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一百一
袁盎晁錯列傳第四十一
袁盎[一]者,楚人也,字絲。父故為群盜,徙處安陵。高后時,盎嘗為呂祿舍人。及孝文帝即位,盎兄噲任盎為中郎。[二]
원앙은 초 사람이다. 자는 사이다. 아버지 때문에 도적이 되어 옮겨 안릉에 살았다. 고후 때 원앙이 일찍이 여록의 사인이 되었다. 효문제가 즉위함에 이르러 원앙의 형 쾌가 원앙을 담당하여 중랑이 되었다.
[一] 索隱音如周禮「盎齊」,烏浪反。
[一] 【索隱】 음은 『주례』의 ‘盎齊’와 같으니 ‘烏’와 ‘浪’의 反이다.
[二] 集解如淳曰:「盎為兄所保任,故得為中郎。」
[二]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앙이 형으로 보호하고 담당하였기 때문에 중랑이 될 수 있었다.
絳侯為丞相,朝罷趨出,意得甚。上禮之恭,常自送之。[一]袁盎進曰:「陛下以丞相何如人?」上曰:「社稷臣。」盎曰:「絳侯所謂功臣,非社稷臣,社稷臣主在與在,[二]主亡與亡。[三]方呂后時,諸呂用事,擅相王,劉氏不絕如帶。是時絳侯為太尉,主兵柄,弗能正。呂后崩,大臣相與共畔諸呂,太尉主兵,適會其成功,所謂功臣,非社稷臣。丞相如有驕主色。陛下謙讓,臣主失禮,竊為陛下不取也。」後朝,上益莊,[四]丞相益畏。已而絳侯望袁盎曰:[五]「吾與而兄善,今兒廷毀我!」盎遂不謝。
강후가 승상이 되어 조회가 끝나고 달려 나오는데 뜻을 얻음을 심하게 하였다.황제가 예로 공경하여 항상 스스로 전송하였다. 원앙이 나아가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승상이 어떤 사람입니까?”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사직의 신하이다.”했다. 원앙이 말하기를 “강후는 이른 바 공신이지 사직 신은 아니니 사직 신은 황제가 살면 함께 살고, 임금이 죽으면 함께 죽습니다. 여후의 때를 당하여 여러 여씨가 일을 쓰고 재상과 왕을 마음대로 하여 유씨는 끊어지지 않음이 띠와 같습니다.(명맥만 유지합니다.) 이 때 강후는 태위가 되어 병권을 주관하여 바로잡지 못하였습니다. 여후가 죽고 대신들이 서로 함께 여러 여씨를 배척할 때 태위는 군대를 주관하면서 마침 그 공을 이룸을 만났으니 이른 바 공신이고, 사직신은 아닙니다. 승상은 황제에게 교만한 기색이 있는 듯합니다. 폐하께서는 겸양하고 신하는 황제에게 예를 잃으니 가만히 폐하께서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했다. 조회 후에 황제가 더욱 삼가 하니 승상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윽고 강후가 원앙을 보고 원망하며 말하기를 “내가 너희 형과 잘 지냈는데 지금 아이가 조정에서 나를 헐뜯는구나!”했다. 원앙이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一] 集解徐廣曰:「自,一作『目』。」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自’는 한편으로 ‘目’이라 쓴다.” 했다.
[二] 集解如淳曰:「人主在時,與共治在時之事。」 索隱按:如淳云「人主在時,與共理在時之事」也。
[二]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황제가 살아 있을 때는 살아 있을 때의 일을 함께 다스린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여순이 말하기를 “황제가 살아 있을 때는 살아 있을 때의 일을 함께 다스린다.” 했다.
[三] 集解如淳曰:「不以主亡而不行其政令。」 索隱如淳云「不以人主亡而不行其政令」。按:如說為得。
[三]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황제가 죽었다 하여 그 정령이 행해지지 않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했다. 【索隱】 여순이 말하기를 “황제가 죽었다 하여 그 정령이 행해지지 않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했다. 살펴보니 여순의 말이 옳음이 된다.
[四] 索隱莊,嚴也。
[四] 【索隱】 ‘莊’은 엄숙함이다.
[五] 正義望,怨也。
[五] 【正義】 ‘望’은 원망함이다.
及絳侯免相之國,國人上書告以為反,徵繫清室,[一]宗室諸公莫敢為言,唯袁盎明絳侯無罪。絳侯得釋,盎頗有力。絳侯乃大與盎結交。
강후가 승상의 직을 면직하고 나라에 돌아가니 나라 사람들이 글을 올려 배반한다고 알리자 불려가 감옥에 묶였다. 종실의 여러 공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데 오직 원앙만이 강후가 죄가 없다고 했다. 강후가 풀려나는 데는 원앙이 자못 힘씀이 있었다. 강후가 곧 크게 원앙과 함께 교류하였다.
[一] 集解漢書作「請室」。應劭曰:「請室,請罪之室,若今鍾下也。」如淳曰:「請室,獄也,若古刑於甸師氏也。」
[一] 【集解】 『한서』에 “청실”이라 썼다. 응소가 말하기를 “‘청실’은 죄를 청하는 방인데 지금의 ‘종하’와 같은 것이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청실’은 옥인데 옛날 전사씨에서 형벌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했다.
淮南厲王朝,殺辟陽侯,居處驕甚。袁盎諫曰:「諸侯大驕必生患,可適削地。」上弗用。淮南王益橫。及棘蒲侯柴武太子謀反事覺,治,連淮南王,淮南王徵,上因遷之蜀,轞車傳送。袁盎時為中郎將,乃諫曰:「陛下素驕淮南王,弗稍禁,以至此,今又暴摧折之。淮南王為人剛,如有遇霧露行道死,陛下竟為以天下之大弗能容,有殺弟之名,柰何?」上弗聽,遂行之。
회남 여왕이 조회하여 벽양후를 죽이고는 거처가 교만함이 심하였다. 원앙이 간하여 말하기를 “제후가 크게 교만하면 반드시 근심이 생기니 마땅히 땅을 깍아야 합니다.” 했다. 황제가 쓰지 않았다. 회남왕이 더욱 횡포하였다. 극포후 시무태자가 모반하다 발각되어 다스려졌는데 회남왕이 연좌되었으므로 회남왕이 불려오니 황제가 인하여 옮겨 촉에 보내는데 함거로 보냈다. 원앙이 당시 중랑장이 되어서 이에 간하여 말하기를 “폐하께서 평소에 교만한 회남왕을 조금도 금하지 않아 이에 이르렀기 때문에 지금 갑자기 그를 꺽으려 합니다. 회남왕의 사람됨이 강하여 만약 안개와 이슬을 만나 길을 가다 죽게 된다면 폐하께서는 마침내 천하의 크게 용납하지 못하고, 동생을 죽인 이름이 있다고 여겨지니 어떻게 하려 하십니까?” 황제가 듣지 않고 마침내 행하였다.
