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卷第四十四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列傳 第四 乙支文德·居柒夫·居道·異斯夫·金仁問 良圖 附
金陽 金昕附
·黑齒常之·張保皐 鄭年附
·斯多含
열전 제4 을지문덕, 거칠부, 거도, 이사부, 김인문 양도 붙임, 김양 김흔 붙임, 흑치상지, 장보고 정년 붙임, 사다함
乙支文德 未詳其世系 資沈鷙有智數 兼解屬文 隋開皇中 煬帝下詔征高句麗 於是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與九軍至鴨淥水 文德受王命 詣其營詐降 實欲觀其虛實 述與仲文 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 則執之 仲文等 將留之 尙書右丞劉士龍爲慰撫使 固止之遂聽 文德歸深悔之 遣人紿文德曰 “更欲有議 可復來” 文德不顧 遂濟鴨淥而歸 述與仲文 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粮盡欲還 仲文謂“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兵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述等不得已而從之 度鴨淥水追之 文德見隋軍士有饑色 欲疲之 每戰輒北 述等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遂進東 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을지문덕은 그 선대 계보를 알 수 없다. 자질이 침착하고 날쌔며 지략과 술수가 있었고, 겸하여 문자를 해득하고 글을 지을 수 있었다. 수나라 개황 연간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정벌하게 했다. 이에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와 9군과 압록수에 이르렀다. 을지문덕이 왕의 명을 받고 그 진영에 나아가 거짓 항복하였는데 실제는 그 허실을 관찰하려해서였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앞서 비밀 명령을 받들었는데 만약 (고구려)왕과 을지문덕이 오면 곧 잡아두라 했다. 우중문 등이 장차 머물게 하려는데 상서우승 유사룡이 위무사가 되어 굳게 저지하여 마침내 받아들였다. 을지문덕이 돌아가자 깊이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을지문덕을 속여 말하기를 “다시 의논하고자 함이 있으니 다시 오시오.”했다. 을지문덕이 돌아보지 않고 마침내 압록수를 건너 돌아왔다. 우문술과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잃은 후 속으로 불안해하였다. 우문술이 식량이 다하였기 때문에 돌아가고자 하니 우중문이 이르기를 “정예로서 을지문덕을 쫓는다면 공이 있을 수 있다.”했다. 우문술이 저지하였으나 우중문이 노하여 말하기를 “장군이 10만의 군대를 가지고 작은 적을 깨트리지 못하고 무슨 얼굴로 황제를 뵙겠는가?”했다. 우문술 등이 부득이 그것을 따라 압록수를 건너 쫓았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사가 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피로하게 하고자 하여 매번 싸우다 문득 패배하였다. 우문술 등이 하루에 7번 싸워 모두 이기니 이미 여러 번 이긴 것을 믿고, 또 여러 의논에 밀려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편양에서 30리 떨어진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만들었다.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仲文答書諭之 文德又 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難以猝拔 遂因其詐而還 爲方陣而行 文德出軍 四面鈔擊之 述等且戰且行 至薩水 軍半濟 文德進軍 擊其後軍 殺右屯衛將軍辛世雄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九軍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淥水 行四百五十里 初度遼 九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준 시에 말하기를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뚫었고, 묘한 계산은 지리를 다하였다. 싸워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충분함을 알아 그치기를 바라노라.”했다. 우중문이 달래는 답서를 보냈다. 을지문덕이 또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고, 우문술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군대를 돌려 가면 마당히 왕을 받들어 행재소에 조회하겠습니다.”했다. 우문술이 사졸이 피폐한 것을 보고 다시 싸울 수 없다고 여겼다. 또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여겼다. 마침내 그 거짓(항복을)으로 인하여(핑계로) 돌아는데 방진을 치고 갔다. 을지문덕이 군대를 내어 4면에서 습격하니 우문술 등이 또한 싸우고 또 행군하여 살수에 이르렀다. 군대가 반쯤 건넜을 때 을지문덕이 진군하여 그 후군을 쳐서 둔위장군 신세웅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사들이 모두 무너져 금지할 수 없었다, 9군의 장수와 군사들이 달아나 돌아 가 하루 낮 하룻밤 만에 압록수에 이르렀는데 450리를 행군한 것이다. 처음 요하를 건널 때 9군 35만 명이었는데 돌아 가 요동성에 이른 이는 오직 2천7백 명뿐이었다.
【論曰】 煬帝遼東之役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高句麗一偏方小國 而能拒之 不唯自保而已 滅其軍幾盡者 文德一人之力也 傳曰 『不有君子 其能國乎』 信哉
논하여 말한다. 수나라 양제의 요동정벌은 군대를 냄은 성대함이 옛날에 있지 않았다. 고구려는 한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로 막아내었으니 자기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그 군대를 없애 거의 다하게 한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다. 경전에 말하기를 “군자가 있지 않으면 어찌 나라를 유지하겠는가?”하였으니 믿을 수 있다.
居柒夫
(或云荒宗) 姓金氏 奈勿王五世孫 祖仍宿角干 父勿力伊湌 居柒夫少 跅弛有遠志 祝髮爲僧 遊觀四方 便欲覘高句麗 入其境 聞法師惠亮開堂說經 遂詣聽講經 一日惠亮問曰 “沙彌從何來” 對曰 “某新羅人也” 其夕法師招來相見 握手密言曰 “吾閱人多矣 見汝容貌 定非常流 其殆有異心乎” 答曰 “某生於偏方 未聞道理 聞師之德譽 來伏下風 願師不拒 以卒發蒙”
거칠부
거칠부(혹은 황종이라 말한다.)는 성이 김씨로 내물왕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잉숙각간이고, 아버지는 물력이찬이다. 거칠부는 어려서 구속됨이 없고, 원대한 뜻이 있었다.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며 구경하였다. 문득 고구려를 엿보고자 하여 그 경계에 들어갔다가 법사 혜량이 당을 열고 설법한다는 것을 듣고 마침내 나아가 강경을 들었다. 하루는 혜량이 물어 말하기를 “사미는 어디에서 왔는가?”하니 대답해 말하기를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했다. 그날 저녁 법사가 불러 오게하여 서로 만나 손을 잡고 몰래 말하기를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았는데 너의 용모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자못 다른 마음이 있을 것이다.”했다. 답하여 말하기를 “제가 구석진 나라에서 태어나 도리를 듣지 못하였는데 스님의 덕과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법사께서는 거절하지 마시고 끝까지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기를 바랍니다.”했다.
