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卷50, 列傳 第 10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 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列傳 第十 弓裔·甄萱 子神劒·龍劒·良劒·金剛·壻英規 附
열전 제10 궁예, 견훤 아들 신검·용검·양검·금강, 사위 영규 붙임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궁예는 신라 사람이다. 성은 김씨로 아버지는 제47대 헌안돵 의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빈어(후궁)인데 성과 이름을 잃어버렸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다.”했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 때 집 위에 흰 빛이 있었는데 긴 무지개 같았다. 일관이 아뢰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에 태어났고, 나면서 이빨이 있었으며 또한 빛나는 불꽃이 보통과 다르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기르지 마십시오.”했다. 왕이 궁중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가서 죽이게 했다. 사자가 포대기 안에서 (아기를) 빼앗아 누 아래로 던졌다. 유비(젖먹이는 종, 유모)가 몰래 받들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찔러 그 한 눈을 애꾸눈으로 만들고, 싸서 도망하여 힘들고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가 10여세에 놀며 장난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종이 알려 말하기를 “그대가 태어나면서 나라에 버림을 당하였는데 내가 차마 하지 못하여 몰래 길렀는데 오늘에 이르러 그대의 미친 듯 함이 이 같으니 반드시 사람들이 아는 바가 되어 나와 그대가 함께 (화를)면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하겠는가?”했다. 궁예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만약 그러하다면 곧 내가 떠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했다. 하고는 곧 세규사(지금의 흥교사가 이것이다.)로 가서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선종이라 불렀다.
及壯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嘗赴齋行次 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祕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羣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장성하면서 승려의 규율에 구속받지 않았고, 헌출하며 담력이 있었다. 일찍이 재를 지내러 가는데 가마귀가 물건을 물고 있다가 지니고 있던 바릿대 안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패에 왕 자가 쓰여 있었다. 곧 비밀로 하고 말하지 않고, 자못 자부심을 가졌다. 신라가 쇠퇴한 말기에 정치가 거칠어져 백성이 흩어지고, 왕기(수도 주변지역) 외의 주현에서는 반란에 붙는 자들이 서로 반이었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여러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처럼 모여드는 것을 보았다. 선종이 어지러움을 타고 무리를 모아 뜻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진성왕 즉위 5년 대순 2년 신해(891) 죽주 도적의 우두머리 기훤에게 의탁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고 오만하게 하고 예로 대우하지 않았다. 선종이 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하여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몰래 기훤의 부하인 원회, 신훤 등과 벗을 맺었다.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 委任以事 遂分兵 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 皆降之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盺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衆心畏愛 推爲將軍
경복 1년 임자(진성왕 6: 892) 북원의 도적 양길에게 의탁하였는데 양길이 잘 대우하고, 일을 맡겼다. 마침내 군대를 나누어 동쪽을 땅을 점령하게 하였다. 이에 지악산 석남사에서 묵고 가서 주천, 나(내)성, 울오, 어진, 등의 현을 습격하니 모두 항복하였다. 건녕 1년(진성왕 8: 894) 명주에 들어 갓는데 무리가 3500명이었다 14대로 나누고 금대, 검모, 흔장, 귀평, 장일 등을 사상으로 삼았다.(사상은 부장을 이른다.) 사졸과 함께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하였고, 주고 빼앗음에 이르러서고 공적으로 하고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무리의 마음이 두려워하고 아껴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았다.
於是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浿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이에 저족, 생천, 부약, 금성, 철원 등의 성을 쳤는데 군대가 내는 소리(군대의 세력)가 매우 성대하여 패서의 도적들로 와서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종이 스스로 무리가 커졌다 여기고 나라를 열고(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일컬으며 비로소 내외(내관과 외관)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가 송악군에서 와 의탁하니 곧 철원군 태수를 주었다.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건녕)3년 병진(진성왕 10: 896) 승령, 임강 두 현을 쳐서 빼앗았다. (건녕)4년 정사(진성왕 11: 897) 인물현이 항복하였다. 선종이 송악군은 한수 북쪽의 이름있는 군이고,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나다 하면서 마침내 도읍으로 정하였다. 공암, 검포, 혈구, 등의 성을 쳐서 깨트렸다. 그 때 양길은 아직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 등 30여성을 빼앗아 소유하였다. 선종이 땅이 많고 백성이 많다는 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20여 성의 날랜 군대로 치려하였다. 선종이 몰래 알고 먼저 쳐서 (양길의 군대를)크게 무너뜨렸다.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湌之職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광화 1년 무오(효공왕 2: 898) 봄 2월에 송악성을 수리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으로 삼아 양주, 견주를 쳤다. 겨울 11월 처음으로 팔관회를 베풀었다. 3년 경신(899) 또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 충주, 당성, 청주(혹은 청천이라 한다.), 괴양 등을 치게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공으로 태조에게 아찬의 직위를 주었다. 천복 1년 신유(901)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하였다.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과거 신라는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깨트렸다. 그러므로 평양 옛 도읍이 잡초로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했는데 대개 태어날 때 버림을 당하였던 것을 원망하였기 때문에 이런ㄴ 말을 한 것이다. 일찍이 남쪽을 순행(돌아보며)하며 흥주 부석사에 이르러 벽에 그림 신라 왕의 상(초상)을 보고 검을 뽑아 쳤다. 그 칼자국이 아직도 있다.
