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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 권47, 열전 7

by 최인표 2024. 1. 5.

三國史記卷第四十七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列傳 第七 奚論

父讚德 附

·素那

父沈那 附

·驟徒

兄夫果·弟逼實 附

·訥催·薛罽頭·金令胤

祖欽春·父盤屈 附

·官昌·金歆運·裂起

仇近 附

·丕寧子 子擧眞·奴合節 附 ·竹竹·匹夫·階伯

열전 제7, 해론(아버지 찬덕을 붙임), 소나 (아버지 심나를 붙임), 취도 (형 부과, 동생 핍실을 붙임), 눌최, 설계두, 김영윤 (할아버지 흠춘, 아버지 반굴을 붙임), 관창, 김흠운, 열기(구근을 붙임), 비령자 (아들 거진, 종 합절을 붙임), 죽죽, 필부, 계백

 

奚論 牟梁人也 其父讚德 有勇志英節 名高一時 建福二十七年庚午 眞平大王 選爲椵岑城縣令 明年辛未冬十月 百濟大發兵 來攻椵岑城一百餘日 眞平王命將 以上州·下州·新州之兵救之 遂往與百濟人戰不克 引還 讚德憤恨之 謂士卒曰 三州軍帥見敵强不進 城危不救 是無義也 與其無義而生 不若有義而死乃激昻奮勵 且戰且守 以至粮盡水竭 而猶食屍飮尿 力戰不怠

해론 모량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찬덕으로 용맹한 뜻과 뛰어난 절개가 있어 이름이 한 때에 높았다. 건복 27년 경오년(진평왕 32: 610) 진평대왕이 가잠성 현령으로 선발하였다. 다음해 신미 겨울 10월 백제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가잠성에 와 공격하였는데 100여일이 지나자 진평왕이 장수에게 명하여 상주, 하주, 신주의 군대로 구원하게 했다. 마침내 가서 백제 사람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찬덕이 분개하고 한탄하여 사졸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3주의 군대와 장수가 적이 강한 것을 보고 나아가지 않고, 성이 위태로운데도 구하지 않으니 이는 의리가 없는 것이다. 그 의리없이 사는 것은 의리있게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죽는 것이 낫다.)”하고는 곧 격앙되어 용감히 싸우기도 하고, 또 싸우고 또 지켰으나 양식이 다하고, 물이 다함에 이르자 오히려 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며 힘껏 싸워 게을리 하지 않았다.

 

至春正月 人旣疲 城將破 勢不可復完 乃仰天大呼曰 吾王委我以一城 而不能全 爲敵所敗 願死爲大厲 喫盡百濟人 以復此城遂攘臂瞋目 走觸槐樹而死 於是城陷 軍士皆降 奚論年二十餘歲 以父功 爲大奈麻 至建福三十五年戊寅 王命奚論 爲金山幢主 與漢山州都督邊品 興師襲椵岑城 取之 百濟聞之 擧兵來 奚論等逆之 兵旣相交 奚論謂諸將曰 昔吾父殞身於此 我今亦與百濟人戰於此 是我死日也遂以短兵赴敵 殺數人而死 王聞之 爲流涕 贈卹其家甚厚 時人無不哀悼 爲作長歌弔之

봄 정월에 이르자 사람이 피로하여 성이 장차 께트려지려 하여 형세를 다시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하늘을 우러러 크게 외쳐 말하기를 우리 왕이 나에게 한 성을 맡겼는데 보전하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였으니 죽어 악귀가 되어 모든 백제 사람을 씹어 먹는 것으로서 이 성을 회복하기를 원한다.”했다. 마침내 소매를 걷어 올리고 눈을 부릅뜨고 회화나무에 달려가 부딪쳐 죽었다. 이에 성이 함락되고, 군사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해론은 나이 20여세였는데 아버지의 공으로 대나마가 되었다. 선복 35년 무인(진평왕 40: 618) 왕이 명하여 해론을 금산당주로 삼고, 한산주 도독 변품과 군대를 일으켜 가잠성을 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백제가 그것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오니 해론 등이 그것을 맞아 군대가 서로 엇갈렸다.(싸우기 시작하였다.) 해론이 여러 장수에게 일러 말하기를 옛날 나의 아버지가 여기에서 목숨을 잃었다. 내가 지금 또한 백제 사람과 여기에서 싸우니 내가 죽을 날이다.”했다. 마침내 짧은 무기로 적에게 달려가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왕이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그 집을 가엾게 여겨 (물건을)주기를 매우 많게 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어 장가를 지어 조문하였다.