師曰 “老僧不敏 亦能識子 此國雖小 不可謂無知人者 恐子見執 故密告之 宜疾其歸” 居柒夫欲還 師又語曰 “相汝鷰頜鷹視 將來必爲將帥 若以兵行 無貽我害” 居柒夫曰 “若如師言 所不與師同好者 有如皦日” 遂還國返本從仕 職至大阿湌 眞興大王六年乙丑 承朝旨 集諸文士 修撰國史 加官波珍湌
스님이 말하기를 “늙은 중이 민첩하지 못하지만 또한 그대를 알 수 있었다. 이 나라가 비록 작으나 사람을 알아보는 자가 없다하지 못한다. 그대가 잡힐까 두렵기 때문에 비밀리에 알리는 것이다. 마땅히 빨리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했다. 거칠부가 돌아가려하는데 스님이 또 말하기를 “너를 보니 제비턱에 매의 눈이라서 장래에 반드시 장수가 될 것입니다. 만약 스님의 말과 같이 스님과 함께 좋아함을 같이하지 않는다면 밝은 해와 같음이 있을 것입니다.(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하고는 마침내 환국하여 본래로 돌아 가(환속하여) 벼슬에 종사하여 관직이 대아찬에 이르렀다. 진흥대왕 6년 을축(545)에 조정의 명을 받들어 여러 문사를 모아 국사를 편찬하고 관직이 파진찬으로 승진하였다.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湌·比台角湌·耽知迊湌·非西迊湌 奴夫波珍湌·西力夫波珍湌·比次夫大阿湌·未珍夫阿湌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 乘勝取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 至是惠亮法師 領其徒出路上 居柒夫下馬 以軍禮揖拜 進曰 “昔遊學之日 蒙法師之恩 得保性命 今邂逅相遇 不知何以爲報” 對曰 “今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居柒夫同載以歸 見之於王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眞智王元年丙申 居柒夫爲上大等 以軍國事務自任 至老終於家 享年七十八
(진흥대왕)12년 신미(551) 왕이 거칠부와 구진 대각찬, 비태 각찬, 탐지 잡찬, 비서 잡찬, 노부 파진찬, 서력부 파진찬, 비차부 대아찬, 미진부 아찬 등 8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침입하게 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을 쳐서 깨트리니 거칠부 등이 이김을 타고 죽령 밖 고현 안의 10군을 빼앗았다. 이에 이르러 혜량법사가 그 무리를 거느리고 길로 나오니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 읍하고 절한 후 나와 말하기를 “지난번에 유학하던 날에 법사의 은혜를 입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연히 만났으니 어떻게 보답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했다. 대답해 말하기를 “지금 우리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귀 나라에 이르기를 원합니다.”했다. 이에 거칠부가 함께 수레에 타고 돌아 와 왕을 뵈었다. 왕이 승통으로 삼았다. 처음 백좌강회와 팔관의 법을 두었다. 진지왕 1년 병신(576) 거칠부가 상대등이 되어 군국의 사무를 스스로 맡았다. 늙어서 집에서 죽었는데 나이는 78세였다.
居道
失其族姓 不知何所人也 仕脫解尼師今爲干 時于尸山國·居柒山國 介居鄰境 頗爲國患 居道爲邊官 潛懷幷呑之志 每年一度 集羣馬於張吐之野 使兵士騎之 馳走以爲戱樂 時人稱爲馬技 兩國人 習見之 以爲新羅常事 不以爲怪 於是起兵馬 擊其不意 以滅二國
거도는 그 친족과 성을 잃어버려 어떤 사람인지 아리 못한다. 탈해 이사금 때 벼슬하여 간이 되었다. 이 때 시산국, 거칠산국이 경계를 이웃하여 끼어 살았는데 자못 나라의 근심이 되었다. 거도가 변경의 관리가 되어 마음속으로 병탄의 뜻을 품고 매년 1번 씩 장토의 들에서 여러 말들을 모아 병사로 하여금 타게 하고, 치달리는 것으로서 오락을 삼았다. 그 때 사람들이 (이 놀이를)일컬어 마기라 하였다. 두 나라 사람들이 자주 보았기 때문에 신라의 보통 일이라 여기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군대와 말을 일으켜 불의에 쳐서 두 나라를 없앴다.
