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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 권48, 열전 8

by 최인표 2024. 1. 5.

三國史記卷第四十八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列傳 第八 向德·聖覺·實兮·勿稽子·百結先生·劒君·金生 姚克一 附·率居·孝女知恩·薛氏女·都彌

열전 제8 향덕, 성각, 실혜, 물계자, 백결선생, 검군, 김생 요극일 붙임, 솔거, 효녀지은, 설씨녀, 도미

 

向德 熊川州板積鄕人也 父名善 字潘吉 天資溫良 鄕里推其行 母則失其名 向德亦以孝順 爲時所稱 天寶十四年乙未 年荒民饑 加之以疫癘 父母飢且病 母又發癰 皆濱於死 向德日夜不解衣 盡誠安慰 而無以爲養 乃刲髀肉以食之 又吮母癰 皆致之平安 鄕司報之州 州報於王 王下敎 賜租三百斛·宅一區·口分田若干 命有司立石紀事 以標之 至今 人號其地云孝家里

향덕은 웅천주 판적향 사람이다. 아버지 이름은 선이고, 자는 반길이다. 천성이 옹화하고 선하여 향리에서 그 행실을 받들었다.(칭찬하였다.) 어머니는 그 이름을 잃어 버렸다. 향덕이 또한 효와 순함으로 그 때에 일컬어지는 바 되었다. 천보 4년 을미(경덕왕 14: 755)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주리는데 더하여 전염병이 돌았다. 부모가 주리고 또 병들었는데 어머니가 또한 종기가 발생하여 모두 거의 죽게 되었다. 향덕이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고 정성을 다해 편안히 위로하였고, 봉양할 것이 없자 이에 넓적다리 살을 취해 먹였다. 또 어머니의 종기를 빨아 모두 평안함에 이르게 하였다. 향사(향의 관청)에서 주에 보고하고, 주에서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명을 내려 조 300, 1, 구분전 약간을 내리고, 담당관청으로 하여금 돌을 세워 일을 기록하게 하는 것으로서 드러내게 하였다. 지금에도 사람들이 그 땅 부르기를 효가리라 한다.

 

聖覺 菁州人 史失其氏族 不樂世間名官 自號爲居士 依止一利縣法定寺 後歸家養母 以老病難於蔬食 割股肉以食之 及死 至誠爲佛事資薦 大臣角干敬信·伊湌周元等聞之 國王以熊川州向德故事 賞近縣租 三百石論曰 宋祁唐書云 善乎 韓愈之論也 曰 父母疾 烹 藥餌 以是爲孝 未聞毁支體者也 苟不傷義 則聖賢先衆而爲之 是不幸因而且死 則毁傷滅絶之罪 有歸矣 安可旌其門 以表異之雖然 委巷之陋 非有學術禮義之資 能忘身以及其親 出於誠心 亦足稱者 故列焉則若向德者 亦可書者乎

성각은 청주 사람이다. 역사에 그 씨와 종족을 잃었다. 세상의 명예와 관직을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 거사라 부르면서 일리현 법정사에 머물렀다. 후에 집에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늙고 병들어 채소만 먹기 어려워 다리 살을 베어내 먹였다. (어머니가)죽음에 이르자 지극한 정성으로 불사와 천도를 하였다. 대신인 각간 경신, 이찬 주원 등이 들었다. (왕에게 아뢰니) 국왕이 웅천주 향덕의 고사에 따라 가까운 현의 조 300석을 상으로 주었다.

논하여 말한다. 송기의 당서에 이르기를 좋구나! 한유의 논의여, 말하기를 부모가 병들면 약을 끓여 먹이는 것을 효라 하였는데, (효를 한다고)팔다리의 몸을 훼손하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만약 의리를 해치지 않는다면 곧 성현이 무리에 앞서 그것을 하였을 것이다. 이에 불행히도 또 죽으면 곧 (몸을)해치고 (윤리가)끊어져 없어지는 죄가 돌아감이 있는 것이니 어찌 그 문에 정표하는 것으로서 표창하여 특이하게 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시골의 비루함이니 학술과 예의의 바탕이 있지 않으면서 자신을 잊는 것으로서 그 어버이에 미치는 진실된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도한 칭찬할만하다. 그러므로 여기에 열전을 쓴다.”하였으니 저 향덕과 같은 자는 또한 기록할만한 자일 것이다.