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 匡治奈(今侍中)·徐事(今侍郞)·外書(今員外郞)又置兵部·大龍部(今倉部)·壽春部(今禮部)·奉賓部(今禮賓省)·義刑臺(今刑部)·納貨府(今大府寺)·調位府(今三司)·內奉省(今都省)·禁書省(今秘書省)·南廂壇(今將作監)·水壇(今水部)·元鳳省(今翰林院)·飛龍省(今太僕寺)·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植貨府(掌栽植菓樹)·障繕府(掌修理城隍)·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천우 1년 갑자(904)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마진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다. 처음으로 광평성을 두고 관원을 갖추었는데 광치내(지금의 시중), 서사(지금의 시랑), 외서(지금의 원외랑)이다. 또 병부, 대룡부(지금의 창부), 수춘부(지금의 예부), 봉빈부(지금의 예빈성), 의형대(지금의 형부), 납화부(지금의 대부시), 조위부(지금의 삼사), 내봉성(지금의 도성), 금서성(지금의 비서성), 남상단(지금의 장작감), 수잔(지금의 수부), 원봉성(지금의 한림원), 비룡성(지금의 태복시), 물장성(지금의 소부감)을 두었다. 또 사대(여러 통역을 익히게 하는 일을 맡았다.), 식화부(과일나무를 심는 일을 맡았다.), 장선부(성과 해자를 수리하는 일을 맡았다.), 주도성(그릇을 만드는 일을 맡았다,)을 두었고, 또 정광, 원보, 대상, 원윤, 좌윤, 정조, 포윤, 군윤, 중윤 등의 관등을 설치하였다. 가을 7월 청주 사람 천 호를 옮겨 철원성에 들어가 서울로 삼았다.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甑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欲幷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상주 등 30여 주현을 쳐서 빼앗았다. 공주 장군 홍기가 와서 항복하였다. 천우 2년 을축(905) 새로운 서울에 들어 가 대궐과 누대를 수선하였는데 사치를 다하였다. (연호인)무태를 고쳐 성책 1년이라 하고, 패서 13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 장군 검용이 항복하였다. 증성의 붉은 옷과 누른 옷을 입은 도적 명귀 등이 복속해 오자 선종이 강성해졌다고 자만하여 (신라를) 병탄하고자 하여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신라를 멸도라 부르게 하고 무릇 신라에서 오는 자는 모두 죽였다.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湌將軍
주량(주전충이 세운 양나라:후량) 건화 1년 신미(911) (연호인)성책을 고쳐 수덕만세 1년이라 하고, 국호를 바꾸어 태봉이라 하였다. 태조를 보내 군대를 통솔하고 금 성 등을 치게하고, 금성을 나루라 하였다. 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 장군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以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湌侍中
선종이 스스로 미륵불이라 부르며 머리에 금책(금관)을 쓰고 몸에는 방포(가사)를 입었다. 장자를 청광보살이라 하고, 둘째를 신광보살이라 하였다. 나가면 곧 항상 흰말을 탔는데 그 갈기와 꼬리를 물들인 비단으로 꾸몄으며, 어린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로 하여금 번개(깃발과 일산), 향기나는 꽃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또 비구 200여 명에게 명하여 범패를 부르며 뒤를 따르게 하였다. 또 스스로 경전 20여권을 지었는 데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 경전의 일이 아니었다. 때에 따라 혹 바로 앉아 (불법을)강의하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스님 석총이 평하여 말하기를 “모두 사특한 말이고 괴이한 이야기로 가르침으로 삼을 수 없다.”했다. 선종이 그것을 듣고 노하여 철퇴로 때려서 죽였다. 3년 계유(913)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船將軍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4년 갑술(914) (연호인) 수덕만세를 고쳐 정개 1년이라 하였다. 태조를 백선장군으로 삼았다. 정명 1년(915) 부인 강씨가 왕이 잘못된 법을 많이 행하자 얼굴색을 바로하고 간하였다. 왕이 미워하여 말하기를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는 것은 어째서인가?”했다.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신과 통하여 그것을 본다.”하고는 뜨거운 불로 쇠 절구공이를 달구어(뜨겁게 하여) 그 음부(성기)를 쳐서 죽였다. 그 두 아들에게 있어서도 이후 의심을 많이 하고 노함을 급히 하였다. 여러 관료와 장수, 아전에서 아래로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죽음을 당하는 자가 있었다. 부양,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이기지 못하였다.(견디지 못하였다.)
先是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甆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畧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 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㪍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이에 앞서 상인 왕창근이라는 자가 있어 당나라에서 와 철원의 시장에서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 4년 무인(918) 시장 안에서 한 사람을 보니 모습이 걸출하게 크고 머리카락이 모두 흰색인데 옛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왼손에는 사기그릇을 들고 오른 손에는 옛 거울을 들고 있었다. 왕창근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의 거울을 사겠는가?”했다. 왕창근이 곧 쌀을 가지고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왕창근이 그 거울을 벽에 걸어두었다. 해가 거울 면에 비치자 작은 글자가 쓰여져 있었는데 그것을 읽어보니 옛 시와 같았다. 그 대략의 내용은 “상제께서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내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묶게 하였다. 뱀의 해 안에 두 용이 나타나니 하나는 몸을 청목 안에 감추고, 하나는 형상을 흑금의 동쪽에 걸었다.(나타날 것이다.)”했다. 왕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그것을 보고는 보통 일이 아니다 여겨 마침내 왕에게 알렸다. 왕이 유사(담당관청)에 명하여 왕창근과 그 거울의 주인을 찾게 하였으나 보이지 않고, 오직 발삽사 불당에 진성의 소상이 있는데 그 사람과 같았다.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 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湌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湌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湌亦必遭害” 迺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 震懼 不知所措
