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九回:兄逼弟曹植賦詩,姪陷叔劉封伏法
제89회 형(조비)이 동생을 핍박하니 조식은 시를 짓고, 조카로 숙부를 함정에 빠트린 유봉은 법에 따라 죽음을 당하다.
卻說曹丕聞曹彰提兵而來,驚問眾官;一人挺身而出,願往折服之。眾視其人,乃諫議大夫賈逵也。曹丕大喜,即命賈逵前往。逵領命出城,迎見曹彰。彰問曰:「先王璽綬安在?」逵正色而言曰:「家有長子,國有儲君,先王璽綬,非君侯之所宜問也。」彰默然無語,乃與賈逵同入城。至宮門前,逵問曰:「君侯此來,欲奔喪耶?欲爭位耶?」彰曰:「吾來奔喪,別無異心。」逵曰:「既無異心,何故帶兵入城?」彰即時叱退左右將士,隻身入內,拜見曹丕。兄弟二人,相抱大哭。曹彰將本部軍馬盡交與曹丕。丕令彰回鄢陵自守,彰拜辭而去。
각설하고 조비는 조창이 군대를 데리고 온다는 것을 듣고 놀라 여러 관리들에게 물으니 한 사람이 몸을 빼 앞으로 나와 가서 그를 복종시킬 것을 원한다고 했다. 무리들이 그 사람을 보니 곧 간의대부 가규였다. 조비가 크게 기뻐하며 곧 가규에게 명하여 앞으로 가게 하였다. 가규는 명을 받고 성을 나가 조창을 맞아 만났다. 조창이 물어 말하기를 “선왕의 옥쇄는 어디에 있는가?”하니 가규가 얼굴 색을 바로하고 말하기를 “집에는 장자가 있고, 나라에는 저군이 있으니 선왕의 옥쇄를 군후께서 물을 바가 아닙니다.”했다. 조창은 묵묵히 말이 없이 곧 가규와 함께 성에 들어갔다. 궁문 앞에 이르러 가규가 물어 말하기를 “군후께서 여기에 온 것은 아버지 상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온 것입니까? 왕위를 다투려 해서입니까?”하니 조창이 말하기를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상에 대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요 따로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했다. 가규가 말하기를 “이미 다른 마음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군대를 데리고 성에 들어 온 것입니까?”했다. 조창은 즉시 좌우의 장사를 물리치고 홀로 안에 들어 가 절하며 조비를 뵈었다.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안고 크게 목하였다. 조창은 본부의 군마를 모두 조비에게 주었다. 조비는 조창을 언릉으로 돌아 가 스스로 지키게 하니 조창이 절하며 하직하고 갔다.
於是曹丕安居王位,改建安二十五年為延康元年。封賈詡為太尉,華歆為相國,王朗為御史大夫。大小官僚,盡皆陞賞。諡曹操曰武王,葬於鄴郡高陵。令于禁董治陵事。禁奉命到彼,只見陵屋中白粉壁上,圖畫關雲長水渰七軍擒獲于禁之事:畫雲長儼然上坐,龐德憤怒不屈,于禁拜伏於地,哀求乞命之狀。原來曹丕以于禁兵敗被擒,不能死節,既降敵而復歸,心鄙其為人,故先令人圖畫陵屋粉壁,故意使之往見以愧之。當下于禁見此畫像,又羞又惱,氣憤成病,不久而死。後人有詩歎曰:
이에 조비는 왕위에 올라 건안 이십오면을 연강 원년으로 바꾸었다. 가후를 봉하여 태위로 삼고, 하후를 상국으로 삼고, 왕랑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대소 관료들이 모두 승진하고 상을 받았다. 조조의 시호를 무왕이라 하고 엄군 고릉에 장례하였다. 우금으로 하여금 릉을 조성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우금이 명을 받들어 그곳에 이르니 능 안에 가루를 벽에 바르고 관운장이 물로 칠군을 잠기게 하고 우금을 사로잡은 일을 그렸는데 그림에 관운장은 당당히 위에 앉아 있고 방덕은 분노하여 굽히지 않았으나 우금은 땅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알고 보니 조비는 우금의 군대가 패하여 사로잡혔을 때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항복한 뒤 돌아왔으므로 마음으로 그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먼저 사람으로 하여금 능 안 벽에 흰 가루 칠을 하고 그림을 그리게 한 뒤 일부러 그로 하여금 가서 보고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때 우금은 이 그림을 보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번뇌하고, 분노하다 병이 들었는데 오래지 않아 죽었다. 후세 사람이 시를 지어 탄식한 것이 있는데 시에는
三十年來說舊交,可憐臨難不忠曹。知人未向心中識,畫虎今從骨裏描。
“삼십년이 지나는 동안 오래 사귀었다 말하더니 불쌍하구나! 어려움에 임하여 조조에게 충성하지 못하였다. 사람을 안다하나 마음속은 알지 못하고. 범을 그린다고 뼈 속으로부터 그리겠는가?” 했다.
