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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비문

by 최인표 2024. 2. 27.

有唐新羅國故知異山雙谿寺敎諡眞鑒禪師碑銘幷序.

당나라 신라국 돌아가신 지리산 쌍계사 임금에게서 시호를 받은 진감선사 비의 명과 서

 

前西國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 奉敎撰幷書·篆額.

전 서국(당 나라)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고,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하인 최치원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비문을)짓고, 글씨를 쓰며, 전액을 썼다.

 

夫道不遠人, 人無異國. 是以, 東人之子, 爲釋爲儒, 必也西浮大洋, 重譯從學. 命寄刳木, 心懸寶洲, 虛往實歸, 先難後獲, 亦猶采玉者, 不憚崐丘之峻, 探珠者, 不辞驪壑之深. 遂得慧炬則光融五乘, 嘉肴則味飫六籍, 競使千門入善, 能令一國興仁. 而學者或謂, 身毒與闕里之說敎也, 分流異體, 圜鑿方枘, 互相矛楯, 守滯一隅. 嘗試論之, 說詩者, 不以文害辭, 不以辞害志. 禮所謂, “言豈一端而已, 夫各有所當.”

대저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도를 구하는 사람은 나라를 달리하지 않는다. 동쪽(신라) 사람의 자식으로 석(불교)을 배우거나 유학을 배우는 이들은 반드시 서쪽으로 큰 바다를 떠서 두 번의 통역(重譯)을 거쳐 학문을 따랐다. 목숨을 나무속을 파낸 통나무배에 의지하여 마음을 보배로운 땅에 걸고, 빈 것으로 갔다가 채워서 돌아왔으니 먼저는 어려웠으나 뒤는 얻었으니 또한 옥을 캐는 자는 곤륜산 언덕의 빼어나게 높음을 꺼리지 않고, 구슬(진주)을 더듬는 자는 검은 용이 있는 깊은 바다를 사양하지 않는다. 마침내 지혜의 횃불을 얻으면 그 빛이 오승에 융합하고, 맛있는 안주를 얻음에 비유하면 곧 六籍을 맛보아 배부른 것과 같으니 다투어 千門(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선에 들게 하니 한 나라에 인을 흥기시키게 할 수 있다. 배우는 자들이 혹 말하기를 신독(불교의 발생지)과 궐리(공자의고향, 유학)의 가르침을 말한 것이 흐름을 나누고, (본질)를 달리하며,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넣는 것이니 서로 모순되어 한 모퉁이를 지키고 머물 뿐이다.”했다. 일찍이 시험 삼아 그것을 논하여 보겠다. “시를 설명하는 자는 글자() 때문에 단어()를 해쳐서는 안 되고 단어() 때문에 (시인의)뜻을 해쳐서는 안된다..” 하였고, 예기에 이른 바(말하기를) “말이 어찌 한 가지 실마리일 뿐이겠는가? 대저 각기 마땅한 바가 있다.”는 것이다.

 

故廬峯慧遠, 著論謂, ‘如來之與周孔, 發致雖殊, 所歸一揆, 體極不兼應者, 物不能兼受故也.’ 沈約有云, “孔發其端, 釋窮其致.” 眞可謂識其大者, 始可與言至道矣. 至若佛語心法, 玄之又玄, 名不可名, 說無可說. 雖云得月, 指或坐忘, 終類係風, 影難行捕. 然陟遐自迩, 取譬何傷. 且尼父謂門弟子曰, “予欲無言, 天何言哉.” 則彼淨名之黙對文殊, 善逝之密傳迦葉, 不勞鼓舌, 能叶印心, 言天不[, ]此奚適而淂. 遠傳妙道, 廣耀吾鄕, 豈異人乎, 禪師是也.

