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七回:討魏國武侯再上表,破曹兵姜維詐獻書
제97회 무후(제갈공명)는 위나라를 토벌하는 표를 다시 올리고, 조씨의 군대를 깨트리려 강유는 속이는 글을 바치다.
卻說蜀漢建興六年秋九月,,魏都督曹休被東吳陸遜大破於石亭,車仗馬匹,軍資器械,並皆罄盡。休惶恐之甚,氣憂成病,到洛陽,疸發背而死,魏主曹叡敕令厚葬。司馬懿引兵還。眾將接入問曰:「曹都督兵敗,即元帥之干係,何故急回耶?」懿曰:「吾料諸葛亮知吾兵敗,必乘虛來取長安。倘隴西緊急,何人救之?吾故回耳。」眾皆以為懼怯,晒笑而退。卻說東吳遣使致書蜀中,請兵伐魏,並言大破曹休之事;一者顯自己威風,二者通和會之好。
각설하고 촉한 건흥 육년 가을 구월 위나라 도독 조휴는 동오 육손에게 석정에서 크게 깨트려져 수레, 말, 군자금, 기계를 모두 잃었다. 조휴는 놀라고 두려워함이 심하고, 근심이 병이 되어 낙양에 이르자 황달이 등에 발생하여 죽으니 위나라 임금 조예가 후하게 장례할 것을 명령하였다. 사마의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여러 장수들이 맞아 들어 가 물어 말하기를 “조 도독의 군대가 패한 것은 곧 원수와 관계가 있는데 무슨 이유로 급히 돌아 오셨습니까?”했다. 사마의가 말하기를 “내가 보건데 제갈공명이 우리의 군대가 패하였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빈틈을 타고 와 장안을 취할 것이다. 만약 농서가 위급해지면 누가 구하겠는가? 내가 그래서 돌아왔을 뿐이다.”했다. 무리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겁낸다 여기고 비웃으며 물러갔다. 각설하고 동오는 사신을 보내 글을 가지고 촉에 이르러 군대로 위나라를 칠 것을 청하고 아울러 크게 깨트린 조휴의 일을 말하였는데 첫째는 지기의 위풍을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는 화해하고우호를 통하는 것이었다.
後主大喜,令人持書至漢中,報知孔明。時孔明兵強馬壯,糧草豐足,所用之物,一切完備,正要出師;聽知此信,即設宴大會諸將,計議出師。忽一陣大風,自東北角上而起,把庭前松樹吹折,眾皆大驚。孔明就占一課,曰:「此風主損一大將!」諸將未信。正飲酒間,忽報鎮南將軍趙雲長子趙統、次子趙廣來見。孔明大驚,擲杯於地曰:「子龍休矣!」二子入見,拜哭曰:「某父昨夜三更病重而死。」孔明跌足而哭曰:「子龍身故,國家損一棟樑,去吾一臂也!」眾將無不揮淚。孔明令二子入成都面君報喪。後主聞雲死,放聲大哭曰:「朕昔年幼,非子龍則死於亂軍之中矣!」即下詔追贈大將軍,諡順平侯,敕葬於成都錦屏山之東;建立廟堂,四時享祭。後人有詩曰:
후주가 크게 기뻐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글을 가지고 한중에 이르러 제갈공명에게 알리게 하였다. 그 때 제갈공명은 군대는 강해지고 말은 튼튼하고, 식량과 말먹이 풀이 풍족하여 쓰는 바의 물건 일체를 완전하게 갖추어 군대를 내려하다 이 소식을 듣고 곧 연회를 베풀고 크게 여러 장수를 모아 군대를 내는 일을 의논하였다. 홀연히 한바탕 큰 바람이 동북쪽 모퉁이로부터 일어나 뜰 앞의 소나무에 불어 (소나무를)꺽으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제갈공명이 점을 쳐보고는 말하기를 “이 바람은 한 대장을 잃을 징조이구나!”했다. 여러 장수들이 믿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있을 때 홀연히 진남장군 조운(조자룡)의 장자 조통, 차자 조광이 와서 뵈려한다고 보고하였다. 제갈공명이 크게 놀라 술잔을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자룡이 죽었구나!”했다. 두 아들이 들어와 뵙고 절하고 곡하며 말하기를 “저의 아버지가 지난 밤 삼경에 병이 중해져 죽었습니다.”했다. 제갈공명이 발을 구르며 곡하고 말하기를 “자룡(조자룡)이 죽은 것은 국가의 한 동량을 잃은 것이고, 나의 한 팔을 잃은 것이다.”했다. 여로장수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제갈공명이 두 아들로 하여금 성동에 들어 가 임금(후주)을 뵙고 초상을 보고하게 하였다. 후주가 조운(조자룡)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소리내어 크게 곡하며 말하기를 “짐이 옛날 어렸을 때 자룡(조자룡)이 아니었다면 곧 난군 안에서 죽었을 것이다!”하고는 곧 명을 내려 대장군을 추증하고 시호를 순평후라 하고, 성도 금병산 동쪽에 장례하고, 사당을 세워 사시로 제사하게 했다. 후세 사람이 시를 남겨 말하기를
常山有虎將,智勇匹關、張。漢水功勳在,當陽姓字彰。兩番扶幼主,一念答先皇。清史書忠烈,應流百世芳。
상산에 무장이 있으니 지혜와 용맹은 관우와 장비에 짝하네. 한수에서 공을 세우고, 당양에서 성과 이름을 드러내었다. 두 번 어린 임금을 돕고 한 마음으로 선황(유현덕)에게 보답하였다. 역사에 충열을 기록하니 백 세대에 꽃다운 이름 흐른다.