淮南王至雍,病死,聞,上輟食,哭甚哀。盎入,頓首請罪。上曰:「以不用公言至此。」盎曰:「上自寬,此往事,豈可悔哉!且陛下有高世之行者三,此不足以毀名。」上曰:「吾高世行三者何事?」盎曰:「陛下居代時,太后嘗病,三年,陛下不交睫,不解衣,湯藥非陛下口所嘗弗進。夫曾參以布衣猶難之,今陛下親以王者脩之,過曾參孝遠矣。夫諸呂用事,大臣專制,然陛下從代乘六傳馳不測之淵,[一]雖賁育之勇[二]不及陛下。陛下至代邸,西向讓天子位者再,南面讓天子位者三。夫許由一讓,而陛下五以天下讓,過許由四矣。且陛下遷淮南王,欲以苦其志,使改過,有司衛不謹,故病死。」於是上乃解,曰:「將柰何?」盎曰:「淮南王有三子,唯在陛下耳。」於是文帝立其三子皆為王。盎由此名重朝廷。
회남왕이 옹에 이르러 병들어 죽으니 듣고, 황제가 음식을 거두고 곡하며 매우 슬퍼하였다. 원앙이 들어가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공의 말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이르렀다.” 했다. 원앙이 말하기를 “황제께서 스스로 너그럽게 할 일이고 이는 지나간 일인데 어찌 뉘우칠 수 있겠습니까! 또한 폐하께는 세상에 높은 행실이 셋이니 이는 명예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나의 세상에 높은 행실이 셋이라는 것은 어떤 일인가?” 하니 원앙이 말하기를 “페하께서 대에 머물 때 태후가 일찍이 병이 들었는데 3년을 폐하께서는 잠자지 않으시고, 옷을 벗지 않았으며, 탕약은 폐하께서 임으로 맛보지 않으시면 올리지 않았습니다. 대저 증삼은 베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어렵게 하였는데 폐하께서는 친히 왕 노릇하면서도 그것을 닦았으니 증삼의 효보다 뛰어납니다. 대저 여러 여씨가 일을 볼 때 대신들을 專制하였으나 폐하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정세 속에서 대로부터 6대의 마차를 달려 오셨으니 비록 맹분과 하육의 용맹함도 폐하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폐하께서 대의 저택에 이르러 서족을 향하여 전자의 자리를 사양한 것이 두 번이었고, 남쪽을 향하여 천자의 자리를 사양한 것이 세 번이었습니다. 저 허유는 한 번을 사양하였는데 폐하께서는 다섯 번 천하를 사양하셨으니 허유보다 네 번을 더 사양 하였습니다. 또한 폐하께서 회남왕을 옮기시고 그 뜻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써 허물을 고치게하고자 하였는데 담당 관청이 삼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병으로 죽은 것입니다. 했다. 이에 문제가 풀고 말하기를 “장차 어찌해야 하는가?”하니 원앙이 말하기를 “회남왕은 아들이 셋 있으니 오직 폐하께 달려 있을 뿐입니다.” 했다. 이에 문제가 그 세 아들 모두를 왕으로 삼았다. 원앙이 이로부터 명성이 조정에서 무거워졌다.
[一] 集解瓚曰:「大臣共誅諸呂,禍福尚未可知,故曰不測也。」
[一] 【集解】 신찬이 말하기를 “대신이 함께 여러 여씨를 죽여서 화복이 오히려 알 수 없었기 때문에 ‘不測’이라 말한 것이다.” 했다.
[二] 集解孟康曰:「孟賁、夏育,皆古勇者也。」 索隱賁,孟賁;育,夏育也。尸子云「孟賁水行不避蛟龍,陸行不避兕虎」。戰國策曰「夏育叱呼駭三軍,身死庸夫」。高誘曰「育為申繻所殺」。賁音奔也。
[二] 【集解】 맹강이 말하기를 “맹분, 하육은 모두 옛날의 용감한 자이다.” 했다. 【索隱】 ‘賁’은 맹분이고, ‘育’은 하육이다. 시자가 말하기를 “맹분은 물로 가면 교룡을 피하지 않고, 육지로 가면 외뿔소와 호랑이를 피하지 않았다.” 했다. 『전국책』에 “하육이 소리 지르면 삼군이 놀랐으나 자신은 평범한 사내에게 죽었다.” 했다. 고유가 말하기를 “하육은 신수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했다. ‘賁’의 음은 ‘奔’이다.
袁盎常引大體慷慨。宦者趙同[一]以數幸,常害袁盎,袁盎患之。盎兄子種為常侍騎,[二]持節夾乘,說盎曰:[三]「君與鬥,廷辱之,使其毀不用。」孝文帝出,趙同參乘,袁盎伏車前曰:「臣聞天子所與共六尺輿者,皆天下豪英。今漢雖乏人,陛下獨奈何與刀鋸餘人載!」於是上笑,下趙同。趙同泣下車。
원앙은 평소에 일반적인 것을 이끌어 말하면서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환관 조동이 자주 총애를 받고 항상 원앙을 해치려 하니 원앙이 근심하였다. 원앙의 형의 아들 종이 상시기가 되어 부절을 가지고 곁에 탔는데 원앙에게 말하기를 “그대와 싸워 조정에서 욕보여 그 헐뜯음을 쓰지 못하게 하십시오.” 했다. 효문제가 나올 때 조동이 수레를 함께 타니 원앙이 수레 앞에 엎드려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천자가 함께하는 6척의 수레는 모두 천하의 호걸과 영웅이라 합니다, 지금 한이 비록 사람이 모자란다 하나 폐하께서는 유독 어찌하여 궁형을 받은 사람과 함께 타십니까!” 했다. 이에 문제가 웃으면서 조동을 내리게 했다. 조동이 울면서 수레에서 내렸다.
[一] 集解徐廣曰:「漢書作『談』字。」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서』에 ‘談’자로 썼다.
[二] 索隱案:漢舊儀云「持節夾乘輿車騎從者云常侍騎」。
[二] 【索隱】 살펴보니 「한구의」에 “부절을 가지고 수레를 함께 타고 따르는 자를 ‘상시기’라 한다.
[三] 集解徐廣曰:「說,一作『謀』。」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說’은 한편으로 ‘謨’라고 쓴다.” 했다.