왕이 탄식하며 이상하게 여기기를 오래하다가 문인 송함홍, 백탁, 허원 등에게 명하여 풀게하였다. 송함홍 등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을 이르는 것이다. 두 용이 나타나 하나는 몸을 청목에 숨기고 하나는 형상을 흑금에 나타냈다는 것은 청목은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이다. 용을 이름으로 삼는 자의 후손은 지금 파진찬 시중을 말하는 것이다. 흑금은 쇠이니 지금 도읍한 철원을 이르는 것이다. 지금 임금이 처음 여기에서 흥기하고, 마지막에 여기에서 없어진다는 징허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묶는 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을 얻고 뒤에 압록을 거둔다는 뜻이다.”했다. 송함홍 등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학대하고 어지럽힘이 이 같으니 우리들이 만약 실제를 가지고 말한다면 우리들이 김치와 젓갈이 될 뿐만 아니라(갈기갈기 찟겨 죽을 뿐만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해침을 만나게 될 것이다.”하고는 이에 말을 꾸며서 고하였다. 왕이 왕이 흉하고 학대하며 함부로 하니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조치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此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 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여름 6월 장군 홍술, 백옥, 삼능산, 복사귀(이는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의 어릴 때 이름이다.) 네 사람이 몰래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가 말하기를 “지금 주상은 음란한 형벌을 마음대로 써서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신료를 목 베며 백성을 도탄에 빠트려 스스로 살게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옛날부터 어두운 이를 폐하고, 밝은 이를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큰 의리입니다. 공께서 탕임금과 무왕의 일을 행할 것을 청합니다.”했다. 태조가 얼굴색을 지으며(붉히며) 거절해 말하기를 “나는 충성하고 순수한 것으로서 스스로 허여하였다. 지금 비록 사납고 어지럽더라도 감히 두 마음을 둘 수 없다. 대저 신하가 임금을 바꾸는 것은 이를 혁명이라 말한다. 내가 실제 덕이 없는데 어찌 은나라, 주나라의 일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했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때는 두 번 오지 않습니다. 만나기는 어렵고 잃음은 쉽고, 하늘이 주는데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허물ㅇ르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러워 나라가 위태로워져 백성들이 모도 그 윗사람 째려보는 것이 원수와 같이 합니다. 지금의 덕망은 공보다 더할 이가 있지 않습니다. 하물며 왕창근이 얻은 바의 거울에 글이 그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독부(포학한 군주)의 손에 죽을 수 있겠습니까?”했다.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羣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태조의)부인 유씨가 여러 장수들의 말을 듣고 이에 태조에게 일러 말하기를 “인으로서 인하지 않음을 치는 것은 예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 의논을 들으니 첩(내가)이 오히려 분함을 일으키는데 하물며 대장부이겠습니까? 지금 여러 마음이 갑자기 변한 것은 천명이 돌아감이 있기 때문입니다.”하고는 손으로 갑옷을 가져다 태조에게 올렸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문을 나서며 길잡이로 하여금 앞에서 외쳐 말하게 하기를 “왕공이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들었다.”했다. 이에 앞, 뒤로 달려와 따라오는 자들이 그 수를 알지 못하였다. 또 먼저 궁성의 문에 이른 자들이 있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는 이가 또한 1만 여명이었다. 왕이 그것을 듣고 할 바를 알지 못하여 이에 미복(평상복)을 입고 도망해 산림으로 들어갔다가 부양의 백성들에게 해침을 당하였다. 궁예가 일어난 당나라 대순 2년(891)부터 주량 정명 4년(918)에 이르기까지 무릇 28년으로 없어졌다.
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씨인데 뒤에 견으로서 씨를 삼았다. 아버지는 아자개인데 농사를 지어 스스로 생활하였다. 후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 견훤이 태어나 어린 아기였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 갈고, 어머니는 그를 먹였다. 아이를 숲 아래에 두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이니 마을의 들은 자들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자람에 이르러 몸과 용모가 크고 우뚝하였으며 뜻과 기개가 크고 뛰어나 보통이 아니었다. 군대를 따라(군대에 들어 가) 서남해안을 지킬 나아갔을 때 창을 베고 적을 기다리니 그 용기가 항상 사졸에 앞섰다. 이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羣盜蜂起 於是萱竊有覦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 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 食邑二千戶
당나라 소종 경복 1년(892) 이 때는 신라 진성왕 재위 6년이다. (왕의)곁에서 총애받던 이들이 정권(인사권)을 잡고 농단하니 기강이 문란하도 해이해졌고, 기근이 더해지니 백성들이 떠돌아다니고 뭇 도적들이 벌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이 몰래 (분수가 아닌 것을)넘겨다보는 마음을 두고 무리들을 불러 모아 서울의 서남쪽 주현을 치니 이르는 곳마다 메아리처럼 호응하였다. 한 달 사이에 무리들이 5천 명에 이르자 마침내 무진주를 습격하고 스스로 왕이라 하였으나 아직 감히 공공연하게 왕을 일컬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 개국공 식읍 2천호라 했다.
是時 北原賊良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良吉職爲裨將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百濟開國金馬山 六百餘年 摠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이 때 북원의 도적 양길이 강성하여 궁예에게 스스로 들어 가 부하가 되었다. 견훤이 그것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다 완산주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견훤이 인심을 얻음을 기뻐하여 좌우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시초를 근원하여(살펴) 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난 후에 혁세(혁거세)가 왕성하게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한이 그것을 따라 흥기하였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에서 나라를 열어 600여년이 지난 총장 연간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보내 선병(수군) 13만으로 바다를 건너고, 신라의 김유신은 잃은 영토를 다시 찾기 위해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대와 합해 백제를 쳐서 없앴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을 세워서 의자왕의 묵은 분노를 씻지 않을 수 있겠는가?”했다. 마침내 스스로 후백제 왕이라 일컫고,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었다. 이 때가 당나라 광하 3년(900)이고 신라 효공왕 4년(900)이다.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太保 餘如故 天復元年 萱攻大耶城不下 開平四年 萱怒錦城投于弓裔 以步騎三千圍攻之 經旬不解 乾化二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 貞明四年戊寅 鐵圓京衆 心忽變 推戴 我太祖卽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湌閔郃稱賀 遂獻孔雀扇及地理山竹箭 又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사신을 보내 오월에 조공하니 오월왕이 답하는 관리를 보내 검교태위의 직을 덧붙여주고 나머지는 전과 같이하였다. 천복 1년(효공왕 5: 901)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 4년(910) 견훤이 금성이 궁예에게 들어 간 것에 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으로 둘러싸고 공격하여 10여일이 지나도 풀지 않았다. 건화 2년(912) 견훤과 궁예가 덕진포에서 싸웠다. 정명 4년 무인(918) 철원경의 무리들이 마음이 갑자기 변해 추대하여 우리 태조를 즉위시켰다. 견훤이 그것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합을 보내 축하하고, 공작선과 지리산 대나무 화살을 바쳤다. 또 사신을 보내 오월에 들어가 말을 바치니 오월 왕이 답하는 관리를 보내 중대부를 더해 주고, 나머지는 전과 같게 하였다.