卻說後主思念趙雲昔日之功,祭葬甚厚,封趙統為虎賁中郎將,趙廣為牙門將,就令守墳,二人辭謝而去。忽近臣奏曰:諸葛丞相將軍馬分撥已,定即日將出師伐魏。後主問在朝諸臣,諸臣多言未可輕動。後主疑慮未決。忽奏丞相令楊儀齎「出師表」至。後主宣入,儀呈上表章。後主就御案上拆開視之。其表曰:
각설하고 후주는 조운(조자룡)의 옛날 공을 생각하고는 제사와 장례를 매우 후하게 하고, 조통을 봉해 호분중랑장을 삼고, 조광은 아문장으로 삼아 무덤을 지키게 하니 두 사람이 감사 말을 하고 갔다. 홀연히 근신이 아뢰어 말하기를 “제갈 승상이 군마를 배정하고 날을 정해 군대를 내어 위나라를 치려합니다.”했다. 후주가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여러 신하들이 많이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후주가 주저하며 결정하지 못하였다. 홀연히 승상(제갈공명)이 양의를 시켜 ‘출사표’를 가지고 이르렀다고 아뢰었다. 후주가 들어오게 하니 양의가 표장을 올렸다. 후주가 책상에 가 봉투를 찢고 보았다. 그 표에 말하기를
先帝慮漢賊不兩立,王業不偏安,故託臣以討賊也。以先帝之明,量臣之才,故知臣伐賊,才弱敵強也。然不伐賊,王業亦亡。惟坐而待亡,孰與伐之,是以託臣而弗疑也。
선제(유현덕)께서 한나라의 도적과 양립할 수 없고, 왕업이 두루 편안하지 못함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신에게 적을 토벌할 것을 부탁 하셨습니다. 선제의 밝음으로서 신(제갈공명)의 재능을 헤아려보시고 신이 적(위나라)을 토벌하려해도 재능은 약하고 적은 강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적(위나라)을 토벌하지 않으면 왕업 또한 망할 것입니다. 오직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린다면 누구와 더불어 위나라를 토벌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에게 부탁하시어 의심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臣受命之日,寢不安席,食不甘味。思惟北征,宜先入南;故五月渡瀘,深入不毛,並日而食,臣非不自惜也。顧王業不可偏安於蜀都,故冒危難以奉先帝之遺意,而議者謂為非計。今賊適疲於西,又務於東,兵法乘勞,此進趨之時也。謹陳其事如左:高帝明並日月,謀臣淵深,然涉險被創,危然後安;今陛下未及高帝,謀臣不如良、平,而欲以長策取勝,坐定天下:此臣之未解一也。
신이 명을 받은 날 잠을 자도 자리가 편안하지 않았고, 밥을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북쪽을 정벌하는 것을 생각하고 먼저 남쪽으로 들어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월에 노수를 건너 깊이 불모의 땅에 들어 가 이틀에 하루분의 밥을 먹은 것은 신이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업을 돌아보니 촉도에서 편안히 있는 것을 만족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위태롭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제께서 남기신 뜻을 받들어야 하고 의논하는 자들의 말은 계책이 아닙니다. 지금 도적이 서쪽에서 피로해지고, 또 동쪽에서 힘을 썼으니 병법에 ‘수고로움을 타라’ 했으니 이는 달려 나갈 때입니다. 삼가 그 일을 아래와 같이 진술합니다. “고제(한나라 고조)께서는 밝기로는 해와 달을 아우르고 신하는 재능과 학식이 매우 깊었으나 험함을 건너고 상처를 입어 위태로운 후에 편안해졌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고제(한나라 고조)에 미치지 못하고 신하는 장량, 진평과 같지 않음에도 긴 계책으로 이기시려하지 않고 앉아서 천하를 평정하려 하십니다. 아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첫 번째 입니다.
劉繇、王朗各據州。論安言計,動引聖人,群疑滿腹,眾難塞胸;今歲不戰,明年不征,使孫權(策)坐大,遂併江東:此臣之未解二也。
유요와 왕랑이 각각 주를 근거로 하여 안정을 논하고 계책을 말하여 성인을 움직이게 하였으나 여러 사람의 의심은 배에 가득 차고, 무리들의 가슴을 막기 어려웠습니다. 금년에는 싸우지 않고, 내년에도 정벌하지 않아 손권(책)으로 하여금 저절로 세력이 커지게 하여 마침내 강동을 병합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이해하지 못하는 두 번째입니다.
曹操智計,殊絕於人,其用兵也,彷彿孫吳;然困於南陽,險於烏巢,危於祁連,逼於黎陽,幾敗北山,殆死潼關,然後偽定一時耳。況臣才弱,而欲以不危而定之,此臣之未解三也。
조조는 지혜와 계책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그 군대 운용은 손자, 오자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남양에서 어려움에 처하였고, 오소에서 험함을 당하였고, 기련에서 위태로웠으며 여양에서 핍박을 당하였으며 북산에서 위태하고 패하였으며, 동관에서 거의 죽을 뻔 한 후에 잠시 안정되었을 뿐입니다. 하물며 신은 재능이 약하지만 위태롭지 않게 평정하려 하였으니 이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 번 째입니다.
曹操五攻昌霸不下,四越巢湖不成。任用李服,而李服圖之;委任夏侯,而夏侯敗亡。先帝每稱操為能,猶有此失,況臣駑下,何能必勝?此臣之未解四也。
조조는 다섯 번 창패를 공격하고도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네 번 소호를 넘었으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복을 임용하였는데 이복은 그(조조)를 도모하려하였고, 하후연에게 위임하였으나 하후연은 패하고 죽었습니다. 선제(유현덕)께서 매번 조조가 유능하다고 칭찬하셨는데도 오히려 이런 잘못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신은 재주가 없고 미련하니 어찌 반드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네 번째입니다.
