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삼국유사

삼국유사 권제5 신주6 밀본최사~빈녀양모

by 최인표 2022. 7. 13.

三國遺事 卷第五

神咒 第六

密本摧邪

善德王德曼 遘疾彌留 有興輪寺僧法惕 應詔侍疾 久而無效 時有密本法師 以德行聞於國 左右請代之 王詔迎入內 本在宸仗外 讀藥師經 卷軸纔周 所持六環 飛入寢內 刺一老狐與法惕 倒擲庭下 王疾乃瘳 時 本頂上發五色神光 覩者皆驚 又承相金良圖爲阿孩時 忽口噤體硬 不言不遂 每見一大鬼率小鬼來 家中凡有盤肴 皆啖嘗之 巫覡來祭 則羣聚而爭侮之

삼국유사 권제5

신주 제5

밀본최사

선덕왕 덕만이 병에 걸려 낫지 않았다. 흥륜사에 중 법척이 있었는데 조서에 대응하여 병을 치료했지만 오래되어도 효과가 없었다. 그 때 밀본 법사 있었는데 덕행으로 나라에 소문이 났다. (왕의)조우가 대신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조서로 궁궐로 맞아 들였다. 밀본이 집 밖에 있으면서 약사경 읽기를 지극히 하였더니 가지고 있던 육환장(여섯 개 고리가 달려 있는 지팡이)이 날라 침실 안으로 들어가 한 늙은 여우와 법척을 찔러 뜰아래에 거꾸로 던지니 왕의 병이 나았다. 그 때 밀본의 머리 위에 오색의 신광이 나타나니 보는 자들이 모두 놀랐다. 또 승상 김양도가 아이였을 때 홀연히 입이 다물어지고 몸이 굳어 말하지 못하고, 몸을 마음대로 하지도 못하였다. (김양도가)매번 큰 귀신이 작은 귀신을 이끌고 와 집 안에 있는 모든 음식을 모두 먹고 맛보았다. 무당이 와 제사하면 곧 여럿이 모여 다투어 욕하였다.

 

圖雖欲命撤 而口不能言 家親請法流寺僧亡名來轉經 大鬼命小鬼 以鐵槌打僧頭仆地 嘔血而死 隔數日 遣使邀本 使還言 本法師受我請將來矣 衆鬼聞之 皆失色 小鬼曰 法師至將不利 避之何幸? 大鬼侮慢自若曰 何害之有! 俄而有四方大力神 皆屬金甲長戟 來捉群鬼縛去 次有無數天神 環拱而待 須臾本至 不待開經 其疾乃治 語通身解 具說件事 良圖因此篤信釋氏 一生無怠 塑成興輪寺吳堂主 彌勒尊像 左右菩薩 竝滿金畫其堂 本嘗住金谷寺

김양도가 비록 거두기를(물러갈 것을) 명하려 하였으나 입으로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법류사 중인 망명(지금 이름을 알 수 없는)을 청해 와 불경을 읽게 하였더니 큰 귀신이 작은 귀신에게 명하여 쇠망치로 중의 머리를 때려 엎어뜨리자 피를 토하며 죽었다. 며칠 지나 심부름꾼을 보내 밀본을 맞아오게 하였더니 심부름꾼이 돌아 와 말하기를 밀본 법사가 우리의 청을 받아 장차 올 것입니다.”했다. 여러 귀신들이 그것을 듣고 모두 얼굴색이 변하였다. 작은 귀신이 말하기를 법사가 이르면 장차 이롭니 않을 것이니 피해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하니 큰 귀신이 오만하고 태연하게 말하기를 무슨 해가 있겠는가!”했다. 홀연히 사방대력신들이 있어 모두 쇠 갑옷을 입고, 긴 창을 들고 와 뭇 귀신들을 잡아 묶어 갔다. 다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천신들이 둘러싸고 기다리더니 잠시 후 밀본이 이르렀는데 불경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그 병이 곧 나아 말이 통하고 몸이 풀려 사건을 갖추어(모두) 말하였다. 김양도가 이 때문에 불교를 도타이 믿어 일생동안 게을리 하지 않았다. 흥륜사 오당의 주존인 미륵존상과 좌우 보살을 소상으로 이루고 아울러 그 당에 금색의 그림을 채웠다. 밀본은 일찍이 금곡사에 머물렀다.

 

又金庾信嘗與一老居士交厚 世人不知其何人 于時 公之戚秀天 久染惡疾 公遣士診衛 適有秀天之舊 名因惠師者 自中岳來訪之 見居士而慢侮之曰 相汝形儀 邪佞人也 何得理人之疾? 居士曰 我受金公命 不獲已爾 惠曰 汝見我神通 乃奉爐咒香 俄頃五色雲旋遶頂上 天花散落 士曰 和尙通力不可思議 弟子亦有拙技 請試之 願師乍立於前 惠從之 士彈指一聲 惠倒迸於空 高一丈許 良久徐徐倒下 頭卓地 屹然如植橛 旁人推挽之不動 士出去 惠猶倒卓達曙 明日秀天使扣於金公 公遣居士往救乃解 因惠不復賣技 讚曰 紅紫紛紛幾亂朱 堪嗟魚目誑愚夫 不因居士輕彈指 多小巾箱襲碔砆

또 김유신이 일찍이 한 노거사와 사귐이 두터웠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 때 공(김유신)의 친척 수천이 오래 동안 나쁜 병이 들었다. (김유신)이 거사를 보내 진찰하게 하였다. 마침 수천의 친구 인혜 스님이 중악에서 와 방문해 있다가 거사를 보고 거만하게 업신여겨 말하기를 너의 형상과 태도를 보니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이다. 어찌 사람의 병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했다. 거사가 말하기를 내가 김공(김유신)의 명을 받았으니 그만 둘 수 없습니다.(어쩔 수 없이 왔을 뿐입니다.)”했다. 인혜가 말하기를 너는 나의 신통을 보라.”하고는 곧 향로를 받들어 향을 피우고 주문을 외웠더니 홀연히 오색의 구름이 머리 위를 돌고, 하늘에서 꽃이 흩어져 내렸다. 거사가 말하기를 화상의 신통력은 불가사의합니다. 제자가 또한 졸렬한 기술이 있으니 시험할 것을 청합니다. 스님은 잠깐만 앞에 서 있기를 원합니다.”했다. 인혜가 (그 말을)따랐다. 거사의 손가락을 튕기자 한 소리가 나면서 인혜가 공중에 거꾸로 올라가는데 높이가 1장 정도였다. 오래동안 천천히 내려와 머리가 땅에 박혔는데 말뚝을 박은 듯이 우뚝하였다. 옆의 사람이 끌어당겼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거사가 나와 갔다. 인혜가 거꾸로 박혀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수천이 김공(김유신)에게 빼주게 하자 공(김유신)이 거사를 보내 가서 구하여 풀어주게 하였다. 인혜가 다시는 기술을 팔지 않았다. 기려 말한다.

홍색, 자색이 분분하게 붉은 색에 섞이니 애석하다. 어목이 어리석은 남자를 속이는구나. 거사가 가벼이 손가락을 튕기지 않았다면 작은 상자에 무부를 얼마나 담았을까

 

惠通降龍

釋惠通 氏族未詳 白衣之時 家在南山西麓 銀川洞之口(今南澗寺東里) 一日遊舍東溪上 捕一獺屠之 弃骨園中 詰旦亡其骨 跡血尋之 骨還舊穴 抱五兒而蹲 郎望見 驚異久之 感嘆躕躇 便弃俗出家 易名惠通 往唐謁無畏三藏請業 藏曰 嵎夷之人豈堪法器! 遂不開授 通不堪輕謝去 服勤三載 猶不許 通乃憤悱立於庭 頭戴火盆 須臾頂裂聲如雷

혜통항룡

석 혜통은 씨족을 알 수 없다. 집은 남산 서쪽 기슭 은천동 입구(지금 남간사 동쪽 마을이다.)이다. 하루는 사동 시내 위에서 놀다가 한 수달을 잡아 죽이고,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다음날 아침에 그 뼈를 잃어버렸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가니 뼈가 옛 구멍으로 돌아가 다섯 마리 새끼를 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혜통)이 바라보고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기를 오래하였다. 감탄하고 주저하다(망설이다) 곧 세속을 버리고 출가하여 이름을 혜통이라 하였다. 당나라에 가 무외삼장을 뵙고 업을 청하였다. 무외삼장이 말하기를 해 뜨는 곳의 사람(외딴 오랑캐 사람이)이 어찌 법기를 감당하리오!”하고는 마침내 가르쳐 주지 않았다. 혜통이 가볍게 떠나가지 않고 3년을 부지런히 섬겼으나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혜통이 곧 분하고 애가 타서 뜰에서 머리에 불 동이를 이고 섰다. 잠시 후 머리가 터졌는데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았다.

 

藏聞來視之 撤火盆 以指按裂處 誦神咒 瘡合如平日 有瑕如王字文 因號王和尙 深器之 傳印訣 時 唐室有公主疾病 高宗請救於三藏 擧通自代 通受敎別處 以白豆一斗 咒銀器中 變白甲神兵 逐崇不克 又以黑豆一斗 咒金器中 變黑甲神兵 令二色合逐之 忽有蛟龍走出 疾遂瘳 龍怨通之逐己也 來本國文仍林 害命尤毒

무외삼장이 와서 그것을 보고 불 동이를 거두고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쓰다듬으며 신주를 외우니 상처가 평소와 같이 합하고 흔적이 남았는데 왕 글자 문양과 같았다. 이 때문에 왕화상이라 불렀다. 그릇을 깊게 여겨 인결을 전해주었다. 그 때 당나라 왕실에 공주에게 병이 있었다. 고종이 무외삼장에게 구해 줄 것을 청하니 혜통을 추천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했다. 혜통은 교지를 받고 다른 곳에 거처하면서 흰 콩 한 말을 가지고 은 그릇 안에 넣고 주문을 외우니 한 갑옷을 입은 신병으로 변하여 쫒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또 검은 콩 한 말을 가지고 금 그릇 안에 넣고 주문을 외우니 검은 갑옷을 입은 신병으로 변하였다. 두 색으로 하여금 함하여 쫒았다. 홀연히 교룡이 달려 나오고 병이 마침내 나았다. 용은 혜통이 자기를 쫒아낸 것을 원망하였다. (용이) 본국 문잉림에 와 목숨을 해치기를 더욱 독하게 하였다.

 

是時 鄭恭奉使於唐 見通而謂曰 師所逐毒龍 歸本國害甚 速去除之 乃與恭 以麟德二年乙丑還國而黜之 龍又怨恭 乃托之柳 生鄭氏門外 恭不之覺 但賞其葱密 酷愛之 及神文王崩 孝昭卽位 修山陵 除葬路 鄭氏之柳當道 有司欲伐之 恭恚曰 寧斬我頭 莫伐此樹 有司奏聞 王大怒 命司寇曰 鄭恭恃王和尙神術 將謀不遜 侮逆王命 言󰡔斬我頭󰡕 宜從所好 乃誅之 坑其家

이 때 정공이 받들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혜통을 보고 일러 말하기를 스님이 쫒아낸 독룡이 본국에 돌아 와 해침이 심하니 속히 가서 제거하십시오.”했다. 이에 정공과 인덕 2년 을축에 돌아와 내쫒았다. 용이 또한 정공을 원망하여 이에 버드나무에 의탁하여 정씨의 집 문 밖에 났다. 정공이 깨닫지 못하고 다만 그 무성함을 감상하고 매우 아꼈다. 신문왕이 죽자 효소왕이 즉위하여 산릉을 닦으면서 장례하는 길을 깨끗이 하는데 정씨의 버드나무가 길을 막았다. 유사(담당관리)가 그것을 베려하자 정공이 성내어 말하기를 차라리 내 머리를 벨지 언정 이 나무를 벨 수는 없다.”했다, 담당관리가 아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사구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정공이 왕화상의 신술을 믿고, 겸손하지 못함을 꾀하여 왕명을 업신여기고 거슬러 내 머리를 베라.’고 말하니 마땅히 좋아하는 바를 따라 베어 죽이고 그 집을 묻으라.”했다.

 

朝議 王和尙與恭甚厚 應有忌嫌 宜先圖之 乃徵甲尋捕 通在王望寺 見甲徒至 登屋 携砂甁 硏朱筆而呼之見我所爲! 乃於甁項 抹一畫曰 爾輩宜各見項 視之皆朱畫 相視愕然 又呼曰 若斷甁項 應斷爾項 如何? 其徒奔走 以朱項赴王 王曰 和尙神通 豈人力所能圖 乃捨之 王女忽有疾 詔通治之 疾愈 王大悅 通因言恭被毒龍之汚 濫膺國刑 王聞之心悔 乃免恭妻孥 拜通爲國師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왕화상과 정공이 (친분이)매우 두터워 대응하여 꺼리고 싫어함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먼저 도모해야 합니다.”했다. 이에 갑옷 입은 군사를 불러 찾아 잡으려 하였다. 혜통이 왕망사에 있다가 갑옷 입은 군사들이 이르는 것을 보고 집에 올라 사기병과 붉은붓을 잡고 외치기를 내가 하는 바를 보라!”했다. 이에 병목에 한 획을 긋고 말하기를 너희들은 마땅히 각기 목을 보라.”했다. 그것을 보니 모두 붉은 획이 그려져 있었다. 서로 보며 크게 놀랐다. 또 외쳐 말하기를 만약 병목을 끊으면 응당 너희의 목이 어떻게 되겠는가?”했다. 그 무리들이 달아나 붉은 목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갔다. 왕이 말하기를 화상이 신과 통하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도모할 바이겠는가?”하고는 이에 내버려 두었다. 왕녀가 홀연히 병이 나자 조서로 혜통에게 병을 다스리게 하였더니 병이 나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혜통이 이로 인하여 정공이 독룡의 해침을 입어 죄없이 나라의 형벌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왕이 듣고 마음으로 뉘우치고 이에 정공의 처와 자식들의 죄를 면하게 하고, 혜통을 국사로 삼았다.

 

龍旣報寃於恭 往機張山爲熊神 慘毒滋甚 民多梗之 通到山中 諭龍授不殺戒 神害乃息 初 神文王發疽背 請候於通 通至 咒之立活 乃曰 陛下曩昔爲宰官身 誤決臧人信忠爲隷 信忠有怨 生生作報 今玆惡疽亦信忠所崇 宜爲忠創伽藍 奉冥祐以解之 王深然之 創寺號信忠奉聖寺 寺成 空中唱云 因王創寺 脫苦生天 怨已解矣(或本載此事於眞表傳中 誤) 因其唱地 置折怨堂 堂與寺今存

용이 정공에게 원수를 갚고 기장산에 가 웅신이 되어 참혹한 해독이 더욱 심하니 백성들이 많이 괴로워하였다. 혜통이 산에 이르러 용을 깨우치고 불살계를 주니 웅신의 해침이 곧 그쳤다. 처음 신문왕이 등에 등창이 나니 혜통에게 치료를 청하였다. 혜통이 이르러 주문을 외우자 나았다. 이에 말하기를 폐하께서 옛날에 재관(재상)의 몸으로 장인 신충을 잘못 결단하여 종으로 삼았습니다. 신충이 원한이 있어 나고 날 때마다(윤회하여) 보복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나쁜 등창도 또한 신충이 모은 것()입니다. 마땅히 신충을 위해 절을 창건하고 명복을 받드는 것으로서 푸십시오.”했다. 신문왕이 깊이 그렇다 여기고 절을 창건하고 신충봉성사라 불렀다. 절이 완성되자 공중에서 노래하는 소리에 왕께서 절을 창건하였기 때문에 괴로움을 벗고 하늘에 태어나게 되어 원한이 이미 풀렸습니다.(어떤 책에는 이 일이 진표전에 실려 있는데 잘못이다.) 인하여 그 노래 한 곳에 절원당을 두었는데 당과 절이 지금에도 있다.