六年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新羅王遣阿湌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出師 萱聞之 引退 萱與我太祖陽和而陰剋 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强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失利而歸 八月 遣使獻驄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确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6년(920)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통솔하여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대를 진례성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율을 보내 태조에게 도움을 청하게 했다. 태조가 군대를 출동하였다. 견훤이 그것을 듣자 (군대를)이끌고 물러났다. 견훤이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합하고, 속으로는 대립하였다. 동광 2년(924) 가을 7월 아들 수미강을 보내 대야와 문소 두 성의 병졸을 내어 조물성을 쳤는데 성의 사람들이 태조를 위해 굳게 지키고 또한 싸웠다. 수미강이 이로움을 잃자 돌아갔다. 8월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총마를 바쳤다. 3년(925) 겨울 10월 견훤이 3천의 기병을 통솔하여 조물성에 이르렀다. 태조가 또한 정예 군대를 데리고 와 승패를 겨루었다. 그 때 견훤의 군대가 매우 날쌔었으나 승부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임시로 화친하는 것으로서 그 군대를 늙게 하고자 하여 글을 보내 화의를 청하고, 당제인 왕신을 인질로 삼게 하였다. 견훤이 또한 생질 진호를 인질로 교환하였다.
十二月 攻取居昌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萱聞之 疑故殺 卽囚王信獄中 又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12월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았다. 사신을 보내 후당에 들어 가 번이라고 말하였다. 당나라가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제군사로 책봉하고, 앞의 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 백제왕에 의거하여 식읍 2천5백호로 하였다. 4년(926)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이 그것을 듣고 일부러 죽인 것으로 여겨 곧 왕신을 옥에 가두었다. 또 사람을 시켜 전년에 보냈던 총마를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웃으며 돌려주었다.
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品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於太祖 冬十月 太祖 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戕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천성 2년(927) 가을 9월 견훤이 근품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고, 나아가 고울부를 습격하여 신라의 서울 근처를 핍박하였다.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 태조가 군대를 내어 원조하였으나 견훤이 신라 서울에 들어갔다. 그 때 왕과 부인, 후궁들이 나와 포석정에서 놀면서 술을 두고 놀고 있다가 적(도적)이 이르자 낭패하여 할 바를 알지 못하여 부인과 함께 성 남쪽의 이궁으로 돌아갔다. 여러 시종, 신료, 궁녀, 악관(음악 연주자)이 모두 어지러운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견훤이 군대를 놓아 크게 노략질하게 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게하여 앞에 이르지 해치고(죽이고), 곧 궁중에 들어가 머물며 강제로 부인을 이끌어 어지럽혔다.(강간하였다.) 또 왕족인 김부를 이어 즉위하게 한 후 왕의 동생 효렴, 재상 영경 등을 포로로 하였다. 또 나라 창고의 진기한 보배와 병장기, (귀족의)자녀, 모든 장인 중인 중에 기술이 뛰어난 자 등은 스스로 따르게 하여 돌아갔다.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 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契丹使裟姑·麻咄等三十五人來聘 萱差將軍崔堅 伴送麻咄等 航海北行 遇風至唐登州 悉被戮死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으로 견훤을 공산 아래서 맞아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락, 신숭겸이 죽고, 여러 군사들이 무너져 달아났다. 태조가 겨우 몸만 면하였다. 견훤이 이김을 타고 대목군을 빼앗았다. 글안이 사고, 마돌 등 35인으로 하여금 와서 위문하였다. 견훤이 장군 최견 등을 보내 함께 마돌 등과 동반하여 보냈는데 항해하여 북쪽으로 가다 바람을 만나 당나라 등주에 이르렀는데 모두 도륙 당하여 죽었다.
