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卷第二十三 百濟本紀 第一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百濟本紀 第一 始祖 溫祚王·多婁王·己婁王·盖婁王·肖古王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다루왕·개루왕·초고왕
百濟始祖 溫祚王 其父鄒牟(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백제 시조 온조왕은 그 아버지 추모(혹은 주몽)가 북부여에서 난을 피해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은 없고 다만 딸만 셋 있을 뿐이었다. 주몽을 보자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되 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이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 했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 태자가 되니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려 등 10명의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들 중에 따르는 자가 많았다. 마침내 한산이 이르러 부아악에 올앞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고자 하니 10신이 간하여 말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가 둘렸고, 동쪽으로 높은 산을 차지하였고, 남쪽으로 기름진 토지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가 막혀 하늘이 내려 준 험함과 땅의 잇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로 이곳에 도읍을 만뜬다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했다. 비류가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 살았다. 오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고 10신으로서 보좌를 삼고 나라 이름을 십제라 했다. 이때는 전한 성제 홍가 3년(18년)이다. 비류는 미추가 땅이 습하고 물이 짜 편안히 살 수 없었다. 위례성에 돌아 가 보니 도읍이 솥발처럼 정해지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마침내 부끄러워 뉘우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에 돌아왔다. 그 후 (처음) 올 때 백성들이 즐거이 따랐기 때문에 이름을 바꾸어 백제라 했다. 그 세계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씨로 삼았다.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陁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한편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로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이고, 어머니는 소서노로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처음 우태에게 시집 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이다. 우태가 죽고 홀로 졸본에서 살았다. 후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전한 건소 2년(BC.37) 봄 2월 남쪽으로 달아 나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고구려라 학,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왕비를 삼았다. 나라를 세우는데 자못 내조가 있었다. 그러므로 주몽이 아껴 대접함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의 아들과 같이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가 낳은 아들 유유가 오자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는데 왕위를 이음에 이르렀다.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疣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일러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어려움을 피하여 달아나 여기에 이르렀다.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물을 기우려 도와 나라를 이루었으니 그 애쓰고, 수고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유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한갓 여기에 있으면서 우울하고 답답해하기를 군더더기 살처럼 하느니 어머니를 받들고 남쪽으로 가 땅을 택하여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낫다.”했다. 마침내 동생과 우리를 이끌고, 패수, 대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북사》와 《수서》에 모두 “동명의 후예 중에 구태가 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처음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로서 아내로 삼게 하였다. 마침내 동이의 강한 나라가 되었다.”했는데 누가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1년(BC.18) 여름 5월 동명왕묘를 세웠다.
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穀 爲拒守之計” 三月 王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2년(BC.17) 봄 정월 왕이 여러 신하에게 일러 말하기를 “말갈이 우리 북쪽 경계를 연이어 있는데 그 사람은 용맹하고 속임이 많다. 마땅히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쌓아 막아지킬 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했다. 3월 왕이 족부(재종숙부) 을음이 지식과 담력이 있어 벼슬을 주어 우보로 삼고 병마의 일을 맡겼다.
三年 秋九月 靺鞨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賊生還者十一二 冬十月 雷 桃李華
3년(BC.16)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니 왕이 날랜 군대를 거느리고 급히 펴서 대패시켰다. 적이 살아 돌아간 자가 10명 중에 한 , 두 사람이었다. 겨울 10월 우레가 울리고, 복숭아 배나무 꽃이 피었다.
四年 春夏 旱 饑疫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4년(BC.15) 봄, 여름 가뭄이 들어 굶주리고 전염병이 있었다. 가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닦았다.
五年 冬十月 巡撫北邊 獵獲神鹿
5년(BC.14) 겨울 10월 북쪽 변경을 돌아다니며 위로하였다. 사냥하여 신록을 잡았다.