 

先是 密本之後 有高僧明朗 入龍宮得神印(梵云文豆婁 此云神印) 祖創神遊林(今天王寺) 屢禳鄰國之寇 今和尙傳無畏之髓 遍歷塵寰 救人化物 兼以宿命之明 創寺雪怨 密敎之風 於是乎大振 天磨之總持嵒母岳之咒錫院等 皆其流裔也 或云 通俗名尊勝角干 角干乃新羅之宰相峻級 未聞通歷仕之迹 或云 射得豺狼 皆未詳 讚曰 山桃溪杏映籬斜 一經春深兩岸花 賴得郎君閑捕獺 盡敎魔外遠京華

이에 앞서 밀본의 뒤에 고승 명랑이 있었는데 용궁에 들어 가 신인(범어에는 문두루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신인이라 했다.)을 얻어 신유림(지금의 천왕사이다.)을 처음 세우고 여러 차례 이웃나라의 침범을 물리쳤다. 지금 화상이 무외삼장의 정수를 전하고 두루 세속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구하고, 만물을 교화하였다. 겸하여 숙명의 밝음으로 절을 지어 원한을 씻게 하였으니 밀교의 교풍이 이에 크게 떨쳤다. 천마의 총지암, 모악의 주석원 등이 모두 그 류(신인)의 후예이다. 혹은 혜통의 세속 이름은 존숭각간이다.”하는데 각간은 곧 신라 재상의 높은 등급이다. 혜통이 벼슬한 자취는 듣지 못하였다. 혹은 활을 쏘아 시랑를 잡았다.”하나 모두 자세하지 않다. 기려 말한다.

산의 복숭아, 계곡의 살구 울타리에 비치는데, 한 줄기 길에 봄이 깊으니 두 언덕에 꽃이 피었다. 다행히 낭군의 힘으로 한가롭게 수달을 잡으니, 마귀와 외도의 교화를 다해 서울에서 멀어졌다.

 

明朗神印

按金光寺本記云 師挺生新羅 入唐學道 將還 因海龍之請 入龍宮傳秘法 施黃金千兩(一云千斤) 潛行地下 湧出本宅井底 乃捨爲寺 以龍王所施黃金飾塔像 光曜殊特 因名金光焉(僧傳作金羽寺 誤) 師諱明朗 字國育 新羅沙干才良之子 母曰南澗夫人 或云法乘娘 蘇判茂林之子金氏 則慈藏之妹也 三息 長曰國敎大德 次曰義安大德 師其季也

명랑신인

금광사 본기를 살펴보니 스님은 신라에서 태어나 당에 들어 가 도를 배우고 장차 돌아오려 하다 해룡의 청으로 인해 용궁에 들어 가 비법을 전하였다. 황금 천량(천근이라 하기도 한다.)을 시주받아 몰래 땅 밑으로 가 본가 우물 바닥에서 솟아 나왔다. 곧 집을 버려 절로 만들고 용왕이 시주한 황금을 가지고 탑과 불상을 꾸미니 빛남이 특별하였다. 이 때문에 금광이라 이름하였다.(승전에는 금우사라 썼으나 잘못이다.) 스님의 이름은 명랑이고, 자는 국육으로 신라 사간 재량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 혹은 법승랑이라 하는데 소판 무림의 딸 김씨이니 곧 자장의 누이이다. 자식을 셋 두었으니 맏이는 국교대덕, 둘째는 의안대덕이고 스님은 그 동생이다.

 

初母夢呑靑色珠而有娠 善德王元年入唐 貞觀九年乙未來歸 總章元年戊辰 唐將李勣統大兵 合新羅 滅高麗 後餘軍留百濟 將襲滅新羅 羅人覺之 發兵拒之 高宗聞之赫怒 命薛邦興師將討之 文武王聞之懼 請師開秘法禳之(事在文武王傳中) 因玆爲神印宗祖 及我太祖創業之時 亦有海賊來擾 乃請安惠朗融之裔廣學大緣等二大德 作法禳鎭 皆朗之傳系也 故幷師而上至龍樹爲九祖(本寺記三師爲律祖 未詳) 又太祖爲創現聖寺 爲一宗根柢焉

처음 어머니가 꿈에 청색 구슬을 머금고 잉태하였다. 선덕왕 1년 당나라에 들어 가 정관 9년 을미에 돌아왔다. 총장 1년 무진에 당나라 장수 이적이 대군을 통솔하여 신라와 합하여 고려(고구려)를 없애 후 남은 군대를 백제에 머물게 하였다가 신라를 습격하여 없애려 하였다. 신라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고 군대를 내어 막았다. 고종이 그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설방으로 하여금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려 하였다. 문무왕이 그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스님에게 비법으로 물리칠 것을 청했다.(사실은 문무왕 전 중에 있다.) 이 때문에 신인종 조사가 되었다. 우리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에 이르러 또한 해적이 와 소란스럽게 함이 있었다. 이에 안혜와 낭융의 후예인 광학, 대연 등 두 대덕에게 청하여 법을 만들어 진압하게 하였는데 모두 명랑 계통이었다. 그러므로 스님을 아울러 위로는 용수에 이르기까지 9조로 삼았고(본사기에는 세 스님이 율조가 되었다고 하는데 자세하지 않다.) 또 태조가 현성사를 창건하여 한 종지의 뿌리로 삼았다.

 

又新羅京城東南二十餘里 有遠源寺 諺傳 安惠等四大德 與金庾信金義元金述宗等 同願所創也 四大德之遺骨 皆藏寺之東峰 因號四靈山祖師嵒云 則四大德皆羅時高德 按堗白寺柱貼注脚載 慶州戶長巨川母阿之女 女母明珠女 女母積利女之子廣學大德大緣三重(古名善會)昆季二人 皆投神印宗 以長興二年辛卯 隨太祖上京 隨駕焚修 賞其勞 給二人父母忌日寶于堗白等 田畓若干結云云 則廣學大緣二人 隨聖祖入京者 安師等 乃與金庾信等創遠源寺者也 等廣學二人骨 亦來安于玆爾 非四德皆創遠源皆隨聖祖也 詳之

또 신라 경성 동남쪽 20여리에 원원사가 있는데 언전에는 안혜 등 4 대덕이 김유신, 김의원, 김술종 등과 함께 같이 발원하여 창건한 것이다. 4 대덕의 유골은 모두 절이 동쪽 봉우리에 감추었다. 이 때문에 사령산 조사암이라 부른다.”했다. 4 대덕은 모두 신라시대 때 덕이 높은 중이다. 돌백사 주첩주각에 실린 것을 살펴보면 경주호장 거천의 어머니는 아지녀이고, 그 여자의 어머니는 명주녀이고, 그 여자의 어머니는 적리녀이다. (적리녀)의 아들이 광학대덕, 대연삼중(옛 이름은 선회이다.)으로 형과 동생이 모두 신인종에 들어갔다. 장흥 2년 신묘에 태조를 따라 상경하여 임금을 따라다니며 항을 사르고 수행하였다. 그 수고로움을 포상하여 돌백 등에 두 사람 부모의 기일보로 논밭 몇 결을 주었다.”했다. 곧 광학, 대연 두 사람이 성조(태조)를 따라 서울에 들어온 사람이고, 안혜 스님 등은 곧 김유신 등과 원원사를 창건한 사람이다. 광학 등 두 사람의 인골은 또한 여기에 와 안치하였을 뿐이고, 4(4명의 고승)이 모두 원원사를 창건하고 성조(태조)를 따른 것은 아니다. 자세히 살펴야 한다.

 

感通 第七

仙桃聖母隨喜佛事

眞平王朝 有比丘尼名智惠 多賢行 住安興寺 擬新修佛殿而力未也 夢一女仙風儀婥約 珠翠飾鬟 來慰曰 我是仙桃山神母也 喜汝欲修佛殿 願施金十斤以助之 宜取金於予座下 粧點主尊三像 壁上繪五十三佛六類聖衆及諸天神五岳神君(羅時五岳 謂東吐含山 南智異山 西雞龍 北太伯 中父岳亦云公山也) 每春秋二季之十日 叢會善男善女 廣爲一切含靈 設占察法會以爲恒規(本朝屈弗池龍 託夢於帝 請於靈鷲山長開藥師道場 平海途 其事亦同) 惠乃驚覺 率徒往神祠座下 堀得黃金一百六十兩 克就乃功 皆依神母所諭 其事唯存 而法事廢矣

감통 제7

선도성모 수희불사

진평왕대에 비구니가 있었는데 이름은 지혜로 어진 행실이 많았으며 안흥사에서 살았다. 새로 불전을 수리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꿈에 한 여신선이 겉모습이 아름답고 구슬로 쪽머리를 꾸미고 와서 위로해 말하기를 나는 이 선도산의 신모이다. 네가 불전을 수리하고자하는 것을 기쁘게 여겨 금 10근을 시주하여 돕기를 원한다. 마땅히 내 자리 아래에서 금을 취하여 주존 삼상을 꾸미고, 벽 위에 53, 6류 성중과 여러 천신, 오악 신군(신라 때 5악은 동 토함산, 남 지리산, 서 계룡산, 북 태백산, 중 부악 또는 공산을 말한다.)을 그리고, 매 봄과 가을 두 계절에 10일 동안 선남선녀를 모아 널리 일체 함령을 위하여 점찰법회를 여는 것을 항상된 규범으로 삼으라.”(본조(고려) 굴불지의 용이 꿈에 가탁하여 황제에게 영취산에서 길이 약사도량을 열어 바닷길이 평안하도록 청하였는데 그 일과 또한 같다.) 했다. 지혜가 놀라 깨 무리를 이끌고 신사 자리 아래 가 파서 황금 160냥을 얻어 공을 이룰 수 있었다. 모두 신모가 깨우친 바에 의였다. 그 일만 남아있고, 법사는 폐하였다.

 

神母本中國帝室之女 名娑蘇 早得神仙之術 歸止海東 久而不還 父皇寄書繫足云 隨鳶所止爲家 蘇得書放鳶 飛到此山而止 遂來宅爲地仙 故名西鳶山 神母久據玆山 鎭祐邦國 靈異甚多 有國已來 常爲三祀之一 秩在群望之上 第五十四景明王好使鷹 嘗登此放鷹而失之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의 딸로 이름이 사소이다. 일찍 신선술을 얻어 해동에 가 머물기를 오래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 황제가 발에 글을 묶어 보내며 말하기를 솔개를 따라 멈추는 곳을 집으로 삼으라.”했다. 사소가 글을 받고 솔대를 놓으니 솔개가 날아 이 산에 이르러 멈추었다. 마침내 집에 와 지선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름을 서연산이라 했다. 신모가 오래 동안 이 산에 기대 나라 지키는 것을 도왔는데 영험하고 기이함이 매우 많았다. 나라가 있은 이래로 항상 3사 중의 하나로 서열이 여러 망제사의 위에 있었다. 54대 경명왕 비가 매 부리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이에 올라 매를 풀어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禱於神母曰 若得鷹 當封爵 俄而鷹飛來止机上 因封爵大王焉 其始到辰韓也 生聖子爲東國始君 盖赫居閼英二聖之所自也 故稱雞龍雞林白馬等 雞屬西故也 嘗使諸天仙織羅 緋染作朝衣 贈其夫 國人因此始知神驗 又國史 史臣曰 軾政和中 嘗奉使入宋 詣佑神館 有一堂 設女仙像 館伴學士王黼曰 󰡔此是貴國之神 公知之乎?󰡕 遂言曰 󰡔古有中國帝室之女 泛海抵辰韓 生子爲海東始祖 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又大宋國使王襄到我朝 祭東神聖母 文有娠賢肇邦之句 今能施金奉佛 爲含生開香火 作津梁 豈徒學長生而囿於溟濛者哉! 讚曰 來宅西鳶幾十霜 招呼帝子織霓裳 長生未必無生異 故謁金仙作玉皇

신모에게 기도하여 말하기를 만약 매를 얻는다면 마땅히 작(벼슬)을 봉할 것입니다.”하니 홀연히 매가 날아 와 책상 위에 앉았다. 이 때문에 작(벼슬)을 봉해 대왕으로 책봉하였다. 그 처음 진한에 이르러 성자(성스러운 아들)를 낳아 동국의 처음 임금이 되었다. 대개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의 나온 바이다. 그러므로 계룡, 계림, 백마 등으로 불렀는데 닭은 서쪽에 속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여러 천선으로 하여금 비단을 짜게 하고 비색을 물들여 조정의 옷을 만들어 그 지아비에게 주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로소 신의 징험임을 알았다. 또 국사에 사신(사관)이 말하기를 (김부식)이 정화 연간에 일찍이 사신이 되어 송에 들어가 우신관에 나아가니 한 당이 있었는데 여자 신선의 상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 왕보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하고는 마침내 말하기를 옛날 중국 제실에 딸이 있었는데 바다에 떠 진한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시조가 되고, 여자는 지선이 되었으며 오래 선도산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상입니다.’했다. 또 대송국의 사신 왕양이 우리 조정에 이르러 동쪽 신인 성모에게 제사하였는데 제문에 어진이를 잉태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구절이 있다. 지금 능히 금을 베풀어 부처를 받들고, 중생을 위하여 향불을 열어 진량을 만들었으니 어찌 한갓 장생만을 배워 몽매함에 얽매여 있겠는가! 가려 말한다.

서연산에 와 머문 지 몇 십 년이 지났는가, 천제의 여인 불러 예상을 짰다. 장생술도 반드시 기이함이 없지 않았지만, 그러므로 금선을 뵙고 옥황이 되었네.

 

郁面婢念佛西昇

景德王代康州(今晉州 一作剛州 則今順安)善士數十人 志求西方 於州境創彌陀寺 約萬日爲契 時有阿干貴珍家一婢名郁面 隨其主歸寺 立中庭 隨僧念佛 主憎其不職 每給穀二碩 一夕舂之 婢一更舂畢 歸寺念佛(俚言己事之忙 大家之春促 盖出乎此) 日夕微怠 庭之左右 竪立長橛 以繩穿貫兩掌 繫於橛上合掌 左右遊之激勵焉 時有天唱於空郁面娘入堂念佛 寺衆聞之 勸婢入堂 隨例精進 未幾 天樂從西來 婢湧透屋樑而出 西行至郊外 捐骸變現眞身 坐蓮臺 放大光明 緩緩而逝 樂聲不撤空中 其堂至今有透穴處云(已上鄕傳)

욱면비염불서승

경덕왕대 강주(지금의 진주, 강주라 쓰기도 한다. 곧 지금의 순안이다.)의 선사 수십 명이 서쪽세상(극락정토) 구함에 뜻을 두고 주 경계에 미타사를 창건하고 만일을 기약하는 계를 하였다. 그 때 아간 귀진의 집 한 여종은 이름이 욱면인데 그 주인을 따라 절에 가 중간 뜰에 서서 중을 따라 염불하였다. 주인이 그 직책이 아님을 미워하여 매번 곡식 2석을 주고 하루저녁에 찧게 하였다. 여종이 일경(초저녁)에 찧기를 마치고 절에 가 염불하였다.(속담에 자기 일의 바빠 주인집의 방아를 서두른다.’는 것은 아마도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낮과 밤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뜰의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노끈을 가지고 두 손바닥을 뚫어 말뚝 위에 묶고는 합장하고 좌우로 흔들어 격려하였다. 그 때 공중에서 하늘이 욱면랑은 당에 들어 가 염불하라.”했다. 절의 무리들이 그것을 듣고 여종에게 당에 들어 갈 것을 권하였다. 예에 따라 정진 하였더니 얼마 후 하늘의 음악이 서쪽에서 들려오더니 여종이 솟아 집의 대들보를 뚫고 나와 서쪽으로 갔다. 교외에 이르러 몸을 버리고 진신으로 변하여 연대에 앉아 큰 빛과 밝음을 내면거 천천히 갔다. 음악 소리가 공중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당에는 지금까지 구멍이 뚫린 곳이 있다.(이상은 향전이다.)

 

按僧傳 棟梁八珍者觀音應現也 結徒有一千 分朋爲二 一勞力 一精修 彼勞力中知事者不獲戒 墮畜生道 爲浮石寺牛 嘗駄經而行 賴經力 轉爲阿干貴珍家婢 名郁面 因事至下柯山 感夢遂發道心 阿干家距惠宿法師所創彌陀寺不遠 阿干每至其寺念佛 婢隨往 在庭念佛云云 如是九年 歲在乙未正月二十一日 禮佛撥屋梁而去 至小伯山 墮一隻履 就其地爲菩提寺 至山下棄其身 卽其地爲二菩提寺 榜其殿曰勗面登天之殿 屋脊穴成十許圍 雖暴雨密雪不霑濕 後有好事者範金塔一座 直其穴 安承塵上 以誌其異 今榜塔尙存

승전을 살펴보니 동량팔진은 관음보살의 응현이다. 무리 일천을 모아 무리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노력하고, 하나는 정성껏 수행하였다. 그 노력하는 사람들 중에 일을 맡은 자가 계를 얻지 못하고 축생도에 떨어져 부석사 소가 되었다. 일찍이 불경을 싣고 다니다 불경의 힘에 의지하여 전생해 아간 귀진의 집 여종이 되었는데 이름을 욱면이라 하였다. 일로 인하여 하가산에 이르러 꿈을 꾸고 마침내 도의 마음을 내었다. 아간의 집이 혜숙법사가 창건한 미타사와 거리가 멀지 않았다. 아간(귀진)이 매번 그 절에 이르러 염불하니 여종도 따라가 뜰에서 염불하였다.”했다. 이 같이 하기를 9년을 하였는데 을미 정월 21일 예불하다가 짚 대들보를 뚫고 갔다. 소백산에 이르러 한 짝 신을 떨어뜨리니 그 당에 나아가 보리사를 지었다. 산 아래 이르러 그 몸(육신)을 버리니 곧 그 땅에 제2 보리사를 짓고, 그 전각에 욱면등천지전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지붕 용마루에 뚫린 구멍은 열 아름쯤 되는데 비록 폭우, 폭설이 내려도 젖지 않았다. 후에 일을 좋아하는 자가 있어 금탑 한 개를 본떠 만들어 그 구멍에 맞추어 반자에 안치하고 그 기이한 행적을 기록하였는데 지금도 그 현판과 탑이 남아있다.

