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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21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大唐新羅國故鳳巖山寺敎諡智證大師寂照之塔碑銘幷序 대당 신라국 돌아가신 봉암산사 시호를 받은 지증대사 적조탑 및 비명과 서문 入朝賀正兼迎奉皇花等使朝請大夫前守兵部侍郞充瑞書院學士賜紫金魚袋 臣 崔致遠奉敎撰 하정사로 당나라에 들어갔고, 겸하여 황화(황제의 칙사) 등의 사신을 맞아 받드는 조청대부 전수병부시랑 충 서서원 학사, 자금어대를 내린 신 최치원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 敍曰, 五常分位 配動方者曰仁心 三敎立名 顯淨域者曰佛. 仁心卽佛 佛目能仁則也. 道郁夷柔順性源 達迦衛慈悲敎海, 寔猶石投水 雨聚沙然. 矧東諸侯之外守者 莫我大, 而地靈旣好生爲本 風俗亦交讓爲主. 熙熙太平之春 隱隱上古之化. 加以姓參釋種 遍頭居寐錦之尊, 語襲梵音 彈舌足多羅之字. 是乃天彰西顧 海引東流, 宜君子之鄕也, 法王之道 日日深又日深矣. 서술하여 말한다. 인.. 2024. 3. 7.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비문 有唐新羅國故知異山雙谿寺敎諡眞鑒禪師碑銘幷序. 당나라 신라국 돌아가신 지리산 쌍계사 임금에게서 시호를 받은 진감선사 비의 명과 서 前西國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 奉敎撰幷書·篆額. 전 서국(당 나라)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고,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하인 최치원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비문을)짓고, 글씨를 쓰며, 전액을 썼다. 夫道不遠人, 人無異國. 是以, 東人之子, 爲釋ㆍ爲儒, 必也西浮大洋, 重譯從學. 命寄刳木, 心懸寶洲, 虛往實歸, 先難後獲, 亦猶采玉者, 不憚崐丘之峻, 探珠者, 不辞驪壑之深. 遂得慧炬則光融五乘, 嘉肴則味飫六籍, 競使千門入善, 能令一國興仁. 而學者或謂, 身毒與闕里之說敎也, 分流異體, 圜鑿方枘, 互相矛楯, 守滯一隅. 嘗試論之, 說詩者, 不以文害辭, 不以辞害志. 禮所謂,.. 2024. 2. 27.
양위표 讓位表 出典: 《東文選》 卷43, 表箋 臣某言。臣聞欲而不貪。駕說於孔門弟子。德莫若讓。騰規於晉國行人。苟竊位 自安。則妨賢是責。臣假威天睠。承乏海隅。雖非法令滋彰。未免寇盜充斥。遑恤于後。勇退爲先。敢言善自爲謀。實慮刑玆無赦。中謝。 臣以當國。雖欝壘之蟠桃接境。不尙威臨。且夷齊之孤竹連彊。本資廉退。矧假九疇之餘範。早襲八條之敎源。言必畏天。行皆讓路。蓋禀仁賢之化。得符君子之名。故籩豆饁田。鍦矛寄戶。俗雖崇於帶劒。武誠貴於止戈。 임금의 자리를 사영하는 표문 신 아무개가 아룁니다. 신이 듣기로 바라되 탐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자의 제자 에게 말하였고, 덕은 사양함만 같음이 없다는 것은 晋나라 행인에게서 나왔다. 구차히 자리(임금의 자리)를 훔쳐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면 곧 어진이를 해친다는 꾸짖음을 듣습니다. 신은 하늘(천자의)이 돌아보는 위엄을 빌.. 2024. 2. 16.
최치원 열전 崔致遠 字孤雲(或云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 不知其世系 致遠少 精敏好學 至年十二 將隨海舶入唐求學 其父謂曰 “十年不第 卽非吾子也 行矣勉之” 致遠至唐追師 學問無怠 乾符元年甲午 禮部侍郞裴瓚下 一擧及第 調授宣州溧水縣尉 考績爲承務郞侍御史內供奉 賜紫金魚袋 최치원은 자가 고운(혹은 해운이라 한다.)으로 왕경(서울:경주) 사량부 사람이다. 역사서의 전이 없어져 그 세계를 알지 못한다. 최치원은 어려서 정민하고(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장차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 가 배움을 구하려 하였다. 그 아버지가 일러 말하기를 “10년만에 급제하지 못하면 곧 내 아들이 아니다. 힘써 공부하라.”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이르러 스승을 따라 배우고 묻기를 게을리 하하지 않았다. 건부 1년(경문왕14년.. 2024.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