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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 권46, 열전 6

by 최인표 2024. 1. 5.

三國史記卷第四十六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列傳 第六 强首·崔致遠·薛聰

崔承祐·崔彦撝·金大問·朴仁範·元傑·巨仁·金雲卿·金垂訓 附

 

强首 中原京沙梁人也 父昔諦奈麻 其母夢見人有角 而妊身及生 頭後有高骨 昔諦以兒就當時所謂賢者 問曰 此兒頭骨如此 何也答曰 吾聞之 伏羲虎形 女媧蛇身 神農牛頭 皐 陶馬口 則聖賢同類 而其相亦有不凡者 又觀兒首有黶子 於相法 面媧無好 頭媧無惡 則此必奇物乎父還謂其妻曰 爾子非常兒也 好養育之 當作將來之國士也及壯 自知讀書 通曉義理 父欲觀其志 問曰 爾學佛乎 學儒乎對曰 愚聞之 佛世外敎也 愚人間人 安用學佛爲 願學儒者之道

열전 제6 강수·최치원·설총

최승우·최언휘·김대문·박인범·원걸·거인·김운경·김수훈 붙임

 

강수는 중원경 사량사람이다. 아버지는 석제 나마이고, 그 어머니가 꿈에 뿔이 있는 사람을 보고 임신하여 낳았는데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었다. 석제가 아이를 데리고 당시 현인이라 말해지던 사람을 찾아가 물어 말하기를 이 아이의 머리뼈가 이 같은데 어떻습니까?”했다. 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복희는 범의 형상이었고, 여와는 뱀의 몸이었으며, 신농은 소의 머리이고, 고요는 말의 입이었습니다. 곧 성현은 같은 류로 그 형상이 또한 평범하지 않음이 있습니다. 또 아이의 머리에 검은 사마귀가 있는 것을 보니 골상법에 얼굴의 검은 점은 좋음이 없고, 머리의 검은 점은 나쁠 것이 없으니 곧 이는 반드시 기이한 인물일 것이라!”했다. 아버지가 돌아 가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아들은 보통의 아이가 아닙니다. 잘 기르면 마땅히 장래에 나라의 선비로 해야 할 것입니다.”했다. 자라서 스스로 글을 읽고, 의리를 밝게 통달하였다. 아버지가 그 듯을 보고자하여 물어 말하기를 불교를 배우겠는가? 유학을 배우겠는가?”하니 대답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불교는 세상 밖의 가르침이라 합니다. 저는 인가 세계의 사람으로 어찌 부처가 하는 것을 배우겠습니까? 유학의 도 배우기를 원합니다.”했다.

 

父曰 從爾所好遂就師讀孝經·曲禮·爾雅·文選 所聞雖淺近 而所得愈高遠 魁然爲一時之傑 遂入仕歷官 爲時聞人 强首嘗與釜谷冶家之女野合 情好頗篤 及年二十歲 父母媒邑中之女有容行者 將妻之 强首辭不可以再娶 父怒曰 爾有時名 國人無不知 而以微者爲偶 不亦可恥乎强首再拜曰 貧且賤非所羞也 學道而不行之 誠所羞也 嘗聞古人之言曰 糟糠之妻 不下堂 貧賤之交不可忘則賤妾所不忍棄者也

아버지가 말하기를 네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라.”했다. 마침내 스승에게 나아가 효경, 곡례, 이아, 문선을 읽었는데 들은 바는 비록 얕으나 얻은 바는 더욱 높고 원대하니 뛰어나고 장대함이 한 때의 준걸이었다. 마침내 벼슬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그 때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었다. 강수가 일찍이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서로 정을 통하였는데(野合) 좋아하는 정이 자못 돈독하였다. 나이 20세에 이르자 부모가 읍 안의 여자로 얼굴이 예쁘고 행실이 좋은 자를 중매하여 장차 아내로 삼게 하려 했으나 강수가 거절하고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지금의) 때에 이름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알지 못함이 없는데 미천한 자로 짝을 삼는다면 또한 부끄러울만한 것이 아닌가?”했다. 강수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가난하고 또 천한 것이 부끄러운 바가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일찍이 들으니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미천할 때의 아내(조강지처)는 집을 낮추지 않고, 가난하고 천할 때의 사귐은 잊어서는 안 된다.’했습니다. 곧 천한 여자라도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했다.