六年 秋七月辛未晦 日有食之
6년(BC.13) 가을 7월 신미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八年 春二月 靺鞨賊三千 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渝舊好 隳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有渝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8년(BC.11) 겨울 2월 말갈 적 3천 명이 와서 위례성을 에워쌌다. 왕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10일이 지나자 적이 식량이 다하여 돌아갔다. 왕이 날랜 군사를 뽑아 추격하여 대부현에 이르러 한 번 싸워 이기고,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 마수성을 쌓고, 병산책을 세웠다. 낙랑태수 사자가 고하여 말하기를 “근래에 예를 갖추어 남을 방문하여 우호를 맺은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 영토 가까이에 성책을 만들어 세우는 것은 혹 조금씩 먹으려는 음모가 있는 것입니까? 만약 옛 우호를 바꾸지 않고 성을 허물고 책을 깨트린다면 곧 시기하고 의심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만약 혹 그렇지 않는다면 한번 싸움으로서 승부를 결단할 것을 청한다.”했다. 왕이 회답하기를 “험함을 베풀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옛과 지금의 떳떳한 방도이다. 어찌 감히 이로서 우호와 화친을 바꿈이 있으리오. 마땅히 사가 의심할 바가 아니다. 집사가 감함을 믿고, 군대를 낸다면 곧 작은 나라가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했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를 잃었다.
十年 秋九月 王出獵 獲神鹿 以送馬韓 冬十月 靺鞨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 我軍敗績 依靑木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救之 賊見之卽退
10년(BC.9) 가을 9월 왕이 사냥을 나가 신록을 잡았는데 마한에 (신록을)보냈다. 겨울 10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이 군대 200명을 보내 곤미천 가에서 막아 싸워 우리 군대가 패하여 청목산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직접 정예 기병 1백을 거느리고 봉현에 나가 구원하였다. 적이 그것을 보고 곧 물러났다.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之路
11년(BC.8)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여 깨트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 독산, 구천 두 책을 만들어 낙랑 길을 막았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況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畫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13년(BC.6) 봄 2월 왕도의 늙은 할머니가 변해 남자가 되었다. 다섯 마리 호랑이가 성에 들어 왔다.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나이는 61세였다.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어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여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지금 요사스러운 현상이 자주 나타나고 국모를 여의어 형세가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니 반드시 나라를 옮겨야 할 것이다. 내가 앞서 순수를 나갔을 때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니 거기에 도읍하는 것으로서 오래 편안함의 계책으로 삼는 것이 마당하다.”했다. 가을 7월 한산 아래 나아가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옮겼다. 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렸다. 드디어 경계를 그어 정하니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을 한계로 하고, 서로는 바다로 막히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월 성과 궁궐을 세웠다.
十四年 春正月 遷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秋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14년(BC.5) 봄 정월 도읍을 옯겼다. 2월 왕이 부락을 돌며 위로하고 농사에 힘쓰라고 권하였다. 가을 7월 한강 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15년(BC.4) 봄 정월 새로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비루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았다.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夏四月 立廟以祀國母
17년(BC.2) 봄 낙랑이 와 침범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 여름 4월 사당을 세우고, 국모를 제사하였다.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18년(BC.1) 경울 10월 말갈이 업습하여 이르니 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맞아 싸워 ㅊ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었다. 11월 왕이 낙랑 우두산성을 습격하고자 하여 구곡에 이르러 큰 눈을 만나 돌아왔다.
二十年 春二月 王設大壇 親祠天地 異鳥五來翔
20년(2) 봄 2월 왕이 대단을 만들고, 직접 천지에 제사하였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날아왔다.
二十二年 秋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虜獲生口 分賜將士
22년(4) 가을 8우ᅟᅯᆯ 석두, 고목 두 성을 쌓았다. 9월 왕이 기병 1천을 거느리고 부현 동쪽에서 사냥하다 말갈 적을 만나 한 번 싸움에 깨트리고 포로를 사로잡아 장사들에게 나누어 내려주었다.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遂壞其柵
24년(6) 가을 7월 왕이 웅천책을 만들고,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꾸짖어 말하기를 “왕이 처음 하(강)를 건넜을 때 발을 용납할 곳이 없었을 때, 우리가 동북 1백리의 땅을 갈라 편안히 하여 왕을 대함이 후하지 않았다 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갚음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함이 없다 말하면서 크게 성과 해자응 만들고 우리의 경계를 침범하니 무슨 뜻인가?” 했다. 왕이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그 책을 허물었다.
