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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연의

제91회 노수에 제사하며 한 승상은 군대를 돌리고, 중원을 정벌하려 무후(제갈공명)가 표를 올리다.

by 최인표 2021. 7. 6.

第九十一回祭瀘水漢相班師伐中原武侯上表

91회 노수에 제사하며 한 승상은 군대를 돌리고, 중원을 정벌하려 무후(제갈공명)가 표를 올리다.

 

卻說孔明班師回國孟獲率引大小洞主酋長及諸部落羅拜相送前軍至瀘水時值九月秋天忽然陰雲布合狂風驟起兵不能渡回報孔明孔明遂問孟獲獲曰:「此水原有猖神作禍往來者必須祭之。」孔明曰:「用何物享祭?」獲曰:「舊時國中因猖神作禍用七七四十九顆人頭並黑牛白羊祭之自然風恬浪靜更兼連年豐稔。」孔明曰:「吾今事已平定安可妄殺一人?」遂自到瀘水岸邊觀看果見陰風大起波濤洶湧人馬皆驚

각설하고 제갈공명이 군대를 돌려 나라로 돌아가자 맹획은 대소의 동주, 추장, 여러 부락을 인솔하고 늘어서서 절하며 환송하였다. 앞 선 부대가 노수에 이르렀는데 때는 구월 가을이었다. 홀연히 하늘을 덮는 먹구름이 덮히고, 광풍이 일어나며 군대가 강을 건너지 못하고 제갈공명에게 돌아 가 보고하니 제갈공명이 마침내 맹획에게 물었다. 맹획이 말하기를 이 물은 원래 창신이 재앙을 일으키기 때문에 오고가는 자들은 반드시 제사를 지냅니다.”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어떤 제물로 제사를 합니까?”하니 맹획이 말하기를 옛 날에는 나라 안에서는 창신이 재앙을 일으키면 사십아홉 개의 작은 아이의 머리와 검은 소, 흰 소로 제사하면 자연히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고요해지고 또 겸하여 매회 풍년이 듭니다.”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일이 이미 평정되었는데 어찌 망녕되이 한 사람이라도 죽일 수 있겠습니까?”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노수 가에 이르러 살펴보았다. 과연 음산하고 싸늘한 바람이 크게 일어나고 파도가 세차게 치솟아 오르니 사람과 말이 모두 놀랐다.

 

孔明甚疑即尋土人問之土人告說:「自丞相經過之後夜夜只聞得水邊鬼哭神號自黃昏直至天曉哭聲不絕瘴煙之內陰鬼無數因此作禍無人敢渡孔明曰:「此乃我之罪愆也前者馬岱引蜀兵千餘皆死於水中更兼殺死南人皆棄於此魂怨鬼不能解釋以致如此吾今晚當親自往祭於水濱。」土人曰:「須依舊例殺四十九顆人頭為祭則怨鬼自散也。」孔明曰:「本為人死而成怨鬼豈可又殺生人耶吾自有主意喚行廚宰殺牛馬和麵為劑塑成人頭內以牛羊等肉代之名曰饅頭。」

제갈공명이 매우 괴이하게 여겨 토인(현지인)을 찾아 물었다. 토인(현지인)이 고하여 말하기를 승상께서 지나간 후로부터 밤마다 물가에서 귀신이 소리내어 크게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부터 새벽까지 곡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독한 안개 속에 귀신들이 무수합니다. 이들이 지은 재앙 때문에 사람이 감히 건너지 못합니다.”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나의 죄와 허물이다. 앞서 마대가 촉의 군대 천여 명을 인솔하였는데 모두 물속에서 죽었고, 다시 겸하여 남쪽 사람들이 죽었는데 모두 여기에 버렸다. 정처없이 떠돌던 혼과 원통한 귀신의 (원한을)풀어주지 못하여 이 같음에 이르렀다. 내가 오늘 저녁에 직접 가서 물가에서 제사해야 겠다.”했다. 토인(현지인)이 말하기를 반드시 옛 에에 의하여 사십아홉 명의 아리를 죽여 머리로 제사하면 곧 원통한 귀신들이 저절로 흩어질 것입니다.”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본래 사람이 죽어 원귀가 되었는데 어찌 또 산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나에게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다. 임시 주방 요리사를 불러 소와 말을 잡고, 밀가루를 반죽하고 조합하여 사람의 머리를 만드는데 안에는 소와 양 등의 고기를 넣는 것으로서 대신하게 하고 만두라 이름하라.”했다.

 

當夜於瀘水岸上設香案鋪祭物列燈四十九盞揚旛招魂將饅頭等物陳設於地三更時分孔明金冠鶴氅親自臨祭令董厥讀祭文其文曰

그날 밤 노수 언덕 위(가에서)에서 향과 제물을 차리고 등 사십아홉 종지를 나열하고 깃발을 흔들어 혼을 부른 뒤 만두 등의 제물을 가져다 땅에 진설하였다. 삼경 때 쯤 제갈공명은 금관을 쓰고 학창의를 입고 직접 제사에 임하여 동권로 하여금 제문을 읽게 하였다. 그 제문에 말하기를

 

維大漢建興三年秋九月一日武鄉侯領益州牧丞相諸葛亮謹陳祭儀享於故歿王事 蜀中將校()及南人亡者陰魂曰:「我大漢皇帝威勝五霸明繼三王昨自遠方侵境異俗起兵縱蠆尾以興妖恣狼心而逞亂我奉王命問罪遐荒大舉貔貅悉除螻蟻雄軍雲集狂寇冰消纔聞破竹之聲便是失猿之勢但士卒兒郎盡是九州豪傑官僚將校皆為四海英雄習武從戎投明事主莫不同申三令共展七擒齊堅奉國之誠共效忠君之志何期汝等偶失兵機緣落奸計或為流矢所中魂掩泉臺或為刀劍所傷魄歸長夜生則有勇死則成名今凱歌欲還獻俘將及汝等英靈尚在祈禱必聞隨我旌旗逐我部曲同回上國各認本鄉受骨肉之蒸嘗領家人之祭祀莫作他鄉之鬼徒為異域之魂我當奏之天子使汝等各家盡霑恩露年給衣糧月賜廩祿用茲酬答以慰汝心至於本境土神南方亡鬼血食有常憑依不遠生者既凜天威死者亦歸王化想宜寧帖毋致號啕聊表丹誠敬陳祭祀嗚呼哀哉伏維尚饗

