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卷第四十五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列傳 第五 乙巴素·金后稷·祿眞·密友·紐由·明臨荅夫·昔于老 朴堤上·貴山·溫達
열전 제5, 을파소, 김후직, 녹진, 밀우, 유유, 명임답부, 석우로, 박제상, 귀산, 온달
乙巴素 高句麗人也 國川王時 沛者於畀留·評者左可慮等 皆以外戚擅權 多行不義 國人怨憤 王怒欲誅之 左可慮等謀反 王誅竄之 遂下令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今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四部共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參大政 西鴨淥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을파소는 고구려 사람이다. (고)국천왕 때 패자 어비류, 평자 좌가려 등은 모두 외척으로서 권세를 함부로 하여 의롭지 않은 행동이 많아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해하였다. 왕이 노하여 죽이려 하니 좌가려 등이 반란을 꾀하다 왕이 죽이려하니 달아났다. 마침내 명을 내려 말하기를 “최근에 벼슬을 총애로서 주고, 지위는 덕이 아님에도 나아가 독이 백성에게 흘러 우리 왕가를 동요하게 한다. 이는 과인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너희 4부는 각기 어질지만 아래 지위에 있는 자를 천거하라.”했다. 이에 4부가 함게 동부 안유를 천거하니 왕이 불러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유안이 왕에게 말하기를 “미신(어리석은 신하)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진실로 큰 정사에 참여하기에 부족합니다. 서압록곡 좌물촌의 을파소는 유리왕 때의 대신인 을소의 손자인데 성품과 바탕이 굳세고, 지혜와 생각이 깊지만 세상에 쓰여지지 못하고 힘써 농사지어 자급합니다. 대왕이 만약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했다. 왕이 사신을 보내 (자신을)낮추는 말과 많은 선물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초빙하여 중이대부의 벼슬을 주고 작을 더해 우태를 삼았다.
謂曰 “孤叨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材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 巴素意雖許國 謂所受職 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選賢良 授高官 以成大業” 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於是朝臣國戚 謂巴素以新間舊 疾之 王有敎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 族之” 巴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上待我以厚意 其可復念舊隱乎” 乃以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王謂晏留曰 “若無子之一言 孤不能得巴素以共理 今 庶績之凝 子之功也” 迺拜爲大使者 至山上王七年秋八月 巴素卒 國人哭之慟
(왕이)일러 말하기를 “내가 은혜를 입고 선조의 기업을 이어 신하와 백성의 위에 처하였으나 덕이 적고 재능이 부족하여 다스림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선생은 공용을 감추어 밝음을 어둡게 하여 궁벽한 초야에 처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나를 버리지 말고 빨리 오시면 나의 기쁨과 행운일뿐만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목일 것입니다. 공경히 가르침을 받들기를 청하니 공께서는 마음을 다해주십시오.”했다. 을파소가 생각하기에 나라를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힘을 다하려 하였으나 이른 바의 직책이 일을 이루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이에 대답해 말하기를 “느리고 둔하여 엄한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훌륭한 인물을 뽑아 높은 관직을 주는 것으로 큰 업적을 이루십시오.”했다. 왕이 그 뜻을 알고 이에 국상을 삼아 정사를 맡게 하였다. 이에 조정의 신하와 나라의 인척(왕족)들이 을파소가 새로움(새로운 사람이)으로서 옛 것(옛 사람)을 이간한다고 미워하였다. 왕이 교(명령)로 말하기를 “귀천 없이 만약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일 것이다.”했다. 을파소가 물러나 사람들에게 알려 말하기를 “때를 만나지 못하면 곧 숨고, 때를 만나면 곧 벼슬하는 것은 선비의 떳떳함입니다. 지금 임금이 나를 대우하기를 두터운 뜻으로서 하시니 다시 전의 은거를 생각하랴.”했다. 이에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사와 교화를 밝게 하며, 상과 벌을 신중히 하니 백성은 편안하고, 내외가 일이 없었다. 왕이 안유에게 일러 말하기를 “만약 그대의 한 마디 말이 없었다면 내가 을파소를 얻어 함께 다스릴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여러 공적이 이루어진 것은 그대의 공이다.”하고, 이에 대사자로 삼았다. 산상왕 7년 가을 8월에 이르러 을파소가 죽으니 나라사람들이 슬프게 곡하였다.