二十五年 春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㪍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幷鄰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幷呑辰·馬之心
25년(7) 봄 2월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다. 한성의 집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일자(무당)가 말하기를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께서 발흥할 징조이고, 소가 하나의 머리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께서 이웃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진한과 마한을 병탄할 마음을 두었다.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唇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 固守不下
26년(6) 가을 7월 왕이 말하기를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상하의 마음이 떠나니 그 형세가 오래하지 못할 것입니다.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병탄된다면 곧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경우가 될 것이니 뉘우쳐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 앞서 빼앗아 뒤의 어려움을 명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했다. 겨울 10월 왕이 군대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 말하고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마침내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 오직 원산, 금현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았다.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27년(7) 여름 4월 두 성이 항복하니 그 백성을 한산의 북쪽으로 옮겼다. 마한이 마침내 없어졌다. 가을 7월 대두산성을 쌓았다.
二十八年 春二月 立元子多婁爲太子 委以內外兵事 夏四月 隕霜害麥
28년(8) 봄 2월 원자 다루를 세워 태자로 삼고, 내외 군사의 일을 맡겼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三十一年 春正月 分國內民戶爲南北部 夏四月 雹 五月 地震 六月 又震
31년(13) 봄 정월 나라 안의 백성을 나누어 남부, 북부라 하였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5월 진진이 있었다. 6월 또 지진이 있었다.
三十三年 春夏 大旱 民饑相食 盜賊大起 王撫安之 秋八月 加置東西二部
33년(15) 봄, 여름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왕이 위로하여 안정시켰다. 가을 8월 동, 서 2부를 두었다.
三十四年 冬十月 馬韓舊將周勤 據牛谷城叛 王躬帥兵五千 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幷誅其妻子
24년(16) 겨울 10월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직접 군대 5천을 거느리고 토벌하니 주근이 스스로 목을 메고 죽었다.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아울러 그 처자를 죽였다.
三十六年 秋七月 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36년(18) 가을 7월 탕정성을 쌓고, 대두성의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했다. 8월 원산, 금현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샇았다.
三十七年 春三月 雹大如雞子 鳥雀遇者死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37년(19) 봄 3월 계란만한 우박이 내려 참새 같은 작은 새가 맞으면 죽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어 6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한수 동북쪽 부락이 굶주려 고구려에 도망하여 들어 간자들이 1천여 호였다. 패수와 대수 사이에 비어 사람이 살지 않았다.
三十八年 春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三月 發使勸農桑 其以不急之事擾民者 皆除之 冬十月 王築大壇 祠天地
38년(20) 봄 2월 왕이 돌아다니며 위로하여 동쪽으로 주양에 이르고, 북쪽으로 패하에 이르렀는데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 사신을 내어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은 모두 없애게 했다. 겨울 10월 왕이 대단을 쌓고, 천지에 제사하였다.
四十年 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斧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拒擊之
40년(22) 겨울 9월 말갈이 와서 술천성을 공격하였다. 겨울 11월 또 부현성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굳센 기병 200 명에게 명하여 막아 치게 하였다.
四十一年 春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本扶餘人也 神識淵奧 年過七十 膂力不愆 故用之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41년(23) 본 정월 우보 을음이 죽자 북부 해루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인데 식견이 깊고, 나이 70세가 지났으나 힘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다. 2월 한수 동북쪽 여러 부락 사람으로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四十三年 秋八月 王田牙山之原五日 九月 鴻鴈百餘集王宮 日者曰 “鴻鴈民之象也 將有遠人來投者乎” 冬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43년(25) 가을 8월 왕이 아산의 들에서 5일을 사냥하였다. 9월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자(일관)가 말하기를 “기러기는 백성의 상이다. 장차 멀리 있는 사람들이 들어 올 것입니다.”했다. 겨울 10월 남옥저 구파해 등 10여 집이 부양에 이르러 정성을 들이니 왕이 받아들여 한산의 남쪽에 안치하였다.