文帝從霸陵上,欲西馳下峻阪。袁盎騎,並車攬轡。上曰:「將軍怯邪?」盎曰:「臣聞千金之子坐不垂堂,[一]百金之子不騎衡,[二]聖主不乘危而徼幸。今陛下騁六騑,[三]馳下峻山,如有馬驚車敗,陛下縱自輕,柰高廟、太后何?」上乃止。
문제가 패릉의 위에서 서쪽으로 매우 가파른 산비탈을 달려 내려가려 했다. 원앙이 말을 타고 수레와 나란히 가며 고삐를 잡았다. 문제가 말하기를 “장군은 겁이 나는가?” 하니 원앙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천금의 자식은 마루 끝에 앉게 하지 않고, 백금의 자식은 난간에 걸터앉게 하지 않는다 합니다. 성수러운 임금은 위태로움을 타고 요행을 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여섯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달리게 하여 험준한 산을 달려 내려가려 하시니 만약 말이 놀라고 수레가 부서지면 폐하께서는 방종하여 스스로를 가볍게 하신 것이니 고조의 사당과 태후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했다. 문제가 이에 그쳤다.
[一] 索隱案:張揖云「恐簷瓦墮中人」。或云臨堂邊垂,恐墮墜也。
[一] 【索隱】 살펴보니 장읍이 말하기를 “처마의 기와가 떨어져 사람이 맞을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했다. 혹은 마루의 가에 섰다가 떨어질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한다.
[二] 集解徐廣曰:「一作『行』。」駰案:服虔曰「自惜身,不騎衡」。如淳曰「騎,倚也。衡,樓殿邊欄楯也」。韋昭曰「衡,車衡」。索隱張晏云「衡木行馬也」。如淳云「騎音於岐反。衡,樓殿邊欄楯也」。韋昭云「衡,車衡也。騎音倚,謂跨之」。按:如淳之說為長。案:纂要云「宮殿四面欄,縱者云檻,橫者云楯」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行’이라 쓴다.” 했다. 배인이 살펴보니 복건은 “스스로 자신을 아껴 난간에 걸터앉지 않는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騎’는 의지하는 것이요, ‘衡’은 누각 가의 난간이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衡’은 수레바퀴 가로대이다.” 했다.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衡木’은 통행을 막는 가로 막대이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騎’의 음은 ‘於’와 ‘岐’의 反이다. ‘衡’은 누각 가의 난간이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衡’은 수레바퀴 가로대이다. ‘騎’의 음은 ‘倚’인데 걸터앉는 것을 말한다.” 했다. 살펴보니 여순의 설이 장점이 된다. 살펴보니 찬요가 말하기를 “궁전 4면의 난간인데 세로 댄 것을 ‘檻’이라 하고, 가로댄 것을 ‘楯’이라 한다.” 했다.
[三] 集解如淳曰:「六馬之疾若飛。」
[三]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여섯 마리 말이 빨리 달리는 것이 나는 듯함 이다.” 했다.
上幸上林,皇后、慎夫人從。其在禁中,常同席坐。及坐,郎署長布席,[一]袁盎引卻慎夫人坐。[二]慎夫人怒,不肯坐。上亦怒,起,入禁中。盎因前說曰:「臣聞尊卑有序則上下和。今陛下既已立后,慎夫人乃妾,妾主豈可與同坐哉!適所以失尊卑矣。且陛下幸之,即厚賜之。陛下所以為慎夫人,適所以禍之。陛下獨不見『人彘』乎?」[三]於是上乃說,召語慎夫人。慎夫人賜盎金五十斤。
문제가 상림에 행차했는데 황후와 신부인이 따랐다. 궁중에 있을 때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음에 이르러 낭서장이 자리를 펴는데 원앙이 신부인을 인도하여 떨어져 앉게 했다. 신부인이 노하여 즐겨 앉지 않았다. 문제가 노하여 일어나 궁중으로 돌아갔다. 원앙이 인하여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높고 낮음은 서열이 있어야 곧 상하가 화목하다.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이미 황후를 세우셨으니 신부인은 곧 첩이고, 첩과 본 부인이 어찌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존비를 잃을 뿐입니다. 또한 폐하께서 사랑을 내리신다면 후하게 선물을 내리시면 됩니다. 폐하께서 신부인을 위한다면 다만 화가 될 뿐입니다. 폐하께서 유독 ‘사람 돼지’를 보지 못하십니까?” 했다. 이에 문제가 곧 기뻐하여 신부인을 불러 말하였다. 신부인이 원앙에게 금 오십근을 내렸다.
[一] 正義蘇林云:「郎署,上林中直衛之署。」
[一] 【正義】 소림이 말하기를 “‘낭서’는 살림을 지키는 관청이다.”했다.
[二] 集解如淳曰:「盎時為中郎將,天子幸署,豫設供帳待之,故得卻慎夫人坐。」
[二]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원앙이 이 때 중낭장이 되었는데 천자가 관청에 가자 미리 휘장을 치고 기다렸기 때문에 신부인의 자리를 덜어 뜨릴 수 있었다.” 했다.
[三] 集解張晏曰:「戚夫人。」
[三]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척부인”이라 했다.
然袁盎亦以數直諫,不得久居中,調為隴西都尉。[一]仁愛士卒,士卒皆爭為死。遷為齊相。徙為吳相,辭行,種謂盎曰:「吳王驕日久,國多姦。今苟欲劾治,彼不上書告君,即利劍刺君矣。南方卑溼,君能日飲,毋何,時說王曰毋反而已。如此幸得脫。」盎用種之計,吳王厚遇盎。
그러나 원앙이 또한 자주 곧게 간하였기 때문에 오래 동안 궁중에 있지 못하고, 뽑혀 농서 도위가 되었다. 사졸을 사랑하니 사졸이 모두 죽음을 다투었다. 옮겨 제의 재상이 되었다가. 옮겨 오의 재상이 되어 하직하고 가는데 (원)종이 원앙에게 말하기를 “오왕이 교만한 날이 오래되어 나라에 간사한 이가 많습니다, 지금 만약 캐묻고 다스리려 하면 그들은 글을 올려 그대를 고하지(무고하지) 않으면 곧 검을 날카롭게 하여 그대를 찌를 것입니다. 남방은 낮고 습하니 그대는 매일 마시면서 아무 일도 하지 마시고, 때때로 왕에게 배반하지 말라는 말만 하십시오. 이 같이 하면 요행히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원앙이 원종의 계책을 쓰니 오왕이 두터이 원앙을 대우하였다.
[一] 集解如淳曰:「調選。」
[一]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골라 뽑는 것이다.” 했다.