 

及太宗大王卽位 唐使者至 傳詔書 其中有難讀處 王召問之 在王前 一見說釋無疑滯 王驚喜 恨相見之晩 問其姓名 對曰 臣本任那加良人 名牛頭王曰 見卿頭骨 可稱强首先生使製廻謝唐皇帝詔書表 文工而意盡 王益奇之 不稱名 言任生而已 强首未嘗謀生 家貧怡如也 王命有司 歲賜新城租一百石

태종대왕이 즉위한 후 당 나라 사신이 이르러 조서를 전하였는데 그 안에 읽기 어려운 곳이 있었다. 왕이 (강수를)불러 물으니 왕 앞에서 한 번 보고 해석을 말하는데 의심나고 막히는 부분이 없었다. 왕이 놀라고 기뻐하여 서로 만남이 늦은 것을 한탄하였다. (왕이) 그 성과 이름을 물으니 대답해 말하기를 신은 본래 임나가라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압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경의 머리뼈를 보니 강수선생이라 말할만하다.”했다. 당나라 황제의 조서에 답하는 표문을 짓게 하였더니 글이 공교롭고 뜻을 다하니 왕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임생이라 말할 뿐이었다. 강수가 일찍이 생업을 도모하지 않아 집이 가난하였으나 즐거워하였다. 왕이 담당관청에 명하여 매년 신성의 조 100석을 내렸다.

 

文武王曰 强首文章自任 能以書翰致意於中國及麗·濟二邦 故能結好成功 我先王請兵於唐 以平麗·濟者 雖曰武功 亦由文章之助焉 則强首之功 豈可忽也授位沙湌 增俸歲租二百石 至神文大王時卒 葬事官供其賻 贈衣物匹段尤多 家人無所私 皆歸之佛事 其妻乏於食 欲還鄕里

문무왕이 말하기를 강수가 문장을 잘지어 편지로 중국과 고구려, 백제 두 나라에 뜻을 이르게(전하여)하였기 때문에 우호를 맺음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선왕(태종무열왕)이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 백제를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군대의 공이나 또한 문장의 도움 때문이니 곧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하고는 사찬의 관등을 주고 녹봉을 더하여 해마다 조 1백석으로 하였다. 신문대왕 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장사할 때 관청이 그 부의를 공급하고 옷감과 물품을 내림이 더욱 많았으나 집안 사람들이 사사로이 하지 않고 모두 불사에 돌렸다. 그 아내가 먹을 것이 궁핍해지자 향리(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大臣聞之 請王賜租百石 妻辭曰 妾賤者也 衣食從夫 受國恩多矣 今旣獨矣 豈敢再辱厚賜乎遂不受而歸 新羅古記曰 文章則强首·帝文·守眞·良圖·風訓·骨沓帝文已下事逸 不得立傳

대신이 그것을 듣고 왕에게 청하여 조 100석을 내리게 하였다. (강수의)처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저는 천한 자로 입고 먹는 것을 지아비를 따랐기 때문에 나라의 은혜를 받음이 많았습니다. 지금 이미 홀로 되었는데 어찌 감히 다시 후한 내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하고는 받지 않고 돌아갔다. 신라 고기에 말하기를 문장으로는 곧 강수, 제문, 수진, 양도, 골답이다.”했는데 제문 이하는 일을 잃어버려 전을 세울 수 없다.

 

崔致遠 字孤雲(或云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 不知其世系 致遠少 精敏好學 至年十二 將隨海舶入唐求學 其父謂曰 十年不第 卽非吾子也 行矣勉之致遠至唐追師 學問無怠 乾符元年甲午 禮部侍郞裴瓚下 一擧及第 調授宣州溧水縣尉 考績爲承務郞侍御史內供奉 賜紫金魚袋

최치원은 자가 고운(혹은 해운이라 한다.)으로 왕경(서울:경주) 사량부 사람이다. 역사서의 전이 없어져 그 세계를 알지 못한다. 최치원은 어려서 정민하고(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장차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 가 배움을 구하려 하였다. 그 아버지가 일러 말하기를 “10년만에 급제하지 못하면 곧 내 아들이 아니다. 힘써 공부하라.”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이르러 스승을 따라 배우고 묻기를 게을리 하하지 않았다. 건부 1(경문왕14, 874) 예부시랑 배찬의 아래에서 한 번에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 율수현 위에 임명되고, 공적을 평가하여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 되고 자금어대를 내렸다.