그러므로 여산의 혜원은 논하는 글을 지어 이르기를 여래와 주공, 공자에 대해 드러낸 이치가 비록 다르나 돌아가는 바는 한 가지 이치이니 지극함을 체득한 이가 겸하여(함께) 가르치지 않는 것은 사물을 겸하여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하였다. 심약이 말하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드러냈었고, 석가는 그 이치를 다 하였다.(드러내었다.)” 하였다. 참으로 그 큰 것(요체를)을 안다고 말 할 수 있는 자라야 비로소 함께 지극한 도를 말할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과 마음의 법에 이르러서는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이름 하려하여도 이름 할 수 없고, 설명하려 하여도 설명할 수 없다. 비록 달을 얻었다 말할 지라도 손가락은 혹 잊어야 하니 끝내 바람을 잡는 것 같아 그림자를 잡는 것처럼 어렵다. 그러나 먼데 가는 것은 가까운 곳으로부터 한다. 비유를 취한다 한들 무엇이 해로우리오. 또한 공자께서 문제자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말이 없고자 한다. 하늘이 무슨 말씀을 하시겠는가?”하셨으니 곧 저 유마거사(淨名)이 문수보살에게 묵묵히(침묵으로) 대답하고, 부처님(善逝)이 비밀리에 가섭에게 전하여 북을 치고 말()을 하는(혀를 움직이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마음을 도장 찍듯이 화합할 수 있었으니 하늘이 말하지 않는다.’ 한 것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멀리 현묘한 도를 전해 널리 우리나라를 빛나게 한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선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禪師, 法諱慧昭, 俗姓崔氏. 其先漢族, 冠盖山東, 隋師征遼, 多沒驪貊, 有降志而爲遐甿者, 爰及聖唐, 囊括四郡, 今爲全州金馬人也. 父曰昌元, 在家有出家之行. 母顧氏, 嘗晝假寐, 夢一梵僧, 謂之曰, “吾願爲阿㜷(方言謂母之子.)” 因以瑠璃甖爲寄, 未幾娠禪師焉. 生而不啼, 迺夙挺銷聲息言之勝牙也. 旣齔從戲, 必燌葉爲香, 采花爲供. 或西嚮危坐, 移晷未嘗動容. 是知, 善本固百千劫前所栽植, 非可跂而及者.

선사는 법휘(법명)이 혜소(慧昭)이니 출가하기 전의 성은 최씨이다. 그 선조는 漢族으로 산동에서 높은 관직을 지낸 가문(산동에서 명망있는 가문)이었다. 수나라 군대가 요동을 정벌할 때 여맥(고구려)에게 많이 죽음을 당하였는데(사로잡히게 되었는데) 항복할 뜻이 있어서 변방(우리나라)의 백성이 된 자이다. 이에 훌륭한 당나라에 이르러 4(우리나라)을 망라하면서 지금의 전주 금마(익산)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는 창원으로 집에 있으면서도 출가 한 것처럼 수행하였다. 어머니는 고씨로 일찍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분의 단정하고 깨끗한 스님이 일어 말하기를 제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했다. 인하여 유리병을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사를 임신하였다. 나면서 울지 않으니 이에 음성을 흩어지고 말을 쉬는 빼어남을 일찍 드러낸 것이다. 나이가 7~8세가 되어서 놀 때에는 반드시 나뭇잎을 불살라 향으로 삼고, 꽃을 꺽어 공양하였으며, 혹은 서쪽을 향하여 바르게 앉아 일찍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가지고 선한 근본이 진실로 백천겁 앞서 심어진 것으로 힘써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自丱臮弁, 志切反哺, 跬步不忘, 而家無斗儲, 又無尺壤可盜天時者. 口腹之養, 惟力是視, 乃裨販娵隅, 爲贍滑甘之業, 手非勞於結網, 心已契於忘筌, 能豊啜菽之資, 允叶采蘭之詠. 曁種艱棘, 負土成墳, 迺曰, ‘鞠育之恩, 聊將力報, 希微之旨, 盍以心求. 吾豈匏瓜, 壯齡滯跡.’

어린아이서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부모의 은혜 갚는 뜻을 간절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고, 집에 조금의 저축도 없고, 또한 (농사를 지을 수 있는)한 자의 땅도 없었다. 입과 배를 봉양함에 오직 눈에 보이는 대로(힘닿는 대로) 힘썼다. 이에 생선 장사를 하여 맛있는 음식을 넉넉하게 할 산업으로 삼으니 손으로 그물을 짜는 수고를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통발을 잊음에 부합하였고, 풍성하게 콩죽을 마실 수 있는 것으로 부모를 봉양하였는데 진실로 부합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흙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 이에 말하기를 길러준 은혜를 애오라지 힘써 갚았으니 깊은 이치의 가르침을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않으리오. 내가 어찌 넝쿨에 매인 조롱박처럼 한창 나이로 자취에 얽매여 있을 것인가?’했다.