盎告歸,道逢丞相申屠嘉,下車拜謁,丞相從車上謝袁盎。袁盎還,愧其吏,乃之丞相舍上謁,求見丞相。丞相良久而見之。盎因跪曰:「願請閒。」丞相曰:「使君所言公事,之曹與長史掾議,吾且奏之;即私邪,吾不受私語。」袁盎即跪說曰:「君為丞相,自度孰與陳平、絳侯?」丞相曰:「吾不如。」
원앙이 돌아가 고하려는데 길에서 승상 신도가를 만나 수레에서 내려 뵙자 승상이 수레 위에서 원앙에게 사례하였다. 원앙이 돌아가 그 하급관리에게 부끄러워 이에 승상의 집에 가 승상 뵙기를 청하였다. 승상이 오래 후에 그를 만났다. 원앙이 꿇어 말하기를 “잠시 따로 말하기를 청합니다.” 했다. 승상이 말하기를 “가령 그대가 공적인 일을 말 한다면 관청에 가서 장사, 아전과 의론하면 내가 또한 그것을 아뢸 것입니다. 곧 사사로운 것이면 내가 사사로운 말을 받지 듣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원앙이 곧 꿇어 말하기를 “그대는 승상이 되어 스스로 헤아리기에 그대와 진평, 강후 중에 누가 낫다고 여깁니까?” 하니 승상이 말하기를 “내가 못하다.” 했다.
袁盎曰:「善,君即自謂不如。夫陳平、絳侯輔翼高帝,定天下,為將相,而誅諸呂,存劉氏;君乃為材官蹶張,遷為隊率,積功至淮陽守,非有奇計攻城野戰之功。且陛下從代來,每朝,郎官上書疏,未嘗不止輦受其言,言不可用置之,言可受採之,未嘗不稱善。何也?則欲以致天下賢士大夫。上日聞所不聞,明所不知,日益聖智;君今自閉鉗天下之口而日益愚。夫以聖主責愚相,君受禍不久矣。」丞相乃再拜曰:「嘉鄙野人,乃不知,將軍幸教。」引入與坐,為上客。
원앙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그대는 곧 스스로 같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저 진평과 강후는 고조를 도와서 천하를 평정하고 장군과 재상이 되었고, 여러 여씨를 베고, 유씨를 보존하였습니다. 그대는 곧 활을 당기는 재관이었는데, 옮겨 한 부대를 통솔하다 공을 쌓고, 회양의 군수에 이르렀을 뿐 기이한 계책으로 성을 공격하고, 들에서 싸운 공이 있지 않습니다. 또한 폐하께서 대에서 왔을 때 매일 아침 낭관이 글을 올리면 일직이 수레를 멈추고 그 말을 듣지 않음이 없었고, 쓸 수 없는 것을 말하면 그대로 두고, 받을 수 있는 것을 말하면 채택하여 일찍이 좋음을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왜이겠습니까? 곧 천하의 현명한 사와 대부가 이르기를 바라서였습니다. 문제께서는 매일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알지 못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 날로 성스러운 지혜를 더합니다. 그대는 지금 스스로 천하의 입을 막고, 칼을 씌우니(재갈을 물리니) 날로 더욱 어리석어집니다. 대저 성스러운 임금이 어리석은 재상을 질책하니 그대는 활르 받음이 오래지 않습니다,” 했다. 승상이 이에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나는 비루한 시골 사람으로 잘 알지 못하였는데 장군이 다행히 가르쳐주십니다.” 하고는 인도하여 들어가 함께 앉아 상객으로 대하였다.
盎素不好晁錯,晁錯所居坐,盎去;盎坐,錯亦去:兩人未嘗同堂語。及孝文帝崩,孝景帝即位,晁錯為御史大夫,使吏案袁盎受吳王財物,抵罪,詔赦以為庶人。
원앙이 평소에 조조를 좋아하지 않아 조조가 앉아 있는 곳에는 원앙이 떠나고, 원앙이 앉아 있으면 조조가 또한 갔다. 두 사람이 일찍이 같은 집에서 말하지 않았다. 효문제가 죽음에 이르러 효경제가 즉위하자 조조가 어사대부가 되자 관리를 시켜 원앙이 오왕의 재물을 받은 것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죄에 저촉되었으나 조칙으로 용서하여 庶人으로 하였다.
吳楚反,聞,晁錯謂丞史曰:[一]「夫袁盎多受吳王金錢,專為蔽匿,言不反。今果反,欲請治盎宜知計謀。」丞史曰:「事未發,治之有絕。[二]今兵西鄉,治之何益!且袁盎不宜有謀。」[三]晁錯猶與未決。人有告袁盎者,袁盎恐,夜見竇嬰,為言吳所以反者,願至上前口對狀。竇嬰入言上,上乃召袁盎入見。晁錯在前,及盎請辟人賜閒,錯去,固恨甚。袁盎具言吳所以反狀,以錯故,獨急斬錯以謝吳,吳兵乃可罷。其語具在吳事中。使袁盎為太常,竇嬰為大將軍。兩人素相與善。逮吳反。諸陵長者長安中賢大夫爭附兩人,車隨者日數百乘。
오와 촉이 배반하였다는 것을 듣고 조조가 승, 사에게 말하기를 “저 원앙은 오왕에게서 금전을 많이 받아 오로지 죄를 가리고 숨겨서 배반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나 지금 과연 배반하였으니 원앙은 마땅히 계책과 모의를 알고 있었는지를 청하고자 한다.” 했다. 승과 사가 말하기를 “일이 아직 펴지지 않았는데 그것을 다스리면 끊어집니다. 지금 군대가 서쪽을 향하여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또 원앙은 마땅히 도모함이 있지 않았습니다.” 했다. 조착이 오히려 결단하지 못하였다. 원앙에게 알리는 사람이 있어서 원앙이 두려워하여 밤에 두영을 만나 오가 배반하는 까닭을 말하고, 황제 앞에 이르러 상황에 대하여 말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두영이 들어가 황제에게 말하니 황제가 곧 원앙을 부르므로 들어가 뵈었다. 조착이 앞에 있었는데 원앙이 이르러 사람을 물리치고 틈을 내릴 것을 청하여 조착을 물러가게 하니 조착이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원앙이 오가 배반하는 상황을 말하고, 조착의 일 때문이니 단지 급히 조착을 베어 오에 사과하면 오의 군대를 이에 그치게 할 수 있습니다. 했다. 그 말은 모두 오의 일 가운데 있다. 원앙으로 하여금 태상을 삼고 두영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두 사람이 평소에 서로 잘 지냈다. 오가 배반함에 이르러 여러 능의 장자와 장안 안의 현자와 대부들이 두 사람에게 다투어 붙었는데 수레로 따르는 자가 매일 수백 대였다.
[一] 集解如淳曰:「百官表御史大夫有兩丞。丞史,丞及史也。」
[一]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백관표」에 어사대부는 승 두 명이 있다. ‘승사’는 ‘승’과 ‘사’이다.” 했다.
[二] 集解如淳曰:「事未發之時治之,乃有所絕。」 索隱案:謂有絕吳反心也。
[二]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 다스리면 곧 끊어지는 바가 있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오의 배반하려는 마음을 끊을 수 있음을 말한다.
[三] 集解如淳曰:「盎大臣,不宜有姦謀。」
[三]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원앙은 대신으로 간사함을 도모함이 있지 않았다.” 했다.
