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 卷49, 列傳 第 9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列傳 第九 倉助利·蓋蘇文 子男生·男建·男産·孫獻誠 附
열전 제9 창조리, 개소문 아들 남생·남건·남산, 손자 헌성 붙임
倉助利 高句麗人也 烽上王時 爲國相 時慕容廆爲邊患 王謂群臣曰 “慕容氏兵强 屢犯我疆埸 爲之奈何” 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 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子 無可用者” 王以爲新城太守 慕容廆不復來 九年秋八月 王發國內丁男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창조리는 고구려 사람이다. 봉상왕 때 국상이 되었다. 그 때 모용괴가 변경의 근심이 이되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모용씨의 군대가 강하고 여러 번 우리 영토를 침범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했다. 창조리가 대답해 말하기를 “북부 대형 고노자가 어질고 용감합니다. 대왕께서 만약 도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려면 고노자가 아니면 쓸 만 한 자가 없습니다.”했다. 왕이 신성태수로 삼았더니 모용괴가 다시 오지 않았다. 9년 8월 왕이 나라 안의 정남으로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려 하니 백성들이 먹음이 부족하고, 부역에 시달렸다. (백성들이) 이 때문에 떠돌아다녔다.
倉助利諫曰 “天災荐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 大王曾是不思 驅飢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況比隣有强梗之敵 若乘吾弊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 王慍曰 “君者 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 無以示威重 今相國 蓋欲謗寡人 以干百姓之譽也” 助利曰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臣旣承乏國相 不敢不言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後言” 助利知王之不悛 退與群臣謀廢之 王知不免 自縊
창조리가 간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재앙이 거듭 이르고, 곡식이 익지 않아 백성들이 그 자리를 잃었습니다. 장정은 사방으로 떠돌고, 늙은이와 어린이들은 골짜기에 굴러다닙니다. 이는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근심하며, 두려워하여 닦고 살펴야 할 때입니다. 대왕께서는 일찍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굶주린 사람들을 몰아 나무와 돌의 일에 곤궁하게 하시니 백성의 부모된 뜻을 심하게 어기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웃에 강하고 굳센 적이 있음에랴! 만약 우리의 폐단을 타고 온다면 사직과 백성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익숙하게 헤아리시길 원합니다.”했다. 왕이 성내어 말하기를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본다. 궁실이 웅장하고 아름답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지금 상국(재상)은 과인을 비방하는 것으로서 백성의 명예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했다. 창조리가 말하기를 “임금이 백성을 구휼하지 않는 것은 인이 아니고, 신하가 임금을 간하지 않는 것은 충이 아닙니다. 신이 국상을 이어받았으니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감히 명예를 구하겠습니까?”했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는 것이오! 말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했다. 창조리가 왕이 고치지 않을 것임을 알고 물러나 여러 신하들과 폐할 것을 꾀하였다. 왕이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다.
蓋蘇文(或云蓋金) 姓泉氏 自云生水中 以惑衆 儀表雄偉 意氣豪逸 其父東部(或云西部) 大人 大對盧死 蓋蘇文當嗣 而國人以性忍暴 惡之不得立 蘇文頓首謝衆 請攝職 如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許嗣位 而凶殘不道 諸大人與王 密議欲誅 事洩 蘇文悉集部兵 若將校閱者 幷盛陳酒饌於城南 召諸大臣共臨視 賓至 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弑王 斷爲數段 棄 之溝中 立王弟之子臧爲王 自爲莫離支 其官如唐兵部尙書兼中書令職也
개소문(혹은 개금이라 한다.) 성은 천씨로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으로서 무리들을 미혹시켰다. 모습이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가 크고 뛰어났다. 그 아버지는 동부(혹은 서부라고 한다.) 대인이다.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이어야 하나 나라 사람들은 성품이 잔인하고 사납다여겨 미워하여 자리를 얻지 못하였다. 소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무리들에게 사과하면서 직(대대로)을 대신할 것을 청하고, 만일 안 됨이 있다면 비록 버려지더라도 후회가 없을 것이라 하였다. 뭇 사람들이 그것을 불쌍하게 여겨 마침내 지위 잇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흉악하고 잔인함이 말로 하지 못할 정도여서 여러 대인과 왕이 몰래 의논하여 죽이고자 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었다. 소문이 부(동부, 혹은 서부)의 군대를 모두 모아 장차 열병하려는 것과 같이하고, 아울러 성 남쪽에 성대히 술과 음식을 차리고 여러 대신을 불러 함께 보자고 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모두 죽이니 무릇 백여 명이었고, 궁으로 달려들어 가 왕을 죽이고 몇 조각으로 잘라 구렁텅이에 버렸다. 왕의 동생의 아들 장을 세워 왕으로 삼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그 관직은 당나라 병부상서 겸중서령의 직과 같았다.