自臣到漢中,中間期年耳。然喪趙雲、陽群、馬玉、閻芝、丁立、白壽、劉郃、鄧銅等,及曲長屯將七十餘人。突將無前,賓叟青姜,散騎武騎一千餘人。此皆數十年之內,所糾合四方之精銳,非一州之所有。若復數年,則損三分之二也。當何以圖敵?此臣之未解五也。
신이 한중에 이르고부터 일 년 사이일 뿐이었으나 조운(조자룡), 양군, 마옥, 염지, 정립, 백수, 유합, 등동 등과 곡장, 둔잔 칠십여 명을 잃었습니다. 돌장, 무전, 빈수, 청강, 산기, 무기 천여 명을 잃었습니다. 이는 모두 수십 년 안에 모았던 사방의 정예로 한 주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다시 몇 년이면 곧 삼분의 이를 잃을 것이니 무엇을 가지고 적을 도모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다섯 번 째입니다.
今民窮兵疲,而事不可息;事不可息,則住與行,勞費正等;而不及早圖之,欲以一州之地,與賊持久:此臣之未解六也。
지금 백성들은 궁핍하고 군대는 피로하지만 일을 쉴 수 없습니다. 일을 쉴 수 없으면 곧 머무는 것과 가는 것은 수고와 비용이 같아지는데도 빨리 그들을 도모함에 이르지 못하고 한 주의 땅을 가지고 적과 오래 싸우려합니다. 이는 이해하지 못하는 여섯 번 째입니다.
夫難平者,事也。昔先帝敗軍於楚,當此之時,曹操拊手,謂天下已定。然後先帝東連吳越,西取巴蜀,舉兵北征,夏侯授首。此操之失計,而漢事將成也。然後吳更違盟,關羽毀敗,秭歸蹉跌,曹丕稱帝。凡事如是,難可逆料。臣鞠躬盡瘁,死而後已,至於成敗利鈍,非臣之明所能逆竟睹也。
대저 평정(평론)하기 어려운 것이 일입니다. 옛날 선제께서 초에서 군대가 패하는 일을 당하였을 때 조조는 손뼉을 치면서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선제께서 동쪽으로 오월과 연결하여 서쪽으로 파촉을 취하고, 군대를 동원해 북쪽을 정벌하여 하후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이는 조조의 잘못된 계책으로 한나라의 일이 달차 이루어지려 했습니다. 그런 후 오나라가 다시 동맹을 어기자 관우(관운장)는 죽고, 자귀에서 실패하니 조비가 황제를 일컬었습니다. 무릇 일이 이 같아서 거슬러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신은 몸과 성의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죽은 후에야 그치겠습니다. (일의)성패와 이둔(날카로움과 무딤)에 이르러서는 신이 능히 밝게 맞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신이 예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後主覽表甚喜,即敕令孔明出師。孔明受命,起三十萬大兵,令魏延總督前部先鋒,逕奔陳倉道口而來。
후주가 표 보기를 마치고 매우 기뻐하며 곧 제갈공명에게 군대 동월할 것을 명령하였다. 제갈공명이 명령을 받고 삼십만 대군을 일으켜 위연으로 하여금 앞 부대 선봉을 총 감독하게 하고 바로 진장길 입구로 달려가게 하였다.
早有細作報入洛陽。司馬懿奏知魏主,大會文武商議。大將軍曹真出班奏曰:「臣昨守隴西,功微罪大,不勝惶恐。今乞引大軍往擒諸葛亮。臣近得一員大將,使六十斤大刀,騎千里征원獂(左馬右宛)馬,開兩石鐵胎弓,暗藏三個流星鎚,百發百中;有萬夫不當之勇。乃隴西狄道人;姓王,名雙,字子全。臣保此人為先鋒。」
빠르게 세작(첩자)이 낙양에 들어 가 보고하였다. 사마의가 위나라 임금에게 아뢰고 문무관을 크게 모아 상의하였다. 대장군 조진이 열에서 나와 아뢰어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농서를 지켰는데 공은 미미하고 죄는 커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대군을 이끌고 가 제갈량(제갈공명)을 사로잡기를 천합니다. 신이 최근에 한 명의 대장을 얻었는데 육십근 큰 칼을 사용하고 말을 타면 천리를 가는 정완마를 타고 두 석 철태궁을 당길 수 있고, 유성추 세 개를 숨겼는데 백 개를 던지면 백 개를 맞추어 만 명이 당해내지 못하는 용맹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농서 적도 사람인데 성은 왕씨이고, 이름은 쌍이며 자는 자전입니다. 신이 이 사람을 보증하여 선봉으로 삼으려합니다.”했다.
叡大喜,便召王雙上殿。視之,身長九尺,面黑晴黃,熊腰虎背。叡笑曰:「朕,得此大將,有何慮哉!」遂賜錦袍金甲,封為虎威將軍前部大先鋒。曹真為大都督。真謝恩出朝,遂引十五萬精兵,會合郭淮、張郃分道把守隘口。
조예가 크게 기뻐하며 곧 왕쌍을 불러 전각에 오르게 하였다. 그를 보니 키가 구척인데 얼굴은 검고 눈동자는 누르며 곰의 허리에 범의 등을 하고 있었다. 조예가 웃으며 말하기를 “짐이 이 대장을 얻었으니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하고는 마침내 비단 포와 금 빛 갑옷을 내리고 봉하여 호(무)위장군 전부 대선봉으로 삼았다. 조진을 대도독으로 삼았다. 조진이 은혜에 감사하고 조정을 나와 마침내 십오만 정병을 이끌고 곽회, 장합을 모아 길을 나누어 좁은 입구를 지켰다.