 

遂於貞元卄年, 詣歲貢使, 求爲榜人, 寓足西泛. 多能鄙事, 視險如夷, 揮楫慈航, 超截苦海. 及達彼岸, 告國使曰, “人各有志, 請從此辭.” 遂行至滄州, 謁神鑒大師, 投體方半, 大師怡然曰, “戲別匪遙, 喜再相遇.”遽令削染, 頓受印契, 若火沾燥艾·水注卑邍然. 徒中相謂曰, “東方聖人, 於此復見.” 禪師形貌黯然, 衆不名, 而目爲黑頭陀. 斯則, 探玄處黙, 眞爲漆道人後身, 豈比夫邑中之黔-能慰衆心而已哉. 永可與赤頿·靑眼, 以色相顯示矣.

마침내 정원 20(804, 애장왕 5) 세공사에게 나아가 뱃사공이 되어 발을 붙여 배를 타고 서쪽(당나라)으로 바다를 건너갔다. 비루한 일을 잘하고, 험한 것 보기를 평평한 듯이 하였고, 노를 저어 배를 운항하여 괴로운 바다를 뛰어넘었다. 피안(당나라 땅)에 이르자 國使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각기 뜻이 있으니 여기서 하직하기를 청합니다.”했다. 마침내 가서 창주에 이르러 신감대사를 뵙고, 오체투지를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웃으며 헤어진 것이 멀지 않은데 기쁘게 다시 서로 만났다.”하고는 대번에 머리를 깍고 물든 옷을 입게 하며(출가를 허락하였다.) 곧바로 印契를 받게 하였는데 마치 마른 쑥에 불을 붙인 듯하고, 물을 낮고 넓은 들판에 주입하는 것 같았다. 무리들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에서 다시 보는구나!”했다. 선사의 모습이 검었는데 무리들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라 하였다. 이는 곧 현묘함을 더듬어 구하고 고요히 처한 것이니 참으로 칠도인의 후신이다. 어찌 저 고을 중의 얼굴 검은 사람이 여러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준 것에 비할 뿐이겠는가. 길이 붉은 수염(불타야사), 푸른 눈(보리달마)과 함께 형상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보일 것이다.

 

元和五年, 受具於嵩山少林寺瑠璃壇, 則聖善前夢, 宛若合符. 旣瑩戒珠, 復歸橫海, 聞一知十, 茜絳藍靑. 雖止水澄心, 而斷雲浪跡. 有鄕僧道義, 先訪道於華夏, 邂逅適願, 西南得朋, 四遠參尋, 證佛知見. 義公前歸故國, 禪師卽入終南, 登萬仞之峯·餌松實, 而止觀寂寂, 三年, 後出紫閣, 當四達之道, 織芒屩, 而廣施憧憧, 又三年. 於是, 苦行旣已修, 他方亦已遊, 雖曰觀空, 豈能忘本. 乃於大和四年, 來㱕, 大覺上乘, 照我仁域.

원화 5(헌덕왕2, 810) 숭산 소림사 유리단에서 구족계를 받으니 자애로운 어머니가 앞서 꾼 꿈과 완연히 부합하였다. 계율의 구슬을 밝히고는 다시 학문의 길로 돌아 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 진홍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청색이 쪽보다 푸른 것과 같았다. 비록 마음이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고, 마음을 맑게 하였지만 조각구름처럼 정처 없이 떠돌았다. 고향 스님(鄕僧)으로 道義란 분이 있었는데 먼저 중국을 방문하여 도를 구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만나보니 (서로)원하는(구하는) 것이 맞았다.(일치하였다.) 서남쪽에서 벗을 얻어 사방으로 멀리 탐구하고 밝혀내어 부처님의 知見을 증명하였다. 도의 공이 앞서 고국으로 돌아가자 선사는 곧 종남산으로 들어 가 만 길의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씨앗을 먹을거리로 하여 고요히 명상하기를 3년을 한 후에 은거하였던 곳(紫閣)에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길에서 짚신을 짜 널리 베풀며 왔다 갔다 하기를 또한 3년을 하였다. 이에 고행이 이미 닦였고, 다른 나라를 이미 돌아보았으니 비록 을 보았으나 어찌 근본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태화 4(830, 830) 돌아오니 부처님(大覺)上乘의 가르침이 우리나라(仁域)를 비추게 되었다.

