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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최치원 열전

by 최인표 2024. 2. 15.

崔致遠 字孤雲(或云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 不知其世系 致遠少 精敏好學 至年十二 將隨海舶入唐求學 其父謂曰 十年不第 卽非吾子也 行矣勉之致遠至唐追師 學問無怠 乾符元年甲午 禮部侍郞裴瓚下 一擧及第 調授宣州溧水縣尉 考績爲承務郞侍御史內供奉 賜紫金魚袋

최치원은 자가 고운(혹은 해운이라 한다.)으로 왕경(서울:경주) 사량부 사람이다. 역사서의 전이 없어져 그 세계를 알지 못한다. 최치원은 어려서 정민하고(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장차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 가 배움을 구하려 하였다. 그 아버지가 일러 말하기를 “10년만에 급제하지 못하면 곧 내 아들이 아니다. 힘써 공부하라.”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이르러 스승을 따라 배우고 묻기를 게을리 하하지 않았다. 건부 1(경문왕14, 874) 예부시랑 배찬의 아래에서 한 번에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 율수현 위에 임명되고, 공적을 평가하여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 되고 자금어대를 내렸다.

 

時黃巢叛 高騈爲諸道行營兵馬都統以討之 辟致遠爲從事 以委書記之任 其表狀書啓 傳之至今 及年二十八歲 有歸寧之志 僖宗知之 光啓元年 使將詔書來聘 留爲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 致遠自以西學多所得 及來將行己志 而衰季多疑忌 不能容 出爲太山郡太守

그 때 황소가 배반하자(반란을 일으키자) 고변(고병)이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어 그를(황소를) 토벌할 때 최치원을 불러 종사로 삼아 서기의 일을 맡겼는데 그 표, , , 계가 지금(삼국사기가 쓰여지던 고려중기)까지 전해진다. 나이 28세에 이르러 고국에 돌아갈 뜻을 두었다. 희종이 그것을 알고 광계 1(헌강왕11, 885) 조서를 가지고 가서 방문하게 하였다. (헌강왕이) 붙들어두고 시독 겸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를 삼았다. 최치원이 서학(당나라에 들어 가 유학한) 이래로 얻은 바가 많아 가서 장차 자기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나라가 쇠퇴한 말기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못하고 나가 태산군(정읍시 칠보면)태수가 되었다.

 

唐昭宗景福二年 納旌節使兵部侍郞金處誨 沒於海 卽差橻城郡太守金峻爲告奏使 時致遠爲富城郡太守 祗召爲賀正使 以比歲饑荒 因之 盜賊交午 道梗不果行 其後致遠亦嘗奉使如唐 但不知其歲月耳

당나라 소종 경복 2(진성왕7, 893) 납정절사 병부시랑 김처회가 바다에 빠져 죽자 곧 추()성군(당진 면천면) 태수 김준을 차출하여 고주사로 삼았다. 그 때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충남 서산시)가 되었는데 마침 불러 하정사로 삼았다. 해마다 흉년이 들고 주리었다. 인하여 도적이 서로 횡횡하여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그 후 최치원이 또한 사신으로 당 나라에 갔으나 다만 그 해와 월을 알지 못한다.

 

故其文集有上太師侍中狀云 伏聞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魯 爲中國巨蠹 隋皇失馭 由於征遼 貞觀中 我唐太宗皇帝 親統六軍渡海 恭行天罰 高麗畏威請和 文皇受降廻蹕 此際我武烈大王 請以犬馬之誠 助定一方之難 入唐朝謁 自此而始 後以高麗·百濟 踵前造惡 武烈入朝請爲鄕導 至高宗皇帝顯慶五年 勅蘇定方 統十道强兵·樓舡萬隻 大破百濟 乃於其地 置扶餘都督府 招緝遺氓 蒞以漢官 以臭味不同 屢聞離叛 遂徙其人於河南 摠章元年 命英公徐勣 破高句麗 置安東都督府 至儀鳳三年 徙其人於河南·隴右 高句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爲渤海 開元二十年 怨恨天朝 將兵掩襲登州 殺刺史韋俊 於是 明皇帝大怒 命內史高品·何行成·太僕卿金思蘭 發兵過海攻討 仍就加我王金某 爲正太尉持節充寧海軍事雞林州大都督 以冬深雪厚 蕃·漢苦寒 勅命廻軍 至今三百餘年 一方無事 滄海晏然 此乃我武烈大王之功也 今某儒門末學 海外凡材 謬奉表章 來朝樂土 凡有誠懇 禮合披陳 伏見 元和十二年 本國王子金張廉 風飄至明州下岸 浙東某官 發送入京 中和二年 入朝使金直諒 爲叛臣作亂 道路不通 遂於楚州下岸 邐迤至楊州 得知聖駕幸蜀 高太尉差都頭張儉 監押送至西川 已前事例分明 伏乞太師侍中 俯降台恩 特賜水陸券牒 令所在供給舟舡 熟食及長行驢馬草料 幷差軍將 監送至駕前