四十五年 春夏 大旱 草木焦枯 冬十月 地震 傾倒人屋
45년(27) 봄, 여름 큰 가뭄이 들어 풀과 나무가 말랐다. 겨울 10월 지진으로 사람들의 집이 기울고, 엎어졌다.
四十六年 春二月 王薨
46년(28) 봄 2월 왕이 돌아가셨다.
多婁王 溫祚王之元子 器宇寬厚 有威望 溫祚王在位第二十八年 立爲太子 至四十六年 王薨 繼位
다루왕은 온조왕의 원자로 모습이 너그럽고 후하여 위엄과 덕망이 있었다. 온조왕 28년 세워 태자로 삼았고, 46년 왕이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二年 春正月 謁始祖東明廟 二月 王祀天地於南壇
2년(29) 봄 정월 시조 동명묘를 배알하였다. 2월 왕이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하였다.
三年 冬十月 東部屹于與靺鞨戰於馬首山西 克之 殺獲甚衆 王喜 賞屹于馬十匹·租五百石
3년(30) 겨울 10월 동부 흘우가 말갈과 마수산 서쪽에서 싸워 이기고, 죽이고 사로잡은 이가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며 흘우에게 말 10필, 조 500석을 상주었다.
四年 秋八月 高木城昆優與靺鞨戰 大克 斬首二百餘級 九月 王田於橫岳下 連中雙鹿 衆人歎美之
4년(31) 가을 8월 고목성 곤우거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00여 개의 머리를 베었다. 9월 왕이 횡악 아래서 사냥하였는데 연이어 두 마리 사슴을 쏘아 맞추니 여러 사람들이 탄미하였다.
六年 春正月 立元子己婁爲太子 大赦 二月 下令國南州郡 始作稻田
6년(33) 봄 정월 원자 기루를 세워 태자로 삼고 크게 풀어주었다. 2월 나라 남쪽 주군에 명령하여 처음 논을 만들게 하였다.
七年 春二月 右輔解婁卒 年九十歲 以東部屹于爲右輔 夏四月 東方有赤氣 秋九月 靺鞨攻陷馬首城 放火燒百姓廬屋 冬十月 又襲甁山柵
7년(34) 봄 2월 우보 해루가 죽었는데 나이가 90세였다. 동부 흘우를 우보로 삼았다. 여름 4월 동쪽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겨울 9월 말갈이 마수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놓아 백성의 집을 불살랐다. 겨울 10월 또 병산책을 습격하였다.
十年 冬十月 右輔屹于爲左輔 北部眞會爲右輔 十一月 地震聲如雷
10년(37) 겨울 10월 우보 흘우를 좌보로 삼고, 북부 진회를 우보로 삼았다. 11월 지진이 있었는데 소리가 우레 같았다.
十一年 秋 穀不成 禁百姓私釀酒 冬十月 王巡撫東西兩部 貧不能自存者 給穀人二石
11년(38) 가을 곡식이 익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사사로이 술을 빚지 못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동서 2부를 돌아다니며 위로하고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에게 곡식을 사람마다 2석씩 주었다.
二十一年 春二月 宮中大槐樹自枯 三月 左輔屹于卒 王哭之哀
21년(48) 봄 2월 궁중의 큰 회나무가 저절로 말랐다. 3월 좌보 흘우가 죽으니 왕이 곡하고 슬퍼하였다.
二十八年 春夏 旱 慮囚 赦死罪 秋八月 靺鞨侵北鄙
28년(55) 봄, 여름 가뭄이 들었다. 죄수를 조사하여 죽일 죄도 용서하였다.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두리를 침범하였다.