 

實兮 大舍純德之子也 性剛直 不可屈以非義 眞平王時 爲上舍人 時下舍人珍堤 其爲人便佞 爲王所嬖 雖與實兮同寮 臨事互相是非 實兮守正不苟且 珍堤嫉恨 屢讒於王曰 實兮無智慧 多膽氣 急於喜怒 雖大王之言 非其意則憤不能已 若不懲艾 其將爲亂 盍黜退之 待其屈服 而後用之 非晩也王然之 謫官泠林 或謂實兮曰 君自祖考 以忠誠公材 聞於時 今爲佞臣之讒毁 遠宦於竹嶺之外荒僻之地 不亦痛乎 何不直言自辨實兮答曰 昔屈原孤直 爲楚擯黜 李斯盡忠 爲秦極刑 故知佞臣惑主 忠士被斥 古亦然也 何足悲乎遂不言而往 作長歌見意

실혜는 대사 순덕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의롭지 않은 것으로는 굽힐 수 없었다. 진평왕 때 상사이이 되었다. 그 때 하사인 진제는 그 사람됨이 아첨하여 왕의 사랑을 받았다. 비록 실혜와 동료이나 일에 임하여 서로 시비를 따질 때 실혜는 바름을 지키고 구차하지 않았다. 진제가 질투하고 원망하여 여러 번 왕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실혜는 지혜가 없고, 담력이 많아 기뻐하고 노함을 급히 합니다. 비록 대왕의 말일지라도 그 뜻이 아니면 곧 분개하여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징계하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가 장차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어찌하여 내쳐 물리치지 않으십니까? 그가 굴복하기를 기다린 후에 등용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왕이 그렇다 여기고 영림의 관리로 좌천시켰다. 어떤 사람이 실혜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는 할아버지 때부터 충성과 공재(재상이 될만한 자질)로 당시 세상에 소문이 났다. 지금 아첨하는 신하의 참소와 비방으로 멀리 죽령의 밖 거칠고 후미진 땅에서 벼슬하게 되었으니 또한 통탄할 일이 아닌가? 어찌 직언으로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는가?” 했다. 실혜가 답하여 말하기를 옛날 굴원은 외롭고 곧았으나 초나라가 배척하여 내쳐졌고, 이사는 지극히 충성하였으나 진나라에게 극형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아첨하는 신하가 임금을 어지럽게 하고, 충성스러운 선비가 배척 당하는 것은 옛날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어찌 슬퍼할 것이 있겠는가?”하고는 마침내 말하지 않고 갔다. 장가를 지어 뜻을 나타내었다.

 

勿稽子 奈解尼師今時人也 家世平微 爲人倜儻 少有壯志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 請救 尼師今使王孫捺音 率近郡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 是役也 勿稽子有大功 以見憎於王孫 故不記其功 或謂勿稽子曰 子之功莫大 而不見錄 怨乎何怨之有或曰 盍聞之於王勿稽子曰 矜功求名 志士所不爲也 但當勵志 以待後時而已後三年 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勿稽子斬獲數十餘級 及其論功 又無所得 乃語其婦曰 嘗聞爲臣之道 見危則致命 臨難則忘身 前日浦上竭火之役 可謂危且難矣 而不能以致命忘身 聞於人 將何面目以出市朝乎遂被髮携琴 入師彘山 不反

물계자는 나해이사금 때 사람이다. 가문이 대대로 미미하였으나 사람됨이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고, 어려서부터 장한 뜻이 있었다. 그 때 여덟 포상국이 함께 아라국을 칠 것을 꾀하였다. 아라국의 사자가 와서 구원을 청하니 이사금이 왕손 날음으로 하여금 가까운 군과 6부의 군대를 통솔해 가서 구원하게 했다. 마침내 여덟 나라의 군대를 무너뜨렸다. 이 전쟁에서 물계자는 큰 공이 있었으나 왕손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 공이 기록되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의 공이 매우 큰데도 기록되지 못하였으니 원망하는가?”했다. 말하기를 어찌 원망하겠습니까?”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왕에게 그것을 아뢰지 않는가?”하니 물계자가 말하기를 공을 자랑하고 명예를 구하는 것은 뜻있는 선비가 할 바가 아닙니다. 단지 마땅히 뜻을 힘써 연마하는 것으로서 뒤의 때를 기다릴 뿐입니다.”했다. 3년 뒤 골포, 칠포, 고사포 세 나라 사람들이 와서 갈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군대를 인솔하여 나가 구원하여 세 나라의 군대를 크게 무너뜨렸다. 물계자는 적을 베어 머리 수십여개를 얻었다. 그 공을 논함에 이르러 또 얻은 바가 없었다. 이에 그 부인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신하된 자의 도리를 들었는데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대하면 곧 자신을 잊는다. 합이다. 지난날 포상국과 갈화성의 전투는 위태롭고 어려운 것이어서 목숨을 바치고 자신을 잊지 못한다고 사람글에게 소문이 났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시장과 조정에 나가겠는가?”했다. 마침내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가지고 사체산에 들어 가 돌아오지 않았다.

