 旣云足矣 拓地開疆 亦可止矣 且陛下每決一重囚 必令三復五奏 進素膳 止音樂者 重人命也 今驅無罪之士卒 委之鋒刃之下 使肝腦塗地 獨不足憫乎 嚮使高句麗違失臣節 誅之可也 侵擾百姓 滅之可也 他日能爲中國患 除之可也 今無此三條 而坐煩中國 內爲前代雪恥 外爲新羅報讎 豈非所存者小 所損者大乎 願陛下許高句麗自新 焚凌波之舡 罷應募之衆 自然華夷慶賴 遠肅邇安

논하여 말한다. 처음 태종이 요동에 일을 일으킬 때 간하는 자들이 하나가 아니었다. 또 안시성에서 군대를 돌린 후 스스로 공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깊이 뉘우쳐 탄식해 말하기를 만약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에 가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했고, 장차 다시 정벌하려 할 때 사공 방현령이 병중에 표를 올려 간하기를 노자가 말하기를 만족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하였습니다. 폐하의 위명과 공덕이 이미 충분합니다. 땅을 열고 지경을 여는 것은 또한 그칠만합니다. 또한 폐하께서 매번 한 명의 중죄인을 결단할 때도 반드시 3번 되풀이 하고, 5번 아뢰게 하고, 거친 음식을 올리고 음악을 그치게 한 것은 사람의 목숨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죄 없는 군사를 몰아 예리한 칼날 아래 맡겨 간과 뇌가 길에 칠해지게 하는 것은 유독 (그들만은)불쌍하게 여김이 부족해서 입니까? 예전에 고구려가 신하의 절개를 어겼을 때는 죽이는 것이 옳고, 백성을 침범하고 소란스럽게 하는 것은 없애는 것이 옳고, 다른 날에 중국의 근심이 될 수 있으면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이 세 가지가 없는데 앉아서 중국을 번거롭게 하여 안으로 앞 시대의 부끄러움을 씻고, 밖으로 신라를 위해 원수를 갚는다 하니 어찌 보존되는 것은 적고, 더는 것은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고구려가 스스로 새롭게 되는 것을 허여하시고, 파도 가운데의 배를 불사르고, 모집에 응한 무리를 돌려보내면 자연히 화이가 기뻐하고 의지할 것이며, 먼 곳에서는 삼가고 가까운 곳에서는 편안할 것입니다.” 했다.

 

梁公將死之言 諄諄若此 而帝不從 思欲丘墟東域而自快 死而後已 史論曰 好大喜功 勤兵於遠者 非此之謂乎 柳公權小說曰 駐蹕之役 高句麗與靺鞨合軍 方四十里 太宗望之 有懼色又曰 六軍爲高句麗所乘 殆將不振 候者告英公之麾 黑旗被圍 帝大恐雖終於自脫 而危懼如彼 而新舊書及司馬公通鑑不言者 豈非爲國 諱之者乎

양공이 죽을 때의 말이 간곡하기 이와 같음에도 황제가 따르지 않고, 동쪽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스스로 통쾌하게 여기려 하다가 죽은 후에야 그만두었다. 사론에 큰 것을 좋아하고, 공 세우기를 기뻐하여 멀리에서 군대의 일을 부지런히 하였다.”는 것은 이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유공권의 소설에 주필산의 전쟁에서 고구려와 말갈의 합한 군대가 40리를 뻗치니 태종이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6군이 고구려에 제압되어 거의 장차 떨치지 못하였을 때 척후가 고하기를 영공의 대장기 검은 깃발이 에워싸였습니다.’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했다. 비록 결국에는 스스로 벗어났으나 위태롭고 두려워함이 그와 같은데도 신당서, 구당서와 사마공의 자치통감에서 말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위하여 숨긴 것이 아니겠는가?