於是 號令遠近 專制國事 甚有威嚴 身佩五刀 左右莫敢仰視 每上下馬 常令貴人武將伏地 而履之 出行必布隊伍 前導者長呼 則人皆奔迸 不避坑谷 國人甚苦之 唐太宗聞蓋蘇文弑君而專國 欲伐之 長孫無忌曰 “蘇文自知罪大 畏大國之討 設其守備 陛下姑爲之隱忍 彼得以自安 愈肆其惡然後取之 未晩也” 帝從之 蘇文告王曰 “聞中國三敎並行 而國家道敎尙缺 請遣使於唐求之” 王遂表請 唐遣道士叔達等八人 兼賜道德經 於是取浮屠寺館之
이에 원근에 호령하여 나라 일을 마음대로 하였는데 매우 위엄이 있었다. 몸에는 다섯 개의 칼을 찼는데 좌우에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매번 말을 타고 내릴 때마다 항상 귀인과 무장으로 하여금 땅에 엎드리게 하여 그를 밟았고, 나갈 때는 반드시 대오를 펴서 앞에 인도하는 자가 길게 외치면 곧 사람들이 모두 달려 흩어졌는데 구덩이와 골짜기를 피하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이 매우 괴롭게 여겼다. 당나라 태종이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마음대로 한다는 것을 듣고 정벌하려 하니 장손무기가 말하기를 “소문이 스스로 죄가 큰 것을 알아 대국(당나라)의 정벌을 두려워하여 그 수비를 베풀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우선 짐짓 참아서 그가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겨 더욱 그 악을 함부로 한 후애 취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황제가 그것을 따랏다. 소문이 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들으니 중국에는 삼교(유불도)가 나란히 행해진다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도교가 아직 빠져있으니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구하 것을 청합니다.”했다. 왕이 마침내 표로 펑하니 당나라가 도사 숙달 등 8명을 보내고, 겸하여 《도덕경》을 내렸다. 이에 불교의 절을 빼앗아 묵게 하였다.
會新羅入唐 告“百濟攻取我四十餘城 復與高句麗連兵 謀絶入朝之路 小國不得已出師 伏乞天兵救援” 於是太宗命司農丞相里玄奬賚璽書 勑王曰 “新羅委質國家 朝貢不闕 爾與百濟 宜各戢兵 若更攻之 明年 發兵討爾國矣” 初玄奬入境 蘇文已將兵擊新羅 王使召之乃還 玄奬宣勑
마침 신라가 당에 들어 가 알리기를 “백제가 우리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다시 고구려와 군대를 합해 조공 들어가는 길을 끊고자 도모하니 소국(신라)이 부득이 rnseoff 내었습니다. 엎드려 천병(황제의 군대, 당나라 군대)으로 구원할 것을 구걸합니다.”했다. 이에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에게 명하여 황제의 옥새가 찍힌 글을 가지고 가 왕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신라는 예물로서 경의를 표하는 나라로 조공이 빠지지 않았다. 너희와 백제는 마땅히 각기 군대를 거두라. 만약 다시 공격한다면 내년에 군대를 내어 너희 나라를 토벌할 것이다.”했다. 처음 현장이 경계에 들어 왔을 때 소문은 이미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를 치고 있었는데 왕이 그를 부르게 하니 이에 돌아왔다. 현장이 황제의 명을 전하였다.