대 한나라 건흥 삼년 가을 구월 초하루에 무향후 영익주목 승상 제갈공명은 삼가 제물과 의식을 베풀어 옛날 왕사(왕의 일, 국가의 일)에서 죽은 촉의 장교와 남쪽 사람의 죽은 혼백에게 바치며 말합니다. “우리 대 한나라의 황제가 위엄으로 오패를 이겨 밝게 삼왕을 계승하였습니다. 지난날 멀리 있는 지방에서 경계를 침범하고, 풍속을 달리하는 사람(다른 민족)이 군대를 일으켜 전갈의 꼬리로서 요사스러움을 일으키고 방자한 이리의 마음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우리가 왕의 명을 받들어 멀리 변경에 죄를 묻고자 크게 용맹한 군대를 일으켜 땅강아지와 개미 같은 미미한 작은 힘들을 제거하려하자 웅군(우수한 군대)이 구름처럼 모여 미친 도적떼가 얼음 녹는 듯 사라졌습니다. 잠간 대나무 쪼개지는 소리를 듣고(대나무가 쪼개지 듯 진군하자) 곧 원숭이의 형세를 잃었습니다.(원숭이 떼처럼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사졸은 모두 구주의 호걸이고, 관료와 장교는 모두 사해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무예를 익혀 정벌을 따르고, 밝은 임금에 몸을 던져 섬기며 함께 세 번의 명령을 펴지 않음이 없어 함께 일곱 번을 사로잡았습니다. 모두 나라를 받드는 정성을 굳게하고 함께 임금에게 충성하는 뜻을 받들었습니다. 어찌 너희들이 우연히 군대의 전략을 잃고 간사한 계책에 떨어질 것을 기약하였겠습니까? 혹 날아다니는 화살에 적중되어 혼은 천대(무덤)에 묻히게 되었고, 혹은 칼과 검에 상처를 입어 백이 긴 어둠의 밤으로 돌아갔습니다. 살아서는 곧 용맹이 있었고, 죽어서는 곧 이름(명예)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승리하고 돌아가 장차 (나라에)이르러 포로를 바치려 합니다. 너희들 영령이 아직 존재해 있으니 기도를 반드시 들을 것입니다. 우리 깃발을 따르고 우리 부곡(군대)을 따라 함께 상국으로 돌아가 각각 고향을 찾고 피붙이의 때에 따른 제사를 받고 가족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여 타향의 귀신이 되어 헛되이 이역의 혼이 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마땅히 천자에게 아뢰어 너희들로 하여금 각각의 집이 은혜에 모두 적셔지고, 해마다 옷과 식량을 내리며 달마다 녹(월급)을 내릴 것입니다. 이 보답을 쓰는 것으로서 너희들의 마음을 위로합니다. 본래 나라(우리나라, )의 토신과 남쪽 지역의 죽은 혼에 이르기까지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가 항상 있을 것이니 의지할 곳이 멀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자는 이미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였고, 죽은 자도 또한 왕의 교화에 귀의하였습니다. 생각하건데 마땅히 편안하게 여기시어 큰 소리 내어 놀지 마십시오. 애오라지 간절한 정성을 표시하여 공경히 제물을 차리고 제사합니다. ! 슬프다! 엎드려 바라건데 흠향하십시오!

 

讀祭文畢孔明放聲大哭極其痛切情動三軍無不下淚孟獲等眾盡皆哭泣只見愁雲怨霧之中隱隱有數千鬼魂皆隨風而散於是孔明令左右將祭物盡棄於瀘水之中

제문 읽기를 마치고 제갈공명이 소리 내어 크게 곡하여 그 통절함을 지극히 하니 정이 삼군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맹획 등의 무리가 모두 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근심에 찬 구름과 원한에 찬 안개 속에 은은히 있던 수천의 귀혼이 모두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이에 제갈공명은 좌우 장수로 하여금 제물을 모두 노수 안에 버리게 하였다.

 

次日孔明引大軍俱到瀘水南岸但見雲散霧收風靜浪平蜀兵安然盡渡瀘水果然鞭敲金鐙響人唱凱歌還行到永昌孔明留王伉呂凱守四郡發付孟獲領眾自回囑其勤政馭善撫居民勿失農務孟獲等涕泣拜別而去

다음 날 제갈공명은 대군을 이끌고 모두 노수 남쪽 언덕에 이르렀는데 구름이 흩어지고 안개가 거두어지며, 바람이 고요하고 물결이 잔잔해진 것을 보았다. 촉의 군대가 편안히 모두 노수를 건넜다. 과연 채찍으로 금등을 두드려 울리고, 사람들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행렬이 영창에 이르자 제갈공명은 왕항과 여개를 남겨 사군을 지키게 하고, 맹획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돌아가도록 조치하고 그 정사와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을 삼가며 백성들을 잘 어루만지고 농사의 때를 잃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맹획 등이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헤어져 갔다.

 

孔明自引大軍回成都後主排鑾駕出郭三十里迎接下輦立於道旁以候孔明孔明慌下車伏道而言曰:「臣不能速平南方使主上懷憂臣之罪也。」後主扶起孔明並車而回設太平筵會重賞三軍自此遠邦進貢來朝者二百餘處孔明奏准後主將歿於王事者之家一一優恤人心懽悅朝野清平

제갈공명이 대군을 이끌고 성도에 돌아왔다. 후주(유선)가 천자의 수레를 타고 성곽에서 삼십리를 나와 영접하는데 수레에서 내려 길옆에 서서 제갈공명을 기다렸다. 제갈공명이 황급히 수레에서 내려 길에 엎드려 말하기를 신이 빠르게 남쪽 지역을 평정하지 못하여 주상(후주 유선)으로 하여금 근심을 품게 하였으니 신의 죄입니다.”했다. 후주(유선)가 제갈공명을 부축하여 일으킨 뒤 수레를 나란히 하여 돌아 가 태평연회를 베풀고 삼군에게 많은 상을 주었다. 이로부터 멀리 있는 나라들이 조공하고 와서 조회하는 자들이 이백여 곳이었다. 제갈공명이 후주에게 아뢰어 허락을 받아 왕의 일(국가의 일)에서 죽은 자의 집을 일일이 은혜를 베풀고 구제하니 사람들이 기뻐하고, 조정과 재야가 맑고 편안해졌다.