 

九年 夏六月 盤龍寺普德和尙 以國家奉道不信佛法 南移完山孤大山 秋七月 霜雹害穀 民饑

9(650) 여름 6월 반룡사 보덕화상은 국가가 도교를 받들고, 불법을 믿지 않기 때문에 남쪽으로 완산주 고대산으로 옮겼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백성들이 굶주렸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11(652) 봄 정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十三年 夏四月 人或言 於馬嶺上 見神人曰 汝君臣奢侈無度 敗亡無日’” 冬十月 王遣將安固出師及靺鞨兵 擊契丹 松漠都督李窟哥禦之 大敗我軍於新城

13(654) 여름 4월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어마령 위에 신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너희 임금과 신하가 사치하고 법도가 없어 패망이 멀지 않았다한다.”했다. 겨울 10월 왕이 장수 안고를 보내 (고구려의)군대와 말갈 군대를 내어 거란을 쳤다. 송막 도독 이굴가가 막았다. 우리 군대가 신성에서 크게 패하였다.

 

十四年 春正月 先是 我與百濟·靺鞨 侵新羅北境 取三十三城 新羅王金春秋 遣使於唐求援 二月 高宗遣營州都督程名振·左衛中郞將蘇定方 將兵來擊 夏五月 名振等 渡遼水 吾人見其兵少 開門度貴端水 逆戰 名振等奮擊 大克之 殺獲千餘人 焚其外郭及村落而歸

14(655) 봄 정월 이에 앞서 우리와 백제, 말갈이 신라 북쪽 경계를 침입하여 33개 성을 빼앗았다.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군을 청하였다. 2월 고종이 영주도독 정명진, 좌위중낭장 소정방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가 치게 하였다. 여름 5월 정명진 등이 요수를 건넜는데 우리 사람들이 그 군대가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를 건너 맞아 싸웠다. 정명진 등이 떨쳐 쳐서 크게 이기고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그 외곽과 촌락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十五年 夏五月 王都雨鐵 冬十二月 遣使入唐賀冊皇太子

15(656) 여름 5월 왕도(수도)에 쇠가 비처럼 내렸다. 겨울 12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황태자 책봉한 일을 축하하였다.

 

十七年 夏六月 唐營州都督兼東夷都護程名振 右領軍中郞將薛仁貴 將兵來攻 不能克

17(658) 여름 6월 당나라 영주도독겸동이도호 정명진, 우령군중낭장 설인귀가 군대를 이끌고 와 공역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十八年 秋九月 九虎一時入城食人 捕之不獲 冬十一月 唐右領軍中郞將薛仁貴等 與我將溫沙門 戰於橫山 破之

18(659) 가을 9월 아홉 호랑이가 한꺼번에 성에 들어와 사람을 잡아먹으므로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겨울 11월 당나라 우령군 중낭장 설인귀 등이 우리 장군 온사문과 횡산에서 싸워 깨트렸다.

 

十九年 秋七月 平壤河水血色凡三日 冬十一月 唐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 爲浿江道行軍大摠管 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左驍衛將軍劉伯英 爲平壤道行軍大摠管 蒲州刺史程名振 爲鏤方道摠管 將兵分道來擊

19(660) 19년 가을 7월 평양 강물이 3일이나 핏빛이었다. 겨울 11월 당나라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이 패강도행군대총관이 되고,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은 요동도행군대총관이 되고, 좌효위장군 유백영은 평양도 행군대총관이 되고, 포주자사 정명진이 노방도총관이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와서 공격하였다.

 

二十年 春正月 唐募河南··淮南六十七州兵 得四萬四千餘人 詣平壤·鏤方行營 又以鴻臚卿蕭嗣業 爲扶餘道行軍摠管 帥回紇等諸部兵 詣平壤 夏四月 以任雅相 爲浿江道行軍摠管 契苾何力 爲遼東道行軍摠管 蘇定方 爲平壤道行軍摠管 與蕭嗣業及諸胡兵凡三十五軍 水陸分道並進 帝欲自將大軍

20(661) 봄 정월 당나라가 하남, 하북, 회남의 67주 군대를 모집하여 44천여 명을 얻어 평양, 루방의 군영으로 나아가고 또 홀로경 소사업을 부여도 행군총관을 삼아 회흘 등의 여러 부병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갔다. 여름 4월 임아상을 패강도행군총관으로 삼고,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삼고, 소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삼고, 소사업과 여러 호병(이민족 군대) 무릇 35군이 수로와 육로로 길을 나누어 나란히 나아가는데 황제가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려 하였다.