蘇文曰 “往者 隋人侵我 新羅乘釁 奪我城邑五百里 自此怨隙已久 若非還我侵地 兵不能已” 玄奬曰 “旣往之事 焉可追論 今遼東 本皆中國郡縣 中國尙不言 高麗豈得必求故地” 蘇文不從 玄奬還具言之 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賊其大臣 殘虐其民 今又違我詔命 不可以不討”
소문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수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침입하였을 때 신라가 틈을 타고 우리의 성읍 500리를 빼앗았는데 이로부터 원함과 틈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침략 당한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군대를 그만둘 수 없습니다.”했다. 현장이 말하기를 “이미 지나간 일인데 어찌 따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요동은 본래 중국의 군현임에도 중국이 오히려 말하지 않는데 고(구)려가 어찌 반드시 옛 땅을 구하여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소문이 따르지 않자 현장이 돌아가 갖추어 말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이고, 그 대신을 해쳤으며 그 백성에게 잔인하고 포학하게 하더니 지금 또한 나의 명령을 어겼다.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했다.
又遣使蔣儼諭旨 蘇文竟不奉詔 乃以兵脅 使者不屈 遂囚之窟室中 於是太宗大擧兵 親征之 事具高句麗本紀 蘇文至乾封元年死 子男生 字元德 九歲以父任爲先人 遷中裏小兄 猶唐謁者也 又爲中裏大兄 知國政 凡辭令 皆男生主之 進中裏位頭大兄 久之 爲莫離支 兼三軍大將軍 加大莫離支 出按諸部 而弟男建·男産知國事
또 장엄을 보내 황제의 명으로 깨우치게 하였으나 소문이 끝내 황제의 명을 받들지 않고, 곧 군대로 위협하였다. 사자가 굽히지 않자 마침내 굴실 안에 가두었다. 이에 태종이 크게 군대를 일으켜 직접 그들을 정벌하였다. 일은 고구려본기에 갖추어져 있다. 소문이 건봉 1년(보장왕25:666)에 죽었다. 아들 남생은 자가 덕원이다. 9세에 아버지의 직임으로 인하여 선인이 되었고, 중리소형으로 옮겼는데 당나라 알자와 같은 것이다. 또 중리대형이 되어 국정을 맡아 모든 사령(사람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 나아가 중리위두대형이 되었다. 오래있다가 막리지다 되어 삼군대장군을 겸하고, 대막리지를 더하였다. 여러 부를 살피러 나가자 동생 남건, 남산이 국사를 맡았다.
或曰 “男生惡君等逼己 將除之” 建·産未之信 又有謂男生 “將不納君” 男生遣諜往 男建捕得 卽矯王命召之 男生懼不敢入 男建殺其子獻忠 男生走保國內城 率其衆 與契丹靺鞨兵附唐 遣子獻誠訴之 高宗拜獻誠右武衛將軍 賜乘輿馬·瑞錦寶刀 使還報 詔契苾何力率兵援之 男生乃免 授平壤道行軍大摠管兼持節安撫大使 擧哥勿·南蘇·倉巖等城以降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남생은 그대들이 자기를 핍박하는 것을 미워하여 장차 없애려 합니다.”했다. 남건과 남산이 믿지 않았다. 또 남생에게 말하기를 “장차 그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하니 남생이 첩자를 보냈는데 남건이 사로잡았다. 곧 왕의 명을 속여 부르니 남생이 두려워하여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남건이 그 아들 헌충을 죽였다. 