 

卻說魏主曹丕在位七年即蜀漢建興四年也丕先納夫人甄氏即袁紹次子袁熙之婦前破鄴城時所得後生一子名叡字元仲自幼聰明丕甚愛之後丕又納安平廣宗人郭永之女為貴妃甚有顏色其父嘗曰:「吾女乃女中之王也。」故號為女王」。自丕納為貴妃因甄夫人失寵郭貴妃欲謀為后卻與幸臣張韜商議時丕有疾韜乃詐稱於甄夫人宮中掘得桐木偶人上書天子年月日時為壓鎮之事丕大怒遂將甄夫人賜死立郭貴妃為皇后因無出養曹叡為己子雖甚愛之不立為嗣

각설하고 위나라 임금 조비의 재위 칠년은 곧 촉한 건흥 사년이다. 조비는 먼저 부인 견씨를 맞아들였으니 곧 원소의 둘째 아들 원희의 부인이었는데 앞서 업성을 깨트렸을 때 얻었다. 후에 한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예이고 자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조비가 매우 사랑하였다. 후에 조비는 또 안평 광종 사람 곽영의 딸을 받아들여 귀비로 삼았는데 얼굴이 매우 아름다워 그 아버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 딸은 곧 여자 중의 왕이다.”했기 때문에 여왕이라 불렀다. 조비가 맞아들여 귀비가 되고나서부터 견부인이 총애를 잃었기 때문에 곽귀비는 후(황후)가 되기로 도모하여 재신 장도와 상의하였다. 그 때 조비는 병이 있었다. 장도는 견부인의 궁 안에서 땅을 파고 오동나무로 만든 허수아비를 얻었는데 (허수아비)위에 천자의 연월일시를 쓴 것은 억누르기 위한 일이라고 칭탁(모함)하였다. 조비가 크게 노하여 견부인을 죽이고 곽귀비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 (곽황후)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예를 길러 자기의 아들로 삼아 비록 매우 사랑하였으나 세워 후사로 삼지는 않았다.

 

叡年至十五歲弓馬熟嫻當年春二月丕帶叡出獵行於山塢之間趕出子母二鹿丕一箭射倒母鹿回視小鹿馳於曹叡馬前丕大呼曰:「吾兒何不射之?」叡在馬上泣告曰:「陛下已殺其母安忍復殺其子?」丕聞之擲弓於地曰:「吾兒真仁德之主也!」於是遂封叡為平原王

조예가 나이 십오세에 이르자 궁마(무예)에 익숙하였다.(능통하였다.) 그 해 봄 이월에 조비는 조예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산 중앙이 오목한 사이를 가는데 새끼와 어미 사슴 두 마리가 쫒아 나오니 조비가 한 화살을 쏘아 어미 사슴을 쓰러뜨리고 작은 사슴을 돌아보니 조예 말 앞으로 달려 나왔다. 조비가 크게 소리쳐 말하기를 내 아이는 어찌하여 활을 쏘아 맞히지 않는가?”하니 조예가 말 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하여 말하기를 폐하께서 이미 그 어미를 죽이셨는데 어찌 차마 다시 그 새끼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했다. 조비가 그것을 듣고 활을 땅에 던져버리고 말하기를 내 아이는 참으로 인덕의 주인이구나!”하고는 이에 마침내 조예를 봉하여 평원왕으로 삼았다.

 

夏五月丕感寒疾醫治不痊乃召中軍大將軍曹真鎮軍大將軍陳群撫軍大將軍司馬懿三人入寢宮丕喚曹叡至指謂曹真等曰:「今朕病已沉重不能復生此子年幼卿等三人可善輔之勿負朕心。」三人皆告曰:「陛下何出此言臣等願竭力以事陛下至千秋萬歲。」丕曰:「今年許昌城門無故自崩乃不祥之兆朕故自知必死也。」

여름 오월 조비가 한질(감기)에 걸렸는데 의원이 치료하여도 낫지 않으니 이에 중군대장군 조진, 진군대장군 진군, 무군대장군 사마의 세 사람을 침궁에 불렀다. 조비가 조예를 불러 (조예가)이르자 가리키며 조진 등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짐의 병이 이미 깊고 중하니 다시 살 수 없을 것이다. 이 아이는 나이가 어리니 경 들 세 사람은 잘 보필하여 짐의 마음을 저버리지 말라.”했다. 세 사람이 모두 고하여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십니까? 신들은 힘을 다하는 것으로서 폐하를 섬겨 천년만년에 이르기를 원합니다.”했다. 조비가 말하기를 올해 허창의 성문이 일없이 스스로 무너지니 곧 성서롭지 못한 조짐이다. 짐은 이 때문에 스스로 반드시 죽을 것임을 아는 것이다.”했다.

 

正言間內侍奏征東大將軍曹休入宮問安丕召入謂曰:「卿等皆國家柱石之臣也若能同心輔朕之子朕死亦瞑目矣!」言訖墮淚而薨時年四十歲在位七年於是曹真陳群司馬懿曹休等一面舉哀一面擁立曹叡為大魏皇帝謚父丕為文皇帝謚母甄氏為文昭皇后封鐘繇為太傅曹真為大將軍曹休為大司馬華歆為太尉王朗為司徒陳群為司空司馬懿為驃騎大將軍其餘文武官僚各各封贈大赦天下時雍二州缺人守把司馬懿上表乞守西涼等處曹叡從之遂封懿提督雍涼等處兵馬領詔去訖

말하는 사이에 내시가 정동대장군 조휴가 궁에 들어와 문안하다고 아뢰었다. 조비가 불러 들여 일러 말하기를 경들은 모두 국가의 주춧돌인 신하이다. 만약 마음을 같이하여 짐의 아들을 보필한다면 짐은 죽어도 또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하는 말을 마치고 눈물을 떨어드리며 죽었다. 그 때 나이는 사십세로 황제 자리에 있은 지 칠년만 이었다. 이에 조진, 진군, 사마의, 조휴 등은 한편으로는 장례를 치르고, 한편으로는 조예를 세워 대위황제라 하였다. 아버지 조비를 문황제라 시호하고, 어머니 견씨는 문성황후라 하였다. 종요를 봉하여 태부라하고, 조진을 대장군, 조휴를 대사마, 화흠을 태위, 왕랑을 사도, 진군을 사고, 사마의를 표기대장군으로 삼았다. 그 나머지 문무관료를 각각 봉하여 증직했다. 천하에 크게 사면하게 하였다. 그 때 옹주, 양주 두 주는 지키는 사람이 빠졌으므로 사마의가 표를 올려 서량 등의 곳을 지키도록 청하였다. 조예가 그것을 따라 마침내 사마의를 봉하여 옹주, 양주 등의 병마를 감독하게 하니 명을 받고 갔다.