 

面去後 貴珍亦以其家異人托生之地 捨爲寺曰法王 納田民 久後廢爲丘墟 有大師懷鏡 與承宣劉碩小卿李元長 同願重營之 鏡躬事土木 始輸材 夢老父遺麻葛屨各一 又就古神社 諭以佛理 斫出祠側材木 凡五載告畢 又加臧獲 蔚爲東南名藍 人以鏡爲貴珍後身

욱면이 간 후 귀진이 또한 가 집에 이인이 삶을 의탁한 땅이라 여겨 희사하여 절로 만들어 법왕사라 하고, 전민(농민)을 들였다. 오래 후 폐해져 폐허가 되었다. 대사 회경이 있어 승선 유석, 소경 이원장과 함께 발원하여 중영하였다. 회경이 토목에 종사하여 비로소 재목을 운반하였다. 꿈에 한 노부가 삼신과 칡신을 각각 하나씩 주었다. 또 옛 신사에 가 불교의 이치를 깨우쳐주고, 신사 옆의 나무를 베어내어 무릇 5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또 장획(노비)을 더 두어 융성해져 동남의 이름있는 절이 되었다. 사람들은 회경을 귀진의 후신이라 하였다.

 

議曰 按鄕中古傳 郁面乃景德王代事也 據徵(徵字疑作珍 下亦同)本傳 則元和三年戊子 哀莊王時也 景德後歷惠恭宣德元聖昭聖哀莊等五代 共六十餘年也 徵先面後 與鄕傳乖違 然兩存之闕疑 讚曰 西隣古寺佛燈明 舂罷歸來夜二更 自許一聲成一佛 掌穿繩子直忘形

논의하여 말한다. 지방에 있는 고전을 살펴보니 육면은 곧 경덕왕대의 일이다. (징자는 아마도 진이라 써야할 것이다. 아래도 또한 같다.) 본전에 곧 원화 3년 무자 애장왕 때이다.”했다. 경덕왕 뒤로 혜공왕, 성덕왕,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등 5, 모두 60여년이다. 징에 앞이고, 면이 뒤이니 향전과는 어긋난다. 그러나 두 가지를 남겨 의심을 없앤다. 기려 말한다.

서편 이웃의 옛 절에 부처의 등불이 밝은데, 방아질 마치고 밤 2경에 절에 와, 스스로 한 소리 내어 한 부처를 이룰 것을 기약하여, 손바닥 뚫어 노끈으로 꿰고 형상을 잊었다.

 

廣德 嚴莊

文武王代 有沙門名廣德嚴莊二人友善 日夕約曰 先歸安養者 須告之 德隱居芬皇西里(或云 皇龍寺有西去房 未知孰是) 蒲鞋爲業 挾妻子而居 莊庵栖南岳 大種力耕 一日 日影拖紅 松陰靜暮 窓外有聲 報云 某已四(西)往矣 惟君好住 速從我來 莊排闥而出顧之 雲外有天樂聲 光明屬地 明日歸訪其居 德果亡矣 於是 乃與其婦收骸 同營蒿里 旣事 乃謂婦曰 夫子逝矣 偕處何如? 婦曰 可 遂留 夜將宿欲通焉 婦靳之曰 師求淨土 可謂求魚緣木 莊驚怪問曰 德旣乃爾 予又何妨?

광덕, 엄장

문무왕 대 중 광덕과 엄장인 두 사람이 있었는데 좋은 벗이었다. 밤낮으로 약속해 말하기를 먼저 안양(극락)에 가는 자는 반드시 알리자.”하였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혹은 황룡사에 서거방이 있었다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에 숨어 살면서 부들로 신발 짜는 것을 생업으로 삼아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크게 씨 뿌리며 힘써 밭을 갈았다. 어느 날 해 그림자가 붉은 색을 이끌고 소나무 그늘이 고요한 저녁 창 밖에 소리가 있었는데 알려 말하기를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갑니다. 그대는 잘 살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시라.”했다.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구름 밖에는 하늘의 음악 소리가 있고, 밝은 빛이 땅에 이어져 있었다. 다음날 그가 사는 곳을 찾아 가보니 광덕이 과연 죽어 있었다. 이에 곧 그 부인과 함께 해골(시신)을 거두어 함께 무덤을 만들었다. 일을 마친 후 곧 그 부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부자(남편)가 죽었으니 함께 사는 것이 어떠합니까?”했다. 부인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머물렀다. 밤에 잠자며 통하고자 했다. 부인이 부끄러워하며 말하기를 스님이 정토를 구하시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한다고 이를 만합니다.”했다. 엄장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광덕은 이미 하였는데 내가 또한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꺼리겠습니까?) 했다.

 

婦曰 夫子與我 同居十餘載未嘗一夕同床而枕 況觸汚乎 但每夜端身正坐 一聲念阿彌陁佛號 或作十六觀 觀旣熟 明月入戶 時昇其光 加趺於上 竭誠若此 雖欲勿西奚往? 夫適千里者 一步可規 今師之觀可云東矣 西則未可知也 莊愧赧而退 便詣元曉法師處 懇求津要 曉作鍤觀法誘之 藏於是潔己悔責 一意修觀 亦得西昇 鍤觀在曉師本傳與海東僧傳中 其婦乃芬皇寺之婢 盖十九應身之一德 嘗有歌云 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鄕言云報言也)多可支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支 兩手集刀花乎白良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阿邪 此身遺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부인이 말하기를 남편과 나는 함께 10여년을 살았으나 일찍이 하루저녁도 침대를 같이 하여 잠자지 않았는데 하물며 접촉하여 더럽혔겠습니까? 다만 매일 밤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앉아 한 소리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염불하였고, 혹은 16관을 지어 관이 무르익어 맑은 달()이 문에 들어오면 때로 그 빛을 타고 그 위에 가부좌하였습니다. 정성을 다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비록 서쪽으로 가고자 하지 않더라도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저 천리를 가는 자는 한 걸음을 법으로 삼습니다. 지금 스님의 관은 동쪽을 말할 수 있겠으나 서쪽(서방정토)은 곧 알 수 없습니다.”했다. 엄장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물러나 곧 원효법사가 있는 곳에 나아가 간절히 율의 요점을 구하였다. 원효가 삽관법을 만들어 가르쳤다. 엄장이 이에 자기를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한 뜻으로 관을 닦아 또한 서쪽으로 오를 수 있었다. 삽관은 원효 본전과 해동승전 안에 있다. 그 부인은 곧 분황사의 여종으로 대개 19응신의 하나이다. 일찍이 노래가 있었는데 달이시여, 이제 정토까지 가서 무량수불 앞에 알리어 여쭈십시오.(우리말로 보언이라 말한다.) 다짐 깊은 부처님께 우러러 두 손 모아 왕생을 원합니다. 왕생을 바랍니다하며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아뢰옵소서, 아아 이 몸을 버려두고 마흔 여덟 가지로 큰 소원을 이루실까 저어합니다.”했다.

 

憬興遇聖

神文王代 大德憬興 姓水氏 熊川州人也 年十八出家 遊刃三藏 望重一時 開耀元年 文武王將昇遐 顧命於神文曰 憬興法師可爲國師 不忘朕命 神文卽位 曲爲國老 住三郎寺 忽寢疾彌月 有一尼來謁候之 以華嚴經中善友原病之說爲言曰 今師之疾 憂勞所致 喜笑可治 乃作十一樣面貌 各作俳諧之舞 巉巖戍削 變熊不可勝言 皆可脫頤 師之病不覺洒然 尼遂出門 乃入南巷寺(寺在三郎寺南)而隱 所將杖子 在幀畫十一面圓通像前

경흥우성

신문왕대 대덕 경흥은 성이 수씨로 웅천주 사람이다. 나이 18세에 출가하여 삼장에 칼을 놀려(삼장에 통달하여) 그 시대에 명망이 높았다. 개요 1년 문무왕이 장차 승하하려할 때 신문왕에게 고명(유언)하여 말하기를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짐의 명령을 잊지 말라.”했다. 신문왕이 즉위하여 정성으로 국노를 삼고, 삼랑사에 살게 하였다. 홀연히 병이 들어 한 달이 되었다. 한 여승이 있어 와서 문안하고 화엄경 안의 착한 벗이 병을 고쳤다는 말을 가지고 말하기를 지금 스님의 병은 근심하고 수고로운데서 이른 바이니 기쁘게 웃으면 나을 것입니다.”하고는 곧 11가지 모양의 얼굴로 각기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니 뾰족하기도 하고, 깍은 듯 하기도 하고, 변하는 모습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모두 턱이 빠질 만하니 스님의 병이 깨닫지 못한 사이에 나았다. 여승이 마침내 문을 나가 곧 남항사(절은 삼랑사 남쪽에 있다.)에 들어 가 숨었는데 가지고 있던 지팡이는 탱화 11면 원통상 앞에 있었다.

 

一日將入王宮 從者先備於東門之外 鞍騎甚都 靴笠斯陳 行路爲之辟易 一居士(一云沙門) 形儀疎率 手杖背筐 來憩于下馬臺上 視筐中乾魚也 從者呵之曰 爾着緇 奚負觸物耶? 僧曰 與其挾生肉於兩股間 背負三市之枯魚 有何所嫌? 言訖起去 興方出門 聞其言 使人追之 至南山文殊寺之門外 抛筐而隱 杖在文殊像前 枯魚乃松皮也 使來告 興聞之嘆曰 大聖來戒我騎畜爾 終身不復騎 興之德馨遺味 備載釋玄本所撰三郎寺碑 嘗見普賢章經 彌勒菩薩言 我當來世 生閻浮提 先度釋迦末法弟子 唯除騎馬比丘不得見佛 可不警哉! 讚曰 昔賢垂範意彌多 胡乃兒孫莫切瑳 背底枯魚猶可事 那堪他日負龍華

하루는 장차 왕궁에 들어가는데 종자가 먼저 동문 밖에서 준비하였는데 안장과 말이 매우 화려하고 신과 삿갓이 이에 갖추어져 행인이 피하였다. 한 거사(한편 사문이라 한다.)가 얼굴과 자태가 경솔하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등에는 대광주리를 메고, 와서 하마대 위에서 쉬고 있었는데 대광주리 안을 보니 마른 물고기가 담겨 있었다. 종자가 그를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승려의 옷을 입고, 어찌하여 범하는 물건을 지고 있는가?”했다. 중이 말하기를 양 다리 사이에 살아있는 고기를 끼고 있는 것과 등에 시장의 마른고기를 지고 있는 것 이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했다. 말을 마치고 일어나 갔다. 경흥이 막 문을 나서다가 그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따르게 하였더니 남산 문수사 문밖에 이르러 대광주리를 버리고 숨었다. 지팡이는 문수상 앞에 있었고, 마른 물고기는 바로 소나무 껍질이었다. 곧 심부름꾼이 와서 고하니 경흥이 그것을 듣고 탄식해 말하기를 대성이 와 내가 짐승을 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하고는 몸을 다하도록 다시는 타지 않았다. 경흥의 덕의 향기가 남은 맛은 석현본이 지은 삼랑사 비에 갖추어져 실려 있다. 일찍이 보현장경을 보니 미륵보살이 말하기를 나는 내세에는 염부제에 태어나 먼저 석가의 말법 제자들을 제도할 것이다. 오직 말을 탄 비구만은 제외시켜 부처를 볼 수 없을 것이다.”하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려 말한다.

옛 어진 이가 보인 모범 뜻 더욱 많았는데, 어찌하여 자손들은 덕을 닦지 않는가? 마른 물고기 등에 진 것은 오히려 옳은 일이나, 다음 날 용화를 저버릴 일 어찌 견디겠는가?

 

眞身受供

長壽元年壬辰 孝昭卽位 始創望德寺 將以奉福唐室 後 景德王十四年 望德寺塔戰動 是年有安史之亂 羅人云 爲唐室立玆寺 宜其應也 八年丁酉 設落成會 王親駕辦供 有一比丘 儀彩疎陋 局束立於庭 請曰 貧道亦望齋 王許赴床杪 將罷 王戱調之曰 住鍚何所? 僧曰 琵琶嵓

진신수공

장수 1년 임진 효소왕이 즉위하여 처음 망덕사를 창건하고, 당나라 황실의 복을 받들려 했다. 후에 경덕왕 14년 망덕사 탑이 흔들리더니 이해 안사의 난이 있었다. 신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나라 황실을 위해 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응함이 있는 것이다.”했다. 8년 정유 낙성회를 열었는데 왕이 직접 가마를 타고 가 공양하였다. 한 비구가 있어 모습이 남루하였다.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청해 말하기를 빈도가 또한 재를 보겠습니다.”했다. 왕이 평상의 끝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장차 재가 끝나려할 때 왕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어느 곳에서 살고 있습니까?”하니 중이 말하기를 비파암입니다.”했다.

 

王曰 此去 莫向人言 受國王親供之齋 僧笑答曰 陛下亦莫與人言 供養眞身釋迦 言訖 湧身凌空 向南而行 王驚愧 馳上東岡 向方遙禮 使往尋之 到南山參星谷 或云大磧川源石上 置錫鉢而隱 使來復命 遂創釋迦寺於琵琶嵓下 創佛無事於滅影處 分置錫鉢焉 二寺至今存 錫鉢亡矣

왕이 말하기를 이제 가면 다른 사람을 향해 국왕이 친히 공양하는 재를 받았다고 말하지 마시오.”했다. 중이 웃으며 말하기를 폐하께서도 또한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했다. 말을 마치고 몸을 솟구쳐 공중을 떠서 남쪽을 향해 갔다. 왕이 놀라고 부끄러워하며 동쪽 산으로 달려올라 가 그 방향을 향해 멀리서 예를 하고, 가서 찾게 하였다. 남산에 삼성곡 혹은 대적천원 돌 위에 지팡이와 바리 떼를 두고 숨었다. 사자가 와서 보고하니 마침내 석가사를 비파암 아래에 창건하고, 그 자취가 사라진 곳에 불무사를 창건하고 지팡이와 바리떼를 나누어 두었다. 두 절이 지금에도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떼는 잃어버렸다.