卻說華歆奏曹丕曰:「鄢陵侯已交割軍馬,赴本國去了;臨淄侯植,蕭懷侯熊,二人竟不來奔喪,理當問罪。」丕從之,即分遣二使往二處問罪。
각설하고 화흠이 조비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언릉후가 이미 군마를 인도하였으니 본국으로 가게하고, 임치후 조식, 소회후 조웅 두 사람은 끝내 상(장례)에 오지 않았으니 이치상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합니다.”했다. 조비가 그것을 따라 곧 두 사신을 시켜 두 곳에 가서 죄를 묻게 하였다.
不一日,蕭懷使者回報:「蕭懷侯曹熊懼罪,自縊身死。」丕令厚葬之,追贈蕭懷王。又過了一日,臨淄使者回報,說:「臨淄侯日與丁儀、丁廙兄弟二人酣飲,悖慢無禮;聞使命至,臨淄侯端坐不動。丁儀罵曰:『昔日先王本欲立吾主為世子,被讒臣所阻;今王喪未遠,便問罪於骨肉,何也?』丁廙又曰:『據吾主聰明冠世,自當承嗣大位,今反不得立。汝那廟堂之臣,何不識人才若此!』臨淄侯因怒叱武士,將臣亂棒打出。」
하루가 되지 않아 소회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소회후 조웅이 죄를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했다. 조비는 후하게 장례하게하고 소회왕이라 추증하였다. 또 하루가 지나 임치에 갔던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여 말하기를 “임치후는 날로 정의, 정이 형제 두 사람과 술을 마시며 패악, 오만하고 무례하였으나 사자가 이르렀음을 듣고도 임치후는 단정히 앉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정의가 욕하며 말하기를 ‘지난날 선왕(조조)은 본래 우리 주공을 세워 세자로 삼으려 하였는데 참소하는 신하에게 저지당하였고, 지금 왕(조비)은 상(조조의 죽음)을 당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곧 골육(형제)에게 죄를 물으니 무엇 때문인가?’하였고, 정이가 또 말하기를 ‘우리 주공(조식)은 총명하기로 세상에 으뜸이니 당연히 대위(왕위)를 계승해야 하는데 지금 도리어 즉위하지 못하였다. 너는 묘당(조정)의 신하로 어찌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함이 이 같은가!’하니 임치후가 노하여 무사를 질책하여 신을 잡아 몽둥이로 어지럽게 치고 내쫒았습니다.”했다.
丕聞之,大怒,即令許褚領虎衛軍三千,火速至臨淄擒曹植等一干人來。褚奉命,引軍至臨淄城。臨淄守將攔阻,褚立斬之,直入城中,無一人敢當鋒銳,逕到府堂。只見曹植與丁儀、丁廙等盡皆醉倒。褚皆縛之,載於車上,并將府下大小屬官,盡行拿解鄴郡,聽候曹丕發落。丕下令,先將丁儀、丁廙等盡皆誅戮。丁儀字正禮,丁廙字敬禮,沛國人,乃一時文士;及其被殺,人多惜之。
조비가 그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곧 허저로 하여금 호위군 삼천을 거느리고 불 같이 빠르게 임치에 가 조식 등 일천 명을 잡아오게 하였다. 허저는 명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임치성에 이르렀다. 임치를 지키는 장수가 막으니 허저가 즉시 베고 바로 성 안에 들어가니 한 사람도 예봉을 막는 이가 없어 빠르게 관청에 이르렀다. 조식과 정의, 정이 등을 보니 모두 술에 취해 엎어져 있었다. 허저가 모두 묶어서 수레에 태워 아울러 관청에 속한 대소 관리를 데리고 모두 업군으로 압송하여 조비의 처리를 기다렸다. 조비가 명령을 내려 먼저 정의, 정이 등을 모두 주륙하게 하였다. 정의는 자가 정례이고, 정이는 자가 경례인데 패국 사람으로 한 때의 문사였다. 그들이 죽음을 당하자 사람들이 많이 애석하게 여겼다.