二十九年 春二月 王命東部 築牛谷城 以備靺鞨
29년(56) 봄 2월 왕이 동부에 명하여 우곡성을 쌓게 하여 말갈을 대비하게 했다.
三十六年 冬十月 王拓地至娘子谷城 仍遣使新羅請會 不從
36년(63)겨울 10월 왕이 땅을 개척하여 낭자곡성에 이르러 신라에 사신을 보내 회합을 청하였으나 (신라가)따르지 않았다.
三十七年 王遣兵攻新羅蛙山城 不克 移兵攻狗壤城 新羅發騎兵二千 逆擊走之
37년(64) 왕이 군대를 보내 신라 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군대를 옮겨 구양성을 공격하니 신라가 기병 2천을 징발하여 맞아 치니 달아났다.
三十九年 攻取蛙山城 留二百人守之 尋爲新羅所敗
39년(66)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200명을 남겨 지키게 했는데 얼마 안 되어 신라에 패하였다.
四十三年 遣兵侵新羅
43년(70) 군대를 보내 신라를 침범하였다.
四十六年 夏五月戊午晦 日有食之
46년(73) 여름 5월 무오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四十七年 秋八月 遣將侵新羅
47년(74)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신라를 침범하였다.
四十八年 冬十月 又攻蛙山城 拔之
48년(75) 겨울 10월 또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四十九年 秋九月 蛙山城爲新羅所復
49년(76) 가을 9월 와산성을 신라가 수복하였다.
五十年 秋九月 王薨
50년(77) 가을 9월 왕이 돌아가셨다.
己婁王 多婁王之元子 志識宏遠 不留心細事 多婁王在位第六年立爲太子 至五十年王薨 繼位
기루왕 다루왕의 원자로 뜻과 식견이 넓고 원대하여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다루왕 6년에 세워 태자로 삼고, 50년에 이르러 왕이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九年 春正月 遣兵侵新羅邊境 夏四月乙巳 客星入紫微
9년(85) 봄 정월 군대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범하였다. 여름 4월 을사 객성이 자미에 들어갔다.
十一年 秋八月乙未晦 日有食之
11년(87) 가을 8월 을미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十三年 夏六月 地震裂陷民屋 死者多
13년(89) 여름 6월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백성의 집이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十四年 春三月 大旱 無麥 夏六月 大風拔木
14년(90) 봄 3월 큰 가뭄이 들어 보리가 수확이 없었다. 여름 6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봅혔다.
十六年 夏六月戊戌朔 日有食之
16년(92) 여름 6월 무술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十七年 秋八月 橫岳大石五 一時隕落
17년(93) 가을 8월 횡악의 큰 돌 다섯 개가 한꺼번에 떨어져 내렸다.
二十一年 夏四月 二龍見漢江
21년(97) 여름 4월 두 용이 한강에 나타났다.
二十三年 秋八月 隕霜殺菽 冬十月 雨雹
23년(99)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콩을 죽였다. 겨울 10월 우박이 내렸다.
二十七年 王獵漢山 獲神鹿
27년(103)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여 신록을 잡았다.
二十九年 遣使新羅請和
29년(105)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청하였다.
三十一年 冬 無氷
31년(107) 겨울 얼음이 얼지 않았다.
三十二年 春夏 旱 年饑民相食 秋七月 靺鞨入牛谷 奪掠民口而歸
32년(108) 봄, 여름 가뭄이 들었다.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가을 7월 말갈이 우곡에 들어가 백성들을 빼앗고 약탈하고 돌아갔다.
三十五年 春三月 地震 冬十月 又震
35년(111) 봄 3월 진진이 있었다. 겨울 10월 또 지진이 있었다.
三十七年 遣使聘新羅
37년(113) 사신을 보내 신라를 예방하게 하였다.