 

智論第四云 昔有罽賓三藏 行阿蘭若法 至一王寺 寺設大會 守門人見其衣服麤弊 遮門不前 如是數數 以衣弊故 每不得前 便作方便 假借好衣而來 門人見之 聽前不禁 旣獲詣坐 得種種好食 先以與衣 衆人問言 何以爾乎? 答曰 我比數來 每不得入 今以衣故得此座 得種種食 宜以與衣爾 事可同按 讚曰 燃香擇佛看新繪 辦供齋僧喚舊知 從此琵琶嵓上月 時時雲掩到潭遲

지론 제4에 말하기를 옛날 계빈국 삼장이 아란야법을 행하여 일왕사에 이르니 절이 큰 오임을 베풀고 있었다. 문을 지키는 사람이 그 의복이 더러운 것을 보고 문을 막아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이 같이 하기를 여러 번 하였다. 옷이 해졌기 때문에 매번 나아가지 못하였다. 곧 방편을 지어 좋은 옷을 빌려 입고 오니 문지기가 그것을 보고 앞으로 가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자리에 나아감을 얻은 후에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을 얻어서는 먼저 옷에게 주었다. 여러 사람들이 물어 말하기를 어찌 그렇게 하느냐했다. 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여러 차례 올 때마다 매번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지금 옷 때문에 이 자리를 얻고, 여러 가지 음식을 얻었기 때문에 마땅히 옷에 주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일이 지금 살펴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月明師兜率歌

景德王十九年庚子四月朔 二日並現 挾旬不滅 日官奏請緣僧 作散花功德則可禳 於是 潔壇於朝元殿 駕幸靑陽樓 望緣僧 時有月明師 行于阡陌時之南路 王使召之 命開壇作啓 明奏云 臣僧但屬於國仙之徒 只解鄕歌 不閑聲梵 王曰 旣卜緣僧 雖用鄕歌可也 明乃作兜率歌賦之 其詞曰 今日此矣散花唱良巴 寶白乎隱花良汝隱 直等隱心音矣命叱使以惡只 彌勒座主陪立羅良

월명사 도솔가

경덕왕 19년 경자 4월 초하루 두 해가 나란히 나타나 열흘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일관이 아뢰기를 인연이 닿은 중을 청하여 꽃을 뿌리는 공덕을 지으면 곧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했다. 이에 조원전에 정결한 단을 만들고 가마를 타고 청양루에 가 인연이 닿는 중을 기다렸다. 그 때 월명사가 있어 밭 사이의 남쪽 길을 가고 있었다. 왕이 부르게 하여 단을 열고, 계문을 짓게 하였다. 월명이 아뢰어 말하기를 신승은 다만 국선의 무리에만 속하여 단지 향가를 풀 수 있을 뿐 범성은 소홀합니다.(익숙하지 못합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이미 인연이 닿은 중으로 점쳐졌으니 비록 향가를 쓸지라도 좋다.”했다. 월명이 이에 도솔가를 지어 바쳤다. 그 가사에

오늘 이에 산화가를 불러, 뿌린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령을 부림이니, 미륵좌주를 모셔라.

 

解曰 龍樓此日散花歌 挑送靑雲一片花 殷重直心之所使 遠邀兜率大僊家 今俗謂此爲散花歌 誤矣 宜云兜率歌 別有散花歌 文多不載 旣而日怪卽滅 王嘉之 賜品茶一襲 水精念珠百八箇 忽有一童子 儀形鮮潔 跪奉茶珠 從殿西小門而出 明謂是內宮之使 王謂師之從者 及玄徵而俱非 王甚異之 使人追之 童入內院塔中而隱 茶珠在南壁畫慈氏像前 知明之至德至誠 能昭假于至聖也如此 朝野莫不聞知 王益敬之 更贐絹一百疋 以表鴻誠

풀이 해 말하면 용루에서 오른 이날 산화가를 불러, 한 송이 꽃 청운에 뿌려 보낸다. 은근하고 정중한 곧은 마음 쓰는 것은 멀리 도솔대선을 맞이하리. 지금 세속에서 이를 일러 산화가랄 하는 것은 잘못이다. 마땅히 도솔가라 해야 하며, 따로 산화가가 있으나 글이 많아 싣지 않는다. 이윽고 해의 괴이함이 곧 사라졌다. 왕이 그것을 아름답게 여겨 좋은 차 한 봉과 수정염주 108개를 내렸다. 홀연히 한 동자가 있어 모습이 맑고 깨끗하였는데 무릎을 꿇고 차와 염주를 받들고 전 서쪽의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은 이를 내궁의 사자로 알았고, 왕은 스님의 종자로 알았다. 서로 알아보니 모두 아니었다. 왕이 매우 괴이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쫓게 하였더니 동자가 내원의 탑 안으로 들어 가 숨었는데 차와 염주는 남쪽 벽 자씨상(미륵불상) 앞에 있었다. 월명의 지극한 덕과 지극한 정성이 지극한 성인을 감동시킬 수 있음이 이 같음을 알았다. 조정과 민간이 모두 알았다. 왕이 더욱 공경하여 다시 명주 100필을 주어 넓은 정성을 표시하였다.

 

明又嘗爲亡妹營齋 作鄕歌祭之 忽有驚颷吹紙錢 飛擧向西而沒 歌曰 生死路隱 此矣有阿米次肹伊遣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一等隱枝良出古 去奴隱處毛冬乎丁 阿也 彌陁刹良逢乎 吾道修良待是古如

明常居四天王寺 善吹笛 嘗月夜吹過門前大路 月馭爲之停輪 因名其路曰月明里 師亦以是著名 師卽能俊大師之門人也 羅人尙鄕歌者尙矣 盖詩頌之類歟? 故往往能感動天地鬼神者非一 讚曰 風送飛錢資逝妹 笛搖明月住姮娥 莫言兜率連天遠 萬德花迎一曲歌

월명이 또 일찍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재를 지내면서 향가를 지어 제사하였는데 홀연히 회오리바람이 일어 종이돈을 날려 서쪽을 향해 사라졌다. 노래는

생사의 길은, 여기 있으매 두려워하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갔습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 미타찰에서 만날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련다.

월명은 늘 사천왕사에서 살았는데 피리를 잘 불었다. 일찍이 달밤에 (피리를)불면서 문 앞 큰 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달의 마부()가 그를 위해 수레바퀴를 멈추었다.(가기를 멈추었다.) 그 때문에 그 길의 이름을 월명리라 했다. 스님이 또한 이 때문에 이름이 드러났다. 스님은 곧 능준대사의 문인이다. 신라 사람들이 향가를 숭상한 것은 오래되었다. 대개 시, 송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주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하나가 아니었다. 기려 말한다.

바람은 돈을 날려 죽은 누이의 노자로 삼게 하였고, 피리는 밝은 달을 흔들어 姮娥가 멈추었다. 도솔천이 하늘처럼 멀다고 하지 마라, 萬德花 한 곡조로 즐겨 맞았다

 

善律還生

望德寺僧善律 施錢欲成六百般若 功未周 忽被陰府所追 至冥司 問曰 汝在人間作何業? 律曰 貧道暮年欲成大品經 功未就而來 司曰 汝之壽籙雖盡 勝願未終 宜復人間 畢成寶典 乃放還 途中有一女子 哭泣拜前曰 我亦南閻州新羅人 坐父母陰取金剛寺水田一畝 被冥府追檢 久受重苦 今師若還古里 告我父母 速還厥田 妾之在世 胡麻油埋於床下 幷藏緻密布於寢褥間 願師取吾油點佛燈 貨其布爲經幅 則黃川亦恩 庶幾脫我若惱矣

망덕사 중 선율이 시주 돈으로 육백반야를 이루고자 했으나 공이 아직 끝나지 않은 채 갑자기 음부의 쫓음을 당하여 명사(저승)에 이르렀다. 명사가 물어 말하기를 너는 인간세상에 있을 때 어떤 업에 종사하였는가?”했다. 선율이 말하기를 빈도는 말년에 대품경을 이루고자하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왔습니다.”했다. 명사가 말하기를 너의 수명은 비록 다하였으나 뛰어난 원을 아직 마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인간으로 돌아 가 보전을 이루라.”하고는 곧 놓아 돌아가게 하였다. 도중에 한 여자가 있는데 앞에서 곡하여 울며 말하기를 내가 또한 남염주 신라 사람인데 부모가 몰래 금강사 수전() 일무를 취한 것에 연좌되어 명부에 잡혀 와 오래 동안 무거운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스님이 만약 옛 마을로 돌아가신다면 나의 부모에게 알려 속히 그 밭을 돌려주게 해 주십시오. 첩이(제가) 세상에 있을 때 호마유를 침상 아래 묻어두었고, 아울러 가는 베를 깔고 자는 요 사이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스님께서 가져다 내 기름으로 불등을 켜시고, 그 포는 경폭을 위한 밑천으로 삼으시면 곧 황천이 또한 은혜로워 거의 저의 고뇌를 벗어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했다.

 

律曰 汝家何在? 曰 沙梁部久遠寺西南里也 律聞之 方行乃蘇 時律死已十日 葬于南山東麓 在塚中呼三日 牧裡聞之 來告於本寺 寺僧歸發塚出之 具說前事 又訪女家 女死隔十五年 油布宛然 律依其諭作冥福 女來魂報云 賴師之恩 亡已離苦得脫矣 時人聞之 莫不驚感 助成寶典 其經秩今在東都僧司藏中 每年春秋 披轉禳災焉 讚曰 堪羨吾師仗勝緣 魂遊却卻返舊林泉 爺孃若問兒安否 爲我催還一畝田

선율이 말하기를 너의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했다. 여자가 말하기를 사량부 구원사 서남쪽 마을입니다.”했다. 선율이 그것을 듣고 바야흐로 가서 소생하였는데 그 때는 선율이 죽고 10일이 지나 남산 동쪽 기슭에 장례한 후였다. 무덤 안에서 3일을 부르짖으니 목동이 그것을 듣고 가서 본사에 알렸다. 절의 중이 가서 무덤을 파 꺼내주니 앞의 일을 모두 말하였다. 또 여자 집을 방문하니 여자가 죽은 지 15년이 지난 후였는데도 기름과 베가 그대로 있었다. 선율이 그 깨우침에 의하여 명복을 비니 여자의 혼이 와서 말하기를 스님의 은혜를 입어 이미 괴로움을 떠나 해탈을 얻었습니다.”했다. 그 때 사람이 그것을 듣고 놀라고 감동하지 않음이 없었다. 보전을 도와 이루었다. 그 경질()은 지금 동도 승사장 안에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펼쳐 재앙을 물리쳤다. 기려 말한다.

부럽도다. 스님은 좋은 인연에 따라, 영혼이 돌아와서 옛 고향으로 왔구나, 부모님이 저의 안부를 물으시거든, 나를 위해서 빨리 그 논을 돌려주라 하시오

 

金現感虎

新羅俗 每當仲春 初八至十五日 都人士女 競遶興輪寺之殿塔爲福會 元聖王代有郎君金現者 夜深獨遶不息 有一處女 念佛隨遶 相感而目送之 遶畢 引入屛處通焉 女將還 現從之 女辭拒而强隨之 行至西山之麓 入一茅店 有老嫗問女曰 附率者何人? 女陳其情 嫗曰 雖好事不如無也! 然遂事不可諫也 且藏於密 恐汝弟兄之惡也 把郎而匿之奧 小選有三虎咆哮而至 作人語曰 家有腥膻之氣 療飢何幸 嫗與女叱曰 爾鼻之爽乎! 何言之狂也?

김현감호

신라 풍속에 매 중춘(2)을 당하면 초 8일부터 15일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남자와 여자들은 다투어 흥륜사의 전탑을 도는 복회를 행하였다. 원성왕대에 낭군 김현이 있었는데 밤이 깊어도 홀로 돌며 그치지 않았다. 한 처녀가 있어 염불하고 따라 돌다 서로 느껴 눈길을 보냈다. 돌기를 마치자 이끌고 가려진 곳으로 들어 가 정을 통하였다. 여자가 장차 돌아가려하는데 김현이 그를 따라갔다. 여자가 거절하였으나 억지로 따라갔다. 가서 서산의 기슭에 이르러 한 띠 집에 들어가니 노파가 있어 여자에게 물어 말하기를 데리고 온 사람은 누구인가?”했다. 여자가 그 실정을 말하였다. 노파가 말하기를 비록 좋은 일이나 없는 것만 못하구나! 그러나 일이 이루어졌으니 간할 수 없다.(나무랄 수 없다.) 또한 은밀한 곳에 숨기라. 너의 형제가 나쁜 짓을 할까 두렵다.”했다. (여자가) 남자를 데리고 깊은 곳에 숨게 했다. 잠시 후 세 호랑이가 포효하며 이르러 사람의 소리를 내어 말하기를 집에 비린 기운이 있어 시장기를 면할 수 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했다. 노파와 여자가 질책하여 말하기를 너의 코가 좋기도 하구나! 어찌 미친 말을 하는가?”했다.

 

時有天唱 爾輩嗜害物命尤多 宜誅一以徵惡! 三獸聞之 皆有憂色 女謂曰 三兄若能遠避而自懲 我能代受其罰 皆喜俛首妥尾而遁去 女入謂郎曰 始吾恥君子之辱臨弊族 故辭禁爾 今旣無隱 敢布腹心 且賤妾之於郎君 雖曰非類 得陪一夕之歡 義重結褵之好 三兄之惡 天旣厭之 一家之殃 予欲當之 與其死於等閑人之手 曷若伏於郎君刃下 以報之德乎 妾以明日入市爲害劇 則國人無如我何 大王必募以重爵而捉我矣 君其無㤼 追我乎城北林中 吾將待之

그 때 하늘에서 부르는 소리가 있었는데 너희들은 남의 목숨을 즐겨 해치기를 더욱 많이 하니 마땅히 하나를 죽이는 것으로서 악을 징계할 것이다.”했다. 세 짐승이 그것을 듣고 모두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여자가 일러 말하기를 세 형이 만약 멀리 피하고, 스스로 징계한다면 내가 대신하여 그 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했다. 모두 기뻐하며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도망갔다. 여자가 들어 와 남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처음 나는 군자가 욕되이 우리 족속에게 임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사양하고 금하였을 뿐입니다. 지금 이미 숨김없이 감히 속마음을 펴겠습니다. 또 천첩은 낭군에 대해서 비록 같은 종류가 아니나 하룻저녁의 즐거움을 같이 할 수 있었으니 의가 중하여 향낭(혼인)의 좋음을 맺었습니다. 세 형의 악은 하늘이 이미 싫어하니 한 집안의 재앙을 내가 감당하려 합니다. 상관없는 사람에게 죽음을 주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날 아래 엎드리는 것으로서 덕을 갚는 것과 같겠습니까? 첩이 다음 날 시장에 들어가 해치기를 심하게 하면 곧 나라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반드시 높은 벼슬로서 (사람을)모집하여 나를 잡게 할 것입니다. 그대는 겁내지 마시고 성 북쪽 숲 속으로 나를 쫓아오시면 내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했다.

 

現曰 人交人 彝倫之道 異類而交 盖非常也 旣得從容 固多天幸 何可忍賣於伉儷之死 僥倖一世之爵祿乎! 女曰 郎君無有此言 今妾之壽夭 盖天命也 亦吾願也 郎君之慶也 予族之福也 國人之喜也 一死而五利備 其可違乎 但爲妾創寺 講眞詮 資勝報 則郎君之惠莫大焉 遂相泣而別

김현이 말하기를 사람이 사람을 사귀는 것은 떳떳한 인륜의 도이나, 다른 종류로 사귀는 것은 대개 떳떳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조용함을 얻었으니(이미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진실로 천행이 많은 것인데 어찌 차마 아내와 남편으로 이루어진 짝의 죽음을 팔아 요행히 한 세상의 작록을 바라겠습니까?”했다. 여자가 말하기를 낭군께서는 이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지금 첩이 일찍 죽는 것은 대개 하늘의 명입니다. 또 내가 원한 것이니 낭군의 경사요 우리 족속의 복이며,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한 번 죽어 다섯 가지 이익이 갖추어지는데 어길 수 있겠습니까? 다만 첩을 위해 절을 짓고 진전(진리)을 강론해 빼어난 과보에(빼어난 과보를 얻는데) 밑천을 삼을 수 있으면 곧 낭군의 은혜가 이보다 큼이 없을 것입니다. 마침내 서로 울면서 이별하였다.

 

次日果有猛虎入城中 剽甚無敢當 元聖王聞之 申令曰 戡虎者爵二級 現詣闕奏曰 小臣能之 乃先賜爵以激之 現持短兵 入林中 虎變爲娘子 熙怡而笑曰 昨夜共郎君繾綣之事 惟君無忽 今日被爪傷者 皆塗興輪寺醬 聆其寺之螺鉢聲則可治 乃取現所佩刀 自頸而仆 乃虎也 現出林而託曰 今玆虎易摶矣 匿其由不洩 但依諭而治之 其瘡皆效 今俗亦用其方 現旣登庸 創寺於西川邊 號虎願寺 常講梵網經 以導虎之冥遊 亦報其殺身成己之恩 現臨卒 深感前事之異 乃筆成傳 俗始聞知 因名論虎林 禾爾于今

다음 날 과연 사나운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와 위협하기를 심하게 하니 감당할 수 없었다. 원성왕이 그것을 듣고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호랑이를 죽이는 자는 2급의 벼슬을 내린다.”했다. 김현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어 말하기를 소신이 할 수 있습니다.”하니 먼저 벼슬을 내리는 것으로서 격려하였다. 김현이 짧은 무기를 지니고 숲 안으로 들어가니 호랑이가 변해 낭자가 되었다. 기뻐하여 웃으며 말하기를 지난 밤 낭군과 함께 헤어지기 아쉬워하던 일을 그대는 소홀함이 없게 하십시오. 오늘 발톱에 다친 자는 모두 흥륜사 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발소리를 듣게 하면 곧 다스릴 수 있습니다.”하고는 곧 김현이 차고 있던 칼을 취해 스스로 목을 찌르고 엎어지니 곧 호랑이였다. 김현이 숲을 나와 가탁하여 말하기를 지금 이 호랑이를 쉽게 잡았다.”하였으나 그 연유를 숨겨 누설하지 않았다. 다만 깨우침에 의하여 다스리게 하니 그 상처가 모두 나았다. 지금 풍속에 또한 그 처방을 썼다. 김현이 등용된 후 서천 가에 절을 창건하고 호원사라 이름하고, 항상 범망경을 강하는 것으로서 호랑이의 저승길을 인도하고, 또한 그 자신을 죽여 자기를 성공시킨 은혜를 갚았다. 김현이 죽음에 인하여 앞의 일의 기이함에 깊이 감동하였다. 이에 붓으로 전을 이루고 논호림이라 이름 하였는데 지금에도 그렇게 칭한다.