 

百結先生 不知何許人 居狼山下 家極貧 衣百結若懸鶉 時人號爲東里百結先生 嘗慕榮啓期之爲人 以琴自隨 凡喜怒悲歡不平之事 皆以琴宣之 歲將暮 鄰里舂粟 其妻聞杵聲曰 人皆有粟舂之 我獨無焉 何以卒歲先生仰天嘆曰 夫死生有命 富貴在天 其來也不可拒 其往也不可追 汝何傷乎 吾爲汝 作杵聲以慰之乃鼓琴作杵聲 世傳之 名爲碓

백결선생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낭산 아래 살았는데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옷을 백번이나 기워 입었는데 마치 비둘기를 거꾸로 걸어놓은 듯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동쪽 마을(동리)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일찍이 영계기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거문고로서 스스로 따라 무릇 기쁨, 노함, 슬픔, 즐거움, 마음에 편하지 않은 일을 모두 거문고를 가지고 폈다. 해가 장차 저물어가자 동네에서 곡식을 방아로 찧었는데 그 처가 절구공이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곡식이 있어 방아를 찧는데 우리 홀로 (곡식이)없구나. 어떻게 해를 마쳐야하나?”했다. 선생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해 말하기를 대저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잇는 것이다. 그 오는 것은 막을 수 없고, 그 가는 것은 쫓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서글퍼하십니까? 절구소리를 지어서 위로합니다.”했다. 곧 거문고를 연주하여 절구 소리를 내었다. 세상에 그것이 전하는데 이름을 대악(방아음악, 방아타령)이라 했다.

 

劒君 仇文大舍之子 爲沙梁宮舍人 建福四十四年丁亥秋八月 隕霜殺諸穀 明年 春夏大飢 民賣子而食 於時宮中諸舍人同謀 盜唱翳倉穀分之 劒君獨不受 諸舍人曰 衆人皆受 君獨却之 何也 若嫌小 請更加之劒君笑曰 僕編名於近郞之徒 修行於風月之庭 苟非其義 雖千金之利 不動心焉時大日伊湌之子 爲花郞 號近郞 故云爾 劒君出至近郞之門 舍人等密議不殺此人 必有漏言 遂召之 劒君知其謀殺 辭近郞曰 今日之後 不復相見郞問之 劒君不言 再三問之 乃略言其由 郞曰 胡不言於有司劒君曰 畏己死 使衆人入罪 情所不忍也” “然則盍逃乎彼曲我直 而反自逃 非丈夫也遂往 諸舍人置酒謝之 密以藥置食 劒君知而强食 乃死 君子曰 劒君死非其所 可謂輕泰山於鴻毛者也