四十年 夏四月 鸛巢于都城門上 六月 大雨浹旬 漢江水漲 漂毁民屋 秋七月 命有司補水損之田
40년(116) 여름 4월 황새가 성문 위에 둥지를 틀었다. 6월 큰비가 10일이나 내리니 백성의 집이 떠내려가고 무너졌다. 가을 7월 유사에게 명하여 수해로 훼손된 받을 수리하게 했다.
四十九年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救之
49년(125) 신라가 말갈에게 침범되고 약탈당하였다. (신라가)글을 보내 군대를 청하니 왕이 다섯 장군을 보내 구원하게 했다.
五十二年 冬十一月 王薨
52년(128) 겨울 11월 왕이 돌아가셨다.
蓋婁王 己婁王之子 性恭順有操行 己婁在位五十二年薨 卽位
개루왕은 기루왕의 아들로 성품이 공순하고 행실이 있었다. 기루왕 52년 왕이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四年 夏四月 王獵漢山
4년(131) 여름 4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五年 春二月 築北漢山城
5년(132) 봄 2월 북한산성을 쌓았다.
十年 秋八月庚子 熒惑犯南斗
10년(137) 가을 8월 경자 형혹이 남두를 범하였다.
二十八年 春正月丙申晦 日有食之 冬十月 新羅阿湌吉宣謀叛 事露來奔 羅王移書請之 不送 羅王怒 出師來伐 諸城堅壁自守不出 羅兵絶糧而歸
28년(155) 봄 정월 병신 그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신라 아찬 길선이 모반하려다 일이 드러나 도망왔다. 신라왕이 글을 보내 (길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보내지 않았다. 신라왕이 노하여 군대를 내어 와서 치니 여러 성들이 성벽을 굳게 하고, 스스로지켜 나가지 않으니 신라 군대는 식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論曰】 春秋時 莒僕來奔魯 季文子曰 “見有禮於其君者 事之如孝子之養父母也 見無禮於其君者 誅之如鷹鸇之逐鳥雀也 觀莒僕 不度於善而在於凶德 是以去之” 今吉宣亦姦賊之人 百濟王納而匿之 是謂“掩賊爲藏”者也 由是 失鄰國之和 使民困於兵革之役 其不明甚矣
논하여 말한다. 춘추시대에 거복이 노나라로 도망왔다. 계문자가 말하기를 “그 임금에게 예가 있는 이를 보거든 그를 섬기기를 효자가 부모를 기르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그 임금에게 예가 없는 자를 보거든 그를 죽이기를 새매가 작은 새를 쫒는 것처럼 한다. 거복을 보니 착함을 헤아리지 않고, 흉한 덕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없애야 한다.”했다. 지금 길선이 또한 간적의 사람인데 백제왕이 받아들여 숨겼으니 이를 일러 “도적을 감싸서 숨긴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잃어 백성들로 하여금 전쟁에 곤궁하게 하였으니 그 밝지 못함이 심한 것이다.
三十九年 王薨
39년(166) 왕이 돌아가셨다.
肖古王(一云素古)蓋婁王之子 蓋婁在位三十九年薨 嗣位
초고왕(또는 소고)왕 개루왕의 아들이다. 개루왕이 재위 39년에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二年 秋七月 潛師襲破新羅西鄙二城 虜獲男女一千而還 八月 羅王遣一吉湌興宣 領兵二萬 來侵國東諸城 羅王又親帥精騎八千繼之 掩至漢水 王度羅兵衆不可敵 乃還前所掠
2년(167) 가을 7월 몰래 군사를 보내 신라 서쪽 변경의 두 성을 습격하여 깨트리고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8월 신라왕이 일길찬 흥선을 보내 군대 2만을 거느리고 나라 동쪽 여러 성을 침입하게 하였다. 신라왕이 또한 직접 정예 기병 8천명을 거느리고 뒤를 이어 엄습하여 한수에 이르렀다. 왕이 신라의 군대가 많아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앞서 약탈하였던 바를 돌려주었다.
五年 春三月丙寅晦 日有食之 冬十月 出兵侵新羅邊鄙
5년(170) 봄 3월 병인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군대를 내어 신라 변경을 침입하였다.