卻說曹丕之母卞氏,聽得曹熊縊死,心甚悲傷;忽又聞曹植被擒,其黨丁儀等已殺,大驚。急出殿,召曹丕相見。丕見母出殿,慌來拜謁。卞氏哭謂丕曰:「汝弟植平生嗜酒疏狂,蓋因自恃胸中之才,故爾放縱。汝可念同胞之情,存其性命。吾至九泉亦瞑目也。」丕曰:「兒亦深愛其才,安肯害他?今正欲戒其性耳。母親勿憂。」
각설하고 조비의 어머니 변씨는 조웅이 목을 내어 죽었다는 것을 듣고 매우 슬퍼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또 조식이 잡히고, 그 무리 정의 등이 이미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을 듣고 크게 놀랐다. 급히 전각을 나와 조비를 불러 만났다. 조비는 어머니가 전각을 나온 것을 보고 황망히 와서 절하며 뵈었다. 변씨가 곡하며 조비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의 동생 조식이 평생 술을 즐기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한 것은 스스로 가슴 속의 재주를 믿었기 때문이니 너는 놓아 주라. 너는 동포의 정을 생각하여 그 생명을 보존해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내가 구천(저승)에 이르러도 또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했다. 조비가 말하기를 “제가 또한 깊이 아끼니 어찌 기꺼이 그를 해치겠습니까? 지금 바로 그 성품을 경계할 따름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했다.
卞氏洒淚而入。丕出偏殿,召曹植入見。華歆問曰:「適來莫非太后勸殿下勿殺子建乎?」丕曰:「然。」歆曰:「子建懷才抱智,終非池中物;若不早除,必為後患。」丕曰:「母命不可違。」歆曰:「人皆言子建出口成章,臣未深信。主上可召入,以才試之。若不能,即殺之;若果能,則貶之,以絕天下文人之口。」
변씨가 눈물을 흘리며 들어갔다. 조비는 편전으로 나와 조식을 불러들인다. 화흠이 물어 말하기를 “방금 태후께서 전하에게 자건(조식)을 죽이지 말라고 권한 것이 아님이 없을 것입니다.(아닙니까?)”하니 조비가 말하기를 “그러하다.”했다. 화흠이 말하기를 “자건(조식)은 재능과 지혜를 품었으니 끝내 못 안의 물건이 아닙니다. 만약 일찍 제거하지 않으시면 반드시 뒤에 금심거리가 될 것입니다.”했다. 조비가 말하기를 “어머니의 명을 어길 수 없다.”하니 화흠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자건은 입을 열면 문장을 이룬다고 말하나 신은 깊이 믿지 못하겠습니다. 주상(조비)께서는 불러 들어오면 재능으로서 시험해 보십시오. 만약 하지 못한다면 곧 죽이시고, 과연 할 수 있다면 곧 내치는 것으로서 천하 문인들의 입(비난)을 끊으십시오.”했다.
丕從之。須臾,曹植入見,惶恐伏拜請罪。丕曰:「吾與汝情雖兄弟,義屬君臣;汝安敢恃才蔑禮?昔先君在日,汝常以文章誇示於人,吾深疑汝必用他人代筆。吾今限汝行七步吟詩一首。若果能則免一死;若不能,則從重治罪,決不姑恕。」植曰:「願乞題目。」
조비는 따르지 않았다. 잠시 후 조식이 들어 와 (조비를) 뵙고 놀라고 두려워하며 엎드려 절하며 죄를 청하였다. 조비가 말하기를 “나와 너는 정으로는 비록 형제이나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이다. 너는 어찌하여 감히 재능을 믿고 예를 업신여기는가? 옛날 선군(조조)이 살아 계실 때 너는 항상 문장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였으나 나는 네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써서 대신 쓰게 하였을 것이라 깊이 의심하였다. 나는 지금 네가 일곱 걸음을 가는 동안 시 한수를 읊게 할 것이다. 만약 과연 할 수 있다면 곧 죽음을 면할 것이고, 만약 하지 못한다면 곧 무겁게 죄를 다스려(무거운 법을 따라) 결단코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했다. 조식이 말하기를 “제목을 청합니다.”했다.
時殿上懸一水墨畫,畫著兩隻牛,鬥於土牆之下,一牛墜井而亡。丕指畫曰:「即以此畫為題。詩中不許犯著『二牛鬥牆下,一牛墜井死』字樣。」植行七步,其詩已成。詩曰:
그 때 전각 위에 하나의 수묵화가 걸려 있었는데 두 마리 소가 흙담 아래서 싸우다 한 마리 소가 우물에 떨어져 죽는 것이 그려져 있었다. 조비가 그림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곧 이 그림으로서 제목을 삼겠다. 시 안에 ‘두 소가 담장 아래서 싸우다 한 소가 우물에 떨어져 죽는다.’는 자양(잣구)를 써서는 안 된다.”했다. 조식이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가 이미 이루어졌다.
兩肉齊道行,頭上帶凹骨。相遇由山下,欻起相搪突。二敵不俱剛,一肉臥土窟。非是力不如,盛氣不泄畢。
“두 고기가 함께 길을 가는데 머리 위에 오목한 뼈를 둘렀구나. 산 아래를 지나다 서로 만나 갑자기 서로 치고 나가려 하네. 두 적이 모두 굳세지 못해, 한 고기는 토굴에 누웠다. 이는 힘이 못해서가(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성대한 기운을 내지 못했을 뿐이다.” 했다.