검군은 구문대사의 아들로 사량궁 사인이 되었다. 건복 44년 정해(진평왕 49: 627)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여러 곡식을 죽였다. 다음해 봄과 여름에 크게 주리니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먹었다. 그 때 궁중의 여러 사인들이 같이 공모하여 창예창의 곡식을 훔쳐 나누어 가졌는데 검군이 홀로 받지 않았다. 여러 사인들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이 모두 받았는데 그대가 홀로 물리치니 어째서인가? 만약 적음을 싫어한다면(적다고 여긴다면) 다시 더할 것을 청하시오.”했다. 검군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이름을 근랑의 무리에게 붙여두고, 풍월(화랑)의 뜰에서 수행하였는데 만일 의로운 것이 아니라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했다. 그 때 대일 이찬의 아들이 화랑이 되었는데 근랑이라 불렀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검군이 나와 근랑의 집 문에 이르렀다. 사인 등이 몰래 의논하기를 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새는 말이 있을 것이다.”하고는 마침내 그를 불렀다. 검군은 그를 모의하여 죽일 것을 알고 근랑에게 사직하고 말하기를 오늘 이후로 다시 서로 보지 못할 것입니다.”했다. 낭이 물었으나 검군이 말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거듭 물으니 이에 대략 그 이유를 말하였다. 낭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담당관청에 말하지 않았는가?”하니 검군이 말하기를 자기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먾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 들게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하지 못하는 바입니다.”했다. “그렇다면 곧 어찌하여 도망하지 않는가?”하니 말하기를 저들은 굽고, 내가 곧은데 도리어 스스로 도망하는 것은 장부가 아닙니다.”하고는 마침내 갔다. 여러 사인들이 술을 두고 사죄하면서도 몰래 약을 술에 타서 먹였다. 검군이 알고도 꿋꿋하게 먹고 죽었다. 군자가 말하기를 검군은 죽어야 할 바가 아님에도 죽었으니 태산을 기러기 털보다 가벼이 여긴 자라 이를만 하다.”했다.

 

金生 父母微 不知其世系 生於景雲二年 自幼能書 平生不攻他藝 年踰八十 猶操筆不休 隸書行草皆入神 至今往往有眞蹟 學者傳寶之 崇寧中 學士洪灌隨進奉使入宋 館於汴京 時翰林待詔楊球·李革 奉帝勅至館 書圖簇 洪灌以金生行草一卷 示之 二人大駭曰 不圖今日得見王右軍手書洪灌曰 非是 此乃新羅人金生所書也二人笑曰 天下除右軍 焉有妙筆如此哉洪灌屢言之 終不信 又有姚克一者 仕至侍中兼侍書學士 筆力遒勁 得歐陽率更法 雖不及生 亦奇品也

김생은 부모가 미천하여 그 세계를 알지 못한다. 경운 2(聖德王 10: 711)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평생동안 다른 기예를 공부하지 않았다.나이 80세가 넘어서도 오히려 붓을 잡아 쉬지 않았다. 예서, 행서, 초서가 모두 신의 경지에 들었다. 지금까지(고려시대) 자주 진품 글씨가 있고, 배우는 자들이 전하여 보배로 여겼다. 숭녕 중에 핚사 홍관이 진봉사를 따라 송나라에 들어 가 변경에서 묵었다. 그 때 한림대조 양구, 이혁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관(숙소)에 이르러 그림 족자에 글씨를 썼다. 홍관이 김생이 쓴 행서, 초서 1권을 보이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뜻하지 않게 오늘 왕우군(왕희지)의 친필 글씨를 볼 수 있구나!”했다. 홍관이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신라 사람 김생이 쓴 것입니다.”했다. 두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우군(왕희지)를 제하고 어떻게 이와 같이 신묘한 글씨를 쓸 수 있겠습니까?”했다. 홍관이 여러 번 말하여도 끝내 믿지 않았다. 또 요극이은 벼슬이 시중 겸시서학사에 이르렀는데 필력(글씨에 힘이 있고)이 있고, 구양순의 솔경법을 얻었다. 비록 김생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또한 뛰어난 솜씨였다.

 

率居 新羅人 所出微 故不記其族系 生而善畵 嘗於皇龍寺壁畵老松 體幹鱗皴 枝葉盤屈 烏鳶燕雀 往往望之飛入 及到 蹭蹬而落 歲久色暗 寺僧以丹靑補之 鳥雀不復至 又慶州芬皇寺觀音菩薩·晉州斷俗寺維摩像 皆其筆蹟 世傳爲神畵

솔거는 신라사람이다. 출신이 미천하였기 때문에 그 종족과 계보를 기록하지 못한다. 나면서 그림을 잘 그렸다. 일찍이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줄기는 비늘처럼 주름지고, 가지와 잎이 서리고 굽어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가 자주 바라보고 날아들었다가 도달함에 이르러 허둥거리다 떨어졌다. 세월이 오래되어 색이 어두워지니 절의 스님이 단청을 가지고 기웠는데(보수하였는데) 까마귀, 참새가 다시는 이르지 않았다. 또 경주 분황사 관음보살, 빈주 단속사 유마상이 모두 그의 그림이다(그의 필적이다.). 세상에 전하여 져 신이 그린 그림(신화라 여겼다.)이라 여겼다.