 

素那(或云金川) 白城郡蛇山人也 其父沈那(或云熄川) 力過人 身輕且捷 蛇山境與百濟相錯 故互相寇擊無虛月 沈那每出戰 所向無堅陣 仁平中 白城郡出兵 往抄百濟邊邑 百濟出精兵急擊之 我士卒亂退 沈那獨立拔劒 怒目大叱 斬殺數十餘人 賊懼不敢當 遂引兵而走 百濟人 指沈那曰 新羅飛將因相謂曰 沈那尙生 莫近白城素那雄豪有父風 百濟滅後 漢州都督都儒公請大王遷素那於阿達城 鄙禦北鄙

소나(혹은 금천이라 한다.)는 백성군 사산 사람이다. 그 아버지는 심나(혹은 식천이라 한다.)는 근육의 힘이 다른 사람보다 세고, 몸이 가벼우며 민첩하였다. 사산의 경계가 백제와 서로 섞여있었기 때문에 서로 노략질하고 공격하여 빈 달이 없었다. 심나가 매번 나가 싸웠는데 향하는 곳 마다 굳게 친 진이 없었다.(대항할 군사가 없었다.) 인평 중(선덕왕의 연호, 634~647)에 백성군이 군대를 내어 가서 백제의 변경 마을을 노략질하니 백제가 정예군대를 내여 급히 쳤다. 우리 군대가 어지지러이 물러났는데 심나 만이 홀로 검을 뽑고, 노한 눈으로 그게 꾸짖고는 수 십여명을 목 베어 죽였다. (백제)이 두려워하여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달아났다. 백제 사람들이 심나를 가리켜 신라의 나는 장수라 하고, 서로 말하기를 심나가 아직 살아 있으니 백성에 가까이 갈 수 없다.”했다. 소나가 용맹스럽고 세어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백제가 없어진 후 한주도독 도유 공이 대왕에게 소나를 아달성으로 옮겨 북쪽 변경을 막게 할 것을 청하였다.

 

上元二年乙亥春 阿達城太守級湌漢宣 敎民以某日齊出種麻 不得違令 靺鞨諜者認之 歸告其酋長 至其日 百姓皆出城在田 靺鞨潛師猝入城 剽掠一城 老幼狼狽 不知所爲 素那奮刃向賊 大呼曰 爾等知新羅有沈那之子素那乎 固不畏死以圖生 欲鬪者曷不來耶遂憤怒突賊 賊不敢迫 但向射之

상원 2년 을해(문무왕 15: 675) 봄 아달성 태수 급찬 한선이 백성으로 하여금 아무 날에 모두 나와 삼을 심으려 하니 명령을 어기지 말라고 했다. 말갈의 첩자가 그것을 알고 돌아 가 그 추장에게 알렸다. 그 날에 이르러 백성들이 모두 성을 나가 밭에 있었는데 말갈이 군대를 숨겼다가 갑자기 성에 들어 가 한 성을 노략질하였다. 노인과 어린이들이 허둥지둥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소나가 칼을 떨치며 적을 향해 크게 부르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은 신라에 심나의 아들 소나가 있다는 것을 아는가? 진실로 죽음을 두려워하여 삶을 도모하지 않는다. 싸우고자 하는 자가 어찌하여 오지 않는가?”하고는 마침내 분노하여 적에게 돌진하였다. 적이 감히 가까이오지 못하고 다만 (소나를)향하여 활을 쏠 뿐이었다.

 

素那亦射 飛矢如蜂 自辰至酉 素那身矢如猬 遂倒而死 素那妻 加林郡良家女子 初素那以阿達城鄰敵國 獨行 留其妻而在家 郡人聞素那死 弔之 其妻哭而對曰 吾夫常曰 丈夫固當兵死 豈可臥牀席 死家人之手乎其平昔之言如此 今死如其志也大王聞之 涕泣沾襟曰 父子勇於國事 可謂世濟忠義矣贈官迊湌

소나가 또한 활을 쏘니 날아다니는 화살이 벌과 같았는데 진시로(아침)부터 유시(저녁)에 이르니 소나의 몸에 박힌 화살이 고슴도치 같았다. 마침내 엎어져 죽었다. 소나의 아내는 가림군 양갓집 딸이다. 처음 소나는 아달성이 적국과 가까웠으므로 홀로 가고 그 아내는 머물러 집(친정)에 있게 하였다. (백성군) 사람들이 소나가 죽었다는 것을 듣고 조문하니 그 아내가 곡하며 대답해 말하기를 내 지아비가 항상 말하기를 장부가 진실로 군대를 담당하여(전장에서) 죽어야지(진실로 마땅히 싸우다 죽어야지) 어찌 침상에 누워 집안사람들의 손에(보살핌 속에) 죽겠는가?’했습니다. 그 평소의 말이 이 같으니 지금 죽은 것은 그 뜻과 같은 것입니다.”했다. 대왕이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며 말하기를 부자가 나라 일에 용감하였으니 대대로 충의를 이루었다고 말할만하다.”하고는 잡찬을 증직하였다.