金后稷 智證王之曾孫 事眞平大王爲伊湌 轉兵部令 大王頗好田獵 后稷諫曰 “古之王者 必一日萬機 深思遠慮 左右正士 容受直諫 孶孶矻矻 不敢逸豫 然後 德政醇美 國家可保 今 殿下日與狂夫獵士 放鷹犬 逐雉兎 奔馳山野 不能自止 老子曰 「馳騁田獵 令人心狂」 書曰 「內作色荒 外作禽荒 有一于此 未或不亡」 由是觀之 內則蕩心 外則亡國 不可不省也 殿下其念之” 王不從 又切諫 不見聽 後后稷疾病 將死 謂其三子曰 “吾爲人臣 不能匡救君惡 恐大王遊娛不已 以至於亡敗 是吾所憂也 雖死 必思有以悟君 須瘞吾骨於大王遊畋之路側” 子等皆從之 他日 王出行 半路有遠聲 若曰 “莫去” 王顧問 “聲何從來” 從者告云 “彼后稷伊湌之墓也” 遂陳后稷臨死之言 大王潸然流涕曰 “夫子忠諫 死而不忘 其愛我也深矣 若終不改 其何顔於幽明之間耶” 遂終身不復獵
김후직은 지증왕의 증손이다. 진평대왕을 섬겨 이찬이 되고, 병부령으로 옮겼다. 대왕이 자못 사냥을 좋아하니 후직이 간하여 말하기를 “옛 날 왕 노릇하는 자는 반드시 하루에도 만 가지 일을 보살피되 깊이 생각하고 멀리 생각하며, 좌우에 있는 바른 선비의 곧은 간쟁을 수용하여 부지런히 애써 감히 편안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에 덕으로 한ㄴ 정치가 순수하고 아름다워져 국갈ㄹ 보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매일 미친 사내와 사냥꾼들과 함께 매와 개를 풀어 꿩과 토끼를 쫓으며 산과 들을 치달리며 스스로 그치지 못합니다. 노자가 말하기를 ‘사냥을 멋대로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했고, 《서경》에 ‘안으로는 여색에 빠지고 밖으로 사냥에 빠지는 것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있으면 혹 나라가 망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면 안으로는 곧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밖으로는 곧 나라를 망하게 하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그것을 생각하십시오.”했다. 왕이 따르지 않자 또 간절히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후에 후직이 병이 들어 죽으려할 때 그 세 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다름 사람의 신하가 되어 임금의 악을 바로잡아 구하지 못하여 대왕께서 노는 것을 그치지 않아 망하고 무너짐에 이를까 두렵다. 이것이 나의 근심이다. 비록 죽을지라도 반드시 임금을 깨우칠 것을 생각하니 반드시 내 뼈를 대왕이 사냥가는 길 옆에 묻으라.”했다. 아들들이 모두 그것을 따랐다. 다른 날에 왕이 나가는데 도중에 머리서 소리가 있는데 “가지 마시오.”하는 듯했다. 왕이 돌아보며 물어 말하기를 “소리가 어디서 나는 것인가?”하니 “저것이 후직의 이찬의 묘입니다.”했다. 마침내 후직이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을 진술하니 대왕이 눈물을 줄줄흘리며, 말하기를 “그대의 충성스러운 간함은 죽어서도 잊지 않으니 나를 사랑함이 깊다. 만약 끝내 고치지 않는다면 죽으나 사는 사이에 무슨 얼굴을 하겠는가?”했다. 마침내 죽을 때까지 다시 사냥하지 않았다.
祿眞 姓與字 未詳 父秀奉一吉湌 祿眞二十三歲始仕 屢經內外官 至憲德大王十年戊戌 爲執事侍郞 十四年 國王無嗣子 以母弟秀宗 爲儲貳 入月池宮 時忠恭角干爲上大等 坐政事堂 注擬內外官 退公感疾 召國醫診脉 曰 “病在心臟 須服龍齒湯” 遂告暇三七日 杜門不見賓客 於是祿眞造而請見 門者拒焉
녹진은 성과 자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수봉 일길찬이다. 논진은 23세에 처음 벼슬하여 여러 번 내외관을 역임하고, 헌덕대왕 10년 무술(818)에 집사시랑이 되었다. 14년(822) 국왕이 아들이 없어 같은 어머니의 동생 수종을 태자로 삼아 월지궁에 들게 하였다. 그 때 충공 각간이 상대등이 되어 정사당에 앉아 내와관을 헤아리고 물러난 공이 병이 들어 국의를 불러 진맥하니 (국의가) 말하기를 병이 심장에 있으니 반드시 용치탕을 복용해야 합니다.“했다. 마침내 21일의 휴가를 고하고 문을 닫고 빈객을 만나지 않았다. 이에 녹진이 뵙기를 청한다고 알리니 문지기가 거절하였다.
祿眞曰 “下官非不知相公移疾謝客 須獻一言於左右 以開鬱悒之慮 故此來耳 若不見 則不敢退也” 門者再三復之 於是引見 祿眞進曰 “伏聞寶體不調 得非早朝晩罷 蒙犯風露 以傷榮衛之和 失支體之安乎” 曰 “未至是也 但昏昏嘿嘿 精神不快耳” 祿眞曰 “然則公之病 不須藥石 不須針砭 可以至言高論 一攻而破之也 公將聞之乎?” 曰 “吾子不我遐遺 惠然光臨 願聽玉音 洗我胸臆”
녹진이 말하기를 “제가(下官) 상공께서 병이 옮길까 손님을 사절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한 말을 좌우에 올려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열어드리려 하기 때문에 여기에 왔을 뿐입니다. 만약 뵙지 못한다면 곧 감히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하고는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뵙기를) 청하였다. 이에 인도하여 만나니 녹진이 나아가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보체의 건강이 좋지 않다 하는데 이른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여 바름과 이슬이 범함을 입었기 때문에 혈기의 조화를 해쳐 몸의 편안함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했다. (충공이)말하기를 “아직 이에는 이르지 않았다. 다만 어둡고 침침하여 정신이 개운하지 않을 뿐이다.”했다. 녹진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곧 공의 병은 반드시 약이 필요하지 않고, 침이 필요하지 않고, 지극한 말과 높은 토론으로서 한 번 쳐서 그것ㅇ을 깨트릴 수 있습니다. 공께서는 장차 그것을 들으시겠습니까?”했다. (충공이)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멀리하지 않고, 은혜롭고 빛나게 와 주었으니 좋은 소리를 들고 내 가슴 속을 씻고자 한다.”했다.