 

孝女知恩 韓歧部百姓連權女子也 性至孝 少喪父 獨養其母 年三十二 猶不從人 定省不離左右 而無以爲養 或傭作或行乞 得食以飼之 日久不勝困憊 就富家請賣身爲婢 得米十餘石 窮日行役於其家 暮則作食歸養之 如是三四日 其母謂女子曰 向食麤而甘 今則食雖好 味不如昔 而肝心若以刀刃刺之者 是何意耶女子以實告之 母曰 以我故 使爾爲婢 不如死之速也乃放聲大哭 女子亦哭 哀感行路 時孝宗郞出遊見之 歸請父母 輸家粟百石及衣物予之 又償買主以從良 郞徒幾千人 各出粟一石爲贈 大王聞之 亦賜租五百石 家一區 復除徭役 以粟多恐有剽竊者 命所司差兵番守 標榜其里曰孝養坊 仍奉表 歸美於唐室 孝宗 時第三宰相舒發翰仁慶子 少名化達 王謂 雖當幼齒 便見老成卽以其兄憲康王之女 妻之

효녀 지은은 한기부 백성 연권의 딸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나이 32세가 되어도 다른 사람을 따르지 않았다.(시집가지 않았다.) 아침에 문안하고, 저녁에 잠자리를 살피며 좌우를 떠나지 않았으나 봉양할 것이 없어 혹은 고용살이하고, 혹은 구걸하여 밥을 얻어 (어머니를)먹였다. 날이 오래되자 지치고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여 부잣집에 나아가 자신을 팔아 종이 될 것을 청하여 쌀 10여석을 얻었다. 날이 저물도록 그 집에서 일을 하고, 저물면 곧 밥을 지어 돌아와 봉양하였다. 이 같이 3, 4일을 하니 그 어머니가 딸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난번의 밥은 거칠었으나 달았는데 지금은 곧 비록 밥이 좋으나 맛이 옛날과 같지 않고, 간과 심장을 마치 칼날로 찌르는 것 같으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했다. 딸이 사실을 말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 때문에 너로 하여금 종이 되게 하였으니 빨리 죽는 것만 못하다.”하고는 크게 소리내 울었다. 딸이 또한 소리내 우니 슬픔을 길가는 사람도 느꼈다. 그 때 효종랑이 놀러 나갔다가 그것을 보고 돌아 가 부모에게 청하여 집안의 곡식 백석과 옷을 운반하여 주었다. (효녀 지은을) 샀던 주인에게 보상하고 양인으로 만들어 주니 낭도 몇 천 명이 각각 곡식 1석씩을 내어 주었다. 대왕이 그것을 듣고 또한 조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리고, 요역을 면제해 주었으며, 곡식이 많기 때문에 노략질하여 훔치는 자가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맡은 관청에 명하여 군대를 보내 지키게 하고, 방을 걸어 그 마을을 효양방이라 하였다. 이어 표를 보내 당나라 왕실에 아름다움을 알렸다. 효종은 그 때 제 3재상 서발한 인경의 아들로 어려서 이름은 화달이었다. 왕이 말하기를 비록 어린나이에 해당하나 문득 노성의 덕이 보인다.”하고는 곧 그 형인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薛氏女 栗里民家女子也 雖寒門單族 而顔色端正 志行脩整 見者無不歆艶 而不敢犯 眞平王時 其父年老 番當防秋於正谷 女以父衰病 不忍遠別 又恨女身不得代行 徒自愁悶 沙梁部少年嘉實 雖貧且窶 而其養志貞男子也 嘗悅美薛氏 而不敢言 聞薛氏憂父老而從軍 遂詣薛氏曰 僕雖一懦夫 而嘗以志氣自許 願以不肖之身 代嚴君之役薛氏甚喜 入告於父 父引見曰 聞公欲代老人之行 不勝喜懼 思所以報之 若公不以愚陋見棄 願薦幼女子 以奉箕箒嘉實再拜曰 非敢望也 是所願焉