 

蔚州刺史李君球立言 高句麗小國 何至傾中國事之有 如高句麗旣滅 必發兵以守 小發則威不振 多發則人不安 是天下疲於轉戍 臣謂 征之未如勿征 滅之未如勿滅’” 亦會武后諫帝 乃止 夏五月 王遣將軍惱音信 領靺鞨衆 圍新羅北漢山城 浹旬不解 新羅餉道絶 城中危懼 忽有大星落於我營 又雷雨震擊 惱音信等 疑駭引退 秋八月 蘇定方破我軍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城 九月 蓋蘇文遣其子男生 以精兵數萬守鴨淥 諸軍不得渡 契苾何力至 値氷大合 何力引衆乘氷度水 鼓噪而進 我軍潰奔 何力追數十里 殺三萬人 餘衆悉降 男生僅以身免 會 有詔班師 乃還

울주자사 이군구가 건의하기를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을 기울이는 일에 이름이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를 없앤다면 반드시 군대를 징발하여 지켜야 하는데 적으면 곧 위엄이 떨치지 않고, 많으면 곧 사람들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이는 천하가(천하 백성이) 옮겨 다니는 수자리에 피로해지는 일입니다. 신이 생각할 때 정벌하는 것보다 정벌 않는 것이 낫고, 없애는 것 보다는 없애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했다. 또한 마침 무후도 황제를 간하였으므로 이에 그쳤다. 여름 5월 왕이 장군 뇌음신을 보내 말갈의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 북한산성을 에워싸고 10여일이나 풀지 않았다. 신라는 양식운반 길이 끊어지자 성 안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고구려) 진영에 떨어지고, 또 우레가 울리고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다. 뇌음신 등이 의심하고 놀라 구내를 이끌고 물러났다. 가을 8월 소정방이 우리군대를 패강에서 깨트리고 마읍산을 빼앗고, 마침내 평양성을 둘러쌌다. 9월 개소문이 그 아들 남생을 보내 날랜 군대 수만으로 압록강을 지키게 하니 여러 군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계필하력이 이르렀을 때 얼음이 크게 얼었다. 계필하력이 무리를 이끌고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나아가니 우리 군대가 무너져 달아났다. 계필하력이 수십리를 추격하여 3만 명을 죽였다.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남생이 겨우 몸이 죽음을 면하였다. 마침 군대를 돌리라는 명이 있어 이에 돌아갔다.

 

二十一年 春正月 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摠管龐孝泰 與蓋蘇文戰於蛇水之上 擧軍沒 與其子十三人 皆戰死 蘇定方圍平壤 會大雪 解而退 凡前後之行 皆無大功而退

21(662) 봄 정월 좌효위장군 백주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와 개소문이 사수가에서 싸웠는데 전군이 몰락하고 그 아들 13명도 모두 전사하였다. 소정방이 평양을 에워쌌으나 큰 눈을 만나 풀고 물러나니 무릇 전후에 걸친 행군에서 모두 큰 공 없이 물러났다.

 

二十五年 王遣太子福男(新唐書云男福) 入唐 侍祠泰山 蓋蘇文死 長子男生代爲莫離支 初知國政 出巡諸城 使其弟男建·男産 留知後事 或謂二弟曰 男生惡二弟之逼 意欲除之 不如先爲計二弟初未之信 又有告男生者曰 二弟恐兄還奪其權 欲拒兄不納男生潛遣所親 往平壤伺之 二弟收掩得之 乃以王命召男生 男生不敢歸 男建自爲莫離支 發兵討之 男生走據國內城 使其子獻誠 詣唐求哀