 

貞元九年 申屠澄自黃冠 調補漢州什邡縣之尉 至眞符縣之東十里許 遇風雪大寒 馬不能前 路傍有茅舍 中有煙火甚溫 照燈下就之 有老父嫗及處子 環火而坐 其女年方十四五 雖蓬髮垢衣 雪膚花臉 擧止姸媚 父嫗見澄來 遽起曰 客甚衝寒雪 請前就火 澄坐良久 天色已暝 風雪不止

정원 9년 신도징이 황관에서 한주 십방현위에 보임되어 진부현 동쪽 10리쯤에 이르러 눈보라와 큰 추위를 만나 말이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길옆에 띠 풀 집이 있고, 안에 불을 피워 매우 따뜻하였다. 등불을 비추며 나아가니 늙은 부모와 처자가 있어 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나이가 14, 5세 정도로 비록 헝클어진 머리와 때 묻은 옷을 입고 있으나 눈 같은 피부와 꽃 같은 얼굴에 행동이 이름다웠다. 부모가 신도징이 오는 것을 보고 대번에 일어나 말하기를 손님이 매우 심한 추위와 눈을 만났으니 불 앞으로 나오실 것을 청합니다.”했다. 신도징이 앉아 있기를 오래하여 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나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다.

 

澄曰 西去縣尙遠 請宿丁此 父嫗曰 苟不以蓬蓽爲陋 敢承命 澄遂解鞍施衾幃 其女見客方止 修容靘粧 自帷箔間出 有閑雅之態 猶過初時 澄曰 小娘子明惠過人甚 幸未婚 敢請自媒如何? 翁曰 不期貴客欲採拾 豈定分也 澄遂修子婿之禮 澄乃以所乘馬 載之而行 旣至官 俸祿甚薄 妻力以成家 無不歡心 後秩滿將歸 已生一男一女 亦甚明惠 澄尤加敬愛

신도징이 말하기를 서거현은 아직도 먼데 여기에서 잠잘 것을 청합니다.”했다. 그 부모가 말하기를 만일 쑥과 가시로 지붕을 이은 집을 누추하다 여기지 않으시면 감히 명을 받들겠습니다.(자고 가도 좋습니다.)”했다. 신도징이 마침내 말안장을 풀고 이불과 휘장을 쳤다. 그 여자는 손님이 바야흐로 머무려는 것을 보고 얼굴을 닦고 곱게 화장한 후 휘장 사이로 나왔는데 아름다운 모습이 오히려 처음보다 나았다. 신도징이 말하기를 낭자의 밝고 지혜로움은 다른 사람보다 매우 뛰어납니다. 다행히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면 감히 스스로 중매를 청하려는데 어떠합니까?”했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기약하지 않은 귀한 손님이 거두어 주신다면 어찌 연분을 정하지 않겠습니까?”했다. 신도징이 마침내 사위의 예를 닦았다. 위징은 바로 타고 있던 말에 그를 태우고 갔다. 관에 이른 후(임지에 이른 뒤) 봉록이 매우 적어 처의 힘으로 집을 이루니 마음에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 후에 관직의 기한을 채우고 장차 돌아가려 하는데 이미 11녀를 낳았다. 또한 매우 밝고 지혜로우니 신도징이 더욱 공경하고 사랑하였다.

 

嘗作贈內詩云 一宦慚梅福 三年愧孟光 此情何所喩 川上有鴛鴦 其妻終日吟諷 似黙有和者 未嘗出口 澄罷官 罄室歸本家 妻忽悵然謂澄曰 見贈一篇 尋卽有和 乃吟曰 琴瑟情雖重 山林志自深 常憂時節變 辜負百年心 遂與訪其家 不復有人矣 妻思慕之甚 盡日涕泣 忽壁角見一虎皮 妻大笑曰 不知此物尙在耶! 遂取披之 卽變爲虎 哮吼拏攫 突門而出 澄驚避之 攜二子 尋其路 望山林 大哭數日 竟不知所之

일찍이 아내에게 시를 지어 주었는데 한 번 벼슬하니 매복에 부끄럽고, 3년을 벼슬하니 맹광에게 부끄럽다. 이 정은 어디에 이르겠는가? 내 위에 원앙이 있다.”했다. 그 처가 종일토록 읇어 묵묵히 화답함이 있는 듯하였으나 아직 일찍이 입에서 내지는 않았다. 신도징이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가려할 때 처가 갑자기 슬퍼하며 신도징에게 일러 말하기를 주었던 한 편을 보면 화답함이 있습니다.”하고는 읇어 말하기를 금슬의 정이 비록 중하나 산림에 뚠 뜻이 스스로 깊다. 항상 시절의 변함을 근심하였다. 헛되이 백년의 마음 저버릴까 허물하도다.”했다. 마침내 함께 그 집(여자의 집)을 찾았으나 다시 사람이 있지 않았다. 처가 사모함이 깊어 날이 다하도록 눈물을 흘리다 문득 벽 모서리에서 하나의 호랑이 가죽을 보았다. 처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이 물건이 아직도 있음을 알지 못하였구나!”하고는 마침내 가져다 뒤집어쓰고는 곧 변하여 호랑이가 되었다. 으르렁거리고 할퀴다 문을 치고 나갔다. 신도징이 놀라 피했다가 두 아들을 데리고 산림을 바라보며 며칠을 크게 곡하였으나 끝내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 澄現二公之接異物也 變爲人妾則同矣 而贈背人詩 然後哮吼拏攫而走 與現之虎異矣 現之虎不得已而傷人 然善誘良方以救人 獸有爲仁如彼者 今有人而不如獸者 何哉? 詳觀事之終始 感人於旋遶佛寺中 天唱徵惡 以自代之 傳神方以救人 置精廬講佛戒 非徒獸之性仁者也 盖大聖應物之多方 感現公之能致精於旋遶 欲報冥益耳 宜其當時能受禧佑乎 讚曰 山家不耐三兄惡 蘭吐那堪一諾芳 義重數條輕萬死 許身林下落花忙

! 슬프다. 신도징과 김현 두 공이 이물(사람과 다른 물건)에 접했는데 변해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은 같으나 사람을 배반한 시를 준 후 으르렁거리며 할퀴고 달아났으니 김현의 호랑이와는 다르다. 김현의 호랑이는 부득이 사람을 해쳤다. 그러나 좋은 방책을 잘 권하는 것으로서(가르쳐주어) 사람을 구하였으니 짐승도 인을 행함이 그와 같음이 있었다. 지금에는 사람으로 짐승보다 못한 자가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일의 끝과 시작을 자세히 보면 절 안을 돌 때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에서 외쳐 징계하자 스스로 대신했으며, 신 같은 방책을 전하여 사람을 구하니 정려()를 두고 불계를 강론하게 하였다. (이것이)한갓 짐승의 성품이 어질기 때문이 아니다. 대개 대성(부처가)은 사물에 응하는 방면이 많아서 김현이 능히 탑을 돌기에 정성을 지극히 한 것에 감응하여 명익을 갚고자 했을 뿐이다. 그 때에 복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기려 말한다.

산가의 세 형의 악을 참지 못하여 고운 잎 한 번 응락 어찌하리오. 다섯 가지 의로우니 만 번 죽음은 가벼워라. 숲 속에서 맡기 몸 낙화마냥 져 갔구나.

 

融天師彗星歌 眞平王代

第五居烈郎第六實處郎(一作突處郎)第七寶同郎等三花之徒 欲遊楓岳 有彗星犯心大星 郎徒疑之 欲罷其行 時 天師作歌歌之 星怪卽滅 日本兵還國 反成福慶 大王歡喜 遣郎遊岳焉 歌曰 舊理東尸汀叱 乾達婆矣遊烏隱城叱肹良望良古 倭理叱軍置來叱多烽燒邪隱邊也藪耶 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 月置八切爾數於將來尸波衣 道尸掃尸星利望良古 彗星也白反也人是有叱多 後句 達阿羅浮去伊叱等邪 此也友物比所音叱彗叱只有叱故

융천사 혜성가 진평왕대

5 거열랑, 6 실처랑(돌처랑이라 쓰기도 한다.) 7 동보랑 등 세 화랑의 무리가 풍악에서 놀고자 하였는데 혜성이 심대성을 범하였다. 낭도들이 그것을 이심하여 그 가는 것을 그만두려 했다. 그 때 그 때 융천사가 노래를 지어 노래하였더니 별의 변괴가 곧 사라지고, 일본의 군대가 나라로 돌아가 도리어 복과 경사를 이루었다. 대왕이 기뻐하여 낭도들을 풍악에 보내 놀게 하였다. 노래는

옛날 동쪽 물가에서 건달바가 놀았던 성을 바라보고, 왜군이 왔다, 횃불을 사르라 변방의 무리여, 세 화랑이 산을 보려함을 듣고, 달도 밝게 불을 켜는 바에, 길을 밝히는 별에, 혜성에게 사뢴 사람 있다, 달아 떠 있어라, 이런데 무슨 혜성이 있겠느냐.

 

正秀師救氷女

第四十哀莊代 有沙門正秀 寓止皇龍寺 冬日雪深 旣暮 自三郎寺還 經由天嚴寺門外 有一乞女産兒 凍臥濱死 師見而憫之 就抱 良久氣蘇 乃脫衣以覆之 裸走本寺 苫草覆身過夜 夜半有天唱於王庭曰 皇龍寺沙門正秀 宜封王師 急使人檢之 具事升聞 王備威儀 迎入大內 冊爲國師

정수사구빙녀

40 애장왕대 사문() 정수가 있었는데 황룡사에 살고 있었다. 겨울에 눈이 깊이 쌓이고 저물었는데 삼랑사에서 돌아가면서 천엄사 문 밖을 지나고 있었다. 한 걸인 여자가 아이를 낳고 누워 얼어 죽게 되었다. 스님이 보고 불쌍하게 여겨 안기를 오래 하였더니 살아났다. 이에 옷을 벗어 덮어주고 맨몸으로 본사(황룡사)에 달려가 거적으로 몸을 덮고 밤을 지냈다. 한 밤중에 궁궐 뜰에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황룡사 중 정수를 마땅히 임금의 스승으로 봉하라.”했다. 급히 사람을 시켜 점검해 보게 하여 일이 모두 왕에게 알려졌다. 왕이 위의를 갖추어 대궐로 맞아들이고 책봉하여 국사로 삼았다.

 

避隱第八

朗智乘雲 普賢樹

歃良州阿曲縣之靈鷲山(歃良 今梁州 阿曲一作西 又云求佛又屈弗 今蔚州置屈弗驛 今存其名)有異僧 庵居累紀 而鄕邑皆不識 師亦不言氏名 常講法華 仍有通力 龍朔初 有沙彌智通 伊亮公之家奴也 出家年七歲時 有烏來鳴云 靈鷲去投朗智爲弟子 通聞之 尋訪此山 來憩於洞中樹下 忽見異人出 曰 我是普大士 欲授汝戒品 故來爾 因宣戒訖乃隱 通神心豁爾 智證頓圓

피은 제8

낭지승운 보현수

삽량주 아곡현 영취산(삽량 지금의 양주이다. 곡은 서라고도 쓴다. 도 구불, 굴불이라고도 한다. 지금 울주에 굴불역을 두었는데 지금도 그 이름이 있다.)에 이상한 중이 있었다. 암자에서 살기를 수십 년 하였으나 향읍이 모두 알지 못하였다. 스님이 또한 씨와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법화경을 강론하여 신통력이 있었다. 용삭 초에 중 지통이 있었는데 이량공 집 종이었다. 나이 7세 때 출가하였는데 그 때 까마귀가 와서 울며 말하기를 영취산에 가 낭지에게 들어 가 제자가 되라.”했다. 지통이 듣고 이 산을 찾아 방문하여 골짜기의 나무 아래에 와 쉬고 있었다. 문득 이상한 사람이 나와 말하기를 나는 보대사인데 너에게 계품을 주려하려 왔다.”하고는 계를 베풀기를 마치고 곧 숨었다. 지통은 정신과 마음이 두루 넓어지고 지증(진실한 지혜)이 문득 두루 통해졌다.

 

遂前行 路逢一僧 乃問 朗智師何所住? 僧曰 奚問朗智乎? 通具陳神烏之事 僧莞爾而笑曰 我是朗智 今玆堂前亦有烏來報 󰡔有聖兒投師將至矣 宜出迎󰡕 故來迎爾 乃執手而嘆曰 靈烏驚爾投吾 報予迎汝 是何祥也! 殆山靈之陰助也 傳云 山主乃辯才天女 通聞之泣謝 投禮於師 旣而將與授戒 通曰 予於洞口樹下 已蒙普賢大士乃授正戒 智嘆曰 善哉! 汝已親禀大士滿分之戒 我自生年來 夕惕慇懃 念遇至聖 而猶未能昭格 今汝已受 吾不及汝遠矣 反禮智通 因名其樹曰普賢

마침내 앞으로 가다 길에서 한 중을 만났다. 이에 묻기를 낭지 스님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는 지통이 신기한 까마귀의 일을 모두 말하였다.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바로 낭지이다. 지금 이 집 앞에 또한 까마귀가 와서 알리기를 성스러운 아이가 스님에게 들어오려 이르려 함이 있으니 마땅히 나가 맞으십시오.’했기 때문에 와서 맞이하는 것이다.”했다. 곧 손을 잡고 감탄해 말하기를 신령스러운 까마귀가 너를 놀라게 하여(깨우쳐) 나에게 들어가게 했고, 나에게 알려 너를 맞게 하였으니 정녕코 상서로운 일이다! 아마도 산령의 은밀한 도움인가 보다.”했다. 전에 이르기를 산의 주인은 곧 변재천녀이다.”했다. 지통이 그것을 듣고 울며 감사하고 스님에게 예를 들였다. 이윽고 장차 계를 주려하니 지통이 말하기를 내가 동구 나무 아래에서 이미 보현대사에게 정계를 받았습니다.”했다. 낭지가 감탄하고 말하기를 훌륭하구나! 네가 이미 대사의 만분지계를 직접 받았구나.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침저녁으로 조심하고 은근히 지성을 만나기를 생각하였지만 오히려 정성이 감동함에 이르지 못하였다. 지금 네가 이미 받았으니 내가 아득히 미치지 못하는구나.”하고는 도리어 지통에게 예를 하였다. 때문에 그 나무를 보현이라 이름 했다.

 

通曰 法師住此 其已久如? 曰 法興王丁未之歲 始寓足焉 不知今幾 通到山之時 乃文武王卽位元年辛酉歲也 計已一百三十五年矣 通後詣義湘之室 升堂覩奧 頗資玄化 寔爲錐洞記主也 元曉住磻高寺時 常往謁智 令著初章觀文及安身事心論 曉撰訖 使隱士文善奉書馳達 其篇尾述偈云 西谷沙彌稽首禮 東岳上德高巖前(磻高在靈鷲之西北故 西谷沙彌乃自謂也) 吹以細塵補鷲岳 飛以微滴投龍淵(云云) 山之東有大和江 乃爲中國大和池龍植福所創 故云龍淵 通與曉皆大聖也 二聖而摳衣師之 道邁可知

지통이 말하기를 법사께서 여기에 머문 것이 오래된 듯합니다.”하니 낭지가 말하기를 법흥왕 정미년에 처음 여기에서 발을 멈추었는데(살았는데) 지금 얼마인지는 알지 못한다.”했다. 지통이 산에 이르렀을 때는 곧 문무왕 즉위 1년 신유해였다. 계산하면 이미 135년이다. 지통이 후에 의상의 방에 나아가 집에 올라 오묘한 이치를 보아 자못 이치의 미묘한 교화에 이바지 하였으니 이가 추동기의 주인이다. 원효가 반고사에 있을 때 항상 낭지에게 가 뵈니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을 짓게 하였다. 원효가 짓기를 마치고 은사 문선으로 하여금 글을 받들고 달려가게 하면서 그 편의 끝에 게를 적었다.

