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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by 최인표 2024. 3. 7.

大唐新羅國故鳳巖山寺敎諡智證大師寂照之塔碑銘幷序

대당 신라국 돌아가신 봉암산사 시호를 받은 지증대사 적조탑 및 비명과 서문

 

入朝賀正兼迎奉皇花等使朝請大夫前守兵部侍郞充瑞書院學士賜紫金魚袋 臣 崔致遠奉敎撰

하정사로 당나라에 들어갔고, 겸하여 황화(황제의 칙사) 등의 사신을 맞아 받드는 조청대부 전수병부시랑 충 서서원 학사, 자금어대를 내린 신 최치원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

 

, 五常分位 配動方者曰仁心 三敎立名 顯淨域者曰佛. 仁心卽佛 佛目能仁則也. 道郁夷柔順性源 達迦衛慈悲敎海, 猶石投水 雨聚沙然. 矧東諸侯之外守者 莫我大, 而地靈旣好生爲本 風俗亦交讓爲主. 熙熙太平之春 隱隱上古之化. 加以姓參釋種 遍頭居寐錦之尊, 語襲梵音 彈舌足多羅之字. 是乃天彰西顧 海引東流, 宜君子之鄕也, 法王之道 日日深又日深矣.

서술하여 말한다. , , , , , 오상의 방위를 나눌 때 動方(東方)에 배치한 것을 仁心이라 하였고, 유교, 불교 도교 삼교의 이름을 세울 때 정결한 영역을 드러낸 것을 부처()라 하였다. 仁心은 곧 부처()이고, 부처를 지목하여 能仁이라 하는 것은 이를 본받은 것이다. 동방의 유순한 본성의 근원을 인도하여 가위(천축국)의 자비로운 가르침의 바다에 이르게 하는 것은 참으로 돌을 물에 던지고, 비를 모래에 모으는 것과 같다. 하물며 동쪽의 제후로 외방을 지키는 자로 우리보다 큰 나라가 없고, 땅의 신령함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풍속이 또한 서로 양보하는 것을 위주로 함에 있어서이겠는가? 화목한 태평의 봄이요, 흐릿한 상고의 교화이다. 여기에 성이 석가의 종족에 참여하여 머리를 깍아 스님이 되어 매금(임금)의 높은 지위에 있기도 하였고, 말은 범어의 음을 답습하여 혀를 튕기면(굴리면) 다라(불경)의 문자가 되었다. 이는 곧 하늘이 밝게 서쪽으로 돌아보고, 바다가 동쪽으로 흐름을 이끈 것이니 마땅히 군자가 사는 곳에 부처(法王)의 도가 나날이 깊어지고, 또 날로 깊어질 것이다.

 

且自魯紀隕星 漢徵佩, 像跡則百川含月 法音則萬籟, 或緝懿縑緗 或綵華琬琰. 故濫雒宅 鏡秦宮之事跡, 照照焉 如揭合璧. 苟非三尺喙 五色毫, 焉能措辭其間 駕說于後. 就以國觀國 考從鄕至鄕, 則風傳沙嶮而來 波及海隅之始.

또 노나라가 별이 떨어진 것을 기록하고, 한 나라 명제가 꿈에 금인이 목에 둥근 해를 두른 것을 징험한 것으로부터 (부처의)자취는 곧 모든 개울이 달을 머금은 듯하고, 설법하는 소리는 곧 온갖 퉁소소리가 바람에 울리는 듯하여, 혹 아름다운 일의 자취를 비단에 적어 넣기도 하고, 혹 아름다운 자취를 빗돌에 수놓기도(새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낙양을 범람하게 하고, 진나라 궁전에 거울을 걸어놓았던 일의 자취가 명백함이 해와 달(合璧)을 걸어놓은 듯하였다. 만일 세 자의 부리()과 오색의 터럭()이 아니면 어찌 그 사이에 능히 말을 얽고 맞추어 후세에 말 전할 수 있겠는가? 나아가 나라를 가지고 나라를 관찰하고, 마을로부터 마을에 이르는 것을 상고해 보니 곧 (불교의)바람이 사막의 험함을 (넘어) 전해 오니 (불교의)물결이 바다 모퉁이에서 시작됨에 미쳤다.

 

昔當東表鼎峙之秋 有百濟蘇塗之儀, 若甘泉金人之祀. 厥後西晉曇始始之貊 如攝騰東入, 句驪 阿度度于我 如康會南行. 時迺梁菩薩帝 反同泰一春, 我法興王 剬律條八載也. 亦旣海岸植與樂之根 日鄕耀增長之寶, 天融善願 地聳勝因.

옛날 동쪽(우리나라가)이 솥발처럼 정립해 있던 때에 백제에는 蘇塗의 의식이 있었는데, 한나라 감천궁에서 金人에게 제사하던 것과 같았다. 그 후 서진의 담시가 처음 맥(고구려)에 간 것은 섭마등이 동쪽으로 (후한에)들어 간 것과 같았고, 고구려에서 아도가 우리나라에 건너 온 것은 강승회가 남쪽으로 (오나라에) 간 것과 같았다. 때는 양나라 보살제(무제)가 동태사에 돌아가진 지 일 년만이요, 우리 법흥왕께서 율령 조목을 만든 지 8년 만이었다. 또한 이미 바닷가에 함께 즐거워함의 뿌리를 심어 해가 뜨는 나라에 늘어나고 자라나는 보배를 빛나게 하였으며, 하늘은 착한 소원을 들어 주고, 땅에서는 훌륭한 인연이 솟았다.

 

爰有中貴捐軀 上僊剔髮, 苾芻西學 羅漢東遊. 因爾混沌能開 娑婆遍化, 莫不選山川勝槪 窮土木奇功. 宴坐之宮 燭徐行之路, 信心泉湧 慧力風揚. 果使㵱杵蠲灾 鍵櫜騰慶, 昔之蕞爾三國 今也壯哉一家. 雁刹雲排 將無隙地, 鯨枹雷振 不遠諸天, 漸染有餘 幽求無斁.

이에 중귀(내관)이 몸을 버렸고, 임금(진흥왕)이 머리를 깍았으며, 스님들은 서쪽에서 배웠고, 아라한이 동쪽에서 노닐었으며, 인하여 혼돈을 열수 있었다. 세상을 두루 교화하고, 산천의 좋은 경치를 선택하며, 토목의 기이한 공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수도할 집()을 화려하게 꾸미고 천천히 가는 길(수행 길)을 밝히니 믿는 마음은 심처럼 솟아나고 지혜의 힘이 바람처럼 드날렸다. 절구공이가 떠다니는(격렬하게 싸우는) 재앙을 없애 무기와 갑옷을 무기고에 감추는 경사에 오르게 하였으니 옛날의 조그만 했던 세 나라가 지금에는 장하게도(씩씩하게도) 한 집안이 되었다. ()이 기러기와 구름처럼 늘어서 문득 빈 땅이 없고, 북이 우레처럼 울려 제천에서 멀지 않으니 무젖어 물듦이 남음이 있었고, 그윽이 탐구함에 싫어함이 없었다.