 

早有細作飛報入川孔明大驚曰:「曹丕已死孺子曹叡即位餘皆不足慮司馬懿深有謀略今督雍涼兵馬倘訓練成時深為蜀中之大患不如先起兵伐之。」參軍馬謖曰:「今丞相平南方回軍馬疲敝只宜存恤豈可復遠征某有一計使司馬懿自死於曹叡之手未知丞相鈞意允否?」

세작이 재빨리 천()에 들어 가 보고하였다. 제갈공명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조비가 이미 죽고, 어린 아들 조예가 즉위했으니 나머지는 모두 근심할 것이 없지만 사마의는 깊은 모략이 있는데 지금 옹주와 양주의 병마를 감독하니 만약 훈련이 이루어진다면 깊이 촉의 큰 근심이 될 것이다. 먼저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는 것이 낫다.”했다. 참군 마직이 말하기를 지금 승상께서 남쪽을 평정하고 돌아 와 군마가 피로하니 구휼하는 것이 마땅한데 어찌 다시 멀리 정벌할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 한 계책이 있어 사마의로 하여금 스스로 조예의 손에 죽게 할 수 있는데 승상의 생각은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했다.

 

孔明問是何計馬謖曰:「司馬懿雖是魏國大臣曹叡素懷疑忌何不密遣人往洛陽鄴郡等處布散流言道此人欲反更作司馬懿告示天下榜文遍貼諸處使曹叡心疑必然殺此人也。」孔明從之即遣人密行此計去了

제갈공명이 이것은 무슨 계책인지를 물었다. 마직이 말하기를 사마의가 비록 위나라의 대신이나 조예가 평소에 의심하고 꺼리고 있습니다. 어찌 비밀리에 사람을 낙양과 업굽 등에 보내 유언비어를 퍼트려 이 사람(사마의)가 배반하고자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다시 사마의가 지은 것으로 한 방문을 천하에 고시하여 두루 여러 곳에 붙여 조예로 하여금 마음으로 의심하게 한다면 반드시 이 사람을 죽일 것입니다.”했다. 제갈공명이 그것을 따라 곧 사람을 보내 비밀리에 이 계책을 실행하러 가게 했다.

 

卻說鄴城門上忽一日見貼下告示一道守門者揭了來奏曹叡叡觀之其文曰驃騎大將軍總領雍涼等處兵馬事司馬懿謹以信義布告天下昔太祖武皇帝創立基業本欲立陳思王子建為社稷主不幸奸讒交集歲久潛龍皇孫曹叡素無德行妄自居尊有負太祖之遺意今吾應天順人日興師以慰萬民之望告示到日各宜歸命新君如不順者當滅九族先此告聞想宜知悉

각설하고 업성 문 위에 홀연히 하루는 고시 한통이 붙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문지기가 떼어 조예에게 와 아뢰었다. 조예가 보니 그 글에 말하기를 표기대장군으로 옹주, 양주 등지의 병마 일을 총괄하는 사마의는 삼가 정성과 의리로 천하에 알린다. 옛날 태조 무황제께서 기업(나라)을 창립한 것은 본래 진사왕의 아들 건을 사직의 주인(황제)으로 세우고자 하셨는데 불행히도 간사하고 참소하는 이들이 서로 모였기 때문에 오래 동안 잠룡으로 지내 왔습니다. 황제(조조)의 손자 조에는 평서 덕행이 없으면서도 망녕되이 스스로 높은 자리에 머물러 태조(조조)가 남긴 뜻을 저버렸습니다. 지금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사람을 따라 날을 정해 군대를 일으키는 것으로서 만 백성의 바람을 위로하고자 합니다. 알려준 날이 이르면 각각은 마땅히 새로운 임금을 공경하라. 만일 따르지 않는 자는 마땅히 구족을 없앨 것이다. 먼저 이를 알려 듣게 한 것이니 마땅히 빠짐없이 모두 알아야 할 것입니다.”했다.

 

曹叡覽畢大驚失色急問群臣太尉華歆奏曰:「司馬懿上表乞守雍正為此也先時太祖武皇帝嘗謂臣曰:『司馬懿鷹視狼顧不可付以兵權久必為國家大禍。』今日反情已萌可速誅之。」王朗奏曰:「司馬懿深明韜略善曉兵機素有大志若不早除久必為禍。」

조예는 읽기를 마치고 크게 놀라 얼굴색이 변하면서 급히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태위 화흠이 아뢰어 말하기를 사마의가 표를 올려 옹주와 양주를 지키겠다고 청한 것이 바로 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태조 무황제께서 일찍이 신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사마의는 매처럼 보고 승냥이처럼 돌아보니 병권을 주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국가의 큰 재앙이 될 것이다.’하셨는데 오늘 배반하는 정이 이미 싹텄으니 빨리 그를 죽여야 합니다.”했다. 왕랑이 아뢰어 말하기를 사마의는 깊이 병법에 밝고 군대의 기미를 잘 알아채며, 평소에 큰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일찍 제거하지 않고 오래되면 반드시 재앙이 될 것입니다.”했다.

 

叡乃降旨欲興兵御駕親征忽班部中閃出大將軍曹真奏曰:「不可文皇帝托孤於臣等數人是知司馬仲達無異志也今事未知真假遽爾加兵乃逼之反耳或者蜀吳奸細行反間之計使我君臣自亂彼卻乘虛而擊未可知也陛下幸察之。」叡曰:「司馬懿若果謀反將奈何?」真曰:「如陛下心疑可仿漢高偽游雲夢之計御駕幸安邑司馬懿必然來迎觀其動靜就車前擒之可也。」

조예는 이에 명령을 내려 군대를 일으켜 직접 정벌하고자 하였다. 홀연히 열 안에서 빛처럼 대장군 조진이 나와 아뢰어 말하기를 안 됩니다. 문황제께서 신 들 몇 사람에게 고(후계 황제:조예)를 부탁하신 것은 사마중달(사마의)이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의 참과 거짓을 알지 못하면서 대번에 군대를 가한다면 곧 그를 핍박하여 배반하게 할 뿐입니다. 혹 촉과 오나라 첩자가 이간하는 계책을 실행하여 우리 군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되면 그들이 빈틈을 타고 공격할지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살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했다. 조예가 말하기를 사마의가 만약 과연 모반한다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하니 조진이 말하기를 만약 폐하의 마음에 의심이 있으시다면 한나라 고조께서 거짓으로 운몽에 갔던 계책을 모방할 수 있습니다. 어가(천자:조예)가 안읍에 가시면 사마의가 반드시 와서 영접할 것이니 그 동정을 보고 수레 앞에 나올 때 사로잡으면 됩니다.”했다.