異斯夫
(或云苔宗) 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至十三年壬辰 爲阿瑟羅州軍主 謀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舡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 踏殺之” 其人恐懼則降 眞興王在位十一年 大寶元年 百濟拔高句麗道薩城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異斯夫 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甲士戍之 時高句麗遣兵來攻金峴城 不克而還 異斯夫追擊之大勝
이사부(혹은 태종이라 한다.)는 성이 김씨로 내물왕의 4세손이다. 지도로왕(지증왕)때 바닷가 변경의 관리가 되었는데 거도의 임시 꾀를 이어 마희로서 가야(혹은 가라라 한다,)국을 빼앗았다. 13년 임진(지증왕 13년, 512)에 아슬라주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합칠 것을 꾀하였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워 위엄으로는 항복받기 어렵고, 계책으로 복종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이에 나무로 사자형상을 많이 만들어 나누어 배에 싣고 그 나라 바닷가에 이르러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곧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게 할 것이다.”하였다.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진흥왕 재위 11년(550) 대보 1년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두 나라 군대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대를 내어 그들을 쳐서 뚜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갑사를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이 때 고구려가 군대를 보내 와서 금현성을 공격하였는데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사부가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
金仁問 字仁壽 太宗大王第二子也 幼而就學多讀儒家之書 兼涉莊·老·浮屠之說 又善隸書射御鄕樂 行藝純熟 識量宏弘 時人推許 永徽二年 仁問年二十三歲 受王命 入大唐宿衛 高宗謂 “涉海來朝 忠誠可尙” 特授左領軍衛將軍 四年 詔許歸國覲省 太宗大王授以押督州摠 管 於是 築獐山城以設險 太宗錄其功 授食邑三百戶
김인문 자는 인수이고 태종대왕 둘째아들이다. 어려서 배움에 나아가 유가(유학)의 글을 많이 읽고, 겸하여 장자와 노자, 불교의 설을 섭렵하였다. 또 예서, 활쏘기, 말 타기, 향악을 잘하여 지식과 도량이 넓어 그 때 사람들이 추앙하였다. 영휘 2년(진덕왕 5, 651) 김인문이 23세 때 왕의 명을 받아 대 당나라에 들어 가 숙위하였는데 고종이 이르기를 “바다를 건너 와 조회하니 충성이 가상하다.”하고는 특별히 좌령군위장군을 주었다. (영휘 4년, 진덕왕 7년, 653) 황제의 허락을 받아 귀국하여 부모를 찾아뵈니 태종대왕이 압독주 총관을 주었다. 이에 장산성을 쌓아 요새를 설치하니 태종이 그 공을 포상하여 식읍 300호를 주었다.
新羅屢爲百濟所侵 願得唐兵爲援助 以雪羞恥 擬諭宿衛仁問乞師 會高宗以蘇定方爲神丘道大摠管 率師討百濟 帝徵仁問 問道路險易 去就便宜 仁問應對尤詳 帝悅制授神丘道副大摠管 勑赴軍中 遂與定方濟海 到德物島 王命太子 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巨艦一百艘載兵迎 延之至熊津口 賊瀕江屯兵 戰破之 乘勝入其都城滅之 定方俘王義慈及太子孝·王子泰等 廻唐 大王嘉尙仁問功業 授波珍湌 又加角干 尋入唐宿衛如前
신라가 여러 번 백제에게 침입을 당하자 당나라 군대를 얻어 도움을 삼고 부끄러움을 씻고자(원수를 갚고자)하여 숙위하러 가는 김인문에게 군대를 청하게 했다. 마침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 대총관으로 삼아 군대를 통솔하여 백제를 토벌하게 했다. 황제가 김인문을 불러 도로의 험함과 평탄함, 나아감의 편의를 물었다. 김인문이 대답하기를 매우 자세하게 하였다. 황제가 기뻐하며 신구도 부대총관을 제수하고 군중에 나갈 것을 명하였다. 마침내 소정방과 바다를 건너 덕물도에 이르니 왕(태종)이 태자에게 명하여 장군 김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큰 배 100척에 군대를 싣고 맞이하게 하여 그들을 이끌어 웅진구에 이르렀다. 적이 강가에 군대를 주둔하였는데 싸워 깨트리고 이김을 타고 그 도성으로 들어 가 없앴다. 소정방이 왕인 의자와 태자 효, 왕자 태 등을 포로로하여 당나라로 돌아 갔다. 태종대왕이 김인문의 공업을 가상히 여겨 파진찬을 주었다가 또 각간으로 승진시키고 곧 당나라에 들어 가 전과 같이 숙위하게 했다.
龍朔元年 高宗召謂曰 “朕旣滅百濟 除爾國患 今高句麗負固 與穢貊同惡 違事大之禮 棄善鄰之義 朕欲遣兵致討 爾歸告國王 出師同伐 以殲垂亡之虜” 仁問便歸國 以致帝命 國王使仁問與庾信等 練兵以待 皇帝命邢國公蘇定方 爲遼東道行軍大摠管 以六軍長驅萬里 迕麗人於浿江 擊破之 遂圍平壤 麗人固守 故不能克 士馬多死傷 糧道不繼 仁問與留鎭劉仁願 率兵兼輸米四千石·租二萬餘斛 赴之 唐人得食 以大雪解圍還 羅人將歸 高句麗謀要擊於半塗 仁問與庾信 詭謀夜遁 麗人翌日 覺而追之 仁問等 廻擊大敗之 斬首一萬餘級 獲人五千餘口而歸 仁問又入唐
용삭 1년(문무왕 1년, 661) 고종이 조칙으로 일러 말하기를 “짐이 백제를 없애 너희 나라의 근심을 없앴다. 지금 고구려가 견고함을 지고 예맥과 악을 같이 하며,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을 어기고, 이웃나라와 잘 지내는 의리를 버렸다. 짐은 군대를 모대 토벌하려하니 너는 돌아 가 국왕에 알려 군대를 내어 같이 정벌하여 망해가는 오랑캐를 섬멸하라.”했다. 김인문이 곧 귀국하여 황제의 명을 전하였다. 국왕(신라 국왕: 문무왕)이 김인문과 김유신 등으로 하여금 군대를 훈련하고 기다렸다. 황제가 형국공 소정방에게 명하여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6군으로서 길게 만 리를 치달려가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을 패강에서 만나 쳐서 깨트리고, 마침내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굳게 지켰기 때문에 이길 수 없었다. 군사와 말이 많이 다치거나 죽고, 양식 운반 길이 이어지지 못하였다. 김인문과 머물며 지키던 유인원이 군대를 이끌고 쌀 4천석과 조 2만곡을 겸하여 운반해 나아가니 당나라 사람들이 먹을 수 있었다. 큰 눈이 내리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신라 사람들이 장차 돌아가려 할 때 고구려가 중도에서 요격할 것은 꾀하였다. 김인문과 김유신이 속이고 밤에 달아니 고구려 사람들이 다음 날 알고 추격하였다. 김인문 등이 돌아 가 쳐서 크게 무너뜨리고 1만 여명을 목 베어 죽이고, 5천여 명을 잡아 도라왔다. 김인문이 또 당나라에 들어 갔다.