 

其敎之興也, 毗婆娑先至 則四郡驅四諦之輪, 摩訶衍後來 則一國耀一乘之鏡. 然能龍雲躍 律虎風騰, 學海之波濤 蔚戒林之柯葉, 道咸融乎無外 情或涉乎有中, 止水停漪 高山佩旭者, 盖有之矣 世未之知.

그 가르침이 흥기한 것은 비바사(아비달마대비바사론/부파불교, 소승불교)가 먼저 이르니 곧 4군에 4제의 법륜을 몰았고, 마하연(대승불교)가 뒤에 오니 곧 한 나라에 일승의 거울을 빛나게 하였다. 그러나 경전에 밝은이가 구름처럼 뛰어오르고, 계율에 뛰어난 이가 바람처럼 오르며, 學海의 파도가 세차게 솟아오르고, 계림의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도가 모두 밖이 없음(끝없음에)에 융합하며, 정이 혹 (마음)속에 있음을 건넜다. 고여 있는 물이 잔물결을 잠재우고, 높은 산에 해를 두른 듯한 이가 대개 있었을 것이나 세상에서는 아직 알지 못하였다.

 

洎長慶初 有僧道義, 西泛睹 西堂之奧 智光侔智藏而還, 智始語玄契者. 縛猿心護奔北之短, 矜鷃翼誚圖南之高. 旣醉於誦言, 競嗤爲魔語. 是用韜光下 斂迹壺中, 罷思東海東 終遁北山, 豈大易之無悶 中庸之不悔者邪. 華秀冬嶺 芳定林, 蟻慕者彌山 雁化者出谷, 道不可廢 時然後. 及興德大王纂戎 宣康太子監撫, 去邪毉國 樂善肥家.

장경(821-824)초에 이르러 도의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서당지장의 오묘한 가르침을 보았는데 지혜의 빛이 서당지장 스님과 나란히 하고 돌아왔는데 지혜로 처음 현묘한 이치(玄契)를 말한 이 이다. (무리들이)원숭이의 마음에 붙들어 매여 북쪽으로 달리는 단점(잘못)을 지키고, 메추라기가 날개를 자랑하며, 남쪽을 향해 높게 날아가는 것을 도모하는 大鵬을 꾸짖었다. 이미 외우는 말에 취하여 다투어 비웃고 마구니의 말이라 하였다. 이에 행랑 아래에 빛을 감추고, 자취를 병 속에 숨겨 동해의 동쪽에 갈 생각을 그만두고 마침내 북산에서 머뭇거렸으니(숨었으니), 어찌 주역세상을 피해 살아도 근심함이 없다.”하는 것과 중용뉘우치지 않는 자.”이리오? 꽃이 겨울 재에 빼어나 선정의 숲에서 향기를 풍기니 개미가 양고기를 사모하는 듯이 모여든 자들이 산에 가득하였는데 교화로 악을 고쳐 선하게 된 자들이 골짜기에서 나왔으니 도는 폐할 수 없는 것이며 때가 그러한 후에 행해지는 것이다. 흥덕대왕이 왕위에 오르고(826), 선강태자(金忠恭)가 정사를 감독하고 군대를 어루만짐에 이르러 부정한 것을 제거하고 나라를 구원하며, 선함을 즐겨하고 집을 살찌게 하였다.

 

有洪陟大師 亦西堂證心 來南岳休足. 鷩冕陳順風之請, 龍樓慶開霧之期. 顯示密傳 朝凡暮聖, 變非蔚也 興且勃焉. 試虛見較其宗趣, 則修乎修沒修 證乎證沒證. 其靜也山立 其動也谷應, 無爲之益 不爭而勝. 於是乎, 東人方寸地虛矣, 能以𩇕利利海外, 不言其所利 大矣哉.

홍척대사가 있는데 또한 서당지장의 심인을 인정받고 남악(지리산)에 와 발을 쉬었다. 임금이 가르침을 따름의 청을 말씀하시니 태자가 안개가 걷힘의 기약을 축하하였다. 비밀히 전해지는 것을 드러내어 보이시니, 아침에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저녁에는 성인이 되니 변하여도 무성한 것은 아니었으나 여기에서 흥기하는 것이 또한 갑작스러웠다. 시험삼아 그 종취를 보아 비교해 보면 곧 닦지만 닦을 것이 없는 것을 닦고, 증명하지만 증명할 것이 없다. 그 고요히 있을 때는 산이 선 것 같고, 그 움직일 때는 골짜기가 울리는 듯하고, 함이 없어도 더해지고, 다투지 않고 이긴다. 이에 동쪽 사람(우리나라 사람)의 마음속 경지가 신령스러워졌는데, 능히 조촐한 이로움(깨끗한 이로움)을 가지고 해외를 이롭게 할 수 있었지만, 그 이로운 바를 말하지 않았으니 위대하다.

 

爾後 觴騫河 筌融道, 無念爾祖 寔繁有徒. 或劍化延津 或珠還合浦, 爲巨擘者 可屈指焉. 西化則靜衆無相 常山慧覺, 禪譜 益州金 鎭州金者是. 東歸則前所敍北山 義 南岳 陟, 而降大安徹國師 慧目 育 智力聞 雙溪照 新興彦 涌岩體 珍丘休 雙峰雲 孤山日 兩朝國師聖住染 菩提宗, 德之厚爲父衆生 道之尊爲師王者, 古所謂 逃名名我隨 避聲聲我追者. 故皆化被恒沙 蹟傳豊石.

이후 도를 찾는 스님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종지의 뜻을 밝혀 도에 융합하였으니 너의 조상을 생각함이 없겠는가? 참으로 무리가 번성하였다. 혹은 중원에서 도를 얻었고 돌아오지 않거나, 혹은 법을 얻고 돌아왔는데 남달리 뛰어난 자를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자이다. 중국에 귀화한 자로는 정중사의 무상과 상산의 혜각이니 禪譜에서 익주 김, 진주 김이라 한 이 이다. 동쪽 돌아온(신라로 돌아 온) 이로는 곧 앞에서 서술한 바 북산의 도의, 남악의 홍척이고, 내려와서는 대()안사 혜철 국사, 혜목산의 현욱, 지력문, 쌍계사 혜조(), 신흥사 언, 용암체, 진구휴, 쌍봉사 도윤, 고산일(굴산사 범일), 양조국사인 성주사 무염, 보리의 ()종이다. (이들은) 덕의 두터워 중생의 아버지가 되고, 도가 높아 왕의 스승이 된 자들이다.

 

古所謂 逃名名我隨 避聲聲我追者. 故皆化被恒沙 蹟傳豊石. 有令兄弟 宜爾子孫. 俾定林標秀於鷄林, 慧水安流於鰈水者矣. 別有不戶不牗而見大道, 不山不海而得上寶. 然息意 澹乎忘味. 彼岸也 不行而至, 此土也 不嚴而治. 七賢孰取譬 十住難定位者, 賢鷄山 智證大師 其人也.