祿眞曰 “彼梓人之爲室也 材大者爲梁柱 小者爲椽榱 偃者植者各安所施 然後大廈成焉 古者 賢宰相之爲政也 又何異焉 才巨者置之高位 小者授之薄任 內則六官·百執事 外則方伯·連率·郡守·縣令 朝無闕位 位無非人 上下定矣 賢不肖分矣 然後王政成焉 今則不然 徇私而滅公 爲人而擇官 愛之則雖不材 擬送於雲霄 憎之則雖有能 圖陷於溝壑 取捨混其心 是非亂其志 則不獨國事溷濁 而爲之者 亦勞且病矣 若其當官淸白 蒞事恪恭 杜貨賂之門 遠請託之累 黜陟只以幽明 予奪不以愛憎 如衡焉 不可枉以輕重 如繩焉 不可欺以曲直 如是則刑政允穆 國家和平 雖曰開孫弘之閤 置曹參之酒 與朋友故舊 談笑自樂可也 又何必區區於服餌之間 徒自費日廢事爲哉” 角干 於是謝遣醫官 命駕朝王室
녹진이 말하기를 “저 목수(梓人)가 집을 지을 때 재목 중이 큰 것은 대들보와 기둥으로 하고, 작은 것은 서까래로 하고, 흰 것, 곧은 것이 각기 베푸는 바에 편안 한 후(각각 알맞은 자리에 들어 간) 큰 집이 이루어집니다. 옛날 어진 재상이 정사를 하는 것과 또한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재능이 큰 자는 높은 지위에 두고, 작은 자에게는 가벼운 직임을 준다면 곧 6관과 온갖 관서, 밖으로는 곧 방백, 연솔, 군수, 현령이고, 조정에는 빈자리가 없으며, 자리에는 잘못된 사람이 없고 상하가 정해질 것이며, 현명한 이와 어리석음이 나누어진 후에 왕정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은 곧 그렇지 아니하여 사사로움을 따라 공적임을 없애고, 사람을 위해 관직을 가려 그를 아끼면 곧 비록 재능이 아니라도 아주 높은 곳으로 보내려하고, 그를 미워하면 곧 비록 능력이 있을지라도 구렁과 골짜기에 빠트릴 것을 도모하여 취하고 버림이 그 마음에 섞여 옳고 그름을 따짐에 그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곧 나라 일이 혼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는 자가 또한 수고롭고 병이 들게 됩니다. 만약 관직을 담당함이 맑고 밝고 일에 임하고 뇌물의 문을 닫고, 청탁의 매임을 멀리하고, 내치고 올리는 것을 다만 어두움과 밝음으로써 하고, 주고 빼앗는 것을 아끼고 미워함으로써 하지 않는다면 저울질 하는 것과 같아서 경중이 잘못되지 않고, 먹통 줄 같이 굽은 것과 곧은 것이 속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같이 하면 곧 형벌과 정사를 진실로 삼가해서 국가가 화평할 것이니 비록 공손홍의 쪽문을 열고, 조참의 술을 두고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스스로 즐겨도 될 것입니다. 또 어찌 반드시 구구히 약을 복용하는 사이에 공연히 스스로 날을 허비하고, 일을 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했다. 각간(충공)이 이에 의관을 사절해 보내고 수레를 타고 왕실에 조회하였다.
王曰 “謂卿剋日服藥 何以來朝” 荅曰 “臣聞祿眞之言 同於藥石 豈止飮龍齒湯而已哉” 因爲王一一陳之 王曰 “寡人爲君 卿爲相 而有人直言如此 何喜如焉 不可使儲君不知 宜往月池宮” 儲君聞之 入賀曰 “嘗聞君明則臣直 此亦國家之美事也” 後熊川州都督憲昌反叛 王擧兵討之 祿眞從事有功 王授位大阿湌 辭不受
왕이 말하기를 “경에게 날짜를 정해 약을 복용하라고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와서 조회합니까?”했다. (충공이)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녹진의 말을 들으니 약석과 같았습니다. 어찌 다만 용치탕만 마실 뿐이겠습니까?”했다. 인하여 왕에게 일일이 진술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임금이 되고, 경은 재상이 되었는데 사람의 직언이 이 같음이 있으니 얼마나 기쁜가! 태자가 알지 못해서는 안 되니 마땅히 월지궁에 가야할 것입니다.”했다. 태자가 그것을 듣고 들어 가 축하해 말하기를 “일찍이 임금이 밝으면 곧 신하가 정직하다고 들었는데 이것이 또한 국가의 아름다운 일입니다.”했다. 후에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켜 왕이 군대를 일으켜 토벌할 때 녹진이 일에 종사하여 공이 있었다. 왕이 대아찬의 지위를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密友·紐由者 並高句麗人也 東川王二十年 魏幽州刺史毋丘儉 將兵來侵 陷丸都城 王出奔 將軍王頎追之 王欲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奔散殆盡 唯東部密友 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遁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僅得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밀우와 유유는 모두 고구려 사람이다. 동천왕 20년(246)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군대를 거느리고 침입해 왔다. 왕이 나와 달아나는데 장군 왕기가 뒤를 쫒았다.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려 하여 죽령이 이르렀을 때 군사들이 달아나고 흩어져 거의 다하였다. 오직 동부의 밀우만 홀로 곁에 있을 뿐이었다. (밀우가)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뒤쫓는 군대가 매우 가까워 형세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이 결사적으로 막을 것이니 왕께서 달아날 수 있습니다.”했다. 마침내 결사대를 모집하여 그들과 적에게 나아가 힘껏 싸웠다. 왕이 겨우 벗어나 가서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졸을 모아 스스로를 지키게 하고 일러 말하기를 “만약 밀우를 취할 수 있는 자(만약 밀우를 구원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후한 상을 주겠다.”했다.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 往犒魏軍 因伺隙 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 王曰 “諾” 紐由入魏軍 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矣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拔刀 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 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 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綠·豆訥河原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하부의 유옥구가 나와 대답해 말하기를 “신이 가보겠습니다.”했다. 마침내 싸우던 땅에서 밀우가 땅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 이에 업고 (왕이 있는 곳에)이르렀다. 