 

時黃巢叛 高騈爲諸道行營兵馬都統以討之 辟致遠爲從事 以委書記之任 其表狀書啓 傳之至今 及年二十八歲 有歸寧之志 僖宗知之 光啓元年 使將詔書來聘 留爲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 致遠自以西學多所得 及來將行己志 而衰季多疑忌 不能容 出爲太山郡太守

그 때 황소가 배반하자(반란을 일으키자) 고변(고병)이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어 그를(황소를) 토벌할 때 최치원을 불러 종사로 삼아 서기의 일을 맡겼는데 그 표, , , 계가 지금(삼국사기가 쓰여지던 고려중기)까지 전해진다. 나이 28세에 이르러 고국에 돌아갈 뜻을 두었다. 희종이 그것을 알고 광계 1(헌강왕11, 885) 조서를 가지고 가서 방문하게 하였다. (헌강왕이) 붙들어두고 시독 겸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를 삼았다. 최치원이 서학(당나라에 들어 가 유학한) 이래로 얻은 바가 많아 가서 장차 자기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나라가 쇠퇴한 말기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못하고 나가 태산군(정읍시 칠보면)태수가 되었다.

 

唐昭宗景福二年 納旌節使兵部侍郞金處誨 沒於海 卽差橻城郡太守金峻爲告奏使 時致遠爲富城郡太守 祗召爲賀正使 以比歲饑荒 因之 盜賊交午 道梗不果行 其後致遠亦嘗奉使如唐 但不知其歲月耳

당나라 소종 경복 2(진성왕7, 893) 납정절사 병부시랑 김처회가 바다에 빠져 죽자 곧 추()성군(당진 면천면) 태수 김준을 차출하여 고주사로 삼았다. 그 때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충남 서산시)가 되었는데 마침 불러 하정사로 삼았다. 해마다 흉년이 들고 주리었다. 인하여 도적이 서로 횡횡하여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그 후 최치원이 또한 사신으로 당 나라에 갔으나 다만 그 해와 월을 알지 못한다.

 

故其文集有上太師侍中狀云 伏聞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魯 爲中國巨蠹 隋皇失馭 由於征遼 貞觀中 我唐太宗皇帝 親統六軍渡海 恭行天罰 高麗畏威請和 文皇受降廻蹕 此際我武烈大王 請以犬馬之誠 助定一方之難 入唐朝謁 自此而始 後以高麗·百濟 踵前造惡 武烈入朝請爲鄕導 至高宗皇帝顯慶五年 勅蘇定方 統十道强兵·樓舡萬隻 大破百濟 乃於其地 置扶餘都督府 招緝遺氓 蒞以漢官 以臭味不同 屢聞離叛 遂徙其人於河南 摠章元年 命英公徐勣 破高句麗 置安東都督府 至儀鳳三年 徙其人於河南·隴右 高句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爲渤海 開元二十年 怨恨天朝 將兵掩襲登州 殺刺史韋俊 於是 明皇帝大怒 命內史高品·何行成·太僕卿金思蘭 發兵過海攻討 仍就加我王金某 爲正太尉持節充寧海軍事雞林州大都督 以冬深雪厚 蕃·漢苦寒 勅命廻軍 至今三百餘年 一方無事 滄海晏然 此乃我武烈大王之功也 今某儒門末學 海外凡材 謬奉表章 來朝樂土 凡有誠懇 禮合披陳 伏見 元和十二年 本國王子金張廉 風飄至明州下岸 浙東某官 發送入京 中和二年 入朝使金直諒 爲叛臣作亂 道路不通 遂於楚州下岸 邐迤至楊州 得知聖駕幸蜀 高太尉差都頭張儉 監押送至西川 已前事例分明 伏乞太師侍中 俯降台恩 特賜水陸券牒 令所在供給舟舡 熟食及長行驢馬草料 幷差軍將 監送至駕前