時新羅君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 結好爲援 甄萱自有盜國心 恐太祖先之 是故 引兵入王都作惡 故十二月日寄書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用先着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皦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獻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그 때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이 쇠퇴한 말세에 부흥이 어렵다 여기고 우리 태조를 이끌어 우호를 맺고 구원될 것을 도모하였다. 견훤이 스스로 나라를 훔칠 마음이 있었는데 태조가 먼저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 때문에 군대를 이끌고 (신라)서울에 들어 가 악을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12월 몇 일에 태조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지난번에 국상 김웅렴 등이 족하(태조)를 불러 서울에 들어 간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함과 같으니 이는 종달새가 날개를 헤친 것을 보고 새매의 날개로 여긴 것이니 반드시 생령(백성)으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하고, 종묘와 사직을 언덕과 폐허로 만들 것이다. 내가 먼저 조적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월을 휘둘러 뭇 신하들에게 밝은 해와 같이 맹서하고 6부를 의와 풍조를 가지고 깨우쳤다. 뜻하지 않게 간신들은 도망하고 나라의 임금이 죽는 변고가 있어 마침내 경명왕의 외사촌 동생이고, 헌강왕의 외손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여 다시 위태로운 나라를 만들고, 잃은 입금을 있게 한 것이 이번에 있었던 일이다.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 ※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 曝骸於美理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歡好 共契鄰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그대는 충고를 살피지 않고 한갓 떠도는 말을 듣고 온갖 계책으로 틈을 엿보며, 여러 방향으로 침입하였으나 아직 저의 말머리를 보지 못하였고, 저의 소 털 하나도 뽑지 못하였소. 초겨울에 도두 색상이 성산의 군대에게 체포되었고 한 달이 안 되어 좌장 김락이 미리사 앞에서 처참히 죽었으며, 죽은 자도 많거니와 사로잡힌 자도 적지 않으니 강하고 약함이 이러하니 누가 이기고 누가 질지는 분명하여졌다. 목적하는 바는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어놓고 말에게 대동강의 물을 먹이는 것이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 사신 반상서가 와서 오월왕의 조칙을 전하였다. 그 글에 ‘경은 고려와 오래토록 화친하여 이웃 맹방으로 함께 약속할 줄 알고 있는데 요즈음 인질들이 죽음으로 인하여 드디어 화친의 옛 우호를 잃고 서로 영토를 침략하여 전쟁을 쉬지 않으니 지금 이 문제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 경의 본국에 다다르게 하고 또 고려에도 서신을 보냈으니 마땅히 서로 친하게 지내 영원토록 복을 누리라.’고 하였다.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 ※慮足下 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㕙獹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戒 無後悔之自貽
저는 의리에 충실하게 (신라)왕실을 높이고 마음속 깊이 큰 나라를 섬기고 있는데 (오월왕의)타이르는 조칙을 받고 곧 바로 이에 따르고자 한다. 항상 염려함은 그대가 싸움을 그만두려 하여도 그렇지 못하고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 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조칙을 베끼어 올리니 청컨대 유의하여 상세히 살펴보기를 바란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사냥개가 서로 피곤하여지면 마침내 남의 조롱을 받을 것이고, 큰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버티고 있는 것도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잘못을 크게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계를 받들어 후회를 자초하지 말도록 하라!”했다.
三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 班尙書所傳詔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叙事者 伏以華軺膚使 爰致制書 尺素好音 兼承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衽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於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焉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於交兵 足下始輕敵 以直前 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천성) 3년(928)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은 답서를 보냈다. 엎드려 오월국 통화사 상서 반씨가 전한 바의 조서 한 통과 아울러 그대의 사정을 서술한 긴 편지를 받았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중국 사신이 조서를 가지고 왔고, 흰 비단에 쓴 좋은 편지에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조서를 받들어 보니 비록 감격을 더하였으나 그대의 편지를 뜯어보고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이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제 뜻을 펴 전하려 한다. 나는 위로는 천명을 받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맡고, 천하를 다스릴 기회를 얻었다. 지난번에 삼한이 액운을 당하여 전국이 흉년으로 황폐해져 백성들이 많이 도적에 속하였고, 모든 농토는 농작물이 말라 붉은 땅이 되었다. 전쟁의 변고를 막고 나라의 재앙을 구제하기 바랐다. 이에 스스로 선린을 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수 천리의 농토가 편안히 농사지어지고, 7∼8년간 병졸이 쉴 수 있었다. 을유년(925) 10월에 이르러 문득 일을 일으켜 교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대는 처음 적을 가볍게 보고 직진하였으니 마치 사마귀가 수레를 막는 것과 같았고, 마침내 어려운 줄을 알고 용감히 퇴각하였으니 마치 모기가 산을 등진 것처럼 신중한 조처였다.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渝盟 神其殛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 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則我有大德於南人也 豈謂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 侵害於生民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姦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於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王 焚燒宮闕 葅醢卿士 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稛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獍梟