옛날에 이른 바 이름을 숨기려하여도 이름이 나를 따르고, 명성에서 도망하여도 명성이 나를 좇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 교화가 항하사(세상)에 입혀졌고 자취는 풍성한 돌에 전해지고, 좋은 형제가 있으며 많은 자손이 있어 선정의 숲으로 하여금 계림에서 빼어나게 하고, 지혜의 물이 접수(동해)에서 편안히 흐르게 하였다. 따로 지게문을 나가지 않고, 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대도를 볼 수 있었고, 산에 오르지 않고,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도 상보를 얻었다. 조용히 뜻을 쉬며, 담담히 맛을 잊었다. 저쪽(중국)에는 가지 않아도 (도에)이르렀고, 이 땅에서는 위엄으로 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七賢을 누가 비유로 취할 것이며, 十住는 자리를 정하기 어려우니 현계산 지증대사가 그 사람이다.

 

始大成也, 發蒙于梵體大德, 稟具于瓊儀律師. 終上達也, 探玄于慧隱嚴君, 乎默于楊孚令子. 法胤唐四祖爲五世父 東漸于海. 遡游數之, 雙峰子法朗 孫愼行 曾孫遵範 玄孫慧隱 來孫大師也. 朗大師從大毉之大證. 按杜中書 正倫 纂銘敍, 遠方奇士 異域高人 無憚險途 來至珍所. 則掬寶歸止 非師而誰. 第知者不言 復藏于密, 能撢秘藏 唯行大師. 然時不利兮, 道未亨也. 乃浮于海 聞于天, 肅宗皇帝寵貽天什曰, 龍兒渡海不憑筏, 鳳子沖虛無認月. 師以山鳥海龍二句爲對, 有深旨哉. 東還三傳至大師 畢萬之後斯驗矣.

처음 크게 이룰 때에 범체대덕에게 몽매함을 깨우쳤고, 경의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마침내 위에 도달할 적에 혜은 엄한 스승에게서 현묘함을 탐구하고, 양부 좋은 제자에게 묵계를 전수하였다. 법의 계보로는 당나라 4조는 5세 아버지로 하여 동쪽으로 점차 바다(신라)에 전해졌다. 물결에 따라 흘러간 것을(노닌 것을 거슬러) 헤아리면 쌍봉사 도신의 제자는 법랑이고, 손제자는 신행이고, 증손제자는 준범이고, 현손제자는 혜은이고, 내손제자가 대사이다(지증대사). 법랑 대사는 4조 대의도신의 큰 증명(大證)을 따랐다. 중서령 두정륜이 지은 4조 도신의 비명에 이르기를 멀리 있는 기이한 선비는 다른 나라의 뛰어난 사람이다. 험한 길을 꺼리지 않고 보배로운 곳에 와서 이르러 곧 보배를 움켜쥐고 돌아갔으니 법랑스님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하였으나 다만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다시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는데 능히 비밀리 그 감추어진 것을 더듬은 이는 오직 신행 스님뿐이다. 그러나 때가 이롭지 않았고, 도가 아직 형통하지 못하였다. 이에 바다에 떠서 건너니 천자에게 알려지니 숙종황제가 은총으로 시를 내렸는데 그 시에 말하기를 용아는(용은) 바다를 건널 때 뗏목에 의지하지 않고, 봉자는(봉황은) 허공을 날 때 달을 인정함이 없구나!”하였다. 스님이 山鳥(산과 새), 海龍(바다와 용) 두 구를 가지고 대답하니 깊은 뜻이 있었다. 동쪽(신라로)으로 돌아 와 삼 대를 전하여 대사(스님)에게 이르니 필만의 후예가 크게 繁昌할 것이라 한 것이 이에 징험되었다.

 

其世緣則王都人 金姓子, 號道憲 字智詵. 父贊瓌, 母伊氏. 長慶甲辰歲現乎世, 中和壬寅曆歸乎寂. 恣坐也四十三夏, 歸全也五十九年. 其具體則身仞餘 面尺所, 儀狀魁岸 語言雄亮, 眞所謂威而不猛者.

그 세상의 인연은 곧 왕도 사람이다. 김씨 성의 자손으로 이름은 도헌이고, 자는 지선이다. 아버지는 찬괴이고, 어머니는 이씨이다. 장경 갑진년(824, 헌덕왕16)에 세상에 나타나(태어나) 중화 임인년(882, 헌강왕8)에 입적하셨다. 하안거 한 횟수는(스님으로 있은 햇수) 43년이었고, 부모에게 몸을 물려받은 것으로부터는(세속의 나이는) 59년이었다. 그 갖춘 몸은 곧 키가 일곱 자 남짓이고, 얼굴은 한 자 정도이며, 儀狀이 뛰어나고 언어는 웅장하고 맑았으니 참으로 이른 바 위엄 있되 사납지 않다.”는 이였다.

 

始孕洎滅 奇蹤秘說 神出鬼沒 筆不加紀. 今探其感應人耳者六異, 操履驚 人心者六是, 而分表之. 初母夢 一巨人告曰, 僕昔勝見佛 季世爲桑門, 以謓恚, 久隨龍報, 報旣旣矣, 當爲法孫. 故侂妙緣 願弘慈化. 因有娠 幾四百日, 灌佛之旦誕焉. 事驗蟒亭, 夢符像室. 使佩韋者益試, 擁毳者精修, 降生之異一也.

처음 잉태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기이한 발자취와 숨겨진 말이 신 같이 나오고 귀신처럼 사라지는 것 같으니 붓으로 기록할 수 없다. 이제 그 느낌을 받아 마음이 따라 움직인 것을 더듬어 사람의 귀를 세우게 한 여섯 가지의 이상함과 사람의 마음을 놀라게 한 지조와 행실을 여섯 가지 옳음으로 나누어 나타낸다. 처음 어머니 꿈에 한 거인이 고하여 말하기를 저는 옛날의 승견불(비바시불)로 말세에(말법 세상에) 스님이 되었다가 성을 낸 일 때문에 오래 동안 용의 과보를 따르다가 과보가 이미 끝났으니 마땅히 법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묘한 인연을 따라 자비로운 교화를 넓힐 것을 원합니다.”했다. 인하여 임신하여 거의 400일 만에 부처님에게 물을 뿌리는(灌佛會) 날 아침에 태어났다. 일이 이무기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일에서 징험되고, 부처님 어머니의 태몽고사에 부합한다. 가죽 띠를 찬자로(스스로 경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조심하고 삼가게 하며, 스님 옷을 입은 자가 정밀히 수행하게 한 탄생의 기이함이 첫 번 째 이다.

 

生數夕不嚥乳, 則號欲嗄. 有道人 過門誨曰, 欲兒無聲 忍絶焄腥. 母從之, 竟無恙. 使乳育者加愼, 肉飡者懷慙, 宿習之異二也. 九歲喪父, 殆毁滅. 有追福僧憐之, 論曰, 幻軀易滅, 壯志難成. 昔佛報恩 有大方便, 子勉之. 因感悟輟哭, 白所生請歸道. 母慈其幼 復念保家無主, 確不許. 耳踰城故事, 則亡去, 就學浮石山 . 忽一日 心驚坐屢遷, 俄聞倚閭成疾. 遽歸省而病隨愈, 時人方阮孝緖. 居無何染沈疴, 謁毉無效. 枚卜之, 僉曰, 宜名隷大神. 母追惟曩夢, 覆以方袍, 而泣誓言, 斯疾若起 乞佛爲子. 信宿果大瘳. 仰悟慈親, 終成素志. 使舐犢者割愛, 飮蛇者釋疑, 孝感之異三也.