서쪽 골짜기의 는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하고, 동악의 은덕(上德)은 높은 바위 앞에(반고사는 영축의 서북에 있는 까닭에 서쪽 골짜기의 사미는 스스로를 이른다.) 작은 티끌 불어 영취산에 보태고, 작은 물방울 날려서 용이 사는 연못에 던집니다(운운).

산의 동쪽에 대화강이 있으니 곧 중국 대화지의 용의 복을 심기 위해 창건하였다. 그러므로 용연이라 한다. 지통과 원효는 모두 큰 성인인데 두 성인이 공손하게 스승으로 섬겼으니 도가 높은지를 알 수 있다.

 

師嘗乘雲往中國淸凉山 隨衆聽講 俄頃卽還 彼中僧 謂是隣居者 然罔知攸止 一日令於衆曰 除常住外 別院來僧 各持所居名花異植 來獻道場 智明日折山中異木一枝歸呈之 彼僧見之 乃曰 此木梵號怛提伽 此云赫 唯西竺海東二靈鷲山有之 彼二山皆第十法雲地菩薩所居 斯必聖者也 遂察其行色 乃知住海東靈鷲也 因此改觀

스님이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산에 가 무리를 따라 강론을 듣고 잠시 후 돌아왔다. 그 안의 중들은 이가 이웃에 사는 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머무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하루는 무리들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항상 거주하는 자를 제외하고 다른 원에서 온 중들은 각각 살고 있는 곳의 꽃과 이상한 식물을 가지고 와 도량에 바치라.”고 했다. 낭지가 다음 날 산 중에서 이상한 나무 한 가지를 꺽어 가서 올렸다. 그 중이 그것을 보고 이에 말하기를 이 나무는 범어로 달제가라 부르는데 여기서는 혁이라 한다. 오직 서천축과 해동의 두 영취산에만 있다. 그 두 산은 모두 제 10법운지보살이 사는 곳이니 이는 반드시 성스러운 자일 것이다.”했다. 마침내 그 행색을 살펴보아 해동 영취산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다시 보게 되었다.

 

名著中外 鄕人乃號其庵曰赫木 今赫木寺之北崗有古基 乃其遺趾 靈鷲寺記云 朗智嘗云 󰡔此庵趾乃迦葉佛時寺基也󰡕 堀地得燈缸二隔 元聖王代 有大德緣會來居山中 撰師之傳行于世 按華嚴經第十名法雲地 今師之馭雲 蓋佛陁屈三指元曉分百身之類也歟 讚曰 想料嵓藏百歲間 高名曾未落人寰 不禁山鳥閑饒舌 雲馭無端洩往還

이름이 중외에 드러나자 향인들이 이에 그 암자를 불러 혁목이라 하였다. 지금 혁목사의 북쪽 언덕에 옛 터가 있으니 곧 그 남은 터이다. 영취사 기에 낭지가 일찍이 이르기를 이 암자 터는 곧 가섭불 시대 절터이다. 땅을 파다 등 2개를 얻었다. 원성왕대 대덕 연회가 와서 산중에 살았는데 스님의 전기를 지어 세상에 전했다.’”한다. 화엄경을 살펴보니 제 10은 법운지라 이름하니 지금 스님이 구름을 탄 것은 대개 부처가 삼지를 굽히고, 원효가 100개의 몸으로 나눈 것과 같은 류이다. 기려 말한다.

생각하니 산에 숨은 지 100년간에 높은 이름은 일찍이 사람 세상에 떨어지지 않았다. 산 새 한가로운 지저귐 금하지 못하여 구름타고 가고 돌아오는 것이 속절없이 알려졌다.

 

緣會逃名 文殊岾

高僧緣會 嘗隱居靈鷲 每讀蓮經 修普賢觀行 庭池常有蓮數朵 四時不萎(今靈鷲寺龍藏殿是緣會舊居) 國主元聖王聞其瑞異 欲徵拜爲國師 師聞之 乃棄庵而遁 行跨西嶺嵓間 有一老叟今爾耕 問師奚適 曰 吾聞邦家濫聽 縻我以爵 故避之爾 叟聽曰 於此可賈 何勞遠售? 師之謂賣名無厭乎! 會謂其慢己 不聽遂行數里許 溪邊遇一媼 問師何往 答如初 媼曰 前遇人乎? 曰 有一老叟侮予之甚 慍且來矣 媼曰 文殊大聖也 夫言之不聽何?

연회도명 문수점

고승 연회는 일찍이 영취산에 숨어살면서 매번 연경(불경)을 읽고 보현보살의 관행을 닦았다. 뜰 연못에는 항상 연꽃 몇 송이가 있어 사시로 시들지 않았다.(지금 영취사 용장전이 연회가 옛날에 살았던 곳이다.) 임금 원성왕이 그 상서롭고 기이함을 듣고 불러 벼슬을 주어 국사로 삼으려 했다. 스님이 그것을 듣고 곧 암자를 버리고 숨었다. 서쪽 고개 바위사이를 지나가고 있는데 한 늙은이가 있어 밭을 갈다가 스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넘었다. (스님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나라에서 잘못 듣고 나를 벼슬로 얽어매려 하기 때문에 피하고 있습니다.”했다. 늙은이가 듣고 말하기를 여기서 팔 것이지 어찌하여 멀리서 팔려 수고 합니까? 스님은 이름 팔기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이를 수 있겠군요!”했다. 연회가 자기를 업신여긴다 여겨 듣지 않고, 마침내 몇 리를 더 갔다. 시냇가에서 한 노파를 만났는데 묻기를 스님은 어디로 가느냐하니 앞과 같이 답하였다. 노파가 말하기를 앞서 사람을 만났는가?”하니 (연회가) 말하기를 한 노인이 나를 업심여기기를 심하게 하였기 때문에 성내고 왔습니다.”했다. 노파가 말하기를 문수대성인데 말한 것을 듣지 않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했다.

 

會聞卽驚悚 遽還翁所 扣顙陳悔曰 聖者之言 敢不聞命乎! 今且還矣 溪邊媼彼何人斯? 叟曰 辯才天女也 言訖遂隱 乃還庵中 俄有天使齎詔徵之 會知業已當受 乃應詔赴闕 封爲國師(僧傳云 憲安王封爲二朝王師 號照 咸通四年卒 與元聖年代相左 未知孰是) 師之感老叟處 因名文殊岾 見女處曰阿尼岾 讚曰 倚市難藏久陸沉 囊錐旣露括難禁 自緣庭下靑蓮誤 不是雲山固未深

연회가 곧 놀라고 두려워하여 대번에 노인이 있던 곳으로 돌아 가 이마를 두드리며 뉘우쳐 말하기를 감히 명을 듣지 않겠습니까. 지금 또한 돌아왔습니다. 시냇가 노파는 어쩐 사람입니까?”했다. 노인이 말하기를 변재천녀이다.”하는 말을 마치고 마침내 숨었다. 이에 (연회가) 암자도 돌아오니 문득 천사가 조서를 가지고 불렀다. 연회가 업을 이미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임을 알고 조서에 응하여 대궐로 갔다. (연회를)봉하여 국사로 삼았다.(승전에 헌안왕이 봉하여 2(2대 조정)의 왕사로 삼았는데 호를 조라 불렀다. 함통 4년에 죽으니 원성왕대와는 서로 어긋난다.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스님이 노인에게 감응한 곳을 문수점이라 하고, 여자를 본 곳을 아니점이라 했다. 기려 말 한다.

저자에 기대 오래 숨어있기 어렵고, 주머니의 송곳은 감추기 어렵다. 뜰아래 청련으로 세상에 나갔지. 운산이 진실로 깊지 않기 때문은 아니라네.

 

惠現求靜

釋惠現 百濟人 小出家苦心專志 誦蓮經爲業 祇禳請福 靈應良稠 兼攻三論 染指通神 初住北部修德寺 有衆則講 無則持誦 四遠欽風 戶外之履滿矣 稍厭煩擁 遂往江南達拏山居焉 山極嵓險 來往艱稀 現靜坐求忘 終于山中

혜현구정

석혜현은 백제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애써 뜻을 모아 연경(법화경)을 외우는 것을 업으로 삼았으며 기도하여 복을 청하면 영험한 감응이 진실로 많았다. 겸하여 삼론을 전공하여 수도를 시작하니 신명에 통하였다. 처음 북부 수덕사에서 살았는데 무리들이 있으면 강론하고, (무리가) 없으면 곧 지니고 외웠으므로 사방의 먼 곳에서도 교화를 흠모하여 문 밖에는 신발이 가득하였다. 점차 번거로움이 싫어 마침내 강남 달노산에 가 살았다. 산이 지극히 험준하여 오고감이 힘들어 찾아보기 어려웠다. 혜현이 고요히 앉아 잊음을 구하다 산중에서 마쳤다.

 

同學轝尸置石室中 虎啖盡遺骸 唯髏舌存焉 三周寒暑 舌猶紅軟 過後方變 紫硬如石 道俗敬之 藏于石塔 俗齡五十八 卽貞觀之初 現不西學 靜退以終 而乃名流諸夏 立傳在唐 聲著矣夫 又高麗釋波若 入中國天台山 受智者敎觀 以神異間山中而滅 唐僧傳亦有章 頗多靈範 讚曰 鹿尾傳經倦一場 去年淸誦倚雲藏 風前靑史名流遠 火後紅蓮舌帶芳

동학이 시신을 가마(상여)에 실어 석실 안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유해를 모두 먹고 해골과 혀만 남겼다. 추위와 더위가 세 번 지나갔는데도 혀는 오히려 붉고 부드러웠다. 그 후 바야흐로 변하여 자주색이 되고 단단해져 돌과 같았다. 중과 속인들이 그것을 공경하여 석탑 안에 감추었다. 세속의 나이는 58세였으니 곧 정관 초이다. 혜현은 서학(중국에 유학)하지 않았고, 고요히 물러나 마쳐(죽어) 이름이 중국에 알려졌고,(중국에 알려 졌고) 당나라에서 전을 세워(전기가 쓰여져) 명성이 드러났다. 또 고려 석파약은 중국 천태산에 들어 가 지자 교관을 받아 신이로 알려졌다가 산중에 죽었다. 당승전에 또 장이 있는데 자못 영험한 교훈이 많았다. 기려 말한다.

불자들과 강경함도 권태로워, 지난해 독경소리 구름 속에 숨겼다, 명성은 역사에 오래도록 전하고, 불 속 연꽃인양 향기로운 혀라네

 

信忠掛冠

孝成王潛邸時 與賢士信忠 圍碁於宮庭栢樹下 嘗謂曰 他日若忘鄕 有如栢樹 信忠興拜 隔數月 王卽位賞功臣 忘忠而不第之 忠怨而作歌 帖於栢樹 樹忽黃悴 王怪使審之 得歌獻之 大驚曰 萬機鞅掌 幾忘乎角弓! 乃召之賜爵祿 栢樹乃蘇 歌曰 物叱好支栢史 秋察尸不冬爾屋支墮米 汝於多支行齊敎因隱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月羅理影支古理因淵之叱 行尸浪 阿叱沙矣以支如支 兒史沙叱望阿乃 世理都 之叱逸烏隱第也 後句亡 由是 寵現於兩朝

신충계관

효성왕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 어진 선비 신충과 궁궐 뜰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면서 일찍이 일러 말하기를 다른 날에 만약 경을 잊는다면 잣나무와 같음이 있을 것이다.”했다. 신충이 일어나 절하였다. 몇 달이 지나 왕이 즉위하여 공산에게 상을 주는데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않았다. 신충이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문득 누렇고 초췌해졌다.(누렇게 말랐다.) 왕이 괴상하게 여겨 조사하게 하였더니 노래를 얻어 바쳤다. 크게 놀라 말하기를 천하의 정치가 매우 바쁘고 번거로워 거의 각궁을 잊을 뻔하였구나!”하고는 이에 불러 벼슬과 록을 내렸더니 잣나무가 소생하였다. 노래에 질 좋은 잣나무가, 가을이 채 안 되어 떨어지니, 너를 어찌 잊으랴 하신, 우러러 보던 그 얼굴이 바뀌게 되었네. 달이 그림자 진 연못의 물결인냥, 모습이야 바라보나, 세상 모두 잃은 처지여라.”했다. 뒷 구절은 없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총애가 두 조정에 드러났다.

 

景德王(王卽孝成之弟也)二十二年癸卯 忠與二友相約 掛冠入南岳 再徵不就 落髮爲沙門 爲王創斷俗寺居焉 願終身丘壑 以奉福大王 王許之 留眞在金堂後壁是也 南有村名俗休 今訛云小花里(按三和尙傳 有信忠奉聖寺 與此相混 然計其神文之世 距景德已百餘年 况神文與信忠乃宿世之事 則非此信忠 明矣 宜詳之)

경덕왕(왕은 곧 효성왕의 동생이다.) 22년 계묘에 신충과 두 벗이 서로 약속하여 관을 걸고(벼슬을 버리고) 남악에 들어갔다. (왕이) 두 번 불러도 나오지 않고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 왕을 위해 단속사를 창건하고 살면서 언덕과 구렁에서 몸을 마칠 때까지 대왕의 복을 받들기를 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임금의 진영을 두었는데 금당 뒤 벽에 있는 것이 이것이다. 남쪽에 속휴라는 이름의 촌이 있는데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랄 한다.(삼화상전을 살펴보니 신충봉성사가 있는데 이것과 서로 섞여있다.(혼동되었다.) 그러나 그 신문왕 대를 헤아리면 경덕왕과는 10여년이 떨어져 있는데 하물며 신문왕과 신충은 곧 이전 세대의 일이니 곧 여기의 신충이 아님이 분명하다. 마땅히 살펴야 할 것이다.)

 

又別記云 景德王代 有直長李俊(高僧傳作李純) 早會發願 年至知命 須出家創佛寺 天寶七年戊子 年登五十矣 改創槽淵小寺爲大刹 名斷俗寺 身亦削髮 法名孔宏長老 住寺二十年乃卒 與前三國史所載不同 兩存之闕疑 讚曰 功名未已鬢先霜 君寵雖多百歲忙 隔岸有山頻入夢 逝將香火祝吾皇

또 별기에 말하기를 경덕왕대에 직장 이준(고승전에는 이순이라고 썼다.)이 있었는데 일찍 발원하기를 나이가 지명(50)에 이르면 반드시 출가하여 절을 창건할 것이다.’했다. 천보 7년 무자에 나이가 50에 오르자 조연소사를 고쳐 지어 큰 절로 만들고 이름을 단속사라 하고, 자신도 또한 머리를 깍고 법명을 공굉장노라 했다. 절에 산지 20년 만에 죽었다.”하니 앞의 삼국사에 실린 것과는 같지 않다. 두 가지를 모두 남겨 의심나는 것을 덜었다. 기려 말한다.

공명을 못 다한 채 귀밑털이 먼저 하얗게 되니, 임금의 은총은 비록 많아도 백년이 급하다. 건너편 언덕에 산이 있어 번번이 꿈에 보이니, 죽어서도 향을 피워 내 임금의 복을 빌리라.

 

包山二聖

羅時有觀機道成二聖師 不知何許人 同隱包山(鄕云所瑟山 乃梵音 此云包也) 機庵南嶺 成處北穴 相去十許里 披雲嘯月 每相過從 成欲致機 則山中樹皆向南而俯 如相迎者 機見之而往 機欲邀成也 則亦如之皆北偃 成乃至 如是有年 成於所居之後高嵓之上 常宴坐

포산이성

신라 때 관기와 도성 두 성스러운 스님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함께 포산(마을에서는 소슬산이라 하니 곧 인도 음으로 이는 포를 말한다.)에 숨어 살았다.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살았고, 도성은 북쪽 굴에서 살았다. 서로 10리 쯤 떨어져 있었으나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매번 서로 왕래하였다. 도성이 관기를 이르게 하고자 하면 곧 산 중의 나무가 모두 남쪽을 향해 굽혀 서로 맞이하는 듯하였다. 관기가 그것을 보고 갔다.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고자 하면 곧 또한 모두 북쪽으로 누우면 도성이 곧 이르렀다. 이 같이 하기를 여러 해였다. 도성은 사는 곳 뒤 높은 바위의 위에서 항상 연좌(좌선)하였다.