及晁錯已誅,袁盎以太常使吳。吳王欲使將,不肯。欲殺之,使一都尉以五百人圍守盎軍中。袁盎自其為吳相時,(嘗)有從史嘗盜愛盎侍兒,[一]盎知之,弗泄,遇之如故。人有告從史,言「君知爾與侍者通」,乃亡歸。袁盎驅自追之,遂以侍者賜之,復為從史。
조착이 죽음을 당한 후 원앙은 태상으로서 오에 사신으로 갔다. 오왕이 장군을 시키려 하였는데 즐겨하지 않았다. 그를 죽이려 하여 한 명의 도위로 하여금 500명을 거느리게 하고 원앙을 군 안에서 포위하고 지키게 했다. 원앙이 오의 재상이 되었을 때부터 종사(하급관리)가 몰래 원앙을 모시던 아이를 사랑하였는데 원앙이 그것을 알았으나 누설하지 않고 그를 대하기를 옛날과 같이 하였다. 어떤 사람이 종사에게 알려 말하기를 “원앙이 너와 모시는 자가 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니 도망하였다. 원앙이 말을 몰아 스스로 쫓아가서 마침내 모시던 자를 내려 주고 다시 종사를 삼았다.
及袁盎使吳見守,從史適為守盎校尉司馬,乃悉以其裝齎置二石醇醪,會天寒,士卒飢渴,飲酒醉,西南陬卒皆臥,司馬夜引袁盎起,曰:「君可以去矣,吳王期旦日斬君。」盎弗信,曰:「公何為者?」
원앙이 오에 사신 와서 가두어질 때 종사가 마침 원앙을 지키는 교위사마가 되었다. 이에 그 옷과 물건을 모두 가져다 팔아서 두 섬의 독하고 순수한 술을 마련하였다. 날씨가 춥고 사졸이 주리고 목마를 때 술을 마시게 하였는데 취하 여 서남쪽 모퉁이의 병졸이 모두 눕자 사마가 밤에 원앙을 인도하여 일어나게 하고는 말하기를 “그대는 떠날 수 있습니다. 오왕이 아침에 그대를 죽이기로 기일을 정하였습니다.” 했다. 원앙이 믿지 한고 말하기를 “공은 무엇을 하는 자인가?” 했다.
司馬曰:「臣故為從史盜君侍兒者。」盎乃驚謝曰;「公幸有親[二],吾不足以累公。」司馬曰:「君弟去,臣亦且亡,辟吾親,[三]君何患!」乃以刀決張,[四]道[五]從醉卒(直)隧[直]出。司馬與分背,袁盎解節毛懷之,[六]杖,步行七八里,明,見梁騎,騎馳去,[七]遂歸報。
사마가 말하기를 “신은 옛날에 종사가 되어 그대의 시비를 훔친 자입니다.” 했다. 원앙이 이에 놀라 사양하며 말하기를 “공은 요행히 부모가 생존해 있으니 내가 공을 연루시킬 수 없습니다.” 했다. 사마가 말하기를 “공께서 떠나시면 신이 또한 달아나 우리 부모를 피신시킬 것이니 군께서는 무슨 금심이십니까!” 했다. 이에 칼로 장막을 찢어 저치고 인도하여 취한 병사들 사이로 바로 나왔다. 사마와 나뉘어 등지고 가면서 원앙은 절모를 풀어 품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7, 8리를 가다 날이 밝았는데 양의 기병을 만나 말을 타고 달려 마침내 돌아가 보고하였다.
[一] 集解文穎曰:「婢也。」
[一] 【集解】 문영이 말하기를 “여종이다.” 했다.
[二] 集解文穎曰:「言汝有親老。」
[二] 【集解】 문영이 말하기를 “너에게는 늙은 부모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햇다.
[三] 集解如淳曰:「藏匿吾親,不使遇害也。」 索隱案:張晏云「辟,隱也。言自隱辟親,不使遇禍也」。
[三]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내 부모를 숨겨서 해침을 만나지 않게 한다.” 했다. 【索隱】 장안이 말하기를 “‘辟’는 숨음이다. 스스로 부모를 숨겨서 화를 만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했다.
[四] 集解音帳。索隱案:帳,軍幕也。決之以出也。
[四] 【集解】 음은 ‘帳’이다. 【索隱】 살펴보니 ‘帳’은 ‘軍幕’이다. 그것을 찢고 나오는 것이다.
[五] 集解如淳曰:「決開當所從亡者之道。」
[五]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마땅히 도망하는 자의 길을 찢어 연 것이다.” 했다.
[六] 集解如淳曰:「不欲令人見也。」
[六]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한 것이다.” 했다.
[七] 集解文穎曰:「梁騎擊吳楚者也。或曰得梁馬馳去也。
[七] 【集解】 문영이 말하기를 “양의 기병이 오, 초를 친 것이다. 어떤 자는 양의 말을 얻어 달려 간 것이다.” 했다.
吳楚已破,上更以元王子平陸侯禮為楚王,袁盎為楚相。嘗上書有所言,不用。袁盎病免居家,與閭里浮沈,相隨行,鬥雞走狗。雒陽劇孟嘗過袁盎,盎善待之。安陵富人有謂盎曰:「吾聞劇孟博徒,[一]將軍何自通之?」盎曰:「劇孟雖博徒,然母死,客送葬車千餘乘,此亦有過人者。且緩急人所有。夫一旦有急叩門,不以親為解,[二]不以存亡為辭,天下所望者,獨季心、劇孟耳。今公常從數騎,[三]一旦有緩急,寧足恃乎!」罵富人,弗與通。諸公聞之,皆多袁盎。
오를 깨트리고 나서 황제가 원왕의 아들 평륙후 예를 초왕으로 삼고 원앙을 초의 재상으로 삼았다. 일찍이 글을 올려 말한 바가 있으나 쓰여지지 않았다. 원앙이 병으로 관직을 면하고 집에 있었는데 마을 사람과 함께하여 서로 따라서 닭싸움, 개 경주를 하였다. 낙양의 극맹이 일찍이 원앙을 지나가자 원앙이 잘 대우하였다. 안릉의 부자가 위앙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극맹은 도박꾼인데 장군은 어찌하여 쓰로 그와 통합니까?” 했다. 원앙이 말하기를 “극맹이 비록 도박꾼이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 문상하는 객의 수레가 천여 대였으니 이 또한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느리고 급한 경우가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대저 하루아침에 급히 문을 두드릴 때 부모가 있다하여 (빗장을)풀지 않거나, 집에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거절하지 않으면서 천하가 우러르는 자는 계심과 극맹일 뿐입니다. 지금 공이 항상 몇몇 말탄 자를 따르게 하지만 하루아침에 느리고 급함이 있다면 정녕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부자를 욕하며 함께 통하지 않았다. 여러 공들이 그것을 듣고는 원앙을 칭송하는 이가 많았다.