曹丕及群臣皆驚。丕又曰:「七步成章,吾猶以為遲。汝能應聲而作詩一首否?」植曰:「願即命題。」丕曰:「吾與汝乃兄弟也。以此為題。亦不許犯著『兄弟』字樣。」植略不思索,即口占一首曰:
조비와 여러 신하들이 크게 놀랐다. 조비가 또 말하기를 “일곱 걸음에 문장을 이루었으나 나는 오히려 늦었다고 여긴다. 너는 들음에 응하여 시 한 수를 지을 수 있겠느냐?”하니 조식이 말하기를 “곧 주제를 명하시기를 원합니다.”했다. 조비가 말하기를 “나와 너는 형제이다. 이로서 주세를 삼으라. 또한 ‘형제’라는 글귀를 쓰지 말라”하니 조식은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 수를 읊었다. 시는
煮豆燃豆萁,豆在釜中泣。本是同根生,相煎何太急!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으니 콩이 솥 안에서 울었다. 본시 같은 뿌리에서 났지만 서로 졸이는 것이(삶는 것이) 어찌 이리도 급한가!”했다.
曹丕聞之,潸然淚下。其母卞氏,從殿後出曰:「兄何逼弟之甚耶?」丕慌忙離坐告曰:「國法不可廢耳。」於是貶曹植為安鄉侯。植拜辭上馬而去。
조비는 그것을 듣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 어머니 변씨가 전각 뒤로부터 나와 말하기를 “형은 어찌 동생을 핍박함이 심한가?”하니 조비가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하여 말하기를 “국법을 없앨 수 없었을 뿐입니다.”하고는 이에 조식을 내쳐 안향후로 삼았다. 조식은 절하며 하직하고 말에 올라 갔다.
曹丕自繼位之後,法令一新,威逼漢帝,甚於其父。早有細作報入成都。漢中王聞之,大驚,即與文武商議曰:「曹操已死,曹丕繼位,威逼天子,更甚於操。東吳孫權,拱手稱臣。孤欲先伐東吳,以報雲長之讎;次討中原,以除亂賊。」
조비는 왕의 자리를 이은 후부터 법령을 일신하고 위력으로 한나라 황제를 핍박하기를 그 아버지보다 심하게 하였다. 일찍이 세작(첩자)이 있어 성도에 보고하였다. 한중왕(유현덕)이 듣고 크게 놀라 곧 문무관과 상의하여 말하기를 “조가 죽은 후 조비가 왕위를 잇고, 이력으로 천자를 핍박하기를 다시 조조보다 심하게 하고, 동오의 손권은 손을 맞잡고 신하를 일컬고 있다. 내가 먼저 동오를 정벌하는 것으로서 관운장의 원수를 갚고, 다음으로 중원을 토벌하는 것으로서 난적(어지럽게 하는 도적)을 제거하려 한다.”했다.
言未畢,廖化出班,哭拜於地曰:「關公父子遇害,實劉封、孟達之罪。乞誅此二賊。」玄德便欲遣人擒之。孔明諫曰:「不可。且宜緩圖之。急則生變矣。可陞此二人為郡守,分調開去。然後可擒。」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요화가 나와 곡하며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관공(관운장)부자가 해를 당한 것은 실로 유봉과 맹달의 죄입니다. 이 두 도적을 주살할 것을 청합니다.”했다. 유현덕이 곧 사람을 보내 사로잡아 오게 하려하였다. 제갈공명이 간하여 말하기를 “안 됩니다. 또한 천천히 도모해야 합니다. 급히 하면 변이 생길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을 승진시켜 군수로 삼고 나누어 갈라지게 한 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했다.
玄德從之,遂遣使陞劉封去守綿竹。原來彭羕與孟達甚厚,聽知此事,急回家作書,遣心腹人馳報孟達。使者方出南門外,被馬超巡視軍捉獲,解見馬超。超審知此事,即往見彭羕。羕接入,置酒相待。
유현덕이 그것을 따라 마침내 사자를 보내 유봉을 승진시켜 면죽에 가 지키게 하였다. 알고 보니 팽양과 맹달은 교분이 매우 두터워 이 일을 알자 급히 집에 돌아 가 글을 써 심복을 시켜 달려가 맹달에게 알리게 하였다. 사자가 막 남문 밖을 나가다 마초의 순시군에 잡혀 마초에게 압송되었다. 마초가 심문하여 이 일을 알고는 곧 팽양에게 가 만났다. 팽양이 영접해 들이고 술을 두고 대접하였다.