 

一日自嵓縫間透身而出 全身騰空而逝 莫知所至 或云 至壽昌郡(今壽城郡)指骸焉 機亦繼踵歸眞 今以二師名命其墟 皆有遺趾 道成嵓高數丈 後人置寺穴下 大平興國七年壬午 有釋成梵 始來住寺 敞萬日彌陀道場 精懃五十餘年 屢有殊祥 時 玄風信士二十餘人歲結社 拾香木納寺 每入山採香 劈析淘洗 攤置箔上 其木至夜放光如燭 由是郡人項施其香徒 以得光之歲爲賀 乃二聖之靈感 或岳神攸助也 神名靜聖天王 嘗於迦葉佛時受佛囑 有本誓 待山中一千人出世 轉受餘報 今山中嘗記九聖遺事 則未詳 曰觀機道成㮽師𣛻師道義(有栢岩基)子陽成梵今勿女白牛師 讚曰

하루는 바위의 합쳐진 사이로부터 몸을 뚫고 나와 온몸으로 공중에 올라갔는데 이른 바를 알지 못한다. 혹은 수창군(지금의 수성군)에 이르러 죽었다고 말한다. 관기가 또한 따라 귀진(세상을 떠났다.) 지금 두 스님의 이름으로서 그 옛터의 이름을 붙였다. 모두 터가 남아있다. 도성암은 높이가 몇 길인데 후세 사람이 구멍() 아래 절을 두었다. 태평흥국 7년 임오에 석성범이 처음 절에 와 살면서 만일 미타도량을 열어 정성껏 50여년을 부지런히 전념하였는데 여러 번 특수한 상서로움이 있었다. 그 때 현풍의 신자 20여명이 결사하여 향목을 거두어 절에 들였다. 매번 산에 들어 가 향을 채취할 때는 쪼개고 씻어서 발 위에 놓아두면 그 나무가 밤에 빛을 내어 촛불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군의 사람들이 그 향도들에게 크게 시주하는 것으로서 빛을 얻은 해를 축하하였다. 곧 두 성사의 영감이거나 혹은 신 도운 바라 했다. 신의 이름은 정성천왕으로 일찍이 가섭불 시대에 부처의 부촉(부탁)을 받고 본서(중생을 구제하려는 염원이 있어)가 있어 산 중에서 1천 명이 세상을 나오는 것을 기다려 남은 보를 받겠습니다.”했다. 지금 산중에 일찍이 9성의 남을 일을 기록하였는데 자세하지는 않지만 관기, 도성, 반사, 첩사, 도의(백암사 터가 있다.), 자양, 성범, 금물녀, 백우스님이다. 기려 말한다.

 

相過踏月弄雲泉 二老風流幾百年 滿壑烟霞餘古木 偃昂寒影尙如迎 㮽音般 鄕云雨木 𣛻音牒 鄕云加乙木 此二師久隱嵓叢 下交人世 皆編木葉爲衣 以度寒暑 掩濕遮羞而已 因以爲號 嘗聞 楓岳亦有斯名 乃知古之隱淪之士 例多逸韻如此 但難爲蹈襲 予嘗寓包山 有記二師之遺美 今幷錄之 紫茅黃精𡎺肚皮 蔽衣木葉非蠶機 寒松颼颼石犖确 日暮林下樵蘇歸 夜深披向月明坐 一半颯颯隨風飛 敗蒲橫臥於憨眼 夢魂不到紅塵覊 雲遊逝兮二庵墟 山鹿恣登人跡稀

서로 지나다 달빛을 밟고 운천(雲泉)에서 놀다가, 두 노인이의 풍류는 몇 백 년이던가. 골짜기 안개가 가득하고 노을에 고목만 남았는데, 굽혔다 폈다 쓸쓸한 그림자가 여전히 맞이하는 듯하다.” ()의 음은 반()으로 마을에서는 우목이라 한다. (𣛻)의 음은 첩()인데 마을에서는 가을목이라 한다. 이 두 스님이 오래 동안 바위가 모여 있는 곳에 숨어 인간 세상과는 교류하지 않았다. 모두 나뭇잎을 엮어 옷으로 삼아 추위와 더위를 넘어서고 축축함을 가리고 부끄러움을 막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불리게 되었다. 일찍이 풍악에 또한 이 이름이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곧 옛날 은거한 선비로 알았다. 이 같은 고상한 정취의 예가 많으나 다만 답습하기 어려울 뿐이다. 내가 일찍이 포산에서 살 때 두 스님의 남은 아름다움을 기록한 것이 있어 지금 아울러 기록해 둔다. 자줏빛 띠 풀과 죽대 뿌리로 배를 채우고, 덮는 옷 나뭇잎으로 하여 누에치는 베틀은 없네. 쓸쓸한 솔바람 부는 돌산에서, 날 저문 숲 아래서 나무하고 돌아오네. 밤이 깊어 달을 향하여 밝은데 앉으니, 쌀쌀하여 바람 따라 반쯤은 날듯하네. 헌 포단에 뒤섞여 누워 천진하게 잠드니, 꿈속의 넋이 속세의 굴레에 도달하지 않는다. 구름처럼 놀다 간 두 암자 터는, 산 사슴만 제멋대로 오르고 사람의 발자취 드물구나.

 

永才遇賊

釋永才性滑稽 不累於物 善鄕歌 暮歲將隱于南岳 至大峴嶺 遇賊六十餘人 將加害 才臨刃無懼色 怡然當之 賊怪而問其名 曰永才 賊素聞其名 乃命□□□作歌 其辭曰 自矣心米 皃史毛達只將來呑隱日遠鳥逸□□過出知遣 今呑藪未 去遣省如 但非乎隱焉破主次弗史內於都還於尸朗也 此兵物叱沙過乎好尸曰沙也內乎呑尼 阿耶 唯只伊吾音之叱恨隱㵛陵隱安支尙宅都乎隱以多

영재 우적

석 영재는 성품이 익살스러워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고, 향가를 잘하였다. 만년에 남악에 은거하려 하여 큰 고개에 이르러 도적 60여 명을 만났다. 장차 해치려하는데 영재가 칼날에 임하여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즐거워하고 당당하였다. 도적이 괴이하게 여겨 그 이름을 물으니 영재라고 했다. 도적이 평소 그 이름을 들었으므로 곧 노래를 짓게 하였다. 그 가사는 제 마음의 모습 모르던 날에, 멀리 새 달아나듯 지나서 알고, 이제는 숲에 가고 있노라. 다만 잘못된 것은 때리는 님에, 저 세상에 다시 돌아갈 사내들, 이 칼 따위 허물될 날 세우니, 아아 오직 내 몸의 한은 선업은 아니, 바라는 집으로 모아짐입니다.”했다.

 

賊感其意 贈之綾二端 才笑而前謝曰 知財賄之爲地獄根本 將避於窮山 以餞一生 何敢受焉 乃投之地 賊又感其言 皆釋釰投戈 落髮爲徒 同隱智異 不復蹈世 才年僅九十矣 在元聖大王之世 讚曰 策杖歸山意轉深 綺紈珠玉豈治心 綠林君子休相贈 地獄無根只寸金

도적이 그 뜻에 감동하여 비단 2단을 주었다. 영재가 웃으며 앞서 사양하고 말하기를 재물이 지옥의 근본이 됨을 알아 장차 궁벽한 산으로 피하여 일생을 보내려는데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곧 땅에 던졌다. 도적이 또한 그 말에 감동하여 모두 칼을 풀고 창을 던 진 후 머리를 깍고 무리가 되어 함께 지리산에 숨어 다시는 세속을 밟지 않았다. 영재의 나이 90에 가가운 원성대왕의 시대였다. 기려 말한다. “지팡이 짚고 산으로 돌아가니 그 뜻이 한층 깊고, 고운 비단과 주옥이 어찌 마음을 다스리랴. 녹림의 군자는 그런 선물 하지 마오, 지옥은 뿌리 없이 다만 한 조각 금일뿐이니.”했다.

 

勿稽子

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 保羅國(今固城)史勿國(今泗州)等八國 倂力來侵邊境 王命太子㮈音將軍一伐等 率兵拒之 八國皆降 時 勿稽子軍功第一 然爲太子所嫌 不賞其功 或謂勿稽子 此戰之功 唯子而已 而賞不及子 太子之嫌君其怨乎? 稽曰 國君在上 何怨人臣? 或曰 然則 奏聞于王幸矣

물계자

10 나해왕 즉위 17년 임진 보라국(지금의 고성), 사물국(지금의 사주) 8개 나라가 힘을 합쳐 와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태자 내음, 장군 일벌 등으로 하여금 군대를 통솔하여 막게 하였는데 8개 나라가 모두 항복하였다. 그 때 물계자의 군공이 제일이었다. 그러나 태자가 싫어하여 그 공을 상주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이르기를 이 전쟁의 공은 오직 그대일 뿐인데 상이 그대에게 이르지 않았으니 태자가 그대를 싫어하는 것을 원망하는가?”하니 물계자가 말하기를 나라의 임금은 윗자리에 있는데 신하(신하인 태자)를 원망하겠습니까?”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곧 왕에게 아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했다.

 

稽曰 伐功爭命 揚己掩人 志士之所不爲也 勵之待時而已 十年乙未 骨浦國(今合浦也)等三國王 各率兵來攻竭火(疑屈弗也 今蔚州) 王親率禦之 三國皆敗 稽所獲數十級 而人不言稽之功 稽謂其妻曰 吾聞仕君之道 見危致命 臨難忘身 仗於節義 不顧死生之謂忠也

물계자가 말하기를 공을 자랑하고 명(이름을) 다투고 자기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가리는 것은 지사가 하지 않는 바입니다. 힘쓰며 때를 기다릴 뿐입니다.”했다. 10년 을미에 골포국(지근의 합포이다.) 등 세 나라 왕이 각각 군대를 통솔하고 와서 갈화(아마도 굴불일 것이다. 지금의 울주)를 치니 왕이 직접 (군대)를 통솔하고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무너졌다. 물계자가 사로잡은 수가 수 십 명이었으나 사람들이 물계자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물계자가 그 처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는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대하면 자신을 잊는다. 절개와 의리에 기대 죽고 사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충입니다. 대저 보라(아마도 발라인 듯하다. 지금의 나주이다.), 갈화의 싸움은 진실로 나라의 어려움이고, 임금의 위태로움인데 내가 일찍이 자신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용기가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바로 불충이 심한 것입니다. 이미 불충하고도 임금을 섬겨 누가 선인(아버지)에게 미쳤으니 효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충효를 잃고 무슨 낯으로 다시 조정과 시장의 안에서 노릴 수 있겠습니까? 이에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메고, 사체산(알 수 없다.)에 들어갔다. 대나무의 곧은 성벽(성품)을 슬퍼하며, 그것에 빗대어 노래를 짓기도 하고, 그것을 비유하여 노래를 짓기도 하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빗겨 거문고를 타며 곡조를 붙이기도 하였다. 숨어 살며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迎如師

實際寺釋迎如 未詳族氏 德行雙高 景德王將邀致供養 遣使徵之 如詣內 齋罷將還 王遣使陪送至寺 入門卽隱 不知所在 使來奏 王異之 追封國師 後亦不復現世 至今稱曰國師房

영여사

실제사 석영여는 씨족을 알지 못한다. 덕행의 높음이 짝이 없었다. 경덕왕이 맞이하여 지극히 공양하려하여 사자를 보내 부르니 영여가 대궐 안에 들어 가 재를 마치고 돌아왔다. 왕이 사자를 보내 호송하게 하여 절에 이르게 하였다. 문에 들어가자 곧 숨어 있는 바를 알지 못하였다. 사자가 와서 아뢰니 왕이 기이하게 여겨 국사를 추봉하였다, 후에 또한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에는 국사방이라 말한다.

 

布川山 五比丘 景德王代

歃良州東北二十許里 有布川山 石窟奇秀 宛如人斲 有五比丘 未詳名氏 來寓而念彌陀 求西方幾十年 忽有聖衆 自西來迎 於是 五比丘各坐蓮臺 乘空而逝 至通度寺門外留連而天樂間奏 寺僧出觀 五比丘爲說無常苦空之理 蛻棄遺骸 放大光明 向西而去 其捐舍處 寺僧起亭榭 名置樓 至今存焉

포천산 다섯 비구 경덕왕대

삽량주 동북쪽 20리쯤에 포천산이 있는데 석굴이 기이하고 빼어나 완연히 사람이 깍은 듯하였다. 다섯 비구가 있어 이름과 성씨를 알지 못하는데 와서 살면서 미타를 염불하여 서방(정토)을 구하기기를 10여년 하였다. 홀연히 성중이 있어 서쪽으로부터 와서 맞이하였다. 이에 다섯 비구가 각각 연대에 앉아 공중을 타고(날아) 가다 통도사 문밖에 이르러 묵었는데 천악이 연주하는 사이에 절의 중이 나와 보니 다섯 비구가 무상고공의 이치를 말하고 유해를 벗어버리고 대광명을 뿜으며 서쪽을 향해 갔다. 그 유해를 버린 곳에 절의 중이 정자를 일으키고(짓고) 이름을 치루라 하였는데 지금에도 여기에 있다.

 

念佛師

南山東麓有避里村 村有寺 因名避里寺 寺有異僧 不言名氏 常念彌陀 聲聞于城中 三百六十坊十七萬戶 無不聞聲 聲無高下 琅琅一樣 以此異之 莫不致敬 皆以念佛師爲名 死後泥塑眞儀 安于敏藏寺中 其本住避里寺 改名念佛寺 寺旁亦有寺 名讓避 因村得名

염불사

남산 동쪽 기슭에 피리촌이 있고, 촌에 절이 있기 때문에 피리사라 하였다. 절에 기이한 중이 있는데 이름과 성씨를 말하지 않고, 항상 미타를 염불하였다. 염불소리가 성 안에 들려 36017만호가 염불소리를 듣지 않은 이가 없었다. 염불하는 소리가 높고 낮음이 없어 낭랑한 한 가지 모양이었다. 이 때문에 기이하게 여겨 지극히 공경하지 않음이 없어 모두 염불사로 불렀다. 죽은 후 진흙으로 참된 모습을 만들어 민장사 안에 안치하고, 그가 본래 살았던 피리사는 이름을 고쳐 염불사라 했다. 절 옆에 또한 절이 있는데 양피라 이름하니 촌으로 인하여 얻은 이름이다.

 

孝善第九

眞定師孝善雙美

法師眞定 羅人也 白衣時 隸名卒伍 而家貧不娶 部役之餘 傭作受粟 以養孀母 家中計産 唯折脚一鐺而已 一日有僧到門 求化營寺鐵物 母以鐺施之 旣而定從外歸 母故之告 且虞子意何如爾 定喜現於色曰 施於佛事 何幸如之 雖無鐺又何患 乃以瓦盆爲釜 熟食而養之

효선 제9

진정사 효선쌍미

법사 진정은 신라 사람이다. 흰옷일 때(출가하지 않은 때) 이름이 군대에 예속되어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장가들지 못하고 부역하고 남은 시간에 공용살이로 곡식을 받아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집 안의 재산을 헤아려보면 오직 다리가 부러진 하나의 솥뿐이었다. 하루는 어떤 중이 문에 이르러 절을 경영할(리할) 철물을 동냥하니 어머니가 솥을 시주하였다. 이윽고 진정이 밖에서 돌아오니 어머니가 일을 알리고 아들의 뜻이 어떠할지를 근심하였다. 진정이 기쁨을 얼굴색에 드러내며 말하기를 불사에 시주하였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비록 솥이 없을지라도 또한 무엇을 근심하겠습니까?”하고는 곧 질 동이로서 솥을 삼아 음식을 익혀 봉양하였다.

 

嘗在行伍間 聞人說義湘法師在太伯山說法利人 卽有嚮慕之志 告於母曰 畢孝之後 當投於湘法師 落髮學道矣 母曰 佛法難遇 人生大速 乃曰畢孝 不亦晩乎? 曷若趂予不死 以聞道聞 愼勿因循 速斯可矣 定曰 萱堂晩景 唯我在側 弃而出家 豈敢忍乎? 母曰 噫! 爲我防出家 令我便墮泥黎也 雖生養以三牢七鼎 豈可爲孝? 予其衣食於人之門 亦可守其天年 必欲孝我 莫作爾言 定沈思久之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사람들이 의상법사가 태백산에서 설법으로 사람을 이롭게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곧 사모하는 뜻이 있어 어머니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효도를 마친 후에는 마땅히 의상법사에게 들어 가 머리를 깍고 도를 배울 것입니다.”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불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매우 빠른데 효도를 마친 후라고 말하면 또한 늦지 않겠는가? 어찌 네가 내가 죽지 않고 도를 들었다는 것을 듣는 것만 하겠는가. 삼가 낡은 인습을 따르지 말고 속히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했다. 진정이 말하기를 어머니 만년에 제가 곁에 있어야 하는데 버리고 출가하는 것을 어찌 감히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 내가 출가에 방해가 된다니 나로 하여금 곧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구나. 비록 살아서 진수성찬(삼뢰칠정)으로서 봉양할지라도 어찌 효라고 랄 수 있겠는가? 나는 다른 사람의 문에서 입고 먹어도(구걸하여도) 또한 그 천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나에게 효도하고자 한다면 그런 말을 하지 말라.”했다. 진정이 깊이 생각하기를 오래하였다.