 

叡從之遂命曹真監國親自領御林軍十萬徑到安邑司馬懿不知其故欲令天子知其威嚴乃整兵馬率甲士數萬來迎近臣奏曰:「司馬懿果率兵十餘萬前來抗拒實有反心矣。」叡慌命曹休先領兵迎之司馬懿見兵馬前來只疑車駕親至伏道而迎曹休出曰:「仲達受先帝托孤之重何故反耶?」

조예가 그 말을 따라 마침내 조진으로 하여금 나라를 살피게 하고 직접 어림군 십만을 거느리고 안읍에 이르렀다. 사마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천자로 하여금 그 위엄을 알게 하고자 병마를 정돈하여 갑사 수만을 거느리고 와 맞이하였다. 근신이 아뢰어 말하기를 사마의가 과연 군대 십여 만을 거느리고 앞에 와 항거하니 진실로 배반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했다. 조예가 황급히 조휴로 하여금 먼저 군대를 거느리고 맞이하게 하였다. 사마의는 병마가 앞에 오는 것을 보고 거가(천자가 탄 수레)가 직접 이른 것으로 의심하여(추측하여) 길에 엎드려 맞이하였다. 조휴가 나와 말하기를 중달(사마의)은 선제(조비)가 고(조예)를 부탁한 중임을 받고서도 무슨 이유로 배반하는가?”했다.

 

懿大驚失色汗流遍體乃問其故休備言前事懿曰:「此吳蜀奸細反間之計欲使我君臣自相殘害彼卻乘虛而來某當自見天子辯之。」遂即退了兵馬至叡車前俯伏泣奏曰:「臣受先帝托孤之重安敢有異心必是吳蜀之奸計臣請提一旅之師先破蜀後伐吳報先帝與陛下以明臣心。」叡疑慮未決華歆奏曰:「不可付之兵權可即罷歸田里。」叡依言將司馬懿削職回鄉命曹休總督雍涼兵馬曹叡駕回洛陽

사마의가 크게 놀라 얼굴색이 변하고, 온 몸에 땀을 흘리며 그 이유를 물었다. 조휴가 앞의 일을 모두 말하였다. 사마의가 말하기를 이는 오와 촉의 첩자가 이간하는 계책을 쓴 것으로 우리 군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해치게 하고, 빈틈을 타서 오려는 것입니다. 제가 마땅히 스스로 천자를 뵙고 해명할 것입니다.”하고는 마침내 즉시 군대를 물리고 조예의 수레 앞에 이르러 엎드리고 눈물을 흘리며 아뢰어 말하기를 신이 선제(조비)께서 고(조예)를 부탁한 중임을 받고 어찌 감히 다른 마음을 품겠습니까? 이는 오와 촉의 간사한 계책임이 틀림없습니다. 신이 일려(한 부대)의 군대를 데리고 먼저 촉을 깨트린 후 오를 쳐서 선제(조비)와 폐하께 보답하는 것으로서 신의 마음을 분명히 할 것을 청합니다.”했다. 조예는 의심하여 결단하지 못하였다. 화흠이 아뢰어 말하기를 병권을 주어서는 안 되고, 곧 파직하여 전리(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했다. 조예가 그 말을 따라 사마의의 관직을 깍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조휴로 하여금 옹주와 양주의 병마를 총 감독하게 하였다. 조예는 수레를 돌려 낙양으로 돌아갔다.

 

卻說細作探知此事報入川中孔明聞之大喜曰:「吾欲伐魏久矣奈有司馬懿總雍涼之兵今既中計遭貶吾有何憂?」次日後主早朝大會官僚孔明出班上出師表一道表曰

각설하고 첩자가 이 일을 탐지하여 천()에 들어 가 보고하였다. 제갈공명이 그것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위나라를 정벌하고자 한 것이 오래 되었으나 사마의가 옹주와 양주의 군대를 총괄하고 있다가 지금 계책에 빠져 쫓겨남을 당하였으니 나에게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하고는 다음 날 후주(유선)가 아침 일찍 크게 관료를 모이게 하였을 때 제갈공명이 열에서 나와 출사표한 통을 올렸다. 표에 말하기를

 

臣亮言先帝創業未半而中道崩殂今天下三分益州罷敝此誠危急存亡之秋也然侍衛之臣不懈於內忠志之士忘身於外者蓋追先帝之殊遇欲報之於陛下也誠宜開張聖聽以光先帝之遺德宏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引喻失義以塞忠諫之路也宮中府中俱為一體陟罰臧否不宜異同若有作奸犯科及為忠善者宜付有司論其刑賞以昭陛下平明之治 不宜偏私使內外異法也侍中侍郎郭攸之費褘董允等此皆良實志慮忠純是以先帝簡拔以遺陛

신 량(제갈공명)은 말씀 올립니다. 선제(유현덕)께서 창업하여(창업한 뜻을) 반이 되지 못하시고(반도 이루지 못하시고) 중도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었는데 익주는 괴롭고 파리합니다. 이는 진실로 위급한 사느냐 죽느냐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모시고 지키는 신하들이 안에서는 충성스러운 뜻을 지닌 선비들로 게으르지 않고, 밖에서는 자신을 잊었습니다. 대개 선제(유현덕)의 특수한 대우를 쫓아(생각하여) 폐하께 갚고자 합니다. 진실로 마땅히 성스러운 덕을 열어 펼치는 것으로서 선제(유현덕)께서 남긴 덕을 빛나게 하고 뜻을 품은 선비의 기운을 넓히며, 망녕되이 스스로를 하찮게 여겨서는 뜻을 잃은 비유를 인용하는 것으로서 충성스러운 간쟁의 길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궁중과 부중(정부, 조정)은 모두 한 몸이니 선함에는 (관직을)올려 주고 잘못에 벌을 주는 것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간사함을 짓고 법령을 어기는 자와 충성스럽고 선함을 행하는 자는 마땅히 유사(관청)에 부탁하여 그 형벌과 상을 논하는 것으로서 폐하의 공평하고 밝은 다스림을 밝게 해야 하고 사사로움에 치우치거나 내외로 하여금 법을 달리해서는 안 됩니다. 시중시랑 곽유지, 비휘, 동윤 등은 모두 어질고 진실되며 뜻과 생각이 충순하기 때문에 선제(유현덕)께서 뽑아 폐하께 남기셨습니다.