酒至數巡,超以言挑之曰:「昔漢中王待公甚厚,今何漸薄也?」羕因酒醉,恨罵曰:「老革荒悖,吾必有以報之!」超又探曰:「某亦懷怨心久矣。」羕曰:「公起本部軍,結連孟達為外合,某領川兵為內應,大事可圖也。」超曰:「先生之言甚當。來日再議。」
술이 몇 차례 돌자 마초가 말로 찔러 말하기를 “옛날 한중왕은 공을 매우 두텁게 대우하였는데 지금 어찌 점점 소홀히 대접합니까?”하니 팽양이 술에 취하여 원망하고 욕하며 말하기를 “노혁(늙은 병사)가 거칠고 어긋나게 하니 내가 반드시 갚을 것입니다!”했다. 마초가 또 엿보아(슬그머니) 말하기를 “내가 또한 원망하는 마음을 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하니 팽양이 말하기를 “공이 본부의 군대를 일으키고 맹달과 결연하여 밖에서 합하시고 제가 천(동천과 서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안에서 응하면 큰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했다. 마초다 말하기를 “선생의 말이 매우 합당합니다. 내일 다시 의논하겠습니다.”했다.
超辭了彭羕,即將人與書解見漢中王,細言其事。玄德大怒,即令擒彭羕下獄,拷問其情。羕在獄中,悔之無及。玄德問孔明曰:「彭羕有謀反之意,當何以治之?」孔明曰:「羕雖狂士,然留之久必生禍。」於是玄德賜彭羕死於獄。
마초는 팽양을 하직하고 곧 사람과 압수한 글을 가지고 한중왕(유현덕)을 뵙고 그 일을 자세히 말하였다. 유현덕이 크게 노하여 곧 팽양을 잡아 옥에 가두게 하고 그 실정을 물었다. 팽양이 옥에 있으면서 후회하여도 미칠 수 없었다. 유현덕이 제갈공명에게 물어 말하기를 “팽양이 모반의 뜻이 있었으니 어떻게 다스리는 것이 마땅합니까?”하니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팽양이 비록 광사(뜻만 고상하고 행실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나 오래 머물게 하면 반드시 재앙을 낳을 사람입니다.”했다. 이에 유현덕은 팽양을 감옥에서 죽게 했다.
彭羕既死,有人報知孟達。達大驚,舉止失錯。忽使命至,調劉封回守綿竹去訖。孟達慌請上庸、房陵都尉申耽、申儀弟兄二人商議曰:「我與同有功於漢中王;今孝直已死,而漢中王忘我前功,乃欲見害,為之奈何?」耽曰:「某有一計,使漢中王不能加害於公。」
팽양이 죽은 후 어떤 사람이 맹달에게 알렸다. 맹달이 크게 놀라 행동이 허둥대었다. 홀연히 사명(사자)이 이르러 유봉을 뽑아 면죽에 돌아 가 지키게 했다. 맹달이 다급히 상용, 호릉도위 신탐, 신의 형제를 청하여 상의하여 말하기를 “나와 법효직(법정)은 같이 한중왕(유현덕)에게 공이 있는데 지금 효직(법정)은 이미 죽고, 한중왕(유현덕)은 나의 앞 공적을 잊고 나를 해치려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했다. 신탐이 말하기를 “나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으니 한중왕(유현덕)이 공(맹달)을 해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했다.
達大喜,急問何計。耽曰:「吾弟兄欲投魏久矣;公可作一表,辭了漢中王,投魏王曹丕,丕必重用。吾二人亦隨後來降也。」達猛然省悟,即寫表一通,付與來使;當晚引五十餘騎投魏去了。使命持表回成都,奏漢中王,言孟達投魏之事。先主大怒。覽其表曰:
맹달이 크게 기뻐하며 급히 무슨 계책인지를 물었다. 신탐이 말하기를 “내 동생과 형은 위나라에 투항하고자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공(맹달)께서 표 한통을 지으시고 한중왕(유현덕)을 하직하고 위나라 왕 조비에게 들어가면 조비는 반드시 중용할 것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또한 뒤를 따라 가서 항복하겠습니다.”했다. 맹달이 그럴듯하게 여겨 곧 표 한 통을 써서 온 사자에게 주고 오십여 기를 이끌고 위나라에 들어갔다. 사명(사자)이 (맹달의)표를 가지고 성도에 돌아 가 한중왕(유현덕)에게 아뢰어 맹달이 위나라에 들어 간 일을 말하였다. 선주(유현덕)이 크게 노하였다. 그 표를 보니 표에