 

興德大王飛鳳筆, 迎勞曰, “道義禪師, 曏已歸止, 上人繼至, 爲二菩薩. 昔聞黑衣之傑, 今見縷褐之英, 彌天慈威, 擧國欣賴. 寡人行當, 以東雞林之境, 成吉祥之宅也.”始憩錫於尙州露岳長柏寺, 毉門多病, 來者如雲, 方丈雖寬, 物情自隘. 遂步至康州知異山, 有數於菟, 哮吼前導, 避危從坦, 不殊兪騎, 從者無所怖畏, 犬如也. 則與善无畏三藏結夏靈山, 猛獸前路, 深入山穴, 見牟尼立像, 宛同事跡. 彼竺曇猷之扣睡虎頭, 令聽經, 亦未專媺於僧史也. 因於花開谷, 故三法和尙蘭若遺基, 纂修堂宇, 儼若化成.

흥덕대왕이 교서를 보내 맞이하고 위로하며 말하기를 도의 선사가 지난번에 이미 돌아왔고, 스님이 이어 이르니 두 보살이 되었습니다. 옛날 검은 옷을 입은 호걸에 대해 들었는데, 지금 누더기를 입은 영웅을 보니 자애로운 위엄이 하늘에 가득하여 온 나라가 기쁘게 의지합니다. 과인이 장차 마땅히 동쪽 계림(신라) 땅을 가지고 길상의 집을 이루겠습니다.”했다. 처음 상주 노악 장백사(상주 남장사)에 주석하니 의원의 집에 병자가 많듯이 오는 자가 구름 같았다. 거처하는 곳이 비록 넓으나, 세상 사람의 심정으로는 스스로 좁다고 여겼다. 마침내 걸어서 강주 지리산에 이르렀는데 몇 마리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앞에서 인도하여 위태로운 곳은 피하고 평탄 한 곳을 따라가는데 말을 탄 것과 다르지 않았고, 따르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어 개를 기르는 것과 같았다. 곧 선무외삼장이 여름에 영산에서 안거를 지낼 때 맹수가 길을 앞서, 산 구멍에 깊이 들어 가 모니 입상(석가모니 입상)을 보니 완연히 일의 자취와 같았다. 그것은 축담유가 잠자는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려 ()경을 듣게 한 것 또한 승사(승전)의 유일한 아름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인하여 화개곡의 돌아가신 삼법화상이 지내시던 남은 절터에 당우(건물)를 지으니 훌륭하게 이루어졌다.

 

洎開城三年, 愍哀大王驟登寶位, 深託玄慈, 降璽書餽齋費, 而別求見願. 禪師曰, “在勤修善政, 何用願爲.” 使復于王, 聞之愧悟, 以禪師色空雙泯定惠俱圓, 降使賜號, 爲慧昭. 昭字, 避聖祖廟諱, 易之也. 仍貫籍于大皇龍寺, 徵詣京邑, 星使往復者, 交轡于路, 而岳立不移其志. 昔僧稠拒元魏之三召云, “在山行道, 不爽大通.” 棲幽養高, 異代同趣.

개성 3(838, 민애왕1) 민애대왕이 왕위에 갑자기 올라 깊은 자애에 깊이 의탁하여 교서를 내리고, 재를 지낼 때 소요되는 비용을 주며 따로 뵙기를 원한다고 청하였다. 선사가 말하기를 부지런히 선정을 닦음에 달려 있을 뿐, 만나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했다. 사자가 왕에게 복명하니 (왕이) 그것을 듣고 부끄러워하면서도 깨들음이 있어 선사로서 을 다 놓아버렸고, 를 모두 갖추어 원만히 하였다 여겨 사자를 보내 이름을 혜소라 하였다. 자는 성조(김인겸)의 묘휘를 피해 바꾼 것이다. 그대로 대황룡사에 승적을 두게 하고, 경읍(서울)으로 부르니 임금의 사자로 가고 돌아가는 자들의 고삐가 길에서 교대하였으나 산악 같이 서서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 승조가 원위의 부름을 3번 거절하고 말하기를 산에 있으면서 도를 닦아 큰 도에 어긋나지 않으려 합니다.”했다. 깊은 곳에 살면서 고상함을 기르는 것이 시대는 다르나 뜻은 같았다.