 

驟徒 沙梁人 奈麻聚福之子 史失其姓 兄弟三人 長夫果 仲驟徒 季逼實 驟徒嘗出家 名道玉 居實際寺 太宗大王時 百濟來伐助川城 大王興師出戰 未決 於是 道玉語其徒曰 吾聞爲僧者 上則精術業 以復性 次則起道用 以益他我形似桑門而已 無一善可取 不如從軍殺身 以報國脫法衣 著戎服 改名曰驟徒 意謂馳驟而爲徒也 乃詣兵部 請屬三千幢

취도는 사량 사람이니 나마 취복의 아들로 사서에 그 성을 잃었다. 형제는 세 사람으로 맏이는 부고, 가운데는 취도, 동생은 핍실이다. 취도가 일찍이 출가하여 이름을 도옥이라 하고 실제사에 살았다. 태종대왕 때 배제가 와서 조천성을 쳤다. 태종대왕이 군대를 일으켜 나가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에 도옥(취도)이 그 무리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스님된 자는 위로는 종사하는 일(術業)을 정밀하게 하여 본성을 회복하고, 다음으로는 도의 쓰임을 일으켜 남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라 한다.’내가 형상은 상문(불교)인 듯하나 한 간지 선도 취할만 것이 없으니 종군하여 나를 죽이는 것으로서 나라에 보답하는 것만 못하다.”하고는 법의(스님의 옷)를 벗고 융복(군복)을 입고 이름을 고쳐 취도라 하였다. 생각하건데 달려가 보병()이 된 것을 말한 듯하다. 이에 병부에 나아가 삼천당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遂隨軍赴敵場 及旗鼓相當 持槍劒 突陣力鬪 殺賊數人而死 後咸享二年辛未 文武大王發兵 使踐百濟邊地之禾 遂與百濟人 戰於熊津之南 時夫果以幢主戰死 論功第一 文明元年甲申 高句麗殘賊 據報德城而叛 神文大王命將討之 以逼實爲貴幢弟監 臨行 謂其婦曰 吾二兄 旣死於王事 名垂不朽 吾雖不肖 何得畏死而苟存乎 今日與爾生離 終是死別也 好住無傷及對陣 獨出奮擊 斬殺數十人而死 大王聞之 流涕嘆曰 驟徒知死所 而激昆弟之心 夫果·逼實亦能勇於義 不顧其身 不其壯歟皆追贈官沙湌

마침내 군대를 따라 적의 진지에 나아갔다. 깃발과 북이 서로 마주함에 이르러(깃발과 북소리의 명에 따라) 창과 건을 가지고 돌진하여 힘껏 싸워 적 몇 명을 죽이고 죽었다. 후에 함형 2년 신미( 문무왕 11: 671) 문무대왕이 군대를 내어 백제 옛 땅의 벼를 짓밟게 하였다. 마침내 백제 사람들과 웅진의 남쪽에서 싸웠는데, 그 때 부과가 당주로서 싸우다 죽었다. 공을 논하니 일등이었다. 문명 1년 갑신(신문왕4: 684) 고구려의 남은 적들이 보덕성을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대왕이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고, 핍실을 귀당 제감을 삼고, 가려하면서 그 부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의 둘째 형이 이미 왕의 일(王事)에 죽어 명예가 드리워져 썩지 않았습니다.(명예를 길이 남겼는데) 내가 비록 어질지(현명하지) 못하나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히 살려 하리오. 오늘 너와 살아서 헤어지면 마침내 죽어서 헤어질 것입니다. 잘살고 서글퍼하지 마시오.”했다. (백제 군사의)진을 마주하자 홀로 나가 힘을 다해 쳐서 수십명을 목 베어 죽이고 죽었다. 대왕이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해 말하기를 취도가 죽을 장소를 알아 형제의 마음을 격동시켰고, 부과, 핍실이 또한 의리에 용감하여 그 몸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장하지 않은가?” 하고는 모두에게 사찬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訥催 沙梁人 大奈麻都非之子也 眞平王建福四十一年甲申冬十月 百濟大擧來侵 分兵圍攻速含·櫻岑·歧岑·烽岑·旗懸·穴柵等六城 王命上州·下州·貴幢·法幢·誓幢五軍 往救之 旣到 見百濟兵陣堂堂 鋒不可當 盤桓不進 或立議曰 大王以五軍 委之諸將 國之存亡 在此一役 兵家之言曰 見可而進 知難而退今强敵在前 不以好謀而直進 萬一有不如意 則悔不可追將佐皆以爲然 而業已受命出師 不得徒還