「臣達伏惟殿下將建伊呂之業,追桓文之功,大事草創,假勢吳楚,是以有為之士,望風歸順。臣委質以來,愆戾山積;臣猶自知,況於君乎?今王朝英俊鱗集,臣內無輔佐之器,外無將領之才,列次功臣,誠足自愧!臣聞范蠡識機,浮於五湖;舅犯謝罪,逡巡河上。夫際會之間,請命乞身,何哉?欲潔去就之分也。況臣卑鄙,無元功勳,自繫於時,竊慕前賢,早思遠恥。昔申生至孝,見疑於親;子胥至忠,見誅於君;蒙恬拓境而被大刑,樂毅破齊而遭讒佞。臣每讀其書,未嘗不感慨流涕;而親當其事,益用傷悼!邇者,荊州覆敗,大臣失節,百無一還;惟臣尋事,自致房陵、上庸,而復乞身自放於外。伏願殿下聖恩感悟,愍臣之心,悼臣之舉。臣誠小人,不能始終。知而為之,敢謂非罪?臣每聞『交絕無惡聲,去臣無怨辭』臣過奉教於君子,願君王勉之。臣不勝惶恐之至!」
“신 맹달이 엎드려 생각하건데 전하께서는 이윤과 여상(강태공)의 기업을 세우시고 환공과 문공의 공을 미루어 대사를 창업하시고 오와 초의 세력을 빌리셨기 때문에 훌륭한 일을 하는 선비들은 풀이 바람을 향해 눕듯이 귀순하였습니다. 신이 귀순한 이래로 허물이 산처럼 쌓였음을 신이 오히려 스스로 알고 있사온데 하물며 임금에 있어서이겠습니까?(임금은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왕의 조정에는 재능이 출중한 이들이 무리지어 모여 있는데 신은 안으로 보좌할 기량이 없고, 밖으로는 (군대를)거느릴만한 재능이 없음에도 공신의 반열에 차례(자리)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스스로 부끄럽게 여깁니다. 신이 듣기에 범려는 시기를 알아 오호에서 배를 탔고(오호에서 떠돌았고), 구범은 사죄하고 강(황하) 위로 물러났습니다. 대저 서로 만남의 사이에는 목숨을 살려줄 것을 청하고 몸이 물러나는 것을 청하는 것은 왜이겠습니까? 떠나고 나아감의 구분을 깨끗이 하고자 해서입니다. 하물며 신은 비루하고 큰 공훈이 없음에도 스스로 때에(이에) 매달리고, 남몰래 앞 시대의 현명한 이를 사모하며 일찍부터 부끄러움을 멀리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옛날 신생은 효를 직극히 하였으나 어버이에게 의심을 당하였고, 오자서는 충성을 지극히 하였으나 임금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몽렴은 국경을 개척하였으나 큰 형벌을 받았으며, 악의는 제나라를 깨트리고도 아첨하고 참소하는 말을 만났습니다.(모함을 당하였습니다.) 신은 매번 그 글을 읽을 때마다 일찍이 마음속으로 감격하고 마음속에 깊이 사무치는 느낌에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는데 직접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더욱 서글퍼집니다. 근자에는 형주가 무너졌고 대신은 절개를 잃어 백 명에 하 명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신만은 일을 생각하여 스스로 방릉과 상용에 이르러 다시 스스로 밖으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데 전하께서는 성스러운 은혜로 느끼고 깨달으시어 신의 마음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신의 행동을 불쌍하게 여겨주십시오. 신은 진실로 소인으로 시작과 마침을 잘 하지 못합니다. 알면서도 그것을 하였으니 감히 죄가 아니라 말하겠습니까? 신이 매번 들으니 ‘사귐을 끊어도 비방하는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하고, 떠나는 신하는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합니다. 신은 과거 군자에게서 가르침을 받드오니 군왕께서는 힘쓰시기를 원합니다. 신은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했다.
玄德看畢,大怒曰:「匹夫叛吾,安敢以文辭相戲耶!」即欲起兵擒之。孔明曰:「可就遣劉封進兵,令二虎相併;劉封或有功,或敗績,必歸成都,就而除之,可絕兩害。」玄德從之,遂遣使到綿竹,傳諭劉封。封受命,率兵來擒孟達。
유현덕이 보기를 마치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필부가 나를 배반하고 어찌 감히 문장으로서 희롱하는가!”하고는 곧 군대를 일으켜 잡으려 하였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유봉을 보내 군대를 진군시켜 두 범이 서로 다투게 해야합니다. 유봉은 혹 공이 있거나, 혹은 패하거나 반드시 성도로 돌아올 것이니 나아가 제거하시면 두 해를 끊을 수 있습니다.”했다. 유현덕이 그것을 따라 마침내 사자를 보내 면죽에 이르러 유봉에게 명을 전하게 하였다. 유봉이 명을 받도 군대를 이끌고 맹달을 잡으러 갔다.