왕이 다리에 눕혔는데 오래지나 소생하였다. 왕이 이리저리 사잇길로 가서 남옥저에 이르렀는데 위나라 군대가 추격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왕은 계책이 다하고 형세가 꺽여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동부 사람 유유가 나와 말하기를 “형세가 매우 급박하니 공연히 죽을 수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음식을 가지고가서 위나라 군대에게 먹이고, 틈을 엿보아 그 장수를 찔러죽일 것입니다. 만일 신의 계책이 성공한다면 곧 왕께서는 분발하여 쳐서 승부를 내시기를 청합니다.”했다. 왕이 “좋습니다.”하였다. 유유가 위나라 군대에 들어 가 거짓으로 항복하고 말하기를 “대국(위나라)에 죄를 짓고 도방하여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몸을 둘 땅이 없습니다. 장차 진영 앞에서 항복하고 법관에게 죽을 것을 청하여 먼저 소신(유유)을 보내 변변찮은 물건을 가지고 이르게 하여 따르는 자들을 위해 드리겠습니다.”했다. 위나라 장수가 듣고 장차 그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는 칼을 음식 그릇에 감추고 앞으로 나가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대가 마침내 어지러워졌다. 왕이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급히 치니 위나라 군대가 소란스럽고 어지러워져 진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에서 물러났다. 왕이 나라를 수복하고는 공을 논하여 밀유와 유유를 1등으로 삼고, 밀우에게 거곡, 청목곡을 내리고, 유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을 내려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유유를 추증하여 구사자로 삼고, 또 그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
明臨荅夫 高句麗人也 新大王時 爲國相 漢玄菟郡太守耿臨 發大兵欲攻我 王問羣臣戰守孰 便 衆議曰 “漢兵 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荅夫曰 “不然 漢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少者宜守 兵家之常也 今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迫之 可以得志” 王然之 嬰城固守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荅夫帥師數千騎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荅夫坐原及質山爲食邑 十五年秋九月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
명임답부는 고구려 사람이다. 신대왕 때 국상이 되었다. 한나라 현토군 태수 경임이 큰 군대를 내어 우리를 치려하니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껏과 지키는 것 중 무엇이 나은지를 물었다. 여러 사람이 논의하여 말하기를 “한나라 군대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가벼이 여기니 만약 나가 싸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가 겁을 낸다고 여겨 여러 번 올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른 바 한 사람이 관을 지키면 만 명이 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라 군대가 비록 많으나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군대를 내어 막기를 청합니다.”했다. 명임답부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크고, 백성이 많습니다. 지금 강한 군대를 데리고 멀리서 와 싸우기 때문에 그 예봉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또 군대가 많은 경우에는 싸우고, 군대가 적은 경우에 지키는 것이 병법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들이 천리 밖에서 식량을 운반하여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해자)을 깊게 파고, 보루를 높게 쌓으며, 들판을 맑게 하고서 기다리면 그들은 반드시 열흘이 지나지 않아 주리고 곤궁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날랜 병졸로 압박하면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했다. 왕이 그렇다여겨 성을 굳게 지켰다. 한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졸들이 굶주리자 이끌고 돌아갔다. 명임답부가 군대 수 천기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싸워 한나라 군대를 크게 무너뜨리니 말한 마리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명임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내려 식읍으로 삼게하였다. 신대왕 15년(179) 가을 9월에 죽으니 나이 113세였다. 왕이 직접 빈소에 가 애통해 하고, 7일동안 조회를 파하고,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례하고 묘지기(수묘인) 20가를 두었다.
昔于老 奈解尼師今之子(或云角干水老之子也) 助賁王二年七月 以伊湌爲大將軍 出討甘文國破之 以其地爲郡縣 四年七月 倭人來侵 于老逆戰於沙道 乘風縱火 焚賊戰艦 賊溺死且盡 十五年正月 進爲舒弗邯 兼知兵馬事 十六年 高句麗侵北邊 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至夜 士卒寒苦 于老躬行勞問 手燒薪藮暖熱之 羣心感喜 如夾纊 沾解王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七年 癸酉 倭國使臣葛那古在館 于老主之 與客戲言 “早晩 以汝王爲鹽奴 王妃爲爨婦” 倭王聞之怒 遣將軍于道朱君 討我 大王出居于柚村