태어난 지 며칠이 되어도 젖을 빨지 않았다. 젖을 눌러서 마시게 하면 소리내어 울어 목이 잠기었다. 문득 어떤 도인이 있어 문을 지나다 가르쳐 말하기를 아이가 소리를 내지 않게 하려한다면(울지 않게 하려하면) 냄새나는 나물과 비린내 나는 고기를 참고 끊어야 합니다.”했다. 어머니가 그것을 따랐더니 (젖을 먹지 않는)근심이 없어졌다. 젖을 먹여 기르는 자를 삼가 하게하고, 고기와 밥을 먹는 자가 부끄러움을 품게 하였으니 묵은 습성의 기이함이 두 번 째이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고 너무 슬퍼하여 몸이 야위고 기운이 없어졌다. 죽은 이의 복을 기도하는 스님이 불쌍하게 여겨 말하기를 덧없는 몸은 쉽게 사라지고, 마음속에 품은 웅대한 뜻은 이루기 어렵습니다. 옛날 부처님이 (부모의)은혜를 갚은 큰 방편이 있었으니 그대는 그것을 힘쓰시오.”했다. 인하여 느끼고 깨달아 울기를 멈추고, 낳아준 바(어머니)에게 말하여 도(불도)에 들어 갈 것을 청하였다. 어머니는 그가 어리고, 다시 집안을 보존할 주인이 없음을 생각하여 굳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이)성을 넘은 고사를 듣고는 곧 도망해 가서 부석산(부석사)에 나아가 배웠다. 홀연히 하루는 심장이 놀라(뛰어) 앉은 자리를 여러 번 옮겼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들었다. 대번에 돌아 가 살피니(보살피니) 병이 따라 나으니 그 때 사람들이 완효서에 견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렸는데 의원을 만나도 효험이 없었다. 여러 곳에 점을 쳐보니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이름을 大神(부처님)에게 예속시켜야 한다.”했다. 어머니가 옛날 꿈을 생각해내고는 경계하며 방포(가사)를 덮고 눈물을 흘리며 맹서해 말하기를 이 병에서 만일 일어난다면(이 병이 나으면) 부처님 아들이 될 것을 청합니다.”했는데, 이틀 밤이 지나자 과연 나았다. 우러러 어머니를 깨닫게 하여 끝내 평소에 품었던 뜻을 이루었다. 어버이로 자식을 사랑하는 자로 하여금 아깝게 여기지 않고 선뜻 내주게 하고(자식이 스님이 되는 것을 선뜻 허락하게 하고), 마시는 술잔에 나타난 뱀 그림자를 의심하여 병든 자가(불도를 의심하는 자의) 의심을 풀게 하였으니 효성으로 (신과 사람을)감동시킴의 기이함이 세 번째이다.

 

至十七受具 始就壇, 覺袖中神光熠熠然 探之得一珠, 豈有心而求. 乃無脛而至, 眞六度經所喩矣. 使飢嘑者自飽, 醉偃者能醒, 勵心之異四也. 坐雨竟 將它適. 夜夢遍吉菩薩撫頂提耳, 苦行難行 行之必成. 形開痒, 默篆肌骨. 自是 不復服繒絮焉 修綫之須 所必麻楮 不穿達屣, 矧羽翣 毛茵餘用矣. 使縕黂者開眼, 衣蟲者厚顔, 律身之異五也.

17세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았는데 처음 계단으로 나아갈 때 소매 안에서 신광이 밝게 빛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더듬어(찾아) 한 구슬을 얻었다. 어찌 마음을 두어서 구한 것이겠는가? 곧 정강이가(발이) 없어도 이른 것이니 참으로 육도집경에서 비유한 바이다. 굶주려 부르짖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 취하여 누운 자가 깰 수 있게 하였으니 마음을 권면함의 기이함이 네 번째이다. 머물던 곳에서 비가 그치자(하안거를 마치자) 장차 다른 곳으로 가려하는데, 밤 꿈에 편길보살(보현보살)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에 입을 가까이하고 말하기를 고행은 행하기 어려우나 행하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했다. 꿈을 깨고 나니 마음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위축되어 피부와 뼈에 새겨두었다. 이로부터 다시는 비단, 솜을 둔 옷을 입지 않았고, 실로 해진 것을 기울 때는 반드시 삼과 닥나무로 하고, 양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지 않았는데, 하물며 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쓰고, 털로 만든 깔개를 사용하였겠는가? 솜옷을 입은 자로 하여금 (불도에)눈을 뜨게 하고, 비단 옷을 입은 자로 하여금 얼굴을 두텁게(부끄럽게) 여기게 하였으니 자기자신을 단속함의 기이함이 다섯 번째이다.

 

自綺年飽老成之德, 加瑩戒珠. 加畏者競相從求益. 大師拒之曰, 人大患好爲師. 强欲慧不惠, 其如模不模何耶. 況浮芥海鄕 自濟未暇 無影逐 爲必笑之態. 後山行 有樵叟假碍前路 曰, 先覺覺後覺, 何須捨空殼. 就之則無見焉. 爰媿且悟 不阻來求, 竹葦于鷄籃山水石寺. 卜築他所 曰, 不繫爲懷 能遷是貴. 使佔畢者三省, 營巢者九思, 垂訓之異六也.

젊어서부터 노성의 덕에 배불렀고, 빛나는 계율의 구슬을 더하니 게다가 두려워할만 한 자(후생)들이 다투어 서로 따라 이익을 구하였다. 대사가 거절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크게 근심할 것은(경계할 것은)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하였으니 지혜롭지 못한 것을 억지로 지혜롭게 하고자 해도 모범으로 하지 못하는 것을 모범으로 하는 것과 같겠는가? 하물며 바다에 뜬 티끌이 스스로 건널 겨를이 없음에랴. 그림자에게 (형체를)좇지 못하게 한 것은 반드시 비웃음거리의 모양이 될 것이다. 후에 산길을 가는데 나무꾼이 앞길을 막으며 말하기를 先覺後覺을 깨우치는 것이 어찌 빈껍데기인 몸을 아낄 필요가 있겠습니까?”했다. 그에게 나아가니 곧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워하며 또한 깨달아 와서 구하는 이를 막지 않으니 계람산 수석사에 (모인 사람들이)대나무와 갈대 같이 빽빽하였다. 얼마 뒤에 다른 곳의 터를 보아 (집을)짓고 말하기를 매이지 않을 것을 생각하였으나 옮겨갈 수 있는 것은 귀한 것이다.”하였다. 책의 글자만 읽을 뿐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이들로 하여금 세 번 (자신을)되돌아보게 하고, 둥지를 꾸민 자는 아홉 번 생각하게 하였으니 가르침을 내린 것의 기이함이 여섯 번째이다.