손을 모으고 말하기를 하늘을 두고 맹서하여 금일 후에는 길이 화목하게 지낼 것이며 진실로 혹 맹서를 어긴다면 신이 벌을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 또한 창을 씀을 멈추는 무를 숭상하며,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을 이루겠다고 기약하여 드디어 겹겹으로 포위한 것을 풀어주고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인질의 보냄을 사양하지 않아 오직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제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인데, 맹서하면서 바른 피가 마르기도 전에 음흉함이 다시 발작하여 벌과 전갈의 독을 생민에게 침해하며, 이리와 호랑이의 광기가 서울 근처를 가로막아 금성이 급박하여지고, 어가가 놀라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의리를 지켜 주나라(여기서는 신라를 지칭)를 높임이 누가 환공, 문공의 패업과 비슷하겠습니까? 틈을 타서 한나라 전복을 도모한 사람으로 오직 왕망과 동탁의 간사함을 볼 뿐입니다. 왕의 지존한 분으로 하여금 굽혀 그대에게 자식으로 칭하게 하여, 높고 낮은 상하의 질서를 잃어버리게 하였습니다. [신라의] 상하가 함께 걱정하기를 큰 보필자의 충순함이 있지 않으면 어찌 사직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마음에 악을 숨기지 않았고, 뜻이 왕을 높임에 간절하다고 하여 장차 조정에 끌어들여 나라의 위태로움을 붙들게 한 것이다.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보기 위하여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임금을 목 베고 궁궐을 불질렀으며, 신료들을 죽여 젖을 담고, 관료와 백성을 도륙하였으며, 종실의 여자를 취하여 같은 수레에 태우고 보물을 바리에 실어갔으니 큰 죄악은 걸왕 주왕보다 더하고, 불인함은 제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보다 심하다.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誓效鷹鸇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擊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邠於海岸 積甲如山 擒鄒造於城邊伏尸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城邊 戮隨䎸於纛下 拔任存之日 邢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州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歸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泜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功 竟息風波 求淸寰海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戢難於靑丘 旣奉訓謀 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旨 悉戢凶機 不惟副上國之仁恩 抑可紹海東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
내가 왕의 죽음에 대한 지극한 원한과 해를 돌리려는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사냥함을 본받고, 견마의 부지런함을 바치기로 참으로 길이 서약했습니다. 다시 방패와 창을 들은 후 느티나무와 버들잎이 두 번 바뀌는 사이에 육지의 공격에서는 우뢰같이 달리고 번개같이 공격하였고, 수전의 공격에서는 호랑이가 뛰고 용이 날 듯하여, 움직였다하면 반드시 공을 이루었고, 활을 들었다 하면 빗나감이 없었습니다. 해안에서 윤빈을 쫓을 때에는 빼앗은 갑옷이 산처럼 쌓였고, 성 언저리에서 추조를 사로잡을 때에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으며, 연산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 앞에서 길환을 목 베었고 마리성 언저리에서 수오를 군기 앞에서 죽였으며, 임존성을 함락하던 날 형적 등 수백 명의 목숨이 버려졌고, 청주를 격파할 때에는 직심 등 네, 다섯 명이 머리를 바쳤으며 , 동수 부근서는 깃발을 바라다보고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에서 입에 구슬을 물고 투항하였고, 강주의 경우 남쪽에서 귀부하였고 수복할 날이 어찌 멀겠습니까? 반드시 지수 의 군영에서 장이의 천 갈래 원한을 씻고, 오강 가에서 한왕이 한 번 크게 이긴 공을 이루어 마침내 전쟁을 종식하고 천하를 길이 맑게 하기를 기약하는 바이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운명이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하물며 오월왕 전하의 덕이 넉넉하여 먼 곳까지 포용하며, 어짊이 깊어 작은 나라를 사랑하여 궁성[丹禁] ※에서 조서를 내어 청구(靑丘)의 난리를 그치라고 타일렀고, 이미 가르침을 받들었으니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공경스럽게 조서의 뜻을 받들어 흉한 마음을 거둔다면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해동의 끊어진 계통을 이을 수 있지만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
夏五月萱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秋八月 萱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拔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
여름 5월에 견훤이 몰래 군사를 보내 강주를 습격하여 3백여 인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이 항복하였다. 가을 8월에 견훤이 장군 관흔에게 명하여 무리를 거느려 양산에 성을 쌓게 하니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 왕충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자 물러나 대야성을 지켰다. 겨울 11월에 견훤이 굳센 군사를 뽑아 부곡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지키던 군사 1천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양지와 명식 등이 항복하였다.
四年秋七月 萱以甲兵五千人 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萱大擧兵 次古昌郡甁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萱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萱虜百姓 移入全州 太祖以元逢 前有功宥之 改順州 號下枝縣
(천성) 4년(929) 가을 7월에 견훤이 갑옷 입은 군사 5천 명으로 의성부를 공격하여 성주 장군 홍술이 전사하였다. 태조가 통곡하면서 “나는 좌우의 손을 잃었다.”라고 하였다. 견훤이 대군을 출동시켜 고창군의 병산 아래에 머물면서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여 전사자가 8천여 명이나 되었다. 다음 날 견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을 습격하니 장군 원봉이 막아내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밤에 달아 났다.견훤이 백성을 포로로 잡아 전주로 데리고 갔다. 태조는 원봉이 이전에 세운 공을 고려하여 용서하여 주고, 순주를 개칭하여 하지현(下枝縣)으로 불렀다.
長興三年 甄萱臣龔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收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湌相貴 以舡兵入高麗禮成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淸泰元年春正月 萱聞 太祖屯運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者 ※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
장흥 3년(932) 견훤의 신하 공직은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항복하자 견훤이 공직의 두 아들과 한 딸을 거두어 다리의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 가을 9월에 견훤이 일길찬 상귀를 보내 수병으로 고려 예성강에 들어가 3일을 머무르면서 염주, 백주, 정주 삼 주의 선박 100척을 불태우고 저산도에서 기르는 말 300필을 잡아갔다. 청태 원년(934) 봄 정월에 견훤이 태조가 운주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이르니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장군 유금필이 굳센 기병 수천 명으로 돌격하여 3천 명을 목 베거나 포로로 잡았다. 웅진 이북 30여 성이 소문만 듣고 스스로 항복하니 견훤의 휘하 술사 종훈, 의사 훈겸, 용감한 장수 상달과 최필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湌能奐 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陰謀 至淸泰二年春三月 與波珍湌新德·英順等 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大赦境內
견훤은 아내를 많이 취하여 아들 10여 사람이 있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아 견훤이 특별히 사랑해 그에게 왕위를 전해주려고 하였다. 그의 형 신검, 양검, 용검 등이 알고서 걱정과 번민을 하였다. 당시 양검은 강주도독, 용검은 무주도독으로 나가 있었고, 신검만이 왕의 옆에 있었다. 이찬 능환(能奐)이 사람을 강주, 무주에 보내 양검 등과 더불어 몰래 모의하였고, 청태 2년(935) 봄 3월에 이르러 파진찬 신덕·영순 등이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살해하였다. 신검이 대왕을 자칭하면서, 국내에 대 사면령을 내렸다.