[一] 集解如淳曰:「博盪之徒。」或曰博戲之徒。
[一]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노름하며 방탕한 무리이다.” 했다. 어떤 이는 “노름하며 희롱하는 무리”라 했다.
[二] 集解張晏曰:「不語云『親不聽』也。」瓚曰:「凡人之於赴難濟危,多以有父母為解,而孟兼行之。」 索隱案:謂不以親為辭也。今此云解者,亦謂不以親在而自解。
[二]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말하지 않고 말하기를 ‘어버이가 들어주지 않는다.’” 했다. 신찬이 “보통 사람은 어려움에 달려 나가고, 위태로움을 구제하는데 많이 부모가 살아 있는 것으로써 벗어남을 삼는데 극맹은 그것을 겸하여 행하였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부모 때문에 거절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 ‘解’라고 말한 것은 또한 부모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스스로를 풀지(핑계대지)않는 것을 말한다.
[三] 集解徐廣曰:「常,一作『詳』。」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常’은 한편 ‘詳’이라 쓰기도 한다.”
袁盎雖家居,景帝時時使人問籌策。梁王欲求為嗣,袁盎進說,其後語塞。[一]梁王以此怨盎,曾使人刺盎。刺者至關中,問袁盎,諸君譽之皆不容口。乃見袁盎曰:「臣受梁王金來刺君,君長者,不忍刺君。然後刺君者十餘曹,[二]備之!」袁盎心不樂,家又多怪,乃之棓生[三]所問占。還,梁刺客後曹輩果遮刺殺盎安陵郭門外。
원앙이 비록 집에 살았으나 경제가 때때로 사람을 시켜 계책을 물었다. 양왕이 후사를 구하고자 하니 원앙이 말을 올렸더니 그 후로는 말이 끊었다. 양왕이 이 때문에 원앙을 원망하여 사람을 시켜 원앙을 찌르게 했다. 자객이 관중에 이르러 원앙을 물으니 여러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여 모두 말이 모자랐다. 이에 원앙을 만나 말하기를 “신이 양왕에게 금을 받고 와서 그대를 찌르려 하였는데 그대는 장자여서 차마 그대를 찌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대를 찌르려는 자가 10여 명에 이르니 그것을 대비하소서!” 했다. 원앙이 마음으로 즐거워하지 않고, 집안이 또한 괴이한 일이 많아 이에 봉생이라는 점쟁이 에게 가서 점괘를 물었다. 돌아와 이어 오는 양의 자객의 무리들이 과연 안릉 곽문 밖에서 원앙을 막고 찔러 죽였다.
[一] 索隱按鄒氏云「塞」當作「露」,非也。案:以盎言不宜立弟之義,其後立梁王之語塞絕也。
[一] 【索隱】 살펴보니 추씨가 말하기를 “‘塞’은 마땅히 ‘露’라 써야 한다.” 했으나 잘못이다. 살펴보니 원앙이 동생을 세우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뜻을 말했더니 그 후 양왕을 세우자는 말이 끊어졌다.
[二] 集解如淳曰:「曹,輩也。」
[二]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曹’는 무리 이다.” 했다.
[三] 集解徐廣曰:「棓,一作『服』。」駰案:文穎曰「棓音陪。秦時賢士,善術者」。 索隱文穎云棓音陪。韋昭云棓,姓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棓’은 한편으로 ‘服’이라 쓴다.” 했다. 배인이 말하기를 “문영은 ‘棓의 음은 陪인데 진 나라 때 현명한 선비로 점을 잘 치는 자이다.’” 했다. 【索隱】 문영은 ‘棓’의 음은 ‘陪’이다. 했고, 위소는 ‘棓’은 성이다. 했다.
晁錯[一]者,潁川人也。學申商刑名於軹張恢先所,[二]與雒陽宋孟及劉禮同師。以文學為太常掌故。[三]]
조조는 영천 사람이다. 신불해와 상앙의 형명학을 지현의 장회 선생에게 배우고, 낙양의 송맹과 유례를 같이 스승으로 섬겼다. 문학으로 태상의 장고가 되었다.
[一] 索隱上音朝,下音厝,一如字讀。案:朝氏出南陽,今西鄂晁氏,謂子朝之後也。
[一] 【索隱】 위의 음은 ‘朝’이고, 아래 음은 ‘厝’ 글자와 같이 읽는다. 살펴보니 조씨는 남양에서 나왔으니 지금의 서악 조씨로 자조의 후예이다.
[二] 集解徐廣曰:「先即先生。」 索隱軹張恢生所。軹縣人張恢先生所學申商之法。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先’은 곧 선생이다.” 했다. 【索隱】 ‘軹張恢生所’는 지현 사람인 장회선생에게 신불해와 상앙의 법을 배웠다. 이다.
[三] 集解應劭曰:「掌故,百石吏,主故事。」 索隱服虔云「百石卒吏」。漢舊儀云「太常博士弟子試射策,中甲科補郎,中乙科補掌故」也。
[三] 【集解】 응소가 말하기를 “‘掌故’는 100석의 녹을 받는 관리로 옛 일을 주관한다.” 【索隱】 복건이 말하기를 “백석의 녹을 받는 卒吏이다.” 했다. 「한구의」에 “태상박사와 제자들이 활쏘기와 계책을 시험하여 중갑과는 낭에 보임하고, 중을과는 장고에 보임한다.” 했다.
錯為人陗直刻深。[一]孝文帝時,天下無治尚書者,獨聞濟南伏生故秦博士,治尚書,年九十餘,老不可徵,乃詔太常使人往受之。太常遣錯受尚書伏生所。[二]還,因上便宜事,以書稱說。詔以為太子舍人、門大夫、家令。[三]以其辯得幸太子,太子家號曰「智囊」。數上書孝文時,言削諸侯事,及法令可更定者。書數十上,孝文不聽,然奇其材,遷為中大夫。當是時,太子善錯計策,袁盎諸大功臣多不好錯。
조조의 사람됨은 강직하되 매우 각박하였다. 효문제 때 천하에 『상서』를 배운 자가 업었는데 오직 제남의 복생은 옛 진나라의 박사로 『상서』를 익혔으되 나이가 90여세로 늙어 부를 수 없어 조칙으로 태상이 가서 배우게 하였다. 태상이 조조를 복생이 있는 곳에 보내 『상서』를 배우게 했다. 돌아와서 효문제가 이용하는데 편리하도록 일컳는 말을 글로 써서 올렸다. 조칙으로 태자 사인, 문대부, 가령이 되었다. 그의 변론으로 태자의 사랑을 얻어 태자가에서 ‘지낭’이라 불렀다. 효문제 때 여러 번 글을 올려 제후를 깍는 일과 법령 중 고쳐 정할 만한 것을 말하였다. 글을 수 십번 올렸으되 효문제가 듣지 않았으나 그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옮겨 중대부를 삼았다. 이런 때를 당하여 태자는 조조가 계책을 잘 한다하였으나 원앙과 여러 큰 공신들은 많이 조조를 좋아하지 않았다.