 

居數年, 請益者, 稻麻成列, 殆無錐地. 遂歷銓奇境, 得南嶺之麓, 爽塏居最, 經始禪廬, 却倚霞岑, 俯壓雲澗. 淸眼界者, 隔江遠岳, 爽耳根者, 迸石飛湍. 至如春谿花夏徑松, 秋壑月, 冬嶠, 四時變態, 萬象交光, 百籟和唫, 千巖競秀. 嘗遊西土者至止, 咸愕視謂, 遠公東林移歸海表, 蓮花世界, 非凡想可擬, 壺中別有天地, 則信也. 架竹引流, 環階四注, 始用玉泉爲牓. 屈指法胤, 則禪師乃曹溪之玄孫, 是用建六祖影堂, 彩飾粉墉, 廣資導誘, 經所謂, ‘爲悅衆生故, 綺錯繪衆像者也.

몇 년을 살자 이익을 청하는 자들이 나락과 벼처럼 열을 이루어 자못 송곳 꼿을 땅도 없었다. 마침내 기이한 장소를 차례로 둘러보다가 남쪽 재의 기슭이 높고 건조하여 살기에 으뜸이어서 비로소 선종의 집()을 경영하는데(짓는데) 뒤로는 안개 낀 봉우리를 의지하였고, 앞으로는 구름서린 골짜기를 굽어보았다. 눈을 서늘(시원)하게 하는 경계는 강 건너 멀리 있는 산이요, 귀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돌 틈에서 솟아나는 여울물소리였다. 더욱 봄 골짜기의 꽃, 여름 샛길의 소나무, 가을 구렁의 달, 겨울 높은 산의 눈처럼 네 계절에 따라 모습을 변화시키니 만 가지 형상이 교대로 빛나고, 온갖 소리가 서로 어울리며, 모든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서토(당 나라)에 노닌 자들이 이르면 모두 보고 놀라 이르기를 원공(혜원 스님) 스님의 동림을 바다 건너 옮겨왔다. 연화장세계는 평범한 사람이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천지가 있다.”한 것은 곧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대나무를 이어 물 흐름을 끌어 계단을 돌려 사방으로 대고는 비로소 옥천이라는 절 이름을 내 걸었다. 법윤(법계)을 손가락을 굽혀가며 헤아려보면 곧 선사는 바로 조계(6조 혜능)의 현손(5대 손)이다. 이에 6조의 영당을 세운 뒤 (6조의 영정을)채색하여 꾸미고 담장을 둘러(봉안하여) 자료를 널리 하여 (중생을)인도하고 유인하였다. 경전에 이른 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비단에 여러 모습을 섞어 그린다.”는 것이다.

 

大中四年正月九日詰旦, 告門人曰, “萬法皆空, 吾將行矣. 一心爲本, 汝等勉之. 無以塔藏形, 無以銘紀跡.” 言竟坐滅, 報年七十七, 積夏四十一. 于時, 天無纖雲, 風雷欻起, 虎狼號咽, 杉栝變衰. 俄而, 紫雲翳, 空中有彈指聲. 會葬者, 無不入耳. 則梁史載, 褚侍中翔嘗請沙門, 爲母疾祈福, 聞空中彈指, 聖感冥應, 豈誣也哉. 凡志於道者, 寄聲相吊, 未亡情者, 銜悲以泣, 天人痛悼, 斷可知矣. 靈函幽隧, 預使備具. 弟子法諒等 號奉色身, 不踰日, 而窆于東峯之冢, 遵遺命也.

대중 4(850, 문성왕12) 정월 9일 이른 아침 문인(제자)들에게 알려 말하기를 만 법이 모두 하니 나는 장차 가려한다. 한 마음(一心)을 근본 삼아 너희들은 힘쓰라. 탑을 만는 것으로서 형상(신체)을 보관함이 없게 하고, 명으로서 자취를 기록함이 없게 하라.”하는 말을 마치고 앉아서 돌아가시니 나이는 77세이고, 승려가 된지(법랍은)41년이었다. 이 때 하늘에는 잔 구름(한 조각구름)도 없는데, 바람과 우레가 갑자기 떨쳐 일어나며, 호랑이와 승냥이가 울부짖고, 삼나무와 노송나무가 변해 쇠하였다. 머지않아(조금 지난 후) 자줏빛 구름이 공중을 가리더니 공중에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있었다. 장례에 모인 자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었다. 나라 역사책에 시중 저상이 일찍이 사문(스님)을 청하여 병든 어머니를 위하여 복을 기도하게 하였더니 공중에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한 것이 실려 있는데 성스러운 감응이 은근하게 나타난 것으로 (스님의 장례 때 공중에서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났다는 것이)어찌 거짓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무릇 도에 뜻을 둔 자들이 소리 내어 서로 조문하였는데 (스님의)정을 잊지 못한 자들이 슬픔을 머금고 눈물을 흘렸으니 하늘과 사람이 비통하게 애도함을 단연코 알 수 있다. 시신을 모실 그릇과 무덤을 미리 준비하여 갖추게 하였다. 제자 법량 등이 울면서 시신을 받들어 날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의 무덤에 관을 넣었으니 남긴 명(유언)을 따른 것이다.