눌최는 사량사람이다. 내나마 도비의 아들이다. 진평왕 건복 40년 갑신(진평왕 46: 624) 겨울 10월 백제가 대거 침입해 와 군대를 나누어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혈책 등 6성을 둘러싸고 공격하였다. 왕이 상수, 하주, 귀당, 법당, 서당의 5군에 명하여 가서 구원하게 했다. 도착해 백제군대의 진이 당당한 것을 보고 그 날카로움을 당해내지 못할 것으로 여겨 머뭇거리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어던 사람이 의논을 세워 말하기를 대왕이 5군을 여러 장수들에게 맡겼으니 나라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전쟁에 달려 있습니다. 병가(병서)에 말하기를 할 만함을 보면 나아가고, 어려움을 알면 물러난다.’하였습니다. 지금 강한 적이 앞에 있는데 좋은 계책을 쓰지 않고 곧바로 나아갔다가 만에 하나 뜻과 같지 않음이 있으면 곧 뉘우쳐도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장수와 보좌하는 이가 모두 그렇다 여겼으나 이미 명을 받아 충동하여 도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先是 國家欲築奴珍等六城而未遑 遂於其地 築畢而歸 於是 百濟侵攻愈急 速含·歧岑·穴柵三城 或滅或降 訥催以三城固守 及聞五軍不救而還 慷慨流涕 謂士卒曰 陽春和氣 草木皆華 至於歲寒 獨松栢後彫 今孤城無援 日益阽危 此誠志士義夫 盡節揚名之秋 汝等將若之何士卒揮淚曰 不敢惜死 唯命是從及城將隤 軍士死亡無幾 人皆殊死戰 無苟免之心

이에 앞서 국가가 노진 등 6성을 쌓으려 하였으나 경황이 없었는데 마침내 그 땅에 쌓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이에 백제가 침공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여 속함, 기잠, 혈책 3성이 혹은 없어지고, 혹은 항복하였다. 눌최가 3 성을 가지고 굳게 지켰으나 5군이 구원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것을 듣고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사졸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봄의 온화한 기운은 초목을 모두 꽃 피우지만, 추워짐에 이르면 홀로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뒤에 시든다. 지금 외로운 성이 구원이 없어 날로 더욱 위태로워진다. 이는 진실로 지사와 의부가 절개를 다하고, 이름을 떨칠 때이다.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했다. 병사들이 눈물을 뿌리며 말하기를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고 오직 명을 따르겠습니다.”했다. 성이 장차 무너짐에 이르자 군사들이 죽고 몇 만 남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구차히 (죽음을)면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訥催有一奴 强力善射 或嘗語曰 小人而有異才 鮮不爲害 此奴宜遠之訥催不聽 至是 城陷賊入 奴張弓挾矢 在訥催前 射不虛發 賊懼不能前 有一賊出後 以斧擊訥催 乃仆 奴反與鬪俱死 王聞之 悲慟 追贈訥催職級湌

눌최에게 한 남자 종이 있었는데 힘이 강하고 활을 잘 쏘았다. 어떤 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 소인으로 특별한 재능이 있으면 해롭지 않은 이가 적습니다. 이 종은 마땅히 멀리해야 합니다.”했다. 눌최가 듣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성이 함락되고 적이 들어오니 종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끼워 눌최 옆에 있으면서 활을 쏘았는데 빗나감이 없었다. 적이 두려워하여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한 적이 있어 나온 후 도끼로 눌최를 쳐서 엎어지게 하였다. 종이 돌아서서 싸우다 같이 죽었다. 왕이 그것을 듣고 눌최에게 급찬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一本作薩)罽頭 亦新羅衣冠子孫也 嘗與親友四人 同會燕飮 各言其志 罽頭曰 新羅用人論骨品 苟非其族 雖有鴻才傑功 不能踰越 我願西遊中華國 奮不世之略 立非常之功 自致榮路 備簪紳劒佩 出入天子之側 足矣武德四年辛巳 潛隨海舶入唐 會太宗文皇帝親征高句麗 自薦爲左武衛果毅 至遼東 與麗人戰駐蹕山下 深入疾鬪而死 功一等 皇帝問 是何許人左右奏新羅人薛罽頭也 皇帝泫然吾人尙畏死 顧望不前 而外國人 爲吾死事 何以報其功乎問從者 聞其平生之願 脫御衣覆之 授職爲大將軍 以禮葬之

(어떤 책에는 살이라 섰다.) 또한 신라 의관(귀족)의 자손이다. 일찍이 벗 4 명과 함께 만하 잔치하며 술을 마시며 각자 그 뜻을 말하였다. 설계두가 말하기를 신라는 사람을 등용함에 골품을 논한다.(골품을 따진다.) 만약 그 족(그 골품) 아니면 비록 뛰어난 재주주와 걸출한 공이 있어도 넘을 수 없다. 나는 원하건데 서쪽으로 중화국(중국:당나라)에 가서 세상에 보기 드문 지략을 드날려 비상의 공을 세우고 스스로 영광스러운 길(관직)에 이르러 비녀와 띠를 갖추며 검을 차고 천자의 옆에 나고 들 수 있으면 충분하다.”했다. 무덕 4년 신사( 진평왕43: 621) 몰래 바다를 따라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갔다. 태종문황제가 직접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을 만나 스스로 추천하여 죄무위과의가 되었다. 요동에 이르러 고구려 사람들과 주필산 아래에서 싸우는데 깊이 들어 가 민첨하게 싸우다 죽으니 공이 1등이었다. 황제(당 태종)가 듣고 묻기를 이는 어떤 사람인가?”했다. 좌우가 신라사람 설계두라고 아뢰었다. 황제가 눈물을 뚝뚝흘리며 말하기를 우리 사람들이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여 돌아보고 앞서지 않는데 외국인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으니 무엇으로써 그 동을 깊을까?”하고는 시종하는 자에게 물어 그 평생의 소원을 듣고 어의(임금의 옷)를 벗어 덮어주고, 관직을 주어 대장군을 삼고 예에 맞추어 장사하게 하였다.