설씨녀는 율리 민가의 여자이다. 비록 한미한 가문의 세력없는 외로운 집이나 안색(얼굴모습)아 단정하고 뜻과 행실이 잘 닦여졌다. 보는 자들이 아름다움을 부러워하였으나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진평왕 때 그 아버지가 나이가 많았으나 정곡에서 나라를 지키는 차례에 해당하였다. 여자는 아버지가 쇠퇴하고 병이 들었기 때문에 차마 멀리 보낼 수 없었고, 또한 여자의 몸으로 대신 갈 수 없는 것을 한탄하며 공연히 스스로 근심하고 고민할 뿐이었었다. 사량부 소년 가실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그 기른 뜻이 곧은 남자였다. 일찍이 설씨를 좋아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설씨가 아버지의 늙음에도 군대에 가야함을 근심한다는 것을 들었다. 마침내 설씨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내가 비록 한 나약한 남자이나 일찍이 뜻과 기상으로서 스스로를 허여하였습니다. 원하건데 현명하지 못한 몸으로 엄군(아버지의 역을 대신하기를 원합니다.”했다. 설씨가 매우 기뻐하며 들어 가 아버지에게 알렸다. (설씨녀의)아버지가 인도하여 보고 말하기를 들으니 공이 노인의 감을 대신하고자한다 하니 기븜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보답할 바를 생각해 보았는데 만약 공이 (나의 딸이)어리석고 비루하다 여겨 버리지 않는다면 어린 딸을 주어 부인으로 섬기게 할 것을 원합니다.”했다. 가실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감히 바라지 못하지만 이는 원하던 바입니다.”했다.

 

於是嘉實退而請期 薛氏曰 婚姻人之大倫 不可以倉猝 妾旣以心許 有死無易 願君赴防 交代而歸 然後卜日成禮 未晩也乃取鏡分半 各執一片云 此所以爲信 後日當合之嘉實有一馬 謂薛氏曰 此天下良馬 後必有用 今我徒行 無人爲養 請留之 以爲用耳遂辭而行 會國有故 不使人交代 淹六年未還

이에 가실이 물러나 (혼인)기일을 청하니 설씨녀가 말하기를 혼인은 사람의 큰 윤리인데 갑자기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이 이미 삼음으로 허락하였으니 죽음이 있어도 바뀜이 없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그대가 수자리에 나가셨다가 교대하여 돌아 온 후 날을 점쳐 예를 이루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하고는 곧 거울을 가져다 반으로 나누어 각기 한 조각씩을 가지고 말하기를 이것으로서 밎음의 표시로 삼았다가 뒷날에 합쳐봅시다.”했다. 가실에게는 말 한 마리가 있었는데 설씨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는 천하의 좋은 말로 후에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걸어가서 기를 이가 없으니 남겨두는 것으로서 쓰임을 삼을 것을 청합니다.”하고는 마침내 하직하고 갔다.

 

會國有故 不使人交代 淹六年未還 父謂女曰 始以三年爲期 今旣踰矣 可歸于他族矣薛氏曰 向以安親 故强與嘉實約 嘉實信之 故從軍累年 飢寒辛苦 況迫賊境 手不釋兵 如近虎口 恒恐見咥 而棄信食言 豈人情乎 終不敢從父之命 請無復言其父老且耄 以其女壯而無伉儷 欲强嫁之 潛約婚於里人 旣定日引其人 薛氏固拒 密圖遁去而未果 至廐見嘉實所留馬 大息流淚 於是嘉實代來 形骸枯槁 衣裳藍縷 室人不知 謂爲別人 嘉實直前 以破鏡投之 薛氏得之呼泣 父及室人失喜 遂約異日相會 與之偕老

나라에 일이 있음을 만나 사람들로 하여금 교대시키지 못하고, 오래하여 6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딸에게 일러 말하기를 처음 3년을 기일로 삼았는데 지금 이미 넘겼다. 다른 집에 시집을 가야 할 것이다.”했다. 설씨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아버지를 편안히 하기 위하여 굳게 가실과 약속하였고, 가실이 그것을 믿고 종군한지가 여러 해로 주림과 추위로 괴로움을 당하였습니다. 하물며 적의 경계에 가까이하여 손에 무기를 놓지 못함이 마치 호랑이의 입을 가까이 한 듯 항상 깨물릴까 두려워 할 것인데 신의를 버리고 한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인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끝까지 아버지의 명을 따르지 않을 것이니 다시 말하지 말아 주실 것을 청합니다.”했다. 그 아버지는 늙고 또한 쇠퇴하였고, 그 딸이 장성하여도 짝이 없었기 때문에 억지로 시집보내려 하여 몰래 마을 사람에게 혼인을 약속하였다. 정해진 날에 그 사람을 인도하니 설씨가 굳게 거절하며 몰래 도망가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마굿간에 이르러 가실이 남긴 말을 보고 크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에 가실이 교대하고 오니 모습이 해골같이 말랐고, 옷이 남루하여 집안사람이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라 하였다. 가실이 바로 앞에서 깨진 거울을 던지니 설씨가 그것을 얻어 부르짖으며 울었다. 아버지와 집안사람들이 기뻐하여 어쩔줄 몰랐다. 마침내 다른 날을 약속하고 서로 만나 함께 늙었다.(해로하였다.)