 

禪師, 性不散樸, 言不由機, 服煖縕黂, 食甘糠麧, 芧菽雜糅, 蔬佐無二. 貴達時至, 曾不異饌, 門人以墋腹進難, 則曰, “有心至此, 雖糲何害.” 尊卑耋, 接之如一, 每有王乘馹傳命, 遙祈法力, 則曰, “凡居王土而戴佛日者, 孰不傾心護念, 爲君貯福, 亦何必遠汚綸言於枯木朽株, 傳乘之飢不得齕·渴不得飮, 吁可念也.” 或有以胡香爲贈者, 則以瓦載煻灰, 不爲丸而焫, , “吾不識-是何臭, 虔心而已.” 復有以漢茗爲供者, 則以薪爨石釜, 不爲屑而煮之, , “吾不識-是何味, 濡腹而已.” 守眞忤俗, 皆此類也.

선사는 성품이 순박함을 흩어버리지 않았고, 말에 하면 기교를 따르지 않았으며(꾸며하지 않았으며), 옷은 베옷과 헌 솜옷도 따뜻하게 여겼고, 밥은 겨와 보리싸래기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밥을 먹으며 나물 반찬이 둘 가지가 없었다.(한 가지 뿐이었다.) 귀한 이가 도달하여 (밥 먹을)때에도 일찍이 반찬을 달리하지 않았다. 문인(제자)들이 거친 음식이라 올리기 어려워하면 곧 말하기를 비록 마음이 있어 여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겨라(거친 밥이라)할지라도 무엇이 나쁘겠는가?”했다. 높고 낮음, 늙은이 어린아이를 대접함이 같았다. 매번 왕의 사자가 역마를 타고 명을 전하여 멀리서 법력을 기원하면 곧 말하기를 왕토(왕의 땅)에 살면서 부처님의 광명(佛日)을 받들고 있는 자로 누가 마음을 기울여 늘 보호할 것을 생각하고 임금을 위해 복을 쌓지 않겠습니까? 또한 어찌 반드시 멀리서 마른 나무와 썩은 등걸(같은 저)에게 임금의 명(綸言)을 더럽히려 하십니까? 왕명을 전하는 이들이 주려도 먹지 못하고, 목이 말라도 마실 수 없는 것을 근심합니다.”했다. 혹 외국의 향(胡香)을 선물한 이가 있었는데 곧 질 그릇에 잿불을 담고, 환을 만들지 않고 불사르며 말하기를 나는 이것이 무슨 냄새인지 알지 못한다. 마음을 경건히 할 뿐이다.”하였다. 어떤 사람이 중국의 차를 공양하는 자가 있었는데 섶으로 돌솥에 불을 때고,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며 말하기를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한다. 배를 적실뿐이다.” 하면서 참을 지키고 세속을 거스는 것이 모두 이러한 종류이다.

 

雅善梵唄, 金玉其音, 側調飛聲, 爽快哀婉, 能使諸天歡喜, 永於遠地流傳. 學者滿堂, 誨之不倦, 至今東國習魚山之妙者, 競如掩鼻, 效玉泉餘響. 豈非以聲聞, 度之之化乎.

범패를 잘하여 그 소리가 금 쟁반에 옥이 구르는듯하였다. 구슬픈 곡조와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아름다워 여러 하늘들(천신들)로 하여금 환희하게 하니 길이 먼 땅에서 유행하고 전해지게 하였다. 배우는 자들이 당()에 가득하였는데 그들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금가지도 어산의 오묘함을 배우는 자들이 다투어 코를 가리고 옥천의 남은 소리를 본뜨려 하였으니 어찌 소리로서 그들을 교화한 것이 아니겠는가?