그러므로 그 문집에 있는 상태사시중장에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동해의 밖에 세 나라가 있는데 그 이름이 마한, 변한, 진한이다. 마한은 곧 고구려이고, 변한은 곧 백제이고, 진한은 곧 신라이다. 고구려, 백제가 전성하였을 때 강한 군대가 백만으로 남쪽으로 오와 월을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의 연, , 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수나라 황제가 통제룰 잃었기 때문에 요동을 정벌하였고, 정관 중에 우리 당나라 태종황제가 직접 6군을 통솔하고 바다를 건너 공손히 하늘의 벌을 행하였습니다.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화의를 청하여 문황제(당 태종)가 항복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 즈음 우리 무열대왕이 견마의 정성으로 한 지방의 어려움을 평정할 도움을 청하여 당나라에 들어 가 조회하고 뵙는 것이 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고구려와 백제가 이전의 악행을 짓자 무열왕이 (담나라)조정에 들어 가 향도가 될 것을 청하였습니다. 고종황제 현경 5( 태종 무열왕 7: 660) 소정방에게 명하여 10도의 강한 군대와 누선 만 척을 통솔하고 크게 백제를 깨트리고 이에 그 땅에 부여도독부를 두고 도망한 농민을 불러 모아 중국의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으나 냄새와 맛이 서로 같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떠나고 배반하므로 마침내 그 사람들을 하남으로 옮겼습니다. 총장 1(문무왕 원년:668) 영공 서적(이적)에게 명하여 고구려을 깨트리고 안동도독부를 두었다가 의봉 3(678)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그 사람들을 하남, 농우로 옮겼습니다. 고구려의 잔당들이 모여 북쪽 태백산 아래를 근거지로 하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 불렀습니다. 개원 20(발해 무왕 14: 732) 천조(당 나라)를 원망하고 한스럽게 여겨 군대를 데리고 등주를 엄습하여 자사 위준을 죽였습니다. 이에 명황제께서 크게 노하여 내사 고품, 하행성, 태복경 김사란에게 명하여 군대를 일으켜 바다를 건너 쳐서 토벌하게 하였을 때 우리 왕 김모를 정태위 지절 충녕해군사 계림주 대도독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신라)과 한(당나라)이 추위에 괴로워하자 칙명으로 군대를 돌리게 하였습니다. 지금 300년이 지나 한 지방이 무사하고 창해가 편안하니 이는 곧 우리 무열대왕의 공입니다. 지금 저는 유문(유학)의 말학으로 해외의 평범한 재능인데 사리에 어긋나게 표장을 받들고 즐거운 나라에 조회한 것은 진실로 간청할 것이 있어서 예에 부합되게 진술하려합니다. 엎드려 살펴 보건데 원화 12(헌덕왕 9: 817) 본국(신라)의 왕자 김장렴이 태풍을 만나 명주 바닷가에 이르러 내렸을 때 절동의 모 관리가 호송하여 서울에 들어갔고, 중화 2( (헌강왕 8: 882) 입조사 김직량이 (중국의)배반한 신하가 란을 지으니 도로가 통하지 않아 마침내 초주 해안에서 배를 내려 구불구불 돌아 양주에 이르러 황제가 촉 땅으로 행차하였음을 알 수 있었는데 고태위가 도두 장검을 보내 호송하여 서천에 이르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으니 이전의 사례가 분명합니다. 엎드려 태사 시중께 청하건데 굽어 큰 은혜를 내려 특별히 수륙의 군첩(통행증)을 내려주시고 지방의 관서로 하여금 배와 익은 음식, 긴 여행에 필요한 말과 말먹이 풀을 공급하게 하시고, 아울러 군대의 장수를 보내 호송하여 황제의 수레 앞에 이를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했다.