 

金令胤 沙梁人 級湌盤屈之子 祖欽春(或云欽純角干) 眞平王時爲花郞 仁深信厚 能得衆心 及壯 文武大王陟爲冢宰 事上以忠 臨民以恕 國人翕然稱爲賢相 太宗大王七年庚申 唐高宗命大將軍蘇定方 伐百濟 欽春受王命 與將軍庾信等 率精兵五萬以應之

김영윤은 사량부 사람이니 급찬 반굴의 아들이다. 할아버지는 흠춘(혹은 흠순 각간이라 한다.)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어질음이 깊고 믿음이 두터워 무리의 마음을 얻었다. 장성해서는 문무대왕이 올려 총재로 삼았다. 충성으로 윗사람을 섬기고, 백성 대하기를 너그럽게 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 칭찬하였다. 태종대왕 7년 경신(660) 당나라 고종이 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백제를 치게 하였는데 흠춘이 왕의 명을 받아 장군 김유신 등과 정예군대 5만을 통솔하고 나갔다.(대응하였다.)

 

秋七月 至黃山之原 値百濟將軍階伯 戰不利 欽春召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盤屈曰 乃入賊陣 力戰死 令胤生長世家 以名節自許 神文大王時 高句麗殘賊悉伏 以報德城叛 王命討之 以令胤爲黃衿誓幢步騎監 將行 謂人曰 吾此行也 不使宗族朋友 聞其惡聲及見悉伏出椵岑城南七里 結陣以待之

가을 7월 황산의 들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을 만났는데 싸움이 이롭지 않았다. 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말하기를 신하가 되어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이 되어 효 만한 것이 없다. 위태로운 것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은 충과 효를 모두 이루어진다.”했다. 반굴이 말하기를 하고는 곧 적진에 즐어 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영윤은 대대로 높은 관직을 지낸 집에서 태어나 자랐으므로 명예와 절개를 스스로 허여하였다.(자부하였다.) 신문대왕 때 고구려의 남은 적 실복이 보덕성을 가지고 배반하였다. 왕이 명하여 토벌하게 하니 영윤은 황금서당 보기감으로 삼았다. 장차 가려할 때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이번에 가면서 종족(친척)과 벗들로 하여금 나쁜 소리를 듣지 않게 하겠다.”했다. 실복이 가잠성 남쪽 7리로 나와 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或告曰 今此凶黨 譬如鷰巢幕上 魚戲鼎中 出萬死以爭 一日之命耳 語曰 窮寇勿迫宜左次以待疲極而擊之 可不血刃而擒也諸將然其言 暫退 獨令胤不肯之而欲戰 從者告曰 今諸將豈盡偸生之人 惜死之輩哉 而以向者之言爲然者 將俟其隙而得其便者也 而子獨直前 其不可乎令胤曰 臨陣無勇 禮經之所誡 有進無退 士卒之常分也 丈夫臨事自決 何必從衆遂赴敵陣 格鬪而死 王聞之 悽慟流涕曰 無是父 無是子 其義烈可嘉者也追贈爵賞尤厚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이 흉한 무리들이 비유하면 제비 천막 위에 둥우리를 친 것 같고, 물고기가 솥 안에서 노는 것과 같습니다. 만 번이라도 나와 죽겠다는 각오로 나와 싸우나 하루살이 일 뿐입니다. 말하기를 어려운 지경에 빠진 도적은 급박하게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마땅히 왼쪽으로 물렀다가 피로가 지극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치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했다. 여러 장수들이 그 말을 그렇다 여기고 잠시 물러났는데 오직 영윤만은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고 싸우려 하였다. 종자(시종)가 고하여 말하기를 지금 여러 장수들이 어찌 모두 살기를 엿보는 사람으로 죽음을 아끼는 사람이겠습니까? 지난번의 말을 그렇다고 여긴 것은 장차 틈을 엿보아 그 편함을 얻으려는 것인데 그대가 홀로 곧바로 나아가는 것은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했다. 영윤이 말하기를 적진을 대하여 용기가 없음은 예경(예기)의 경계하는 바로 나아감은 있고, 물러남은 없는 것이 사졸의 떳떳한 직분입니다. 장부가 일을 대하고 스스로 결단할 것이지 어찌 반드시 무리들을 따르리오.(어찌 무리를 따를 필요가 있겠는가?)”하고는 마침내 적진으로 나아가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그것을 듣고 처량하고 애통히 여겨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런 아버지가 없었다면 이런 아들이 없다. 그 의리가 아름다운 것이라 할 수 있다.”하고는 벼슬을 추증하고 매우 두터운 상을 주었다.

