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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양위표

by 최인표 2024. 2. 16.

讓位表

 

出典: 東文選43, 表箋

 

臣某言臣聞欲而不貪駕說於孔門弟子德莫若讓騰規於晉國行人苟竊位

自安則妨賢是責臣假威天睠承乏海隅雖非法令滋彰未免寇盜充斥遑恤于後勇退爲先敢言善自爲謀實慮刑玆無赦中謝臣以當國雖欝壘之蟠桃接境不尙威臨且夷齊之孤竹連彊本資廉退矧假九疇之餘範早襲八條之敎源言必畏天行皆讓路蓋禀仁賢之化得符君子之名故籩豆饁矛寄戶俗雖崇於帶劒武誠貴於止戈

임금의 자리를 사영하는 표문

신 아무개가 아룁니다. 신이 듣기로 바라되 탐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자의 제자 에게 말하였고, 덕은 사양함만 같음이 없다는 것은 나라 행인에게서 나왔다. 구차히 자리(임금의 자리)를 훔쳐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면 곧 어진이를 해친다는 꾸짖음을 듣습니다. 신은 하늘(천자의)이 돌아보는 위엄을 빌려 바다 모퉁이에서 재능 없이 왕위에 올라 비록 법령이 더욱 늘어난 것은 아니나 도적 떼가 가득 차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겨를에 뒤를 걱정하겠습니까? 용감하게 물러나는 것을 우선하려는 것이니 어찌 스스로 잘 꾀했다고 말 하겠습니까? 실로 형벌을 생각하고, 이에 용서함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담당한 나라는 비록 울루(도깨비)의 신선의 복숭아와 경계를 접하나, 위엄으로 대하는 것을 숭상하지 않았고, 또한 본래 백이와 숙제의 고죽국과 이웃하여 청렴하고 겸양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하물며 구주(홍범 9)의 남은 규범을 빌려 일찍부터 (기자의)8조의 가르침을 이어 근원으로 삼았습니다. 말은 반드시 하늘을 두려워하였고, 길을 갈 때는 모두 길을 양보하였으니 仁賢의 교화를 받아 군자의 이름에 부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밭에서 들밥을 먹일 때도 제기로 하였고, 짧은 창과 세모창은 문에 기대놓았으며, 풍속은 비록 칼 차는 것을 숭상하였으나, 는 진실로 전쟁을 그치는 것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從建國而來罕致反城之釁嚮化則南閭是絶安仁則東戶何慙是以直至臣兄贈大傅臣晸遠沐皇澤虔宣詔條供職一終安邊萬里

이에 나라를 세운 이래로 성을 바치고 적에게 들어가 피를 칠하는 것에 이름이 드물었습니다. 교화를 따름에는 곧 남려가 이에 끊어졌고, 인을 편안히 여김은 곧 동호라도 무엇이 부끄럽겠습니까? 이 때문에 바로 신의 형 증태부 신 정(헌강왕)에 이르기까지 멀리 황제의 은택에 목욕하였고, 정성껏 조칙을 펴고 직무를 맡아봄을 한결같이 마쳐 변방 만리를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而及愚臣繼守諸患倂始則黑水侵疆曾噴毒液次乃綠林成黨競簸狂氛所管九州仍標百郡皆遭寇火若見劫灰加復殺人如麻曝骨如莽滄海之橫流日甚昆岡之猛焰風顚致使仁鄕變爲疵國此皆由臣守中迷道馭下乖方鴟梟沸響於鳩林魚鼈勞形於鰈水

어리석은 신이 이어 지킴에 이르러 여러 근심이 나란히 이르러 처음에는 곧 흑수가 경계를 침입하여 독액을 내뿜고, 다음으로 녹림이 당을 이루어 다투어 광기를 부리니 관할하는 9주와 아래의 100군이 모두 도적의 불꽃을 만나 마치 세상을 파멸할 때 일어나는 큰불의 재를 보는 듯하였습니다. 더욱이 다시 사람 죽이기를 삼대 베듯이 하고, 드러난 해골이 우거진 풀과 같았습니다. 창해의 멋대로 흐름은 날로 심해지고 곤강(곤륜산)의 사나운 불길이 바람처럼 치솟고, 어진 지방으로 하여금 병든 나라로 변하게 함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모두 신이 중도를 지키는 길을 잃고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이 어그러진 것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올빼미는 구림에서 물 끓듯이 울고(애절하게 울고) 물고기와 자라는 접수에서 몸뚱이를 수고롭게 하였습니다.