25(666) 왕이 태자 복남(신당서에 복남이라 했다.)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태산의 제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개소문이 죽고 맏아들 남생이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 국정을 맡고, 나가 여러 성을 돌아다니며 그 동생 남건, 남산으로 하여금 남아 뒤의 일을 맡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두 동생에게 일러 말하기를 남생이 두 동생이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제거하려 생각하고 있으니 먼저 계책을 세우는 것이 낫습니다.”했다. 두 아우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또 남생에게 고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두 동생이 형이 돌아 와 그 권력을 빼앗을 것을 두려워하여 형을 막고 받아들이지 않으려합니다.”했다. 남생이 몰래 친한 사람을 보내 평양에 가 엿보게 하였다. 두 동생이 덮쳐 그를 붙잡았다. 왕명으로 남생을 부르니 남생이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다.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대를 징발하여 토벌하니 남건이 달아 나 국내성을 차지하고 그 아들 헌성으로 하여금 당나라에 나아가 애걸하였다.

 

六月 高宗命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 帥兵應接之 男生脫身奔唐 秋八月 王以男建爲莫離支兼知內外兵馬事 九月 帝詔男生 授特進遼東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 封玄菟郡公 冬十二月 高宗以李勣爲遼東道行軍大摠管兼安撫大使 以司列少常伯安陸·郝處俊副之 龐同善·契苾何力 並爲遼東道行軍副大摠管兼安撫大使 其水陸諸軍摠管 幷轉糧使竇義積·獨孤卿雲·郭待封等 並受勣處分 河北諸州租賦 悉詣遼東給軍用

6월 고종이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그에 응하여 맞이하게 하니 남생이 몸을 빼어 당나라로 달아났다. 가을 8월 왕이 남건을 막리지로 삼고, 겸하여 내외 병마의 일을 맡겼다. 9월 황제가 남생에게 명하여 특진요동도독 겸평양도안무대사를 주고 현도군공에 봉하였다. 겨울 12월에 고종이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겸안무대사를 삼고, 사열소상 백안륙, 학처준을 부총관으로 삼고, 방동선, 계필하력을 나란히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안무대사로 삼고, 그 수룩제군총관, 병전량사 두의적, 독고경운, 곽대봉 등은 나란히 이세적의 처분(지휘)을 받게 하고, 하북 여러 주의 조부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 군대에 쓰게 했다.

 

二十六年 秋九月 李勣拔新城 使契苾何力守之 勣初渡遼 謂諸將曰 新城高句麗西邊要害 不先得之 餘城未易取也遂攻之 城人師夫仇等 縛城主開門降 勣引兵進擊 一十六城皆下 龐同善·高侃 尙在新城 泉男建遣兵襲其營 左武衛將軍薛仁貴擊破之 侃進至金山 與我軍戰敗 我軍乘勝逐北 薛仁貴引兵橫擊之 殺我軍五萬餘人 拔南蘇·木氐·蒼嵒三城 與泉男生軍合 郭待封以水軍 自別道趣平壤 勣遣別將馮師本 載糧仗以資之 師本舡破失期 待封軍中飢窘 欲作書與勣 恐爲他所得 知其虛實 乃作離合詩以與勣

26(667) 가을 9월 이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계필하력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이적이 처음 요수를 건너 여러 장수에게 일러 말하기를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중요한 곳으로 먼저 얻지 않으면 나머지 성도 쉽게 빼앗지 못할 것이다.”하고는 마침내 공격하게 했다. 성 사람 사부구 등이 성주를 묶은 뒤 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적이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16개 성이 모두 함락되었다. 방동선, 고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는데 천남건이 군대를 보내 그 진영을 습격하게 하니 좌무위장군 설인귀가 쳐서 깨트렸다. 고간이 나아가 금산에 이르러 우리 군대와 싸워 패하였다. 우리 군대가 이김을 타고 추격하여 패배시켰다. 설인귀가 군대를 이끌고 옆에서 쳐서 우리 군대 5만여 명을 죽이고, 남소, 목저, 창암의 3성을 함락시켰다. 천남생의 군대와 합하였고, 곽대봉은 수군을 거느리고 다른 길로 평양으로 나아갔다. 이적이 별장 풍사본을 보내 식량과 무기를 실어 공급하게 하였다. 풍사본은 배가 깨져 기일을 잃으니 곽대봉의 군대가 굶주리고 군핍하였다. 풍사본이 글을 지어 이적에게 주려하였으나 다른 이가 빼앗아 그 사실을 알까 두려워하여 이에 이합의 시를 지어 이적에게 주었다.