卻說曹丕正聚文武議事,忽近臣奏曰:「蜀將孟達來降。」丕召入問曰:「汝此來,莫非詐降乎?」達曰:「臣為不救關公之危,漢中王欲殺臣,因此懼罪來降,別無他意。」曹丕尚未准信,忽報劉封引五萬兵來。取襄陽,單搦孟達廝殺。丕曰:「汝既是真心,便可去襄陽取劉封首級來,孤方准信。」達曰:「臣以利害說之,不必動兵,令劉封亦來降也。」
각설하고 조비는 바로 문무관을 모아 일을 의논하고 있는데 홀연히 근신이 아뢰기를 “촉의 장수 맹달이 항복하러 왔습니다.”했다. 조비가 불러들여 물어 말하기를 “네가 여기에 온 것은 거짓 항복이 아님이 틀림없는가?”하니 맹달이 말하기를 “신이 관공(관운장)의 위태로움을 구원하지 않아 한중왕(유현덕)이 신을 죽이려하기 때문에 죄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는 것이지 따로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했다. 조비는 오히려 믿지 못하였다. 홀연히 유봉이 오만의 군대를 이끌고 왔는데 양양을 차지하고 오직 맹달을 죽이려 합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조비가 말하기를 “네가 진실된 마음이라면 곧 양양에 가서 유봉의 수급을 가지고 오면 내가 비로소 믿겠다.”했다. 맹달이 말하기를 “신이 이로움과 해됨을 가지고 설득하면 반드시 군대를 동원하지 않아도 유봉으로 하여금 또한 와서 항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했다.
丕大喜,遂加孟達為散騎常侍、建武將軍、平陽亭侯,領新城太守,去守襄陽、樊城。原來夏侯尚、徐晃已先在襄陽,正將收取上庸諸部。孟達到了襄陽,與二將禮畢,探得劉封離城五十里下寨。達即修書一封,使人齎赴蜀寨招降劉封。劉封覽書大怒曰:「此賊誤吾叔姪之義,又間吾父子之親,使吾為不忠不孝之人也!」遂扯碎來書,斬其使。次日,引軍前來搦戰。
조비가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맹달을 산기상시 건무장군 평양정후 신성태수로 삼아 가서 양양과 번성을 지키게 하였다. 원래 하후상, 서황이 이미 먼저 양양에 있으면서 바로 상용의 여러 부를 거두려하였다. 맹달이 양양에 이르러 두 장수와 예를 마치고 알아보니 유봉이 성에서 오십 리 떨어진 곳에 영채를 두고 있는 것을 알아내었다. 맹달은 곧 글 한 통을 써서 사람을 시켜 가지고 촉의 영채에 가 유봉에게 항복하라고 했다. 유봉은 글을 읽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 도적이 우리 숙질의 의리를 잘못되게 하고서 또 우리 부자의 친함을 이간하여 나로 하여금 불충불효의 사람으로 만들려하는구나!”하고는 마침내 가지고 온 글을 찢어버리고 그 사자를 베어 죽였다. (유봉은)다음 날 군대를 이끌고 앞으로 나와 싸움을 걸었다.
孟達知劉封扯書斬使,勃然大怒,亦領兵出迎。兩陣對圓,封立馬於門旗下,以刀指罵曰:「背國反賊,安敢亂言!」孟達曰:「汝死已臨頭,還自執迷不省!」封大怒,拍馬輪刀,直奔孟達。戰不三合,達敗走,封乘虛追殺二十餘里,一聲喊起,伏兵盡出。左邊夏侯尚殺來,右邊徐晃殺來,孟達回身復戰:三軍夾攻。劉封大敗而走,連夜奔回上庸,背後魏兵趕來。劉封到城下叫門,城上亂箭射下。申耽在敵樓上叫曰:「吾已降了魏也!」
맹달은 유봉이 글을 찢고 사자를 죽인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또한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 맞이하였다. 두 진(군대가) 둥글게 대치하자 유봉이 진영 문 깃발 아래 말을 세우고 칼로 가리키며 욕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배반한 도적놈이 어찌 감히 근거 없이 말을 함부로 하는가?”하니 맹달이 말하기를 “너의 죽음이 이미 눈앞에 닥쳤는데 도리어 스스로 잘못을 고집하며 살피지 못하는가?”하니 유봉이 크게 노하여 말에 박차를 가하고 칼을 돌리며 바로 맹달에게 달려왔다. 싸운 지 삼합이 되지 않아 맹달이 패하여 달아나자 유봉은 빈틈을 타고 이십여 리를 추격하였는데 한 소리 함성이 일어나며 복병이 모두 나왔다. 왼쪽에서는 하후상이 달려 나오고, 오른쪽에서는 서황이 달려 나오고 맹달도 몸을 돌려 다시 싸워 삼군이 협공하였다. 유봉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 밤 새 달아나 상용에 돌아가는데 뒤에서 위나라 군대가 쫓아 왔다. 유봉이 성 아래 이르러 문을 여라고 소리치니 성 위에서 화살이 쏮아져 내렸다. 신탐이 망대 위에 있다가 고함쳐 말하기를 “내가 이미 위나라에 항복하였다.”했다.