 

官昌(一云官狀) 新羅將軍品日之子 儀表都雅 少而爲花郞 善與人交 年十六 能騎馬彎弓 大監某薦之太宗大王 至唐顯慶五年庚申 王出師 與唐將軍侵百濟 以官昌爲副將 至黃山之野 兩兵相對 父品日謂曰 爾雖幼年 有志氣 今日是立功名取富貴之時 其可無勇乎官昌曰 卽上馬橫槍 直擣敵陣 馳殺數人 而彼衆我寡 爲賊所虜 生致百濟元帥階伯前 階伯俾脫胄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多奇士 少年尙如此 況壯士乎乃許生還

관창(관장이라 하기도 한다.)은 신라 장군 품일의 아들이니 모습이 아름다웠다. 어려서 화랑이 되어 다른 사람과 잘 사귀었다. 나이 16세에 말을 타고 활을 잘 쏘니 대감 아무개가 태종대왕에게 천거하였다. 당나라 현경 5년 경신(태종무열왕 7: 660) 왕이 군대를 출동하여 당나라 장군과 백제를 침입할 때 관창을 부장으로 삼았다. 황산의 들이 이르러 두 군대가 서로 대치하였을 때 아버지 품일이 일ㄹ 말하기를 네가 비록 나이 어리나 뜻과 기운이 있다. 오늘이 공과 명에를 세워 부귀를 취할 때이다. 어찌 용기가 없을 것닌가?”했다. 관창이 말하기를 하고는 곧 말에 올라 창을 빗겨들고 바로 적진을 찔러 치달리며 몇 사람을 죽였으나 그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 적에게 사로잡히는 바가 되었다. 살려서 백제 원수 계백의 앞에 이르렀는데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고는 그 젊음(어림)과 용기기를 아껴서 차마 해를 가하지 못하고 탄식해 말하기를 신라에 기이한 군사가 많아 소년도 오히려 이 같은데 하물며 건장한 군사이겠는가?”하고는 곧 살려 돌려보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官昌曰 向吾入賊中 不能斬將搴旗 深所恨也 再入必能成功以手掬井水 飮訖 再突賊陣疾鬪 階伯擒斬首 繫馬鞍送之 品日執其首 袖拭血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無所悔矣三軍見之 慷慨有立志 鼓噪進擊 百濟大敗 大王贈位級湌 以禮葬之 賻其家唐絹三十匹·二十升布三十匹·穀一百石

관창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적진 안에 들어갔을 때 장수를 목 베고, 깃발을 뽑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하는 바이다. 다시 들어간다면 반드시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하고는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서 마시고 다시 적진에 돌진하여 민첩하게 싸웠다.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어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하기를 내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고, 왕사(왕의 일)에 죽을 수 있었으니 후회가 없다.”했다. 3군이 그것을 보고 격앙되어 뜻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진격하니 백제가 크게 무너졌다. 대왕(태종무열왕)이 급찬의 관등을 주고 예를 갖추어 장례하게 하고, 그 집에 당나라 비단 30, 20승 포 30, 곡식 100석을 부조하였다.

 

金歆運 奈密王八世孫也 父達福迊湌 歆運少遊花郞文努之門時 徒衆言及某戰死 留名至今 歆運慨然流涕 有激勵思齊之貌 同門僧轉密曰 此人若赴敵 必不還也永徽六年 太宗大王憤百濟與高句麗梗邊 謀伐之 及出師 以歆運爲郞幢大監 於是 不宿於家 風梳雨沐 與士卒同甘苦 抵百濟之地 營陽山下 欲進攻助川城 百濟人乘夜疾驅 黎明緣壘而入 我軍驚駭 顚沛 不能定 賊因亂急擊 飛矢雨集 歆運橫馬握槊待敵

김흠운은 나밀왕의 8세손이다. 아버지는 달복 잡찬이다. 흠운이 젊어서 화랑 문노의 아래서 놀 때 무리들이 아무개가 싸우다 죽어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였다.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고 권면하여 같이하려는 모습이 있었다. 동문 승려인 전밀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적에게 나아간다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했다. 영휘 6(무열왕 2: 655) 태종대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변경을 막는 것에 분개하여 칠 것을 꾀하였는데 군대를 출동시킴에 이르러 흠운을 낭당 대감으로 삼았다. 이에 집에서 잠자지 않고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비로 목욕하며 병사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하였다. 백제의 땅에 이르러 양산 아래에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조천성을 치려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밤을 타고 빠르게 몰아 해가 뜰 무렵 성루를 따라 들어오니 우리군대가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 안정시킬 수 없었다. 적이 어지러움을 타고 급히 치니 나는 화살이 비처럼 모였다. 흠운이 말을 빗겨 타고 창을 자보 적에 대항하였다.