 

贈大師 景文大王 心融鼎敎 面謁輪工. 遙深爾思 覬俾我卽, 乃寓書曰, 伊尹大通, 宋纖小見. 以儒辟, 自邇陟遠. 邑巖居 頗有佳所, 木可擇矣 無惜鳳儀. 妙選近侍中可人 鵠陵 昆孫 立言爲使. 旣傳敎已, 因攝齊焉. 答曰, 修身化人 捨靜奚趣. 鳥能之命 善爲我辭, 幸許安塗中 無令在汶上. 上聞之 益珍重. 自是 譽四飛於無翼, 衆一變於不言.

태사를 증직받은 경문대왕이 마음으로는 솥발처럼 정립된(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융합한 이이고, 법륜을 굴리는 장인으로 직접 만나려 하였다. 멀리서 깊이 생각하여 나에게 나아오기를 바랐다. 이에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이윤은 크게 통하였고, 송섬은 작은 것을 보았습니다. 유학으로서 불교를 견주면 가까운 곳으로부터 멀리 오르는 것입니다. 도성 주변에도 속세를 떠나 숨어살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가 있어 새가 나무를 가려 앉듯이 고를 수 있으니 봉황의 모습을 아끼지 마십시오.” 했다. 가까이서 (왕을)모시는 사람(近侍) 가운데 쓸 만한 사람을 잘 뽑아 원성왕(鵠陵)6세손인 김입언을 사자로 삼았다. 교지를 전하기를 마친 후 인하여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대사가) 답하여 말하기를 몸을 닦고 사람을 교화하면서 고요한 곳을 버리고 어디로 나아가겠습니까? 새가 나무를 가려 앉듯이 하라는 명은 나를 위해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행히 진흙탕 가운데(지금 있는 곳에) 편안히 있게 허락하시어 汶上에 있지 않게 하십시오.”했다. 임금(경문왕이)이 듣고 더욱 소중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대사의)명예는 날개가 없어도 사방으로 날아 무리들이 말하지 않음에도 변하였다.

 

咸通五年冬 端儀長翁主 未亡人爲稱, 當來佛是歸. 敬謂下生 厚資上供. 以邑司 所領賢溪山安樂寺 富有泉石之美, 請爲猿鶴主人. 乃告其徒曰, 山號賢溪 地殊愚谷 寺名安樂, 僧盍住持. 從之徙焉, 居則化矣. 使樂山者益靜, 擇地者愼思, 行藏之是一焉.

함통 5(864, 경문왕4) 단의장옹주가 미망인이라 하고서 당래불(미륵불)에 귀의하였다. (대사를)공경하여 (미륵불이)하생했다 이르고 많은 재물을 올렸다. 읍사 관할의 현계산 안락사는 샘과 돌의 아름다움이 많이 있으니 원숭이와 학의 주인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사가) 문도(제자)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산 이름이 賢溪로 땅이 愚谷:어리석은 골짜기)’와는 다르고, 절 이름이 安樂이니 스님으로 어찌 주지하지 않겠는가?”하고는 따라 옮겨서 머무르니 곧 교화되었다. 산을 좋아하는 자로 하여금 더욱 고요하게 하고, 땅을 가리는 자는 생각을 삼가 하게 하였으니 가고 숨는 것이 옳음의 첫 번째이다.

 

他日 告門人曰, 故韓粲 金公嶷勳 度我爲僧, 報公以佛. 乃鑄丈六玄金像, 之以銑. 爰用鎭仁宇, 導冥路. 使行恩者日篤, 重義者風從, 知報之是二焉. 至八年丁亥, 檀越翁主 使茹金等 伽藍南畝曁臧獲本籍授之, 爲懷袍傳舍, 俾永永不易. 大師因念言, 王女資法喜 尙如是矣, 佛孫味禪悅 豈徒然. 我家匪貧 親黨皆歿, 與落路行人之手, 寧充門弟子之腹.

다른 날에 문인(제자)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돌아가신 한찬 김공 억훈은 나를 승적에 넣어 스님이 되게 하였으니 공에게 부처로서 갚겠다.”하고는 곧 장육현금상을 주조하고 금박을 입히고, 이에 인우()를 보호하고 저승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은혜를 행하는 자로 하여금 날로 돈독하게 하고, 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자로 하여금 바람처럼 따르게 하였으니 갚음을 아는 것이 옳음의 두 번째이다. 8년 정해(867, 경문왕7)에 이르러 단월옹주가 여금 등으로 하여금 가람()의 남쪽 밭과 노비의 문서를 주어 오고가는 스님들의 傳舍(여관)를 삼게 하고, 길이 바뀌지 않게 하였다. 대사가 인하여 생각을 말하기를 왕녀가 불법의 기쁨에 의뢰함이 오히려 이와 같은데 부처님의 자손으로서 의 기쁨을 맛보았거늘 어찌 헛되게 하겠는가? 우리 집이 가난하지 않으나 친족이 모두 죽어 길가는 행인들의 손에 떨어지게 하느니 차라리 문제자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 낫다.”하였다.

 

遂於乾符六年, 捨莊十二區 田五百結, 隷寺焉. 飯孰譏囊 粥能銘鼎, 民天是賴 佛土可期. 雖曰我田, 且居王土, 始資疑於王孫韓粲 繼宗 執事侍郞 金八元 金咸熙 及正法大統 釋玄亮, 聲九皐 應千里. 贈太傅 獻康大王 㤎而允之. 其年九月 敎南川郡僧統訓弼, 擇別墅 劃正場. 斯盖外佐君臣益地, 內資父母生天. 使續命者與仁, 賞歌者悛, 檀捨之是三焉.

마침내 건부 6(879, 헌강왕5) (농장) 12구역, 500결을 절에 예속시켰다. 누가 밥주머니라 비방하겠는가? 죽이라도(죽을 먹어도) 솥에 새길 수 있는 것이다.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으니 이에 의지하여 불토(부처님의 땅)를 기약할 수 잇는 것이다. 비록 내 밭이라 하나 왕토(왕의 땅)에 살기 때문에 비로소 왕손 한찬 김계종, 집사시랑 김팔원, 김함희에게 질의하고, 정법사의 대통 현량 스님에게 미치니 소리가 온 하늘에 울리고, 천리 밖에서 대답하였다. 태부를 증직 받은 헌강대왕이 바르게 여겨 허락하였다. 그 해(879) 9월 남천군 승통 훈필로 하여금 별서(농장)를 가려 正場을 구획하게 하였다. 이것은 대개 밖으로는 나라의 토지를 넓혀 임금과 신하를 도운 것이고, 안으로는 부모가 하늘에서 태어나는 것을 도운 것이다. 목숨을 이은 자로 하여금 인을 함께하게 하고, 노래하는 이에게 상을 준 허물을 고치게 하였으니 보시의 옳음이 세 번째이다.

 

有居乾慧地 曰沈忠, 聞大師刃餘定慧, 鑑透乾坤, 志確曇蘭, 術精安廩, 禮足已, 白言, 弟子有剩地, 在曦陽腹. 鳳巖龍谷 境駭橫目, 幸構禪宮. 徐答曰, 吾未能分身, 惡用是.