[一] 集解韋昭曰:「術岸高曰峭。」瓚曰:「陗峻。」 索隱案:韋昭注本無「術」字。或云術,道路也。峭,七笑反。峭,峻也。
[一]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길의 언덕이 높은 것을 ‘峭(가파를 초)’라 한다.” 했다. 신찬은 “‘峭’는 가파르다 이다.”했다. 【集解】 살펴보니 위소가 주석한 본에는 ‘術’자가 없다. 어떤 이는 ‘術’은 도로라 한다. ‘峭’는 ‘七’과 ‘笑’의 反이다. ‘峭’는 가파름이다.
[二] 正義衛宏詔定古文尚書序云:「徵之,老不能行,遣太常掌故晁錯往讀之。年九十餘,不能正言,言不可曉,使其女傳言教錯。齊人語多與潁川異,錯所不知者凡十二三,略以其意屬讀而已也。」
[二] 【正義】 위굉조가 정한 『고문상서』 서에 ‘그를 불렀으되 늙어 갈수 없었기 때문에 태상장고 조조로 하여금 가서 그것을 읽게 하였다. 나이 90여세로 바로 말하지 못하고, 말을 깨달을 수 없어 그 딸로 하여금 말을 전하여 조조를 가르쳤다. 제 사람의 말이 많이 영천과 달라서 조조가 알지 못하는 것이 10개 중에 두, 셋이어서 대략적인 그 뜻으로 읽을 뿐이었다.
[三] 集解服虔曰:「太子稱家。」瓚曰:「茂陵書太子家令秩八百石。」
[三] 【集解】 복건이 말하기를 “태자가 가를 일컳었다.” 했다. 신찬이 “『무릉서』에 태자가령의 녹은 8백석이었다.” 했다.
景帝即位,以錯為內史。錯常數請閒言事,輒聽,寵幸傾九卿,[一]法令多所更定。丞相申屠嘉心弗便,力未有以傷。內史府居太上廟壖中,門東出,不便,錯乃穿兩門南出,鑿廟壖垣。[二]丞相嘉聞,大怒,欲因此過為奏請誅錯。錯聞之,即夜請閒,具為上言之。丞相奏事,因言錯擅鑿廟垣為門,請下廷尉誅。上曰:「此非廟垣,乃壖中垣,不致於法。」丞相謝。罷朝,怒謂長史曰:「吾當先斬以聞,乃先請,為兒所賣,固誤。」丞相遂發病死。錯以此愈貴。
경제가 즉위하여 조조를 내사로 삼았다. 조조가 평소에 여러 번 한가한 틈에 일을 말할 것을 청하니 문득 들어주었는데 총애가 9경보다 나았으며, 법령을 많이 바꾸어 정하였다. 승상 신도가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으나 힘이 해침은 없었다. 내사부는 태상의 사당 빈 터에 있어 동쪽 문으로 나와 편하지 않았는데 조조가 이에 두 문을 뚫고 남쪽으로 나오려하여 사당빈 터의 담장을 뚫었다. 승상 신도가가 듣고 크게 노하여 이 허물 때문에 조조를 죽일 것을 아뢰고자 하였다. 조조가 그것을 듣고 곧 밤에 틈을 청하여 갖추어 경제에게 말을 올렸다. 승상이 일을 아뢰어 조조가 사당의 담장을 함부로 뚫어 문을 삼았으니 정위에게 내려 죽일 것을 청하였다. 경제가 말하기를 “이는 사당의 담장이 아니라 사당 빈터의 담장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했다. 승상이 사죄하였다. 조정이 파하자 노하여 장사에게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먼저 머리를 베고 아뢰어야 하는데 먼저 청하여 어이에게 팔린바 되었으니 진실로 잘못 되었다.” 했다. 승상이 마침내 병이 들어 죽었다. 조조가 이에 더욱 귀하게 되었다.
[一] 集解徐廣曰:「九,一作『公』。」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九’는 한편으로 ‘公’이라 썼다.” 했다.
[二] 索隱上音乃戀反。謂牆外之短垣也。又音而緣反。正義上,人緣反。壖者,廟內垣外游地也。
[二] 【索隱】 위의 음은 ‘乃’와 ‘戀’의 反이다. 담장 밖의 짧은 담을 말한다. 또 음은 ‘而’와 ‘緣’의 反이다. 【正義】 위는 ‘人’과 ‘緣’의 反이다. ‘壖’은 사당 안 담 밖의 빈 땅을 말한다.
遷為御史大夫,請諸侯之罪過,削其地,[一]收其枝郡。奏上,上令公卿列侯宗室集議,莫敢難,獨竇嬰爭之,由此與錯有卻。錯所更令三十章,諸侯皆諠譁疾晁錯。錯父聞之,從潁川來,謂錯曰:「上初即位,公為政用事,侵削諸侯,別疏人骨肉,人口議[二]多怨公者,何也?」晁錯曰:「固也。不如此,天子不尊,宗廟不安。」錯父曰:「劉氏安矣,而晁氏危矣,吾去公歸矣!」遂飲藥死,曰:「吾不忍見禍及吾身。」死十餘日,吳楚七國果反,以誅錯為名。及竇嬰、袁盎進說,上令晁錯衣朝衣斬東市。
옮겨 어사대부가 되어 제후의 죄과로 그 땅을 깍고 그 주변 군을 거둘 것을 청하였다. 조조가 경제에게 아뢰면 경제는 공경, 열후, 종실로 하여금 모여 의논하게 하면, 감히 어렵다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두영만이 그것을 간쟁하니 이로 말미암아 조조와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조조가 고친 령 30장은 제후가 모두 떠들고 조조를 미워하였다. 조조의 아버지가 그것을 듣고 영천에서 와 조조에게 말하기를 “경제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공은 정사를 함에 전권을 행사하여 제후의 땅을 침범하고 깍으며, 사람들과 혈육을 이별하고 멀게 하니 사람들이 공을 많이 원망하는 말을 하고 의논하니 어찌된 것인가?” 했다. 조조가 말하기를 “진실입니다. 이 같지 않으면 천자가 존귀하지 않고, 종묘가 편안하지 않습니다.” 했다. 조조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유씨는 편안하나 조씨는 위태로우니 내가 공을 떠나 돌아갈 것이다!”하고는 마침내 약을 먹고 죽으며 말하기를 “나는 차마 화가 내 몸에 미치는 것을 볼 수 없다.” 했다. 죽은 지 10여일 후 오, 초 7국이 과연 배반하였는데 조조를 죽이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다. 두영과 원앙이 나아가 말을 올리니 경제가 조조로 하여금 朝衣(官服)를 입게하고 동시에서 베어 죽였다.