 

禪師泥洹, 當文聖大王之朝, 上惻僊, 將寵淨諡, 及聞遺戒, 愧而寢. 越三紀, 門人以陵谷爲慮, 扣不朽之緣於慕法弟子, 內供奉一吉干楊晉方崇文臺鄭詢一, 斷金爲心, 勒石是請. 獻康大王, 恢弘至化, 欽仰眞宗, 追諡眞鑑禪師·大空靈塔, 仍許篆刻, 以永終譽. 懿乎! 日出暘谷, 無幽不燭, 海岸植香, 久而彌芳.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은 문성대왕 대인데 임금이 마음으로 슬퍼하여 장차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 남김 경계(유언)를 듣고, 부끄러워하며 그쳤다. 3(36)가 지나 문인(제자)들이 언덕으로서 골짜기가 될 것(세상이 바뀔 것)을 우려하여 법을 사모하는 제자들에게 썩지 않을 인연을 두드리니(의논하니) 내공봉 일길간 양진방, 숭문대 정순일이 쇠를 끊는 것으로 마음 삼아(굳게 마음을 합해) 돌에 글자를 새길 것을 청하였다. 헌강대왕이 지극한 교화를 크게 넓히시고 참된 가르침을 공경히 우러러 진감선사라는 시호와 대공영탑이라는 탑 이름을 내리고, 그대로 글자 새기는 것을 허락하는 것으로 길이 영예를 다하게 하였으니 아름답도다! 해가 양곡에 나와 어두운 곳에 비추지 않음이 없고, 바닷가에 향나무를 심어 오래될수록 향기로움이 가득하였다.

 

或曰, “禪師垂不銘不塔之戒, 而降及西河之徒, 不能確奉先志, 求之歟, 抑與之歟. 適足爲白珪之玷.” ! 非之者, 亦非也. 不近名, 而名彰, 蓋定力之餘報. 與其灰滅電絶, 曷若爲可爲於可爲之時, 使聲震大千之界. 而龜未戴石, 龍遽昇天, 今上繼興, 塤篪相應, 義諧付囑, 善者從之. 以隣岳招提有玉泉之號, 爲名所累, 衆耳致惑, 將俾弃同卽異, 則宜捨舊從新, 使標其寺之所枕倚, 則以門臨複澗爲對, 乃錫題爲雙溪焉.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선사께서 하지(비를 세우지) 말고, 탑을 만들지 말라는 경계가 있었는데 내려와 서하의 무리(어리석은 무리)들에 이르러 굳게 스승의 뜻을 받들지 않고 (탑비를)세울 것을 (스스로)구하였는가? 아니면 (남이)준 것인가? 단지 백옥에 묻은 흠이 될 것이다.” 한다. ! 그것(탑과 비를 건립하는 것)을 잘못되었다하는 자도 또한 잘못이 다. 명예를 가까이하지 않아도 이름이 빛나는 것은 대개 선정을 닦은 힘의 남은 갚음이다. 저 재처럼 없어지고 번개처럼 끊어지는 것이 어찌 할 수 있는 때에 할 수 있는 것을 하여 명성이 대천세계에 진동하게 하는 것만 같겠는가? 거북(귀부)가 돌(비석)을 받들기도 전에 용(임금)이 갑자기 하늘에 오르시고, 지금의 임금이 이어 즉위하여 질 나발과 피리가 서로 화답하듯 부촉하신 뜻을 헤아려 좋은 것을 따랐다. 이웃 산에 절(招提)로 옥천의 이름 한 것이 있어 이름이 겹치는 바가 되어 무리들의 기를 의혹되게 함에 이르렀으므로 장차 같음을 버리고 다름에 나아가게 하려하여 곧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따르려 하여 그 절이 자리 잡은 곳을 드러내게 하였더니 곧 절 문이 두 줄기 시내를 마주하고 있었다. 이에 절 이름으로 쌍계를 내렸다.

 

申命下臣曰, “師以行顯, 汝以文進, 宜爲銘.” 致遠拜手, “, .” 退而思之, 頃捕名中州, 嚼腴咀雋于章句間, 未能盡醉衢罇, 唯愧深跧泥甃. 況法離文字, 無地措言, 苟或言之, 北轅適郢. 以國主之外護, 門人之大願, 非文字, 不能昭昭乎群目. 遂敢, 身從兩役, 力效五能, 雖石或憑焉, 可慙可懼, 而道强名也, 何是何非. 掘筆藏鋒, 則臣豈敢, 重宣前義, 謹札銘云.