封大怒,欲要攻城,背後追軍將至。封立腳不牢,只得望房陵而奔,見城上已盡插魏旗。申儀在敵樓上將旗一颭,城後一彪軍出,旗上大書「右將軍徐晃」。封抵敵不住,急望西川而走。晃乘勢追殺。劉封部下只剩得百餘騎,到了成都,入見漢中王,哭拜於地,細奏前事。玄德怒曰:「辱子有何面目復來見吾!」封曰:「叔父之難,非兒不救,因孟達諫阻故耳。」玄德轉怒曰:「汝須食人食、穿人衣,非土木偶人!安可聽讒賊所阻!」命左右推出斬之。漢中王既斬劉封,後聞孟達招之,毀書斬使之事,心中頗悔;又哀痛關公,以致染病,因此按兵不動。
유봉이 크게 노하여 성을 공격하려하는데 뒤에서 추격하는 군대가 이르려 하였다. 유봉이 버티지 못하고 방릉을 향해 달아났으나 성위에 이미 모두 위나라 깃발이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신의가 적루 위에서 깃발을 한 번 흔들자 선 뒤에서 한 떼의 군대가 나오는데 깃발에는 크게 ‘우장군서황’이라 쓰여 있었다. 유봉은 적이 이르자 막지 못하고 급히 서천을 향해 달아났다. 서황은 형세를 타고 추격하였다. 유봉의 부하는 단지 백여 기만 남았을 뿐으로 성도에 이르러 한중왕(유현덕)을 뵙자 땅에서 곡하며 절하고 자세하게 앞의 일을 아뢰었다. 유현덕이 노하여 말하기를 “욕된 아들이 무슨 면목으로 다시 와 나를 보는가?”하니 유봉이 말하기를 “숙부의 어려움은 내가 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맹달이 간하고 막았기 때문일 뿐입니다.”했다. 유현덕이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모름지기 사람의 밥을 먹고, 사람의 옷을 입으니 흘과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가 아니다! 어찌 아첨하는 도적에게 막히는 바가 될 수 있단 말인가!”하고는 좌우에게 명하여 끌고나가 죽이게 했다. 한중왕(유현덕)은 유봉을 베어 죽인 후 맹달이 부르는 글을 찢고 사자를 베어 죽인 일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자못 뉘우쳤으나 또한 관공(관운장)의 죽음을 슬퍼하다 병이 들었다. 이 때문에 군대를 정비하면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且說魏王曹丕,自即王位,將文武官僚,盡皆陞賞;遂統甲兵三十萬,南巡沛國譙縣,大饗先塋。鄉中父老,揚塵遮道,奉觴進酒,效漢高祖還沛之事。人報大將軍夏侯惇病篤,丕即還鄴郡。時惇已卒,丕為挂孝,以厚禮殯葬。
각설하고 위왕 조비는 왕위에 오른 후 문무관료들을 모두 승진시키고 상을 주었다. 마침내 갑병 삼십만을 동솔하고 남쪽으로 패국 초현에 순행하여 크게 선영에 제사하였다. 마을의 부로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길을 막고 술잔을 받들어 술을 올려 한나라 고조가 패 땅에 돌아올 때의 일을 모방하였다. 사람이 대장군 하후돈의 병이 위독하다고 보고자하자 조비는 곧 업군으로 돌아왔다. 그 때 하후돈은 이미 죽은 후였다. 조비는 상복을 입고 후한 예로 장례하였다.
是歲八月間,報稱石邑縣鳳凰來儀,臨淄城麒麟出現,黃龍現於鄴郡。於是中郎將李伏、太史丞許芝商議:種種瑞徵,乃魏當代漢之兆,可安排受禪之禮,令漢帝將天下讓於魏王。遂同華歆、王朗、辛毗、賈詡、劉廙、劉曄、陳矯、陳群、桓階等,一班文武官僚,四十餘人,直入內殿,來奏漢獻帝,請禪位於魏王曹丕。正是:魏家社稷今將建,漢代江山忽已移。未知獻帝如何回答,且看下文分解。
이 해 팔월 사이에 석읍현에서는 봉황이 춤을 추었고, 임치성에서는 기린이 출현하였고, 황룡이 업군에 나타났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중낭장 이복, 태사승 허지가 상의하기를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조는 곧 위나라가 한 나라를 대신할 징조에 해당하니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는 예를 베풀어한나라 황제로부터 천하를 위에 양보하게 할만하다.”했다. 마침내 화흠, 왕랑, 신비, 가후, 유이, 유엽, 진교, 진군, 항계 등 한 무리의 관료들 사십여 명이 바로 내전에 들어 가 한나라 헌제에게 아뢰어 위왕 조비에게 선위할 것을 청하였다. 바로 이러하다. 위나라 가문의 사직이 지금 막 세워지자 한나라의 강산이 갑자기 옮겨졌다. 헌제가 어떻게 회답할지 알지 못하겠으니 또한 아래 글에서 나누어 풀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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