 

此所謂太師侍中 姓名亦不可知也 致遠自西事大唐 東歸故國 皆遭亂世 屯邅蹇連 動輒得咎 自傷不偶 無復仕進意 逍遙自放 山林之下·江海之濱 營臺榭植松竹 枕藉書史 嘯詠風月 若慶州南山·剛州氷山·陜州淸涼寺·智異山雙溪寺·合浦縣別墅 此皆遊焉之所 最後 帶家隱伽耶山海印寺 與母兄浮圖賢俊及定玄師 結爲道友 棲遲偃仰 以終老焉

여기의 이른 바 태사 시중의 성과 이름은 또한 알지 못한다. 최치원이 서쪽에서 대당을 섬기고 동쪽으로 고국에 돌아 왔는데 모두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머뭇거리고 발이 묶여 움직이면 문득 허물을 얻으니 스스로 (때를)만나지 못함을 서글퍼하여 다시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다. 마음 내키는대로 돌아다니며 스스로 방랑하여 산림, ,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 대나무를 심었으며 책을 베개로 삼아 읽고 시를 읊조렸다. 경주 남산, 강주 빙산, 합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 별서는 모두 노닐던 장소였다. 마지막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모형인 스님 현준, 정현 스님과 도우를 맺고 조용히 살다가 늙어 죽었다.

 

始西遊時 與江東詩人羅隱相知 隱負才自高 不輕許可人 示致遠所製歌詩五軸 又與同年顧雲友善 將歸 顧雲以詩送別 略曰 我聞海上三金鼈 金鼈頭戴山高高 山之上兮 珠宮貝闕黃金殿 山之下兮 千里萬里之洪濤 傍邊一點雞林碧 鼈山孕秀生奇特 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新唐書藝文志云 崔致遠四六集一卷·桂苑筆耕二十卷 注云 崔致遠高麗人 賓貢及第爲高騈從事其名聞上國如此 又有文集三十卷 行於世 初我太祖作興 致遠知非常人 必受命開國 因致書問 有雞林黃葉 鵠嶺靑松之句 其門人等 至國初來朝 仕至達官者非一 顯宗在位 爲致遠密贊祖業 功不可忘 下敎 贈內史令 至十四歲太平三年癸亥

二月 贈諡文昌侯

처음 서쪽(당나라)에서 노닐 때(유학할 때) 강동 시인 나은과 서로 알았다.(알고 지냈다.) 나은이 재주를 믿고 스스로를 높게 여겨 뛰어난 인물을 가벼이 여겨 허여하지 않았는데(인정하지 않았는데) 최치원에게 지은 바의 노래와 시 5축을 보여주었다. 또 같은 해에 과거 합격한 고운과 좋은 벗이었다. 장차 돌아가려할 때 고운이 시로서 송별하였는데 대략 내 들으니 바다 위에 금자라가 셋이 있는데, 금자라가 머리에 인 산이 높고 높도다. 산 위에 구슬과 보배와 황금으로 꾸민 궁전이 있고, 산 아래에는 천리만리 넓은 물결 옆에 한 점 계림이 푸르다. 자라 산이 빼어난 인재 잉태하여 기특한 이 낳았다. 12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은 중국을 감동시켰고, 18세에 글 싸움하는 곳에 나아가 한 화살로 금문책을 깨트렸다.”했다. 신당서예문지에 최치언은 사륙집1, 계원필경20권이 있다.”하고 주석에 최치원은 고려 사람인데 빈공과에 급제하고 고병의 종사관이 되었다.”했다. 그 이름이 상국(당나라)에 들림이 이와 같았다. 문집30권이 있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처음 우리 태조가 일어날 때 최치원은 (태조가)보통 사람이 아니어서 반드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열 것이라는 것을 알고 편지를 모내 문안하였는데 (그 글에) 有雞林黃葉(게림에는 누른 잎이 있고) 鵠嶺靑松(곡령에는 푸른 솔이 있다.) 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 문인(제자)들이 국초에 이르러 와서 조회하였는데 높은 벼슬에 이른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고려)현종이 왕위에 있을 때 최치원이 조상의 왕업을 몰래 도왔으니 그 공을 잊을 수 없다하여 명을 내려 내사령을 추증하였다. 14년 태평 3년 계해(실제는 태평 2년 임술(1022)) 2(실제는 5)에 이르러 문창후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薛聰 字聰智 祖談捺奈麻 父元曉 初爲桑門 淹該佛書 旣而返本 自號小性居士 聰性明銳 生知道術 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 至今學者宗之 又能屬文 而世無傳者 但今南地 或有聰所製碑銘 文字缺落不可讀 竟不知其何如也 神文大王以仲夏之月 處高明之室 顧謂聰曰 今日 宿雨初歇 薰風微涼 雖有珍饌哀音 不如高談善謔 以舒伊鬱 吾子必有異聞 盍爲我陳之