二十一年 冬十月 無雲而雷 星孛于西北 二十日而滅
21년(186) 겨울 10월 구름이 없으면서 우레가 울렸다. 성패가 서북으로 흘렀는데 20일만에 없어졌다.
二十二年 夏五月 王都井及漢水皆竭
22년(187) 여름 5월 왕도(수도)의 우물과 한수가 모두 말랐다.
二十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出師攻新羅母山城
23년(188) 봄 2월 궁실을 중수하고, 군대를 내어 신라 모산성을 쳤다.
二十四年 夏四月丙午朔 日有食之 秋七月 我軍與新羅戰於狗壤敗北 死者五百餘人
24년(189) 여름 4월 병오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우리 군대가 신라와 구양에서 싸워 패하여 죽은 자가 500여 명이었다.
二十五年 秋八月 出兵襲新羅西境圓山鄕 進圍缶谷城 新羅將軍仇道帥馬兵五百拒之 我兵佯退 仇道追至蛙山 我兵反擊之 大克
25년(190) 가을 8월 군대를 내어 신라 서쪽 변경 원산향을 습격하고, 나아가 부곡성을 에워쌌다. 신라 장군 구도가 군대 500 명을 거느리고 막았다. 우리 군대가 거짓으로 물러나는 채 하니 구도가 추격하여 와산에 이르러 우리 군대가 돌려 쳐서 크게 이겼다.
二十六年 秋九月 蚩尤旗見于角·亢
26년(191) 가을 9월 치우기가 각성과 항성에 나타났다.
三十四年 秋七月 地震 遣兵侵新羅邊境
34년(199) 가을 7월 지진이 있었다. 군대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입하였다.
三十九年 秋七月 出兵攻新羅腰車城拔之 殺其城主薛夫 羅王奈解怒 命伊伐湌利音爲將 帥六部精兵 來攻我沙峴城 冬十月 星孛于東井
39년(204) 가을 7월 군대를 내어 신라 요차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그 성주 설부를 죽였다. 신라왕 나해가 노하여 이벌찬 이음을 장수로 삼아 6부의 정예 군대를 거느리고 와 우리의 사현성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 성패가 동정에 있었다.
四十年 秋七月 太白犯月
40년(205) 가을 7월 태백이 달을 범하였다.
四十三年 秋 蝗 旱 穀不順成 盜賊多起 王撫安之
43년(208) 가을 누리떼가 있었다. 가뭄으로 곡식이 순조로이 익지 않아 도적이 많이 일어났다. 왕이 위로하여 안정시켰다.
四十四年 冬十月 大風拔木
44년(209) 겨울 10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뽑았다.
四十五年 春二月 築赤峴·沙道二城 移東部民戶 冬十月 靺鞨來攻沙道城不克 焚燒城門而遁
45년(210) 봄 2월 사현, 사도 두 성을 쌓고, 동부의 백성을 옮겼다. 겨울 10월 말갈이 와서 사도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성문을 불사르고 달아났다.
四十六年 秋八月 國南蝗害穀 民饑 冬十一月 無氷
46년(211) 가을 8월 나라 남쪽에 누리떼가 곡식을 해쳤다. 백성이 굶주렸다. 겨울 11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四十七年 夏六月庚寅晦 日有食之
47년(212) 여름 6월 경인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四十八年 秋七月 西部人茴會 獲白鹿獻之 王以爲瑞 賜穀一百石
48년(213) 가을 7월 서부 사람 회회가 흰 사슴을 잡아 바치니 왕이 상서로운 것으로 여겨 곡식 100석을 내렸다.
四十九年 秋九月 命北部眞果領兵一千 襲取靺鞨石門城 冬十月 靺鞨以勁騎來侵 至于述川 王薨
49년(214) 가을 9월 북부 진과에게 명하여 군대 1천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을 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겨울 10월 말갈이 굳센 기병으로 와서 침입하여 술천에 이르렀다. 왕이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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