건혜지에 있는 이로 심충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대사가 이치를 분별하는 칼날이 선정과 지혜에 남음이 있고, 거물이 하늘과 땅을 뚫으며, 뜻이 담란처럼 확고하고, 학술이 안름처럼 정밀하다는 것을 듣고, 찾아 가 예를 갖추어 스스로 말하기를 제자에게 남은 땅이 있는데 희양산 중턱에 있습니다. 봉암과 용곡으로 지경이 눈을 놀라게 할만하니 선종의 절을 지을 수 있으면 다행이겠습니다.”했다. 천천히 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몸을 나눌 수 없으니 어디에 이를 쓰리오.”했다.

 

忠請膠固, 加以山靈有甲騎爲前騶之異, 乃錫挺樵溪而歷相焉. 且見山屛四迾, 則獄鳥翅掀, 水帶百圍, 則虬腰偃. 旣愕且唶, 獲是地也, 庸非天乎. 不爲靑衲之居, 其作黃巾之窟. 遂率先於衆 防後爲基, 起瓦四注以壓之, 鑄鐵像二軀以衛之.

심충의 청이 굳고 더하여 산이 신령하여 갑옷 입은 기마병이 앞으로 치닫는 기이함이 있다 하였다. 이에 석장을 짚고, 나무꾼이 다니는 계곡으로 가서 차례로 살펴보았다. 또한 산이 병풍처럼 사방을 막은 것을 보니 곧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에 편 듯하고 물이 백 겹으로 둘렀으며 이무기가 허리를 돌에 대고 누워 있는 듯하였다. 이미 놀라고 또한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땅을 얻음 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로 하지 않는다면 황건(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하고는 마침내 무리들보다 앞장서 뒤를 막아 터를 만들고, 기와를 인 처마를 일으켜 네 개의 기둥을 누르게 하고, 철로 불상 두 구를 주조하여 절을 지키게 하였다.

 

至中和辛丑年, 敎遣前安輪寺僧統 俊恭 肅正史 裵聿文, 定疆域, ?芸賜爲鳳巖焉. 及大師化往數年, 有山甿爲野冠者 始敢据輪 終能食葚, 得非深𣂏定水 預氵友魔山之巨力歟. 使折臂者標義, 掘尾者制狂, 開發之是四焉.

중화 신축년(881, 헌강왕 7) 교서로 전 안륜사 승통 준공, 숙정대 사 배율문을 보내 (절의)경계를 표시하여 정하게 했다. 이어 편액을 내려 봉암이라 했다. 대사가 가서 교화한 지 몇 년이 지난 후 산에 사는 백성들로 들 도적이 된 자들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감히 법의 수레바퀴를 막았으나 끝내 오디를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깊이 선정의 물을 퍼내어 미리 마구니의 산을 비옥하게 한 큰 힘이 아니겠는가? 팔이 부러진 자로 하여금 의리를 드러내게 하고, 꼬리를 파낸 자로 하여금 미친 기운을 제제하여 (선한 마음을)열어 편 옳음이 네 번째이다.

 

太傅大王 以華風掃弊 慧海濡枯. 素欽靈育之名 渴聽法深之論, 乃注心鷄足 灑翰鶴頭, 以徵之曰, 外護小緣 念踰三際. 內修大惠, 幸許一來. 大師 感動琅函言及, 勝因通世 同塵率土, 懷玉出山. 轡織迎途 至憩足于禪院寺, 錫安信宿 引問心于月池宮. 時屬纖蘿不風 溫樹方夜, 適覩金波之影 端臨玉沼之心.

태부대왕(헌강왕)이 중국의 풍습(제도)를 가지고 폐단을 쓸어내니 지혜의 바다가 마름을 무젖게 하였다. 평소 靈育의 이름을 공경하시어 불법의 깊은 논의를 목마른 듯이 들으시려하여, 이에 마음을 계족산에 두시고 학두서의 글씨체로 붓을 휘둘러 글을 써서 불러 말하기를 밖에서 작은 인연을 보호하다가 잠간 사이에 한 해를 넘었고, 안으로 큰 지혜를 닦을 수 있도록 한 번 오심을 허락하십시오.”했다. 대사가 편지의 말에 좋은 인연은 세상을 통하여 한 나라에서 속세에 묻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한 것에 감동하여 옥을 품고 산을 나오니 말고삐가 베를 짜듯이 길에서 맞이하였다.(수레와 말이 서로 이어 길에서 맞이하였다.) 선원사에 이르러 쉬었는데 편안히 이틀을 쉬자 월지궁에 인도하여 마음을 물었다. 그 때는 덩굴 풀에 바람이 불지 않는 때에 속하고, 온실의 나무에 바야흐로 밤이 될 무렵이었다. 마침 달그림자가 맑은 못 가운데에 똑 바로 비친 것을 보았다.

 

大師俯而覬 仰而告曰, 是卽是, 餘無言. 上洗然欣契曰, 金仙花目 所傳風流, 固協於此. 遂拜爲忘言師. 及出俾藎臣譬旨 幸宜小停, 答曰, 謂牛戴牛 所直無幾. 以鳥養鳥 爲惠不貲. 請從此辭, 枉之則折. 上聞之喟然, 以韻語歎曰, 施旣不留 空門鄧侯. 師是支鶴, 吾非超鷗. 乃命十戒弟子宣敎省副使 馮恕行, 援送歸山. 使待兎者離株, 魚者學網, 出處之侍五焉.

대사께서 엎드려 바라보다가 위로 우러러 고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곧 이것(마음)이니 남은 말이 없습니다.”했다. 임금께서 깨끗한 듯이 기뻐하고 합하여 말씀하시기를 부처님님이 푸른 연꽃을 들어 가섭을 돌아보자 가섭이 미소를 지었다고 전해지는 풍류가 진실로 이에 부합합니다.”하고는 마침내 망언사라 하였다. (궁을)나옴에 이르러 진심으로 힘쓰는 신하로 하여금 (왕의)뜻을 깨닫게(전하게) 하면서 다행히 조금 더 머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청하였다,) 답하여 말하기를 牛戴牛라 말하지만 값나가는 것은 몇 없다. 새를 기르는 방법을 가지고 새를 기르는 것은 은혜가 값나가지 않겠습니까?(은혜가 많을 것입니다.) 이 말을 따를 것을 청합니다. 굽히면 곧 부러질 것입니다.”했다. 임금이 그것을 듣고 韻語로 탄식해 말하기를 베풀어도 머물지 않으니 공문(불교의) 등후로다.”했다. 스님은 이 支遁이 놓아 둔 학인데, 나는 속세를 초월한 갈매기가 아니로다. 이에 10계를 받은 제자 선교성 부사 풍서행에게 명하여 도와 보내 산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토끼를 기다리는 자로 하여금 그루터기를 떠나지 않게 하고, 물고기를 탐내는 자로 하여금 그물 짜는 것을 배우게 하였으니 출처의 정대함이 다섯 번째이다.