설총은 자가 총지이고, 할아버지는 담날 나마이다. 아버지는 원효는 처음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불경을 자세히 알았다. 얼마 후 근본에 돌아 온 후에는(환속 후에는) 스스로 서성거사라 이름하였다. 설총은 성품이 총명하고 예민하여 나면서 도술을 알았고, 방언(신라 말)을 가지고 아홉가지 경전을 읽어 후생(후배)을 가르치고 인도하였는데 지금(고려)의 배우는 자들이 종주로 여겼다. 또한 문장을 잘 읽어서 글을 잘 지었으나 세상에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 남쪽 지방에 혹 설총이 지은 바의 비명이 있는데 문자가 빠지고 탈락되어 읽을 수 없다. 끝내 그것이 어떠하였는지를 알지 못한다. 신문대왕이 중하의 달(한 여름, 5)에 높고 밝은 방에 거처하면서 설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오늘 오래 내리던 비가 처음 그치고 향기로운 바람이 살랑살랑 부니 비록 맛있는 반찬과 애처로운 음악이 있을지라도 고상한 말과 좋은 해학으로 울적한 회포를 펴는 것보다 못하다. 그대는 반드시 이상한 것을 들음이 있었을 것이다. 어찌하여 나를 위해 말하지 않는가?”했다.

 

聰曰 唯 臣聞 昔花王之始來也 植之以香園 護之翠幕 當三春而發艶百花而獨出 於是自邇及遐 艶艶之靈 夭夭之英 無不奔走上謁 唯恐不及 忽有一佳人 朱顔玉齒 鮮粧靚服 伶俜而來 綽約而前曰 妾履雪白之沙汀 對鏡淸之海面 沐春雨以去垢 快淸風而自適 其名曰薔薇 聞王之令德 期薦枕於香帷 王其容我乎又有一丈夫 布衣韋帶 戴白持杖 龍鍾而步 傴僂而來曰 僕在京城之外 居大道之旁 下臨蒼茫之野景 上倚嵯峨之山色 其名曰白頭翁 竊謂左右供給雖足 膏梁以充腸 茶酒以淸神 巾衍儲藏 須有良藥以補氣 惡石以蠲毒 故曰雖有絲麻 無棄管蒯 凡百君子 無不代匱 不識 王亦有意乎或曰 二者之來 何取何捨花王曰 丈夫之言 亦有道理 而佳人難得 將如之何丈夫進而言曰 吾謂王聰明識理義 故來焉耳 今則非也 凡爲君者 鮮不親近邪侫 疎遠正直 是以孟軻不遇以終身 馮唐郞潛而皓首 自古如此 吾其奈何花王曰 吾過矣 吾過矣’”

설총이 말하기를 ! 신이 들었으니 옛날에 화왕이 처음 전래 되었을 때 향기로운 정원에 심고 비취 색 장막으로 보호하였더니 삼춘(3개월 동안)을 당하여 고움을 드러내니 모든 꽃을 능가하여 홀로 빼어났다. 이에 가까운 곳과 먼 곳으로부터 아름답고 고운 꽃들이 달려와 찾아보고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할 뿐이었다. 홀연히 한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데 붉은 얼굴과 옥 같은 이를 가졌는데, 곱게 단장하고 예쁜 옷을 입고 하늘거리며 와 전천히 나와 말하기를 (제가)은 눈처럼 흰 모래를 밟고,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대하면서 봄비에 목욕하여 때를 제거하고 맑은 바람을 쐬며 스스로 즐기니 그 이름은 장미라 합니다.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안에서 잠자리 시중을 들기를 기대합니다.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했습니다. 또 한 장부가 있어 베옷을 입고, 가죽 띠를 하고 흰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비실비실 걸어 구부리고 와서 말하기를 저는 경성(서울) 밖에 있는 큰 길 옆에 살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넓고 멀어서 아득한 들의 경치를 바라보고, 위로는 높고 험한 산에 기대 사는데 이름을 백두옹이라 합니다. 살짝 생각하건데 좌우(측근)에서 공급하는 것이 비록 풍족하고,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하며, 옷장에 옷을 가득 저장하고 있을지라도 반드시 좋은 약을 가지고 기를 돕고 침으로 독을 덜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실을 만드는 삼이 있을지라도 띠를 버릴 수 없다. 합니다. 무릇 모든 군자는 어느 시대나 없지 않으니 알지 못하겠습니다. 왕께서 또한 뜻함이 있으십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왔는데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시겠습니까?’ 했다. 화왕이 말하기를 장부의 말도 또한 도리가 있고, 아름다운 사람을 얻기도 어려우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했다. 장부가 나와 말하기를 저는 왕께서 이치와 의리를 밝게 알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 생각하였을 뿐입니다. 지금은 곧 아닙니다. 무릇 임금 노릇하는 자가 사특하고 아첨하는 것을 친하고 가까이하고, 정직함을 멀리하지 않음이 드뭅니다. 이 때문에 맹자는 불우하게 몸을 마쳤고, 풍당은 낭의 벼슬에 잠겨 머리가 희어졌습니다. 옛날부터 이 같으니 내가 어쩌겠습니까?’했다. 화왕이 말하기를 내 허물이다. 내 허물이다.’했다.