 

勣怒曰 軍事方急 何以詩爲 必斬之行軍管記通事舍人元萬頃 爲釋其義 勣乃更遣糧仗赴之 萬頃作檄文曰 不知守鴨淥之險泉男建報曰 謹聞命矣卽移兵據鴨淥津 唐兵不得度 高宗聞之 流萬頃於嶺南 郝處俊在安市城下 未及成列 我軍三萬掩至 軍中大駭 處俊據胡床 方食乾糒 簡精銳擊敗之

이적이 노하여 말하기를 군대의 일이 바야흐로 급한데 어찌 시를 짓는가? 반드시 베어 죽일 것이다.”했다. 행군관기통사사인 원만경이 그 뜻을 풀어주니 이적이 이에 다시 양식과 무기를 보냈다. 원만경이 격문을 지어 말하기를 압록의 험함을 지킬 줄 모른다.”하니 천남건이 답장하여 말하기를 삼가 명을 듣습니다.”하고는 곧 군대를 옮겨 압록진을 차지하자 당나라 군대가 건너지 못하였다. 고종이 그것을 듣고 원만경을 영남에 유배하고, 학처준을 안시성 아래 있게 하였다. (학처준이)열을 이루기 전에 우리 군대 3만이 습격하여 이르니 군대가 크게 놀랐다. 학처준이 호상을 차지하고 막 마른 식량을 먹다가 날랜 군대를 뽑아 치니 (고구려 군대가) 패하였다.

 

二十七年 春正月 以右相劉仁軌爲遼東道副大摠管 郝處俊·金仁問副之 二月 李勣等拔我扶餘城 薛仁貴旣破我軍於金山 乘勝 將三千人 將攻扶餘城 諸將以其兵少止之 仁貴曰 兵不必多 顧用之何如耳遂爲前鋒以進 與我軍戰勝之 殺獲我軍 遂拔扶餘城 扶餘州中四十餘城皆請服 侍御史賈言忠奉使 自遼東還 帝問 軍中云何

27(668) 봄 정월 우상 유인궤를 요동도 부대총관으로 삼고, 학처준, 김인문을 부장으로 삼았다. 2월 이적 등이 우리 부여성을 함락하였다. 설인귀가 우리 군대를 금산에서 깨트리고 이김을 타고 3천 명을 거느리고 부여성을 공격하려 하니 여러 장수들이 그 군대가 적기 때문에 멈추어야 한다고 여겼다. 설인귀가 말하기를 군대가 반드시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쓰느냐를 어떻게 쓰느냐할 뿐이다.”하고는 마침내 전봉(선봉)이 되어 나아가 우리 군대와 싸워 이겨 우리 군대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마침내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부여주 안의 49여 성이 모두 항복을 청하였다. 시어사 가언충이 사신으로 왔다가 요동으로 돌아가니 황제가 묻기를 군중은 어떠한가?”했다.

 

對曰 必克 昔 先帝問罪 所以不得志者 虜未有釁也 諺曰 軍無媒 中道回今男生兄弟鬩狠 爲我鄕導 虜之情僞我盡知之 將忠士力 臣故曰必克 且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滅之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虜仍荐饑 人相掠賣 地震裂 狼狐入城 蚡穴於門 人心危駭 是行不再擧矣泉男建復遣兵五萬人 救扶餘城 與李勣等遇於薛賀水 合戰 敗死者三萬餘人 勣進攻大行城

대답해 말하기를 반드시 이깁니다. 옛날 선제께서 죄를 물을 때 뜻을 얻지 못한 까닭은 적들이 아직 틈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대에 중매가 없으면 중간에 돌아온다.’합니다. 지금 남생 형제가 싸우고,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 적의 실정과 거짓을 모두 알고, 장수는 충성되고, 군사는 힘을 씁니다. 신이 그래서 반드시 이긴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 고구려비기에 말하기를 ‘900년이 되지 않아 마땅히 80대장이 없앨 것이다.’했습니다. 고씨는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소유하여 지금 900년이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적이 거듭 굶주려 사람들이 서로 훔치거나 꿰어 팔고,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며, 이리와 여우가 성에 들어오며,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으며, 인심은 위태하여 놀라니 이번 걸음으로 다시 거사하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천남건이 다시 군대 5만 명을 보내 부여성을 구원하려고 이적 등과 설하수에서 만나 싸우다 패하여 죽은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이적이 나아가 대행성을 공격하였다.