 

大舍詮知說曰 今賊起暗中 咫尺不相辨 公雖死 人無識者 況公新羅之貴骨 大王之半子 若死賊人手 則百濟所誇詫 而吾人之所深羞者矣歆運曰 大丈夫旣以身許國 人知之與不知一也 豈敢求名乎强立不動 從者 握轡勸還 歆運拔劒揮之 與賊鬪 殺數人而死 於是 大監穢破·少監狄得相與戰死 步騎幢主寶用那聞歆運死曰 彼骨貴而勢榮 人所愛惜 而猶守節以死 況寶用那生而無益 死而無損乎遂赴敵 殺三數人而死 大王聞之傷慟 贈歆運·穢破位一吉湌 寶用那·狄得位大奈麻 時人聞之 作陽山歌 以傷之

대사 전지가 설득하여 말하기를 오늘 적이 어두움 속에서 일어나 지척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공이 비록 죽을지라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공은 신라의 귀골(귀한 골품)으로 대왕의 사위이니 만약 적의 손에 죽는다면 곧 백제의 자랑거리가 되고, 우리 사람들에게는 깊은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했다. 흠운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허여하였으니(나라에 바치기로 하였으니)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알아주는 것과 알아주지 않는 것은 한 가지이다.(같은 것이다.) 어찌 감히 명예를 구하겠는가?”하고는 굳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종자(시종)가 고삐를 잡고 돌아 갈 것을 권하였으나 흠운이 검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이에 대감 예파, 소감 광득이 서로 함께 싸우다 죽었다. 보기당주 보용나가 흠운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말하기를 그는 골(골품)은 귀하고, 권세는 영화로워 사람들이 사람하고 아끼는 바였는데도 오히려 절개를 지키고 죽었는데 하물며 보용나는(나는) 살아서 이익됨이 없고, 죽어도 손해될 것이 없구나!”하고는 마침내 적에게 달려 가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대왕이 그것을 듣고 서글퍼하고 슬퍼하며 흠운, 예파,에게 일길찬의 관등을 주고, 보용나, 적득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었다. 그 때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양산가를 지어 애도하였다.

 

論曰 羅人患無以知人 欲使類聚羣遊 以觀其行義 然後擧用之 遂取美貌男子 糚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邪正 擇而薦之於朝 故大問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者此也 三代花郞 無慮二百餘人 而芳名美事 具如傳記 若歆運者 亦郞徒也 能致命於王事 可謂不辱其名者也

논하여 말한다. 신라 사람들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까 근심하여 무리를 모아 여럿이서 놀게 하고 그 행실과 의로움을 관찰한 후 등용하려 하였다. 마침내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화장하게 하고 화랑이라 이름하고 받들었더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혹은 도의로서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서 기뻐하며, 산수 간에 노닐었는데 멀리까지 이르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간사함과 바름을 알고 가려서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이 말하기를 임금을 보좌하는 어진 인물과 충신이 이로부터 나왔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한 것이 이것이다. 3대의 화랑이 무려 200여명으로 훌륭한 이름과 아름다운 일은 모두 전기와 같다. 김흠운과 같은 자도 또한 낭도인데 왕사(왕의 일)에 목숨을 바쳤으니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이를만하다.

裂起 史失族姓 文武王元年 唐皇帝遣蘇定方 討高句麗 圍平壤城 含資道摠管劉德敏傳宣國王 送軍資平壤 王命大角干金庾信 輸米四千石·租二萬二千二百五十石 到獐塞 風雪沍寒 人馬多凍死 麗人知兵疲 欲要擊之 距唐營三萬餘步而不能前 欲移書而難其人 時裂起以步騎監輔行 進而言曰 某雖駑蹇 願備行人之數

열기는 역사서에 종족과 성을 잃었다. 문무왕 1(661) 당나라 황제가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토벌하게 하여 평양성을 둘러쌌을 때 함자도 총관 유덕민이 국왕에게 소식을 전하며 군량을 평양으로 수송하라했다. 왕이 대각간 김유신에게 명하여 쌀 4천석, 22250석을 수송하게 하였다. 장새에 이르니 바람과 눈이 몹시 차가워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대가 피로한 것을 알고 요충지에서 치려하였다. 당나라 진영과 거리가 3만여 보 였는데 앞으로 갈 수 없었다. 글을 보내려 하였으나 그 사람을 얻기 어려웠다. 그 때 열기는 보기감으로 행군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나아가 말하기를 제가 비록 느리고 둔한 걸음이나 갈사람 몇을 갖추어주실 것을 원합니다.”했다.