거듭하여 미천한 신(최치원)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스님은 수행으로 드러났고, 너는 문장으로 나왔으니 마땅히 명()을 지으라.”했다. 致遠이 두 손을 들어 마주잡고 절을 하며 말하기를 , 라고 대답하고는 물러나 생각하니 잠간 중주(중국)에서 이름을 구할 때, 장구(문장)의 사이에서 기름진 것을 씹고, 기름진 고기를 씹었으나 아직 성인의 가르침에는 흠뻑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진흙 우물에 깊이 빠졌음을 부끄러워할 뿐입니다. 하물며 법은 문자를 떠나 있어 말을 둘 땅이 없으니 구차히 혹 그것을 말할지라도 수레를 북쪽으로 향하고서 (남쪽의) 영 땅으로 가려는 것입니다. 다만 임금의 외호(보호)와 문인(제자)의 큰 원함은 문자가 아니면 여러 눈에 밝게 드러낼 수 없습니다. 마침내 감히 몸으로 두 일(비문의 찬술과 서사)을 따라 힘써 보잘 것 없은 재능(五能) 일을 본받으려 합니다. 비록 혹 돌에 의지할지라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할만하고, 도는 억지로 이름한 것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을 그르다 하겠는가? 拙筆의 재능을 감추어 드러내지 않는 것(부족한 재능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곧 신이 어찌 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 거듭 앞의 뜻을 펴 삼가 을 짓는다.

 

杜口禪那, 歸心佛陀. 입을 다물고 선정을 닦으며 마음을 부처님께 돌려

根熟菩薩, 弘之靡它. 근기가 익숙한 보살이 되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넓힘에만 힘썼네

猛探虎窟, 遠泛鯨波. 용간하게 범의 굴을 더듬고, 멀리 사나운 파도를 넘어

去傳秘印, 來化斯羅. (중국에)가서 비밀의 인을 전해받아, 와서 사라(신라)를 교화하였다.

 

尋幽選勝, 卜築巖磴. 그윽하고 좋은 경계를 찾아 바위 비탈을 보아 (절을)지었다.

水月澄懷, 雲泉寄興. 물과 달로 마음을 맑게 하고, 구름과 샘이 흥을 일으켰다.

山與性寂, 谷與梵應. 산은 본성과 더불어 공적하고, 골짜기는 범패가 울리니

觸境無硋, 息機是證. 닿는 경계 걸림이 없고, 꾸밈을 끊어 깨달았다.

 

道贊五朝, 威摧衆妖. 도는 다섯 임금을 돕고, 위엄은 뭇 요사함을 꺽었다.

黙垂慈蔭, 顯拒嘉招. 묵묵히 자애로운 그늘을 드리우고, 아름다운 부름을 드러나게 거절 하였다.

海自飃蕩, 山何動搖. 바닷물은 스스로 바람에 요동치나 산이 어찌 움직이리오.

無思無慮, 匪斲匪雕.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어 깍음도 없고 새김도 없다.

 

食不兼味, 服不必備. 먹음은 맛을 겸하지 않고, 옷은 반드시 갖추지 않았다.

風雨如晦, 始終一致. , 바람은 어두운 듯 한대 시작과 끝이 한결 같다.

慧柯方秀, 法棟俄墜. 지혜의 가지는 막 뻗어나는데 법의 대들보가 갑자기 떨어졌다.

洞壑凄凉, 煙蘿憔悴. 깊은 골짜기 처량하고 아지랑이와 풀들이 초췌하구나.

 

人亡道存, 終不可諼. 사람은 없어져도 도는 보존되었으니 끝내 감추지 못하리라.

上士陳願, 大君流恩. 빼어난 선비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니 큰 임금이 은혜를 베풀었다.

燈傳海裔, 塔聳雲根. 법등이 바다 건너에 전해져, 탑이 구름 속에 우뚝하다.

天衣拂石, 永耀松門. 천의가 스쳐 돌이 닳도록 길이 송문에 빛나리라.

 

光啓三年七月日, . 僧奐榮, 刻字.

광계 3(887, 진성여와 3) 월 일, 세우다. 스님인 환영이 글자를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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