 

夏四月 彗星見於畢昴之間 唐許敬宗曰 彗見東北 高句麗將滅之兆也秋九月 李勣拔平壤 勣旣克大行城 諸軍出他道者 皆與勣會 進至鴨淥柵 我軍拒戰 勣等敗之 追奔二百餘里 拔辱夷城 諸城遁逃及降者相繼 契苾何力先引兵至平壤城下 勣軍繼之 圍平壤月餘 王臧遣泉男産 帥首領九十八人 持白幡 詣勣降 勣以禮接之 泉男建猶閉門拒守 頻遣兵出戰 皆敗 男建以軍事委浮圖信誠 信誠與小將烏沙·饒苗等 密遣人詣勣 請爲內應 後五日 信誠開門 勣縱兵登城 鼓噪焚城 男建自刺不死 執王及男建等 冬十月 李勣將還 高宗命 先以王等獻于昭陵 具軍容奏凱歌 入京師 獻于大廟

여름 4월 혜성이 필성과 묘성 사이에 나타났다. 당나라 허경종이 말하기를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는데 고구려가 장차 없어질 징조이다.”했다. 가을 9월 이적이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적이 대행성을 이긴 후 여러 군대가 다른 길에서 나온 자들이 모두 이적과 만나 나아가 압록책에 이르니 우리 군대가 막아 싸웠다. 이적 등이 (고구려군대)를 무너뜨리고 200여리를 추격하여 달려 가 욕이성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들이 숨고 도망하거나 항복하는 자들이 서로 이어졌다. 계필하력이 먼저 군대를 이끌고 평양성 아래에 이르고, 이적의 군대가 이었다. 평양을 에워싼 지 한 달 정도에 (고구려)왕이 천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흰 깃발을 가지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게 했다. 이적이 예로서 대접하였다. 천남건은 아직 문을 닫고 막아 지키며, 자주 군대를 보내 나가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남건이 군대의 일은 승려 신성에게 맡겼다. 신성이 소장 오사, 요묘 등과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이적에게 나아가 안에서 응할 것을 청하였다. 5일 후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군대를 풀어 성에 올라 북을 치고 소리치며 성을 불태웠다. 남건은 스스로 찔러 죽고, 왕과 남건 등은 사로잡혔다. 겨울 10월 이적이 장차 돌아가려할 때 고종이 명하여 먼저 왕 등을 소릉에 바치게 하고, 군대의 위용을 갖추어 개선가를 연주하면서 경사(수도)에 들어 가 대묘에 바치게 하였다.

 

十二月 帝受俘于含元殿 以王政非己出 赦以爲司平大常伯員外同正 以泉男産爲司宰少卿 僧信誠爲銀靑光祿大夫 泉男生爲右衛大將軍 李勣已下 封賞有差 泉男建流黔州 分五部·百七十六城·六十九萬餘戶 爲九都督府·四十二州·百縣 置安東都護府於平壤 以統之 擢我將帥有功者爲都督·刺史·縣令 與華人叅理 以右威衛大將軍薛仁貴 檢校安東都護 摠兵二萬人 以鎭撫之 是高宗總章元年戊辰歲也

12월 황제가 함원전에서 포로를 받았는데 왕의 정사는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용서하고 사평대상백 원외동정을 삼았다. 천남산은 사재소경을 삼고, 승려 신성은 은청광록대부를 삼고, 천남생은 우위대장군을 삼았다. 이적 이하 봉하고 상주기를 차이있게 하였다. 천남건은 검주로 유배하고, 5, 176, 69만여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100현으로 하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두어 통치했다. 우리 장수 중에 공이 있는 자를 발탁하여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아 중국사람과 함게 다스림에 참여시켰다. 우위위대장군 설인귀, 검교안동도호로 삼아 군대 2만 명을 거느리고 진무하게 했다. 이 때가 고종 총장 1년 무진년이다.