 

母卽起罄倒囊儲 有米七升 卽日畢炊 且曰 恐汝因熟食經而營行慢也 宜在予目下 喰其一 橐其六 速行速行 定飮泣固辭曰 弃母出家 其亦人子所難忍也 況其杯漿數日之資 盡裹而行 天地其謂我何? 三辭三勸之 定重違其志 進途宵征 三日達于太伯山 投湘公剃染爲弟子 名曰眞定 居三年 母之訃音至 定跏趺入定 七日乃起

어머니가 곧 일어나 엄숙하게 비어있는 주머니를 뒤집으니 쌀 7되가 있었다. 그날 밥 짓기를 마치고 또한 말하기를 네가 밥을 익혀 먹으면서 가면 가는 것이 늦어질까 두렵다. 마땅히 내 눈 앞에서 그 한 되를 먹고 그 여섯 되를 전대에 넣어 빨리빨리 가라.”했다. 진정이 눈물을 삼키며 굳게 사양해 말하기를 어머니를 버리고 출가하는 것은 또한 사람의 자식으로서 차마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물며 며칠의 먹을거리를 모두 다 싸서 가면 천지간에 나를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하였다. 세 번 사양하고, 세 번 권하였다. 진정이 거듭 그 뜻을 어기다 밤에 길을 나서 갔다. 3일 만에 태백산에 이르러 상공(의상)에게 들어 가 머리를 깍고 제자가 되어 이름을 진정이라 했다. 머문 지 3년 만에 어머니의 부음이 이르자 진정이 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들어 가 7일만에 일어났다.

 

說者曰 追傷哀毁之至 殆不能堪 故以定水滌之爾 或曰 以定觀察母之所生處也 或曰 斯乃如實理薦冥福也 旣出定 以後事告於湘 湘率門徒歸于小伯山之錐洞 結草爲廬 會徒三千 約九十日 講華嚴大典 門人智通隨講 撮其樞要 成兩卷 名錐洞記 流通於世 講畢 其母現於夢曰 我已生天矣

해설하는 자가 말하기를 추모와 슬픔이 지극하여 자못 견뎌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정의 물로서 씻어내었을 뿐이다.”했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선정으로서 어머니가 태어나는 곳을 관찰한 것이다.”했다. 어떤 이는 이는 곧 실의 도리와 같이 명복을 올린 것이다.”했다. 선정에서 나옹 후 일을 의상에게 고하니 의상이 문도를 이끌고 소백산 추동으로 가 풀을 엮어 집으로 삼고 무리 3천을 모아 약 9일 동안 화엄대전을 강의하였다. 문인 지통이 강의를 따라 그 요점을 뽑아 두 권을 만들고 추동기라 이름 하였는데 세상에 유통하였다. 강의를 마치자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이미 하늘에 태어났다.”했다.

 

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

牟梁里(一作浮雲村)之貧女慶祖有兒 頭大頂平如城 因名大城 家窘不能生育 因役傭於貨殖福安家 其家俵田數畝 以備衣食之資 時有開士漸開 欲設六輪會於興輪寺 勸化至福安家 施布五十疋 開咒願曰 檀越好布施 天神常護持 施一得萬倍 安樂壽命長 大城聞之 跳跟而入 謂其母曰 予聽門僧誦倡 云施一得萬倍 念我定無宿善 今玆困匱矣 今又不施 來世益艱 施我傭田於法會 以圖後報何如? 母曰 善 乃施田於開 未幾 城物故

대성 효 2세부모 신문왕대

모량리(부운촌이라 쓰기도 한다.)의 가난한 여자 경조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는 평평하여 마치 성과 같았기 때문에 이름을 대성이라 했다. 집이 가난하여 키울 수 없어 부자인 복안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였다. 그 집에서 나누어준 밭 몇 무를 가지고 의식의 밑천을 갖추었다. 그 때 개사(고승) 점개가 흥륜사에서 육륜회를 베풀고자 하여 복안의 집에 이르러 감화시키니(믿게 하니) (복안이) 50필을 시주하였다. 점개가 축원하여 말하기를 단월이 보시를 좋아하니 천신이 항상 보호할 것이며, 하나를 베풀고 만 배를 얻어 안락하고 수명이 길 것입니다.”했다. 대성이 그 말을 듣고 뛰어 들어 와 그 어머니에게 일러 말하기를 문의 승이 외쳐 말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하나를 베풀어 만 배를 얻는다.’합니다. 생각하건데 나는 지난 세상에서 닦은 선이 없어 지금 이처럼 곤궁합니다. 지금 또한 베풀지 않으면 내세에 더욱 어려울 것이니 우리 용전을 법회에 베푸는 것으로서 후에 갚음을 도모하는 것이 어떠합니까?”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좋다.”하고는 곧 밭을 점개에게 시주하였다. 얼마 후 대성이 죽음을 당하였다.

 

是日夜 國宰金文亮家 有天唱云 牟梁里大城兒 今託汝家 家人震驚 使檢牟梁里 城果亡 其日與唱同時 有娠生兒 左手握不發 七日乃開 有金簡子彫大城二字 又以名之 迎其母於第中兼養之 旣壯 好遊獵 一日登吐含山捕一熊 宿山下村 夢熊變爲鬼訟曰 汝何殺我 我還啖汝 城怖懅請容赦

이날 밤 국재(재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는데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지금 너의 집에 의탁한다.”했다. 집의 사람들이 크게 놀라 점검하게 하였더니 과연 대성이 죽었는데, 그날이 소리친 것과 같은 때였다.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다. 왼손을 꽉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 폈는데 금간자에 대성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또한 이름으로 하고 그 (대성의)어머니를 지안으로 맞아 함께 봉양하였다. 자라서 놀고 사냥하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한 마리 곰을 잡고, 산 아래 촌에 묵었다. 꿈에 곰이 변해 귀신이 되어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나를 죽였는가? 내가 도리어 너를 씹어 먹겠다.”했다. 대성이 두려워하여 용서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鬼曰 能爲我創佛寺乎? 城誓之曰喏 旣覺 汗流被蓐 自後禁原野 爲熊創長壽寺於其捕地 因而情有所感 悲願增篤 乃爲現生二親 創佛國寺 爲前世爺孃創石佛寺 請神琳表訓二聖師各住焉 茂張像設 且酬鞠養之勞 以一身孝二世父母 古亦罕聞 善施之驗 可不信乎! 將彫石佛也 欲鍊一大石爲龕盖 石忽三裂 憤恚而假寐 夜中天神來降 畢造而還

귀신이 말하기를 나를 위해 불사()를 지을 수 있는가?”하니 대성이 맹서하여 수락합니다.” 했다. (꿈을) 깨고 나니 땀이 흘러 자리를 적셨다. 이후로부터 들판에 나가는 것을 금하고, 곰을 위해 그 잡았던 땅에 장수사를 창건하였다. 그런 까닭에 정에 느끼는 바가 있어 이루고자 하는 비장한 소원이 더욱 두터워졌다. 이에 현생의 두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창건하고 신림과 표훈 두 성사를 청해 각각 거기에 살게 하였다. (거대한) 불상을 만들어 길러준 수고로움을 갚았다. 한 몸으로서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날에도 듣기 드물었으니 베풀기를 잘함의 징험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차 석물을 조각하려하여 하나의 큰 돌을 깍아 감실의 뚜껑을 만들려 하는데 돌이 세 개로 갈라졌다. 분해하고 성내다 잠시 잠을 자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만들기를 마치고 돌아갔다.

 

城方枕起 走跋南嶺爇木 以供天神 故名其地爲香嶺 其佛國寺雲梯石塔彫鏤石木之功 東部諸刹未有加也 古鄕傳所載如上 而寺中有記云 景德王代 大相大城以天寶十年辛卯始創佛國寺 歷惠恭世 以大歷九年甲寅十二月二日大城卒 國家乃畢成之 初請瑜伽大德降魔住此寺 繼之至于今 與古傳不同 未詳孰是 讚曰 牟梁春後施三畝 香嶺秋來獲萬金 萱室百年貧貴 槐庭一夢去來今

대성이 막 침대에서 일어나 달려 남쪽 고개로 달려가 향나무로서 천신에게 공양하였다. 그러므로 그 땅을 이름하여 향령이라 했다. 그 불국사 사다리와 석탑을 돌과 나무에 새긴 공은 동부(경주) 여러 사찰 중에 나은 것이 없었다. 옛 향전에 실린 바는 위와 같다. 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경덕왕대에 대상(재상) 대성치 천보 10년 신묘에 처음 불국사를 창건하고, 혜공왕대를 지나 대력 9년 갑인 122일에 대성이 죽으니 국가에서 이에 왕성하여 마쳤다. 처음 유가대덕 항마를 청해 이 절에 살게 하였는데 이어져 지금에 이르렀다.”하니 고전과는 같지 않다. 어느 것이 옳은 지 자세하지 않다. 기려 말한다. “모량리에서 봄에 3묘를 시주한 뒤, 향령에서 가을에 만금을 얻었다. 어머니가 오랜 세월 가난과 귀함을 누렸으니 괴정은 한 꿈에 과거, 미래 지금이다.”했다.

 

向得舍知割股供親 景德王代

能川州有向得舍知者 年凶 其父幾於餒死 向得割股以給養 州人具事奏聞 景德王賞賜租五百石

향득사지 할고공친 경덕왕대

웅천주에 향득사지라는 자가 있었는데 흉년이 들어 그 아버지가 거의 굶어죽게 되었다. 향득이 다리를 베어 먹였다. 주의 사람들이 일을 갖추어 아뢰었더니 경덕왕이 상으로 조 500석을 내렸다.

 

孫順埋兒 興德王代

孫順者(古本作孫舜) 牟梁里人 父鶴山 父沒 與妻同傭作人家 得米穀養老孃 孃名運烏 順有小兒 每奪孃食 順難之 謂其妻曰 兒可得 母難再求 而奪其食 母飢何甚 且埋此兒 以圖母腹之盈 乃負兒歸醉山(山在牟梁西北)北郊 堀地忽得石鐘甚奇 夫婦驚怪 乍懸林木上 試擊之 舂容可愛 妻曰 得異物 殆兒之福 不可埋也 夫亦以爲然 乃負兒與鐘而還家 懸鐘於梁扣之 聲聞于闕

손순매아 흥덕왕대

손순은(옛 책에는 손순이라 썼다.) 모량리 사람으로 아버지는 학산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처와 함께 다른 사람 집에서 품팔이를 하여 쌀과 곡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 이름은 운오였다. 손순에게는 작은 아이가 있었는데 매번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었다. 손순이 그것을 곤란하게 여겨 그 처에게 일러 말하기를 아이는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려운데 그 음식을 빼앗으니 어머니의 주림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또 이 아이를 땅에 묻는 것으로서 어머니 배가 찰 것을 도모하려합니다.”했다. 곧 아이를 업고 취산(산은 모량리 서쪽에 있다.) 북쪽 교외에 가 땅을 파다 갑자기 돌로 만든 종을 얻었는데 매우 기이하였다. 부부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이를 숲의 나무 위에 걸고 시험 삼아 치니 소리가 웅장하고 아름다워 사랑할만하였다. 처가 말하기를 기이한 물건을 얻음은 자못 아이의 복이니 묻을 수 없습니다.”했다. 남편이 또한 그렇다 여겨 곧 아이를 엎고, 종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 종을 대들보에 걸고 치니 소리가 대궐에 들렸다.

 

興德王聞之 謂左右曰 西郊有異鐘聲 淸遠下類 速檢之 王人來檢其家 具事奏王 王曰 昔郭巨瘞子 天賜金釜 今孫順埋兒 地湧石鐘 前孝後孝 覆載同鑑 乃賜屋一區 歲給粳五十碩 以尙純孝焉 順捨舊居爲寺 號弘孝寺 安置石鐘 眞聖王代 百濟橫賊入其里 鐘亡寺存 其得鎭之地 名完乎坪 今訛云枝良坪

흥덕왕이 그것을 듣고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서쪽 교외에서 기이한 종소리가 있는데 맑고 먼듯하니 빨리 점검하라.”했다. 왕의 사람이 그 집에 와 점검하고는 일을 갖추어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말하기를 옛날 곽거예의 아들은 하늘에서 금 솥을 내렸고, 지금 손순은 아이를 묻으려하는데 땅에서 돌 종이 솟아 났으니 앞의 효와 뒤의 효는 하늘과 땅에 함께 본보기이다.”하고는 곧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식을 주는 것으로서 손순의 효를 높였다. 손순이 옛날에 살던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홍효사라 부르고 석종을 안치하였다. 진성왕대에 백제 횡포한 도적이 그 마을에 들어 왔을 때 종은 없어지고 절은 남았다. 그 종을 얻은 땅은 이름을 왕호평이라 하였는데 지금에는 잘못 전해져 지량평이라 한다.

 

貧女養母

孝宗郎遊南山鮑石亭(或云三花述) 門客星馳 有二客獨後 郎問其故 曰 芬皇寺之東里有女 年二十左右 抱盲母相號而哭 問同里 曰 󰡔此女家貧 乞啜而反哺有年矣 適歲荒 倚門難以藉手 贖賃他家 得穀三十石 寄置大家服役 日暮櫜米而來家 炊餉伴宿 晨則歸役大家 如是者數日矣 母曰 昔日之糠粃 心和且平 近日之香秔 膈肝若剌而心未安 何哉? 女言其實 母痛哭 女嘆己之但能口腹之養 而失於色難也 故相持而泣󰡕 見此而遲留爾 郎聞之潛然 送穀一百斛 郎之二親亦送衣袴一襲 郎之千徒 歛租一千石遺之 事達宸聰 時眞聖王賜穀五白石 幷宅一廛 遣卒徒衛其家 以儆劫掠 旌其坊爲孝養之里 後捨其家爲寺 名兩尊寺

 

빈녀양모

효종랑이 남산 포석정(혹은 삼화술이라 한다.)에서 노닐 때 문객이 매우 급하게 달려왔는데 두 문객만이 뒤쳐졌다. 효종랑이 그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분황사 동쪽 마을에 여자가 있는데 나이는 20세 정도로 눈먼 어머니를 안고 서로 소리 내어 울고 있었습니다. 같은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이 여자의 집이 가난하여 음식을 구걸하여 부모의 은혜를 갚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마침 흉년으로 걸식하여 살아가기 어려워 다른 집에 품팔이하여 곡식 30석을 얻어 부잣집에 맡겨두고 일을 하였습니다. 날이 저물면 쌀을 싸서 집에 와 밥을 지어 (어머니에게)먹이고 함께 잠을 잡니다. 새벽이 되면 부잣집에 일을 하러 갑니다. 이 같이 한 것이 며칠 째입니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거친 음식일지라도 마음이 평화로웠는데 최근에는 향기로운 멥쌀임에도 가슴을 찌르는 듯 하여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니 무엇때문인가?’했다. 여자가 그 실정을 말하니 어머니가 통곡하고, 딸은 자기가 다만 입과 배만 채우는 봉양을 하면서 잘못 어려워하는 기색을 나타낸 것을 한탄하였기 때문에 서로 안고 운 것입니다. 했습니다. 이를 보느라 늦었습니다.” 했습니다. 효종랑이 그것을 들고 조용히 곡식 100곡을 보냈다. 효종랑의 부모가 또한 옷과 바지 한 벌을 보내니 효종랑의 천여 무리들이 조 1000석을 거두어 보냈다. 일이 임금의 귀에 이르렀다. 그 때 진성왕이 곡식 500석을 내리고 아울러 집 한 채를 내리고, 군대를 보내 그 집을 지키게 하여 도적의 약탈을 경계하게 하였다. 그 방에 깃발을 세워(그 방을 정표하여) 효양의 마을이라 하였다. 후에 그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이름을 양존사라 하였다.

 

三國遺事 卷第五()

삼국유사 권제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