卻說蜀兵前隊哨至陳倉,回報孔明,說「陳倉道口已築起一城,內有一將郝昭把守,深溝高壘,遍排鹿角,十分謹嚴;不如棄了此城,從太白嶺鳥道出祁山甚便。」孔明曰:「陳倉正北是街亭,必得此城,方可進兵。」命魏廷引兵到城下,四面攻之。連日不能破,魏延復來告孔明,說城難破。孔明大怒,欲斬魏延。忽帳下一人告曰:「某雖無才,隨丞相多年,未嘗報效。願去陳倉城中,說郝昭來降,不用張弓隻箭。」
각설하고 촉의 군대 앞 부대 정찰병이 진창에 이르고는 돌아 가 제갈공명에게 보고하여 말하기를 “진창 입구에는 이미 한 성을 쌓아 올리고, 성 안에서 한 장수 인 학소가 지키는데 구(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두루 녹각을 배열하였는데 완전히 신중하고 엄밀합니다. 이 성을 버리고 태백령 오도를 따라 기산으로 나가는 것이 낫고 매우 편합니다.”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진창 정 북쪽은 가정으로 반드시 이 성을 얻어야 비로소 진군할 수 있다.”하고는 위연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성 아래에 이르러 사방에서 공격하게 하였다. 연일 공격하였으나 깨트리지 못하자 위연이 다시 제갈공명에게 가 성을 깨트리기 어려움을 말하였다. 제갈공명이 크게 노하여 위연의 머리를 베려 하였다. 홀연히 군막 아래서 한 사람이 고하여 말하기를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승상을 따른 것이 여러 해이나 일찍이 갚지를 못하였습니다. 진창성 안으로 가서 학소를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기를 원하며, 활과 화살을 쓰지 않겠습니다.”했다.
眾視之,乃部曲鄞祥也。孔明曰:「汝用何言以說之?」詳曰:「郝昭與某同是隴西人氏,自幼交契。某今到彼,以利害說之,必來降矣。」孔明即令前去。鄞祥驟馬,逕到城下叫曰:「郝伯道故人鄞祥來見。」城上人報知郝昭。昭令開門放入,登城相見。昭問曰:「故人因何到此?」祥曰:「吾在西蜀孔明帳下,參贊軍機,待以上賓之禮。特令某來見公,有要言相告。」昭勃然變色曰:「諸葛亮乃我國之讎敵也!吾事魏,汝事蜀,各事其主!昔時為昆仲,今時為讎敵!汝再不必多言,便請出城!」
무리가 그를 보니 곧 부곡 은상이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너는 무슨 말로서 나를 설득하겠는가?”하니 은상이 말하기를 “학소와 저는 농서 사람인 씨로 어려서부터 사귀었습니다. 제가 지금 거기에 이르러 이해를 가지고 설득하면 반드시 와서 항복할 것입니다.”했다. 제갈공명이 곧 앞으로 가게 하였다. 은상이 말을 달려 재빨리 성 아래에 이르러 외쳐 말하기를 “학백도(학소)의 치구 은상이 와 만나려한다.”했다. 성 위의 사람이 학소에게 보고하였다. 학소가 성문을 열고 놓아 들어오게 하고는 성에 올라 서로 보았다. 학소가 물어 말하기를 “친구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이르렀는가?”하니 은상이 말하기를 “나는 서촉 제갈공명 휘하에 있으면서 군사에 관한 일을 도우며 상빈의 예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특히 저로 하여금 와서 공(학소)을 뵙고 긴요한 말로 알릴 것이 있습니다.”했다. 학소가 갑자기 얼굴색을 바꾸며 말하기를 “제갈공명은 우리나라의 원수이다! 나는 위나라를 섬기고, 너는 촉을 섬겨 각자 그 임금을 섬긴다! 옛날에는 곤중(형제)을 위하고, 지금은 원수를 위하는구나! 너는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니 곧 성을 나가기를 청한다!”했다.
鄞祥又欲開言,昭已出敵樓上了。魏兵急催上馬,趕出城外。祥回頭視之,見昭立定護心木欄干。祥勒馬以鞭指之曰:「伯道賢弟,何太情薄耶?」昭曰:「魏國法度,兄所知也,吾受國恩,但有死而已。兄不必下說詞,早回見諸葛亮,教快來攻城,吾不懼也!」祥回告孔明曰:「郝昭未等某開言,就先阻卻。」孔明曰:「汝可再去見他,以利害說之。」祥又到城下,請郝昭相見。昭出到敵樓上。祥勒馬高叫曰:「伯道賢弟,聽吾忠言。汝據守一孤城,怎拒數十萬之眾?今不早降,後悔無及,且不順大漢而事奸魏,抑何不知天命,不辨清濁乎?願伯道思之。」
은상이 또 말하고자 하였으나 학소는 이미 적루에서 나간 뒤였다. 위나라 군대가 급히 말에 오를 것을 재촉하여 쫓아 성 밖으로 나갔다. 은상이 머리를 돌려 그를 보니 학소가 호심목 난간에 바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은상이 말고삐를 당기며 채찍으로 가리켜 말하기를 “백도(학소) 동생은 어찌 크게 정이 박한가?”하니 학소가 말하기를 “위나라 법도를 형도 알고 있고, 나는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다만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형은 말할 필요 없이 일찍 돌아 가 제갈공명을 만나 빨리 와 성을 공격하게 하라.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했다. 은상이 돌아 와 제갈공명에게 알려 말하기를 “학소는 제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막았습니다.”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너는 다시 가 그를 뵙고 이해를 가지고 설득해 보라.”하니 은상이 또 선 아래에 이르러 학소와 만나기를 청하였다. 학소가 적루에 이르렀다. 은상이 말고삐를 당기고 크게 외쳐 말하기를 “백도(학소) 동생은 나의 충언을 들으시오. 너는 하나의 외로운 성에 기대 어찌 수십만의 무리를 막으려 하십니까? 지금 빨리 항복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대 한나라를 따르지 않고 간사한 위나라를 섬기니 어찌 천명을 알지 못하고, 맑음과 흐림을 분별하지 못하십니까? 원하건데 백도(학소)는 그것을 생각하십시오.”했다.