以乾封元年 扈駕登封泰山 加授右驍衛大將軍 食邑四百戶 摠章元年戊辰 高宗皇帝遣英國公李勣 帥師伐高句麗 又遣仁問徵兵於我 文武大王與仁問 出兵二十萬 行至北漢山城 王住此 先遣仁問等 領兵會唐兵 擊平壤 月餘執王臧 仁問使王跪於英公前 數其罪 王再拜 英公禮答之 卽以王及男産·男建·男生等還 文武大王 以仁問英略勇功 特異常倫 賜故大琢角干朴紐食邑五百戶 高宗亦聞仁問屢有戰功
건봉 1년(문무왕 6년, 666) 황제의 수레를 따라 태산에 올라 봉선의 의식에 참여하였는데 우효위대장군과 식읍 5백호를 주었다. 총장 1년 무진(문무왕 8년, 668) 고종황제가 영국공 이적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또 김인문을 보내 우리에게 군대를 징발하게 하였다. 문무대왕과 김인문이 군대 20만을 내어 행군하여 북한산성에 이르렀다. 왕은 여기에 머무르고, 김인문 등을 먼저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와 만나 평양성을 치게 하였다. 한 달정도 후에 고구려 왕 장을 잡았다. 김인문이 영국공 앞에서 왕을 무릎꿇게 하고 그 죄를 헤아렸다. 왕이 두 번 절하니 영국공이 예로 답하였다. 곧 왕과 남산, 남건, 남생 등을 데리고 돌아갔다. 문무대왕은 김인문이 뛰어난 지략과 용맹한 공이 보통보다 다르다고 여겨 죽은 대탁 각간 박뉴의 식읍 500호를 내렸다. 고종이 또한 김인문이 여러 번 전공이 있음을 들었다.
制曰 “爪牙良將 文武英材 制爵疏封 尤宜嘉命” 仍加爵秩 食邑二千戶 自後侍衛宮禁 多歷年所 上元元年 文武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唐皇帝大怒 以劉仁軌爲雞林道大摠管 發兵來討 詔削王官爵 時 仁問爲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 在京師 立以爲王 令歸國以代其兄 仍策爲雞林州大都督開府儀同三司 仁問懇辭不得命 遂上道 會 王遣使入貢且謝罪 皇帝赦之 復王官爵 仁問中路而還 亦復前銜
황제가 글을 내려 말하기를 “손톱과 이빨을 지닌 장수(용맹한 장수)이고 훌륭한 장수이며 문무에 영특한 재능을 지녔다. 벼슬을 제정하고 봉읍을 주고 더욱 아름다운 명을 내림이 마당하다.”하고는 벼슬과 녹을 높여 식읍 2천 호를 더하였다. 그 후로 당나라의 궁궐에서 시위하기를 여러 해 하였다. 상원 1년(문무왕 13년, 673) 문무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크게 노하여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을 삼아 군대를 내어 가서 토벌하게 하고, 왕(문무왕)의 관작을 깍았다.그 때 김인문이 우효위 원외 대장군 임해군공이 되어 서울(당나라 서울 장안)에 있었는데 세워 왕으로 삼고 귀국하여 그 형을 대신하게 하고, 그대로 책봉하여 계림주 대도독 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 김인문이 간절히 사양하다 부득이하여 마침내 길에 올랐다. 마침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사죄하니 황제가 용서하고, 다시 왕의 관작을 회복하였다. 김인문이 중간에 돌아와 앞의 직급을 회복하였다.
調露元年 轉鎭軍大將軍行右武威衛大將軍 載初元年 授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 延載元年四月二十九日 寢疾薨於帝都 享年六十六 訃聞上震悼 贈襚加等 命朝散大夫行司禮寺大醫署令陸元景·判官朝散郞直司禮寺某等 押送靈柩 孝昭大王追贈太大角干 命有司 以延載二年十月二十七日 窆于京西原 仁問七入大唐 在朝宿衛 計月日 凡二十二年 時亦有良圖海湌 六入唐 死于西京 失其行事始末
조로 1년(문무왕 19년, 679) 진군대장군 행우무위위대장군에 전임되었다. 재초 1년(신문왕 10년, 690) 보국대장군 상주국 임해군공 개국공 죄우림군장군을 받았다. 연재 1년(효소왕 3년, 694) 4월 29일 제도(장안)에서 병이 들어 죽으니 향년 66세였다. 상(황제)이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수의를 주고 조산대부 행사례시 대의서령 육원경, 판관 조산랑 직사례시 모 등에게 명하여 영구를 호송하게 하였다, 효소대왕이 태대각간을 추증하고 담당관청으로 하여금 연재 2년(효소왕 4년, 695) 서울 서쪽 언덕에 무덤을 만들게 하였다. 김인문이 일곱 번 당나라에 들어 가 조정에 있으면서 숙위한 월일을 계산하면 모두 22년이었다. 그 때 또한 양도 해찬이 여섯 번 당에 들어 가 서경(장안)에서 죽었는데 그 일을 행한 시말은 잃어버렀다.