 

二年己巳 二月 王之庶子安勝 率四千餘戶 投新羅 夏四月 高宗移三萬八千三百戶於江淮之南及山南·京西諸州空曠之地 至咸亨元年庚午歲 夏四月 劒牟岑欲興復國家 叛唐 立王外孫安舜(羅紀作勝) 爲主 唐高宗遣大將軍高侃 爲東州道行軍摠管 發兵討之 安舜殺劒牟岑 奔新羅

(총장)2(669) 2월 왕의 서자 안승이 4천여호를 인솔하고 신라에 들어갔다. 여름 4월 고종이 38300호를 강회의 남쪽과 산남, 경 서 여러 주의 비어있는 땅으로 옮겼다. 함형 1(670) 경오년 여름 4월에 이르러 검모잠이 국가를 다시 일으키려하여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왕의 외손자 안순(신라본기에는 승이라 썼다.)을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 당나라 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보내 동주도행군총관을 삼고 군대를 징발하여 토벌하게 하니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二年辛未歲 秋七月 高侃破餘衆於安市城 三年壬申歲 十二月 高侃與我餘衆 戰于白水山破之 新羅遣兵救我 高侃擊克之 虜獲二千人 四年癸酉歲 夏閏五月 燕山道摠管大將軍李謹行 破我人於瓠瀘河 俘獲數千人 餘衆皆奔新羅

(함형)2(671) 신미년 가을 7월 고간이 남은 무리를 안시성에서 깨트렸다. (함형)3(672) 임신년 12월 고간이 우리 남은 무리들과 백수산에서 싸워 (우리를)깨트리니 신라가 군대를 보내 구원하였다. 고간이 쳐서 이기고 2천 명을 사로잡았다. (함형)4(673) 계유년 여름 윤 5월 연산도총관 대장군 이근행이 우리 사람들을 호로하에서 깨트리고 추천 명을 포로로 잡았고, 나머지 무리는 신라로 달아났다.

 

儀鳳二年丁丑歲 春二月 以降王爲遼東州都督 封朝鮮王 遣歸遼東 安輯餘衆 東人先在諸州者 皆遣與王俱歸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 以統之 王至遼東 謀叛 潛與靺鞨通 開耀元年 召還邛州 以永淳初死 贈衛尉卿 詔送至京師 葬頡利墓左 樹碑其阡 散徙其人於河南·隴右諸州 貧者留安東城傍舊城 往往沒於新羅 餘衆散入靺鞨及突厥 高氏君長遂絶

의봉 2(677) 정축년 봄 2월 항복한 왕을 요동주도독을 삼아 조선왕에 봉해 요동으로 돌려보내 남은 무리들을 모으게 했다. 동쪽 사람들로 먼저 여러 주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보내 왕과 돌아가게 하였다.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치하였다. 왕이 요동에 이르자 모반하여 몰래 말갈과 통하였다. 개요 1(681) 공주로 소환하였다. 영순 초에 죽으니 위위경을 추증하고 조서로 경사로 옮기게 하여 힐리의 묘 왼쪽에 장례하게 하고, 무덤 앞에 비를 세웠다. 그 사람들을 하남, 농우 여러 주로 흩어 옮기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안동성 옆 옛 성에 남겨두었는데 종종 신라로 도망하였다. 남은 무리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들어가니 고씨 임금이 마침내 끊어졌다.

 

垂拱二年 以降王孫寶元爲朝鮮郡王 至聖曆初 進左鷹揚衛大將軍 更封忠誠國王 使統安東舊部 不行 明年 以降王子德武爲安東都督 後稍自國 至元和十三年 遣使入唐獻樂工

수공 2(686)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 성력 초에 이르러 좡응양위 대장군으로 승진하고, 다시 충성국왕을 봉하여 안동옛부를 통치하게 했으나 행해지지 못하였다. 다음해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다. 후에 점점 스스로 나라를 이루었다. 원화 13(818)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악공을 바쳤다.