 

在世行 無遠近夷險, 未嘗代勞以蹄角. 及還山 氷霓梗跋涉, 乃以栟櫚步輿寵行, 謝使者日, 是豈井大春 所云人車耶. 顧英君所不須, 矧形毁者乎. 然命旣至矣, 受之爲濟苦具. 及移疾于安樂練居, 杖不能起, 始乘之. 使病病者了空, 賢賢者離執, 用捨之是六焉.

세상에서 도를 행할 때 멀고 가깝고 평탄하고 험함이 없이 일찍이 수고로움으로서 말발굽과 뿔(말과 소로)로 대신하게하지 않았다. 산에 돌아감에 이르러 얼음이 얼고 눈이 쌓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넘을 막으므로 이에 (임금이)종려나무로 만든 가마로서 특별히 가게하시니 사자에게 거절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정대춘이 말한 바 사람의 수레이겠습니까? 돌아보면 영특한 인물도 반드시 하지 않는데(타지 않는데)하물며 형상을 무너뜨린 자(스님)에 있어서 이겠습니까? 그러나 왕명이 이미 이르렀으니 그것을 받아 괴로움을 건너는 도구로 삼겠습니다.”했다. 병이 들자 안락사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지팡이를 짚고도 일어나지 못할 정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마를 탔다. 병을 병으로 알고서 근심하는 자로 하여금 공의 도리를 깨달아 알게 하고, 어진 이를 어진 이로 알아 집착에서 떠나게 하였으니 쓰고 버림의 옮음이 여섯 번 째이다.

 

至冬抄旣望之二日, 趺坐悟言之際, 泊然無常. 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 終風谷 則聲咽虎溪, 積雪摧松 則色侔鵠樹. 物感斯極, 人悲可量. 信而假殯于賢溪, 其日而遂窆于羲野.

겨울의 마지막달 기망(16)에서 이틀이 지난날 가부좌를 하고 한 방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평상과 다름없이 고요한 모습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 별이 하늘로 돌아 올라가고, 달이 큰 바다에 떨어지니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골짜기에서 울부짖으니 곧 소리가 호계가 오열하는 듯하고, 눈이 쌓인 소나무가 꺽이니 곧 색이 곡수와 같았다. 사물의 느낌이 이처럼 지극하니 사람의 슬픔을 헤아릴 수 있다. 이틀 밤을 지나 현계산에 임시로 묻었다가 1년 후 마침내 희양산 들에 무덤을 만들었다.

 

其詞曰, 그 사에 이르기를

麟聖依仁仍據德 공자는 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고,

鹿仙知白能守黑 노자는 흰 것을 알아 검은 것을 지켰고

二敎徒稱天下式 두 가르침이 공연히 천하의 법칙이라 일컬으나

螺髻眞人難确力 석가의 가르침은 힘겨루기 어렵다.

十萬里外鏡西域 십 만리 밖 서역의 거울 되었고

一千年後燭東國 일천 년 후 동쪽나라의 촛불이 되었다.

鷄林地在鼇山側 계림의 땅은 오산의 옆에 있는데

仙儒自古多奇特 선과 유가 옛부터 많이 기특하였다.

可憐羲仲不曠職 어여쁜 희중은 직분을 비워두지 않았고

更迎佛日辨空色 다시 佛日을 맞아 공과 색을 분별하였다.

敎門從此分階墄 교문이 이로부터 계단(층계)를 나누었고

言路因之理溝洫 말의 길이 인하여 밭 사이 물길처럼 퍼졌다.

身依兎窟心難息 몸은 토끼 굴에 의지하나, 마음은 쉬기 어려웠고

足蹋羊岐眼還惑 발은 갈래 길을 밟으니 눈은 도리어 미혹하였다.

法海安流眞叵법의 바다에 편안히 흐를 줄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고

心得眼訣苞眞極 마음으로 안결을 얻었으니 참되고 극진함을 포괄하였구나

得之得類罔象得 증득 속의 증득은 망상의 얻음과 같다.

默之默異寒蟬默 침묵 속의 침묵은 한선의 침묵과는 다르고

北山義與南岳陟 북산의 도의와 남악의 홍척은

垂鵠翅與展鵬翼 홍곡의 날개를 드리우고, 붕새의 날개를 폈다.

海外時來道難抑 해외에서 제 때에 돌아 와 도를 억제하기 어렸고

遠流禪河無壅塞 멀리 까지 선의 물이 흘러도 막힘이 없었다.

蓬托麻中能自直 쑥대는 삼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곧을 수 있었고

珠探衣內休傍貸 구슬을 옷 안에서 더듬는데 옆 사람에게 빌리겠는가?

若賢溪善知識 담연 자약한 현계산의 선지식이여

十二因緣匪虛飾 六異六是가 헛된 꾸밈은 아니었다.

何用攀絚兼拊杙 무엇하러 사막을 건너고 산맥을 넘을 것이며

何用舐筆及含墨 무어하러 붓 끝을 빨며, 먹물을 먹일 것인가?

彼或遠學來匍匐 그가 혹 멀리서 유학하여 어렵게 돌아왔다.

我能靜坐降魔賊 내가 고요히 앉아 마적을 항복시킬 수 있고

莫把意樹誤栽植 의념의 나무를 잘못 심어 기르지 말고

莫把情田枉稼穡 정의 밭을 잡아 농사일을 굽히지 말아야 한다

莫把恒沙論萬億 항하사 모래를 만이다 억이다 논함을 잡지 말고

莫把孤雲定南北 외로운 구름을 두고 남북을 정하지 말라

德馨四遠聞詹蔔 덕의 향기는 사방 멀리 치자나무 꽃처럼 알려졌고

惠化一方安社稷 지혜의 교화가 한 나라의 사직을 편안히 하였다.

面奉天花飄縷𧙢 몸소 임금의 은총을 받들어 누더기를 펄럭였고

心憑水月呈禪拭 마음을 물에 비친 달에 비유하여 선식을 바쳤네.

□□佳綿誰入棘 집안의 대를 이을 부유한 처지에서 과연 누가 형극의 길에 들 것인가

腐儒玄杖慙摘埴 썩은 선비의 도로 대사의 情狀을 들추기가 부끄럽도다

跡耀寶幢名可勒 발자취가 보당처럼 빛나니 이름을 새길 만한데

才輸錦頌文難織 나의 재주가 錦頌을 감당하지 못하여 글을 짓기 어렵도다

飮禪悅食 시끄럽고 번거로운 창자로 선열의 공양에 배부르고자

來向山中看篆刻 산중으로 와서 전각을 살펴보노라.

 

(陰記) (비의 뒷면 기록)

太傅王馳醫問疾, 降𩢲營齊. 不暇無偏無頗, 能諧有始有終. 特敎菩薩戒弟子建功鄕令 金立言, 慰勉諸孤, 賜諡智證禪師, 塔號寂照. 仍許勒石, 俾錄狀聞, 門人性蠲 敏休 楊孚 繼徽等 咸得鳳毛, 𣫍陳迹以獻.