 

以為宮中之事事無大小悉以咨之然後施行必得裨補闕漏有所廣益將軍向寵性行淑均曉軍事試用之於昔日先帝稱之曰」,是以眾議舉寵以為督愚以為營中之事事無大小悉以咨之必能使行陣和穆優劣得所也親賢臣遠小人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遠賢臣此後漢所以傾頹也先帝在時每與臣論此事未嘗不歎息痛恨於桓靈也侍中尚書長史參軍此悉貞亮死節之臣也願陛下親之信之則漢室之隆可計日而待也

저는 궁중의 일은 일이 크고 적음이 없이 모두 자문을 구한 뒤 시행하시면 반드시 잘못되고 빠진 것을 도와 널리 이익되는 바가 있다고 여깁니다. 장군 향총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공평하며 군대의 일을 밝게 통합니다. 지난날에 시험 삼아 등용하신 선제께서 그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유능하다.’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의논으로 향총을 천거하여 도독으로 삼았습니다. 저는 군영 중의 일은 일이 크고 작음이 없이 모두 자문하시면 반드시 진을 행함을 화목하게 하여 나음과 못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은 전한이 흥기하고 융성해진 까닭이고, 소인을 가까이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한 것은 후한이 기울어 무너진 까닭입니다. 선제(유현덕)께서 살아계실 때 매번 신(제갈공명)과 이 일을 논하였는데 일찍이(항상)환제와 영제를 탄식하고 통한히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시중, 상서, 장사, 참군 이들은 모두 바르고 성실하며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는 신하들입니다. 폐하께서 그들을 가까이하시고, 믿으신다면 곧 한나라의 융성은 날을 헤아려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臣本布衣躬耕南陽苟全性命於亂世不求聞達於諸侯先帝不以臣卑鄙自枉屈三顧臣於草廬之中諮臣以當世之事由是感激遂許先帝以馳驅後值傾覆受任於敗軍之際奉命於危難之間爾來二十有一年矣先帝知臣謹慎故臨崩寄臣以大事也受命以來夙夜憂慮恐付託不效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深入不毛

신은 본래 포의로 남양에서 몸소 밭을 갈면서 구차히 어지러운 세상에서 목숨을 보전하였을 뿐 제후에게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선제(유현덕)께서 신을 비루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많이 스스로를 굽히시어 세 번 신의 초가집을 돌아보시고, 신에게 현 세상의 일을 물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제갈공명)감격하여 마침내 선제(유현덕)를 위해 최선(충성)을 다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후에 기울어 뒤집어지는 패군의 즈음에 임무를 맡아, 위급하고 어려운 사이에 명을 받든 이래로 이십일 년이 지났습니다. 선제(유현덕)께서는 신의 삼가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돌아가실 때 큰일들을 신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 밤낮으로 근심하였고, 부탁을 본받지(이루지) 못함으로서 선제(유현덕)의 밝음을 해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월에 노수를 건너 깊이 불모지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今南方已定甲兵已足當獎帥三軍北定中原庶竭駑鈍攘除姦凶興復漢室還於舊都此臣所以報先帝而忠陛下之職分也至於斟酌損益進盡忠言則攸之允等之任也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之效不效則治臣之罪以告先帝之靈若無興復之言則責攸之允等之咎以彰其慢陛下亦宜自謀以諮諏善道察納雅言深追先帝遺詔臣不勝受恩感激今當遠離臨表涕泣不知所云

지금 남쪽 지방이 이미 평정되었고, 갑옷 입은 군사들이 이미 충분하니 마땅히 삼군을 격려하여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할 때입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재주를 다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이를 없애 한나라 황실을 부흥시키고 옛 도읍에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이는 신(제갈공명)이 선제(유현덕)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직분입니다. 덜고 더하는 것을 짐작하여 지극한 충언을 올리는 것은 곧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의 임무입니다. 폐하께서는 신에게 역적을 토벌하는 것으로서 (한나라의)부흥을 맡겨 주시기를 원합니다. (한나라의 부흥을)드러내지 못한다면 곧 신의 죄를 다스리시는 것으로서 선제(유현덕)의 영령에 알리십시오. 만약 (한나라의)부흥을 말하지 않는다면 곧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의 허물을 꾸짖는 것으로서 그 태만함을 드러내십시오. 폐하께서는 또한 마땅히 스스로 생각하여 신하나 백성에게 선한 도를 물으시고 좋은 말을 살펴 받아들이는 것은 선제(유현덕)께서 남기신 명을 깊이 따르는 것입니다. 신은 받은 은혜에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멀리 떠나며 표를 올림에 있어서 눈물이 흘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後主覽表曰:「相父南征遠涉艱難方始回都坐未安席 今又欲北伐恐勞神思。」孔明曰:「臣受先帝託孤之重夙夜未嘗有怠今南方已平可無內顧之憂不就此時討賊恢復中原更待何日忽班部中太史譙周出奏曰:「臣夜觀天象北方旺氣正盛星曜倍明未可圖也。」乃謂孔明曰:「丞相深明天文又何故強為?」孔明曰:「天道變易不常豈可拘執吾今且駐兵馬於漢中觀其動靜而後行。」

후주(유선)가 표를 읽기를 마치고 말하기를 상부께서는 남쪽을 정벌하기 위해 어려움을 건너갔다가 막 도읍에 돌아와 앉아 있어도 미처 편안한 자리에 앉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또 북벌하고자 하니 정신과 생각이 수고로울까 두렵습니다.”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신이 선제(유현덕)께 고(후주)를 부탁하신 중요한 임무를 받고 밤낮으로 일찍이 태만함이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남쪽 지방이 이미 평정되었고, 안으로는 돌아볼 근심이 없으니 이런 때에 역적 토벌에 나서지 않는다면 중원을 회복하는 것을 어느 날에 다시 기대하겠습니까?” 했다. 홀연히 늘어선 무리 안에서 태사 초주가 나와 아뢰어 말하기를 신이 밤에 하늘의 상을 관찰해 보니 북방은 왕성한 기운이 바로 성대하고 별은 배나 밝아 도모할 수 없습니다.”하고난 이에 제갈공명에게 일러 말하기를 승상께서는 천문에 깊이 밝은데 또 무슨 이유로 억지로 (북벌을)행하려 하십니까?”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하늘의 도는 변화하여 항상하지 않으니 어찌 집착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오늘 또한 병마를 한중에 주둔하고 그 동정을 살핀 후에 가려 합니다.”했다.