金陽 字魏昕 太宗大王九世孫也 曾祖周元伊湌 祖宗基蘇判 考貞茹波珍湌 皆以世家爲將相 陽生而英傑 太和二年 興德王三年 爲固城郡太守尋 拜中原大尹 俄轉武州都督 所臨有政譽 開成元年丙辰 興德王薨 無嫡嗣 王之堂弟均貞 堂弟之子悌隆 爭嗣位 陽與均貞之子阿湌祐徵·均貞妹壻禮徵 奉均貞爲王 入積板宮 以族兵宿衛 悌隆之黨金明·利弘等來圍 陽陳兵宮門 以拒之曰 “新君在此 爾等何敢兇逆如此” 遂引弓射殺十數人 悌隆下裴萱伯 射陽中股
김양, 자는 위흔이니 태종대왕 9세손이다. 증조는 주원 이찬이고, 조부는 종기 소판이고, 아버지는 정여 파진찬이다. 모두 세가로 장수와 재상을 하였다. 김양은 나면서 영특하고 걸출하였다. 태화 2년(828), 흥덕왕 3년 고성군 태수가 되었고, 곧바로 중원 대윤에 임명되었다가 갑자기 무주도독으로 전임되어 임하는 바마다 정사를 잘 한다는 칭찬이 있었다. 개성 1년 병진(흥덕왕 11년, 희강왕 1년, 836) 흥덕왕이 돌아가시고, 적손이 업었다. 왕의 당제(4촌동생) 김균정과 당제(사촌동생)의 아들 김제륭이 왕위계승을 두고 다투었다. 김양과 김균정의 아들 아찬 김우징, 김균정의 매서(누이의 남편) 김예징이 김균정을 받들어 왕으로 삼고 적판궁에 들어 가 족병(가병)으로 숙위(호위)하였다. 김제륭의 무리인 김명, 이홍 등이 와 둘러싸니 김양이 군대로 궁궐 문을 지키는 것으로서 막으며 말하기를 “새로운 임금이 여기에 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감히 흉포하여 도리에 어긋남이 이같은가?”했다. 마침내 활을 당겨 수십 명을 쏘아 죽이니 김제륭의 부하 배훤백이 김양을 쏘아 다리를 맞추었다.
均貞曰 “彼衆我寡 勢不可遏 公其佯退 以爲後圖” 陽 於是 突圍而出 至韓歧(一作漢祗市) 均貞沒於亂兵 陽號泣旻天 誓心白日 潛藏山野 以俟時來 至開成二年八月 前侍中祐徵 收殘兵 入淸海鎭 結大使弓福 謀報不同天之讎 陽聞之 募集謀士兵卒 以三年二月 入海 見祐徵 與謀擧事 三月 以勁卒五千人 襲武州 至城下 州人悉降 進次南原 迕新羅兵 與戰克之 祐徵以士卒久勞 且歸海鎭 養兵秣馬 冬彗孛見西方 芒角指東 衆賀曰 “此除舊布新 報寃雪恥之祥也” 陽號爲平東將軍
김균정이 말하기를 “그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형세가 막을 수 없다. 공들은 거짓으로 물러난 후에 도모할 것이다.”했다. 김양이 이에 포위를 뚫고 나왔는데 한기(한지라 쓰기도 한다.)의 시자에 이르러 김균정이 난병들에게 죽었다. 김양이 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며 밝은 태양을 가리키며 맹서하고 산야에 숨어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개성 2년(희강왕 2년, 837) 8월에 이르러 전 시중 김우징이 남은 군대를 거두어 청해진에 들어 가 대사 궁복과 결탁하여 하늘을 함께하지 못할 원수를 갚을 것을 모의하였다. 김양이 그것을 듣고 모사와 군대를 모집하여 (개성)3년(희강왕 3년, 838) 2월 바다에 들어 가 김우징을 만나 일을 일으킬 것을 논의하였다. 3월 날랜 군사 5천 명을 데리고 무주를 습격하여 성 아래 이르니 무주의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진군하여 남원에 가 신라 군대를 맞아 싸워 이겼다. 김우징은 병졸들이 오래동안 수고했기 때문에 청해진으로 돌아 가 군대를 기르고 말을 먹였다.(길렀다.) 겨울에 혜성이 서쪽에 나타났는데 뾰족한 꼬리가 동쪽을 가리켰다. 무리들이 축하해 말하기를 “이는 옛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을 상서로움이다.”했다. 김양이 이름을 평동장군이라 했다.
十二月再出 金亮詢以鵡洲軍來 祐徵又遣驍勇閻長·張弁·鄭年·駱金·張建榮·李順行六將統兵 軍容甚盛 鼓行至武州鐵冶縣北川 新羅大監金敏周 以兵逆之 將軍駱金·李順行 以馬兵三千 突入彼軍 殺傷殆盡 四年正月十九日 軍至大丘 王以兵迎拒 逆擊之 王軍敗北 生擒斬獲 莫之能計 時 王顚沛逃入離宮 兵士尋害之 陽 於是 命左右將軍領騎士 徇曰 “本爲報讎 今渠魁就戮 衣冠士女百姓 宜各安居勿妄動” 遂收復王城 人民案堵
12월 다시 나오니 김양순이 무주의 군대를 데리고 왔다. 김우징이 도 날래고 용감한 염장, 장변, 정년, 낙금, 장건영, 이순행 6장군을 보내 군대를 통솔하게 하니 군대으이 모습이 매우 성대하였다. 북을 치며 행군하여 무주 철야현 북천에 이르니 신라 대감 김민주가 군대로서 막았다. 장군 낙금, 이순행이 마병(기병) 3천 명으로서 그 군대에 돌격해 들어 가 죽이고 해치기를 거의 다하였다. 개성 4년(희강왕 4년, 839) 정월 19일 군대가 대구에 이르니 왕이 군대를 데리고 맞아 막았는데 역습하여 치니 왕의 군대가 패배하였다. 사로잡고 목 베어 죽임이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때 왕이 자빠지며 이궁에 들어갔는데 병사들이 그를 찾아 죽였다. 김양이 이에 좌우 장군에게 명하여 기병을 거느리게 하였다. 김양순이 말하기를 “본래 원수를 갚기 위함인데 지금 우두머리를 죽였으니 귀족의 남녀와 백성들은 마땅히 각기 편안히 거처하고 망녕되이 움직이지 말라.”했다. 마침내 왕성을 수복하니 백성들이 안도하였다.