남생이 달아나 국내성을 지키고, 그 무리를 인솔하여 글안, 말갈 군대와 당나라에 붙었다. (남생이) 아들 헌성을 보내 호소하니 고종이 헌성에게 우무위장군의 벼슬을 주고, 수레와 말, 상서로운 비단, 보배 칼을 내리고 돌아가 보고하게 하고, 글필하력에게 명하여 군대를 인솔하여 돕게 하니 남생이 이에 (화를)면하였다. 평양도 행군대총관 겸지절안무대사를 주니 가물, 남소, 창암 등의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帝又命西臺舍人李虔繹 就軍慰勞 賜袍帶金釦七事 明年召入朝 遷遼東大都督玄菟郡公 賜第京師 因詔還軍 與李勣攻平壤 入禽王 帝詔遣子 卽遼水勞賜 還 進右衛大將軍卞國公 年四十六卒 男生純厚有禮 奏對敏辯 善射藝 其初至 伏斧鑕待罪 世以此稱焉獻誠 天授中以右衛大將軍兼羽林衛 武后嘗出金幣 於文武官內 擇善射者五人 中者以賜之 內史張光輔先讓獻誠爲第一 獻誠後讓右王鈐衛大將軍薛吐摩支 摩支又讓獻誠 旣而 獻誠奏曰 “陛下擇善射者 然多非華人 臣恐唐官以射爲恥 不如罷之” 后嘉納 來俊臣嘗求貨 獻誠不答 乃誣其謀叛 縊殺之
황제가 또 서대 사인사인 이건역에게 명하여 군대에 나아가 수고로움을 위로하게 하고, 도포, 띠 금 그릇, 일곱가지 물건을 내렸다. 다음해 불러 조정에 들어오자 요동대도독현도군공으로 옮기고 경사(서울)에 집을 내렸다. 인하여 조칙으로 군대로 돌아가 이적과 평양을 공격하고, 들어 가 왕을 사로잡았다. 황제가 조칙으로 아들을 요수에 보내 위로를 내렸다. 돌아와 우위대장군 변국공에 승진하고 나이 46세에 죽었다. 남생은 인물됨이 순수하고 후덕하였다. 예가 있어 아뢰고 대답함이 민첩하고 말을 잘 하였으며 활을 잘 쏘았다. 처음 당나라에 이르렀을 때 머리를 자를 도끼와 허리를 자를 형틀에 엎드려 죄를 기다렸다. 세상에서는 이를 가지고 헌성을 칭찬하였다. 천수 연간에 우위대장군으로 한림위를 겸하였다. (측천)무후가 일찍이 금을 내어 문무관 안에서 활 잘 쏘는 자 5명을 가려 맞춘 자에게 내리게 하였다. 내사 장광보가 먼저 헌성에게 1등을 양보하였고, 헌성이 뒤에 우왕검위대장군 설토마지에게 양보하였고, 설토마지가 또한 헌성에게 양보하였다. 이윽고 헌성이 아뢰어 말하기를 “폐하께서 활을 잘 쏘는 자를 가리나 중국사람이 아님이 많아 신은 당나라 관리들이 활쏘기를 부끄럽게 여길가 두렵습니다. 그만두는 것이 낫습니다.”하니 측천무후가 흔쾌히 받아들였다. 내준신이 일찍이 돈을 구하였는데 헌성이 답하지 않으니 이에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목을 매달아 죽였다.
后後知其寃 贈右羽林衛大將軍 以禮改葬【論曰】 宋神宗與王介甫論事曰 “太宗伐高句麗 何以不克” 介甫曰 “蓋蘇文 非常人也” 然則蘇文 亦才士也 而不能以直道奉國 殘暴自肆 以至大逆 春秋 『君弑賊不討 謂之國無人』 而蘇文保腰領 以死於家 可謂幸而免者 男生·獻誠 雖有聞於唐室 而以本國言之 未免爲叛人者矣
측천무후가 그 억울함을 알고 우림위대장군을 증직하고, 예로서 고쳐 장례하게 하였다. 논하여 말한다. 송나라 신종이 왕개보와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태종이 고구려를 쳤을 때 무엇 때문에 이기지 못하였는가?”하니 왕개보가 말하기를 “개소문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하였으니 소문은 또한 재능있는 사람일 것이지만 곧은 도리로서 나라를 받들지 않고 잔인하고 사납게하며 스스로 함부로 하는 것으로서 대역죄에 이르렀다. 《춘추》에 “임금을 해친 이를 성토하지 않으면 나라에 사람이 없다.”하였니 소문이 몸을 보존하여 집에서 죽었으니 요행히 면한 자라고 할 수 있다. 남생과 헌성은 비록 당나라 황실에서 이름이 났으나 본국(고구려)으로서 말하자면 배반한 사람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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