 

都彌 百濟人也 雖編戶小民 而頗知義理 其妻美麗 亦有節行 爲時人所稱 蓋婁王聞之 召都彌與語曰 凡婦人之德 雖以貞潔爲先 若在幽昏無人之處 誘之以巧言 則能不動心者 鮮矣乎對曰 人之情 不可測也 而若臣之妻者 雖死無貳者也王欲試之 留都彌以事 使一近臣 假王衣服馬從 夜抵其家 使人先報王來

도미는 백제 사람이다. 비록 호적에 편입되 하찮은 백성이지만 자못 의리를 알았다. 그 아내가 아름답고 또 절개의 행실이 있어 그 때 사람들이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이 그것을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기를 무릇 부인의 덕은 비록 정조가 굳고 행실이 깨끗함을 우선으로 삼으나 만약 어둡고 사람이 없는 것에 있으면서 고욕로운 말로 그을 유인하면 곧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자가 적을 것이다.”했다. (도미가) 대답해 말하기를 사람의 정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신의 아내 같은 경우에는 비록 죽더라도 두마음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왕이 시험해보고자 하여 일으 ㄹ가지고 도미를 억류하고 한 가까운 신하를 시켜 가짜로 왕의 옷을 입게 하고 말을 타고 밤에 그 집에 이르게 하고, 사람을 시켜 먼저 왕이 왔다고 알리게 하였다.

 

謂其婦曰 我久聞爾好 與都彌博得之 來日入爾爲宮人 自此後 爾身吾所有也遂將亂之 婦曰 國王無妄語 吾敢不順 請大王先入室 吾更衣乃進退而雜餙一婢子薦之 王後知見欺 大怒 誣都彌以罪 矐其兩眸子 使人牽出之 置小船泛之河上 遂引其婦 强欲淫之 婦曰 今良人已失 單獨一身 不能自持 況爲王御 豈敢相違 今以月經 渾身汚穢 請俟他日 薰浴而後來王信而許之 婦便逃至江口 不能渡 呼天慟哭 忽見孤舟 隨波而至 乘至泉城島 遇其夫未死 掘草根以喫 遂與同舟 至高句麗䔉山之下 麗人哀之 丐以衣食 遂苟活 終於羈旅

그 부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오래동안 너의 좋음을 들었는데 도미와 바둑을 두어 얻었으니 내일 너를 들여 궁인을 삼을 것이다, 이후로부터 너의 몸은 나의 소유이다.”하고는 마침내 (몸을)어지럽히려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국왕은 망녕된 말을 않을 것이니 제가 감히 따르지 않으리오! 대왕께서 먼저 방에 들어가시면 제가 옷을 바꾸어 입고 나아가겠습니다.”하고는 물러나 한 여자 종을 번거롭게 꾸며서 올렸다. 왕이 후에 속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를 왕을 속인 죄로 두 눈동자를 빼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 작은 배에 태워 강 위에 뛰우게 했다. 마침내 그 부인을 이끌어 억지로 욕보이려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지금 낭군을 이미 잃었으니 홀로 남은 한 몸을 스스로 지탱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왕을 모시는 일이라면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지금은 월경 때문에 온 몸이 더러움에 물 들었으니 다른 말을 기다려 목욕한 후 오기를 청합니다.”했다. 왕이 믿고 허락하였다. 부인이 곧 도망하여 강 어귀에 이르렀으나 건널 수 없었다.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니 갑자기 작은 배가 보이고 파도를 따라 이르렀다. 타고 천성도에 이르러 죽지 않은 남편을 만나 풀뿌리를 캐어 먹었다. 마침내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 말산 아래 이르니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다. 옷과 음식을 구걸하며 구차히 살다가 나그네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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