 

譙周苦諫不從於是孔明乃留郭攸之董允費褘等為侍中總攝宮中之事又留向寵為大將總督御林軍馬陳震為侍中蔣琬為參軍張裔為長史掌丞相府事杜瓊為諫議大夫杜微楊洪為尚書 孟光來敏為祭酒尹默李譔為博士 郤正費詩為秘書 譙周為太史內外文武官僚一百餘員同理蜀中之事

초주가 굳게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에 제갈공명이 곧 곽유지, 동윤, 비위 등을 남겨 시중을 삼고 궁중의 일을 총괄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또 향총을 남겨 대장으로 삼고, 어림군마를 총 감독하게 하고, 진진은 시중으로 삼고, 장완은 참군으로 삼으며 장예를 장사로 삼아 승상부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두찬은 간의대부로 삼고, 두미, 양홍은 상서로 삼고, 맹광, 내민은 제주로 삼고, 윤묵, 이선은 박사, 각정, 비시는 비서, 초주는 대사로 삼았다. 내외 문무관료 일백 여명이 함께 촉 안의 일을 다스리게 했다.

 

孔明受詔歸府喚諸將聽令前督部鎮北將軍領丞相司馬涼州刺史都亭侯魏延前軍都督領伏風太守張翼牙門將裨將軍王平後軍領兵使安漢將軍領建寧太守李恢副將定遠將軍領漢中太守呂義兼管運糧左軍領兵使平北將軍陳倉侯馬岱副將飛衛將軍廖化右軍領兵使奮威將軍博陽亭侯馬忠鎮撫將軍關內侯張嶷行中軍師車騎大將軍都鄉侯劉琰中監軍揚武將軍鄧芝中參軍安遠將軍馬謖前將軍都亭侯袁琳左將軍高陽侯吳懿右將軍玄都侯高翔後將軍安樂侯吳班領長史綏軍將軍楊儀前將軍征南將軍劉巴前護軍偏將軍漢成亭侯許允左護軍篤信中郎將丁咸右護軍偏將軍劉敏後護軍典軍中郎將宮雝行參軍昭武中郎將胡濟行參軍諫議將軍閻晏行參軍偏將軍爨行參軍稗將軍杜義武略中郎將杜祺綏軍都尉盛敦從事武略中郎將樊岐典軍書記樊建丞相令史董厥帳前左護衛使龍驤將軍關興右護衛使虎翼將軍張苞以上一應官員都隨著平北大都督丞相武鄉侯領益州牧知內外事諸葛亮

제갈공명은 명을 받고 승상부에 돌아 와 여러 장수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전독부 진북장군 연승상사마 양주자사 도정후 위연, 전군도독 영복풍태수 장익, 아문장 비장군 왕평, 후군령병사 안한장군 령건령태수 이회, 부장 정원장군 영한중태수 영의, 겸 관운량 좌군랴령 병사 평북장군 진창후 마대. 부장 비위장군 요화, 우군령병사 분위장군 박양정후 마충, 진무장군 궐내후 장의. 행중군사 거기대장군 도향후 유염, 중감군 양무장군 등지, 중참군 안원장군 마속, 전장군 도정후 원림, 좌장군 고양후 오의, 우장군 현도후 고상, 후장군 안락후 오반, 영장사 수군장군 양의, 전장군 정남장군 유파, 전호군편장군 한성정후 허윤, 좌호군 독신중랑장 정함, 우호군 편장군 유민, 후호군 전군중랑장 궁옹, 행참군 조무중랑장 호제, 행참군 간의장군 염안, 행참군 편장군 찬습, 행참군 패장군 두의, 무략중랑장 두기, 수장군도위 성돈, 종사무략 중낭장 번기, 전군서기 번건, 승상령사 동궐, 장전좌호위사 용양장군 관흥, 우호위사 호익장군 장포이다. 이상의 모든 관원들이 모두 평북대도독 승상 무향후 영익주목 지내외사 제갈량(제갈공명)을 따랐다.

 

分撥已定又檄李嚴等守川口以拒東吳選定建興五年春三月丙寅日出師伐魏忽帳下一老將厲聲而進曰:「我雖年邁尚有廉頗之勇馬援之雄此二古人皆不服老何故不用我耶?」眾視之乃趙雲也孔明曰:「吾自平南回都馬孟起病故吾甚惜之以為折一臂也今將軍年紀已高倘稍有參差動搖一世英名減卻蜀中銳氣。」雲厲聲曰:「吾自隨先帝以來臨陣不退遇敵則先大丈夫得死於疆場者幸也吾何恨焉願為前部先鋒。」孔明再三苦勸不從雲曰:「如不教我為先鋒就撞死於階下!」孔明曰:「將軍既要為先鋒須得一人同去。」

직책을 정한 뒤 또 이엄 등에게 격문을 보내 천구(촉으로 들어 가는 입구)를 지키는 것으로서 오나라를 막게 하였다. 건흥 오년 봄 삼월 병인일을 선정하고 위나라를 정벌하는 군대를 출발시켰다. 홀연히 군막 아래서 한 노장이 성난 소리로 나와 말하기를 내가 비록 나이가 많으나 오히려 전국시대 조나라 염파 장군과 후한의 정치가인 마원의 용앵과 웅략이 있습니다. 아 두 옛 사람은 모두 늙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로 나를 쓰지 않습니까?”했다. 무리들이 그를 보니 바로 조운(조자룡)이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내가 남쪽을 평정하고 도읍에 돌아 온 후에 마맹(마초)이 병이 들었기 때문에 내가 매우 애석해하고 한 팔이 끊어진 것처럼 여겼습니다. 지금 장군은 이미 나이가 많은데 만약 조금이라도 잘못됨이 있다면 한 세상의 꽃다운 명성이 흔들리고, 촉의 날카로운 기운이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했다. 조운(조자룡)이 성난 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선제(유현덕)를 따른 이래로 진(전쟁)에 임하여 물러나지 않았고, 적을 만나면 곧 앞장섰습니다. 대장부가 강장(전장)에서 죽을 수 있는 것은 행운인데 내가 무엇을 원망하겠습니까? 앞 부대의 선봉이 되기를 원합니다.”했다. 제갈공명이 두 번 세 번 간곡히 권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조운(조자룡)이 말하기를 만약 나를 선봉으로 삼지 않으신다면 계단 아래에 부딪혀 죽을 것입니다.”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장군께서 이미 선봉이 되기를 요청하시니 반드시 한사람과 함께 가야 합니다.”했다.