其敎書曰 『如意特蒙寵愛 惠帝得以爲君 建成濫處元良 太宗作而卽位 天命不易 神器有歸 恭惟 大王神武超倫 英謀冠古 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 廓淸塗炭 而黎元安集 鼓舞風雷 而邇遐駿奔 功業幾於重興 智慮忽其一失 幼子鍾愛 姦臣弄權 導大君於晉惠之昏 陷慈父於獻公之惑 擬以大寶授之頑童 所幸者上帝降衷 君子改過 命我元子 尹玆一邦 顧非震長之才 豈有臨君之智 兢兢慄慄 若蹈冰淵 宜推不次之恩 以示惟新之政 可大赦境內 限淸泰二年十月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大辟已下 罪咸赦除之 主者施行』
그 교서는 다음과 같다. “여의가 특별히 총애를 입었으나 혜제가 임금이 될 수 있었고 외람되이 세자의 위치를 차지하였으나 태종이 일어나 즉위하였으니, 천명은 바꿀 수 없고 임금자리는 돌아갈 곳이 있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왕의 신령스런 무예는 뭇 사람을 훨씬 뛰어 넘었으며, 영특한 꾀는 옛날에 비추어도 우뚝하였다. 쇠퇴기에 태어나 세상을 다스림을 자임하고 삼한 땅을 순회하여 백제를 부흥하고 도탄을 제거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하였으므로 즐거워 북치고 춤추는 것이 바람과 번개처럼 나타났고, 멀리와 가까이에서 발 빠르게 달려와 이룬 업적이 거의 중흥에 이르렀다. 지혜롭고 사려가 깊었으나 문득 한번 실수하여 어린 아들을 편애하고 간신들이 권력을 조롱하고 대왕을 진(晉)나라 혜제의 어두움으로 인도하여 어진 아버지를 헌공의 의혹에 빠지게 하여 왕위를 어리석은 아이에게 거의 줄 뻔하였는데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 진실한 마음을 내리시어 군자에게 허물을 고치게 하시고 맏아들인 나에게 명하여 이 한 나라를 다스리게 하셨다. 돌아다보건대, 나는 뛰어난 재목이 아니니 어찌 임금에 앉을 지혜가 있으리오마는 조심하고 조심하여 마치 얼음이 언 연못을 밟고 건너는 듯하다.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실시하여 새로운 정치를 펼쳐 보이고자 국내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청태 2년(935) 시월 17일 새벽을 시점으로 하여 이미 발각된 일이나 아직 발각되지 않은 일, 그리고 이미 처분된 것이나 처분되지 않은 것이나 큰 죄 이하의 모든 죄는 다 용서하여 사면하니 맡은 자는 이대로 시행하라!” 했다.
萱在金山三朔 六月 與季男能乂·女子哀福·嬖妾姑比等逃奔錦城 遣人請見於太祖 太祖喜 遣將軍黔弼·萬歲等 由水路勞來之 及至 待以厚禮 以萱十年之長 尊爲尙父 授館以南宮 位在百官之上 賜楊州爲食邑 兼賜金帛蕃縟·奴婢各四十口·內廐馬十匹
견훤이 금산에 있은 지 3개월 만인 6월에 막내아들 능예, 딸 애복, 총애하는 첩 고비 등과 더불어 금성으로 도주하여 사람을 시켜 태조에게 만나기를 청하니 태조가 기뻐하여 장군 유금필, 만세 등을 보내 수로를 거쳐 가서 위로하고 도착함에 이르러 두터운 예로서 대접하였다. 견훤이 10년 연장자라 하여 그를 높여 상보(尙父)로 삼고 남쪽 궁궐을 주어 유숙하게 하였다. 지위는 백관의 최상위로 하였다. 양주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과 비단, 장식품, 노와 비 각각 40구, 내구마 10필을 주었다.
甄萱壻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以家人之禍 失地投於高麗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勤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盍致書以安慰我王 兼殷勤於王公 以圖將來之福乎?” 其妻曰 “子之言是吾意也”
견훤의 사위 장군영규가 그의 부인에게 은밀히 말하였다.“대왕께서 부지런히 힘쓴 지 40여 년에 공들인 업적이 거의 이루어졌는데 하루아침에 집안사람의 화로 인하여 땅을 잃고 고려에 투항하였다. 대저 정숙한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는데 만약 자기의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을 섬긴다면 무슨 얼굴로 천하의 의로운 사람들을 볼 수 있겠는가? 하물며 고려의 왕공께서는 마음이 어질고 후하며 근면하고 검소하여 민심을 얻었다고 듣고 있으니 이는 아마 하늘이 인도하여 도와주는 것으로서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니 편지를 보내 우리 왕을 문안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에게도 겸손하고 정중함을 보여 장래의 복을 어찌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했다. 그 아내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곧 내 뜻과 꼭 부합합니다.” 하였다.
於是 天福元年二月 遣人致意 遂告太祖曰 “若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太祖大喜 厚賜其使者而遣之 兼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則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姉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言”
이에 천복 1년(936) 2월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뜻을 고하기를 “만약 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청컨대 내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 하니,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그 사신에게 후하게 물건을 주어 보내고, 겸하여 영규에게 사례하면서 말하였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합쳐지고 도로의 막힘이 없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그런 후에 당에 올라 부인을 배알하고 형으로 섬기고 누이처럼 높이겠으며, 반드시 끝내 두터이 보답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귀신이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입니다.” 했다.
夏六月 萱告曰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則臣雖死無憾” 太祖從之
여름 6월에 견훤이 아뢰었다. “늙은 이 신하가 전하에게 몸을 바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려 반역한 자식을 목 베기를 바라서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신령스러운 군사를 빌려주어 그 난신적자를 없애주신다면 신은 비록 죽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태조가 이에 따랐다.
先遣太子武·將軍述希 領步騎一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 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陣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將軍王順·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大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百濟將帥所在
먼저 태자 무와 장군 박술희를 보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나가게 하고, 가을 9월에 태조가 삼군을 통솔하고 천안에 이르러 군사를 합쳐 일선으로 진군하였다. 신검이 군사로 막았다. 갑오일에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맞서 진을 쳤는데 태조와 상보 견훤이 군사를 사열하고, 대상 견권, 박술희, 금산, 장군 용길, 기언 등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좌익되었고, 대상 김철, 홍유, 수향, 장군 왕순, 준량 등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우익이 되었다. 대광 순식, 대상 긍준, 왕겸, 왕예, 금필, 장군 정순, 종희 등으로 하여금 철기 2만과 보병 3천 및 흑수, 철리 여러 도의 날랜 기병 9천5백 명은 중군이 되었다. 대장군 공훤, 장군 왕함윤이 군사 1만 5천 명을 인솔하고 선봉이 되어 북을 치며 진격하니 백제 장군 효봉, 덕술, 명길 등이 군세가 대단하고 정비된 것을 보고 갑옷을 버리고 진 앞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태조가 위로하고 백제 장수가 있는 곳을 물었다.