석우로는 나해니사금의 아들이다.(혹은 각간 수로의 아들이다.) 조분왕 2년(231) 7월 이찬으로서 대장군이 되어 나가 감문국을 토벌하여 깨트리고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조분왕 4년(233) 7월 왜인이 와서 침범하였다. 석우로가 사도에서 맞아 싸웠는데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적의 전함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조분왕)15년(244) 정월 승진하여 서불함이 되고, 겸하여 병마사를 담당하였다. 16년(245)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나가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을 지켰다. 밤이 되자 사졸이 추위로 괴로워하자 석우로가 몸소 가서 수고로움을 묻고 손으로 섶을 태워 따뜻하게 하니 군사들의 마음으로 감동하고 기뻐하였는데 마치 솜옷을 두른 듯 여겼다. 첨해왕이 재위하였을 때 사량벌국이 옛날에는 우리에게 속하였으나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에게 돌아가므로 석우로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 토벌하여 없앴다. 첨해왕 7년(253) 계유 왜국 사신 갈나고가 관(객사)에 있었는데 석우로가 대접을 맡아 객(사신)과 희롱하여(농담으로)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의 왕을 염노(소금 만드는 종)로 삼고, 왕비는 찬부(밥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했다. 왜왕이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첨해왕)이 우유촌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于老曰 “今玆之患 由吾言之不愼 我其當之” 遂抵倭軍 謂曰 “前日之言 戲之耳 豈意興師至於此耶” 倭人不答 執之 積柴置其上 燒殺之乃去 于老子 幼弱不能步 人抱以騎而歸 後爲訖解尼師今 味鄒王時 倭國大臣來聘 于老妻請於國王 私饗倭使臣 及其泥醉 使壯士曳下庭焚之 以報前怨 倭人忿 來攻金城 不克引歸【論曰】 于老爲當時大臣 掌軍國事 戰必克 雖不克 亦不敗 則其謀策必有過人者 然以一言之悖 以自取死 又令兩國交兵 其妻能報怨 亦變而非正也 若不爾者 其功業 亦可錄也
석우로가 말하기를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삼가지 않음에서 유래한 것이니 내가 그것을 감당하겠다.”하고는 마침내 왜군에 이르러 말하기를 “지난날의 말은 희롱일 뿐인데 어떻게 군대를 일으켜 이에 이를 것을 생각하였겠습니까?”했다. 왜인들이 대답하지 않고 잡아 섶을 쌓아 그 위에 두고 태워 죽이고 갔다. 석우로의 아들이 어리고 약하여 걷지 못하여 사람이 안고 말을 타고 돌아왔는데 후에 흘해니사금이 되었다. 미추왕 때 왜국 대시이 와 문안하니 석우로의 처가 국왕에게 청하여 개인적으로 왜의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그가 몹시 취하자 장사로 하여금 뜰로 끌어내려 태워 전날의 원한을 갚았다. 왜인들이 분노하여 와서 금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논하여 말한다. 석우로가 당시의 대신이 되어 군대와 국가의 일을 담당하여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비록 이기 못할지라도 또한 패하지는 않았으니 곧 그 꾀와 계책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마디 말를 어긋나게 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취하고, 두 나라로 하여금 전쟁을 하게 하였다. 그 처(아내)는 원한을 갚을 수 잇었으나 또한 변칙이고 정도가 아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 공을 또한 기록할만했을 것이다.
朴堤上(或云毛末) 始祖赫居世之後 婆娑尼師今五世孫 祖阿道葛文王 父勿品波珍湌 堤上仕爲歃良州干 先是實聖王元年壬寅 與倭國講和 倭王請以奈勿王之子未斯欣爲質 王嘗恨奈勿王 使己質於高句麗 思有以釋憾於其子 故不拒而遣之 又十一年壬子 高句麗 亦欲得未斯欣之兄卜好爲質 大王又遣之 及訥祗王卽位 思得辯士 往迎之 聞水酒村干伐寶靺·一利村干仇里迺·利伊村干波老三人有賢智 召問曰 “吾弟二人 質於倭·麗二國 多年不還 兄弟之故 思念不能自止 願使生還 若之何而可”
박제상(혹은 모말이라 한다.) 시조 혁거세의 후예로 파사니사금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 갈문왕이고,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이다. 박제상이 벼슬하여 삽량주 간이 되었다. 이에 앞서 실성왕 1년(402) 임인 왜국과 싸움을 그만두고 서로 화해하였는데 왜왕이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청하였다. 왕이 일찍이 내물왕이 자기로 하여금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그 아들에게 풀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지 않고 보냈다. 또 11년(412) 임자 고구려가 또한 미사흔의 형 복호를 볼모로 삼고자 하니 대왕(실성왕)이 또한 보냈다. 눌지왕이 즉위함에 이르러 말 잘하는 선비를 얻어 가서 그들(미사흔과 복호)을 맞이할 것을 생각하였다. 수주촌 간 벌보말과 일리촌 간 구리내, 이이촌 간 파노 세 사람이 어질고 지혜가 있다는 것을 듣고 불러 물어 말하기를 “내 동생 두 사람이 왜와 고구려 두 나라에 볼모로 있는데 여러 해 동안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제의 일이라 그리움을 스스로 그칠 수 없습니다. 원하건데 살아서 돌아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했다.
三人同對曰 “臣等聞歃良州干堤上 剛勇而有謀 可得以解殿下之憂” 於是 徵堤上使前 告三臣之言而請行 堤上對曰 “臣雖愚不肖 敢不唯命祗承” 遂以聘禮入高句麗 語王曰 “臣聞交鄰國之道 誠信而已 若交質子 則不及五覇 誠末世之事也 今寡君之愛弟在此 殆將十年 寡君以鶺鴒在原之意 永懷不已 若大王惠然歸之 則若九牛之落一毛 無所損也 而寡君之德大王也 不可量也 王其念之”
세 사람이 같이 대답해 말하기를 “신들이 들으니 삽량주 간 박제상이 굳세고 용맹하며 꾀가 있다하니 전하의 근심을 풀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했다. 이에 박제상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세 신한의 말을 알려주고 갈 것을 청하였다. 박제상이 대답해 말하기를 “신ㅇ 비록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하나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고는 마침내 문안드리는 예로서 고구려에 들어 가 (고구려)왕에게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이웃나라와 사귀는 도는 진실일 뿐이라 합니다. 만약 볼모를 서로 보낸다면 5패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니 진실로 말세의 일입니다. 지금 우리 임금의 아끼는 동생이 여기에 있은 지 거의 10년이 되니 우리 임금이 형제가 서로 돕는 뜻으로 서로 회포의 뜻을 그치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은혜를 베풀어 돌려보내 준신다면 곧 아홉 마리 소의 털 중 한 터럭이 떨어진 것과 같아서 더는 바가 없을 것이니 우리 임금이 대왕을 덕스럽게 여김이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그것을 생각하십시오.”했다.