그러므로 그 문집에 있는 상태사시중장에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동해의 밖에 세 나라가 있는데 그 이름이 마한, 변한, 진한이다. 마한은 곧 고구려이고, 변한은 곧 백제이고, 진한은 곧 신라이다. 고구려, 백제가 전성하였을 때 강한 군대가 백만으로 남쪽으로 오와 월을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의 연, , 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수나라 황제가 통제룰 잃었기 때문에 요동을 정벌하였고, 정관 중에 우리 당나라 태종황제가 직접 6군을 통솔하고 바다를 건너 공손히 하늘의 벌을 행하였습니다.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화의를 청하여 문황제(당 태종)가 항복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 즈음 우리 무열대왕이 견마의 정성으로 한 지방의 어려움을 평정할 도움을 청하여 당나라에 들어 가 조회하고 뵙는 것이 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고구려와 백제가 이전의 악행을 짓자 무열왕이 (담나라)조정에 들어 가 향도가 될 것을 청하였습니다. 고종황제 현경 5( 태종 무열왕 7: 660) 소정방에게 명하여 10도의 강한 군대와 누선 만 척을 통솔하고 크게 백제를 깨트리고 이에 그 땅에 부여도독부를 두고 도망한 농민을 불러 모아 중국의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으나 냄새와 맛이 서로 같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떠나고 배반하므로 마침내 그 사람들을 하남으로 옮겼습니다. 총장 1(문무왕 원년:668) 영공 서적(이적)에게 명하여 고구려을 깨트리고 안동도독부를 두었다가 의봉 3(678)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그 사람들을 하남, 농우로 옮겼습니다. 고구려의 잔당들이 모여 북쪽 태백산 아래를 근거지로 하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 불렀습니다. 개원 20(발해 무왕 14: 732) 천조(당 나라)를 원망하고 한스럽게 여겨 군대를 데리고 등주를 엄습하여 자사 위준을 죽였습니다. 이에 명황제께서 크게 노하여 내사 고품, 하행성, 태복경 김사란에게 명하여 군대를 일으켜 바다를 건너 쳐서 토벌하게 하였을 때 우리 왕 김모를 정태위 지절 충녕해군사 계림주 대도독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신라)과 한(당나라)이 추위에 괴로워하자 칙명으로 군대를 돌리게 하였습니다. 지금 300년이 지나 한 지방이 무사하고 창해가 편안하니 이는 곧 우리 무열대왕의 공입니다. 지금 저는 유문(유학)의 말학으로 해외의 평범한 재능인데 사리에 어긋나게 표장을 받들고 즐거운 나라에 조회한 것은 진실로 간청할 것이 있어서 예에 부합되게 진술하려합니다. 엎드려 살펴 보건데 원화 12(헌덕왕 9: 817) 본국(신라)의 왕자 김장렴이 태풍을 만나 명주 바닷가에 이르러 내렸을 때 절동의 모 관리가 호송하여 서울에 들어갔고, 중화 2( (헌강왕 8: 882) 입조사 김직량이 (중국의)배반한 신하가 란을 지으니 도로가 통하지 않아 마침내 초주 해안에서 배를 내려 구불구불 돌아 양주에 이르러 황제가 촉 땅으로 행차하였음을 알 수 있었는데 고태위가 도두 장검을 보내 호송하여 서천에 이르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으니 이전의 사례가 분명합니다. 엎드려 태사 시중께 청하건데 굽어 큰 은혜를 내려 특별히 수륙의 군첩(통행증)을 내려주시고 지방의 관서로 하여금 배와 익은 음식, 긴 여행에 필요한 말과 말먹이 풀을 공급하게 하시고, 아울러 군대의 장수를 보내 호송하여 황제의 수레 앞에 이를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했다.