郝昭大怒,拈弓搭箭,指鄞祥而喝曰:「吾前言已定,汝不必再言,可速退,吾亦不射汝!」鄞祥回見孔明,具言郝昭如此光景。孔明大怒曰:「匹夫無禮太甚!豈欺吾無攻城之具耶?」隨叫土人問曰:「陳倉城中多少人馬?」土人告曰:「雖不知的數,約有三千人。」孔明笑曰:「量比小城,安能禦我!休等他救兵到,火速攻之!」
학소가 크게 노하여 활을 잡아 화살을 걸고 은상을 가리키며 외쳐 말하기를 “나는 앞의 말이 이미 정해졌으니 너는 두말할 필요가 없으니 속히 물러나면 나는 또한 너를 쏘지 않을 것이다.”했다. 은상이 돌아 가 제갈공명을 만나 학소의 이 같은 광경을 모두 말하였다. 제갈공명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필부가 무례함이 너무 심하구나! 나에게 성을 공격하는 도구가 없다고 업신여기는가?”하고는 따르던 토인(현지인)에게 외쳐 말하기를 “진창성 안에 인마가 얼마나 있는가?”했다. 토인(현지인)이 고하여 말하기를 “비록 정확한 수를 알지 못하나 약 삼천 명이 있습니다.”했다. 제갈공명이 웃으며 말하기를 “작은 성을 가지고 어찌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구원병이 이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불이 번지는 것처럼 빠르게 공격하라!”했다.
於是軍中起百乘雲梯。一乘上可立十數人,週圍用木板遮護。軍士各把短梯軟索,聽軍中擂鼓,一齊上城。郝昭在城上望見蜀兵裝起雲梯,四面而來,即令三千軍各執火箭,分佈四面;待雲梯近城,一齊射之。次日,又四面鼓噪吶喊而進。郝昭急命運石鑿眼,用葛索穿定飛打,衝車皆被打折。孔明又令人運土填城壕,教廖化引三千鍬钁軍,從夜間掘地道,暗入城去。郝昭又於城中掘重壕橫截之。如此晝夜相攻,二十餘日,無計可破。
이에 군중에서 백 개의 공성용 사다리를 일으켰다. 한 대 위에는 수십 명이 설 수 있는데 둘레는 나무판자를 써 보호하였다. 군사들이 각각 짧은 사다리와 부드러운 새끼줄을 잡고 군중의 북이 울리는 것을 듣고 일제히 성에 올랐다. 학소는 성 위에서 촉의 군대가 사다리를 일으키고 사방에서 오는 것을 보고는 곧 삼천의 군대롤 하여금 각각 불화살을 잡아 사방으로 나누게 하고 사다리가 성에 가까워지기를 기다려 일제히 쏘게 하였다. 다음 날 또 사방에서 북소리와 함성이 울리며 진군했다. 학소는 급히 돌을 운반해 구멍을 뚫고는 칡 끈으로 꿰어 날려 치게 하니 수레가 부딪혀 모두 부서졌다. 제갈공명이 또 사람들로 하여금 흙을 운반하여 성의 해자를 메꾸게 하고, 요화로 하여금 삼천의 초곽군을 이끌고 밤사이에 땅굴을 파고 몰래 성에 들어가게 하였다. 학소가 또한 성 안에서 깊은 구덩이를 가로로 파 그것을 끊었다. 이 같이 밤낮으로 공격하기를 이십여일 하였으나 (성을) 깨트릴 수 있는 계책이 없었다.
孔明心中憂悶。忽報:「東邊救兵到了,旗上大書魏先鋒大將王雙」。孔明問曰:「誰可迎之?」魏延曰:「某願往。」孔明曰:「汝乃先鋒大將,未可輕出。」又問:「誰敢迎之?」裨將謝雄應聲而出。孔明與三千軍去了。孔明又問曰:「誰敢再去?」裨將龔起應聲要去。孔明亦與三千軍去了。孔明恐城內郝昭引兵衝出乃把人馬退二十里下寨。
제갈공명이 마음속으로 근심하였다. 홀연히 “동쪽에서 구원병이 이르렀는데 깃발에 크게 ‘위선봉대장왕쌍’이라 쓰여 있습니다.”하고 보고 했다. 제갈공명이 물어 말하기를 “누가 맞이할 수 있는가?”하니 위연이 말하기를 “제가 가기를 원합니다.”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너는 곧 선봉대장이니 가벼이 나가서는 안 된다.”하고는 도 묻기를 “누가 감히 맞이하겠는가?”하니 비장 사운이 대답하며 나왔다. 제갈공명이 삼천의 군대를 주어 가게 했다. 제갈공명이 또 물어 말하기를 “누가 감히 다시 가겠는가?”하니 비장 공기가 대답하며 가기를 청하였다. 제갈공명이 또 삼천의 군대를 주어 가게 했다. 제갈공명은 성 안에서 학소가 군대를 이끌고 치고 나올 것을 두려워하여 인마를 삼십리 물려 영채를 세웠다.