 

論曰玄菟·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籩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桴於海以居之 有以也夫 然而易之爻 二多譽 四多懼 近也高句麗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 其北隣皆天子有司 亂世則英雄特起 僣竊名位者也 可謂居多懼之地 而無謙巽之意 侵其封場以讐之 入其郡縣以居之 是故兵連禍結 略無寧歲 及其東遷 値隋唐之一統 而猶拒詔命以不順 囚王人於土室 其頑然不畏如此

논하여 말한다. 현도, 낙랑은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가 봉해진 곳이다. 기자가 그 백성에게 예의, 농사와 누에치기, 길쌈을 가르치고, 8조의 금법을 베풀었다. 이 때문에 그 백성들이 서로 흠치지 않고, 대문을 닫지 않으며, 부인은 정조와 신의를 지켜 음란하지 않았다. 먹고 마시는 것은 변두(제기)를 사용하니 이는 어진이의 교화 덕택이다. 또 천성이 유순하여 3방과는 달랐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슬퍼하고 바다에 떼를 뛰워 살고자 하였던 것도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의 효사에 “2는 칭찬이 만고, 4는 두려움이 많다. 가깝기 때문이다.”했다. 고구려는 진나라, 한나라시대 이후로부터 중국의 동북쪽 모퉁이에 끼어 있었다. 그 북쪽 이웃은 모두 천자의 관리로 난세에는 곧 영웅으로 빼어나서 이름과 자리를 함부로 도둑질 하였으니 두려움이 많은 땅에 자리하였다 이를 만하다. 겸손의 뜻이 없고 중국의 봉토를 침략하여 원수를 만들고 그 군현에 들어 가 살았다. 이 때문에 전쟁이 이어지고 화가 맺어져 대략 편안한 해가 없었다. 그 동쪽으로 옮기고, 수나라와 당나라의 통일을 만났음에도 오히려 황제의 명을 거역하고 따르지 않으며, 천자의 사신을 토굴에 가두었다. 그 완고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故屢致問罪之師 雖或有時設奇以陷大軍 而終於王降國滅而後止 然觀始末 當其上下和 衆庶睦 雖大國不能以取之 及其不義於國 不仁於民 以興衆怨 則崩潰而不自振 故孟子曰 天時地利 不如人和左氏曰 國之興也以福 其亡也以禍 國之興也 視民如傷 是其福也 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其禍也有味哉斯言也 夫然則凡有國家者 縱暴吏之驅迫 强宗之聚斂 以失人心 雖欲理而不亂 存而不亡 又何異强酒而惡醉者乎

그러므로 여러 번 죄를 묻는 군대가 이르렀다. 비록 혹 때로 기이한 계책을 베풀어 대군을 빠트림이 있었으나 끝내는 왕은 항복하고 나라가 없어진 후에 그쳤다. 그러나 그 시작과 끝을 보면 마땅히 그 상하가 화합하고 무리들이 화목하면 비록 대국일지라도 빼앗지 못하였지만 나라에 의롭지 못하고, 백성에게 어질지 모하여 여러 원한을 일으키면 곧 무너져 스스로 떨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맹자하늘의 때와 땅의 이로움은 사람의 화합보다 못하다.”했고, 좌씨는 나라가 흥하는 것은 복 때문이고, 그 망하는 것은 재앙 때문이다. 나라가 흥할 때는 백성 보기를 자신의 상처와 같이하니 이것이 그 복이다. 그 망할 때는 백성을 흙과 풀처럼 여기니 이것이 그 재앙이다.”했으니 이 말이 맛이 있다. 그렇다면 무릇 나라를 소유한자는 사나운 관리의 윽박지름과 강종(권세있는 이)이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것을 놓아두어 사람의 마음을 잃는다면 비록 다스려 어지럽지 않게 하고, 보존하여 망하지 않게 하고자 하여도 또한 어찌 술을 억지로 마시고 취함을 싫어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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