 

此所謂太師侍中 姓名亦不可知也 致遠自西事大唐 東歸故國 皆遭亂世 屯邅蹇連 動輒得咎 自傷不偶 無復仕進意 逍遙自放 山林之下·江海之濱 營臺榭植松竹 枕藉書史 嘯詠風月 若慶州南山·剛州氷山·陜州淸涼寺·智異山雙溪寺·合浦縣別墅 此皆遊焉之所 最後 帶家隱伽耶山海印寺 與母兄浮圖賢俊及定玄師 結爲道友 棲遲偃仰 以終老焉

여기의 이른 바 태사 시중의 성과 이름은 또한 알지 못한다. 최치원이 서쪽에서 대당을 섬기고 동쪽으로 고국에 돌아 왔는데 모두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머뭇거리고 발이 묶여 움직이면 문득 허물을 얻으니 스스로 (때를)만나지 못함을 서글퍼하여 다시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다. 마음 내키는대로 돌아다니며 스스로 방랑하여 산림, ,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 대나무를 심었으며 책을 베개로 삼아 읽고 시를 읊조렸다. 경주 남산, 강주 빙산, 합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 별서는 모두 노닐던 장소였다. 마지막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모형인 스님 현준, 정현 스님과 도우를 맺고 조용히 살다가 늙어 죽었다.

 

始西遊時 與江東詩人羅隱相知 隱負才自高 不輕許可人 示致遠所製歌詩五軸 又與同年顧雲友善 將歸 顧雲以詩送別 略曰 我聞海上三金鼈 金鼈頭戴山高高 山之上兮 珠宮貝闕黃金殿 山之下兮 千里萬里之洪濤 傍邊一點雞林碧 鼈山孕秀生奇特 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新唐書藝文志云 崔致遠四六集一卷·桂苑筆耕二十卷 注云 崔致遠高麗人 賓貢及第爲高騈從事其名聞上國如此 又有文集三十卷 行於世 初我太祖作興 致遠知非常人 必受命開國 因致書問 有雞林黃葉 鵠嶺靑松之句 其門人等 至國初來朝 仕至達官者非一 顯宗在位 爲致遠密贊祖業 功不可忘 下敎 贈內史令 至十四歲太平三年癸亥

二月 贈諡文昌侯

처음 서쪽(당나라)에서 노닐 때(유학할 때) 강동 시인 나은과 서로 알았다.(알고 지냈다.) 나은이 재주를 믿고 스스로를 높게 여겨 뛰어난 인물을 가벼이 여겨 허여하지 않았는데(인정하지 않았는데) 최치원에게 지은 바의 노래와 시 5축을 보여주었다. 또 같은 해에 과거 합격한 고운과 좋은 벗이었다. 장차 돌아가려할 때 고운이 시로서 송별하였는데 대략 내 들으니 바다 위에 금자라가 셋이 있는데, 금자라가 머리에 인 산이 높고 높도다. 산 위에 구슬과 보배와 황금으로 꾸민 궁전이 있고, 산 아래에는 천리만리 넓은 물결 옆에 한 점 계림이 푸르다. 자라 산이 빼어난 인재 잉태하여 기특한 이 낳았다. 12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은 중국을 감동시켰고, 18세에 글 싸움하는 곳에 나아가 한 화살로 금문책을 깨트렸다.”했다. 신당서예문지에 최치원은 사륙집1, 계원필경20권이 있다.”하고 주석에 최치원은 고려 사람인데 빈공과에 급제하고 고병의 종사관이 되었다.”했다. 그 이름이 상국(당나라)에 들림이 이와 같았다. 문집30권이 있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처음 우리 태조가 일어날 때 최치원은 (태조가)보통 사람이 아니어서 반드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열 것이라는 것을 알고 편지를 모내 문안하였는데 (그 글에) 有雞林黃葉(게림에는 누른 잎이 있고) 鵠嶺靑松(곡령에는 푸른 솔이 있다.) 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 문인(제자)들이 국초에 이르러 와서 조회하였는데 높은 벼슬에 이른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고려)현종이 왕위에 있을 때 최치원이 조상의 왕업을 몰래 도왔으니 그 공을 잊을 수 없다하여 명을 내려 내사령을 추증하였다. 14년 태평 3년 계해(실제는 태평 2년 임술(1022)) 2(실제는 5)에 이르러 문창후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삼국사기46, 열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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