王曰 “諾” 許與同歸 及歸國 大王喜慰曰 “我念二弟 如左右臂 今只得一臂 奈何” 堤上報曰 “臣雖奴才 旣以身許國 終不辱命 然高句麗大國 王亦賢君 是故 臣得以一言悟之 若倭人不可以口舌諭 當以詐謀 可使王子歸來 臣適彼 則請以背國論 使彼聞之” 乃以死自誓 不見妻子 抵粟浦 汎舟向倭 其妻聞之 奔至浦口 望舟大哭曰 “好歸來” 堤上回顧曰 “我將命入敵國 爾莫作再見期” 遂徑入倭國 若叛來者 倭王疑之 百濟人前入倭 讒言新羅與高句麗謀侵王國 倭遂遣兵 邏戍新羅境外 會高句麗來侵 幷擒殺倭邏人 倭王乃以百濟人言爲實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하고는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나라에 돌아오니 대왕(눌지왕)이 기뻐하며 위로해 말하기를 “내가 두 동생을 생각함이 좌우 팔과 같이 하였는데 지금 다만 한 팔만 얻었을 뿐이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했다. 박제상이 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비록 보잘것없은 재주이나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치기로 하였으니 끝내 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왕이 또한 어진 임금입니다. 이 때문에 신이 한 마디 말로 깨닫게 할 수 있었습니다. 왜인 같은 경우는 말로서는 깨우칠 수 없으니 마땅히 거짓 꾀로 해야 왕자를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그들에게 가면 곧 청하건데 나라를 배반한 논의를 그들이 듣게 해주십시오.”했다. 이에 죽음으로서 스스로 맹세하고, 처자를 보지 않은 채 율포에 이르러 배를 뛰워 왜를 향하였다. 그 처가 그것을 듣고 달려 포구에 이르러 배를 바라보며 크게 소리내어 울며 말하기를 “잘 돌아오시오.”했다. 박제상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명을 받아 적국에 들어가니 당신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할 수 없소.”했다. 마침내 빠르게 왜국에 들어 가 마치 배반하고 오는 것처럼 했으나 왜왕은 의심하였다. 백제 사람이 앞서 왜에 들어갔는데 신라와 고구려가 왕의 나라를 침범하려 꾀한다고 참소하는 말을 하였으므로 왜가 마침내 군대를 보내 신라의 국경 밖을 순찰하게 하였는데 고구려 군대가 와서 침입하는 것을 만나 왜의 순찰하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왜왕이 이에 백제 사름의 말을 실제로 여겼다.
又聞羅王囚未斯欣·堤上之家人 謂堤上實叛者 於是出師將襲新羅 兼差堤上與未斯欣爲將 兼使之鄕導 行至海中山島 倭諸將密議 滅新羅後 執堤上·未斯欣妻孥以還 堤上知之 與未斯欣乘舟遊 若捉魚鴨者 倭人見之 以謂無心喜焉 於是堤上勸未斯欣潛歸本國 未斯欣曰 “僕奉將軍如父 豈可獨歸”
또 신라왕이 미사흔과 박제상의 집안 사람들을 가두었다는 것을 듣고 박제상이 실제로 배반한 자로 여겼다. 이에 군대를 내어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 하고, 겸하여 박제상과 미사흔을 보내 장군으로 삼아 길을 인도하게 하고 가서 바다 가운데 산도에 이르렀다. 왜의 여러 장수들이 비밀리 모의하여 신라를 없앤 후 박제상과 미사흔의 가족들을 잡아 돌아오려 하였다. 박제상이 그것을 알고 미사흔과 함께 배를 타고 노닐며 물고기와 오리를 잡는 것처럼 하였다. 왜인이 그것을 보고 딴 마음이 없다고 여겨 기뻐하였다. 이에 박제상이 미사흔에게 몰래 본국(신라)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다. 미사흔이 말하기를 “내가 장군을 받들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였는데 어찌 홀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했다.
堤上曰 “若二人俱發 則恐謀不成” 未斯欣抱堤上項 泣辭而歸 堤上獨眠室內晏起 欲使未斯欣遠行 諸人問 “將軍何起之晩” 答曰 “前日 行舟勞困 不得夙興” 及出 知未斯欣之逃 遂縛堤上 行舡追之 適煙霧晦冥 望不及焉 歸堤上於王所 則流於木島 未幾使人以薪火燒爛支體 然後斬之
박제상이 말하기를 “만약 두 사람이 함께 출발한다면 곧 꾀함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렵습니다.”했다. 미사흔이 박제상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하직하고 돌아갔다. 박제상이 홀로 방 안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미사흔으로 하여금 멀리 가게 하려하였다. 여러 사람이 묻기를 “장군이 어찌하여 일어남이 늦습니까?”하니 (박제상이) 답하여 말하기를 “전날에 배를 타고 가 피로하여 일찍 일어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박제상이) 나오자 미사흔이 도망한 것을 알고 마침내 박제상을 묶고 배를 타고 추격하였으나 마침 안개가 연기처럼 끼어 어두웠으므로 바라보아도 미치지 못하였다.(볼 수 없었다.) 박제상을 왜왕이 있는 곳에 돌려보내니 곧 목도에 유배하였다가 얼마되지 않아 사람을시켜 섶에 불을 붙여 온 몸을 태운 후 목을 베어 죽였다.
大王聞之哀慟 追贈大阿湌 厚賜其家 使未斯欣 娶其堤上之第二女爲妻 以報之 初 未斯欣之來也 命六部遠迎之 及見握手相泣 會兄弟置酒極娛 王自作歌舞 以宣其意 今鄕樂憂息曲 是也
대왕이 그것을 듣고 슬퍼하고 애통해하며 대아찬을 추증하고 그 집에도 많이 내렸다. 미사흔으로 하여금 박제상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게 하여 처로 삼게 하는 것으로서 갚았다. 처음 미사흔이 왔을 때 6부로 하여금 멀리 가 맞이하게 하였는데 만나서는 손을 잡고 서로 눈물을 흘렸다. 형제가 만나 술을 두고 즐기기를 지극히하였다. 왕이 스스로 노래와 춤을 짓는 것으로서 뜻을 폈다. 지금의 향악 우식곡이 이것이다.