 

於是 王愀然作色曰 子之寓言 誠有深志 請書之 以爲王者之戒遂擢聰以高秩 世傳日本國眞人 贈新羅使薛判官詩序云 嘗覽元曉居士所著 金剛三昧論 深恨不見其人 聞新羅國使薛 卽是居士之抱孫 雖不見其祖 而喜遇其孫 乃作詩贈之其詩至今存焉 但不知其子孫名字耳 至我顯宗在位十四歲 乾興元年壬戌 追贈爲弘儒侯 或云 薛聰嘗入唐學 未知然不

이에 왕이 쓸쓸해하는 얼굴색을 지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우화는 진실로 깊은 뜻이 있으니 글로 써서 왕 노릇하는 자의 경계로 삼을 것을 청한다.”했다. 마침내 설총을 발탁하여 높은 관직을 주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일본국 진인이 신라 사신 설판관에게 준 시의 서문에 일찍이 원효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은 사려펴보았는데 그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하였는데 신라국 사신 설씨가 곧 거사의 손자라는 것을 듣고, 비록 그 할아버지를 보지 못하였지만 그 손자를 만나니 기뻐서 곧 이 시를 지어 줍니다.”했다. 그 시사 지금까지 있다. 다만 그 자손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우리 현종 이 왕이 있은 지 13년 천흥 5년 신유(1021)에 홍유후를 추증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설총이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 가 배웠다.” 했으나 그런지 아닌지는 알지 못하겠다.

 

崔承祐 以唐昭宗龍紀二年入唐 至景福二年 侍郞楊涉下及第 有四六五卷 自序爲餬本集 後爲甄萱作檄書 移我太祖 崔彦撝 年十八 入唐遊學 禮部侍郞薛廷珪下及第 四十二還國爲執事侍郞瑞書院學士 及太祖開國 入朝 仕至翰林院太學士平章事 卒諡文英

金大問 本新羅貴門子弟 聖德王三年 爲漢山州都督 作傳記若干卷 其高僧傳·花郞世記·樂本·漢山記猶存 朴仁範·元傑·巨仁·金雲卿·金垂訓輩 雖僅有文字傳者 而史失行事 不得立傳

최승우는 당나라 소종 용기 2(진성왕4: 890) 당나라에 들어 가 경복 2(진성왕7: 893)시랑 양섭의 아래서 급제하였다. 사륙5권이 있는데 스스로 쓴 서문에 호본집이라 했다. 후에 견훤의 격서를 지었다. 우리 태조에게 보냈다. 최언위는 나이 18세 때 당나라에 들어 가 유학하고 예부시랑 설정규의 아래서 급제하였다. 42세에 귀국하여 집사시랑 서서원 학사가 되고, 태조가 개국하자 조정에 들어 와 벼슬이 한림원 태학사 평장사에 이르렀다. 죽자 시호를 문영이라 했다.

김대문은 본래 신라 귀문(귀족가문)의 자제이다. 성덕왕 3(704) 한산주 도독이 되었고, 전기 약간 권을 지었다.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는 아직도 있다. 박인범, 원걸, 거인, 김운경, 김수훈 등은 비록 겨우 문자가 전하는 자가 있으나 역사서에 행한 일들을 잃어 전을 세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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