태부왕(헌강왕)이 의원을 보내 병을 묻게 하고는 역마를 내려 보내 재를 지내게 하였다. 치우침이 없는 공정한 정사를 보느라 겨를이 없는 사이에도 始終이 한결 같았다. 특히 보살계를 받은 제자이며 건공향의 수령인 김입언에게 명하여 여러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게 하고, 시호로 지증선사, 탑호로 적조를 내렸다. 그대로 비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고, 행장을 기록하여 아뢰라 하였다. 문인 성견, 민휴, 양부, 계휘 등은 모두 재능이 뛰어난 자로 자취를 늘어놓는 것으로서 바쳤다.

 

至乙巳歲 有國民媒儒道 嫁帝鄕 而名掛輪中 職攀柱下者 曰崔致遠. 捧漢后龍緘 賚淮王鵠幣, 雖慙鳳擧, 頗類鶴歸. 上命信臣淸信者陶竹陽 授門人狀, 賜手敎曰, 縷褐東師 始悲遷化, 繡衣西使 深喜東還. 不之爲 有緣而至, 無恡外孫之作, 將酬大士之慈.

을사년(885, 헌강왕 11)에 이르러 국민 가운데 유도를 매개로 하여 황제의 나라에 시집 가 이름을 계륜 가운데에 걸었고, 관직은 주하사에 오른 이가 있으니 신 최치원입니다. 한 후(당나라 희종)의 용함(조칙)을 받들고, 회왕(고변)의 폐백을 가지고 귀국하였으니 비록 봉황이 날아오는 상서로움에는 부끄러우나 자못 학이 돌아 온 것과는 유사합니다. 임금께서 믿을 수 있는 신하로 청신자인(불교신자인) 도죽양에게 명하여 문인에게 받은 행장을 주어 전하게 하고 편지를 내려 말하기를 누더기를 걸친 동쪽의 스님이 돌아가심을 슬퍼하였는데 수를 놓은 옷을 입은 서쪽의 사신이 동쪽으로 돌아 와 매우 기쁘다. 썩지 않을 일을 할 인연이 있어 이르렀으니 아끼지 말고 좋은 글을 지어 장차 대사의 자애로움을 갚도록 하라.”했다.

 

臣也 雖東箭非材, 而南冠多幸. 方思運斧 遽値號弓. 況復國重佛家藏僧史, 法碣相望 禪碑最多. 遍覽色絲 試搜殘錦, 則見無去無來之說 競把斗量, 不生不滅之譚, 動論車載, 曾無魯史新意, 或用同公舊章. 是知石不能言, 益驗道之元遠. 唯懊師化去早, 臣歸來遲. 靉靆字誰告前日, 逍遙義不聞眞決. 每憂傷手 莫悟伸擧, 歎時則露往霜來 遽涸愁鬢, 談道則天高地厚 厪腐頑毫. 將諧汗漫之遊, 始述崆峒之美.

신은 비록 무관의 재능이 아니라 문인인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바야흐로 재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것을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임금의 승하를 만났습니다. 하물며 다시 나라가 불서를 중하게 여기고 집에는 승사를 갈무리하였으며 스님의 비석이 서로 바라보이는데 그 중에 선종 스님의 비가 가장 많았습니다. 두루 좋은 글을 살펴보고 시험 삼아 새롭지 못한 글도 찾아보았는데, 無去無來(감도 없고, 옴도 없다.)의 말이 다투어 말을 헤아릴 정도요, 不生不滅(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는) 말씀이 움직이면 수레에 실을 정도였지만, 일찍이 노나라 역사(춘추) 같은 새로운 뜻이 없었고, 혹 주공의 옛 문장을 쓴 것과 같을 뿐이었다. 이것으로 돌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고, 더하여 도가 멀다는 것을 징험하였습니다. 오직 스님의 돌아가심이 빠르고 신이 돌아옴이 늦은 것을 한탄할 뿐입니다. 애체(靉靆) 두 글자를 가지고 누가 전 날을 알려줄 것인가 소요원에서 설법한 것처럼 참된 비결을 듣지 못하였으니, 매번 손을 상할까 걱정만하고 펴 들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빨리 글을 써야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때를 탄식하면 곧 이슬은 가고, 서리가 와 갑자기 근심으로 희어진 귀밑머리가 시들어 쇠약한 것 같고, 도를 말하자면 곧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터우며, 겨우 뻣뻣한 붓털을 썩힐 뿐입니다. 장차 산만하게 내버려두고 등한히 함의 노님에 어울려만 비로소 공동(광정자:지증대사)의 아름다움을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有門人英爽 來趣受辛, 金口是資 石心彌固. 忍踰刮骨 求甚刻身, 影伴八冬 言資三復. 抑六異六是之屬辭無媿, 賈勇有餘者, 實乃大師 內蕩六魔 外除六蔽 行苞六度 坐證六通故也. 事譬採花 文難削藁, 遂同榛藁勿翦 有慙糠粃在前. 跡追蘭殿之遊, 誰不仰月池佳對. 偈效柏梁之作, 庶幾騰日域高譚. 芬皇寺 釋慧江 書幷刻字 歲八十三. 院主 大德能善·通俊. 都唯那等 玄逸·長解·鳴善. 旦越成碣 西大將軍 着紫金魚袋 蘇判 阿叱彌·加恩縣 將軍 熙弼, 當縣刃㳯治□□□于德明.

龍德四年 歲次甲申 六月 日 竟建.

문인(제자) 영상이 와 受辛(의 파자)을 재촉했지만 금구의 고사를 떠올리며, 돌 같은 마음을 더욱 굳게 하였다. 뼈를 깍는 고통을 참았지만 요구하는 것은 몸에 새기는 것보다 심한 것이다. 그림자는 8년이나 짝하였고, 말은 세 번을 되풀이 한 것에 의지하였다. 저 여섯 가지 기이한 일과, 여섯까지 옳음을 가지고 글을 지은 것에 부끄러움이 없다. 용기를 북돋우어 남음이 있는 자는 실로 곧 대시이시니 안으로는 여섯 마구니를 소탕하고, 밖으로는 여섯 폐단을 제거하였으며, 행하면 六波羅密을 포괄하여 앉아서 六神通을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일은 비유하면 꽃을 채취하는 것과 같고, 글은 초고를 없애는 것이 어렵다. 마침내 개암나무와 마른 나무를 함께 베어내지 못하여 술지개미와 겨를 앞에 둔 듯하여 부끄럽다. 자취가 난전의 노님을 따랐으니 누가 월지의 아름다움을 대면하여 우러르지 않겠는가? 백량을 본받아 게를 지었으니 해 뜨는 지역의 고상한 이야기에 가까울 것이다. 분황사 스님 이 글씨를 쓰고 글자를 새겼는데 나이가 83세였다. 원주는 대덕 능선과 통준이고, 도유나 등은 현일, 장해, 명선이다. 비를 세운 단월로는 서대장군, 자금 어대를 입은 소판 아질미, 가은현 장군 희필, 당현□□□우덕명

 

龍德四年 歲次甲申 六月 日 竟建.

용덕 4(924, 경애왕 1) 세차 갑신 6월 세워 마쳤다.

 

 

 

원문출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고대금석문, 남동신 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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