孝奉等曰 “元帥神劒 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 直擣中軍 一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神劒與二弟及將軍富達·小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孥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一云三兄弟 皆伏誅)
효봉 등이 말하기를 “원수 신검은 중군에 있습니다.”했다. 태조가 장군 공원에게 명하여 곧 바로 중군을 치게 하니 전군이 일제히 진격하여 협공하니 백제 군대가 무너져 도망하였다. 신검과 두 동생, 장군 부달, 소달, 등환 등 40여 명이 살아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항복을 받고, 능환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위로하고 처자식과 함께 서울에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능환에게 물어 말하기를 “처음 양검 등과 비밀리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가 꾀한 것이다. 신하된 위리로 마땅히 이 같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능환이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목을 베어 죽이게 했다. 신검이 왕위를 훔친 것은 다른 사람의 위협을 받은 때문으로 그 본래의 마음이 아니었고, 또한 목숨을 바쳐 죄를 청하였기 때문에 특히 그 죽음을 면제하였다.(또는 3형제가 모두 목 베어졌다 하기도 한다.)
甄萱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故州縣案堵 老幼皆呼萬歲 於是存問將士 量材任用 小民各安其所業 謂神劒之罪 如前所言 乃賜官位 其二弟與能奐罪同 遂流於眞州 尋殺之 謂英規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藉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仍許職左丞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二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晉天福元年 共四十五年而滅
견훤이 근심하고 번민하다 등창이 생겨 몇 일만에 황산의 절에서 죽었다 태조가 군령을 엄하게 밝혀 사졸들이 추호도 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와 현이 안심하고 늙은이에서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에 (백제의)장군과 병졸들을 위문하고 재능을 헤아려 등용하였다. 백성들이 각기 편안히 그 종사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하여 관등을 내렸다. 두 동생과 능환은 죄가 같았기 때문에 마침내 진주오 유배하였다가 죽였다. (태조가)영규에게 이르기를 “전 왕이 나라를 잃은 후 그 신하로 한 사람도 위로하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경의 부부만은 천리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고, 견하여 과인에게 귀부하였으니 그 의로움을 잊을 수 없다.”하고는 좌승의 직을 주고, 밭 1천 경을 내려주었다. 역마 25필을 빌리는 것을 허락하여 집안사람을 맞이하게 하였다. 그의 두 아들에게는 관직을 내렸다. 견훤이 당나라 경복 1년(892)에 일어나 (후)진 천복 1년(935)에 이르기까지 모두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甚矣 甄萱 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 若禽獼而草薙之 實天下之元惡大憝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
논하여 말한다.“신라의 운수가 다하고 도를 잃어 하늘이 돕는 바가 없고, 백성이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에 여러 도적이 틈을 타고 일어나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그 중에 심한 자가 궁예, 견훤 두 사람이었을 뿐이다. 궁에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 종주국을 배반하고 원수로 삼아 해치고 없앨 것을 도모하여 선조의 화상을 벰에 이르렀으니 그 인한지 않음이 심하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에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재앙의 마음을 품었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다행으로 여겨 서울과 마을을 침략하고, 임금과 신하를 죽이기를 마치 새를 사냥하고 풀을 베듯이 무차별로 죽였으니 실로 천하의 큰 악의 우두머리이다. 그러므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을 당하였고, 견훤은 그 아들에게 재앙을 낳게하였으니(재앙을 받았으니) 모두 스스로 그것을 취한 것이니 또한 누구를 허물하리오. 비록 항우와 이밀의 뛰어난 재능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흥기를 대적할 수 없었다. 하물며 궁예와 견훤 같은 흉한 사람이 어찌 우리 태조와 서로 대항할 수 있으리오! 단지 백성을 몰아 준 자 일 뿐이다.”
叅考 寶文閣修校 文林郞 禮賓丞同正 臣 金 永溫·叅考 西材場判官 儒林郞 尙衣直長同正 臣 崔 祐甫·叅考 文林郞 國學學諭 禮賓丞同正 臣 李 黃中·叅考 儒林郞 前國學學正 臣 朴 東柱·叅考 儒林郞 金吾衛錄事叅軍事 臣 徐 安貞·叅考 文林郞 守宮署令兼直史館 臣 許 洪材·叅考 將仕郞 分司司宰注簿 臣 李 溫文·叅考 文林郞 試掌冶 ※署令兼寶文閣校勘 臣 崔 山甫·編修 輸忠定難靖國 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守太保 門下侍中 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 富軾·同管句 內侍 寶文閣校勘 將仕郞 尙食直長同正 臣 金 忠孝·管句 右承宣 尙書工部侍郞 翰林侍講學士 知制誥 臣 鄭 襲明
편찬자 명단
참고 보문각수교 문림랑 예빈승동정 신 김 영온
참고 서재장판관 유림랑 상의직장동정 신 최 우보
참고 문림랑 국학학유 예빈승동정 신 이 황중
참고 유림랑 전국학학정 신 박 동주
참고 유림랑 금오위록사참군사 신 서 안정
참고 문림랑 수궁서령겸직사관 신 허 홍재
참고 장사랑 분사사재주부 신 이 온문
참고 문림랑 시장야서령겸보문각교감 신 최 산보
편수 수충정난정국 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치사 신 김 부식
동관구 내시 보문각교감 장사랑 상식직장동정 신 김 충효
관구 우승선 상서공부시랑 한림시강학사 지제고 신 정 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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