陽召萱伯曰 “犬各吠非其主 爾以其主射我 義士也 我勿校 爾安無恐” 衆聞之曰 “萱伯如此 其他何憂” 無不感悅 四月淸宮 奉迎侍中祐徵卽位 是爲神武王 至七月二十三日 大王薨 太子嗣位 是爲文聖王 追錄功 授蘇判兼倉部令 轉侍中兼兵部令 (入)唐聘問 兼授公檢校衛尉卿 大中十一年八月十三日 薨于私第 享年五十 訃聞大王哀慟 追贈舒發翰 其贈賻殮葬 一依金庾信舊例 以其年十二月八日 陪葬于太宗大王之陵從父兄
김양이 배훤백을 불러 말하기를 “개도 각기 그 주인이 아님에 짖는다. 너는 그 주인을 위해 나를 쏘았으니 의로운 선비이다. 나는 따지지 않겠으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했다. 무리들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배훤백이 이와 같으니 나머지가 무엇을 근심하랴!”하고는 감동하고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 4월 궁궐을 청소하고 시중 김우징을 받들어 맞으니 이를 신무왕이라 한다, 7월 23일에 이르러 대왕이 죽으니 태자가 왕위를 계승하니 이를 문성왕이라 한다. (김양의)공을 추록하여 소판 겸 창부령을 주었다가 시중 겸 병부령으로 전임하고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겸하여 공에게 검교위위경을 주었다. 대중 11년(문성왕 19년, 857) 8월 13일 개인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0세이다. 부음을 들은 대왕이 크게 슬퍼하며 서발한을 추증하고 부의와 장례를 김유신의 옛 예와 같게 하였다. 그해 12월 8일 태종대왕의 능에 배장하였다. 종부형이다.
昕 字泰 父璋如 仕至侍中波珍湌 昕幼而聰悟 好學問 長慶二年 憲德王將遣人入唐 難其人 或薦昕太宗之裔 精神朗秀 器宇深沈 可以當選 遂令入朝宿衛 歲餘請還 皇帝詔授金紫光祿大夫試太常卿 及歸 國王以不辱命 擢授南原太守 累遷至康州大都督 尋加伊湌兼相國
김흔 자는 태이고, 부는 장여이다. 벼슬이 시중 파진찬에 이르렀다. 김흔은 어려서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경 2년(헌덕왕 14년, 822) 헌덕왕이 장차 사람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가게 하려는데 알맞은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어떤 사람이 김흔을 천거하기를 “태종의 후예로 정신이 밝고 빼어나며 그릇이 깊고 크니 마땅히 선발할만합니다.”했다. 마침내 (당나라에)조회하고 숙위하게 하였다. 1년이 지나 돌려보낼 것을 청하니 황제가 금자광록대부 시태상경을 주었다. 돌아오니 국왕이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하여 발탁하여 남원태수를 주었다. 여러 번 옮겨 강주대도독에 이르렀고, 곧 이찬 겸 상국을 더하였다.
開成己未閏正月 爲大將軍 領軍十萬 禦淸海兵於大丘敗績 自以敗軍 又不能死綏 不復仕宦 入小白山 葛衣蔬食 與浮圖遊 至大中三年八月二十七日 感疾終於山齋 享年四十七歲 以其年九月十日 葬於奈靈郡之南原 無嗣子 夫人主喪事 後爲比丘尼
개성 기미(신무왕 원년, 839) 정월 대장군이 되어 군대 10만을 거느리고 대구에서 청해의 군대를 막다가 패하였고, 자신이 패하였는데도 또한 죽지 못하였다 하여 다시 벼슬하지 않고 소백산에 들어 가 갈의 와 거친 음식을 먹으며 승려와 노닐었다. 대중 3년(문성왕 11년, 849) 8월 27일에 이르러 병이 걸려 산의 집에서 죽으니 향년 47세였다. 그 해 9월 10일 나령군 남쪽 언덕에 장례하였다. 자식이 없어 부인이 장례의 일을 주관하였는데 후에 비구니가 되었다.
黑齒常之 百濟西部人 長七尺餘 驍毅有謀略 爲百濟達率兼風達郡將 猶唐刺史云 蘇定方平百濟 常之以所部降 而定方囚老王 縱兵大掠常之懼 與左右酋長十餘人遯去 嘯合逋亡 依任存山自固 不旬日 歸者三萬 定方勒兵攻之 不克 遂復二百餘城 龍朔中 高宗遣使招諭 乃詣劉仁軌降 入唐爲左領軍員外將軍洋州刺史 累從征伐積功 授爵賞殊等 久之 爲燕然道大摠管 與李多祚等 擊突厥破之 左監門衛中郞將爨寶璧 欲窮追邀功 詔與常之共討 寶璧獨進 爲虜所覆 擧軍沒 寶璧下吏誅 常之坐無功 會 周興等誣其與鷹揚將軍趙懷節叛 捕繫詔獄 投繯死 常之御下有恩 所乘馬爲士所箠 或請罪之 答曰 “何遽以私馬 鞭官兵乎” 前後賞賜 分麾下無留貲 及死 人皆哀其枉
흑치상지 백제 서부 인이다. 키가 7척 정도였다. 날래고 굳세며 꾀가 지략이 있었다. 백제 달솔 겸 풍달 군장이 되었다. 당나라 자사와 같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니 상지가 거느린 바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소정방이 늙은 왕을 가두고 군대를 놓아 크게 약탈하니 흑치상지가 두려워하여 좌우 추장 10여인과 달아나 도망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존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지켰다. 10일이 지나지 않아 돌아온 자가 3만이었다. 소정방이 군대를 독려하여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마침내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 용삭 연간에 고종이 사신을 보내 불러 달래니 곧 유인궤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다. 당나라에 들어 가 좌령군 원외장군 양주자사가 되었다. 여러 번 정벌에 종사하여 공을 쌓아 관작과 상이 무리와 달랐다. 오래 후 연연도 대총관이 되어 이다조 등과 함께 돌궐을 쳐서 깨트렸다. 좌감문위 중낭장 찬보벽이 끝가지 추격하여 공을 세우고자 하니 흑치상지와 함께 토벌하게 했으나 찬보벽이 홀로 나아갔다가 포로가 되고 전군이 뒤집어지고 군대가 함락되었다. 천보벽은 옥리에게 넘겨져 죽임을 당하였다. 흑치상지가 연좌되어 공이 없어지게 되었다. 마침 주흥 등이 그가 응양장군 조회절의 배반에 참여하였다고 무고하여 잡혀 묶였다가 교수형을 당해 죽었다. 흑치상지는 부리는 아랫사람에게 은혜가 있었다. 타는 바의 말이 병사들에게 매질을 당하였을 때 어떤 사람이 죄주기를 청하였다. 답하여 말하기를 “어찌 대번에 사사로운 말 때문에 관병을 채찍질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전후의 상은 나누어 휘하에게 주어 남은 재화가 없었다. 죽음에 이르러 사람들이 그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張保皐
(羅紀作弓福)鄭年