貴山 沙梁部人也 父武殷阿干 貴山少與部人箒項爲友 二人相謂曰 “我等期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修身 則恐不免於招辱 盍聞道於賢者之側乎” 時圓光法師 入隋遊學 還居加悉寺 爲時人所尊禮 貴山等詣門 摳衣進告曰 “俗士顓蒙 無所知識 願賜一言 以爲終身之誡” 法師曰 “佛戒有菩薩戒 其別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堪 今有世俗五戒 一曰事君以忠 二曰事親以孝 三曰交友以信 四曰臨戰無退 五曰殺生有擇 若等 行之無忽”
귀산은 사량부 사람이다. 아버지는 무은 아간이다. 귀산은 어려서 추항과 벗이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우리들이 선비, 군자와 노닐면서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곧 욕을 부르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어진 자의 옆에서 도를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 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들어 가 유학하고 돌아와 가실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때 사람들 존경의 예를 받고 있었다 귀산 등이 문하에 나아가 옷을 걷어 올리고(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나아가 말하기를 “속세의 선비로 어리석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원하건데 한 말씀을 내리신다면 종신토록 경계를 삼겠습니다.”했다. 원광법사가 말하기를 “불교의 계율에 보살계가 있는데 10가지 조목이 있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의 신하로 강당하지 못할까 두렵다. 지금 세속에 다섯가지 경계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 섬기기를 충성으로 하고, 둘째는 어버이 섬기기를 효로서 한다. 세 번째 벗을 사귀기를 신의로서 하고, 네 번째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으며, 여섯째는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너희들은 그것을 행하고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했다.
貴山等曰 “他則旣受命矣 所謂殺生有擇 獨未曉也” 師曰 “六齋日·春夏月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 謂馬牛雞犬 不殺細物 謂肉不足一臠 是擇物也 如此 唯其所用 不求多殺 此可謂世俗之善戒也” 貴山等曰 “自今已後 奉以周旋 不敢失墜”
귀산 등이 말하기를 “다른 것은 곧 명(가르침)을 받았습니다만 이른 바 殺生有擇은 유독 깨닫지 못하였습니다.”했다. 원광법사가 말하기를 “육재일, 봄, 여름철에 죽이지 않는 것이 이것이 가리는 것이다. 부리고 기르는 것(가축)을 죽이지 않으니 말, 소, 닭, 개를 이른다. 작은 동물을 죽이지 않으니 고기가 한 점도 되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이 같이 하여 오직 그 쓰이는 바로 하고, 많이 죽이지 않는다. 이는 세속의 좋은 경계라 말 할만하다.”했다.
眞平王建福十九年壬戌秋八月 百濟大發兵 來圍阿莫(一作暮)城 王使將軍波珍干乾品·武梨屈·伊梨伐·級干武殷·比梨耶等 領兵拒之 貴山·箒項 並以少監赴焉 百濟敗退於泉山之澤 伏兵以待之 我軍進擊 力困引還 時武殷爲殿 立於軍尾 伏猝出 鉤而下之 貴山大言曰 “吾嘗聞之師曰 ‘士當軍無退’ 豈敢奔北乎” 擊殺賊數十人 以己馬出父 與箒項揮戈力鬪 諸軍見之奮擊 橫尸滿野 匹馬隻輪 無反者 貴山等金瘡滿身 半路而卒 王與羣臣 迎於阿那之野 臨尸痛哭 以禮殯葬 追賜位貴山奈麻 箒項大舍
진평왕 건복 19년 임술(진평왕 24년: 602) 8월 백제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와서 아막(막은 모라 쓰기도 한다)성을 둘러쌌다. 왕이 장군 파진간 건품, 무이굴, 이이벌, 급간 무은 비이야 등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귀산과 추항이 함께 소감으로서 달려 갔다. 백제가 패하여 천산의 못 가로 물러나 군대를 숨기고 기다렸다. 우리 군대가 진격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 때 무은이 전(후군)이 되어 군대의 끝에 서있었는데 숨었던 군대가 갑자기 나와 갈고리로 끌어내렸다. 귀산이 크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선비는 군대를 담당하여 물러서지 않는다.’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나리오!”하고는 적 수 십 명을 쳐서 죽이고 자기 말로 아버지를 내보내고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웠다. 여러 군사들이 그것을 보고 분발하여 치니 넘어진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한 마리 말, 한 채의 수레도 돌아가 자가 없었다. 귀산 등이 무기에 다친 상처가 온몸에 가득하여 중도에 죽었다. 왕과 여러 신하들이 아나의 들에서 맞이하여 시신에 나아가 통곡하고 예로서 장례하게 하고, 귀산에게는 나마의 관등, 추항에게는 대사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曉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戲曰 “汝常啼聒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及女年二八欲下嫁於上部高氏 公主對曰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況至尊乎 故曰 ‘王者無戱言’ 今大王之命 謬矣 妾不敢祗承” 王怒曰 “汝不從我敎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宜從汝所適矣” 於是 公主以寶釧數十枚繫肘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問溫達之家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 問其子所在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평원왕) 때 사람이다. 용모가 늙고 추레해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마음속은 곧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구걸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찢어진 옷을 입고, 해진 신을 신고 저자거리 사이를 왕래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그를 지목하여 어리석은 온달(바보 온달)이라 하였다. 평강왕의 딸이(공주가) 아이일 때 울기를 잘하였다. 왕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네가 항상 울어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라면 반드시 사대부의 아내가 되지 못하고, 마땅히 어리석은 온달에게 시집보낼 것이다.”했다. 왕이 매번 그렇게 말하였다. 공주 나이 28세에 이르러 상부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대답해 말하기를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부인이 될 것이라 하셨는데 지금 무슨 이유로 전에 하신 말씀을 바꾸십니까? 필부도 오히려 식언을 하지 않는 하물며 지극히 지존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말하기를 ‘왕 노릇 하는 자는 희롱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하니 지금 대왕의 명은 잘못된 것입니다. 