 

況乃西歸瑞節則鷁艦平沉東降冊書則鳳軺中輟阻霑膏雨虛費薰風是乖誠動於天實懼罪深於海群寇旣至今爲梗微臣固無所取材日邊居羲仲之官非臣素分海畔守延陵之節是臣良圖久苦兵戎仍多疾瘵深思自適其適難避各親其親

하물며 부절을 서쪽(중국)으로 들어가게 하면 곧 귀인이 타는 배는 물에 가라앉았습니다. 동쪽으로 황제가 글을 내리(冊書)면 곧 봉황을 새겨 꾸민 수레는 중도에(사신은) 그치고 돌아가 알맞은 비에 젖음을 막아 훈훈한 바람을 허비하였습니다. 이는 하늘에 정성과 감동을 어그러뜨렸기 때문이니 진실로 죄가 바다보다 깊음을 두려워합니다. 여러 도적들이 이미 지금에 이르러 가시덤불이 되었는데도 보잘 것 없는 신이 진실로 취할 수단이 없습니다. 해 뜨는 변두리에서 희중의 관(동방의 왕)으로 사는 것은 신의 본분이 아닐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연릉계자의 절개를 지키는 것이 신의 좋은 계책일 것입니다. 오래동안 병란에 괴로움을 당하여 질병이 많으니 유유자적하기를 깊이 생각하였으나, 친족을 친히함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竊以臣姪男嶢是臣亡兄晸息年將志學器可興宗山下出泉蒙能養正丘中有李衆亦思賢不假外求爰從內擧近已俾權藩寄用靖國災然屬蟻至壞堤蝗猶蔽境熱無以濯溺未能援帑廩一空津途四塞槎不來於八月路猶敻於九天不獲早託梯航上聞旒扆

삼가 생각하건데 신의 조카 요(효공왕)는 신의 죽은 형인 정(헌강왕)의 자식인데 배움에 뜻을 두는 나이(志學 15)이고, 그릇이 종실을 일으킬 만합니다. 산 아래에 샘이 나오듯이 바르게 길러짐을 입었고, 언덕 안에서 오얏이 있는 거처럼 무리들이 도한 어짐을 생각하였습니다. 밖에서 구함을 빌리지 않더라도 안에서 천거함을 따라 최근에 그로 하여금 임시로 번방의 일을 맡게하여 나라의 재앙을 진정시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개미가 제방을 무너뜨리고, 메뚜기가 나라 안을 덮는 것과 같으며, 뜨거워도 씻을 수 없으며, 물에 빠졌는데도 구원하지 못함에 빠진 것에 속하였습니다. 창고는 한결같이 비어있고, 나루와 갈은 사방이 막혀있고, 뗏목은 8월이 되어도 오지 않고, 길은 구천보다 오히려 멀어 일찍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임금의 거처에 아뢰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雖唐虞光被無憂後至之誅柰蠻夷寇多久阻遄征之使禮實乖闕情莫遑寧臣每思量力而行輒遂奉身而退自開自落竊媿狂花匪斲匪雕聊全朽木所顗恩無虛受位得實歸旣睽分東顧之憂空切詠西歸之什謹因當國賀正使某官入朝附表陳讓以聞

비록 요와 순 임금의 빛이 입혀져 뒤에 이르러 죽임을 당할 근심은 없어졌으나 만이(오랑캐)의 도적이 매우 많아 오래 동안 빨리 가야할 사신을 막았습니다. 예에 진실로 어그러지고 빠졌으니 정(마음)이 어찌 편안했겠습니까? 신이 매번 힘을 헤아려 행할 것을 생각하다 문득 마침내 자신을 받들어 물러나기로 하였습니다. 스스로 열고 스스로 떨어지는 광화를 부끄러워하지만 깍지 않고 새기지 않고 애오라지 썩은 나무를 보존하려 합니다. 바라는 바는 은혜를 헛되이 받음이 없게 하고, 자리가 실제에 돌아 갈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미 동쪽을 돌아보는 근심을 나누는 직을 등졌기 때문에 공연히 서쪽으로 돌아가는 시를 절실히 읊습니다. 삼가 나라의 하정사 아무개 관리가 입조하는 것을 당하여 표를 붙여 양위를 진술하는 것으로서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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