(年或作連)皆新羅人 但不知鄕邑父祖 皆善鬪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噎 角其勇壯 保皐差 不及也 年以兄呼保皐 保皐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後保皐還國 謁大王曰 “遍中國以吾人爲奴婢 願得鎭淸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淸海 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大王與保皐萬人 此後海上無鬻鄕人者 保皐旣貴 年去職饑寒 在泗之漣水縣 一日言於戍將馮元規曰 “我欲東歸 乞食於張保皐”
장보고(신라본기에 궁복이라 썼다.)와 정년(년은 혹 련이라 쓴다.)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 다만 고향과 아버지, 할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모두 싸움을 잘하였다. 정년은 바다 아래에 잠겨 50리를 가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조금 뒤졌으나 나이로서 장보고를 형이라 불렀다. 장보고는 나이로, 정년은 재능으로 항상 맞서 서로 아래라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당나라에 가 무녕군 소장이 되었는데 말을 타고 창을 씀이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후에 장보고가 환국하여 대왕을 뵙고 말하기를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 나라 사람으로 노비가 된 자가 있었습니다. 청해에 진을 두어 도덕이 사람을 노략질하여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를 원합니다.”했다. 청해는 신라 바닷길의 요충지이니 지금 완도라 말한다. 대왕이 장보고에게 만 명을 주었다. 이 후로 해상에서 향인(우리나라 사람)을 파는 자가 없어졌다. 장보고가 귀하게 되었을 때 정년은 관직을 떠나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사수의 연수현에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수비하는 장수 풍원규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쪽(신라)으로 돌아가 장보고에게 음식을 구걸하고자 한다.”했다.
元規曰 “若與保皐所負如何 奈何去取死其手” 年曰 “饑寒死 不如兵死快 況死故鄕耶” 遂去 謁保皐 飮之極歡 飮未卒 聞王弑國亂無主 保皐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入國 誅叛者立王 王召保皐爲相 以年代守淸海(此與新羅傳記頗異 以杜牧立傳 故兩存之)
풍원규가 말하기를 “그대와 장보고는 신세진 바가(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가서 그 손에 죽음을 취하려 하는가?”했다. 정년이 말하기를 “굶주리고 추위에 떨다 죽는 것은 군대에서 깨끗하게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물며 고향에서 죽음에 있어서랴!”했다. 마침내 가서 장보고를 뵈니 술을 마시며 환락을 다하였다. 술 마시기를 마치지 않았는데 왕이 살해되어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이 없다는 것을 들었다. 장보고가 군대 5000명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면서 정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흐리며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화란을 평정할 수 없습니다.”했다. 정년이 나라에 들어 가 배반한 자를 죽이고 왕을 세웠다. 왕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서 청해를 대신 지키게 하였다.(이는 신라전의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두목이 전을 세웠기 때문에 두 개 모두 남겨둔다.)
論曰 杜牧言 『天寶安祿山亂 朔方節度使安思順 以祿山從弟賜死 詔郭汾陽代之 後旬日復詔李臨淮 持節分朔方半兵 東出趙·魏 當思順時 汾陽·臨淮 俱爲牙門都將 二人不相能 雖同盤飮食 常睇相視 不交一言 及汾陽代思順 臨淮欲亡去 計未決 詔臨淮 分汾陽半兵東討 臨淮入請曰 ‘一死固甘 乞免妻子’ 汾陽趍下 持手上堂 偶坐曰 ‘今國亂主遷 非公不能東伐 豈懷私忿時耶’ 及別執手泣涕 相勉以忠義 訖平巨盜 實二公之力 知其心不叛 知其材可任 然後 心不疑 兵可分 平生積憤 知其心 難也 忿必見短 知其材 益難也
논하여 말한다. 두목이 말하기를 “천보 연간의 안록산의 난 때 삭방절도사 안사순이 녹산의 종제(4촌)이기 때문에 죽음이 내려지고, 곽분양이 대신하게 하였다. 10일 후 다시 이임회에게 조서를 내려 부절을 가지고 삭방의 군대를 반으로 나누어 동쪽으로 조와 위 지역으로 나가게 하였다. 안사순 때에는 곽분양, 이임회가 모두 아문도장이 되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잘 하지 못하여(사이가 좋지 못하여)비록 같은 상의 음식이라도 항상 서로 흘겨보면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곽분양이 안사순을 대신하자 이임회가 도망하려 하였으나 계획을 결행하지 못하였다. 이임회에게 조서를 내려 곽분양의 군대를 반으로 나누어 동쪽을 토벌하게 하자 이임회가 들어 가 청하여 말하기를 ‘한 번 죽음은 진실로 달게 받으나 처자는 면하게 해 줄 것을 청합니다.’했다. 곽분양이 달려 내려와 손을 잡고 당에 올라 마주 앉아 말하기를 ‘지금 나라가 어지러워 임금이 옮겼으니 공이 아니면 동쪽을 칠 수 없습니다. 어찌 사사로이 분함을 품을 때이겠습니까?’했다. 헤어질 때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충과 의로서 권면하여 끝내 큰 도적을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두 공의 힘이었다. 그 마음에 배반하지 않을 것을 알고, 그 재능이 맡길만함을 안 후에는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고 군대를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평생동안 분함을 쌓고 그 마음을 알기는 어렵고, 분함은 반드시 단점을 보니 그 재능을 알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했다.