卻說謝雄引軍前行,正遇王雙;戰不三合,被雙一刀劈死。蜀兵敗走。雙隨後趕來。龔起接者,交馬只三合,亦被雙所斬。敗兵回報孔明。孔明大驚,忙令廖化、王平、張嶷三人出迎。兩陣對圓,張嶷出馬。王平、廖化壓住陣角。王雙縱馬,來與張嶷交馬數合,不分勝負。雙詐敗便走,嶷隨後趕去。王平見張嶷中計,忙叫曰:「休趕!」
각설하고 사웅은 군대를 이끌고 앞으로 행군하여 바로 왕쌍을 만나 싸운지 삼합에 왕쌍의 한 칼에 베어져 죽었다. 촉의 군대가 패하여 달아났다. 왕쌍이 뛰를 따라 왔다. 공기가 맞이해 말이 교차한지 삼합에 또 베인 바되어 죽었다. 패한 군대가 돌아 와 제갈공명에게 보고하였다. 제갈공명이 크게 놀라 합급히 요화, 왕평, 장의 세 사람으로 하여금 나가 맞이하게 하였다. 두 진영이 둥글게 마주하자 장의가 말을 타고 나왔다. 왕평, 요화는 진영 모퉁이를 억제하였다. 왕쌍이 말을 달려 와 장의와 말을 교차하며 싸운 지 몇합하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왕쌍이 거짓으로 패한 척 달아나니 장의가 뒤를 따라 갔다. 왕평은 장의가 계책에 빠지는 것을 보고 황망히 외쳐 말하기를 “좇지 말라!”했다.
嶷急回馬時,王雙流星鎚早到,正中其背。嶷伏鞍而走,雙回馬趕來。王平、廖化截住,救得張嶷回陣。王雙驅兵大殺一陣,蜀兵折傷甚多,嶷吐血幾口,回見孔明,說:「王雙英雄無敵。如今二萬兵就陳倉城外下寨,四面立起排柵,築起重城,深挖濠塹,守禦甚嚴。」
장의가 급히 말을 돌릴 때 왕쌍이 유성추로 재빨리 날려 그 들을 맞추었다. 장의가 말안장에 엎드려 달아나니 왕쌍이 말을 돌려 쫓아 왔다. 왕평, 요화가 귾어 막고 장의를 구하여 진으로 돌아 왔다. 왕쌍은 군대를 몰아 크게 한바탕 죽이니 촉의 군대가 죽고 다친 이가 매우 많았다. 장의가 몇 번 입으로 피를 토하고 돌아 와 제갈공명을 뵙고 말하기를 “왕쌍을 영웅으로 대적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만의 군대가 나아가 진창성 아래 진을 치고, 사방에 목책을 일으켜 세워 두터운 성을 쌓고 깊이 해자를 파고 지키기를 매우 엄중하게 합니다.”했다.
孔明見折二將,張嶷又被打傷,即喚姜維曰:「陳倉道口,這條路不可行,別有何策?」維曰:「陳倉城池堅固,郝昭守禦甚密;又得王雙相助,實不可取。不若令一大將,依山傍水,下寨固守;可抓(孤)曹真也。」
제갈공명은 두 장수가 꺽이고, 장의가 또한 맞아 다친 것을 보고는 곧 강유를 불러 말하기를 “진창 길 입구 저 갈래길로 갈 수 없으니 따로 무쓴 계책이 있는가?”하니 강유가 말하기를 “진창성과 해자가 견고하고, 학소가 엄밀하게 지키며, 또 왕쌍의 도움을 얻었으니 진실로 취할 수 없습니다. 한 대장으로 하여금 산에 의지하고 물을 옆에 하여 영채를 만들고 굳게 지키게 하여 조진을 끍어내는(고립시키는)것이 낫습니다.”했다.
孔明從其言,即令王平、李恢引二千兵守街亭小路;魏延引一兵守陳倉口。馬岱為先鋒,關興、張苞為前後救應使。從小徑出斜谷,望祁山進發。
제갈공명이 그 말을 따라 곧 왕평, 이회로 하여금 이천의 군대를 이끌고 가정의 작은 길을 지키게 하고, 위연은 한 군대를 이끌고 진창의 입구를 지키게 하였다. 마대를 선봉으로 삼고, 관흥, 장포는 전후구응사로 삼고, 작은 길을 따라 사곡으로 나와 기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卻說曹真因思前番被司馬懿奪了功勞,因此到洛口分調郭淮、孫禮東西把守;又聽得陳倉口告急,已令王雙去救,聞知王雙斬將立功,大喜,乃令中護軍大將費耀,權攝前不(部)總督,諸將各自把守譯口。忽報山谷中捉得細作來見。曹真令押入,跪於帳下。其人告曰:「小人不是奸細,乃有機密來見都督,誤被伏路軍捉來,乞退左右。」真乃去其縛,左右暫退。其人告曰:「某乃姜伯約心腹人也,蒙本官遣送密書。真曰:「書安在?」其人於貼肉衣內取出呈上,真拆視之,曰:
각설하고 조진은 앞서 사마의에게 공로를 빼앗긴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낙구에 이르러 곽회와 손례를 동서로 나누어 지키게 하고, 또 진창 입구가 급하다는 것을 듣고 왕쌍으로 하여금 가서 구원하게 하였는데 왕쌍이 장수를 베어 공을 세운 것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중호군대장 비요로 하여금 임시로 앞 부대를의 총 감독을 대신하게 하고 여러 장수들은 각자 역구를 지키게 하였다. 홀연히 산골짜기 안에서 세작(첩자)을 잡았다고 보고하였다. 조진이 압송해오게 하니 군막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그 사람이 고해 말하기를 “소인은 간세(첩자)가 아니라 곧 기밀을 가지고 도독을 뵈러 오다 잘못 길에 숨어 있던 군대에게 잡혀왔으니 좌우를 물려주시기를 청합니다.”했다. 조진이 이에 그 묶은 것을 풀고 좌우에게 잠시 물어나게 하였다. 그 사람이 고하여 말하기를 “저는 곧 강백약(강유)의 심복으로 본관(강유)이 저에게 밀서를 가져가게 하였습니다.”했다. 조진이 말하기를 “글은 어디에 있는가?”하니 그 사람이 몸에 곡 붙인 옷 안에서 (글을)꺼내 올렸다. 조진이 봉투를 뜯어 그것을 보니 편지에