 

言未盡一人應曰:「某雖不才願助老將軍先引一軍前去破敵。」孔明視之乃鄧芝也孔明大喜即撥精兵五千副將十員隨趙雲鄧芝去訖孔明出師後主引百官送於北門外十里孔明辭後主旌旗蔽野戈戟如林率軍望漢中迤邐進發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 사람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가 비록 재능은 없으나 노장군(조자룡)을 도와 먼저 한 부대를 이끌고 앞으로 가 적을 깨트리기를 원합니다.”했다. 제갈공명이 그를 보니 곧 등지였다. 제갈공명이 크게 기뻐하며 곧 정예 군대 오천과 부장 십 명을 뽑아 조운(조자룡)과 등지를 따라 가게 했다. 제갈공명이 군대를 출발할 때 후주(유선)는 백관을 이끌고 북문 밖 십리에서 환송하였다. 제갈공명이 후주(유선)를 하직하는데 깃발은 들을 덮고 창을 숲과 같이(세우고) 군대를 이끌고 한중을 향해 구불구불 출발하였다.

 

卻說邊庭探知此事報入洛陽是日曹叡設朝近臣奏曰:「邊官報稱諸葛亮率大兵三十餘萬出屯漢中令趙雲鄧芝為前部先鋒引兵入境。」叡大驚問群臣曰:「誰可為將以退蜀兵?」忽一人應聲而出曰:「臣父死於漢中切齒之恨未嘗得報今蜀兵犯境臣願引本部猛將更乞陛下賜關西之兵前往破蜀上為國家效力下報父讎臣萬死不恨!」

각설하고 변경에서 이 일을 탐지하고 낙양에 들어 가 보고하였다. 이날 조예는 조회를 열었었는데 근신이 아뢰어 말하기를 변경의 관리가 보고하기를 제갈량(제갈공명)이 대군 삼십여 만능 거느리고 나와 한중에 주둔하려 하여 조운(조자룡), 등지를 앞 부대 선봉으로 삼고 군대를 이끌고 국경에 들어왔습니다.’”했다. 조예가 크게 놀라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 말하기를 누가 장수가 되어 촉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가?”하니 홀연히 한 사람이 대답하며 나와 말하기를 신의 아버지가 한중에서 죽어 이를 끊는 한이 있는데 아직 원수를 갚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촉의 군대가 국경을 범하였으니 원하건데 신이 본부의 용맹한 장수를 이끌기를 원하며, 다시 폐하께서 내리시는 관서의 군대로 앞서 가서 촉의 군대를 깨트리기를 청합니다. 위로는 국가를 위하여 힘을 다하고, 아래로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신은 만 번 죽어도 한스럽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眾視之乃夏侯淵之子夏侯楙楙字子休其性最急又最吝自幼嗣與夏侯惇為子後夏侯淵為黃忠所斬曹操憐之以女清河公主招楙為駙馬因此朝中欽敬雖掌兵權未嘗臨陣當時自請出征曹叡即命為大都督調關西諸路軍馬前去破敵

무리들이 그를 보니 곧 하후연의 아들 하후무였다. 하후무의 자는 휴인데 그 성품이 매우 급하고 또 매우 도량이 좁았다. 어려서 후사로 하후돈에게 주어 아들이 되었다.(양자가 되었다.) 후에 하후연이 황충에게 죽음을 당하자 조조가 그를 불쌍하게 여겨 딸 청하공주를 하후무에게 시집보내 부마가 되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 공경하였다. 비록 병권을 잡았으나 일찍이 진에 임해보지는 못하였다.(전쟁에 참여하지는 못하였다.) 이런 때를 당하여 스스로 출정을 청하니 조예가 곧 명하여 대도독으로 삼고 관서 여러 방면의 군마를 징발하여 앞으로 가 적을 깨트리게 하였다.

 

司徒王朗奏曰:「不可夏侯駙馬素不曾經戰今付以大任非其所宜更兼諸葛亮足智多謀深通韜略不可輕敵。」夏侯楙曰:「司徒莫非結連諸葛亮欲為內應耶吾自幼從父學習韜略深通兵法汝何欺我年幼吾若不生擒諸葛亮誓不回見天子!」

사도 왕랑이 아뢰어 말하기를 안 됩니다. 하후부마는 평소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는데 지금 큰 임무를 맡기시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또 제갈량(제갈공명)은 지혜가 충분하고, 꾀가 많으며 깊이 병법에 통하였으니 적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했다. 하후무가 말하기를 사도께서는 제갈량(제갈공명)과 연결하여 안에서 대응하려하는 것 아니오? 내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병법을 익혀 깊이 병법에 통달하였는데 네가 어찌 내가 어리다고 무시하는가? 내가 만약 제갈량(제갈공명)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돌아와 천자를 뵙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했다.

 

王朗等皆不敢言夏侯楙辭了魏主星夜到長安調關西諸路軍馬二十餘萬來敵孔明正是欲秉白旄麾將士卻教黃吻掌兵權未知勝負如何且看下文分解

왕랑 등이 모두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하후무는 위나라 임금(조예)을 하직하고 밤을 세워 장안에 이르러 관서 제 방명의 병마 이십여 만 명을 동원하고 가 제갈공명을 대적하였다. 바로 이러하다. 흰 깃발을 잡고 장수와 군사를 지휘하게 하려 하나 어린애에게 병권을 잡게 하였구나. 승부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다. 또 아래 글에서 나누어 풀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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