[一] 集解徐廣曰:「一云言景帝曰『諸侯或連數郡,非古之制,非久長策,不便,請削之』,上令公卿云云。」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일부가 경제에게 아뢰길 ‘제후가 혹 여러 군과 연결하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니고, 장구한 계책이 아니며, 편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깎기를 청하니 경제가 공경에게 이러저러하게 하라 한 것이다.
[二] 集解徐廣曰:「一作『讙』。」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 ‘讙(시끄러울 환)이라 쓰기도 한다.
晁錯已死,謁者僕射鄧公[一]為校尉,擊吳楚軍為將。還,上書言軍事,謁見上。上問曰:「道軍所來,[二]聞晁錯死,吳楚罷不?」鄧公曰:「吳王為反數十年矣,發怒削地,以誅錯為名,其意非在錯也。且臣恐天下之士噤口,[三]不敢復言也!」上曰:「何哉?」鄧公曰:「夫晁錯患諸侯彊大不可制,故請削地以尊京師,萬世之利也。計畫始行,卒受大戮,內杜忠臣之口,外為諸侯報仇,臣竊為陛下不取也。」於是景帝默然良久,曰:「公言善,吾亦恨之。」乃拜鄧公為城陽中尉。
조조가 죽은 후 알자복야 등공을 교위로 삼고 오, 초의 군대를 치는 장군으로 삼았다. 돌아와 글을 올려 군대의 일을 말하고 경제를 뵈었다. 경제가 묻기를 “군대를 거느리고 오는 길에 조조가 죽었음을 들었을 터인데 오, 초는 군대를 그쳤는가? 아닌가?” 했다. 등공이 말하기를 “오왕이 배반한 것은 수 십년입니다. 땅을 깍음에 대한 노함으로 인하여 조조를 죽이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으나 그뜻은 조조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은 천하 선비들이 입을 다물 것을 두려워하므로 감히 다시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경제가 말하기를 “왜인가?” 하니 등공이 “저 조조는 제후가 강대하져서 제재할 수 없음을 근심하였기 때문에 땅을 깍는 것으로서 경사(서울)를 높여 만대를 이롭게하는 것이었습니다. 계획을 처음 시행할 때 갑자기 죽어, 안으로는 충신의 입을 막고 밖으로는 제후를 위해 원수를 갚아주었으니 신은 가만히 폐하를 위해 취하지 말아야 했다고 여깁니다.” 했다. 이에 경제가 말없이 오래 있다가 말하기를 “공의 말이 좋습니다. 내가 또한 한스럽게 여깁니다.” 하고는 등공을 성양중위로 삼았다.
[一] 正義漢書作「鄧先」。孔文祥云名先。
[一] 【正義】 『한서』에는 “등선”이라 썼다. 공문상은 “이름이 先이다.” 했다.
[二] 集解如淳曰:「道路從吳軍所來也。」瓚曰:「道,由也。」
[二]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道’는 오의 군대로부터 오는 길이다.” 했다. 신찬은 “’道‘는 말미암음이다.” 했다.
[三] 索隱上音其錦反,又音其禁反。
[三] 【索隱】 위의 음은 ‘其’와 ‘錦’의 反이고, 또 음은 ‘其’와 ‘禁’의 反이다.
鄧公,成固人也,[一]多奇計。建元中,上招賢良,公卿言鄧公,時鄧公免,起家為九卿。一年,復謝病免歸。其子章以脩黃老言顯於諸公閒。
등공은 성고 사람으로 기이한 계책이 많았다. 건원 중에 무제가 어질고 선한 이를 부르자 공경이 등공을 말하였는데 이 때 등공이 면직되어 있었는데 집을 일으켜 9경이 되었다. 1년 후 다시 병을 핑계로 관직을 면하고 돌아갔다. 그 아들 장은 황노(노장사상)를 닦아 말로 여러 공들 사이에 드러났다.
[一] 正義梁州成固縣也。括地志云:「成固故城在梁州成固縣東六里,漢城固城也。」
[一] 【正義】 양주 성고현이다. 『괄지지』에 “성고 옛 성은 양주 성고현 동쪽 6리에 있는데 한나라 때 성고성이다.” 했다.
太史公曰:袁盎雖不好學,亦善傅會,仁心為質,引義慷慨。遭孝文初立,資適逢世。[一]時以變易,[二]及吳楚一說,說雖行哉,然復不遂。好聲矜賢,竟以名敗。晁錯為家令時,數言事不用;後擅權,多所變更。諸侯發難,不急匡救,欲報私讎,反以亡軀。語曰「變古亂常,不死則亡」,豈錯等謂邪!
태사공이 말하기를 “원앙은 비록 배움을 좋아하지 않고 또 도박을 좋아하였으나 어진 마음을 바탕삼아 의리를 이끌고 강개하였다. 효문제가 처음 즉위한 때를 만나 자질이 알맞은 세상을 만났다. 때는 변하고 바뀌니 오, 초를 한 번 유세하여 유세가 비록 행해졌으나 다시 이루지는 못하였다. 명성을 좋아하고 현명함을 자랑하였으나 마침내 명성 대문에 무너졌다. 조조는 가령이 되었을 때 여러 번 일을 말하여 쓰여지지 않았고, 후에 권세를 함부로하여 많이 변경된 바가 있었다. 제후들이 이반할 때 급히 바로잡아 구원하지 않고 사사로운 원수를 갚고자 하다 도리어 몸을 잃었다. 속담에 ‘옛 것을 변화시키고 떳떳한 도리를 어지럽히면 죽지 않으면 망한다.’ 했다. 어찌 조조 등을 말한 것이 아닐까!” 했다.
[一] 集解張晏曰:「資,才也。適值其世,得騁其才。」
[一]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資’는 재주이다. 그 세상을 적절히 맞닥트려 그 재주를 펼 수 있는 것이다.” 했다.
[二] 集解張晏曰:「謂景帝立。」
[二]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경제가 즉위한 것을 말한다.” 했다.
【索隱述贊】袁絲公直,亦多附會。攬轡見重,卻席翳賴。朝錯建策,屢陳利害。尊主卑臣,家危國泰。悲彼二子,名立身敗!
【索隱述贊】 원사는 공정하고 곧아, 또 많이 남이 따랐다. 고삐를 잡아 중함을 드러내고, 자리를 물리쳐 이득을 가렸다. 조조가 계책을 세워 여러 번 이로움과 해침을 진열하였다.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어 가는 위태로웠으나 나라는 편안했다. 슬프다 저 두 사람이여 이름은 세웠으되 몸은 무너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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