「罪將姜維百拜,呈書大都督曹麾下:維念世食魏祿,忝守城邊;叨竊厚恩,無門補報。昨日誤遭諸葛亮詭計,陷身於巔崖之中。思念舊國,何日忘之?今幸蜀兵西出,諸葛亮甚不相疑。賴都督親提大兵而來,如遇敵人,可以詐敗。維當在後,以舉火為號,先燒蜀人糧草,卻以大兵翻身掩之,則諸葛亮可擒也。非立功報國,實欲自贖前罪。倘蒙照察,速需來命。」
“죄를 지은 장수 강유가 백번 절하며 대도독 조진 휘하에 글을 올립니다. 대대로 위나라 녹을 먹은 것을 유념하여 성 지키는 것을 고맙게 여겼습니다. 두터운 은혜를 입고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지난날 잘못 제갈공명의 속이는 계책을 만나 몸이 산꼭대기 벼랑 안에 빠졌습니다. 옛 나라를 생각하니 어찌 하루라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다행히 촉의 군대가 서쪽으로 나오고, 제갈공명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도독께서 직접 대군을 데리고 오시다 만약 적을 만나시면 거짓으로 패해야 합니다. 저는 마땅히 뒤에 있다가 불을 드는 것으로서 신호를 삼아 먼저 촉의 식량과 말먹이 풀을 불태울 때 큰 군대로서 몸을 뒤집어 습격하시면 곧 제갈공명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을 세워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아니라 실로 스스로 앞의 죄를 속죄하려 합니다. 만약 비추어 살피시고 속히 명을 내리십시오.”했다.
曹真看畢大喜曰:「此天使吾成功也!」遂重賞來人,便令回報,依期會合。真喚費耀商議曰:「今姜維暗獻密書,令吾如此如此」。耀曰:「諸葛亮多謀,姜維智廣,或者是諸葛所使,恐其中有詐。」真曰:「他原是魏人,不得已而降蜀,又何疑乎?」耀曰:「都督不可輕進,只守定本案。某願引一軍接應姜維,如成功,歸都督;倘有奸計,某自支當。」
조진이 보기를 마치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로 하여금 공을 이루게 하는구나!”하고는 마침내 온 사람에게 많은 상을 주고 곧 돌아 가 보고하여 약속한대로 만나게 하였다. 조진이 비요를 불러 상의해 말하기를 “지금 강유가 몰래 밀서를 바쳐 나로 하여금 이렇게 저렇게 하게 하였다.”했다. 비요가 말하기를 “제갈공명은 꾀가 많고, 강유는 지혜가 넓으니 혹 이것이 제갈공명이 시킨 것으로 그 안에 거짓이 있을까 두려워합니다.”했다. 조진이 말하기를 “그는 원래 위나라 사람으로 부득이 촉에 항복하였는데 또 무엇을 의심하는가?”했다. 비요가 말하기를 “도독께서는 가벼이 진군하지 마시고 다만 본 영채를 지키십시오. 제가 한 군대를 이끌고 강유에게 대응하기를 원합니다. 만일 공을 이룬다면 (공은) 도독에게 돌아갈 것이고, 만일 간사한 계책이 있다면 제가 스스로 감당할 것입니다.”했다.
真大喜,遂令費耀引兵五萬,望斜谷而進。行了兩三程,屯下軍馬,令人哨探。當日申時分,回報「斜谷道中,有蜀兵來也。」耀忙催進兵。蜀兵未及交戰先退,耀令兵追之,蜀兵又來,方欲對陣,蜀兵又退。如此者三次。俄延至次日申時分,魏兵一日一夜不曾敢歇,只恐蜀兵攻擊。方欲屯軍造飯,忽然四面喊聲大震,鼓角齊鳴,蜀兵漫山遍野而來。
조진이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비요로 하여금 군대 오만을 이끌고 사곡을 향해 나아갔다. 행군하여 이 삼정 행군하여 군마를 주둔하게 하고 사람을 시켜 정찰하게 하였다. 그날 신시쯤 (정찰병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사곡도 안에 촉의 군대가 오고 있습니다.”했다. 비요가 황급히 군대의 진군을 재촉하였다. 촉의 군대가 아직 싸움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먼저 물러나니 비요가 군대로 하여금 추격하게 하였다. 촉의 군대가 또 와 막 진을 마주하려하는데 촉의 군대가 또 물러났다. 이 같이 하기를 세 번 하였다. 시간이 흘러 다음날 신시쯤에 이르기까지 위나라 군대는 하루 낮, 하루 밤을 감히 쉬지 못하고 다만 촉의 군대가 공격할 것을 두려워할 뿐이었다. 막 군대를 주둔하고 밥을 지으려 하는데 홀연히 사방에서 함성이 크게 울리고, 북과 뿔피리가 일제히 울리며 촉의 군대가 산과 들에 꽉차게 왔다.