此保皐與汾陽之賢等耳 年投保皐 必曰 ‘彼貴我賤 我降下之 不宜以舊忿殺我’ 保皐果不殺 人之常情也 臨淮請死於汾陽 亦人之常情也 保皐任年事 出於己 年且饑寒 易爲感動 汾陽·臨淮平生抗立 臨淮之命 出於天子 攉於保皐 汾陽爲優 此乃聖賢遲疑成敗之際也 彼無他也 仁義之心 與雜情並植 雜情勝則仁義滅 仁義勝則雜情消
여기의 장보고와 곽분양의 현명함은 동등하다. 정년이 장보고에게 투탁할 때 ‘저는 귀하고 나는 천하니 내가 낮추면 마땅히 옛 원한 때문에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했는데 장보고가 과연 죽이지 않은 것은 사람의 떳떳한 정이다. 이임회가 곽분양에게 죽음을 청한 것 또한 사람의 떳떳한 정이다. 장보고가 정년에게 일을 맡긴 것도 자기에게서 나간 것이고, 정년이 또한 주리고 추위에 떨었으므로 감동하기 쉬웠던 것이다. 곽분양과 이임회가 평생동안 대립해 있었지만 이임회에 대한 명은 천자에게서 나왔으니 장보고에 비하여 곽분양이 나았다.(쉬웠다.) 이는 곧 성현도 의심하고 망설이다 실패를 이루는 즈음이다.(분기점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의의 마음이 여러 잡된 정과 섞여 나란히 심어져 잡된 정이 우세하면 곧 인읙 없어지고, 인의가 의세하면 곧 잡된 정이 사라진다.
彼二人 仁義之心旣勝 復資之以明 故卒成功 世稱周·召爲百代之師 周公擁孺子 而召公疑之 以周公之聖·召公之賢 少事文王 老佐武王 能平天下 周公之心 召公亦且不知之 苟有仁義之心 不資以明 雖召公尙爾 況其下哉 語曰 ‘國有一人 其國不亡’ 夫亡國 非無人也 丁其亡時 賢人不用 苟能用之 一人足矣』 宋祁曰 『嗟乎 不以怨毒相惎 而先國家之憂 晉有祁奚 唐有汾陽·保皐 孰謂夷無人哉』
저 두 사람은 인의의 마음이 이미 우세하고 다시 자질이 밝았기 때문에 마침내 공을 이룬 것이다. 세간에서는 주공과 소공을 백대의 스승이라 말하는데 주공은 어린아이를 지켰고, 소공은 그것을 의심하였다. 주공의 성스러움과 소공의 어짊으로 젊어서는 문왕을 섬기고, 늙어서는 무왕을 도와 천하를 평안하게 하였으나 주공의 마음은 소공도 또하 알지 못하였다. 만일 인의 의 마음은 있으나 자질이 밝지 못하면 비록 소공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그 아래에 있어서랴. 속담에 ‘나라에 한 사람이 있으면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하니 대저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망할 때를 당하여 어진 이를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등용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송기가 말하기를 ‘아! 원한 때문에 서로 해치지 않고 국가의 근심을 우선한 것으로는 진나라에 이해가 있었고, 당나라에는 곽분양과 장보고가 있었으니 누가 동이에 사람이 없다 이를 수 있겠는가.’했다.
斯多含 系出眞骨 奈密王七世孫也 父仇梨知級湌 本高門華胄 風標淸秀 志氣方正 時人請奉爲花郞 不得已爲之 其徒無慮一千人 盡得其歡心 眞興王命伊湌異斯夫 襲加羅(一作加耶)國 時斯多含年十五六 請從軍 王以幼少不許 其請勤而志礭 遂命爲貴幢裨將 其徒從之者亦衆 及抵其國界 請於元帥 領麾下兵 先入旃檀梁 (旃檀梁 城門名 加羅語謂門爲梁云) 其國人 不意兵猝至 驚動不能禦 大兵乘之 遂滅其國 洎師還 王策功賜加羅人口三百 受已皆放 無一留者 又賜田固辭 王强之 請賜閼川不毛之地而已 含始與武官郞 約爲死友 及武官病卒 哭之慟甚 七日亦卒 時年十七歲
사다함은 진골출신으로 나밀왕의 7세손이다. 아버지는 구리지 급찬이니 본래 고귀한 가문의 후예로 풍채가 미끈하게 빼어났고, 뜻과 기운이 반듯하여 그 때 사람들이 받들어 화랑이 될 것을 청하니 부득이 (화랑이) 되었다. 그 무리들이 무려 1천명으로 그들의 환심을 모두 얻었다.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가라(가야라 쓰기도 한다.)국을 습격하게 하였다. 그 때 사다함의 나이 15, 6세로 종군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어리라다 하여 허락하지 않다가 그 청이 부지런하고 뜻이 확고하였으므로 마침내 명하여 귀당비장으로 삼았다. 그 무리들로 그를 따르는 자가 또한 많았다. 그 나라 경계에 이르러 원수에게 휘하의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전단량으로 들어 갈 것을 청하였다.(전단량은 성문 이름이다. 가라 말로 문을 일러 양이라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군대가 갑자기 이르자 놀라 막지 못하였다. 큰 군대가 그것을 타고 마침내 그 나라를 멸하였다. 군대가 졸아오자 왕이 공을 책정하여 가라 사람 300명을 내리자 자기가 받은 사람을 모두 풀어주어 한 사람도 남긴 이가 없었다. 또 밭을 내리자 굳게 사양하였는데 왕이 강하게 권하자 알천의 불모지를 내려줄 것을 청할 뿐이었다. 사다함이 처음 무관랑과 죽음을 함께할 벗이 될 것을 약속하였는데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매우 슬프게 곡하다 7일 만에 또한 죽으니 그 때 나이 1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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