 

遂與軍師仇近等十五人 持弓劒走馬 麗人望之 不能遮閼 凡兩日致命於蘇將軍 唐人聞之 喜慰廻書 裂起又兩日廻 庾信嘉其勇 與級湌位 及軍還 庾信告王曰 裂起·仇近 天下之勇士也 臣以便宜許位級湌 而未副功勞 願加位沙湌王曰 沙湌之秩 不亦過乎庾信再拜曰 爵祿公器 所以酬功 何謂過乎王允之

마침내 군사 구근 등 15명과 함께 활과 검을 지니고 말을 달리니 고구려 사람들이 바라보고도 막지 못하였다. 이틀이 걸려 소장군(소정방)에게 명을 전하니 당나라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며 위로하고 답서를 주었다. 열기가 또 이틀이 걸려 돌아오니 김유심이 그 용기를 아름답게 여겨 급찬의 관등을 주었다. 군대가 돌아오자 김유신이 왕에게 알려 말하기를 열기, 구근은 천하의 용사입니다. 신이 펴느이적으로 급찬의 관등을 허락하였으나 아직 공로에는 미흡합니다. 사찬의 관등을 더할 것을 원합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사찬의 지위는 또한 지나치지 않습니까?”하니 김유신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벼슬과 녹은 공기로 공을 갚는 것이니 어찌 지나치다 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後庾信之子三光執政 裂起就求郡守 不許 裂起與祇園寺僧順憬曰 我之功大 請郡不得 三光殆以父死而忘我乎順憬說三光 三光授以三年山郡太守 仇近從元貞公 築西原述城 元貞公聞人言 謂怠於事 杖之 仇近曰 僕嘗與裂起入不測之地 不辱大角干之命 大角干不以僕爲無能 待以國士 今以浮言罪之 平生之辱 無大此焉元貞聞之 終身羞悔

후에 김유신의 아들 삼광이 집정하였을 때 열기가 나아가 군수가 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열기가 기원사 승 순경과 말하기를 나의 공이 큰데 군 태수가 되기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습니다. 삼광이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나를 잊은 것인가?”하였다. 순경이 삼광에게 말하니 삼광이 삼년산군 태수를 주었다. 구근은 원종공을 따라 서원술성을 쌓았는데 원정 공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일을 게을리 하였다하여 장을 때렸다. 구근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열기와 헤아릴 수 없는 땅에 들어 가 대각간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대각간이 나로서 능력이 없다 하지 않고, 국사로 대우하였는데 지금 소문으로 죄를 주니 평생의 욕됨이 이보다 큼이 없다.”하였다. 원정이 듣고 종신토록 부끄러워하고 뉘우쳤다.

 

丕寧子 不知鄕邑族姓 眞德王元年丁未 百濟以大兵 來攻茂山·甘勿·桐岑等城 庾信率步騎一萬 拒之 百濟兵甚銳 苦戰不能克 士氣索而力憊 庾信知丕寧子有力戰深入之志 召謂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 今日之事 急矣 非子誰能奮勵出奇 以激衆心乎因與之飮酒 以示殷勤 丕寧子再拜云 今於稠人廣衆之中 獨以事屬我 可謂知己矣 固當以死報之出謂奴合節曰 吾今日上爲國家 下爲知己 死之 吾子擧眞 雖幼年有壯志 必欲與之俱死 若父子倂命 則家人其將疇依 汝其與擧眞 好收吾骸骨 歸以慰母心言畢 卽鞭馬橫槊 突賊陣 格殺數人而死

비령자는 (출신)향읍과 종족의 성을 알지 못한다. 진덕왕 1년 정미(647) 백제가 큰 군대로 와서 무산, 동잠, 감물 등의 성을 공격하였다. 김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막았다. 백제 군대가 매우 날래서 힘들게 싸워도 이기지 못하여 병사의 사기는 떨어지고 힘은 다하였다. 김유신이 비령자가 힘껏 싸우고 깊이 들어가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 불러 말하기를 날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 오늘의 일이 위급하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기운을 내서 힘쓰고, 기이함을 내어 무리의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겠는가?”했다. 인하여 그와 술을 마시는 것으로서 은근함을 보였다. 비령자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일을 나에게 부탁하시니 나를 알아주신다 이를만합니다. 진실로 마땅히 죽음으로서 보답하겠습니다.”하고는 나가 종 합절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오늘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나를 알아준 이를 위해 죽으려 한다. 나의 아들 거진은 비록 나이가 어리나 굳센 의지가 있으니 반드시 함께 죽으려 할 것이다. 만약 부자가 함께 목숨을 바친다면 그 집안사람들이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잘 거두어 돌아가면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라.”했다. 말을 마치고 곧 말에 채찍질하여 긴 창을 빗겨들고 적진에 돌진하여 이르러 몇 사람을 죽이고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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