門齊開處,閃出一輛四輪車,孔明端坐其上,令人請魏軍主將答話。耀縱馬而出;遙見孔明,心中暗喜,回顧左右曰:「如蜀兵掩至,便退後走。若見山後火起,卻回身殺去,自有兵相接應。」分付畢,耀馬出呼曰:「前者敗將,今何趕又來!」孔明曰:「汝喚曹真來答話!」耀罵曰:「曹都督乃金枝玉葉,安肯與反賊相見乎!」
(진영)문이 일제히 열리는 곳에서 한 대의 사륜거가 나오는데 제갈공명이 그 위에 단정히 앉아 사람을 시켜 위나라 군대를 주관하는 장수와 대화하기를 청하였다. 비요가 말을 달려 나와 멀리서 제갈공명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돌아가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만약 촉의 군대가 갑자기 공격하면 곧 물러난 후 달아나라. 만약 산 뒤에서 불이 일어나면 몸을 돌려 쇄도해 가라. (내)스스로 군대로 대응함이 있을 것이다.”했다. 분부를 마치고 비요가 말을 타고 나와 외쳐 말하기를 “앞서 패한 장수가 지금 어찌하여 또 쫓아 왔는가!”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네가 조진을 불러오면 대화할 것이다.”했다. 비요가 욕하여 말하기를 “조 도독은 곧 금지옥엽인데 어찌 기꺼이 반적과 서로 만나겠는가!”했다.
孔明大怒,把羽扇一招,左有馬岱,右有張嶷,兩路兵衝出。魏兵便退。行不到三十里,望見蜀兵背後火起,喊聲不絕。兩軍殺出,左有關興,右有張苞。山上矢石如雨,往下射來。魏兵大敗。費耀知是中計,集退軍望山谷中而走,人馬困乏。背後關興引生力軍趕來,魏兵自相踐踏及落澗身死者,不知其數。耀逃命而走,正遇山披口一彪軍,乃是姜維。耀大罵曰:「反賊無信!」維笑曰:「吾欲擒曹真,誤賺汝矣?速下馬受降!」耀躍馬奪路,望山谷中而走。忽見谷中火光沖天,背後追兵又至。耀自刎身死,餘眾盡降。
제갈공명이 크게 노하여 우선을 잡고 한 번 부르니 왼쪽에는 마대가 있고, 오른 쪽에는 장의가 있어 두 길로 군대가 치고 나왔다. 위나라 군대는 곧 물러났다. 행군하여 삼십리에 이르지 않아 멀리 촉의 군대 뒤쪽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이 보이고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두 군대가 쇄도해 나오는데 왼쪽에는 관흥이 있고, 오른쪽에는 장포가 있어 산 위에서 화살과 돌을 비처럼 지나온 곳으로 쏘아 내렸다. 위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비요는 계책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군대를 모아 산골짜기 안으로 물러나 달아나는데 인마가 곤궁하였다. 뒤에서 관흥이 힘을 내는 군대를 이끌고 쫓아오니 위나라 군대가 스스로 서로 밟고 몸이 시내에 떨어져 죽은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비요가 목숨을 걸고 도망하다 산기슭 입구에서 한 떼의 군대를 만나니 곧 이가 강유였다. 비요가 크게 욕하여 말하기를 “반적은 믿을 수 없구나!”하니 강유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조진을 사로잡으려 하였는데 잘못하여 너를 속였구나! 속히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했다. 비요가 말을 뛰게 하여 길을 찾아 산골짜기 안을 향해 달아났다. 홀연히 골짜기 안에서 화광이 하늘에 치솟고, 뒤에서 추격하는 군대가 또 이르렀다. 비요가 스스로 묵을 찔러 죽으니 나머지 무리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孔明連夜驅兵,直至祁山前下寨,收住軍馬,重賞姜維。維曰:其恨不得殺曹真也。孔明亦曰:「可惜大計小用矣。」
제갈공명이 밤을 이어 군대를 몰아 바로 기산 앞에 이르러 영채를 세우고 군마를 거두어 머물게 하고 강유에게 많은 상을 주었다. 강유가 말하기를 “조진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하니 제갈공명이 또 말하기를 “큰 계책을 작은 것에 쓴 것이 애석하다.”했다.
卻說曹真聽知折了費耀,悔之無及,遂與郭淮商議退兵之計。於是孫禮、辛毗星夜具表申奏魏主,言蜀兵又出祁山,曹真損兵折將,勢甚危急。叡大驚,即召司馬懿入內曰:「曹真損兵折將,蜀兵又出祁山,卿有何策,可以退之?」懿曰:「臣已有退諸葛亮之計。不用耀武揚威,蜀兵自然走矣。」正是已見子丹無勝術,全憑仲達有良謀。未知其計如何,且看下文分解。
조진은 비요가 죽었다는 것을 듣고 후회해마지 않더니 마침내 곽회와 군대를 물릴 계책을 상의하였다. 이에 손례, 신비가 밤을 새워 표를 갖추어 위나라 임금에게 아뢰어 촉의 군대가 또 기산을 나왔는데 조진은 군대가 줄고 장수가 죽어 형세가 매우 위급하다고 말하였다. 사마예가 크게 놀라 곧 사마의를 불러 (사마의가)안으로 들어오자 말하기를 “조진의 군대가 줄고, 장수가 죽어 촉의 군대가 또 기산으로 나왔다고 하는데 경은 어떤 계책이 있어 물리칠 수 있는가?”했다. 사마의가 말하기를 “신에게 이미 제갈공명을 물리칠 계책이 있습니다. 빛나는 무와 위엄을 쓰지 않고도 촉이 군대는 스스로 달아날 것입니다.”했으니 바로 이러하다. 이미 자단(조진)에게 이길 방법이 없는 것을 보고, 중달의 좋은 계책에 기댄다. 그 계책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겠다. 또 아래글에서 나누어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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