첩은(저는)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했다. 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나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곧 진실로 내 딸이라 할 수 없다. 어찌 함께 살 수 있겠는가? 마땅히 네가 가는 바를 따르라.” 했다. 이에 공주가 보물 팔찌 여러 개를 팔꿈치에 맨 후 궁을 나와 홀로 갔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묻고 곧 가서 온달의 집에 이르러 눈먼 늙은 어미를 보고 앞에 가까이 가 절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老母對曰 “吾子貧且陋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侜 以至於此乎 惟我息不忍饑 取楡皮於山林 久而未還” 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負楡皮而來 公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公主獨歸 宿柴門下 明朝更入 與母子備言之 溫達依違未決 其母曰 “吾息至陋 不足爲貴人匹 吾家至窶 固不宜貴人居” 公主對曰 “古人言 ‘一斗粟猶可舂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 可共乎” 乃賣金釧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資用完具
늙은 어미가 대답해 말하기를 “내 아들은 가난하고 또한 비루하여 귀인이 가까이 할만한 바가 아닙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매우 향기로워 보통과 다르고, 그대의 손을 잡으니 부드럽고 매끄러워 비단과 같으니 반드시 천하의 귀인일 것입니다. 누구의 속임으로 인하여 이르렀습니까? 내 자식이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림에서 느릅나무 껍질을 취하러 간지 오래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습니다.”했다. 공주가 나가 산 아래에 이르러 옹달이 느릅나무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마음에 품은 바를 말하니 온달이 벌컥 화를 내며 말하기를 “이는 어린 여자 마땅히 행할 바가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니 귀신일 것이니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마침내 가서 돌아보지도 않았다. 공주가 혼자 돌아 가 나무문(사립문) 아래서 자고 다음 날 다시 들어 가 모자(온달과 온달의 어머니)에게 갖추어 말하였다. 온달이 우물쭈물하며 뎔단하지 못하자 그 어미가 말하기를 “내 자식이 지극히 비루하여 귀인의 짝이 되기에 부족하고, 내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진실로 귀인이 살기에 마땅하지 않습니다.”했다. 공주가 대답해 말하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한 말의 곡식이면 오히려 절구질 할 수 있고, 한 자의 베이면 오히려 바느질 할 수 있다.’했으니 만일 마음을 같이한다면 어찌 반드시 부유하고 높은 벼슬을 한 연후에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했다. 이에 금팔찌를 팔아 받, 집, 노비, 소와 말, 그릇을 사 필요한 돈과 물품을 완전하게 갖추었다.
初買馬 公主語溫達曰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甚勤 馬日肥且壯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羣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常在前 所獲亦多 他無若者 王召來 問姓名 驚且異之
처음 말을 살 때 공주가 말하기를 “삼가하여 시장 사람의 말을 사지 말고 반드시 나라의 말 중에서 병들고 수척한 말로 내다파는 것을 택하여 사 오십시오.”했다. 온달이 그 말과 같이 하였다. 공주가 기르고 먹이기를 매우 부지런하게 하였더니 말이 날로 살찌고 또한 건장해졌다. 고구려는 항상 봄 3월 3일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고 잡은 돼지와 사슴을 가지고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하였다. 그날에 이르러 왕이 사냥을 나가니 여러 신하와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랐다. 이에 온달이 기른 바의 말을 타고 따라 가는데 그 달릴 때는 항상 앞에 있었고, 잡은 바가 또한 많아 다른 이로 같은 자가 없었다. 왕이 불러오게 하여 성과 이름을 묻고는 놀라고 또한 기이하게 여겼다.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肄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第一 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由此寵榮尤渥 威權日盛 及嬰陽王卽位 溫達奏曰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臨行誓曰 “鷄立峴·竹嶺已西 不歸於我 則不返也”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踣而死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於乎歸矣” 遂擧而窆 大王聞之悲慟
그 때 후주의 무제가 군대를 내어 요동을 정벌하였다. 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이산의 들에서 맞아 싸웠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 십여 명을 목베어 죽이니 여러 군사들이 이김을 타고 분발해 쳐서 크게 이겼다. 공을 논함에 이르자 온달을 제일로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가상하게여기고 탄복해 말하기를 “이가 나의 사위이다.”하고는 예를 갖추어 맞이하여 벼슬을 내려 대형을 삼았다. 이로부터 사람과 영예가 더욱 많아졌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대해졌다.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어 말하기를 “신라가 우리 한북의 땅(한강 이북의 땅)을 갈라 군현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통한으로 여기고,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지 않았습니다. 원하건데 대왕께서는 제가 현명하다 여기시지 마시고 군대를 주시면 한 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돌려 받을 것입니다.”했다. 왕이 허락하였다. 갈 때에 맹서해 말하기를 “계립현, 죽령 서쪽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하고는 마침내 갔다. 신라군대와 아단성 아래서 싸우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넘여져 죽었다. 장례하려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않으니 공주가 와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하니 마침내 들어서 장사하였다. 대왕이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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